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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들여다보기

北 영화는 남한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親北인사, 비전향 장기수 통해 남한 비방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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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박정희 대통령’ 역 맡은 배우, 회식에서 남한 노래 불러 혁명화 교육
⊙ 〈이름 없는 영웅들〉 작가 리진우, 비밀누설죄로 ‘요덕수용소’ 끌려가 죽음
⊙ 해외 동포 매수용 선전영화에 동원된 윤이상, 최홍희
북한 다부작 예술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의 한 장면. 사진=인터넷 캡처
  최근 들어 ‘북한’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공작〉 〈PMC〉 〈스윙키즈〉 등의 영화가 대거 개봉됐다. 2018년 칸 국제영화제에서는 영화 〈공작〉이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심야상영)’ 부문에 초청돼 화제를 모았다. 〈공작〉은 1990년대에 북핵(北核)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대북(對北)사업가로 위장해 북한에 침투한 실존 안기부 첩보요원 ‘흑금성’(암호명)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 실화를 토대로 한 만큼 서울과 중국 베이징, 평양을 비롯한 다양한 장소와, 북한에 침투한 남한 공작원이란 신선함에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싼 10년간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다뤘다.
 
  북한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나오고 있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소재가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북한 영화 속에서도 남한의 모습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있을까.
 
  북한에도 남한을 소재로 한 영화가 꽤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4·19혁명을 다룬 〈성장의 길에서〉와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는 부른다〉 〈님을 위한 행진곡〉, 첩보와 선전·선동을 위한 〈이름 없는 영웅들〉 〈민족과 운명〉 등 여러 장르의 다양한 예술영화가 있다. 주제도 다르고 배우도 다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있다. 남한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영화에서는 남북을 대립적인 단순 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에서는 장르에 상관없이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썩어빠진 자본주의로 묘사된다. 등장인물은 친북(親北) 인사들 이외에는 모두 야비하고 권모술수가 능한 인간으로 표현됐다.
 
  북한이 남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든 것은 1980년대부터다. 체제 선전을 위해서다. 북한은 영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남한의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이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 김정일이다. 1973년 김정일이 당 선전담당 비서로 올라오면서부터다. 김정일이 영화광(映畵狂)이라는 것은 남한에서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김정일은 영화 제작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단편적인 예로 당대 최고의 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부부를 납치해 평양에 데려간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김정일은 1978년 홍콩에서 최은희를 납치해 북한으로 끌고 갔다. 같은 해 신 감독도 납북됐다.
 
  최씨는 201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이 굉장한 영화광이었냐’는 질문에 “영화를 좋아해서 세계 영화를 1만5000여 편 소장하고 있었어요. 한국 작품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런 영화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게 아니라 혼자만 보는 것이었는데, 혼자 보면서 자유세계에 대해 공부하는 것 같았어요. 개방하려고 많은 애를 쓰는 것 같았는데, 모든 여건이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北, 최고의 첩보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
 
  리진우가 쓴 〈이름 없는 영웅들〉(20부작)은 1981년 평양의 조선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영화다. 6·25전쟁 중인 1952년 말 미군이 대규모 ‘신공세’를 준비하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적후에서 그들의 전략적 기도를 파탄시킴으로써 전쟁 승리에 기여하는 공작원들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북한의 대표적인 다부작 (多部作) 첩보영화다.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김정일은 영화 제작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정일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수만 달러가 제작비로 쓰였다. 당시 북한 상황으로 봤을 때 엄청난 투자였다. 그 덕분에 영화는 완성도가 뛰어났다. 반면 그 이면에 북한 인권과 관련한 슬픈 이야기도 숨어 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리진우는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나서 요덕수용소로 끌려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요덕 정치범수용소는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다. 정식 명칭은 ‘15호 관리소’다. 북한에는 요덕수용소 외에 정치범수용소가 몇 군데 더 있지만, 대외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요덕 정치범수용소다. 규모가 크다. 그리고 다른 지역 수용소는 석방이 불가능한 완전통제구역만 있지만, 요덕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 외에 간혹 석방되기도 하는 혁명화구역도 있다.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증언이 그렇다.
 
