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서재경(徐在景) 남도학숙 원장이 말하는 김우중 회장의 1992년 대선 참여 전말 : 월간조선

제14대 대선을 눈앞에 둔 1992년 10월은 뜨거웠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등 기성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김우중(金宇中) 대우 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의 대권 도전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해 봄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국회 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한 정 회장의 대선 출마가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그의 재계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김 회장의 출마 움직임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국 정계를 대표해 온 김영삼, 김대중 두 인물과 재계를 대표해 온 정주영, 김우중이라는 인물이 동시에 대선이라는 한 링에 올라가 격전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결론적으로, 14대 대선은 민자당 김영삼 후보, 민주당 김대중 후보,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등 사실상 3자 대결로 치러졌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10월까지 대선 출마가 유력했던 김우중 회장은 당시 왜 출마의 뜻을 접은 것일까.

한 중앙일간지는 10월 25일자에 김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 후 14대 대선 출마 결심을 굳혔다는 소식을 1면 톱으로 특종 보도했다. 하지만 그 나흘 뒤인 29일 오전 김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며칠 사이에 김 회장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김 회장은 지금까지 그때 벌어졌던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2014년 8월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에서도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김 회장이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고심할 때 곁에 있었던 이가 서재경(徐在景) 남도학숙 원장이다.

서 원장은 당시 대우그룹 회장 비서실 이사로서 김우중 회장이 지향하는 당의 정강 정책 등을 마련했던 인물이다. 김 회장이 직접 창당을 결행할 생각도 했고 그 당의 정강 정책까지 마련했었다는 것은 이번에 서 원장을 통해서 처음 알려지는 이야기다.

서 원장은 김 회장을 대신해 김 회장의 불출마 입장을 기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김 회장의 저서로 1989년에 발매돼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기획자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 상임고문’으로서 선거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서 원장에게 오래전부터 1992년 당시 김 회장의 대선 도전과 관련한 비화들을 들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던 차에 올 10월 하순경에 맞춰 그가 책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핑계로 서 원장을 만났다. 서 원장은 김 회장의 정치 참여와 관련한 이야기에는 좀체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기획하게 된 동기와 그가 쓴 책에 대해 물어보는 틈틈이 김 회장의 정치 참여와 관련한 비화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서 원장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기사는 그 ‘틈틈이 물었던 질문과 답’을 중심으로 씌어졌다. 서 원장은 1992년 10월에 있었던 일들을 날짜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보수 가치 위에 진보 개념 접목

김우중 회장과 기내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서재경 원장.

— 1989년에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기획해 발간 6개월도 안 돼 100만 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이겠죠?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깊죠. 당시 87년 6·29로 활성화한 정치민주화는 경제계에도 변화를 가져와 산업현장의 노사분규를 촉발시켰습니다. 신문은 노사분규로 도배되었고, 날마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노사분규가 터졌죠. 이런 상태가 1년도 넘게 지속되자 사람들이 염려하기 시작했고요.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이 현저히 불공정한 세상이 아니라는 점을 말할 필요가 있었고, 악덕 자본가인 양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기업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던 거죠. 부자와 기업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대중에게 인식시킬 필요도 있었습니다.”

— 그래서 김 회장의 책을 기획하게 된 것이군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당시 기울어진 사회 분위기를 반전시킬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로 기억되기보다는 기업가로 평가받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했고요. 근검, 절약, 노력, 성실 등 보수적 가치 위에 창조, 도전과 같은 진보의 개념을 접목시킨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의 창립 20주년을 맞고 있었는데 그 20년 내내 대우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산업화 세대의 중심인물이자 성공신화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이런 인물이라면 어지러운 세상에 한마디를 던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그 책을 통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는지요.

“꼭 이 책 덕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책이 나오면서 시끄러웠던 노사분규도 잦아들었습니다. 숨죽이고 뒤로 후퇴했던 기업인들, 지난날 노사문제에 소홀하다 악덕 기업주로 몰렸던 사람들이 심기일전해서 다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기업주들이 힘을 내서 열심히 뛰면 당연히 노사분규도 줄어듭니다.”

