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진단] 행정안전부의 새 주소 시행, 불교탄압 의도 있나? : 월간조선

“도로명 주소(‘동·洞/리·里’ 중심의 지번 대신 ‘대로·大路/로·路/길’ 등 도로명으로 표시되는 주소)를 시행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과 불교를 없애려는 것입니다.”

새 주소 시행을 이틀 앞둔 지난 7월 27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새 도로명 주소, 전면폐기 촉구 토론회’가 열렸다. ‘우리 땅 이름 지키기’ 시민모임이 주최한 이 토론회에는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조계종 문화결사위원회 등의 단체와 학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도로명 주소 시행의 전면 재검토를 주장했다.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면 절 이름이 들어 있는 길 이름뿐 아니라 4만여 개의 전국 ‘동·리’ 이름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새 도로명주소, 전면 폐기 촉구 토론회>에 참석한 단국대 조명래 교수.

토론자로 참석한 단국대 조명래 교수는 도로명 주소 시행에 대해 “정부가 일방적·편의적으로만 일을 추진한 것”이라며 “서구의 도로 중심 주소 체계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라고 말했다. 관할 부처인 행정안전부 지방재정세제국 새 주소 담당 김기영(金奇暎) 과장은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에 대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많은 사람이 검토해 온 사안을 너무 한 측면으로만 몰아가는 것 같다”고 반박했다. 동명(洞名)이 사라진다는 말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면서 “기존의 동네 이름은 토지를 근간으로 하는 문서에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새 주소 사업은 1997년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에서 추진한 사업 중 하나였다. 당시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2002년 한·일 월드컵과 같은 국제행사를 열기 위해서는 복잡한 주소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결정, 사업을 추진했다. 지자체에서 직접 예산을 편성해서 시행하도록 했다. 도로명 시행 민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도로명 주소 사업은 예산을 쏟은 만큼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 사업인지라 추진력이 약했다”고 전했다. 그의 말이다.

“반대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실정상 작은 도로가 워낙 많다 보니 도로구간을 체계적으로 정비한다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죠. 도로명 주소를 추진하고자 하는 공감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생활주소(법정 주소가 아닌 지역 사람들 간에 통용되는 주소)로만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미적대던 중 IMF 위기 때는 이 사업이 실업구제 대책의 일환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지도가 잘 구축되어 있지만 그때는 정확한 지도가 없었다. 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길과 건물을 확인하는 작업에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도로명 주소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건물에는 건물번호를, 도로에는 도로이름을’이라는 캐치 프레이즈 아래 2011년까지 제대로 된 도로명 주소를 구축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올해 드디어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정부는 지난 7월 29일 ‘새 도로명 주소’를 전국에 공시했다. 지금은 법정주소 확정절차가 진행중이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경우 기존의 ‘종로구 세종로 81-3’에서 ‘종로구 세종대로 175’로, 예술의전당의 경우 기존 ‘서초구 서초동 700’에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으로 바뀐다. 국민들이 새 시스템에 적응하는 기간을 두기 위해 2013년 12월 31일까지 기존의 지번 주소와 병행 사용하기로 했다. 행안부는 “올해 6월 30일로 끝났던 도로명 변경신청 기간을 올해 말까지로 연장하는 개정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민등록증과 공적 장부는 올해 말까지 정리할 계획이며, 유통·통신 및 금융권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연계해 각종 청구서에도 도로명 주소를 찍어 발송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 새 주소의 장점 몰라

‘화계사길’ 대신 ‘덕릉로’로 바꿔 달린 도로명판.

그러나 도로명 주소 시행을 앞두고 여러 문제점이 불거지고 있다. 법정동명인 전국 4만여 개 지명이 사라진다는 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특히 불교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새 주소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절 이름이 들어간 전국 150여 개 길이 사라졌기 때문. 서울 성북구에 있는 ‘보문사길’은 ‘지봉로’로, 성북구 ‘흥천사길’은 ‘아리랑로’로, 강북구 ‘화계사길’은 ‘덕릉로’(德陵路)로 바뀌었다. 대구시 ‘동화사길’과 달성군의 ‘화장사길’에는 각각 ‘팔공산로’와 ‘비슬로’라는 새 도로명이 붙었다. 불교계에서는 “새 주소 사업이 이 정부의 종교편향적 사고에서 나온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화계사길이 덕릉로로 바뀌면서 논란이 된 서울 강북구 수유동을 찾았다.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의 60% 이상은 주소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중 대다수는 새 도로명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화계사길이라고 하면 모두 다 쉽게 찾아오는데 굳이 생소한 ‘덕릉로’로 바꿔야 했느냐”는 것이었다.

