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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8〉

禮訟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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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9년 효종 승하 후 모후(계모) 자의대비 조씨의 服喪 문제로 제1차 예송 발발
⊙ 1674년 현종의 모친 인선왕후 장씨의 服喪 문제로 제2차 예송
⊙ 臣權 옹호파인 西人은 仁祖의 次子인 孝宗을 庶子로, 王權 옹호파인 南人은 嫡子로 간주
⊙ “예부터 지금까지 중대한 大統을 이어받아 宗社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嫡長子·嫡長孫이 되지 못한 경우가 과연 있었습니까?”(대구 유생 도신징의 상소)
⊙ 현종, “기해년에는 國制를 사용하고 오늘날에는 옛날의 禮를 쓰자는 말인데 왜 앞뒤가 다른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송시열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4일 효종(孝宗)이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외아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런데 이틀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효종의 관(棺)을 준비하면서 짧게 만드는 바람에 판자를 구해 덧대어야 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책임자는 송시열(宋時烈)이었다. 과연 이 일은 송시열의 실수인가 아니면 의도적 행위인가? 훗날 남인(南人)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날의 일에 대해 분명히 책임 소재를 따지고 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재궁(梓宮·관) 제도는 국초부터 정해진 것으로 300년 동안 준용해왔으나 폐단이 없었는데, 지금 척수가 부족하여 판자를 이어서 쓰고 있으니, 이게 어찌 무더운 여름철에 베 끈을 매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길이까지 부족하였으니, 이는 더욱 이치 밖의 일로서 소렴을 잘못했다는 것을 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시열이 예(禮)를 안다고 자처하면서 군부(君父)의 상(喪)에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부판으로 된 재궁을 써가면서까지 자기 실정이 탄로 날까 봐 염(殮)을 다시 할 것을 청하지 않아, 마지막 보내는 대례에 막대한 이변이 있게 하였으니, 시열의 죄야말로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태화는 원상(院相)으로 있으면서 끈을 매지 않은 것을 보고서도 강력히 다투지 않았고, 척수가 부족함을 보고도 염을 다시 할 것을 청하지 않은 채 앞장서서 부판을 쓰자는 논의를 꺼내 시열의 뜻만을 순종하였으니, 그의 마음에는 선왕(先王)은 저버릴 수 있어도 시열은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었겠는가! 비열한 인간이 행여 지위를 잃을세라 걱정하는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그의 죄를 논하기로 들면 시열보다 덜할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황각(黃閣·의정부)에다 30년씩이나 두고 그의 말대로만 따랐으니, 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정권 교체 후 다시 쓴 역사
 
  그러나 숙종 6년(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西人)이 남인(南人)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 수정에 들어가 3년 후인 1683년 《현종개수실록》을 완성한다. 같은 날 일에 대해 《개수실록》은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옥체의 풍위가 보통에 비해 큰 데 대해 재궁은 비록 즉위 초부터 비치하였으나 유래의 척도를 따랐을 뿐이었다. 상사를 당해 널을 다루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길이와 넓이가 부족한 것을 알았다. 다른 재목을 찾아 얻지 못함으로써 부판을 쓰게 된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모함하는 자들은 교포를 묶지 않고 염습 고치기를 청하지 않은 것으로 송시열에게 죄를 돌렸다. 또 태화가 맨 처음 부판을 쓸 것을 발론한 것으로 시열의 뜻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서술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 당쟁(黨爭)이다. 그 후 곧바로 시작된 예송(禮訟)에서 보여준 송시열의 태도를 감안할 때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 도발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禮學의 정치도구화
 
허목
  효종이 승하하자 곧바로 효종의 모후(계모)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服喪) 기간을 3년으로 할 것인가 1년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서 서인과 남인 간에 당론이 갈렸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시작된 것이다.
 
  복제(服制) 문제가 복잡하게 진행된 이유는 효종이 집안의 사적(私的)인 관계로 보면 대비의 둘째 아들인 셈이고, 왕위 계승이라는 면에서 보면 적자(嫡子)가 되므로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 복을 입는 기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주자가례》를 따르고, 왕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는데, 《오례의》에 바로 이러한 사례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왕실의 경우 《오례의》를 준용하면 그만인 사안이기도 했다.
 
