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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⑦ 천지인(天地人)과 윤동주의 ‘서시’

“높은 곳에 ‘별’, 가장 아래에 ‘잎새’, 그사이에 ‘내’가 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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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그림에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까닭은…
⊙ 김소월 ‘진달래꽃’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
⊙ 윤동주 ‘서시’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맹세
⊙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알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2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화가 김병종이 즉흥적인 느낌으로 그린 이어령 초상.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을 쓰던 젊은 날의 이미지로 그렸다. 사진=조선일보DB
  내가 서양 사람들 앞에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을 이야기하면 서양인들이 다들 와 놀랍다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있어요.
 
  서양의 최고 철학자는 플라톤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년)는 “오늘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중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 1520년)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내지 그리스도교 국가이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들어와요. 중세 때는 그리스도교와 이방의 종교 문화는 대립하고 싸웠지만 르네상스에 들어서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까지도 다 품어버립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티칸 교황청의 프레스코화입니다.
 

  대표적인 그림은 라파엘로가 1510~1512년 사이에 그린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리스는 희랍의 신(神)을 믿는 다신교니까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지요. 그런데 왜 바티칸에 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도 예수님 밑에 오면 다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테네 학당〉을 보면 알겠지만, 가로세로의 비율이 똑같아요. 이처럼 비율이 똑같은 게 기독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의 철학자들을 데리고 기독교를 만든 거죠.
 
 
  서양 철학의 기본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중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오른쪽은 그림 속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진=조선일보DB
  이 그림의 중앙을 보세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워놓았지요? 그리고 나머지 희랍 철학자들을 다 집어넣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디오게네스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죠. 통나무집에서 산 디오게네스 말고 또 누가 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겠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크게 확대해 보면,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땅을 가리키고 있죠.
 
  이러니 서양 사람들이 내가 ‘천지인 삼재’를 이야기하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플라톤은 “모든 인간의 본질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선생님, 하늘이 아니라 땅이지요,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서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년)이 정(正·테제·Thesis), 반(反·안티테제·Antithesis), 합(合·신테제·Synthesis)이라고 해도,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년)가 무의식을 파헤치고 별의별 것을 다 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에서 ‘하늘’과 ‘땅’은 멀어요. 하늘은 이데아, 관념의 세계이고 땅은 육체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무한·영원의 세계이고 땅은 순간·공간의 세계입니다. 무한·유한, 선·악, 두 세계로 나뉩니다.
 
  서양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잘못한 사람들이 모두 땅으로 떨어져요. 떨어지는 것은 무게를 지니고 있어요.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것은 다 나쁜 것이 되고, 죄는 항상 무거운 것이에요.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들의 발목에 큰 족쇄를 채우죠.
 
  반대로 중력을 이기고 날아가는 것들은 선(善)한 것들, 좋은 것들이죠.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죄의 무게만큼 높은 산을 올라가는 형벌을 내립니다. 올라간 만큼 죄가 가벼워져요.
 
 
  # 잘못된 지식의 위험성 - ‘진달래꽃’의 새로운 해석
 
1988년 12월 촬영한 이어령 선생과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 한국을 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의 이미지 메이커 이어령 선생이 개회식 〈정적〉에서 굴렁쇠를 굴린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을 안아 올려 원의 의미를 말해주는 모습이다. 사진=조선일보DB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국민시 두 편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김소월(金素月·1902~1934년)의 ‘진달래꽃’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 시를 대개 학창 시절 외웠거나 지금도 외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는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의 ‘서시’입니다.
 
  두 시 모두 각종 시험에 단골 출제되는 시지요. 심지어 외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외우는 사람 중 거의 단 한 사람도 ‘진달래꽃’과 ‘서시’를 제대로 모른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자, ‘진달래꽃’을 우리는 이별의 시로 배웠어요. 과연 진짜 그럴까요? 이 시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시작해요. ‘가실 때’니까 아직 내가 사랑하는 님은 안 갔어요. 이런데 어떻게 이별의 시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가신다면 이러이러하겠다’는 이야기니까 현재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이에요. 가령 내가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이라고 썼는데 시제를 잘못 봐서 ‘아, 이(李)아무개 백만원 생겼대’라고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영어로 하면 if 가정법이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가르쳐요. 사랑가가 아닌 이별가로 말이죠.
 