화계사길 상가에서 만난 한 50대 자영업자의 이야기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담겨 있는 지명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름을 붙여야 하죠. 덕흥대원군묘(덕릉)를 쓴다는데, 그가 역사적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덕흥대원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화계사길에서 만난 주민이 ‘덕릉로’란 도로명에 반대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40년 넘게 살았다는 60대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년에 도로명판을 새로 달 때부터 불만이 많았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름을 살려야지요. 덕릉로라고 하면 어떻게 알고 여기를 찾아오겠습니까.”

주민들은 오랜 세월 익숙해진 이름 대신 새 이름이 붙은 것 자체에 대해 불만이었다. 새 주소 도입 취지는 뭔지 몰랐다. 홍보가 되지 않은 것이다. 행안부 관계자도 “도로명 주소 도입의 취지와 이용법을 알리는 방식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동시에 “국민들이 새 주소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홍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도 주장했다.

화계사와 비슷한 사례가 성북구에도 있었다. 성북구청 새 주소 사업 담당자 말에 따르면 개운사길이 김성수(金性洙)의 호인 인촌길로 고시된 후 항일단체와 개운사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성북구청이 행안부에 질의를 했다. 처음에는 행안부가 변경할 수 없다고 했다가 지난 6월초 구청에 개운사길로 환원을 허용해 준다는 회신을 보냈다고 한다.

강북구 600개 도로명 15개로 줄여

화계중학교를 거쳐 삼각산 화계사로 들어가는 입구.

성북구청이 인촌길을 개운사길로 다시 환원한 데 대해 강북구청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강북구청 부동산정보과 김수부(金洙夫) 과장은 “그렇게 모든 입장을 다 들어준다면 도로명 주소 체계 시행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말했다.

현행법은 도로명을 부여하고 변경할 때, 2개 이상의 시·도에 걸쳐 있는 경우 행안부장관이, 2개 이상의 자치구에 걸쳐 있는 경우 서울시장이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강북구청 관계자의 말이다.

“덕릉로는 저희 강북구뿐만 아니라 노원구, 도봉구,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쳐 있는 약 11km의 매우 긴 도로입니다. 시·도에 걸쳐 있는 길이라 도로명 변경은 행안부장관이 결정하도록 되어 있지요. 기존의 화계사길 구간은 덕릉로가 시작되는 구간입니다. 만약 강북구 화계사길 구간만 이름을 그대로 둘 경우 덕릉로는 1길부터 51길까지는 없고, 그 다음 도봉구에서 이어지는 52길부터 시작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죠.”

―도로명 주소법이 개정된 2009년 이후 강북구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저희 구는 600개가 넘던 길 이름을 총 15개로 줄였어요. 예전에는 길 이름이 너무 많아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죠. 이를 몇 개의 길로 단순화해 숫자만 붙이니 길 찾기가 훨씬 쉬워지더군요.”

―주민들의 동의를 충분히 얻은 건가요.

“도로명은 부구청장이 위원장으로 있는 도로명주소위원회에서 심의하고 주민들에게 고지한 뒤 이의신청을 받아 최종 결정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관심이 적었습니다. 작년 하반기 도로명 시설물을 설치하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군요. 지난 3월부터 6월까지는 주민들에게 개별적으로 새 주소를 통보했습니다. 그 기간에 새 도로명 주소에 이견이 있는 분에 한해 정정요청서를 받았습니다. 도로명 주소법상 행안부 관할 도로는 해당 지역 주민의 5분의 1이 동의할 경우 부여된 도로명을 다시 변경할 수 있거든요.”

8월 10일 광화문광장, 행안부에서 주최한 새주소 찾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화계사 측에서 이의를 제기한 건 언제였나요.

“6월 초쯤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거의 변경신청 기간이 끝나 가는 때였어요. 변경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신청일로부터 최소 70일의 기간이 필요한데, 화계사길 문제가 나온 시점은 시간적으로 너무 늦어 무리였습니다. 화계사길은 행안부 관할 도로라 저희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요. ‘덕릉로’를 주소로 사용하는 사람 수가 4개 자치구 합쳐 총 6만명이 넘는데, 그중 5분의 1의 동의를 받는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가능하면 화계사 측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김수부 과장은 “주소 사업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입장을 일일이 다 들어줄 수 없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의 말이다.

