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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특집

김무성 옥새 파동 막전막후

옥새 전쟁 사흘간의 기록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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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조 공천 과정 보고받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
⊙ ‘옥새전쟁’ 19~22일 사이 결심… 어차피 사이가 벌어진 만큼 계속 박근혜 대통령 눈치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
⊙ 원유철·친박 최고위원, 웃으며 소주 마셨던 김무성이 역공 취할 것이라곤 상상 못해
⊙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영도다리 사진은 연출 아닌 김 대표의 정치 감각이 만들어 낸 것”
    (김 대표 핵심 참모)
⊙ ‘3대3’ 타협안 받아들였다고 전처럼 고개 숙인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
⊙ 내년 대선 경선 관리하는 차기 지도부 선출 놓고 박근혜 김무성 대리전 예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별명은 ‘무대’다. ‘김무성 대장’의 줄임말이다. ‘무대’는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할 때 후배들이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솔직하고 리더십이 강하다’는 평가와도 통한다. 김 대표의 별명은 2014년 7월 전당대회 이후 하나가 더 생겼다. ‘30시간’이다. 특정 사안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 의원들에게 저항했다가 반발에 부딪히면 하루 정도 지나고 고개를 숙이는 사례들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2014년 10월 개헌 여부를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맞붙었던 ‘상하이 발언 사건’ 때가 시작이었다. 이후 2015년 7월 유승민 의원이 청와대와 친박의 ‘축출 작전’으로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났을 때, 2016년 2월 27일 본인이 비박계 의원들에게 “친박계 핵심 인사가 현역 의원 40여 명의 물갈이 명단을 줬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촉발한 ‘살생부 파문’ 때도 버티지 못했다. 사건 중간중간 김 대표는 증세·복지·공무원연금 등에서도 대통령과 온도 차를 보였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입장을 철회하곤 했다.
 
  김 대표 입장에서 박 대통령과 충돌할 때마다 슬그머니 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서 지지층이 영남권으로 겹치는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김 대표 측근의 이야기다.
 
  “자체 분석 결과 박 대통령의 지지층과 김 대표 지지층은 70%가량 겹친다. 박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가는 오히려 고정 지지층의 이탈이 늘어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MB(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강하게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지지층이 각각 영남과 수도권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근은 이같이 전했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총재 가까이서 정치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현직 대통령이 당선은 못 시켜도 떨어뜨릴 수는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뒀다.”
 
  이회창 전 총재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현직 대통령이 예뻐하는 사람을 당선시킬 힘은 없어도 미운 사람의 당선을 막을 힘은 차고 넘친다는 걸 절감했다는 것이다. “고개 들면 죽는데이”라는 말이 김 대표의 입에 붙은 이유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통해 정계에 입문, 상도동계 막내로 정치를 배웠다. 2002년도에는 이회창 전 총재의 비서실장직을 역임했다.
 
  김 대표는 그간 대권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스스로 몸을 낮췄다. “대통령이 목표였다면 몸조심, 말조심했을 것”(2013년 10월 《월간조선》 인터뷰) “대권은 하늘이 주시는 것인데 제 스스로는 대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2015년 5월 23일 대한민국헌정회 정책포럼) “나한테 대권 기회 오겠나”(2015년 7월 30일 뉴욕특파원 오찬간담회) 등의 회의적 발언을 해 온 것이다. 대권을 노리고 박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여 왔다는 측근들의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김 대표는 올해 3월 29일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대선 도전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를 했다.
 
  “선거 승패에 관계없이 총선이 끝나면 뒷마무리를 하고 (당대표직을) 사퇴하겠다.” 김 대표의 원래 임기는 오는 7월 13일까지다. 내년 대통령 선거(12월 20일) 출마를 위해서는 당헌(黨憲)상 대선일로부터 1년6개월 이전에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6월 19일까지는 물러나야 한다.
 
  “정치인 김무성은 전형적인 구밀복검(口蜜腹劍·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지만 배 속엔 칼이 있다)이다”(익명을 요구한 친박계 의원) “김무성은 자기 정치할 사람”(청와대 관계자) 등의 비난에도 본인이 지금껏 꿋꿋이 버텨 왔던 이유를 공개한 것이다.
 