 
  ‘진달래꽃’은 이별가가 아닌 사랑가
 
2016년 6월 서울 종로구 화봉문고에서 전시된 《진달래꽃》 초판본의 모습. 시인 김소월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5년 경매에서 1억 3500만원에 낙찰되었다.
  “사랑한다면 당신하고 어디 가서 서로 진달래꽃 꺾어서 뿌리지 않고 화전이라도 부쳐 먹으면서 오순도순 했어야지. 이건 분명히 이별하는 이야기야”라고 단정하는 식이에요.
 
  그러나 동사의 시제를 잘 보세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에서 보듯 ‘드렸다’가 아니라 ‘드리오리다’잖아요. 그런데 다들 ‘드렸다’로 읽어요. 그러니까 이별의 시가 된 거죠. ‘뿌리오리다’지, 뿌리지 않았어요. 이 시의 동사는 전부가 미래 추정형입니다. 마지막 구절도 보세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시가 정말로 이별가가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 말없이 보내 드렸었지.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셨지. 죽어도 눈물 안 흘리려고 했는데 눈물 펑펑 흘렸습니다.’
 
  이게 원래의 시와 닮기나 했어요?
 
  이 시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지금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버려도 꽃을 뿌려줄 겁니다. 나는 눈물도 안 흘릴 겁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는 이별을 가장하여 사랑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을 상상하면서 이별을 통해 오늘의 반대되는 상황으로 오늘의 내가 누리고 있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의 슬픔을 통해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죠.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패러독스 아이러니(Paradox Irony) 수법이라고 합니다.
 
 
  # 선입견으로 읽는 윤동주의 ‘서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저항시인…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이게 상표(商標)입니다. 영화사의 로고예요.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죠. 외우면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됩니까?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줘요.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아! 죽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다짐이구나’ 하고 해석해가면서 읽는 거죠. 그렇게 하고 읽으면 이 시의 여러 군데가 걸려요.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 짓게 되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이 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선생에게 가르침도 받지 않고 그냥 날것인 채로 읽었을 때도 저항시라고 느껴질까요? 한번 해보세요.
 
 
  ‘서시’를 날것 그대로 다시 읽기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인 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전문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시만 읽었을 때,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이 시를 저항시로 읽으려면 해석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부끄럽지 않게 나는 친일파가 되지 않겠다. 일본놈 앞잡이를 절대 안 하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라는 게 민초들이지. 바로 한국인이야. 이 시를 쓰고 있는 윤동주가 살고 있는 북간도로 쫓겨온 가난한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을 보니 일본 식민치하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안되어 보여서 윤동주가 괴로워하고 있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조국 해방의 별, 우리의 별 그걸 위하여 나는 끝까지 일본 사람들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해야지. 우리 동포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일제에 저항하고 조선[한국]을 독립시켜서 이 가난하고 학대받고 어렵고 고난에 찬 민족을 구해야 되겠다. 그 길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니 나는 오늘도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끝!
 
  자, 여러분은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의 저항시 한 편을 감상했어요.
 
 
  # 새롭게 읽는 윤동주의 ‘서시’ - 삭제된 서술부의 시제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바람에’+‘도’가 붙으니, ‘바람’은 물론이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니 그게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내 이웃을,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윤동주는 사랑했어요.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언제가 되었든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시인 김소월
  이렇게 맹세하고, 다짐하고, 소원한다는 건 돌이켜 말하면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이 살고 싶은데 그게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자신이 없으니 또 한 번 맹세하고 다짐하는 거죠.
 
  앞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야기하면서 시제를 잘못 읽으면 시의 본래 뜻을 모르고 착각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서시’의 이 부분은 한국어의 특성상 서술어를 생략하면서 시제가 동시에 생략되어 있어요. 보세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 ‘부끄러움’도 문화의 산물. 3가지 부끄러움
 
한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미니스커트 1호’ 윤복희 이야기〉 캡처.
  19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는 망신스럽다고 야단이 났어요. 결국 윤복희씨는 미니스커트 때문에 울고 갔잖아요. 요즘은 그가 입었던 미니스커트는 오히려 얌전해 보일 정도인데 옛날엔 그 정도의 길이도 창피해했어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문화입니다.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것이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되지요. 또 남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것이 자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해도 부끄럽지 않잖아요. 주말 오전에 늦잠 자고 일어나 한껏 흐트러진 모습도 혼자 있을 때는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 모습을 누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는 부끄러워지지만. 또 남들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이건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이죠. 남들은 다 몰라도 하늘과 나만은 아는 그런 일들이 있으니까요. 이 부끄러움이 땅으로 내려오면 다시 남에 대한 부끄러움, 흔히 말하는 ‘쪽팔리는’ 부끄러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 가지 부끄러움을 배웠어요.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남이 보는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옷을 못 벗는데,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어요. 개에게, 탁자에 놓인 꽃한테 “저리 가, 고개 돌려”라는 말을 하지는 않잖아요.
 