  다만 현실적으로 자의대비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상으로 이미 삼년상 상복을 입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송시열이 이끌던 서인은 《주자가례》를 따를 것을 주창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아들을 위해 상복을 입는 경우, 장자(長子)가 죽었을 때는 삼년상이고 둘째 이하의 아들일 경우에는 기년상(朞年喪)이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은 “효종이 자의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인데다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여도 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허목(許穆)이 이끄는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대우하여 삼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예송은 서인들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으로 일단락되었고, 윤선도는 유배를 떠나야 했다.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제 문제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권력투쟁이었다. 서인은 왕실 무력화(無力化)를 본격적으로 시도했고 남인은 반(反)왕당파 서인 세력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이 당시에는 현종이 아직 권력이 튼튼하지 못한데다가 송시열·송준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실을 모독하는 이론에 가까운 송시열의 손을 들어주어야 했다. 현종 말기 그가 2차 예송 때 서인을 폐출(廢黜)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1차 예송에서 서인의 손을 들어준 것은 다소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할 것이다.
 
 
  2차 禮訟 발발
 
  1차 예송으로 조정 신하들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려 예절 문제로 끝없는 논란을 벌이자 현종은 “만일 다시 복제를 가지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을 쓰리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그런데 현종 15년(1674년) 2월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모친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때까지 1차 예송 복제의 당사자인 인조의 계비 자의왕대비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1차 예송 때는 아들 사망에 따른 복제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며느리 사망에 따른 복제 문제였다.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동일했기 때문에 이미 예송의 재촉발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차 때만 해도 현종이 어렸지만 그사이에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현종도 이제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을 때였다.
 
  예조판서 조형과 참판 김익경 등은 당초 사흘 후인 2월 26일 자의왕대비 상복과 관련해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이것은 곧 대비를 인조의 큰 며느리로 본다는 뜻이고 이는 곧 효종도 장자로 본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15년 전에 있었던 1차 예송에서는 효종은 사실상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로 간주되어 자의왕대비는 당시 삼년복(참최복)이 아닌 일년복(기년복)을 입은 바 있었다.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의 예론(禮論)에 따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예조의 의견은 송시열의 예론을 뒤집은 것이었다.
 
 
  하루 만에 입장 번복한 예조
 
  문제는 바로 다음 날 터진다. 예조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스스로 번복하는 입장을 아뢴 것이다.
 
  “신들이 어제 복제(服制)의 절목 가운데 왕대비께서 입을 복제에 대해 기년복으로 헤아려 정해 재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례복도(家禮服圖)》 및 명나라 제도에 며느리의 복은 기년복과 대공복(大功服·9개월)의 구분이 있었으며, 기해년 국상 때에도 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번 복제는 대공복이라는 게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다급한 사이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이처럼 경솔히 하다 어긋나게 한 잘못이 있었으니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현종은 일단 “알았다”고 짧게 답한다. 그러나 이미 속으로는 10년 이상 참아왔던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분위기는 이날 기사에 대한 사관의 평을 통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기해년의 복제를 처음 정할 때 송시열이 의논을 수렴하면서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핑계 대었는데, 그 뜻은 사실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 중에서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後嗣)를 삼았을 경우에 해당하는 설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애초에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의논을 정해 올리자, 당시 선비의 이름으로 행세하며 송시열에게 편당 지은 자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미워해 옥당(玉堂)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위협하니 예조판서 조형(趙珩·1606~1679년) 등이 여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서 기년복을 다시 대공복으로 고쳐서 올렸다.〉
 
  《현종실록》 편찬을 주로 남인이 맡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관의 이 지적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론’이란 공론이 아니라 송시열당의 당론, 혹은 송시열의 의견이었다.
 
  침착한 성품의 현종은 일단 기년복이냐 대공복이냐를 떠나 대비의 장례 절차에 차질을 빚었다는 이유로 예조판서 조형, 참판 김익경, 참의 홍주국, 정랑 임의도 등을 잡아다가 심문할 것을 명했다. 본질적인 문제는 일단 남겨두고 우회하려는 뜻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는 조형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가 남인이라면 의도적인 도발을 한 것이고 서인이라면 (서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인이라면 실은 많은 서인이 송시열이 세운 당론과 달리 무의식 중에 현종을 장자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조형의 인물됨과 당파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조판서 조형
 