“도로명 변경요청의 발단은 성북구 개운사길에서 시작된 거라고 봅니다. 한 번 들어준 사례가 있으니 여기저기서 서로 바꿔 달라고 아우성인 거죠. 언론은 행안부가 도로명 변경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나오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 측 입장을 들어주게 되면 또 기독교 측에서 불만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지요. 3년 전쯤인가 화계사길 도로 명판을 한신대 신학대학원 학생 중 하나가 떼어 버린 일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종교 간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도로명 변경이 종교 문제로 비화된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2009년 6월 서울 대치동에 있는 한 교회가 ‘삼성로’를 ‘칼빈길’로 변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관할구청은 2~3차례에 걸친 심의를 했지만 그 과정에 종교 간 다툼이 일어나 변경이 보류됐다.

“새 주소 경제효과 4조3000억원”

위기관리연구소 위금숙 소장.

정부가 추진한 새 주소 사업의 취지는 ‘위치 찾기의 편리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지난 14년 동안 준비해 온 이 사업은 시행하자마자 도로명 결정과 구간을 나누는 문제로 커다란 벽에 부딪혀 있다. 기자는 도로 구간이 나뉘는 방식과 도로명 주소 체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위기관리연구소를 찾아가 위금숙(魏金淑) 소장을 만났다. 이 연구소는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총 12개 구의 도로명 주소 컨설팅을 맡고 있다. 위금숙 소장의 말이다.

“저희는 도로명 중심의 새 주소가 정착될 경우, 그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매년 4조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서구 선진국은 물론 저개발 국가인 에티오피아까지 모두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길을 찾는 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위 소장의 설명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익숙하던 것을 버리고 바꾼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전자정부를 도입하던 때도 다들 반대했습니다. 정부가 가진 정보를 국민들에게 인터넷으로 제공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죠.”

그는 먼저 도로명 주소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그 시스템을 알아야 된다고 말했다. 주소의 기능이 무엇인지 돌이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게나 집의 위치를 알릴 때 주소를 말하기보다는 주변의 큰 건물이나 관공서를 중심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거미줄 같은 지번 주소로는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새 주소는 길 이름이 곧 주소가 됩니다. 주소 자체인 도로명과 건물 번호만 가지고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죠.”

위 소장은 “지금은 도로명 주소 사용법을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며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불편한 일이 많겠지만 후대에는 매년 4조3000억원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만큼 편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로명 주소는 도로 폭에 따라 대로(8차로 이상) 로(2~7차로), 길(1차로 이하)로 구분하며, 종(從)으로 난 도로는 남쪽에서부터, 횡(橫)으로 난 도로는 서쪽에서부터 1길(좌측·홀수길), 2길(우측·짝수길) 순서로 도로명을 정한다. 꺾어지는 구간이 아니면 최대한 같은 길 이름을 쓰고, 구간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번호를 붙인다. 결국 거리를 예측하게 하는 기능까지 하는 것이다. 건물 주소는 길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건물에는 홀수 번호를 붙이고 우측에 있는 건물에는 짝수 번호를 붙인다. 이 번호 역시 확장성을 감안해 거리를 예측할 수 있는 숫자다.

“하나의 길을 자치구별로 끊어서 주민들이 원하는 이름을 붙이게 하면 안 되느냐”는 질문에 위 소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런 식으로 구간을 끊다 보면 원래의 도로명 주소 취지에서 벗어납니다. 만약에 차를 타고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직선대로를 타고 가다가 계속 직진하는 구간인데도 다른 길로 갈아타야 한다고 하면,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길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불편이 생깁니다. 일본도 지번 중심에서 도로명 주소로 바꿨습니다.”

새 도로명 주소로 혼선을 빚고 있는 서초대로 1길.

정치적 압력에 흔들린 도로 이름 붙이기 원칙

서울 종로구 필운동 부근 도로 곳곳에 붙어있는 새 도로명판.

