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우월과 자기만족 그리고 자기도취로 치닫는 서울의 문화적 위상과 역량이 미래 한국을 위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지난날의 역사는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다”(전상인 교수)
⊙ 표준어를 구사하는 박근혜 대통령… 지역색에서 자유로운, 서울 중류층의 사고 지녀
⊙ ‘중앙(서울)과 지방’의 차별적 시선에는 ‘표준어와 사투리’의 편견이 내포
⊙ 18세기 이후 지방은 非 문명화된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
⊙ “지금의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을 닮아”… 서울은 사회적 위기에 둔감하고 시대소명에 무심
취재지원 : 孔聖閏 月刊朝鮮 인턴기자
⊙ 표준어를 구사하는 박근혜 대통령… 지역색에서 자유로운, 서울 중류층의 사고 지녀
⊙ ‘중앙(서울)과 지방’의 차별적 시선에는 ‘표준어와 사투리’의 편견이 내포
⊙ 18세기 이후 지방은 非 문명화된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
⊙ “지금의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을 닮아”… 서울은 사회적 위기에 둔감하고 시대소명에 무심
취재지원 : 孔聖閏 月刊朝鮮 인턴기자
- 수도 서울의 전경.
세종시가 들어서고 수도(首都) 서울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됐다고 느끼는 이는 별로 없다. 다시 말해 서울 중심의 헤게모니(hegemony)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진부한 얘기일지 모르나 지방의회가 처음 구성된 1991년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통치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방의 자생력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구체적으로 체감하기는 어렵다. 지방선거를 수차례 치르며 중앙과 지방이 길항(拮抗)과 견제의 관계를 모색한 사례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매머드 서울’, 즉 수도권에는 여전히 국민의 절반이 산다. 국론을 분열시킨 행정수도 이전 논란의 광풍 이후 ‘서울 패권주의’, ‘서울공화국’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지방분권’을 외치는 유무형의 동력(動力)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중앙과 싸우려 했던 지방 일부 도시(부산이나 대구, 광주로 상징되는)나 정치권의 노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나랏일’에 바빠서인지 그들을 통해 지방이, 지역의 현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몇 년 전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을 들끓게 했던 ‘동남권 신공항 이전’ 논란 역시 박근혜 정부 들어 조용하다. 지방이 중앙의 대형 이슈(국정원 댓글, 이석기 사태)에 매몰돼 동력을 잃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국미래학회 전 회장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전상인(全相仁)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은 비록 대구 출신이고 국회의원 지역구도 대구(달성군)였지만 지방색이 강하지 않은, 서울 사람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박 대통령은 초중등 과정 모두를 서울에서 보냈다. 대통령 입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역대 대통령이 자신의 출신지 방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번만은 달라졌다. 서울말, 그러니까 표준어를 구사하는 대통령이라고 해야 할까. 전 교수는 “표준말을 제대로 구사하는 대통령을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말한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대통령’이란 어떤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일까.
사투리와 지역색에서 자유로운, ‘인 서울(In Seoul)’의 지리적 자부심, 서울 중류층에 특화된 사고, 표준어 구사능력에서 오는 문화적 세련미를 오버랩시키는 대통령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전 교수의 말이다.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상경 1세대는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사이 지방 방언은 서울에서 점차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어요. 상경 1.5세대만 하더라도 서울말과 사투리가 흔했어요. ‘콩글리시’처럼 말이죠.”
하지만 “상경 2~3세대는 서울말이 자연스럽다. 이민 2~3세대에게 현지어가 모국어이듯. 게다가 일단 서울말이 상급(上級)으로 인식되면 방언의 소멸은 빨라진다”며 “결국 대구 출신 박 대통령의 서울말에는 한국 현대사의 언어사회학적 결산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고 전 교수는 강조한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서울말은 표준어로 상징되는 문화 자본과 중류층에 특화된 문화권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표준어와 사투리
표준어(서울)의 범주에서 사투리(지방)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주변부’에서 사용하는 말에 가깝다. 사투리는 교양을 갖추지 못한, 표준어에 못 미치는 ‘열등하고 하층계급에서 사용하는 말’로 폄하되기 십상이다. 서울말(중앙)의 일방적 담론만 있게 되면 지방의 현실은 보이지 않거나 왜곡되게 보인다.
소설가 박완서(朴婉緖·1931~2011) 선생은 생전 ‘서울말의 위력’에 대해 곧잘 이야기했다. 선생은 황해도 개성(경기도 개풍)에서 10km 떨어진 산간벽지에서 났지만 ‘이상하게도’ 말은 서울 표준말을 썼다고 한다.
“19세기 말, 과거시험에 번번이 실패해 생계가 곤궁해진 선조(先祖)가 부자 친척의 배려로 그곳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우리 할아버지의 의식은 서울 지향적이어서 매사에 우리가 마을 사람보다 지체 높은 양반이고, 또 서울 사람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했다”고 한다. 선생이 쓴 수필 <포스트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글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끼니 거를 걱정이나 안 하고 겨우겨우 사는 우리 형편이 마을 사람보다 나을 게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쓰는 말이라도 표나게 다른 말을 씀으로써 마을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확실하게 해두려는 것 같았다. 차별성이란 물론 우리가 그들보다 신분이 높다는 우월감이었다.
밖에 나가 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오는 그 고장 사투리와 억양이 집에서는 어떤 나쁜 짓보다 더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중략) 단지 서울 사람이라는 이유로 잘난 척을 하며 사는 할아버지를 닮아 나도 곧 내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 잘난 척이 하고 싶어졌고, 그 방법은 간단했다. 동무들하고 놀 때도 동무들이 쓰는 내 고장 말을 쓰지 않고 우리 집안에서만 통용되는 서울말을 쓰는 거였다.…>
선생은 “표나게 다른 언어를 씀으로써 나는 어느 틈에 동무들로부터 소외됐지만 나는 그들보다 한 단계 높다는 우월감 때문에 외톨이를 오히려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태어난 환경 때문에 너무 어린 나이에 내가 쓰는 말에 자부심을 느꼈을 뿐 아니라, 내 귀에 세련되지 못한 말을 쓰는 사람을 얕잡아보는 고약한 버릇까지 습득하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시골 아이들 틈에서 그들과 다른, 서울말을 쓰며 느꼈던 소외감과 우월감의 경험이 고스란히 작품 속 ‘언어의 힘’이 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박완서 선생은 평생 서울 표준어의 생생한 언어를 통해 서민적 삶의 층위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서울말만이 ‘잘난’ 것이 아니다. 작가들에게 서울은 강력한 문화자본의 도시다. 많은 출판사가 있고 문예지, 예술가들이 득시글득시글 댄다. 서울이라는 거대 문화자본의 범주에 들지 못하면 지방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작품의 질마저 의심받는다.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소설가 김원일(金源一) 선생은 경상도를 배경으로 한 전후(戰後)소설을 많이 남겼지만, 문단에 그의 이름이 회자(膾炙)하자 서울행을 택했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도 대구 《매일신문》 기자를 하다 등단 이후 서울에서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
김원일 선생은 “지방 출신 소설가인 나로서는 문화적 활동이 용이한 수도 서울에 정착하는 게 꿈이었고, 그 뒤 서울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는 긴장 아래 여태껏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 역시 사회적 활동을 접을 나이에 이르면 수도 서울을 떠날 예정”이라고 고백했다.