김장생
  경력부터 보자. 조형은 승지를 지낸 조희보(趙希輔)의 아들로 인조 8년(1630년) 문과에 급제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됐으며, 인조의 환도 후 병조좌랑에 올랐다. 이후 이조좌랑, 승지, 충청감사, 대사간, 도승지 등을 두루 거쳤으며, 이어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1665년 의금부 지사, 우참찬을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 좌참찬, 예조판서, 의금부 판사 등을 거쳐 이때 예조판서로 있다가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 이미 이때 그의 나이 7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당파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고 굳이 말하자면 대세에 따라 서인의 입장을 따르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쟁의 시대였다. 어느 한쪽에 온몸을 던지지 않는 인물이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이는 그가 숙종 5년 6월 18일 세상을 떠났을 때 서인 쪽에서 쓴 《숙종실록》에 실린 졸기(卒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전 판서 조형(趙珩)이 졸(卒)하였다. 조형이 조금 간약(簡約)하다는 평이 있었으나, 사람됨이 느슨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요직에 등용되지 못한 데다 또 사당(邪黨·남인)들이 그가 일찍이 예론(禮論)에 가담하였다 하여 여러 해 동안 폐치했는데,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74세였다. 뒤에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즉 자신들의 편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왕대비의 복제를 처음에 기년제로 올리는 등의 ‘잘못’을 저질렀다 하여 “사람됨이 느슨하고 무능하다”고 통박하고 훗날 양주로 유배를 가게 된 것 또한 깎아내리고 있다. 조형은 서인과 남인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적극적 당파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입장을 바꿔 대공복설을 올렸다 하여 훗날 조형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는 참판 김익경은 철저한 서인으로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특히 그는 김장생의 셋째 아들 김반의 여섯째 아들로 세자(훗날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아버지 김익겸의 막냇동생이다. 숙종에게는 처 작은할아버지였던 셈이다.
 
 
  대구 유생 도신징의 상소
 
  자의왕대비의 복제를 둘러싼 논쟁은 조형 등이 유배를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자의왕대비의 복제는 대공복으로 결정되었다. 적어도 중앙 조정에서는 현종이나 중신들도 더 이상 그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대 현안 앞에서 이뤄진 과도한 침묵은 더 큰 폭풍우를 부르는 조짐이었다.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자의왕대비의 복제가 대공복으로 정해져 5개월이 흐른 현종 15년 7월 6일 남인 계통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남인들의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은 이 당시 현종 자신의 생각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신은 비록 보잘것이 없으나, 그래도 없어지지 않는 이성이 있으므로 충정에 격동되어 어리석고 미천한 신분을 헤아려보지도 않은 채 천리길을 달려와 엄한 질책을 받게 되더라도 신의 소견을 말씀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넘어 근력이 쇠약한 데다 불꽃같은 더위를 무릅쓰고 오다가 중도에서 병이 나 지체한 바람에 집에서 떠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간신히 도성으로 들어와 보니, 말씀드릴 기회는 벌써 지나 이미 발인(發靷)한 뒤였습니다. 전하의 지극하신 효성에 감동되어 하늘과 사람이 순조롭게 도와 대례(大禮)를 완전하게 마쳤으니 이는 오늘날의 큰 다행이긴 하나, 사실 후세에 보일 원대한 계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이므로 말하지 않는다’고 공자가 말씀하셨으므로 지금 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고 예(禮)가 잘못된 점만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대비께서 인선왕후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를 따라 한 것입니까?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은 모두 기년의 제도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 국상 때에 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를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
 
 
  현종은 嫡長孫인가 아닌가?
 