— 서 원장께서 10월 20일께에 출간할 예정인 책에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가정, 학교, 청년 등이 협력해야 한다는 ‘5자 협력론’이라는 내용이 있던데 김우중 회장이 현역에 있다면 서 원장과 같은 청년실업 대책을 내놨을까요.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등 다섯 집단이 한 방향을 향해 노력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게 제 주장인데요. 마치 다섯 손가락 하나씩을 떼어 놓으면 힘이 미약하지만 다섯 손가락을 모아 주먹을 쥐면 힘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각자 따로 움직이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요원해요. 이를 저는 ‘오자 협력론’이라고 작명한 거고요.”

— 청년실업과 관련해서 정부나 기업 나아가서는 학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가정과 청년까지 협력해야 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한국사회는 지금 정상이 아니잖아요? 어디 한두 군데라야 해결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총체적 문제를 노정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혁명적 수준의 ‘국가개조’가 필요합니다. 국가를 개조하려면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람을 낳고 기르는 가정이 제일 중요합니다. 가정교육이 모든 교육의 기초이니까요. 교육학은 ‘어머니 무릎학교(school of mother’s knee)’를 가장 위대한 학교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무릎학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 청년 자신들은요.

“저는 청년들의 직업 선택 방식에 1차원, 2차원, 3차원적 방식이 있다고 봐요. 먼저 제1차원의 방식은 인기와 근무조건을 따져서 직업을 택하는 방식인데,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직업선택에서 돈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청년들의 9할 이상이 이 방식을 따릅니다. 2차원의 직업 선택은 자신의 소질과 소망을 찾아가는 방식이죠. 스포츠, 예능 등 각 분야의 수많은 스타들이 그 예죠.”

— 2차원 방식의 직업 선택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죠. 다만 2차원 선택의 단점은 자칫 철학의 빈곤으로 인해 인생을 ‘재미있게’는 살아도 ‘의미있게’ 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일 겁니다.”

— 그럼 3차원적 선택은 뭡니까.

“사는 동안은 행복하고, 죽어서는 특별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얻는다면 진정 성공한 사람일 겁니다. 이런 성공을 보장하는 방식이 바로 3차원의 직업선택이라고 보는 거죠.”

노태우는 정치 참여를 말렸다고 하지만 …

전용기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김 회장과 서 원장.

이쯤에서 김우중 회장 이야기로 넘어갔다.

—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나온 후 김 회장이 당시 재야 인사였던 장기표씨 등과 해외여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것도 서 원장의 기획이었습니까.

“제 기획은 아니었어요. 제가 장기표씨 연락처를 찾아서 김 회장께 연결은 했죠. 그때만 해도 장기표씨가 재야를 대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조심스러운 만남이었어요. 그래서 늦은 밤에 외진 데서 몰래 만나듯이 그렇게 만났죠. 의외로 두 분이 서로 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들임에도 말이 통했어요. 90년인가 91년 그 무렵이었어요. 두 분이 우즈베키스탄, 유럽 등을 여행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죠.”

— 그때 김 회장이 장기표씨 외에도 재야인사들과 많이 만났나요.

“함께 여행을 한 분은 장기표씨 한 명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기표씨와 세계여행을 한 후 그 뒤로 김용옥 교수와 중동, 아프리카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소설가 이문열씨하고 모스크바, 유럽, 아프리카, 필리핀, 베트남 등지를 여행했죠.”

— 그게 김 회장의 정치참여 준비였던 건가요.

“그거는 아니었어요. 그 전에도 대학교수들을 모시고 연말연시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행 전체를 동행하는 게 아니라 김 회장은 자기의 비즈니스를 하고 동행한 교수는 그 시간에 자유롭게 여행을 하다가 이동 중에 비행기 안에서 3~4시간씩 대화를 나누죠. 이를테면 독선생을 모시고 특강을 듣는 셈이죠. 김 회장은 그런 여행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스스로의 생각도 정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런 시간을 통해서 김 회장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었군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거죠.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콘텐츠를 쉼 없이 채우신 거죠. 예를 들어 소설가와 여행을 하면 소설가들의 사물을 보는 시각과 새로운 발상, 개인적 체험들을 경청합니다. 그런 분야는 기업인은 알 수 없는 영역이잖아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았다고 보면 됩니다.”