사투리 교정학원 성업 중
‘중앙(서울)과 지방’의 차별적 시선에는 ‘표준어와 사투리’의 편견이 내포한다. 거칠게 표현해, 사투리는 ‘표준어의 틀린 말’이란 냉혹한 시선이 깔려 있다. 사투리는 우스갯소리나 촌스러움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하고, 출신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자 감추고 싶은 원적(原籍)이기도 하다.
사투리를 모국어처럼 쓰다가 상경한 이들이 겪는 문화적 충격은 상당하다. 미디어가 발달하기 이전은 충격이 더 심했으리라. 요즘 서울 지역 대학 캠퍼스에서는 학생들의 사투리를 듣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유는 뭘까.
포항 출신으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인 백종경씨는 사투리를 ‘그 지역 사람들의 소속감을 강화해 주는 요소’라고 정의한다. 그는 “서울말 역시 서울 사람을 뭉치게 하는 일종의 약속”이라며 “서울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소속감을 공유하기 위해 서울말을 더 쓴다”고 했다. 그는 대학 신입생 시절, 씁쓸한 기억이 있다. 발표수업을 하다 지도교수가 그의 말을 막은 것이다. 사투리가 거슬린다는 이유였다. 백씨는 “이후 TV뉴스를 보면서 몇 달 동안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공적인 자리에선 의식적으로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반면 같은 과에 재학 중인 대전 출신의 백윤기씨는 “대전말과 서울말은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서울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올해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한 부산 출신 최준혁씨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사투리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스피치 학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드림스피치 아카데미 박상현 원장은 “주로 면접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아나운서 지망생이 사투리 교정수업을 문의하러 온다”고 했다. 학원생 중에는 아무래도 지방 출신이 많고 간혹 연변 출신 조선족이나 탈북 청년들도 있다고 귀띔한다. 박 원장의 말이다.
“사투리 교정은 개인차가 커요. 6개월 만에 완전히 서울말을 익히는 이도 있지만 10년을 연습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어요.”
한국스피치리더십센터 민영욱 원장은 “사투리 교정을 하려는 이들 중에는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도 많다”고 했다.
“사투리로 인해 전달력이 떨어지면 리더로서의 자격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자격지심도 생길 수 있어요.”
연세스피치학원의 박윤진 상담원은 “이번 달 개인수업을 신청한 이가 9명인데 이 중 3~4명이 사투리 교정을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수업가격은 회별 5만원에서 8만원. 학원에서 만난 부산이 고향이라는 한 20대 여성은 “사람들 앞에 나가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사투리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질까 겁이 났다. 사투리를 내 입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표준말은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
미디어와 통신기기가 발달하면서 서울과 지방의 시공간 격차는 과거보다 좁혀졌다. 표준어의 대세화(大勢化)라고 할까.
반면 사투리는 점차 일종의 문화적 낙인(烙印)처럼 비친다.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김경수(金慶洙) 명예교수는 “방언이나 사투리가 서울에서 존중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흥미소로서의 호기심 정도로 취급되지 않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표준어가 있고 방언이 있게 마련입니다. 표준어는 방송이나 공문서 등 공공언어로 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타당해요. 그렇다고 방언이 무시돼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말은 서울말대로, 지방말은 지방말대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느 것이 더 많이 쓰이거나 세력이 크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편을 가르고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자기 지역만 아는 소아적(小兒的) 편견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사회학자들은 표준어에 계급성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예를 들어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는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로 되어 있다.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표준어는 수도 서울에 사는 ‘중간계급의 말’이다. 역사적으로 서울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이전의 봉건적 양반 및 지주계급과 구별되는, 새로운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 중간계급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었다.(김보경의 <표준어의 망상, 사투리의 망상> 참조)
표준어가 서울의 중산층(중간계급)이 쓰는 언어가 되면서 표준어(서울말)와 교감할 기회를 상실한 사투리가 표준어 밑에 놓이게 된 것은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중앙대 김경수 교수는 “역설적으로 표준어와 사투리가 대등관계가 아닌 종속관계가 되면서, 표준어가 각 지방의 사투리를 통해 풍부해지고 유려해지는 확장성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각 지역 향우회 인사들의 소식을 전하는 《향우(鄕友)신문》 김혁연(金赫淵) 대표의 말이다. 이 신문은 서울에서 발행한다.
“서울로 상경한 1세대들의 아들딸인 상경 2~3세대들은 이미 서울에 토착화돼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해 자신과 거리를 둡니다.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유불리를 따집니다. 불리하다 싶으면 감추기도 해요. 아버지가 쓰는 사투리에 익숙하면서도 다소 비하하는, 이중성을 보여 씁쓸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박근혜 정부의 組閣과 서울 출신의 등용
지난해 3월 초 박근혜 정부가 국무총리를 비롯해 18명의 첫 내각을 인선했다. 언론은 인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출신 인사를 많이 발탁했다”는 점을 꼽았다. 특히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관료 출신이 많았다. 출신 고교별로 보니 경기고 5명, 서울고 4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들은 대개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세련된 ‘글로벌 인사’였다.
평준화 이전의 경기고와 경복고·서울고·용산고와 같은 서울 지역 명문고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향우신문》 김혁연 대표의 말이다.
“지난해 8월 우연히 서울고 앞을 지나다가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어요. 박근혜 정부 장관급 인사 4명이 서울고 출신이란 것이었습니다. 상경한 지방 출신들이 뭉치듯 서울 출신 역시 출신 학연으로 뭉치는데, 제가 보기에 충성도와 집중도는 오히려 지방 명문고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요.”
실제 그럴까. 옛 재경부 국장 출신 P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70년대 서울고를 졸업했다.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총리·장관 내정자가 서울고 출신입니다. 또 서남수 교육부 장관과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이 모두 서울고 출신입니다. 이 중 유·서·방 장관이 서울고 동기들입니다. 한 내각에 고교 동기동창 3명이 동시에 입성하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죠.”
그는 “평준화 이전 서울 지역 명문고의 위력은 경북고와 부산고, 광주일고, 대전고와 같은 지방 명문고의 위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이다.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은 아무래도 그 수가 제한되기 마련입니다. 또 문과 출신들이 주로 고급공무원을 꿈꾸며 상경하죠. 반면 서울 출신들은 자라고 성장한 ‘수도’라는 터전 위에서 인맥과 학맥을 고스란히 승계한다고 볼 수 있어요. 거대한 수도의 인프라 위에서 말이죠. 관료나 대기업 중에는 지방 출신들이 적지않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그 밑의 중견기업부터는 대개가 서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국세청장 출신의 민주당 이용섭(李庸燮) 의원이 지난해 9월 16일 정부 고위공무원단 1466명의 학력을 분석했는데, 서울 소재 고교 출신이 519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영남 고교 출신이 396명, 호남 249명, 충청 146명 순이었다. 이 중 경기고 출신이 44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고 25명, 경복고 22명으로 나타났다. 서울이 인구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학생 정원은 학교마다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이 지방 출신보다 똑똑해서일까.