 
  손수조 전략공천이 계기
 
2016년 3월 13일 오후 새누리당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박근혜 키즈’인 손수조 전 부산사상당협위원장을 전략공천 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김무성 대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대표의 인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3월 13일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의 5차 공천심사 결과가 계기였다. 이날 공관위는 부산 사상 지역을 여성추천 지역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부산 사상 지역의 유일한 여성 예비후보는 2012년 4·11 총선 당시 ‘박근혜 키즈’로 전략공천을 받았던 손수조 전 당협위원장뿐이었다. 손 전 위원장이 사실상 공천을 받게 된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둔 19대 총선에서 박근혜 선대위원장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맞상대로 당시 27살의 손 후보를 전략적으로 공천하고, 그의 당선을 위해 수차례 지원유세를 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인 바 있다.
 
  김 대표는 손 전 위원장이 공천 경쟁자였던 장제원 전 의원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실제 언론이 공개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손 전 위원장의 지지율은 장제원 전 의원에 미치지 못했다. 장 전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의석을 뺏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김 대표는 한 공관위 관계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의석을 잃어도 상관없나?” 이 질문에 공관위 관계자는 이같이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관위 내부에서는 손수조가 ‘박근혜 키즈’인데 공천을 안 줄 수 있겠느냐고. 대통령 얼굴을 봐서라도 줘야 한다고. 손수조가 혹시 무소속 장제원에게 패배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김 대표는 핵심 측근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는 총선 승리와 정권 재창출에는 별 관심이 없는가. 비박을 포함한 180석보다 친박만의 120석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3·15 공천 학살 이후 참모와 잦은 회의
 
새누리당인과 대표직인 찍힌 4·13 총선 후보자 추천서.
  이틀 뒤인 3월 15일 공관위의 7차 공천심사 발표는 김 대표를 더욱 충격에 빠트렸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날 발표한 공천 결과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비박 의원에게는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지만 진박(眞朴) 신인에게는 전략공천이란 혜택을 줬다.”
 
  실제 이재오(서울 은평을) 진영(서울 용산) 의원과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로 지목한 유승민 의원과 가까운 김희국(대구 중남구) 류성걸(대구 동갑) 이종훈(경기 성남분당갑) 조해진(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의원 등은 공천 탈락했다.
 
  반면 진박 후보로 불리는 정종섭(대구 동갑) 추경호(대구 달성) 유영하(서울 송파을) 후보는 단수 추천했다. 공천 결과를 지켜본 김 대표는 더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다. 참모들도 김 대표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들은 김 대표에게 “(김 대표가) 상향식 공천도 못 지키고, 리더십도 제대로 못 보여줬다는 비판이 많다. 이대로 있으면 대표가 대권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건의했다.
 
  김 대표는 3월 16일 공관위의 결정에 대해 최고위원회 의결을 보류하고 공관위 재의(再議)를 요구했다. 이날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원내대표를 두 번 지낸 이재오 의원이 당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역 남성의원이 있는데 굳이 여성우선추천 지역으로 정하고, 어떤 지역은 선거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 의원이 탈락했다. 이 모든 것이 상향식 공천의 원칙, 국민공천제에 다 반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기자간담회 직후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공천위가 상당히 당헌·당규를 위반하고 임의로 결정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는 (김 대표의 발언)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재의 요구를 일축했다.
 
  김 대표도 물러나지 않았다. 3월 17일 정례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하지 않은 것이다. ‘3·15’ 학살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원유철 원내대표와 서청원·김태호·이인제 최고위원 등 친박계는 자기들끼리 모여 최고위원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장은 김 대표에 대한 성토로 가득했다. ‘최후의 카드’인 최고위 해체 이야기까지 나왔다. 당헌 113조에 따르면 당 대표 궐위 또는 최고위 기능 상실 등의 경우 비대위를 구성하게 돼 있다. 친박계 최고위원이 모두 사퇴할 경우 최고위 의결정족수(5명)에 미달하기 때문에 이는 기능상실 상태로 해석할 수 있어 비대위 구성요건을 충족한다는 것이다. 이는 김 대표를 몰아내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원 원내대표와 최고위원들의 압박에 김 대표는 3월 18일 최고위를 열었다. 오전 9시와, 오후 9시 두 번 개최했으나 공천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다.
 