  부끄러움조차 ‘천지인’과 연관해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러니 ‘천지인’이 기가 막힌 거죠.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된 ‘부끄러움’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유묵 ‘신기독(慎其獨)’. 사진=문화재청
  좀 더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선악과(善惡果)’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어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을 때 창세기 2장 2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어떻게 됐을까요?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다’는 것은 알몸을 부끄러워했다는 말과 같아요. 이처럼 부끄러움은 인간의 원죄(原罪)에서 나왔다는 시각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하늘(신)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죄인 것이죠. 부끄러움의 세 층위(層位) 중 첫 번째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입니다.
 
  신기독(愼其獨), 혹은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인데, ‘홀로 있을 때 삼가라’는 뜻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이 남긴 여러 유묵 가운데 ‘신기독’이란 글씨가 등록문화재(제44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구가 집무실 벽에 ‘신기독’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 선생 역시 ‘신독’이란 말을 따랐다고 합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서책을 읽자 가족들이 편하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혼자 있어도 천 명 사이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신독’이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퇴계와 김구의 경구, 愼獨
 
  《송사·채원정전(宋史·蔡元定傳)》에서는 ‘신독’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밤길 홀로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남이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삼간다는 이 신독·신기독은, ‘나와 하늘’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뜻합니다.
 
  ‘나(개인)와 사회’, 다시 말해 ‘사회 법률·제도’가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나와 하늘’이 주고받는 것이지 중간에 ‘사회와 법률’이 개입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법을 어겨 혹독한 처벌을 받아도 ‘나와 하늘’ 앞에 떳떳한 겁니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시성식(諡聖式)을 직접 주재하며 김대건(金大建·1822~1846년) 신부를 비롯해 가톨릭 복자 103위를 성인(聖人)으로 품위를 올렸습니다. 또 지난 2014년 2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게 시복(諡福)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신앙 선조들은 선교사나 사제, 수도자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와 하늘’이 바로 연결된 경우가 아닐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까지 불사해가며 믿음을 지키게 했을까요?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 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을지 몰라도 보다 높은 차원의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망해가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근거가 부족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순교자의 죽음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때 양심은 ‘나와 하늘’이 바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양심과 ‘부끄러움’
 
시인 윤동주
  독자 여러분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은 개인의 양심(良心) 문제일 수도 있어요. 두 번째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말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양심’을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어요.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
 
  《철학사전》(중원문화 刊)에서 ‘양심’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인간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는 감정상의 느낌을 말한다.’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양심에 어긋나면’ 혹은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이는 아무리 인적이 드문 거리라도 함부로 무단횡단하지 않습니다. 지나는 차도 없고 횡단보도가 멀어도 그는 도로교통법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하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 유명한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1900~1980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떠올려보세요. 어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따른 결정에 불안감과 공포를 느낍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원칙(양심)을 따르지 못하고 외부의 ‘신화’와 ‘우상’을 섬깁니다.(신화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심리 상태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양심의 실체는, 내면의 성찰과 비판을 거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어야 합니다. 남이 만든 도덕률 혹은 윤리적 외부 준거(準據)나 틀에 맞추고, 맞춰가는 행위를 ‘양심에 따른다’고 착각합니다. 사회적인 법과 제도, 도덕률이 절대적인 양심이 될 순 없습니다.
 
 
  양심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무리 사회 제도가 허용한다고 해도, 내 양심에 비춰 아니라고 느끼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미국 사상가 헨리 소로(Henry D. Thoreau·1817~1862년)가 말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같은 것이죠.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법과 제도를 알면서도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양심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모진 고문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토록 믿어왔던 도덕률이 악법으로 바뀔 경우 양심은 큰 혼란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양심은 세상에서 평가하는, 옳고 그른 것을 초월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권력이 바뀌어도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마다 양심, 풀이하자면 자긍심,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같은 정서들은 천차만별입니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브로디와 셰퍼의 연구(1982)에 따르면 위협적이고 처벌적인 부모들이 도덕적으로 성숙한 자녀들을 양육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와 정반대로 가혹한 형태의 훈육에 의존하는 부모들은 종종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죄책감, 양심의 가책, 수치심, 혹은 자기비판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 자녀들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아이들을 부모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육만능론’은 전혀 신뢰할 것이 못 됩니다.
 