비슷한 사례는 재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7월 기업경영평성과 평가사이트인 ‘CEO 스코어’가 2012년 연결 매출기준, 국내 500대 기업 현직(2013년 7월 15일 기준) 최고경영자(CEO) 668명을 오너경영인(142명)과 전문경영인(526명)으로 나눠 나이, 재직기간, 출신지역, 학력 등 이력사항을 전수조사한 결과, CEO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맥은 ‘경복고-고려대 경영학과’로 나타났다. 또 전문경영인의 최대 학맥은 ‘경기고-서울대 경영학과’였다.
또 출신 고교는 경기고가 47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고와 경복고가 각각 32명, 30명으로 톱3를 형성했다. 경북고는 17명, 부산고는 12명, 경남고는 11명 등 영남권 고교가 뒤를 이었다.
서울의 아파트 숲에서 자란 上京 2~3세대
취재 중 만난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서울 3대 공립학교(경기·경복·서울고)’ 출신 기업인 중에 유독 오너 집안이 많다고 알려졌다”며 “학교의 역사가 길다 보니 가업(家業)을 일으킨 동문이 다른 학교보다 많고, 자식들 역시 이들 학교에 다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은 상경 1세대가 서울에 정착한 뒤 성장한 상경 2~3세대가 다수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점과 이들이 수도(서울)를 발판으로 한국사회의 주축이 되었을 것이란 전제를 담는다. 아버지의 고향이 어디든 상경 2~3세대들의 고향은 서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아스팔트 위에서 뛰놀며 자란 세대다. 이들은 ‘고향’이라고 표현되는 출신지에서 자유롭다. 아버지의 방언보다 서울말이 익숙하다. “일단 서울말이 상급으로 인식되면 방언의 소멸은 빨라진다”(전상인 교수)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말’에 익숙하고 ‘서울 패권주의’에 둔감한 이들이, 상류층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들의 이해관계가 다수결의 원리(전국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서울에 살고 있다)로 결정되는 기형적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주로 인사파트에서 일했던 전직 대기업 임원 출신 이수명(李秀名)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수의 지방 출신 엘리트들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그들과 경쟁하는 다수의 서울 지역 명문학교들의 인맥과 비교할 수 없어요. 한국사회가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 관리하면서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울 명문 고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 ‘서울중심주의’가 깔렸고, 서울을 배경으로 도시성장의 역사도 담겨 있습니다. 상경 1세대들도 서울 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고, 2~3세대들은 자연스레 서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고에는 ‘서울이 잘되면 지방도 잘되고, 한국사회도 잘된다’는 이념이 뿌리박혀 있어요. 불평등한 사회통합의 생각이 은연중에 배어 있는 셈이죠.”
이번에는 《향우신문》 김혁연 대표의 말이다.
“냉혹하게 말해 지금의 지방을 저렇게 내버려둔 이가 누굽니까. 상경한 1세대들 아닙니까. 그들은 산업화를 위해 스스로 ‘서울 일극주의(一極主義)를 택했어요. 서울의 발전을 고향의 발전으로 간주했던 것이죠. 그들은 고향에 대한 귀속감이나 정서가 있다고 해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지금도 없어요.”
서울 소재 중견기업의 경우 유난히 ‘서울학연’을 따지는 오너들도 있고 겉으로 표시 안 내고 같은 대학과 같은 고교, 심지어 같은 초등학교를 인맥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기업도 있다. 이 같은 학연을 전근대적 현상이라 일축하기엔 학연의 사회적 의미가 매우 깊다.
다산 정약용,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라”
‘파리지앵’과 ‘뉴요커’처럼 서울 사람들의 자의식(自意識)은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그리고 그런 ‘서울내기’의 자의식이 중앙과 지방의 기형적 관계를 만든 것은 아닐까.
덕성여대 정진웅 교수(문화인류학)는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의 시대, 폭압적 개발 독재시대를 거치며 (기형적 관계가) 강화됐다. 특히 개발 독재시대에 들어 본격화하기 시작한 도시 중심의 돌진적(突進的) 자본주의화 과정이 권력과 물질적 부를 제외한 다른 가치들을 급속히 변방으로 몰아냈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북대 김영화(金永和) 교수(사회복지학)와 영남대 김태일(金泰鎰) 교수(정치외교학)는 “중세까지는 어떤 정치체제를 택하든 지방은 그 나름 독립되고 독자적인 의의를 가졌다”면서 “그러나 중세를 무너뜨리고 근대를 이룩하는 주도세력이 근대국가를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주권을 지닌 통일체로 만들려고 중앙이 여러 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고 강조한다.
학자들은 한국사회가 17세기 조선을 거치며 서울과 지방이 서로 다른 형태로 변모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부산교대 국어교육과 김준형(金埈亨) 교수는 “18세기 이후 한양사람들은 지방을 비(非)문명화된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이 자녀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는 유언을 남겼다. 1810년 전라도 강진 유배지에서 보낸 서신(<시이아가계(示二兒家誡)>)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중국은 문명이 일반화되어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구석의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 될 수 있고 현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도성의 문에서 몇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太古)의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더구나 멀고 먼 외딴곳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중략) 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정작 유배지에서 말년을 보낸 정약용은 지방을 ‘태고의 미개지’로 여겼다. 부산교대 김준형 교수는 “당시 서울과 지방은 더 이상 동시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는 등가적 존재가 아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박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야담집에 나타난 서울과 지방의 풍경> 참조).
“정약용은 서울에서 십 리(4km)만 벗어나면 원시시대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서울과 지방, 두 문명(문화)의 차이가 컸음을 말합니다. 그 이전에는 단지 서울과 지방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만 존재했는데, 이 시기가 오면 서울과 지방은 공간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뒤처진 상황이 빚어진 것입니다. 정약용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서울을 벗어나면 ‘무지렁이’가 된다고 본 것은 그런 상황을 말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 안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에 살아야만 사람으로서 존재가치를 가질 수 있고, 출세의 길도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혹은 서울 근처에 살지 못하면 중앙의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도 한계가 있고, 또한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던 탓입니다.”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사대부라면 반드시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심리이자 당시 지식인들이 가졌던 사유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절규와도 같은 것이었네요.
“그렇죠. 18세기 이후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된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에서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지식을 생존의 법칙으로 아는 지식인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벗어날 경우 그들은 더는 아무런 존재가치도 가질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8세기 한양과 21세기 서울
18세기 서울 양반들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지방을 배제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표적인 예가 과거시험이었다. 서울 출신 관료들은 지방을 배제하기 위해 서울의 일부 집단에 유익하도록 과거시험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준형 교수는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해도 시골선비는 조정에서 크게 빛을 발할 수 없었다.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출세길이 보장되지 않은 당후(堂后, 승정원 주서) 자리에나 지방 출신을 앉히곤 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정조 임금은 줄곧 자신의 곁에 머물렀던 지방 출신의 승지 이신회의 얼굴을 처음 본 게 그가 왕위에 등극한 지 16년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정조실록》 16년(1792년) 10월 29일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수십 년간 시종 반열에 있었는데 아직 얼굴도 몰랐다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닌가. 먼 시골 출신으로서 그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서울과 지방의 기형적 관계는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쓴 《정주진사제명안서(定州進士題名案序)》의 한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김 교수의 번역을 통해 소개한다.