  김 대표 측은 일요일인 3월 19일 “최악의 경우 공천장에 도장을 안 찍어 주는 방법”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직선거법 제49조에 따라 당의 후보자를 선관위에 등록할 때는 당대표의 직인(職印)이 필요하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당시 선관위로부터 대표 직인이 없는 공천장은 무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법이 너무 명확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고 하더라”고 했다.
 
  여차하면 ‘옥새 전략’을 꺼내 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김 대표는 3월 21일, 22일 최고위 회의 때도 진전이 없자 참모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아날로그 금고 속 옥새
 
3월 23일 자정 최고위원회의 종료 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등 친박계 최고위원은 여의도 감자탕 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사진= 박종희 제2사무부총장 페이스북
  김 대표 측 관계자의 전언이다.
 
  “대표가 공천을 보류한 후보 전원을 주저앉혀야 할지, 아니면 그중 몇 명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할지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참모들의 의견도 갈렸다. 오랜 회의 끝에 ‘결국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결정은 대표에게 부메랑이 될 것이다. 모두 다 살리든, 모두 다 죽이든 두 방안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게 최선’이라는 의견이 힘을 받았다. 모두 다 살리느냐, 모두 다 죽이느냐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내가 알기엔 대표가 ‘모두 주저앉혀야 한다’는 의견에 손을 들어줬다. 24일 도장을 찍지 않고, 후보등록 마감일(25일 오후 6시)까지 최고위를 개최하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갖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김 대표가 총선 후보 등록이 끝나는 25일까지 당대표 직인을 찍지 않을 경우 공천이 보류된 진박 후보는 총선에 출마할 수가 없다. 더구나 총선 후보 등록 기간에는 당적(黨籍) 변경이 금지되기 때문에 이들은 무소속 출마도 불가능했다.
 
  김 대표의 이런 움직임은 핵심 측근들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옥새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3월 23일이 밝았다. 김 대표는 당 총무국에 전화해서 ‘직인’을 가져오라고 했다. 오후 3시경이었다. 공천 확정자의 공천장에 직인을 찍기 위해서였다. 옥새라고도 표현하지만, 정식 명칭은 ‘대표 직인’이다. 김 대표는 2014년 7월 당대표에 선출되고 직인을 새로 팠다. 이 직인은 당인(黨印)과 함께 서울 여의도 당사 총무국 금고에 보관돼 있다. 영화에 나올 법한 대단한 금고라고 상상하겠지만 구식이다. 가로 60cm 세로 130cm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의 금고는 열쇠로 열었다 잠그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열쇠는 박현석 총무국장이 관리한다.
 
  이날 오후 9시에 열린 최고위 회의에서 김 대표는 “여론조사에서 상당히 앞서는 후보 대신 지는 후보에게 공천을 줄 수 있느냐. 절대 직인을 찍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원 원내대표 등 친박 최고위원들은 “선거 앞두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고 고성으로 맞받았다. 싸늘한 분위기의 최고위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자정에 끝났다. 한 최고위원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 ‘소주 회동’을 제안했다. 장소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양지탕’ 집이었다. 하지만 영업이 끝나 그 뒤편에 있는 감자탕 집에 자리를 잡았다. 김 대표를 비롯해 원 원내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김학용 대표비서실장, 홍문표 제1사무부총장, 박종희 제2사무부총장이 감자탕을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한 참석자는 “꽤 많은 양의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취기가 돌았는지 분위기 는 화기애애했다. 박 제2사무부총장은 ‘소주 회동’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자신의 SNS에 공개하기도 했다. 23일 자정을 조금 넘겨 시작한 소주 회동은 2시간 뒤인 24일 새벽 2시에 끝났다.
 
 
 
옥새는 당사에 있었다!

