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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⑨ 땅 이야기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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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에선 “의영아, 의영아!”로 불러… 해방되고는 ‘이어녕’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가 처음 나왔을 때 ‘이어영’
⊙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 교육부에선 ‘이어령’
⊙ 최초의 신소설 《血의 淚》,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비극, 한자 세대의 비극
⊙ 한국인에게 묻고, 세계인에게 묻는 말 “너, 어디까지 왔니?”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故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2001년 9월 7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건강이 썩 좋지 않아 외부 강연을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 서울 평창동 서재에서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배려하여 집으로 와준 것이었지요.
 
  그러나 본래 서재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곳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왕궁의 주인인 임금님이라 할지라도 그 왕궁의 주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주방에 들어가면 몇 사람이 죽어나가게 돼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해도 임금님이 보면 “야! 니들이 이걸 나한테 먹였구나, 어! 저기 바퀴벌레도 있구나” 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방은 그 성의 주인인 임금은 물론 외부인에게도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됩니다. 그 성에서 열리는 파티가 아무리 화려하고 성대해도 그 파티가 열리는 동안 주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음식을 막 엎지르고, 쓰레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겠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방이 바로 서재인 셈입니다. 읽다가 엎어둔 책들, 글 쓰면서 마신 차 찌꺼기가 엉겨 붙은 찻잔, 구겨진 원고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였던 자리의 흔적들. 게다가 남들은 ‘야, 이 양반 참, 뭐 이런 걸 갖다 놨어. 초등학교 애들 방도 아니고’라고 생각할 만한 나에게만 소중하고 영감을 주는 물건들도 여기저기 있어요.
 
  남한테 보이려고 꾸민 공간이 아니니까 그냥 별의별 게 다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있어요. 그래서 여간해서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장소이지요. 그럼에도 서재까지 여러분에게 열어놓은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 60년 넘게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이야기
 
이어령 선생의 서울 평창동 서재에 자리한 《플라톤 전집》. 선생은 생전에 “《플라톤 전집》을 읽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았습니다. 일제 시대를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또 23~24세, 대학 4학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평생을 글을 썼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이 없을지 몰라요, 주변에. 실력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 재수 좋은 사람이 많지가 않거든요.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을 어디서 구해 오겠어요. 전 세계에 없어요. 서양에서는 괴테 하나가 23세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83세까지도 현역으로 글을 썼죠.
 
  그러니까 내가 잘나거나 지식이 특별히 많아 강연하고 글 쓴 게 아니라, 단지 해방 이후 70여 년간 다양한 시대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글로 꾸준히 옮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제가 어렸을 때 누님과 나물 캐러 다닌 게 ‘채집 시대’를 경험한 것 아니겠어요? 오래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면서 산업 사회에서 ‘정보화와 디지로그’에 관한 글을 쓰고, 후기 정보 사회인 요즘에는 ‘빅데이터’에 관한 글을 썼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한 생애 속에서 누님 쫓아 나물 캐던 채집 시대를 거친 소년이 후기 정보 사회의 빅데이터 강연을 하는 사람은 전 지구상에 나 하나뿐인 거예요.
 
 
  # 채집 시대 때 사랑받는 이는 누구?
 
“쑥과 같은 나물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나물 캐기는 채집이에요.” 전남 구례 오일장의 봄나물이다. 사진=조선DB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나물 캐러 다녔어요. 쑥과 같은 나물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이지 인간이 재배한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나물 캐기는 채집이에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서 못 찾아 먹는 것일 뿐, 우리는 나물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콩나물 같은 것은 인간이 재배하기도 하지만 나물의 기본은 산채(山菜), 즉 인간이 가꾼 것이 아니라 산에서 그저 자라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이걸 아직도 몰라요.
 