<…항상 진사시험이 끝나면 국왕이 전(殿)에 나와 합격자를 발표한다. 합격한 200명은 모두 대궐의 뜰에 머리를 숙인 채 호명하는 순서를 듣고 절을 한 후에 교지(敎旨)를 받는다. 교지를 받으면 그것을 품에 안고서 종종걸음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궐을 나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 사는 사람은 차례대로 관리로 발탁되어 지방 수령, 혹은 목사에까지 이르게 된다. 선명한 의복과 좋은 말을 타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 삶을 마친다.
반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지방 사람은 곧바로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작 앵삼(鶯衫) 한 벌과 연건(軟巾) 한 정을 갖춰 입고 집안 어른께 절하고 성묘하고 이어서 친척들을 두루 찾아 인사를 드린다. 친척들은 모두 기뻐하고, 마을 사람들은 구경한다. 이런 일은 열흘이 돼서야 그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포의로 지내다가 산골짜기 구렁에 박혀 살다가 죽는다. 슬프도다.…>
김준형 교수는 “당시 지방 출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세력가의 추천을 받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요소였다”며 “조선 후기 야담이나 패설에서 소위 ‘시골선비 상경기’가 자주 보이는 것 역시 이런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조선 후기 야담집에는 권력을 가진 서울 재상의 집에 명함을 들이기 위해 벌어지는 시골선비의 촌극은 물론, 벼슬을 구걸해 자리를 얻었다가 좌절해 다시 낙향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작품이 여럿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우스꽝스러움’은 서울과 지방의 우열관계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김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서울과 지방의 거리감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 여기에 대해 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과거 방영된 TV 드라마나 방화(邦畵)를 보면, 서울에 사는 것 자체가 우월감으로 작동하고, 서울을 꿈꾸며 상경하는 모습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던가요?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됐는가를 묻는다면 저는 결단코 ‘문화의 집중도’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문화의 집중은 서울과 지방의 시간적 격차를 벌리고, 그에 따라 교양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문화를 통한 특화된 공간으로 서울을 계속 부각시키면서 서울의 말, 서울의 옷, 서울의 사고 등을 통해 저절로 지방과 격차를 두었던 거죠. 아마 이런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겠지요.”
둔감한 서울말 쓰는 권력자의 현실인식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지금의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을 닮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말부터 한양은 지방 인구 전입이 크게 늘고 상업의 발달이 가세하면서 19세기 초반 서울은 도시적 번영과 도회적 기분을 한껏 누렸다. 양반 인구의 급증 속에서도 요직은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는 도시 귀족 연줄이 거의 독점했다는 것이다. 이 세도가(勢道家)들은 제 나름의 문화자본을 배양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문화 권력을 형성했다.
전 교수는 “현실에 대한 지배세력의 안주는 당연히 개혁 의지의 실종을 낳았고 머지않아 이는 반드시 대가를 치렀다. 지방 사회의 저항과 국권 상실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18세기 중반 이중환(李重煥·1690~ 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사대부가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통해 다투는 서울은 인심이 고약하고 풍속이 고르지 않다고 썼습니다. 지역을 볼모로 권세를 부리고 양민을 괴롭히는데다가 자기들의 부덕한 행실을 감추는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들끼리 공유하던 서울의 문화 정치는 ‘성난 기운으로 피나게 싸우던 버릇’이 줄어든 자리에 ‘부드럽고 매끄러운 새로운 병통(病痛)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 이중환의 진단이었습니다. 요컨대 사회 갈등의 교양화 내지 문명화입니다.”
전 교수는 이를 ‘서울깍쟁이의 규범적 대세화’라고 명명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한국 정치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어떤 비장감이나 치열함이 보이지 않는다”며 “자기우월과 자기만족 그리고 자기도취로 치닫는 서울의 문화적 위상과 역량이 미래 한국을 위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지난날의 역사는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지금 서울은 그때의 한양을 닮아가고 있어요. 지방이 무너지고 민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서울이 사회적 위기감에 둔감하고 시대적 소명 의식에 무심한 듯 여겨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다를 바 없고, 강남 좌파나 그것의 신종 아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끄러운 서울말(표준어) 뒤에 서울의 위기를 보지 못하면 지방의 위기, 대한민국의 위기도 볼 수 없다. 지금의 서울이 산업화 시절, ‘서울 일극주의’ 산물의 결과라는 점에서, 서울이 지방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서울의 위기는 대한민국의 위기다. 어찌 보면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금의 지방은 서울이 생산한 것(중앙정부의 재원)에 의지해 살아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없으면 서울이고 지방이고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지방의 동력이 미약하고 서울의 이슈에 묻혀 그곳 사람들의 호소가, 절규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지방이 없으면 서울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 서울이 우리 사회의 위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새로운 병통’을 보태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봐야 한다.⊙
[인터뷰] 언론인 兪英哲의 주장
“지방이 서울 엘리트들을 겁 먹여야 서울편중 해소된다”
《영남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유영철씨는 “지금의 서울이 조선조의 한양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서울에 권력이 집중되고 희소성의 권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현역에서 물러나 언론정보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 전 국장은 또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등 모든 권력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며 “이들 권력은 인맥과 학맥·혼맥으로 얽혀 있다. 서울 출신이 우월하다는 것은 권력 자체이거나 권력에 가까이 있기에 자리가 비거나 생기면 지방보다 인맥·학맥·혼맥 면에서 먼저 우점종(優占種)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사색 당쟁이 극심했던 이유가 뭘까요. 과거를 통해 배출되는 인재는 넘쳐나는 데 비해 벼슬자리는 국한돼 붕당이 노골화되고 다른 붕당을 제거해야 자신들이 벼슬을 차지해 득세하는 모양이 되지 않았나요? 그토록 생사를 걸 만큼 치열해 결국은 외척이 등장해 권력을 싹쓸이하면서 매관매직도 성행하게 됐고, 결국 조선의 운명이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는 지경까지 이르렀지요.
또 서울 출신이 지방 출신보다 우월한 점은 뭘까요? 자리가 생겼을 때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점, 서울 출신이기에 권력이 집중된 서울에서 생경함 없이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는 점 등이 아닐까요?”
—지방언론은 서울공화국이란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지방언론도 겉으론 서울편중을 비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울 패권주의자들에 편입돼 이런 의식에 가담하게 됩니다. 실례로 입시철이 되면 지방의 고교는 서울대에 몇 명 진학시키느냐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지요.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더욱 분발해 서울대에 더 보내자’는 프레임으로 보도하는 것이죠. 지방의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지방 우대, 수도권 규제완화 반대를 외치나 그들의 실생활은 서울 중심이고, 당선과 동시에 서울 선민화(選民化)에 편입돼 버린다고 할 수 있어요. 어느 국회의원은 당선 이후 4년 내내 재경(在京) 동창회사무실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도 있지요. 그리고 다음 선거에 낙선하자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는 겁니다.”
—지방에 대한 관점과 관심이 점점 경직화되고 있어요. 서울의 위기 때문인지 지방의 위기가 안 보여요.