 
2016년 3월 24일 김무성 대표는 “보류된 5개 지역에 대한 공천관리위원회의 결정에 대해서 의결을 하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뒤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3월 24일 원 원내대표는 새벽의 좋았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공천 갈등 봉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물밑에서 역습을 준비한 김 대표의 반응은 차가웠다. “절대 도장을 찍지 않겠다.”
 
  예상외 반응에 놀란 원 원내대표는 서청원, 이인제, 김태호 최고위원과 비공개 대책 회의를 가졌다. 장소는 서 최고위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이었다. 보안을 위한 선택이었다.
 
  비공개 회의에서는 “김 대표가 도장을 찍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은 ‘액션’이다. 극단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 것이니 지켜보자”는 결론이 났다. 순간 원 원내대표와 최고위원들 휴대전화에 문자가 떴다. “〈긴급〉 2시30분 김무성 긴급 기자회견”. 2시14분이었다. 김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한 최고위원이 외쳤다. 서 최고위원 방에 모인 인사들은 곧장 TV를 켜고 김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에 집중했다.
 
  김 대표는 “이재만(대구동을) 추경호(대구 달성) 정종섭(대구 동갑) 유재길(서울 은평을) 유영하(서울 송파을) 후보의 공천장에 도장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원 원내대표와 친박계 최고위원은 김 대표의 예상치 못한 선전포고에 비상이 걸렸다. ‘눈뜨고 코 베인 격’이었다. 이들은 김 대표의 기자회견 직후 당헌 30조(대표가 사고 또는 해외 출장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원내대표가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를 근거로 원 원내대표가 대신 대표 직인을 찍어 공천 절차를 밟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대표 직인이 필요했다.
 
  서 최고위원의 측근은 “김 대표가 23일 공천장 도장을 찍어 주기 위해 대표 직인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 최고위원에게 보고했다. 확인 내용과 보고 내용엔 차이가 있었다.
 
  “김 대표가 대표 직인을 가지고 부산에 갔습니다.”
 
  서 최고위원의 측근이 김 대표가 공천장에 도장을 찍고 나서 반납하지 않고 부산으로 가지고 갔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원 원내대표는 대표 직인의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 총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원 원내대표도 김 대표가 대표 직인을 부산으로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의 직인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당사에 보관돼 있어야 마땅한 당의 직인 2개가 당사에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김 대표를 비판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당시 대표 직인은 당사에 있었다.
 
  정치권 관계자는 “김 대표가 부산으로 가기 직전에 총무국장을 만나고 갔다”며 “총무국장은 당대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김 대표가 기자회견 전 총무국에 가는 것을 봤다”며 “아마 이때 대표 직인을 주고 당분간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의)연락을 받지 말라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
 
 
  영도다리 사진의 진실
 
3월 25일 자 《조선일보》 1면. ‘영도대교에 선 김무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이 눈길을 끈다. 김 대표측 관계자는 “연출한 사진이 아니다”고 했다.
  원 원내대표와 친박계 최고위원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당시 김 대표는 부산(김해)행 대한항공 KE1117편에 올랐다. 3시에 이륙한 비행기가 김해공항에 착륙한 것은 한 시간 뒤인 4시. 김 대표는 김해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차를 타고 영도의 선거사무실(부산 영도구 영선대로 75 동원빌딩 5층)로 향했다.
 
  기존 김 대표의 영도 지역구 사무실은 영도구 다른 곳에 있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김 대표의 지역구가 부산 영도에서, 부산 중구 영도구로 통합 조정되면서 지금의 사무실로 옮겼다. 현 사무실은 중구와 영도구를 잇는 영도대교 바로 옆에 있다. 중구 사무실은 대청동에 있다. 영도대교 인근이다.
 
  4시40분쯤 영도 사무실에 도착한 김 대표는 취재를 위해 사무실을 찾은 지역 주재기자들과, 지역지 기자, 자신을 돕는 당직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사무실 큰 유리창 앞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영도다리를 한참 쳐다봤다.
 