이어지는 질의 응답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과 대선 후보 경선에 불복해 민자당을 탈당, 새한국당을 만든 이종찬(李鍾贊) 전 의원의 김우중 회장의 대선 도전과 관련한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서 원장의 증언과 배치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종찬 전 의원의 새한국당은 김 회장을 대선 후보로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대선에 출마하려 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비밀리에 만나 ‘정치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머리에서 지우라’고 했으며, 김 회장이 결국 포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회장의 대선 도전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종찬 전 의원이 2015년에 발간한 회고록 중 김 회장과 관련된 한 부분이다.

〈… 10월 27일 김우중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밤늦게 힐튼호텔 23층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새벽 1시 30분까지 그와 대화했다. 내가 물었다.

“너 …, 출마할 생각 진짜 있는 거냐?”

나의 노골적인 질문에 그도 솔직하게 답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하겠다고 나서는데, 나라고 못할 것 있겠냐? 나이로 봐도 정 회장이야 고령이지만, 난 연부역강하지 않니?”

“너와 정주영씨가 경쟁하게 되면, 이 나라 정치판은 재벌 싸움판으로 바뀌지 않겠냐?”

“나는 일단 하면 대우를 처음 시작할 때와 똑같은 각오로 나가려 한다.”

“그렇다면 기업을 완전 청산하는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믿겠냐?”

그는 움찔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잠시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네가 반대하는 것 같은데, 내가 다시 생각하지.”〉

이 전 의원이 김 회장의 대선 참여에 반대했다는 뉘앙스다.

92년 봄부터 사람들 만나며 마음의 준비

92년 대선 참여 문제를 놓고 김 회장은 서 원장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 김 회장께서 1992년 대선 도전은 왜 포기했던 겁니까.

“지금도 미스터리예요. 제가 당시 김 회장의 정치 참여 문제와 관련해서는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중 하나인데요. 아마 회장 자신을 빼고는 제가 제일 많이 관여를 한 사람일 겁니다. 김 회장께서 끝내 그 비밀을 안 털어놓은 영역이 그 부분입니다. 아직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가 아닌지 아니면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짐작이라 …. 분명한 것은 92년 봄부터 마음의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현역 의원과 전직 의원 등 정치인들을 많이 만났죠.”

— 정치인 누구누구를 만났습니까.

“이종찬씨라든지 김용환씨, 장경우씨, 이철씨, 정대철씨 등 김 회장님의 경기고 동문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을 남의 눈을 피해서 신중하게 만났죠. 그 사람들로부터 충고도 듣고 시장을 분석하듯이 한국 정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들었어요.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정치를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그랬어요.”

— 대선 도전 의지는 분명했던 거네요.

“저는 의지가 있었다고 봐요.”

—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과 교섭단체 구성 성공에 자극을 받은 건가요.

“그게 자극이 됐을 거예요. 정 회장과 김 회장은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서로를 할퀴는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랬죠. 그런데 라이벌인 정 회장이 자기 정치세력을 가지고 대우를 할퀼 수도 있잖아요. 국정감사 때 괴롭힐 수도 있고요. 정 회장에 대한 위기의식도 있었을 거예요.”

— 이종찬씨는 회고록에서 친구인 김 회장의 정치 참여를 말린 듯한 뉘앙스로 얘기했던데요.

“이종찬씨의 주장은 그쪽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지켜본 시각은 달라요.”

— 시각이 어떻게 다른데요.