“한국사회의 권력 엘리트가 지방에 대해 갖는 관심은 이미 경직화되어 버렸어요. 이전 정권이 지방분권, 공공기관 이전 등의 제도 마련에 분주했으나 형식적인 성과에 그쳤지요. 실질적인 지방화, 서울편중 해소는 지방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서울의 엘리트들이 겁을 먹을 수 있도록, 서울의 권력 엘리트들이 정책을 수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방의 엘리트들도 소영웅주의에 함몰되어 있으니 수월하지 않을 겁니다.”
—몇 달 후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한국사회에서 지방민은 권력 참여 기회에서 소외된 계층입니다. 지방민으로 산다는 것은 소외를 체념하고 관조하며 사는 셈이죠. 지방선거가 다가와도 지방의 권익보다는 중앙의 권익(서울 패권주의와 서울 선민의식을 고양하는 권익)이 우선시되면, 이번에도 ‘소외된’ 지방선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중요하긴 해도 권력만 제외하면 서울보다 더 나은 여건들이 지방에는 널려 있는지도 몰라요. 그들이 아무리 선민의식을 갖고 서울 패권주의에 젖어 있더라도 그 같은 가치기준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내공이 있다면 지방은 살기 좋은 지역임이 틀림없겠죠.”⊙
진부한 얘기일지 모르나 지방의회가 처음 구성된 1991년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통치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방의 자생력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구체적으로 체감하기는 어렵다. 지방선거를 수차례 치르며 중앙과 지방이 길항(拮抗)과 견제의 관계를 모색한 사례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매머드 서울’, 즉 수도권에는 여전히 국민의 절반이 산다. 국론을 분열시킨 행정수도 이전 논란의 광풍 이후 ‘서울 패권주의’, ‘서울공화국’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지방분권’을 외치는 유무형의 동력(動力)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중앙과 싸우려 했던 지방 일부 도시(부산이나 대구, 광주로 상징되는)나 정치권의 노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나랏일’에 바빠서인지 그들을 통해 지방이, 지역의 현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몇 년 전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을 들끓게 했던 ‘동남권 신공항 이전’ 논란 역시 박근혜 정부 들어 조용하다. 지방이 중앙의 대형 이슈(국정원 댓글, 이석기 사태)에 매몰돼 동력을 잃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국미래학회 전 회장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전상인(全相仁)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은 비록 대구 출신이고 국회의원 지역구도 대구(달성군)였지만 지방색이 강하지 않은, 서울 사람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박 대통령은 초중등 과정 모두를 서울에서 보냈다. 대통령 입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역대 대통령이 자신의 출신지 방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번만은 달라졌다. 서울말, 그러니까 표준어를 구사하는 대통령이라고 해야 할까. 전 교수는 “표준말을 제대로 구사하는 대통령을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말한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대통령’이란 어떤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일까.
사투리와 지역색에서 자유로운, ‘인 서울(In Seoul)’의 지리적 자부심, 서울 중류층에 특화된 사고, 표준어 구사능력에서 오는 문화적 세련미를 오버랩시키는 대통령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전 교수의 말이다.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상경 1세대는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사이 지방 방언은 서울에서 점차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어요. 상경 1.5세대만 하더라도 서울말과 사투리가 흔했어요. ‘콩글리시’처럼 말이죠.”
하지만 “상경 2~3세대는 서울말이 자연스럽다. 이민 2~3세대에게 현지어가 모국어이듯. 게다가 일단 서울말이 상급(上級)으로 인식되면 방언의 소멸은 빨라진다”며 “결국 대구 출신 박 대통령의 서울말에는 한국 현대사의 언어사회학적 결산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고 전 교수는 강조한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서울말은 표준어로 상징되는 문화 자본과 중류층에 특화된 문화권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표준어와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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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말과 경상도 사투리를 비교한 만화. |
소설가 박완서(朴婉緖·1931~2011) 선생은 생전 ‘서울말의 위력’에 대해 곧잘 이야기했다. 선생은 황해도 개성(경기도 개풍)에서 10km 떨어진 산간벽지에서 났지만 ‘이상하게도’ 말은 서울 표준말을 썼다고 한다.
“19세기 말, 과거시험에 번번이 실패해 생계가 곤궁해진 선조(先祖)가 부자 친척의 배려로 그곳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우리 할아버지의 의식은 서울 지향적이어서 매사에 우리가 마을 사람보다 지체 높은 양반이고, 또 서울 사람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했다”고 한다. 선생이 쓴 수필 <포스트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글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끼니 거를 걱정이나 안 하고 겨우겨우 사는 우리 형편이 마을 사람보다 나을 게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쓰는 말이라도 표나게 다른 말을 씀으로써 마을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확실하게 해두려는 것 같았다. 차별성이란 물론 우리가 그들보다 신분이 높다는 우월감이었다.
밖에 나가 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오는 그 고장 사투리와 억양이 집에서는 어떤 나쁜 짓보다 더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중략) 단지 서울 사람이라는 이유로 잘난 척을 하며 사는 할아버지를 닮아 나도 곧 내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 잘난 척이 하고 싶어졌고, 그 방법은 간단했다. 동무들하고 놀 때도 동무들이 쓰는 내 고장 말을 쓰지 않고 우리 집안에서만 통용되는 서울말을 쓰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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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故 박완서 선생. |
그러나 어린 시절 시골 아이들 틈에서 그들과 다른, 서울말을 쓰며 느꼈던 소외감과 우월감의 경험이 고스란히 작품 속 ‘언어의 힘’이 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박완서 선생은 평생 서울 표준어의 생생한 언어를 통해 서민적 삶의 층위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서울말만이 ‘잘난’ 것이 아니다. 작가들에게 서울은 강력한 문화자본의 도시다. 많은 출판사가 있고 문예지, 예술가들이 득시글득시글 댄다. 서울이라는 거대 문화자본의 범주에 들지 못하면 지방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작품의 질마저 의심받는다.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소설가 김원일(金源一) 선생은 경상도를 배경으로 한 전후(戰後)소설을 많이 남겼지만, 문단에 그의 이름이 회자(膾炙)하자 서울행을 택했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도 대구 《매일신문》 기자를 하다 등단 이후 서울에서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
김원일 선생은 “지방 출신 소설가인 나로서는 문화적 활동이 용이한 수도 서울에 정착하는 게 꿈이었고, 그 뒤 서울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는 긴장 아래 여태껏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 역시 사회적 활동을 접을 나이에 이르면 수도 서울을 떠날 예정”이라고 고백했다.
사투리 교정학원 성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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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in) 서울’은 거대한 문화자본을 향유하는 곳이다. 서울 국제음악제를 엿새간 펼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내부 모습. |
사투리를 모국어처럼 쓰다가 상경한 이들이 겪는 문화적 충격은 상당하다. 미디어가 발달하기 이전은 충격이 더 심했으리라. 요즘 서울 지역 대학 캠퍼스에서는 학생들의 사투리를 듣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유는 뭘까.