  만약 주공(周公)이 제정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예에 따라 행하였다고 한다면, 《주례(周禮)》 가운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고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후세에서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唐)나라 위징(魏徵)이 건의하여 이 부분을 고쳤고, 송나라 주자도 고전을 모아 《가례(家禮)》를 편찬하면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어준다’고 하였고,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가례의절(家禮儀節)》을 편찬할 적에도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본조(조선)의 선정신(先正臣·옛 명신) 정구(鄭逑)가 만든 오복도(五服圖) 가운데 《주례》의 ‘큰며느리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전하는 《춘추》의 예를 지킨 것일 뿐이지 후세에서 따라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큰며느리에게 기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역대 여러 선비가 짐작해 정한 것으로서 성인이 나오더라도 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사로운 견해로 참작해 가까운 명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버리고 저 멀리 삼대(三代)의 옛날 예를 취하였으니 전도된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일찍이 국가에서 제정한 예에 따라 기해년에는 큰아들에게 기년복을 입어주었는데, 반대로 지금에 와서는 국가에서 제정한 뭇 며느리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게 하면서 예경(禮經)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의리가 후일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왕대비의 위치에서 볼 때 전하가 만일 뭇 며느리한테서 탄생한 것으로 친다면 전하는 서손(庶孫)이 되는데, 왕대비께서 춘추가 한이 있어 뒷날 돌아가셨을 경우 전하께서 왕대비를 위해 감히 중대한 대통(大統)을 전해 받은 적장손(嫡長孫)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중대한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宗社)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적장자나 적장손이 되지 못한 경우가 과연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적장손으로 자처하신다면 양세(兩世)를 위해 복을 입어드리는 의리에 있어서 앞뒤가 다르게 되었으니 천리의 절문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言路가 막혔다’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 치고 어느 누가 놀라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가 경계하고 주의시키면서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라는 한 글자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어 사람마다 제 몸을 아끼느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더니 더없이 중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때를 당해서도 일체 침묵을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어, 조정에 공론이 없어지고 재야(在野)의 사기(士氣)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선뜻 깨닫고 즉시 반성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전례를 상고토록 분명하게 지시해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올바른 제도로 회복시킨 다음, 후회한다는 전교를 널리 내려 안팎의 의혹을 말끔히 씻어준다면, 상례 치르는 예에 여한이 없을 것이고 적장손의 의리도 밝혀질 것입니다. 떳떳한 법을 바로잡아 도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이 일에 달려 있으며, 말 한마디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오늘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능히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국시(國是)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망령된 말을 한 죄로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
 
  신이 대궐문 앞에서 이마를 조아린 지 반 달이 지났는데도 시종 기각을 당하기만 하였으니, 국가의 언로가 막혔으며 백성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말하려 하는 것은 오늘날 복을 낮추어 입은 잘못에 대한 것일 뿐인데, 승정원이 금지령을 어기고 예를 논한다는 말로 억압하면서 받아주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아, 기해년의 기년복에 대해서는 경상도 선비들이 올린 소로 인해 이미 교서를 반포하고 금령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공복에 대해서는 금령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지레 막아버리니 정원(政院·승정원)의 의도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과거에 기년복으로 정할 때 근거로 한 것은 국조 전례였는데 지금 대공복으로 정한 것은 상고해볼 데가 없으니, 맹자가 이른바 ‘예가 아닌 예’란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공복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미천한 자들도 알 수 있는데 잘 알고 있을 정원으로서 이렇게까지 막아 가리고 있으니, 전하께서 너무 고립되어 있습니다. 재야의 아름다운 말이 어디에서 올 수 있겠습니까. 진(秦)나라는 시서(詩書)를 읽지 못하도록 금령을 만들었다가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성스런 이 시대에 예경을 논하지 말라는 금령을 새로 만들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이 소를 올려 한번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안에서 저지하니 뜻을 못 펴고 되돌아가다 넘어져 죽을 뿐입니다만,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에 놓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조여들고 말이 움츠러들어 뜻대로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대궐을 향해 절하고 하직하면서 통곡할 뿐입니다.〉
 
 
  현종의 분노
 
  읽고 또 읽었다. 어렵사리 도신징의 상소를 전해 받은 현종은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어느 하나 자신의 속뜻과 다른 바가 전혀 없었다.
 
  ‘도대체 서인이란 자들은 뭐 하자는 사람들인가?’ ‘송시열, 그대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 방향으로 끌어왔으며 지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대신이란 자들은 나를 임금이라고 생각이나 하는가?’ 끝 모를 분노의 의문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동안 뭘 했던 건가?’ 자책과 함께 향후 대처방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불사(一戰不辭). 현종의 마음은 이미 확전 쪽으로 잡혀가고 있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면모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나라가 더 이상 나라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창 잘 자라고 있는 세자에게 뭘 물려주겠는가?’
 
  도신징 상소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송시열을 필두로 한 예론이 실은 효종을 서자로 취급하는 논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상소를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세력이 반 달 동안이나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는 승지들까지 자기편이 아니라는 데 현종은 경악했다. 도신징의 말대로 자신은 고립돼 있었다.
 
