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사 27기 임관 후 국내 최초로 미국의 ‘혼합공기(헬륨+산소) 심해잠수과정’ 이수
⊙ 1994년 9월 제네바 미·북 합의 직전 해군무관 파견… 1995년 11월 로버트 김 처음 만나
⊙ 로버트 김, ‘K파일’ 만들어 백 대령에게 전달… ‘북한의 내부소요 진압용 무기구입’
첩보도 포함
⊙ 미국, 북 상어급 잠수함 침투 정보를 미·북 관계 악화 우려해 사전에 알고도 쉬쉬했나?
⊙ 이스라엘, 거물 스파이 조너선 폴라드 구명 위해 지도자들 총력전… 김영삼 정부는 외면
⊙ 1994년 9월 제네바 미·북 합의 직전 해군무관 파견… 1995년 11월 로버트 김 처음 만나
⊙ 로버트 김, ‘K파일’ 만들어 백 대령에게 전달… ‘북한의 내부소요 진압용 무기구입’
첩보도 포함
⊙ 미국, 북 상어급 잠수함 침투 정보를 미·북 관계 악화 우려해 사전에 알고도 쉬쉬했나?
⊙ 이스라엘, 거물 스파이 조너선 폴라드 구명 위해 지도자들 총력전… 김영삼 정부는 외면
지난 9월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샹제리제센터 컨벤션홀.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는 200명이 넘는 재미동포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76)의 가족과 후원자들로 붐볐다. 스파이 혐의로 옥살이를 했던 김씨가 2005년 10월 출소부터 10년가량 후원자에게 쓴 편지 425통 가운데 80여 통을 추려 책으로 펴낸 것이다.
김씨가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있다 보니 우리말도 어눌해지고 컴퓨터도 잘 다룰 줄 몰랐는데, 많은 분의 도움으로 고국에 ‘러브레터’를 매주 보낼 수 있었고, 책으로까지 선보이게 됐다”고 인사말을 할 때, 건너편 테이블의 한 노신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로버트 김을 응시하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자 로버트 김은 노신사에게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노신사는 ‘로버트 김 사건’의 빌미가 됐던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白東一·68)씨였다. 로버트 김의 부인 장명희(張明熙)씨, 동생인 김성곤(金星坤) 전 국회의원(한민족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로버트 김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 박성현(朴成鉉) 청해엔지니어링 대표 등이 이들의 재회를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미국 비자신청 두 차례나 거부당해”
지난 9월 22일, 백동일 예비역 대령(해군 정보여단장 역임)을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사건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의 해군무관이었다. 1996년 9월 24일 로버트 김이 주미 대사관 국군의 날 리셉션장에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당한 지 20주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1978년 미국 해군정보국(ONI)에 들어가 그곳에서 19년간 손꼽히는 베테랑 정보분석가로 일하던 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북한 관련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형을 받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백동일 대령의 운명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나가던 해군의 정보장교 백 대령은 졸지에 미국의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됐다. 백 대령은 외교관의 면책특권으로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군과 관련한 모든 업무에서 백 대령을 배제시키라고 한국 국방부에 요구했다.
― 로버트 김 사건이 터지면서 곧바로 전역하셨나요.
“무관이 기피인물로 지목된다는 것은 진급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와 관련된 보직은 일절 맡을 수 없습니다. 미 국방부는 주한 미군과 거의 접촉이 없는 기술정보부대장 보직까지도 문제로 삼았고, 그 바람에 국군정보사 해군정보여단 내 공작기지(UDU) 부대장으로 갔습니다. 사건 후 1999년 김동진(金東鎭) 국방부장관님과 유삼남(柳三男) 해군참모총장님의 배려로 대령 계급장을 달고 해군준장 보직인 국군정보사 해군정보여단장(910여단장)을 지냈습니다. 2001년 1월 28년간의 군 생활을 접고 회한을 품은 채 군복을 벗었습니다.”
현재 백동일 대령은 20년째 미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심지어 미 교통안전국(TSA)이 ‘주요 경계대상 인물’로 등재해 놓는 바람에 국내외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항관리의 허락을 받아야 탑승이 가능했다. 백 대령은 “미국에서 치러진 큰아들의 결혼식도, 둘째 아들의 졸업식도 참석할 수 없는 아버지가 돼 버렸다”며 “미국 비자를 두 차례에 걸쳐 신청했으나 모두 거부당하는 바람에 미국에 거주하는 큰아들 가족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 로버트 김의 구속으로 인해 심적 고통의 나날을 보내셨군요. 로버트 김 구명활동에도 참여하셨습니까.