포항 출신으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인 백종경씨는 사투리를 ‘그 지역 사람들의 소속감을 강화해 주는 요소’라고 정의한다. 그는 “서울말 역시 서울 사람을 뭉치게 하는 일종의 약속”이라며 “서울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소속감을 공유하기 위해 서울말을 더 쓴다”고 했다. 그는 대학 신입생 시절, 씁쓸한 기억이 있다. 발표수업을 하다 지도교수가 그의 말을 막은 것이다. 사투리가 거슬린다는 이유였다. 백씨는 “이후 TV뉴스를 보면서 몇 달 동안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공적인 자리에선 의식적으로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반면 같은 과에 재학 중인 대전 출신의 백윤기씨는 “대전말과 서울말은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서울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올해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한 부산 출신 최준혁씨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사투리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스피치 학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드림스피치 아카데미 박상현 원장은 “주로 면접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아나운서 지망생이 사투리 교정수업을 문의하러 온다”고 했다. 학원생 중에는 아무래도 지방 출신이 많고 간혹 연변 출신 조선족이나 탈북 청년들도 있다고 귀띔한다. 박 원장의 말이다.
“사투리 교정은 개인차가 커요. 6개월 만에 완전히 서울말을 익히는 이도 있지만 10년을 연습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어요.”
한국스피치리더십센터 민영욱 원장은 “사투리 교정을 하려는 이들 중에는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도 많다”고 했다.
“사투리로 인해 전달력이 떨어지면 리더로서의 자격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자격지심도 생길 수 있어요.”
연세스피치학원의 박윤진 상담원은 “이번 달 개인수업을 신청한 이가 9명인데 이 중 3~4명이 사투리 교정을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수업가격은 회별 5만원에서 8만원. 학원에서 만난 부산이 고향이라는 한 20대 여성은 “사람들 앞에 나가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사투리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질까 겁이 났다. 사투리를 내 입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 서울 사람을 부르는 다양한 말 ‘서울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똑똑하지만 야멸찬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서울깍쟁이는 겻불도 안 쬔다’는 말이 나올 정도. 원래 깍쟁이는 서울의 땅꾼(뱀 장수)을 일컫는 말인데 점차 서울내기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이런 서울깍쟁이의 말투가 타지방 사람이 보기에 입에 살살 녹는다고 해서 ‘깍쟁이 젤리’라는 말도 1960년대에 유행했다. 다른 표현으로 ‘서울 다마내기(양파)’라는 말도 있다. 서울 사람은 타지방보다 겉과 속이 똑같다는 의미다. 행동과 말이 딱 부러진다는 의미. 또 서울 사람의 행태를 비꼬는 말 중에 ‘개트림’이란 말이 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면서 트림은 오지게 한다고 해서 ‘개트림’이란 말이 나왔다. 허세를 부린다는 말이다. 서울토박이 중앙회 강영선 부회장은 5·16 당시 군 훈련소에서 처음 배운 규율이 ‘팔자걸음 고치기’였다고 한다. 그는 “교관들이 ‘서울 병력은 팔자걸음으로 걸으면 안 된다’며 걸음걸이부터 고치라고 했다”고 말했다. 서울 양반들의 팔자걸음이 서울 토박이에게는 익숙했던 모양이다.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려는 것을 빗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 남대문만 가면 그만’이라는 속담도 있다. |
표준말은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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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 이후 지방의 동력이 중앙의 대형이슈에 매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TK·PK 지역을 들끓게 했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규탄 집회 모습(2011년 4월 8일 대구 동성로). |
반면 사투리는 점차 일종의 문화적 낙인(烙印)처럼 비친다.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김경수(金慶洙) 명예교수는 “방언이나 사투리가 서울에서 존중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흥미소로서의 호기심 정도로 취급되지 않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표준어가 있고 방언이 있게 마련입니다. 표준어는 방송이나 공문서 등 공공언어로 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타당해요. 그렇다고 방언이 무시돼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말은 서울말대로, 지방말은 지방말대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느 것이 더 많이 쓰이거나 세력이 크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편을 가르고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자기 지역만 아는 소아적(小兒的) 편견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사회학자들은 표준어에 계급성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예를 들어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는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로 되어 있다.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표준어는 수도 서울에 사는 ‘중간계급의 말’이다. 역사적으로 서울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이전의 봉건적 양반 및 지주계급과 구별되는, 새로운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 중간계급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었다.(김보경의 <표준어의 망상, 사투리의 망상> 참조)
표준어가 서울의 중산층(중간계급)이 쓰는 언어가 되면서 표준어(서울말)와 교감할 기회를 상실한 사투리가 표준어 밑에 놓이게 된 것은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중앙대 김경수 교수는 “역설적으로 표준어와 사투리가 대등관계가 아닌 종속관계가 되면서, 표준어가 각 지방의 사투리를 통해 풍부해지고 유려해지는 확장성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각 지역 향우회 인사들의 소식을 전하는 《향우(鄕友)신문》 김혁연(金赫淵) 대표의 말이다. 이 신문은 서울에서 발행한다.
“서울로 상경한 1세대들의 아들딸인 상경 2~3세대들은 이미 서울에 토착화돼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해 자신과 거리를 둡니다.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유불리를 따집니다. 불리하다 싶으면 감추기도 해요. 아버지가 쓰는 사투리에 익숙하면서도 다소 비하하는, 이중성을 보여 씁쓸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박근혜 정부의 組閣과 서울 출신의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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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서울지하철 모습. 전국 인구 4분의 1 이상이 서울에 모여 산다. 서울 사람의 사고에는 ‘서울이 잘되면 지방도 잘된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다. |
평준화 이전의 경기고와 경복고·서울고·용산고와 같은 서울 지역 명문고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향우신문》 김혁연 대표의 말이다.
“지난해 8월 우연히 서울고 앞을 지나다가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어요. 박근혜 정부 장관급 인사 4명이 서울고 출신이란 것이었습니다. 상경한 지방 출신들이 뭉치듯 서울 출신 역시 출신 학연으로 뭉치는데, 제가 보기에 충성도와 집중도는 오히려 지방 명문고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요.”
실제 그럴까. 옛 재경부 국장 출신 P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70년대 서울고를 졸업했다.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총리·장관 내정자가 서울고 출신입니다. 또 서남수 교육부 장관과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이 모두 서울고 출신입니다. 이 중 유·서·방 장관이 서울고 동기들입니다. 한 내각에 고교 동기동창 3명이 동시에 입성하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죠.”
그는 “평준화 이전 서울 지역 명문고의 위력은 경북고와 부산고, 광주일고, 대전고와 같은 지방 명문고의 위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이다.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은 아무래도 그 수가 제한되기 마련입니다. 또 문과 출신들이 주로 고급공무원을 꿈꾸며 상경하죠. 반면 서울 출신들은 자라고 성장한 ‘수도’라는 터전 위에서 인맥과 학맥을 고스란히 승계한다고 볼 수 있어요. 거대한 수도의 인프라 위에서 말이죠. 관료나 대기업 중에는 지방 출신들이 적지않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그 밑의 중견기업부터는 대개가 서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국세청장 출신의 민주당 이용섭(李庸燮) 의원이 지난해 9월 16일 정부 고위공무원단 1466명의 학력을 분석했는데, 서울 소재 고교 출신이 519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영남 고교 출신이 396명, 호남 249명, 충청 146명 순이었다. 이 중 경기고 출신이 44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고 25명, 경복고 22명으로 나타났다. 서울이 인구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학생 정원은 학교마다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이 지방 출신보다 똑똑해서일까.