하지만 정부의 원칙과 달리 도로 구간을 잘못 나눠 놓은 곳도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도시계획 전문가는 서초중앙로와 잠원로를 예로 들었다. 이 두 도로는 꺾이지 않고 직선으로 이어진 구간이 있는데도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지자체별 도로명주소위원회가 도로명을 결정할 때 정치적인 압력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일반 서민들은 도로명을 변경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며 “정치적 이유로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용산구 청파로가 대표적이다. 청파로의 일부 구간은 새로 도로명을 정비하면서 원칙에 따라 효창원로가 됐다. 그러자 이 지역의 한 구의원이 그 구간을 청파로로 바꾸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청파로가 없어지면 청파동에 기반을 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도시계획 전문가는 “전국에 이 같은 사례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지역 의원들은 주민들에게 해당 동네를 없애려 한다는 식의 루머를 퍼뜨려 여론을 왜곡해서 몰아 갑니다. 그러면 도로명 주소의 체계를 잘 모르는 주민들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는 식이죠. 다행히 용산구 청파로의 경우 책임감 있는 도로명주소위원회 위원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위원들은 권력집단의 압력에 못 이겨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건물에 붙어있는 새주소.

용산구청 도로명 주소 담당 박주영(朴珠榮) 주임은 “청파동 문제로 솔직히 소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구하자 “이미 효창원로로 제대로 고시가 끝난 상황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답을 회피했다.

서초대로 1길도 도로명을 정할 때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동작대로는 서초구와 동작구에 걸친 길이다. 서초대로 1길로 부여된 구간은 동작대로와 연결된 구간이다. 원칙대로 한다면 동작대로 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길에 동작대로를 붙이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주민들의 의견을 의식해 서초구 도로명주소위원회에서 서초대로 1길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서초구청은 이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서초대로 1길은 서초대로 3길에서 간접 연결되는 도로라면서 한 개 구간 정도는 꼭 ‘서초대로’에 붙어 있지 않아도 그 길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 말에 따르면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길 이름을 서초대로 1길로 할 경우 이 주소를 찾기 위해서는, 서초대로를 찾은 뒤 서초대로 3길을 따라가다 방배천로라는 길을 건너뛰어 서초대로 1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익명의 도시계획 전문가는 “주민들은 도로명이 바뀌는 것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거나 내려갈까봐 민감해 한다”면서 “행안부나 자치단체가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일관된 원칙에 따라 일을 추진해야 된다”고 말했다.

화계사, “화계사로 고집 않지만 덕릉은 맞지 않아”

원칙은 중요하다. 그 원칙으로 인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화계사 측의 입장은 어떨까. 화계사 앞길은 기존의 ‘화계사길’에서 ‘덕릉로’로 바뀌었다. 이 길은 한신대학교대학원 입구에서 번동사거리에 이르는 1.8km 왕복 4차선 도로로, 화계(華溪)라는 계곡을 복개하면서 서울시가 화계사길로 명명했다.

화계사는 중종(中宗) 17년(1522년) 삼각산 부허동(浮虛洞)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계라는 동네 이름을 땄다고 한다. 적어도 화계라는 지명(地名)의 역사가 480년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작년 10월 구청 직원이 나와서 ‘화계사길’ 대신 ‘덕릉로’란 명판으로 바꿔 단 것이다.

화계사 교무국장 동재(東材) 스님은 “‘덕릉’이란 이름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왜 이런 허구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냐”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고 말했다. 덕릉은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宣祖)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墓)를 덕릉이라고 불렀다. 동재스님의 계속된 설명이다.

“조선시대에 왕이 아닌 사람의 묘를 ‘릉’이라 부르는 걸 금했습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가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분이죠. 선조는 자기 아버지 묘를 덕릉으로 부르기 위해서 묘 옆으로 난 고개를 억지로 덕릉고개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 고개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덕릉고개를 지나왔다고 하면 술과 맛있는 음식을 주어 보냈고, 덕흥대원군의 묘를 지나서 왔다고 하면 실컷 두들겨 패서 보냈다고 해요.

혹자는 그깟 지명 하나를 가지고 역사 왜곡까지 들먹일 것까지 있느냐고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덕릉’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기정사실화되었다면 그거야말로 역사 왜곡 아닌가요.”

화계사 측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경기도 별내면에 있는 지명을 왜 서울에 있는 강북구에서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총 11km나 되는 덕릉로 구간을 놓고 볼 때 화계사와 덕릉고개는 각각 덕릉로 양 끝 지점에 있다. 두 번째는 덕릉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지명을 바꾸는 절차가 너무 행정 편의적이라는 것이다. 동재 스님은 “우리는 단순히 화계사란 이름만 고집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덕릉이란 이름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는 전국적으로 사찰 이름이 들어간 불교식 도로명이 일반도로명으로 바뀌는 사례가 150~200개 사이인 것으로 추산했다.