  서양 사람들이 김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서양 사람들은 김을 먹지 않아요. 요즘은 김도 양식 재배를 하지만 본래 김은 인간이 씨를 뿌려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자연에서 그저 발생한 것을 우리가 뜯어 먹는 것이었거든요. 동양인만 김을 먹어요. 채집 문화, 나물 문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거죠. 샐러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야채 요리는 모두 재배된 식물로 만들어져요. 허브와 같은 향신료조차 그들은 정원의 한쪽에서 따로 재배하죠. 그러나 한국을 보세요. 쑥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해서 판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날의 시골 장터에 나가 보면 밭둑이나 산에서 직접 채취해온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시장에 좌판을 펴고 앉아 있고, 우리는 그 나물을 사다가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먹어요. 서양의 샐러드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의 생활 속에 채집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채집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중 어느 쪽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아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부지런한 사람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농경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이 자기 논과 밭을 열심히 경작해서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었지만 채집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농경은 작물을 기르는 일이 주가 되지만, 채집 시대에 인간은 작물을 수확만 할 뿐 기르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어요. 기르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죠. 그러니까 뒷동산에 주어진 사슴은 몇 마리밖에 없어요.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이미 주어진 것이죠.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남들이 놀 때 그 사슴을 전부 잡아먹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사람은 굶을 수밖에요.
 
 
  채집 시대의 勝者 꼬부랑 할머니
 
  부지런한 것은 우리가 직접 생산에 참여할 때나 그러라는 이야기예요. 고사리든 뭐든, 하느님이 주신 것은 똑같으니 그것을 다 함께 나누어 따 먹어야 하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서 새벽까지 막 따서 자기가 먹고 남은 것을 저축하면, 저축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죠. 그러니까 옛날 채집 시절에는 게으르고 저축하지 않는 사람이 그 공동체에게 굉장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예요. “너 착한 애야”라는 칭찬도 받고요. 그래서 요즘은 노름해서 지면 그 사람에게 돈을 빼앗지만, 옛날에는 일을 아예 못 하도록 도구를 빼앗았어요. 그 사람이 일을 못 해야 그만큼의 배분이 나에게 돌아오니까요.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이것은 마셜 살린스(Mashall Sahlins·1930~2021년)의 《석기시대 경제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람이 혼자 벌어서 몇 사람이나 먹여 살렸을 것 같아요? 대개 두 사람, 세 사람 정도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것을 직접 다 채집해 왔어요.
 
  그러면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채집 시대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자가 누구였을까요?
 
  아프리카의 수렵 채집민 하드자족 예를 든다면 가장 많은 식량을 구한 이는 놀랍게도 노파들이었다고 하죠. 그것도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들….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1946~)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어디서 음식을 구해서 먹이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있으면 아이들은 풍족한 영양을 공급받아 잘 자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가 바로 내가 비유로 늘상 이야기하던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할게요.
 
  할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내지 희생,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채집 시대 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따져보면 남성은 식량을 구하러 장거리 여행을 떠나거나 사냥 혹은 싸움으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어요. 여성 입장에선 먹고사는 문제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이유였죠.
 
  그러니 때로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온 기근이나 추위, 풍수해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보릿고개 같은 불가피한 식량난까지 대비해야 했어요. 이럴 때 가족 내지 집단 내에 모계 친척 여성, 즉 어머니, 외할머니, 이모할머니의 존재는 아이들의 성장과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예상할 수 있어요.
 
  한편, 채집민들은 사냥감을 집단 전체와 나눠 가졌다고 해요. 그러나 남성의 채집(사냥)만으론 집단이 필요로 하는 칼로리의 절반도 채울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메웠을까요? 여성, 무엇보다 할머니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요. 또 일부 남성은 일부일처(一夫一妻)에 만족하지 않았을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 역시 부성(父性)의 지원이 불확실한 남성과도 짝을 맺었던 거지요. 결국 여성 스스로 남성의 빈 자리를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 했는데 ‘대행 부모’ 내지 ‘돌봄 공유’의 형태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할머니이고 장수하는 할머니는 ‘인류의 에이스 카드’였지요.
 
  세라 허디의 이런 시각은 내가 이야기하는 ‘꼬부랑 할머니’와 일맥상통합니다. 남자들이 채집이나 사냥을 해오면 누가 요리해요? 여자는 애 낳고 키우면서 자연히 집에 있게 되잖아요. 불을 다루는, 부지깽이를 든 여자가 바로 인류 최초의 요리사, 즉 꼬부랑 할머니죠.
 