  리진우 작가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이유는 표면상으로 비밀을 누설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說)이 있지만 내부 모함에 의해 잡혀갔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당시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서 리진우 작가는 김정일의 지시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문서고에 보관된 전쟁 당시 비밀문서와 북한의 첩보 활동에 관한 문서를 열람했다. 이게 독(毒)이었다. 리 작가는 문서고에서 본 정보를 바탕으로 사실에 가깝게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영화는 더욱 생동감이 넘쳤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에 10부작을 목표로 시작한 영화는 10부를 추가해 20부작이 됐다.
 
 
  월북 미군들 北 영화 출연
 
  영화가 끝난 직후 북한 영화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리진우 작가가 당 중앙위원회 문서고에서 본 내용을 사람들에게 발설하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중 하나가 6·25전쟁이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라는 것이다. 물론 확인된 바 없는 소문이었지만, 이로 인해 리진우 작가는 요덕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다.
 
  북한 출신 영화감독 정성산씨는 이에 대해 “당시 영화계에서는 큰 사건이었다. 외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내부에서는 당시 최익규 중앙당 선전선동 부부장 눈 밖에 나서 숙청당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정 감독은 “〈이름 없는 영웅들〉은 북한 당해 최고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촬영장에 많이 다니며 놀란 것은 월북한 미군들의 연기였다. 이들이 연기를 너무 잘해서 평양에 팬들이 엄청 많았다”고 말했다.
 
  특히 이 영화는 1960년대 탈영해 북한으로 넘어간 주한미군 세 명이 조연으로 열연해 더욱 인기를 끌었다. 찰스 젠킨스, 제임스 드레스녹, 래리 A. 앱셔 등 세 월북 미군은 이 영화에서 각각 미8군 소속 방첩장교 ‘칼’, 미국인 기업가 ‘아서’, 영국 첩보원 ‘루이스’ 역을 맡았다. 이들 중 젠킨스는 2004년 미국과 일본 등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북한에서 나와 아내의 고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가시마(佐渡島)에 정착했다. 그는 1978년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소가 히토미와 1980년 결혼해 두 딸을 뒀으며, 아내 소가는 2002년 10월 일본으로 먼저 돌아왔다. 그 외 앱셔와 드레스녹은 북한에서 사망했다.
 
  정 감독은 “당시 이 영화 제작자와 출연자들이 ‘공화국 영웅’ 칭호와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영화에 출연하면 무조건 훈장을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영화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탈출… 북한 영화계 침체
 
  북한의 영화 수준은 신상옥 감독의 납북 전과 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1978년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씨를 북한으로 납치했다. 신 감독은 납북 이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평양에 ‘신필름’을 재건했다. 신필름은 신 감독이 남한에서 만든 기업형 영화사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심청전〉 〈불가사리〉 등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특히 최씨는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한국인 최초의 해외 영화제 수상 기록을 남겼다.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신 감독 부부는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 후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이 사건 후 김정일은 신필름 소속 연출가와 작가, 배우들을 모두 ‘혁명화’ 교육장으로 보냈다. 혁명화는 북한식 인간 개조 방식의 하나로, 현재도 북한의 인사 정책에 자주 활용된다. 인간 개조는 북한이 정권 수립 초기부터 중요하게 추진한 사업인데, 쉽게 얘기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 혁명사상을 주입시켜 당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새 인간형으로 개조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세뇌’라고 일컫는 북한 사상 정책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탈출 사건으로 인해 북한 영화계는 한동안 침체기였다. 정 감독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했다. “두 사람이 탈출한 소식을 듣고 화가 난 김정일이 신필름을 해체하고 소속돼 있는 사람들을 모두 혁명화 교육장으로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화계는 정말 살얼음판 같았다”며 “그러다 1990년대 초 북한 영화계에 큰 바람이 불면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말했다.
 