“이종찬씨는 김우중 회장이 정치를 막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고 자기는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는 입장인데 내가 알기로는 이종찬씨가 거꾸로 와서 불쏘시개 역할을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하고 조건들도 제시했어요. 김 회장이 정치에 참여한다면 새한국당이 당권과 대권을 분리해서 가자는 이야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 그러면 대권은 김우중 회장, 당권은 이종찬 전 의원이겠죠?

“그렇죠.”

—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입장은 어땠습니까. 회고록에서는 김 회장의 정치 참여를 만류했다고 했는데요.

“뒤에 입장을 바꿨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노 대통령이 김 회장의 정치 참여를 만류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점입니다. 제가 하도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날짜까지 기억합니다. 10월 23일이었어요.”

노태우는 김우중에게 어떤 언질을 주었나

김 회장의 언론 인터뷰에 배석한 서 원장.

서 원장의 길게 이어진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김 회장은 10월 23일 오후 2시에 강릉 MBC에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이날 노 대통령이 김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하자고 했다. 강릉MBC 특강 시간에 맞추기 위해 김 회장은 노 대통령과 점심 식사 후 헬기를 이용해 강릉으로 가기로 했다. 서 원장은 행사 준비를 위해 아침에 차량을 이용해 강릉으로 먼저 갔다.

그런데 강연 시간이 다 돼 가는데 김 회장이 오질 않고 있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김 회장의 수행비서와 전화 연결이 안 됐다. 청와대로 김 회장을 모시고 간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운전기사는 김 회장이 아직 청와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시간에 이미 강릉 MBC 강당은 주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 원장은 강연 진행자에게 세탁기 등 대우의 가전 제품을 경품으로 내놓을 테니 주부들을 대상으로 장기자랑을 진행하면서 시간을 끌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1시간쯤 시간을 끌고 3시가 돼서야 김 회장이 탑승한 헬기가 도착했다.

서 원장은 김 회장을 맞이하기 위해 급하게 헬기장으로 갔다. 김 회장 차에 동승한 서 원장은 “너무 늦었으니까 빨리 가시죠” 하며 강연장으로 급히 가자고 재촉했다. 그런데 김 회장이 서 원장에게 “우리 어디 가서 얘기부터 하자”고 하는 거였다. 김 회장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 노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언질을 받았나 보죠.

“그랬던 거였어요. 제가 강당 뒤에 강사들 대기실로 김 회장을 모시고 갔더니 물부터 달라는 거예요. 물을 가져다주었더니 한 컵을 들이켜고는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엄지손가락으로 노 대통령을 지칭)한테 정치 참여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랬더니 뭐라고 그럽니까’ 하고 물으니까 ‘굉장히 좋은 생각이라고 격려를 하더라’는 거예요. 의외의 반응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노 대통령이 ‘지금은 내가 현직이니까 말은 할 수 없지만 퇴임 후에는 나도 김 회장이 하는 당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김 회장이 흥분했던 거예요. 김 회장으로서는 엄청난 언질을 받은 거죠. 김 회장은 노 대통령의 말을 자기를 도와주고 지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죠.”

— 그렇게 얘기했다면 누가 들어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그렇죠. 그런데 한 중앙일간지가 25일자 1면 톱으로 김우중 회장과 노 대통령 면담 소식을 보도했어요. 김 회장이 대선 출마 의향도 밝혔다는 제목과 함께였죠.”

— 노 대통령과의 독대 후 그와 관련해 더 이상의 얘기는 없었나요.

“아니, 있었죠. 강릉 MBC 강연을 끝내고 서울로 오면서 차 안에서 제게 김 회장이 당을 만들려면 준비가 필요할 텐데 뭘 준비해야 하는지를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당을 만들려면 ‘우선 정강 정책, 당헌, 당규 이런 것들하고 선거법에 맞게 지역에 지구당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등의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김 회장이 ‘그거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느냐’고 해서 ‘아뇨, 금방 할 수 있고 검토해 놓은 것도 있다’고 했더니, ‘그래? 그럼 오늘부터 그걸 좀 서둘러라. 우선 당이 지향해야 할 지향점, 당의 노선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내일까지 정리를 해라’ 하고 지시를 내리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날 밤에 타워호텔로 믿을 만한 직원들 2명을 불러서 밤샘 작업을 했어요.”