  헤겔은 ‘최초의 전사(戰士)’, 즉 남성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닙니다.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전사 혹은 싸움꾼이 아니고 부지깽이를 든 여성,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다른 영장류와는 구별되는 이런 인간의 ‘협동 육아’가 진화사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고, 세라 허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행위, 공감하고 협력하는 태도, 나눔과 같은 ‘상호 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하게 되었지요.
 
  이런 관계 속에서 점점 현실의 어려움이나 닥쳐올 고난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인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일까’를 질문할 수 있게 되었지요.
 
 
  # ‘어디까지 왔어?’라는 말의 뜻
 
  자, 우리가 그 수렵채집의 시대로부터 지금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해보세요.
 
  전화가 와도 옛날 같으면 “누구십니까” 했을 것을 요즘은 전화에 발신인이 누구인지 다 뜨니 그런 것을 묻지 않죠. 그 대신 기다리는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가 약속시각이 지났는데도 사람은 오지 않고 전화만 올 때, 첫마디가 이래요.
 
  “너, 어디야 거기?”
 
  그다음으로 하는 말은 “어디까지 왔어?”죠. 요즘은 모바일 시대라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잖아요.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가 길바닥에서 막 울먹울먹하면서 휴대전화를 걸 때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아마 이렇게 말을 할 거예요.
 
  “엄마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다른 애들은 하교 시간에 다들 엄마가 와서 데리고 가는데 내 보호자만이 오지 않을 때 하는 말이죠. 또 있어요. 어머니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 지금이 몇 시야? 어디까지 왔어?”
 
  어머니는 딸이 오는 시각에 맞추어 골목길로 마중을 나가줘야 하니까요.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그래요. 요즘 아들들이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듣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전화를 걸어서 “야, 너 어디까지 왔어?” 한 뒤에 바로, “뭐? 떠나지도 않았어?”라고 말을 합니다. 아들은 아예 떠나지도 않은 것이죠.
 
  이런 건 또 할아버지들이 하는 것도 있어요. 명절이나 제삿날인데 서울에 있는 자식만 안 왔어요. 세상 풍파를 다 겪어본 할아버지는 딱 점잖게 어린애처럼 보채는 일도 없이 신경질도 안 내고 느긋하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씀하시죠.
 
  “누구야, 다들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할아버지들의 맥없는 그 말은 참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도 해요. 다른 자식들은 다 왔는데 서울 애만 안 오는 거예요. 지금 제사도 다 지내고 명절이면 차례도 다 지냈는데 그 애만 늦는 거죠.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늦어요. 우리가 약속시각보다 늦게 왔을 때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이 “길이 막혔다”는 말이에요. 도로가 막히지 않아도 “거의 다 왔는데 길이 막혀요”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전화할 때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해요. 거북한 전화가 왔을 때는 잘 들리면서도 이렇게 말하잖아요.
 
  “전화 상태가 나빠서 잘 안 들려. 내가 나중에 걸게.”
 
 
  #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국과 세계는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까지 왔고 어디에 있는지, 이것을 내가 때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 입장에서, 때로는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 입장에서,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 입장에서 한국인에게 묻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니? 거기 어디야?”
 
  또 아시아인에게 같은 질문을 해요.
 
  사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어요. 과거엔 우리가 유럽을 위시한 서양 사람을 죽어라 쫓아갔지만, 이제는 거꾸로 서양 사람이 동양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아시아 사람들은 지금 갈등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사람은 어디까지 왔냐?’를 묻는 거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만들고, 미국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있는데 아시아인은 뭘 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왔어요?
 