 
 
北의 해외 동포 회유 선동에 동원된 친북 인사들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탈출 이후 침체돼 있는 북한 영화계는 1990년대 초 봄을 맞게 된다. 1992년 북한 가요 ‘내 나라 제일로 좋아’가 나오자, 김정일은 이 노래에 맞는 영화를 제작하라고 지시한다. 김정일의 지시로 창작된 다부작 예술 〈민족과 운명〉은 1992년 문학예술종합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특히 영화는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다양한 인물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사상을 깊이 있게 해명하는 방향으로 의도된 야심작이다.
 
  북한은 이 영화를 철저히 해외 동포용 선전물로 제작했다. 북한은 해외 망명자들을 선동하기 위해 친북 인사들을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최덕신(崔德新), 최홍희(崔泓熙), 윤이상(尹伊桑) 등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이름을 바꾸어 등장한다. 영화 〈민족과 운명〉은 ‘최현덕’(1~4부), ‘차홍기’(6~10부), ‘리정모’(11~13부), ‘윤상민’(5부, 6~10부) 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 친북 인사거나 월북자, 비전향 장기수 등을 다루면서 남한의 사회 현실을 비방·풍자하는 효과를 노렸다.
 
  영화 〈민족과 운명〉은 애초 100부 제작이 계획이었다. 이를 10편 단위로 수출하고 자연스럽게 남한으로 흘러 들어가게 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해외 시청자들에게 외면받았다. 애초 북한은 해외 선전용 영화를 기획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주목받지 못하자 국내 선전용으로 주제를 바꿨다. 한편 〈민족과 운명〉(1992~2003년 제작)은 총 62부작인 다부작 예술영화다. 이는 다시 소주제별로 등장인물과 시대배경 등을 달리하며 다양한 내용의 영상물로 나뉘어 있다.
 
 
  박정희 역 맡은 배우는 재일동포 출신
 
북한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에 출연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역을 맡은 배우 리문호. 사진=인터넷 캡처
  영화에는 친북 인사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비교적 자세히 다뤘지만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기 전 김정일은 남한 대통령들에 대해 자세히 표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영화 제작팀은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 박 전 대통령 관련 영화와 드라마까지 시청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 배역을 맡은 북한의 배우 김윤홍은 재일교포 출신이다. 김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 1학년 때 북한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평양의 한 선전대에서 생활하다 지인의 추천으로 단역배우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자란 김씨는 한국어 발음이 서툴러 영화마다 일본 순사 역을 맡았다.
 
  북한 영화계에 종사하다 탈북한 김진모(가명)씨는 “김윤홍 배우가 한국어 발음이 이상해 초반에는 많이 고생했다. 그러다 〈민족과 운명〉에 박정희 전 대통령 배역으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하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 역을 맡은 배우 김윤홍. 사진=인터넷 캡처
  김씨는 영화 방영 당시 연기를 잘한다는 평(評)을 받으며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노래를 잘못 불러서 지방으로 혁명화 교육을 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을 마치고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두 회식하는 자리가 있었다. 다들 술을 마시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김씨는 노래를 부르겠다며 마이크를 잡고 남한 노래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두 노래는 영화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이 사실은 김정일에게도 보고됐다. 대로(大怒)한 김정일은 김윤홍의 배우 자격을 박탈하고 지방으로 혁명화 교육을 보냈다. 2년간 혁명화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긴 했지만 김씨는 그 후로 제대로 된 배역을 맡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영화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두 번 정도 등장하지만 큰 비중이 없었다. 전 전 대통령의 배역을 맡은 리문호 배우는 머리가 벗겨진 전 전 대통령을 묘사하기 위해 반(半)삭발 투혼까지 발휘했다.
 
  이 영화는 또한 북한 주민들에게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박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다른 영화에도 많이 등장해 북한 주민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이었다.
 
  김씨는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북한에서 민주투사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대통령이 돼서 평양을 방문해 놀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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