▣ 새주소〔도로명주소〕업무편람

·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특정 종교시설
예) ○○교회길, ○○절길 등

· 추상명사를 사용한 도로명
예) 힘찬길, 빛찬길, 금빛길, 소망길, 희망길, 새싹길, 근면길, 자조길, 정직길, 멋샘길, 빛샘길, 믿음길, 정든길, 바른맘길 등

· 안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는 도로명
국도, 지방도 등의 관리번호나 생존인물이 이름(호), 이전 가능성이 있는 (공공)시설물의 명칭 등 예) 1번국도길, 시청길, 도청길, 동부서뒤1길, 동사무소길, 읍사무소길, 등기소길, 전화국길, ~초등(중)학교길, ~고교길, 백화점길 등

· 주민의 반감을 유발하는 도로명
예) 황천길, 사정길, 할렘가, 야동길, 부고길 등

· 너무 긴 도로명
기초번호와 일련번호를 제외하고 가급적 6자 이내 (10자 초과 금지) 예) 농협시지부서쪽길, ○○쪽으로 가는길 등

· 보안시설을 이용한 도로명
예) ○○부대길, ○○발전소길 등

발행: 행정안전부 지방세분석과/기준일 : 2009.09.27

역사적으로 불교 관련 지명 많아

예를 들어, 대구시 달서구에 있는 용화사길은 노이길로 바뀌었다. 용화사 양복문 총무는 “어느 날 보니까 용화사길이 아닌 노이길이라는 도로명판이 붙어 있었다”면서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바꿔버려 황당했다”는 말을 전했다. ‘노이길’은 옆 동네인 노이동의 이름을 따서 지은 길 이름이다.

“아무리 동네 이름이 노이동이라 해도 용화사로 들어오는 입구는 오래 전부터 계속 용화사길로 불러 왔지 않습니까. 저희 스님이 구청에 가서 항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구청 사람들이 혹시 종교가 다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겠습니까.”

이렇게 절 이름이 들어간 길 이름이 사라지게 된 것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특정 종교시설은 도로명으로 부적합하다’는 새 주소 업무 편람의 규정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불교계의 종교편향 발언에 대응해 행안부 김기영 과장은 “도로명 변경 절차에 따라 주민의견 수렴 등을 거쳐 일반도로명에서 종교명칭을 담은 도로명으로 변경된 사례도 다수 있다”면서 설명자료를 냈다. ‘초지로→전등사로, 동광길→보문로3길, 인촌로23길→개운사길, 월평하원로→법화로, 새한4길→미륵길, 배낭골로→가나안로 등.’ 김 과장은 “이 같은 사례가 정확하진 않으나 수십 개가 더 있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업무편람에서 제시한 기준은 2009년에 도로명을 재정비하면서, 오히려 어느 종교로든 편향되지 않기 위해 둔 규정이었습니다.” 행안부는 그러나 “일반도로명에서 종교명칭을 담은 도로명으로 개명한 곳을 모두 조사하려면 전국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자료를 수집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와 불교계의 대립에 대해 우리글 진흥원 양영채(梁泳彩) 사무총장은 “예로부터 불교식 지명이 많았기 때문에 불교계 사람들이 특히 많이 반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에 있는 ‘동’과 시골에 있는 ‘리’를 합치면 4만개가 넘는다. 모두 오랜 역사를 거치며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계가 지명에 더욱 애착을 갖는 이유는 절 이름이 꼭 들어가지 않더라도 옛 지명 중에 불교식 유래가 담긴 것들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예로 서울의 ‘미아동’만 하더라도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이어 만든 불교식 지명이다.

기자는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結社·불교의 혁신운동)추진본부’가 수집했다는 현황 자료를 얻기 위해 담당자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러나 결사본부 측은 자료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답변했다. 결사본부 사무총장 혜일(慧日) 스님은 “우리는 단순히 사찰명이 들어간 길 이름 문제만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사라지는 4만여 개 지명 이름을 살리자는 것”이라며 “그것이 해결되면 절 이름이 들어간 도로명도 자연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불교계가 처음 주장에서 후퇴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