  앞으로 세계 경제에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의 역할과 비중이 더 커지리라 기대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는 11월 18~19일 태국 방콕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리고, 이보다 앞선 15~16일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을 것이 있어요. 코로나19 이전의 메르스 사태 때 뭘 느꼈어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을 줄 알았던 그 중동의 낙타, 내가 한 번 보지도 못했던 그 낙타 때문에 우리가 온통 난리를 겪었잖아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금도 그 난리를 치고 있어요. 원인은 박쥐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이의 재조합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세상에 박쥐가 다 뭐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무관한 사람은 없어요. 글로벌이니 로컬이니 이런 이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에요. 우리 밥상을 보세요. 우리 시골에서 키운 게 별로 없어요. 표고버섯과 밤은 일본산, 손질한 고등어는 네덜란드산, 소고기는 호주산, 돼지고기는 멕시코산, 닭고기는 캐나다산, 전지분유는 뉴질랜드산을 자주 먹으니 우리 밥상만 하더라도 이미 글로벌한 것이죠.
 
  그러니 마지막에는 세계인들에게 물어야 해요. 우리만 행복해도 안 돼요. 아프리카에서 병이 나고, 또 지구 어딘가에서 지진이 나는 속에 우리 혼자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또 전 세계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까지 왔니?”라고.
 
  한국인에게 묻고, 아시아인에게 묻고, 세계 사람에게 묻는데 그중 제일 급한 것은 한국인에게 묻는 것이고,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어디서 불났다”고 할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자기 동네에서 불났다”고 그러면 다들 문을 열어보고, “이웃집에서 불이 났다”고 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거나 도망을 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민족, 애국 이런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디 왔느냐를 알면 한국이 어디에 왔는지를 알고 아시아가, 세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 나의 책을 읽는 목적이고, 또 내가 여러분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하는 목적입니다.
 
  이야기의 전체 주제를 알아야 해요. 초상집에 갈 때 누구 초상인지는 알고 가야지, 실컷 울고 나서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대?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의 시작이 어딘지를 알아야 합니다.
 
 
  # 환경·시대에 따라 ‘이어영’ ‘이어녕’ ‘이어령’으로 불린 이야기
 
이어령 선생이 1962년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오른쪽은 문학사상사가 발행한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1962년에 처음 나왔어요. 그때는 저자의 사진을 책에 넣어주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 책의 저자 보관본 사진 속지에 내가 내 이름을 써넣었는데 ‘이어영’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언젠가부터 ‘이어령’이라고 사인을 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얼굴색이 변한 것처럼 이름도 바뀐 겁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나는 ‘의영’이라고 불렸어요. 서울 경기도에서는 ‘어’자의 발음을 ‘의’라고 했거든요. ‘암행어사’라고 하지 않고 ‘암행의사’라고 하는 식이죠. 그러니까 원래 ‘령(寧)’자는 단어의 제일 앞에 나오면 ‘영’으로 발음하고 중간에 나오면 ‘령’으로 읽어야 하는데, ‘어(御)’자를 ‘의’라고 발음해버리니까 히아투스(Hiatus·모음충돌)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령’자가 처음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영’으로 발음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집안에서는 다들 “의영아, 의영아!” 그렇게 불렀어요.
 
  학교에 들어가서는 다들 표준말을 쓰니까 지금이라면 의당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때는 일제 시대라 창씨개명 때문에 아무도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요. 6학년 때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이름을 찾았는데 그때는 ‘어녕’이라고 했어요. 그러다 또 중학교에 갔더니 그때는 한글맞춤법도 없었을 땐데, 국어 선생님이 “‘어녕’이가 뭐냐, ‘어영’이다, 너는” 하셨어요. 그래서 내 이름의 영문 표기는 ‘O Young’이에요. 인터넷에서 나를 영어로 검색할 때도 그렇고, 내 책 영문 번역본의 저자 이름도 모두 ‘by Lee O Young’로 되어 있어요.
 
  오래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에서 우리 외교 문화인사를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내가 거의 최초의 한국문화론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저자이고 대학교수니까 나를 초청했었죠. 대학 졸업 직후에 교수를 했으니 교수치고는 무척 젊었던 나를 보고 영국 문정관이 자기도 모르게 “Oh, Young!”, 그러니까 ‘너 참 젊다!’며 감탄을 해요. 그러더니 자기가 나를 초청하려면 내 이름의 로머나이즈(romanize)를 써야 한다며 묻기에, “너 지금 나에게 ‘Oh, Young’ 그랬잖아, 그렇게 쓰면 돼. ‘Young’이라고”라고 대답한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 영문명은 ‘오영, 어영’이죠.
 