“수감 직후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을 때, 로버트 김은 ‘당신과 나는 하늘이 점지해 준 형제’라고 카드를 보내 오히려 저를 위로했어요. 저도 사건의 당사자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달려가 재판에서 그를 변론하려고도 했으나, 국방부에서 사건의 확산을 우려해 미국행을 막았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미국과 정상회담 때 로버트 김 조기석방과 보호관찰형 면제를 요청해 줄 것을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를 조직해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UDU 지옥훈련 이수하고 해군 UDT에 EOD 창설
1948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한 백동일 대령은 1968년 해군사관학교에 27기로 입학했다. 1973년 해사를 졸업한 백동일은 제독을 꿈꾸며 함정병과를 선택했다. 함정병과는 육군의 보병, 공군의 조종병과처럼 초급 장교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는 상륙함(LST)과 초계함(PCE)의 포술장과 작전관을 거쳐, 해군첩보부대의 특수전정규과정(UDU 기초과정)을 마치고 평소 동경하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6년 7월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 폭발물처리과정(EOD)을 이수하고 귀국한 그는 1977년 해군 최초의 해군특수전여단(UDT/SEAL)으로 발령받아 폭발물처리반(EOD) 학교를 창설했다. 그는 내친김에 1979년부터 2년간 ‘지옥훈련코스’라는 심해잠수과정(Diving & Salvage HeO2 Officer’s Course)에 도전한다. 그는 수도 워싱턴과 버지니아주 훈련장에서 쌀 두 가마 무게인 150kg의 혼합공기(헬륨+산소) 다이빙키트를 착용하고 국내 최초로 100m 심해잠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0년 뒤늦게 정보로 병과를 옮긴 그는 해군 정보부대의 UDU와 관련한 부대에서 활동했다. 1988년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1990년에는 해군본부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평가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988년 국방정보본부의 러시아 주무장교로 3년간 근무하다 1992년 대령 계급장을 달고 버지니아주 미 국방정보본부 연합전략정보과정(CSITP)을 이수하러 떠난다. 본격적인 정보전문가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1994년 그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 해군무관으로 선발돼 파견된다.
백 대령은 “국방정보본부에서는 소련을 담당했던 백동일 대령을 러시아 무관 후보로 검토했으나 김홍렬(金弘烈) 해군총장의 추천으로 미국 무관에 지원해 미국 무관요원으로 선발됐다”면서 “당시 미국 무관은 소속군인 해군에서 추천을 받아야 했고, 각 군 총장의 의중을 미국에 잘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실력뿐만 아니라 총장의 신임을 얻어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고 했다.
해군무관의 첫 임무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가 타결되기 한 달 전, 9월 23일 백동일 대령은 주미 무관으로 파견됐다. 당시 박용옥(朴庸玉) 육군소장이 주미 국방무관(국방부차관 역임)으로 부임해 있었다. 백동일 대령은 무관의 기본임무인 첩보수집, 군사외교, 방산물자 수출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고 한다.
백 대령은 미국이 북한과의 합의를 위해 어떤 물밑 대화를 나눴는지, 1994년 김일성(金日成) 사망 직후 조문파동 이후 남북관계를 단절한 북한이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일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백 단장의 말이다.
“정보장교 눈에 미국은 첩보의 보고(寶庫)였습니다. 한국에선 한참을 기다려야 파악이 되는 태평양함대의 함정배치 상황, 7함대사령관 등의 교체 등 휴민트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활동한 만큼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에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한국군에 필요한 자료들을 열심히 획득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 국방부에서 매년 발행하는 《국방백서》는 무관들에게 5부만 배당되던 것을 50권씩이나 확보해 본부에 보냈습니다.”
백 대령은 적극적 활동 덕분에 미국 근무 2년 동안 연속으로 최우수 무관에 선발되기도 했다. 한미연례안보회의(SCM)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한 김동진 국방부장관은 주미 대사관을 찾아 박용옥 국방무관에게 “백동일 대령이 누구냐”라며, “자료 잘 보고 있어, 열심히 해”라고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해 주기도 했다.
― 첫 임무는.
“1994년 10월에 부임하자 미·북 간 제네바협상이 막바지로 진행 중이었습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미·북 간 협의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에 크게 상심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핵을 저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한을 배제하고서라도 미·북 관계를 개선하려 했습니다. 미·북 간 ‘밀월관계’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제네바협상은 한국의 외교부, 미국의 국무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미 국방부에서 관련 정보를 얻어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무관들이 죽어났습니다. 훗날 국정원 최고수장에 올랐던 김모 참사관은 ‘백 무관, 운동도 하고 바깥 바람도 쐬 가며 하거래이 …’라고 했지요.”
‘K파일’로 만들어 우편으로 배달
1995년 11월 28일 해군은 워싱턴DC에서 한미해군정보교류회의(IEC)를 개최했다. 백동일 대령과 로버트 김은 이 회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주미 해군무관으로 나가 있던 백동일 대령은 회의 준비를 맡게 됐고, 미국 측이 통역 겸 안내장교를 미 해군성 정보국(ONI)에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로버트 김에게 맡기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다. 미군 측이 호의를 베푼 것이다.