당 강령을 만들다

페루 리마에 있는 대우 딜러숍을 돌아보고 있는 김 회장. 오른쪽이 서 원장이다.

— 당 강령의 얼개 정도는 나왔겠네요.

“그렇죠. 밤샘 작업을 했어요. 이튿날 또 보강 작업을 하고 그 다음 날 새벽에는 만남의 광장으로 달려갔죠. 25일이었는데 김 회장이 그날 대우전자 광주공장 방문과 광주에서 열리는 광산 김씨 종중 모임 참석, 야간에는 전남대 대학원 초청 강연이 있어서 만남의 광장에서 만나 헬기로 이동하기로 했던 날이죠. 그런데 만남의 광장에 이종찬씨도 함께 온 거였어요. 서울에서부터 김 회장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면서 온 거죠. 두 사람은 얘기가 안 끝났는지 운전기사까지 차에서 내리게 하고 한참을 더 이야기하더군요.”

— 무슨 이야기를 나눴답니까.

“저는 헬기에 탑승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김 회장이 탑승하자마자 ‘이종찬씨하고는 웬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까’ 하고 물었죠. 김 회장이 ‘응. 정리할 이야기가 있어서 …, 아니 정치하는 친구들은 말야 믿기가 어려워’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종찬씨는 회고록에서 김 회장의 정치 참여 만류를 위해 29일에 힐튼 호텔로 찾아가서 만났다고 했는데 김 회장의 대선 참여 의사가 보도된 25일 아침에도 장시간 김 회장과 대화를 했습니다. 제가 직접 목도한 거니까요.”

— 광주에서는 심야에 서 원장님을 통해서 대선 출마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는데요.

“그랬죠. 한 중앙일간지의 보도가 나간 날이라 타 언론사들이 갑자기 광주에 몰려왔어요. 그 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러 광주까지 따라온 거죠. 기자들이 힘들게 따라붙길래 김 회장의 의견을 물어서 기자들에게 저녁에 숙소인 신양파크 호텔에서 맥주 한잔 하면서 보자고 했어요. 그 후로 저는 저대로, 김 회장은 김 회장대로 일정을 마치고 밤 10시가 다 돼서야 호텔에서 김 회장을 만났어요. 김 회장에게 ‘기자들 만나셔야죠’ 했더니 ‘안 만나면 안 되냐?’ 그러는 거예요. 기자들이 오전에 한 약속만 믿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도 김 회장은 ‘아, 나 안 나갈 건데 뭐(대선 출마 안한다)’ 그러는 거예요.”

—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필 그날은 저도 김 회장 지시로 이곳저곳을 바삐 다니느라 김 회장 곁에 있질 못했어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없었죠. 안 나갈 거라고 하시면서 김 회장이 잠시 혼자 생각하더니 저한테 ‘니가 가서 나 안 나간다고 얘기해, 그렇게 정리하지’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된 거예요. 기자들한테 가서 ‘김 회장께서는 정치를 안 하신다고 선을 그었다’고 했죠. 다음 날 아침 26일자 각 신문 1면에 서 아무개를 통해 김 회장이 대선 불출마를 밝혔다고 보도가 됐죠. 그러고는 광주에서 김포공항으로 가서 일본으로 출국을 한 거죠.”

— 본인 입으로는 출마한다, 안 한다는 말을 확실하게 하지 않고 일본으로 갔던 거네요.

“그랬죠. 그래서 김 회장의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고 29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본인 입으로 불출마를 선언한 거죠.”

— 29일까지 왜 뜸을 들이며 불출마 선언을 직접 하지 않았던 거죠.