  그 뒤 내 글이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어 편수관들이 모였어요. 그때는 남의 이름이라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에서 지정한 표기법으로 통일하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 국가 지정 표기법으로는 지명은 속음으로 읽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충남 보령(保寧)이라고 하지 ‘보영’ 또는 ‘보녕’이라고 읽거나 표기하지 않잖아요. ‘보령, 회령, 비령’ 하는 식으로 지리책에서 ‘寧’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령’으로 표기하니까 사람 이름에도 ‘寧’자가 있으면 ‘령’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는 거죠. 그래서 교과서에는 내 이름이 ‘이어령’으로 표기되었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
 
현암사가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실린 이어령의 사진과 사인. 사인이 ‘이어영’으로 적혀 있다.
  당시 내가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이고, 월급봉투나 기타 문서에도 ‘이어녕’인데 교육부에 가면 ‘이어령’이 되어 교과서에는 전부 ‘이어령’으로 실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술 먹다 말고 한밤중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는 겁니다.
 
  “선생님! 지금 싸움이 붙었는데,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그때마다 나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사람들은 “아니, 내기가 걸렸는데 아무렇게나 하면 돼요?”라고 불평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대답해서 서로 다 이긴 걸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면 누군가는 잃을 수가 있는데 그건 내 책임이잖아요. 한때는 책에 저자 사인을 ‘이어영’이라고 했는데, 왜 그때 ‘이어영’이라고 사인해놓고는 지금은 ‘이어령’이라고 하느냐고 따지면 나는 할 말이 없거든요.
 
  교육부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 ‘이어령’, 집안에서 불러준 ‘이의영’, 중학교 때 ‘이어영’, 그리고 대학에서는 ‘이어녕’! 이렇게 내가 내 이름을 어려서부터 쓰고, 20대부터 글을 쓰고 책을 내기 시작해서 거의 60~70년을 이 성(姓)과 이름을 가지고 책을 내고 저자 사인을 해주었는데도 내가 내 이름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예요.
 
  게다가 남들은 나한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디까지 왔니’처럼 광복 후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일제 시대 강제로 창씨개명한 것을 제외하고라도 ‘李御寧’이라는 이름이 이처럼 다양하게 변한 거예요. 남들이 그렇게 불러준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양하게 변환하며 써왔어요. 1962년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초판 저자 보관본에는 이렇게도 선명하게 나의 글씨로 써놓은 나의 이름 ‘이어영’이 있으니까요.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뜻은…
 
  내 이름에도 이러한 비화가 있지만, 나의 첫 번째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역시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두고 시적(詩的)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사실 이 책이 첫 출간될 당시에는 한자어로 된 제목이 일반적이었거든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한자어 제목으로 바꾸면 ‘풍토(風土)’가 돼요. 정신풍토, 지리풍토 이런 말로도 많이 쓰이고, 영어로 하면 Climate. 기후, 풍토. 희랍어로는 ‘기울다’는 뜻이죠. ‘경사져 있다’는 말이에요. 흔하게 쓰고 듣던 말이지만 ‘풍토’라는 말을 하면 가슴에 찡하게 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한자를 말했기 때문이지요. 풍토의 풍(風)은 바람 풍자예요. 토(土)는 흙이라는 뜻이죠. 저는 이 풍토라는 말을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운 말로 바꾸면서 바람이 뒤에 오고 흙이 먼저 오도록 순서만 뒤집었어요. 그리고 흙, 바람이라는 말에 ‘속에’라는 말을 붙였어요. 또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데 ‘저’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어 ‘저 바람 속에’라고 손가락질하듯이 하니까 바람이 보여요.
 