  영도다리는 1934년 일본군이 군수물자 운반을 위해 만든 다리로, 국내 최초의 연륙교(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다. 영도다리엔 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피란민의 애환 등 부산의 나이테가 오롯이 살아 있다. “영도다리만큼 부산이라는 지명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곳은 없다”는 이야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영도다리를 한참 지켜보던 김 대표에게 한 기자가 이야기했다. “대표님, 영도다리 한번 가시죠.”
 
  김 대표는 “그러자”며 사무실 당직자, 기자들과 함께 영도다리로 향했다. 사진기자 한 명이 “대표님 영도다리 좀 걸어 보세요”라고 하자, 김 대표는 영도다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중간쯤 가다 멈춘 김 대표는 다리 난간에 기대 바다를 바라봤다. 3월 25일 자 《조선일보》 1면에 ‘영도대교에 선 김무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은 이때 찍힌 것이다. 김 대표 측 핵심 참모는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자고 미리 기획한 것은 아니다”며 “그 모습은 김 대표의 정치 감각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이런 사진을 언론이 보도했을 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 즉흥적으로 생각에 잠긴 모습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이후 김 대표는 중구 선거 사무실을 방문해 당직자들을 격려했다. 동아대 앞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겨 지역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무대 “나 잘했제”

 
옥새 전쟁은 끝났지만 김무성 대표의 반란은 향후 당권·대권을 향한 여권 내 권력 투쟁을 예고했다. 2016년 2월 16일 국정관련 연설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김 대표의 전화기가 울렸다. 원 원내대표였다. “대표님, 6시30분 비행기로 부산으로 가겠습니다.” 온다는 사람을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김 대표와 원 원내대표는 오후 7시50분쯤 영도 선거 사무실에서 만났다. 원 원내대표는 “빨리 당무에 복귀하셔서 최고위를 주재해 주십사 하는 (최고위의) 뜻을 대표님께 전달하려고 달려왔다”고 했다. 김 대표는 “당무를 거부한 일은 없고 이번 선거에 당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해서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원 원내대표가 재차 “당원들, 국민이 걱정하니까 대표님 당무를 해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김 대표는 답변하지 않은 채 물만 마셨다. 김 대표가 꿈쩍하지 않자 원 원내대표는 “아직 식사 전이니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김 대표는 “자갈치시장에 있는 단골 횟집으로 가자”고 말하고는 측근인 박민식 의원을 불렀다. 박 의원은 친김무성계인 이진복, 서용교, 배덕광 의원에게 연락해 “김 대표가 밥을 먹자고 하니, ○○ 횟집으로 오라”고 했다.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김 대표와 원 원내대표, 박민식, 이진복 의원은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며 식사를 했다. 오후 8시30분이었다. 식사 중에도 원 원내대표는 “얼른 돌아오시라”고 했고, 김 대표는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만 답했다. 오후 10시 별다른 성과 없이 원 원내대표가 자리를 떴고, 서용교, 배덕광 의원이 새로 합류했다. 서, 배 의원도 김 대표의 측근이다.
 
  김 대표는 박민식 이진복 서용교 배덕광 의원과 횟집 옆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맥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4명의 측근 의원에게 그동안의 심경을 토로했다.
 
  “내가 이재오 유승민 주호영 의원 세 명은 절대로 낙천해서는 안 된다고 공심위에 이야기했는데, 꿈쩍하지 않더라. 서청원 최고위원과 최경환 의원 등 친박계 핵심들과 중재하려고 했는데 합의 직전에 결렬됐다. 합의가 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 그래서 당헌·당규를 연구해서 문제 있는 곳 다섯 곳을 다 걸고넘어지기로 한 것이다. 당헌·당규에 따르면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인물을 공천하게 돼 있다. 당헌·당규를 지키는 것이 대표의 의무 아니겠는가. 나 잘한 거 아니냐.”
 
  김 대표가 말을 이었다.
 
2016년 3월 24일 오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부산 영도구 사무실을 찾은 원유철 원내대표와 함께 자갈치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원유철 원내대표가 당무 거부라고, 억지를 부리는데 이게 어떻게 당무 거부인가. 당헌·당규를 지키자는 것이지. 그래도 내일은 올라갈 거다.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최고위는 절대 열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한 의원은 계속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머지 의원은 “협상을 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의원의 기억.
 