 
  김익경의 引避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대사간으로 임명된 전 예조참판 김익경이 현종을 찾아와 인피(引避)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피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이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 처벌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말한다.
 
  “삼가 듣건대, 어떤 유생이 소를 올려 왕대비께서 입은 복제에 대해 예조에서 정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고 논하였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가 하달되지 않아 어떻게 말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데다가 또 옳고 그름과 잘잘못에 대해 지레 논해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은 그 당시 예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신징의 상소가 현종에게 전달되자마자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계통의 승지들이 김익경을 비롯한 서인의 핵심 인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종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인 진영은 불안과 공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전긍긍(戰戰兢兢). ‘과연 주상은 이 일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김익경이 인피하자 사간원의 사간 이하진, 정언 안후태 등이 엄호사격에 나섰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 일로 인피할 것까지야 뭐가 있겠습니까. 김익경으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그러나 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하진이나 안후태의 지원논리는 무성의한 것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닷새 후인 7월 11일 사헌부 장령 이광적이 나서 “상복 제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데 유생이 올린 소는 망령되고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여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진과 안후태는 좌천시키고 김익경은 출사하게 하소서”라고 소를 올렸다.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또 공론인가?’
 
  현종이 볼 때 서인들이 ‘노는 꼴’이 가관이었지만 일단은 이광적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하진과 안후태를 현직에서 내쫓았다.
 
  이때 현종은 몸이 좋지 않은 데다가 치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틈틈이 공부하고 연마해온 예론 탐구를 바탕으로 도신징의 상소에 대한 치밀한 검토에 들어갔다. 검토 결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현종은 7월 13일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대신들을 부른다.
 
 
  송시열과 김수흥
 
김상용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흥에게 질문을 던진다.
 
  “왕대비께서 입을 상복 제도에 대해 예조가 처음엔 기년복으로 의논해 정하여 들였다가 뒤이어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무슨 곡절 때문에 그런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김수흥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종과 김수흥의 예론 쟁론에 앞서 먼저 김수흥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김수흥(金壽興·1626~1690년)은 좌의정을 지낸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원래는 중추부 동지사 김광찬(金光燦)의 아들인데 동부승지를 지낸 김광혁(金光爀)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그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선봉장이었던 김상헌의 손자라는 사실이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相容)도 호란 때 일부 종실을 호종하여 강화도로 피란했다가 1637년(인조 15년) 1월 청(淸)군이 강화도를 함락시킬 때 남문 누각에 올라가 화약을 터트려 분사(焚死)한 절의(節義)의 인물이었다.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로서는 절의의 두 형제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겠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한 형 소현세자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정당성 강화 차원에서 두 사람의 절의가 필수불가결했다. 특히 김상헌은 70 노구를 이끌고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대로(大老)라는 극찬을 받으며 하늘을 찌를 듯한 명망을 이뤘다.
 
  송시열은 예론이라는 이론면에서는 송익필-김장생-김집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절의의 현실정치에서는 김상헌을 이었다. 송시열에게 김장생·김집 부자가 마음이었다면 김상헌은 몸이었다. 송시열은 1645년(인조 23년) 경기도 모처에 은거하고 있던 김상헌을 직접 찾아뵈었고 자신의 아버지 송갑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 산림(山林)들 사이에 묘갈명을 부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경을 표시한다는 뜻이었다. 김상헌 또한 송시열을 ‘태평책을 품은 경세가’ ‘주자를 이은 종유(宗儒)’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김상헌은 75세였고 송시열은 38세였다.
 
  김수흥은 바로 이 무렵인 1648년(인조 2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5년(효종 6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에는 아우 김수항과 함께 문과 중시(重試)에서도 거듭 급제했다. 송시열이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증·김수흥·김수항 3형제에게 건 기대는 각별했다. 특히 양자 입적을 통해 김상헌의 종지(宗旨)를 계승한 김수흥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부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김수흥은 대사간·도승지 등을 거쳐 현종 3년에는 34세의 나이로 예조판서에 오른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부친상을 당해 한동안 중앙 정계를 떠나 있던 김수흥은 1672년(현종 13년) 우의정으로 복귀했는데 이때 좌의정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러고 2년 후 송시열은 배후로 물러나고 김수흥이 영의정에 올랐을 때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가 점차 커진 것이다.
 