  그러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건 ‘풍토’라는 말인데, 한자로 風土라고 할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추상어였다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세 살 때 배운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순간 ‘아! 풍토라는 말이 바람과 흙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죠. 흙과 바람. 우리 몸, 육체는 흙이에요. 마음, 또는 정신(Spirit)이라는 것은 바람이에요.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수시로 변해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변하는 ‘나(마음)’와 변하지 않는 ‘나(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나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그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인 거예요. 《풍토》가 아니라. 사실 이 제목 덕분에 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 한국 근대에 담긴 비극적 현실
 
1906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 사진은 2016년 한 출판사가 펴낸 《혈의 누》.
  한국 근대문학이 막 부화하던 시절 책 제목을 어떻게 붙였는지 볼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李人稙·1862~1916년)의 《혈(血)의 누(淚)》를 들어보셨지요? ‘피의 눈물’이라고 하면 간단할 것을 신소설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제목은 굳이 한자를 써서 ‘혈의 누’라고 붙였어요. 소설가들이 모두 한자에 절어 ‘피의 눈물’이라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소설가는 제 나라말, 그것도 세 살 때 배운 말로 소설을 써야 하는데, 엄청난 한자문화 때문에 한자 세대는 한자가 우리나라 말보다도 더 익숙했어요. 그러니까 《혈의 누》 같은 제목을 쓰게 되는 거죠. 한글 세대인 요즘 사람들은 《혈의 누》라는 제목을 보면 ‘남원 광한루’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나” 그러지 “내 눈에서 혈의 누가 난다”라고 하면 무슨 실감이 나나요? 아버지가 막 화를 내면서 “너 그 짓하면서 내 눈에서 피눈물 나는 걸 봐야 되겠냐!”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찡한데, “내 ‘혈의 누’ 나는 걸 봐야 되겠냐!” 하면 아무 감동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풍토》, 그러면 독자들이 감동하지 않는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면 감동하는 거예요. 게다가 그냥 바람도 아니고 ‘저 바람’이라 하고 거기다 ‘속’이라는 글자가 두 개 나오니 운율이 붙는 거예요. 또 이게 완결된 문장이 아니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그러니까 종이 울리다 만 것처럼 여운이 있잖아요. 흙 속에 뭐가 있는지, 바람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제목 하나만으로 상상하는 거예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대한민국 제1호 잡지 《소년》 창간호. 독자 6명으로 시작한 14전짜리 《소년》은 1908년 11월 최남선이 발행했다.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 창간호의 권두시로 발표되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신체시(新體詩)의 효시’라고 하는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 선생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를 최남선 선생이 썼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海에게서 少年에게’예요. 바다 해(海)자를 썼어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펜클럽대회를 한국에서 열었을 때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소개한 일이 있어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왔지요. 스크린 전면에 이 시의 영문 제목이 떴는데 눈이 아득해지더라고요. ‘From the sun, To the boys’라고요. 화들짝 놀랄 수밖에요. 번역자가 한글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바다 해(海)를 하늘에 떠 있는 해(日)로 생각을 하고 영문으로 옮긴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신체시의 비극이에요. 신체시라고 했으니 ‘바다에서 소년에게’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海에게서 소년에게’라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바다를 해(海)라고 하고, 사람을 인(人)이라고 하는 게 더 알기 쉬웠던 거죠. 한자 세대니까.
 
  병원 중에 이비인후과라는 게 있잖아요. 이비인후과의 ‘이(耳)’는 귀를 뜻하는 한자예요. 그러나 우리말의 ‘이’는 치아를 의미하죠. 그래서 누가 “너 이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면 되묻게 되는 거죠. 두 손으로 각각 귀와 치아를 가리키며 “귀요? 치아요?”라고.
 
  그러니까 신소설, 신체시를 쓰던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굉장히 위대한 분이지만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한자 세대가 아닌 한글 세대라서 그분들의 위대성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죠.
 