  어쨌든, 각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 양육태도가 다르듯 저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서상의 반응, 즉 양심도 다릅니다.
 
 
  복수와 관련한 두 이야기
 
독일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에서 선왕의 장례식 장면이다. 무대를 가득 덮은 흙을 활용해 인물들의 심리와 공간을 표현한다. 사진=LG아트센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는 사냥꾼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 扮)의 복수극입니다. 휴 글래스는 거대한 야생 곰에게 일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비정한 동료 피츠 제럴드(톰 하디)는 인디언의 추격과 돈에 눈이 멀어 휴의 아들을 죽이고 그 또한 땅속에 묻고 떠납니다. 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데 이 경우 어떤 사람은 ‘복수하라’고 양심에 명령을 내리지만, 어떤 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인만은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덴마크의 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심지어 선왕(先王)의 아내와 재혼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햄릿’ 왕자.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망령(亡靈)에게서 자신이 동생 클로디어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못해 양심상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극(劇)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다른 사람은 숙부를 죽여서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할지 모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부끄러움’은, 본능적인 욕구들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원초아(Id), 이러한 욕구들에 대해 현실적인 계획들을 세워 대응하는 합리적인 자아(Ego)보다는 도덕적인 초자아(Superego)와 가깝습니다.
 
  초자아는 양심과 비슷합니다. 초자아가 생겨나면 아동은 자신의 행위에 자긍심을 느끼고, 반면 도덕적으로 위반한 행동에 대해서는 죄책감 혹은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내부의 감시자(internal sensor)’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 이론은 현대 심리학에서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초자아가 아동들이 이성의 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의 욕망 같은 정서적인 갈등을 경험하는 남근기(3~6세)에 주로 발달한다는 주장도 요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 ‘서시’를 읽는 세 가지 방법 - 종교시·저항시·휴머니즘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55).
  다시 윤동주의 ‘서시’로 돌아가 세 가지 층위의 부끄러움에 관해 분석해보겠습니다. 앞서 ‘하늘이 나를 봤을 때’ ‘땅의 사람이 나를 보았을 때’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을 말했어요.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民族愛), 인간애(人間愛), 우주애(宇宙愛)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어요. 땅에는 잎새가 있지요. 먼저 하늘의 별은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어요. 그러나 땅의 풀잎과 같은 잎새는 바람이 불면 흔들려요. 잎은 떨어지면 쉽게 죽습니다. 그러니 잎새는 모든 죽어가는 것의 상징이지요. 별은 죽음을 초월한 것이에요. 죽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오, 폭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별아.” 태풍 속에서 배를 타고 노 젓는 사람들은 별을 보고 항해를 합니다. 그 별이 우리나라로 오면 북극성, 북두칠성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북두칠성에서 온 것이에요. 저 삼라에서 온 것입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2017년 11월 2일 서울 마포구 한국조폐공사 제품 홍보관에서 모델이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그러니 우리가 누워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하는 것은, ‘죽는 나와 영원히 죽지 않는 저 하늘나라에서 온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땅에서는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슬프지만 별과 나를 동일시(Identify)해서 별의 생명이 되었을 때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슬픈 얘기예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 인간의 아름다운 눈, ‘나와 하늘’이 연결되다
 
  사형수들은 형장에서 죽기 전에 예외 없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쳐다보고 죽는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하늘과 땅을 보고 죽어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눈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형수의 눈이라도 아름다워요. 하늘을 보고 땅을 보니까 말이죠. 짐승들은 땅밖에 보지 못합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움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압니다.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온 사람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쓰거나 옷을 뒤집어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죄를 짓고 끌려왔지만 너도 인간이구나, 하는 안도감이지요.
 
  함께 죄를 지은 무리가 저희끼리는 막 부끄럽게 다녀도 끄떡없었어요. 그런데 잡혀온 순간 하늘을 보는 겁니다. 하늘을 보니 스스로 부끄러운 거예요.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의 사이에 있습니다.
 
 
  윤동주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한일 대학생 공동역사체험’ 행사에 참가한 한일 대학생들이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 내에 위치한 윤동주 시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인간은 천(天)과 지(地)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제일 마지막 줄을 볼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 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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