 
  현종, “왜 앞뒤가 다른가”
 
  김수흥 입장에서 보자면 효종을 서자로 보는 서인의 예론은 단순히 왕권에 대한 반대를 넘어 할아버지의 절개를 드높이 숭상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현종의 질문에 김수흥은 간단하게 답한다.
 
  “기해년에 이미 기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종을 너무 얕잡아본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현종은 예론에 관한 이론 무장을 거의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 하지만 중국 고대의 예법[古禮]이 아닌 국제(國制)에 따라 1년복으로 정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번 왕대비의 대공복도 국제에 따른 것인가?”
 
  명확한 사실은 효종이 승하한 기해년 때 자의왕대비는 기년복을 입었다. 그런데 현종은 국제에 따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내심’ 고례를 따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시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서인들도 외형적으로는 국제를 따랐다고 이야기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의왕대비의 복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들도 더 이상 내심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써가며 기년복을 대공복으로 바꾼 것인데 도신징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자신들의 의도가 만천하에, 그것도 현종 앞에서 드러나게 돼버린 것이었다.
 
  김수흥은 “고례에 따르면 대공복입니다”라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점을 현종은 놓치지 않았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사용하고 오늘날에는 옛날의 예를 쓰자는 말인데 왜 앞뒤가 다른가?”
 
  김수흥이 “기해년에도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자 현종은 평소와 달리 단호함을 보였다.
 
  “그렇지 않다. 그때는 분명 국제를 썼던 것이고 그 뒤 문제가 되어 고례대로 하자는 다툼이 있었을 뿐이다.”
 
 
  덫에 걸린 김수흥
 
  김수흥이 수세에 몰리자 같은 서인 계열의 행(行)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이 거들고 나섰다.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다시 김수흥에게 따져 물었다.
 
  “자, 그러면 국제에 따를 경우 이번에는 어떤 복이 되는가?”
 
  김수흥은 “국제에는 맏며느리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고 답한다. 이에 현종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얼굴에도 노기(怒氣)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왕대비께서 거행하고 있는 대공복은 국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건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사용한 것은 국제였지 고례가 아니다. 만일 경들의 주장대로 기해년에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했다고 한다면 오늘날 대공복은 국제를 참작한 것이 뭐가 있는가?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맏며느리라면, 즉 효종을 장자로 간주했다면 국제로 하더라도 대공복이 아닌가 하는 정면 반박이었다. ‘효종을 적장자로 삼을 수 없다’는 서인들의 묵계(默契)는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종이 다시 한 번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따른 것”이라고 못 박으려 하자 결국 김수흥은 본심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를 따랐기 때문에 따지는 자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너무 나갔다. 현종은 확실하게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고례에서 장자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
 
  김수흥으로서는 “참최 삼년복입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모순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자기 입으로 기해년에는 국제가 아닌 고례를 따랐다고 해놓고 장자의 복은 참최 삼년복이라고 말해버렸으니 당시 현종은 장자가 아닌 중자(衆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돼버린 것이다.
 
  상황은 끝났다. 그때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내보이며 읽어볼 것을 권한다. 김수흥과의 논쟁을 통해 현종은 자기 아버지가 서인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인조의 서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더불어 도신징의 상소가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정확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현종의 죽음
 
  이후 현종은 자의왕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바꾸고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으로 귀양 보냈다. 또 예론의 주무부서인 예조의 판서·참판 등을 하옥한 다음 귀양을 보냈다. 그러고 충주에 물러나 있던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불러올려 영의정으로 삼았다. 전광석화 같은 조치를 통해 정권 교체를 추진한 것이다. 훗날 숙종이 여러 차례 보여주게 되는 환국(換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송 불과 한 달여 만인 8월 10일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던 현종이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허적이 명을 받고 한양에 들어온 것은 8월 16일. 영의정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 등은 서인이었다. 병환의 와중에도 이들 3상과 함께 처사촌인 우승지 김석주 등을 두루 인견하고 세자를 부탁한 현종은 8월 18일 창덕궁에서 숨을 거둔다. 이때 현종의 나이 34세였다. 이로써 서인 세력을 숙청하려는 계획은 일단 전면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예송도 미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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