 
  #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
 
국립국어원은 이어령 문화부 장관 시절인 1991년 1월 23일 개청했다. 이어령 장관, 안병희 초대 국어연구원장 등이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별관에 마련한 새 청사에서 현판식을 갖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한글 세대, 즉 우리말 세대는 광복 이후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아요. 한글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여러분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지만, 한국 사람이 세 살 때 배운 어머니 말로 통하는 세상이 왔으니 우리는 옛날 사람보다 행복한 시대에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 쓴다고, 이비인후과의 이(耳)라고 하지 않고 귀라고 한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행복이 먼 데 있는 게 아니에요. 비교해보면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지 못하고 ‘해(海)’라고 쓰면 ‘해(日)’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도 그렇게 썼다고 하니, 또 그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인 신체시라고 부르니, 우리 근대라는 것이 오죽했겠어요.
 
  한글 세대 이전에 한자 세대가 있었어요. 나는 서당 가서 천자문을 배웠으니 한자 세대에 약간은 걸쳐 있는 사람이에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그때 초등학교에 다녔으니 일어 세대는 말할 것도 없죠. 이름까지도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나는 ‘혈의 누’와 같은 형식의 제목인 ‘풍토’라고 하지 않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고 했어요. 풍토라는 한자어를 순수한 어머니의 말로 한 거죠. 이 책이 외국에서도 《Climate》가 아니라 《In This Earth, In That Wind》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어요. 풍토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흙과 바람이라는 의식이죠. 이것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내 사상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이 배어 있는 것이 세계로 알려졌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천자문을 읽었고 그다음에 일본어를 썼어요. 학교에 가서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이전에 일본어를 철저히 배워야 했죠. 그곳은 한국어를 쓰면 벌을 서던 세계였어요. 6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된 사람이 지금은 언어를 다루는 문필가가 되었어요. 한글 세대가 된 거죠.
 
  한때는 사람들이 내가 우리말로 감동을 준다고 해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렀는데 내가 붙인 말이 아니에요. 실은 별명이 몇 개 있는데 ‘창조의 아이콘’ ‘창조적 지성’, 그리고 뭐… ‘한국대표 지성’.
 
 
  내가 제일 바라는 말은…
 
  솔직히 하나도 안 맞는 이야기지만 남들이 붙여준 겁니다. 그러니 별명이지요. 난 그런 별명이 싫어요. 대신 “부르려면 크리에이터(Creator)로 불러다오” 하지요. 창조인, 생각하는 사람(Thinking Man)이라고 부르는 게 내가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다른 나라들이 200년 걸려도 하지 못한 산업문명의 모든 것을 우리는, 한국은 불과 몇십 년 안에 다 치러야 했습니다. 범람하는 산업화의 물결, 급변하는 문명의 충돌 그 사이사이, 고비고비마다 굵직한 모토를 던져왔지요. 20대에는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 30대에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대표되는 한국문화론, 40대에는 일본문화론인 ‘축소 지향의 일본인’, 50대에는 88서울올림픽 슬로건 ‘벽을 넘어서’, 60대에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70대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 80대에는 ‘생명이 자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물 한 방울’이라는 키워드를 던졌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어떤 문필가와 교수가 만년 동안 살아야 체험할 수 있는 인류 문명의 전 과정을 80여 년 한평생 동안 모두 체험하고 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
 
[편집자 註]
  1962년 현암사에서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다. 이후 동화출판공사, 범서출판사, 갑인출판사, 삼성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 책을 찍었다.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컬럼비아대에서 동양학 연구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어령 하면 수많은 저작물 중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이 책의 서문은 너무나 아름답고 슬프다. 아무리 읽어도 감동이 식지 않는다.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길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 흙과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롱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차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집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정적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거기에는 백로의 날갯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고, 시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늘진 골짜기와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허의 고요에 가까운 것이다. 향수만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도 또 설명될 수도 없는 정적함이다.
 
  아름답기보다는 어떤 고통이, 나태한 슬픔이, 졸린 정체(停滯)가 크나큰 상처처럼 열려져 있다. 그 상처와 공도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 그렇게 펼쳐져 있는 여린 색채의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위확장(胃擴張)에 걸린 아이들의 불룩한 그 배를 보지 않고서는, 광대뼈가 나온 시골 여인네들의 땀내를 맡아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무심히 지껄이는 말솜씨를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집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가축처럼 둔한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 갔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리고 그 위급한 경황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앙상한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벗겨진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운전사가 어이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 같은 몸짓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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