  “저는 웬만큼 성과를 거둔 만큼 서울로 올라가실 것이라면 최고위를 열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대표는 강경하더군요. 절대 열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의원이 ‘어차피 대표님 고민은 대구의 진박 후보 2명(정종섭, 추경호) 아니냐. 두 명을 살려주면 그쪽(박 대통령, 청와대)도 대표님의 요구(이재오, 유승민 생환)를 들어주지 않겠느냐. 정종섭, 추경호를 날리면 박 대통령에 대한 정면 도전을 의미하는 만큼 잘 생각해 보시라’고 하더군요. 대표가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내일 아침 8시30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갈 거다. 그런데 최고위는 열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습니다. 그때가 자정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는 “그 술자리에서만 해도 김 대표는 ‘살생부’와 ‘막말’ 파문을 거치며 어차피 사이가 벌어진 만큼 더는 박근혜 대통령 눈치를 안 보겠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전했다.
 
 
  옥새 전쟁의 결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3월 3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 참석, 대권 도전 의사를 에둘러 밝혔다.
  김 대표는 3월 25일 오전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부산 자택을 나섰다. ‘뻗치기’(취재원을 기다리는 행위)를 하고 있던 기자 한 명이 물었다.
 
  “대표 직인을 찍지 않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습니까.”
 
  김 대표는 “심각하게 당헌·당규를 위반한 공천이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 공천에 대한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김 대표는 오전 10시쯤 서울 여의도 당사에 도착했다. 그는 “최고위 회의를 소집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고 했다. 부산 출발 전과 약간 입장이 바뀐 것이다. 김 대표가 전날 기자회견에서 “주말까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최고위 회의는 오전 11시38분에 재개됐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또다시 후퇴한 것이 아니라 회의는 열되 선관위 후보 등록이 마감되는 오후 6시까지 직인을 찍지 않고 버티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김 대표는 시간을 끌려고 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김 대표는 계속 표정없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전했다. 간혹 발언을 할 때도 아주 느리게 말을 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펼쳤던 ‘필리버스터링(합법적 의사진행방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김 대표의 시간 끌기 전략에 4시가 가까워졌음에도 이견이 좁혀지질 않았다. 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 등은 “말이 안 통한다” “최고위원을 그만두고 만다”고 두 손을 들어 회의가 정회에 이르렀다. 그때 원 원내대표가 김 대표를 회의장 밖으로 불렀다. 원 원내대표는 김 대표의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 “이재만, 유재길 후보는 빼시지요.”
 
  김 대표는 원 원내대표의 제안이 청와대 의중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잠시 생각하던 김 대표는 원 원내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구의 정종섭(동갑) 추경호(달성) 이인선(수성을) 후보 등 3명의 ‘진박’ 후보 공천장에 도장을 찍어 주는 대신, 이재오(서울 은평을) 유승민(대구 동을) 김영순(서울 송파을) 후보가 출마한 곳은 불공천 지역으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25시간15분 동안 펼쳐진 ‘옥새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김 대표 측 핵심 참모는 “친박계에서는 김 대표의 옥새 투쟁에 대해 ‘내란(內亂)을 일으킨 것’이란 표현까지 썼다. 이 상태로는 총선을 치르지 못할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먼저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니 김 대표 입장에서도 한 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타협 직후 “정치라는 게 큰 실패를 막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선택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선거를 앞둔 당대표로서 내 원칙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옥새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이번 ‘김무성 대표의 반란’은 공천 갈등의 차원을 넘어 향후 당권·대권을 향한 여권 내 권력 투쟁을 예고했다는 분석이다. 김 대표가 이번에 박 대통령에 대해 ‘항명(抗命)’을 선택함으로써 그 ‘전단(戰端)’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1차전은 총선이 끝나자마자 치러지는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다.
 
  경북 지역의 3선 의원은 “차기 지도부가 내년 대선 경선을 관리하기 때문에 친박과 비박 간 싸움은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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