“제가 일본으로 갈 때는 함께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다만 시간 벌기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예를 들면 누구누구가 지지한다, 참여한다는 구두 언질이 있었는데 그게 확답이 아직 안 오니까 기다릴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시간을 끌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중에 그쪽에서 부정적인 답이 왔다든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 김 회장의 출마 움직임 때문에 금융계로부터 압박을 심하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노태우 정부 시절 ‘금융계 황제’라고까지 불렸던 이원조씨가 제일은행을 시켜서 압박을 해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25일 광주에서 기자들한테 김 회장이 대선에 안 나간다고 얘기를 하고 대우그룹 기조실장한테 현지 상황을 전화로 전했어요. 그랬더니 기조실장이 ‘천만다행이다. 지금 은행에서 기조실장 방에 와서 점령군처럼 추가 담보를 내놓으라는 등 채권 확보를 시작했다. 아주 고약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는데 회장이 안 나간다고 선언을 했으면 이제 재무적인 문제는 해소가 되겠구나’ 하고 좋아하더군요.”

— 그 뒤로는 정치와 관련해 김 회장 가까이에 있을 일이 없었겠군요.

“그렇죠. 대선 직후 김 회장 집에서 행사가 있어서 김 회장을 만난 일이 있어요. 정치를 포기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져서 제가 ‘지난 번에는 너무 급조한 감이 없지 않다. 너무 급히 하지 말고 차분히 준비한다면 앞으로도 기회는 있지 않으냐, 아직 젊은 나이다’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김 회장의 정치 참여 움직임을 체크했던 정희자 여사

89년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부다페스트에 있는 국립미술관 앞에서 김 회장 부인 정희자 여사와 셋째아들 김선용씨와 기념촬영한 서 원장.

— 당시 김 회장 부인 정희자 여사의 반대도 심했다면서요.

“결사 반대였어요. 그것도 불출마 선언 원인 중에 하나가 됐을 거예요. 정희자 여사가 저한테도 수시로 확인을 했어요. ‘어떨 것 같냐, 김 회장이 정치에 나갈 것 같냐, 안 나갈 것 같냐’를, 수시로 확인했는데, 만약에 정치를 한다고 선언하면 당신이 별도의 기자회견을 해서라도 김 회장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국민들 앞에 이야기하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 김 회장은 정말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 건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았어요. 김 회장은 ‘내가 이번에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정치에 나가더라도 한국의 정치문화를 바꾸는 것을 나는 목표로 한다. 이번에 나가서 떨어져도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전기를 만든다면 내가 그동안 비즈니스해서 애국하는 기분으로 수출하고 다녔는데 이번에는 내가 다른 방법으로 애국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어요.”

— 정치 문화를 바꾼다?

“예를 들면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내가 당을 하게 되면 국회의원은 다 국민주택 규모 이하의 아파트로 내려가 살게 할 거다. 그 다음에 자동차는 1500cc 이하를 타게 할 거다. 우리 당 소속 국회의원은 호화음식점, 유흥음식점 이런 데 못 다니게 할 거다. 절대로 골프를 못하게 할 거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상당히 청교도적인, 지금 보면 김영란법보다 훨씬 앞선 생각이죠.”

— 너무 이상주의 아닌가요.

“아뇨. 그 양반은 리더십이 상당히 강해서 만약에 정치 참여를 했다면 그 당은 그렇게 갔을 거예요. 자기부터 내려가겠다고 그랬어요. ‘나도 25평 이하로 내려갈 거야. 방배동 집 정리하고 나부터 자동차 줄여 타고 할 거다.’ 그런 결심은 확고했어요.

— 대선 출마를 했다면 새한국당이 아니라 스스로 당을 만들어서 출마했을 거다?

“네, 스스로 당을 만들어서 했을 겁니다.”

— 김우중 회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가 엇갈리는데요.”

“극단의 평가가 있는데 저는 중립적 입장에 있는 학자들이 김 회장이 대우를 창업해서 문 닫을 때까지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었으면 해요. 대우가 국가에 손해를 끼쳤는지, 이익을 주었는지, 중립적인 학자들이 분석을 해 주었으면 해요. 지금의 평가는 너무 감정적, 인상 비평적 평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