비슷한 사례는 재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7월 기업경영평성과 평가사이트인 ‘CEO 스코어’가 2012년 연결 매출기준, 국내 500대 기업 현직(2013년 7월 15일 기준) 최고경영자(CEO) 668명을 오너경영인(142명)과 전문경영인(526명)으로 나눠 나이, 재직기간, 출신지역, 학력 등 이력사항을 전수조사한 결과, CEO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맥은 ‘경복고-고려대 경영학과’로 나타났다. 또 전문경영인의 최대 학맥은 ‘경기고-서울대 경영학과’였다.
또 출신 고교는 경기고가 47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고와 경복고가 각각 32명, 30명으로 톱3를 형성했다. 경북고는 17명, 부산고는 12명, 경남고는 11명 등 영남권 고교가 뒤를 이었다.
서울의 아파트 숲에서 자란 上京 2~3세대
취재 중 만난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서울 3대 공립학교(경기·경복·서울고)’ 출신 기업인 중에 유독 오너 집안이 많다고 알려졌다”며 “학교의 역사가 길다 보니 가업(家業)을 일으킨 동문이 다른 학교보다 많고, 자식들 역시 이들 학교에 다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은 상경 1세대가 서울에 정착한 뒤 성장한 상경 2~3세대가 다수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점과 이들이 수도(서울)를 발판으로 한국사회의 주축이 되었을 것이란 전제를 담는다. 아버지의 고향이 어디든 상경 2~3세대들의 고향은 서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아스팔트 위에서 뛰놀며 자란 세대다. 이들은 ‘고향’이라고 표현되는 출신지에서 자유롭다. 아버지의 방언보다 서울말이 익숙하다. “일단 서울말이 상급으로 인식되면 방언의 소멸은 빨라진다”(전상인 교수)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말’에 익숙하고 ‘서울 패권주의’에 둔감한 이들이, 상류층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들의 이해관계가 다수결의 원리(전국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서울에 살고 있다)로 결정되는 기형적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주로 인사파트에서 일했던 전직 대기업 임원 출신 이수명(李秀名)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수의 지방 출신 엘리트들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그들과 경쟁하는 다수의 서울 지역 명문학교들의 인맥과 비교할 수 없어요. 한국사회가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 관리하면서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울 명문 고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 ‘서울중심주의’가 깔렸고, 서울을 배경으로 도시성장의 역사도 담겨 있습니다. 상경 1세대들도 서울 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고, 2~3세대들은 자연스레 서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고에는 ‘서울이 잘되면 지방도 잘되고, 한국사회도 잘된다’는 이념이 뿌리박혀 있어요. 불평등한 사회통합의 생각이 은연중에 배어 있는 셈이죠.”
이번에는 《향우신문》 김혁연 대표의 말이다.
“냉혹하게 말해 지금의 지방을 저렇게 내버려둔 이가 누굽니까. 상경한 1세대들 아닙니까. 그들은 산업화를 위해 스스로 ‘서울 일극주의(一極主義)를 택했어요. 서울의 발전을 고향의 발전으로 간주했던 것이죠. 그들은 고향에 대한 귀속감이나 정서가 있다고 해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지금도 없어요.”
서울 소재 중견기업의 경우 유난히 ‘서울학연’을 따지는 오너들도 있고 겉으로 표시 안 내고 같은 대학과 같은 고교, 심지어 같은 초등학교를 인맥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기업도 있다. 이 같은 학연을 전근대적 현상이라 일축하기엔 학연의 사회적 의미가 매우 깊다.
다산 정약용,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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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선생은 서울에서 10리(4km)만 벗어나도 원시시대가 펼쳐진다고 했다. 사진은 정약용의 <면학문> 발문. |
덕성여대 정진웅 교수(문화인류학)는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의 시대, 폭압적 개발 독재시대를 거치며 (기형적 관계가) 강화됐다. 특히 개발 독재시대에 들어 본격화하기 시작한 도시 중심의 돌진적(突進的) 자본주의화 과정이 권력과 물질적 부를 제외한 다른 가치들을 급속히 변방으로 몰아냈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북대 김영화(金永和) 교수(사회복지학)와 영남대 김태일(金泰鎰) 교수(정치외교학)는 “중세까지는 어떤 정치체제를 택하든 지방은 그 나름 독립되고 독자적인 의의를 가졌다”면서 “그러나 중세를 무너뜨리고 근대를 이룩하는 주도세력이 근대국가를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주권을 지닌 통일체로 만들려고 중앙이 여러 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고 강조한다.
학자들은 한국사회가 17세기 조선을 거치며 서울과 지방이 서로 다른 형태로 변모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부산교대 국어교육과 김준형(金埈亨) 교수는 “18세기 이후 한양사람들은 지방을 비(非)문명화된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이 자녀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는 유언을 남겼다. 1810년 전라도 강진 유배지에서 보낸 서신(<시이아가계(示二兒家誡)>)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중국은 문명이 일반화되어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구석의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 될 수 있고 현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도성의 문에서 몇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太古)의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더구나 멀고 먼 외딴곳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중략) 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정작 유배지에서 말년을 보낸 정약용은 지방을 ‘태고의 미개지’로 여겼다. 부산교대 김준형 교수는 “당시 서울과 지방은 더 이상 동시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는 등가적 존재가 아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박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야담집에 나타난 서울과 지방의 풍경> 참조).
“정약용은 서울에서 십 리(4km)만 벗어나면 원시시대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서울과 지방, 두 문명(문화)의 차이가 컸음을 말합니다. 그 이전에는 단지 서울과 지방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만 존재했는데, 이 시기가 오면 서울과 지방은 공간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뒤처진 상황이 빚어진 것입니다. 정약용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서울을 벗어나면 ‘무지렁이’가 된다고 본 것은 그런 상황을 말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 안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에 살아야만 사람으로서 존재가치를 가질 수 있고, 출세의 길도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혹은 서울 근처에 살지 못하면 중앙의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도 한계가 있고, 또한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던 탓입니다.”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사대부라면 반드시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심리이자 당시 지식인들이 가졌던 사유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절규와도 같은 것이었네요.
“그렇죠. 18세기 이후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된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에서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지식을 생존의 법칙으로 아는 지식인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벗어날 경우 그들은 더는 아무런 존재가치도 가질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8세기 한양과 21세기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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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대 김준형 교수. |
김준형 교수는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해도 시골선비는 조정에서 크게 빛을 발할 수 없었다.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출세길이 보장되지 않은 당후(堂后, 승정원 주서) 자리에나 지방 출신을 앉히곤 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정조 임금은 줄곧 자신의 곁에 머물렀던 지방 출신의 승지 이신회의 얼굴을 처음 본 게 그가 왕위에 등극한 지 16년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정조실록》 16년(1792년) 10월 29일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수십 년간 시종 반열에 있었는데 아직 얼굴도 몰랐다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닌가. 먼 시골 출신으로서 그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서울과 지방의 기형적 관계는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쓴 《정주진사제명안서(定州進士題名案序)》의 한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김 교수의 번역을 통해 소개한다.
<…항상 진사시험이 끝나면 국왕이 전(殿)에 나와 합격자를 발표한다. 합격한 200명은 모두 대궐의 뜰에 머리를 숙인 채 호명하는 순서를 듣고 절을 한 후에 교지(敎旨)를 받는다. 교지를 받으면 그것을 품에 안고서 종종걸음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궐을 나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 사는 사람은 차례대로 관리로 발탁되어 지방 수령, 혹은 목사에까지 이르게 된다. 선명한 의복과 좋은 말을 타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 삶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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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북촌 한옥마을 전경. 18세기 서울 양반들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지방을 배제했다. 지방 출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울에 올라가 세력가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
김준형 교수는 “당시 지방 출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세력가의 추천을 받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요소였다”며 “조선 후기 야담이나 패설에서 소위 ‘시골선비 상경기’가 자주 보이는 것 역시 이런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조선 후기 야담집에는 권력을 가진 서울 재상의 집에 명함을 들이기 위해 벌어지는 시골선비의 촌극은 물론, 벼슬을 구걸해 자리를 얻었다가 좌절해 다시 낙향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작품이 여럿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우스꽝스러움’은 서울과 지방의 우열관계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김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서울과 지방의 거리감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 여기에 대해 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과거 방영된 TV 드라마나 방화(邦畵)를 보면, 서울에 사는 것 자체가 우월감으로 작동하고, 서울을 꿈꾸며 상경하는 모습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던가요?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됐는가를 묻는다면 저는 결단코 ‘문화의 집중도’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문화의 집중은 서울과 지방의 시간적 격차를 벌리고, 그에 따라 교양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문화를 통한 특화된 공간으로 서울을 계속 부각시키면서 서울의 말, 서울의 옷, 서울의 사고 등을 통해 저절로 지방과 격차를 두었던 거죠. 아마 이런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겠지요.”
둔감한 서울말 쓰는 권력자의 현실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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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전상인 교수. |
전 교수는 “현실에 대한 지배세력의 안주는 당연히 개혁 의지의 실종을 낳았고 머지않아 이는 반드시 대가를 치렀다. 지방 사회의 저항과 국권 상실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18세기 중반 이중환(李重煥·1690~ 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사대부가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통해 다투는 서울은 인심이 고약하고 풍속이 고르지 않다고 썼습니다. 지역을 볼모로 권세를 부리고 양민을 괴롭히는데다가 자기들의 부덕한 행실을 감추는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들끼리 공유하던 서울의 문화 정치는 ‘성난 기운으로 피나게 싸우던 버릇’이 줄어든 자리에 ‘부드럽고 매끄러운 새로운 병통(病痛)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 이중환의 진단이었습니다. 요컨대 사회 갈등의 교양화 내지 문명화입니다.”
전 교수는 이를 ‘서울깍쟁이의 규범적 대세화’라고 명명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한국 정치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어떤 비장감이나 치열함이 보이지 않는다”며 “자기우월과 자기만족 그리고 자기도취로 치닫는 서울의 문화적 위상과 역량이 미래 한국을 위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지난날의 역사는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지금 서울은 그때의 한양을 닮아가고 있어요. 지방이 무너지고 민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서울이 사회적 위기감에 둔감하고 시대적 소명 의식에 무심한 듯 여겨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다를 바 없고, 강남 좌파나 그것의 신종 아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끄러운 서울말(표준어) 뒤에 서울의 위기를 보지 못하면 지방의 위기, 대한민국의 위기도 볼 수 없다. 지금의 서울이 산업화 시절, ‘서울 일극주의’ 산물의 결과라는 점에서, 서울이 지방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서울의 위기는 대한민국의 위기다. 어찌 보면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금의 지방은 서울이 생산한 것(중앙정부의 재원)에 의지해 살아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없으면 서울이고 지방이고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지방의 동력이 미약하고 서울의 이슈에 묻혀 그곳 사람들의 호소가, 절규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지방이 없으면 서울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 서울이 우리 사회의 위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새로운 병통’을 보태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봐야 한다.⊙
[인터뷰] 언론인 兪英哲의 주장
“지방이 서울 엘리트들을 겁 먹여야 서울편중 해소된다”
《영남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유영철씨는 “지금의 서울이 조선조의 한양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서울에 권력이 집중되고 희소성의 권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현역에서 물러나 언론정보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유 전 국장은 또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등 모든 권력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며 “이들 권력은 인맥과 학맥·혼맥으로 얽혀 있다. 서울 출신이 우월하다는 것은 권력 자체이거나 권력에 가까이 있기에 자리가 비거나 생기면 지방보다 인맥·학맥·혼맥 면에서 먼저 우점종(優占種)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사색 당쟁이 극심했던 이유가 뭘까요. 과거를 통해 배출되는 인재는 넘쳐나는 데 비해 벼슬자리는 국한돼 붕당이 노골화되고 다른 붕당을 제거해야 자신들이 벼슬을 차지해 득세하는 모양이 되지 않았나요? 그토록 생사를 걸 만큼 치열해 결국은 외척이 등장해 권력을 싹쓸이하면서 매관매직도 성행하게 됐고, 결국 조선의 운명이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는 지경까지 이르렀지요.
또 서울 출신이 지방 출신보다 우월한 점은 뭘까요? 자리가 생겼을 때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점, 서울 출신이기에 권력이 집중된 서울에서 생경함 없이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는 점 등이 아닐까요?”
—지방언론은 서울공화국이란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지방언론도 겉으론 서울편중을 비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울 패권주의자들에 편입돼 이런 의식에 가담하게 됩니다. 실례로 입시철이 되면 지방의 고교는 서울대에 몇 명 진학시키느냐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지요.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더욱 분발해 서울대에 더 보내자’는 프레임으로 보도하는 것이죠. 지방의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지방 우대, 수도권 규제완화 반대를 외치나 그들의 실생활은 서울 중심이고, 당선과 동시에 서울 선민화(選民化)에 편입돼 버린다고 할 수 있어요. 어느 국회의원은 당선 이후 4년 내내 재경(在京) 동창회사무실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도 있지요. 그리고 다음 선거에 낙선하자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는 겁니다.”
—지방에 대한 관점과 관심이 점점 경직화되고 있어요. 서울의 위기 때문인지 지방의 위기가 안 보여요.
“한국사회의 권력 엘리트가 지방에 대해 갖는 관심은 이미 경직화되어 버렸어요. 이전 정권이 지방분권, 공공기관 이전 등의 제도 마련에 분주했으나 형식적인 성과에 그쳤지요. 실질적인 지방화, 서울편중 해소는 지방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서울의 엘리트들이 겁을 먹을 수 있도록, 서울의 권력 엘리트들이 정책을 수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방의 엘리트들도 소영웅주의에 함몰되어 있으니 수월하지 않을 겁니다.”
—몇 달 후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한국사회에서 지방민은 권력 참여 기회에서 소외된 계층입니다. 지방민으로 산다는 것은 소외를 체념하고 관조하며 사는 셈이죠. 지방선거가 다가와도 지방의 권익보다는 중앙의 권익(서울 패권주의와 서울 선민의식을 고양하는 권익)이 우선시되면, 이번에도 ‘소외된’ 지방선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중요하긴 해도 권력만 제외하면 서울보다 더 나은 여건들이 지방에는 널려 있는지도 몰라요. 그들이 아무리 선민의식을 갖고 서울 패권주의에 젖어 있더라도 그 같은 가치기준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내공이 있다면 지방은 살기 좋은 지역임이 틀림없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