― 로버트 김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참 선한 인상이셨어요. 19년 동안 한국 군인 구경도 못하다 갑자기 만나니 애국심이 발동했던 것 같아요. 로버트 김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부친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공화당 의원을 지낸 김상영(金尙榮) 선생(로버트 김 석방 5개월 전인 2004년 2월 90세로 작고)이었어요. 고향집엔 부친이 가훈으로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써 놓았다고 했습니다.”
― 처음 만나 나눈 대화를 기억하세요?
“‘출처개척’ 차원에서 로버트 김에게 ‘백색요원’으로 첩보수집에 한계를 토로하며 기밀이 아닌 사항에 한해 북한군 관련 첩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주한 미군들이나 국방부에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들 모두 내 소관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상황이었거든요. 한국의 열악한 정보력을 알게 된 로버트 김은 기밀로 정해지지 않는 정보에 한해 협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로버트 김은 백동일 대령에게 비밀로 지정되지 않는 자료 중 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취합해 ‘K파일’로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 왔다. 로버트 김에게 받은 정보는 70여 건으로, 일반적인 북한 동향도 있었지만 비중이 있는 내용도 30여 건에 달했다.
백 대령은 “주미 대사관이 파악한 김대중, 최형우(崔炯宇) 등 당시 한국의 차기대권 주자들의 성향에 대한 분석자료도 받았지만, 북한 군사 동향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본부에 보고하지 않고 세절(細切)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로버트 김이 전달한 정보가 전체적으로 미국 측 주장처럼 국가 안위와 직결될 정도로 비도(秘度)가 높은 내용은 아니었다”며 “스파이라면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우편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내부 소요 가능성도 로버트 김에게 타진했습니까.
“민감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내부 소요 진압용 무기 구매 첩보였습니다. A4 2장짜리 문건으로, 미국 첩보수집부서에서 무기 중개상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죠. 북한이 내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권총과 수류탄을 구매하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방부의 ‘북한붕괴 시나리오’를 만들 때 큰 기여를 했습니다.”
― 엄청난 정보들이 올라오니까 국방부는 깜짝 놀랐겠습니다.
“신문기자로 말하면 특종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보본부 담당자들은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브이아이피(VIP)께 들고 가는 정보라는 뜻이죠. ‘추가자료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아 밤낮없이 뛰느라 무좀까지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독이 든 사과
―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한 미국의 정보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당시 북한은 잠수함을 동해로 자주 보내 남한의 정세를 살폈고, 심지어 제주도 근해까지 잠수함을 보내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북한의 이 같은 동향은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임에도 우리의 감시수단 부족으로 ‘눈뜬장님’이었습니다. 미국은 무기를 수송한 북한 선박들을 주목해 추적했죠. 우리의 대잠초계기가 남포항에서 빠져나온 북한 선박 A를 서해상에서 촬영하면서 컨택은 하지만, 이후 행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한미해군정보회의 때, 그들은 5분도 안 걸려 북한 선박 A의 경유지와 함께 그 선박이 파키스탄 항구에서 물품을 하역 중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줘요. 한국군 정보장교들은 미군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죠.”
기자가 “평소 FBI가 로버트 김과 만나는 것을 감시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느냐”고 하자, 백 대령은 “오랜 기간 전화를 감청하고 우편물을 검열해 왔다는 것을 사건이 터진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 재판과정에서 검사가 ‘한국의 백동일 무관은 주한 미군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장교(inquisitive officer)였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 미국 도착 직후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한 것으로 본다”며 “결국 미국이 건넨 ‘독이 든 사과(poisoned apple)’를 베어 물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미국 FBI의 백 대령 감시는 조직적이었다. 미 해군은 1995년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를 한국에 팔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에게 미국의 C4I 상황을 문의했고, 로버트 김에게 한미 해군 대 해군회의(ROK-US Navy to Navy Talks)에 참석한 해군 대표단 가운데 해군대령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1996년 3월 30일 백 대령은 워싱턴 셰러턴호텔에서 그 해군 대령을 소개받았고, “이 시스템이 한국 실정에 잘 맞지 않으니 심사숙고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백 대령의 말이다.
“로버트 김과 유선상으로 한국 해군대령이 투숙하고 있는 셰러턴호텔 객실 번호를 이야기해 주며, 랑데부 시간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 FBI가 이것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미간 회의를 마치고 복귀 시 호텔 측으로부터 ‘숙소에 폭발물 설치가 의심되니 묵고 있는 투숙객 전원을 소개(疏開)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때 FBI가 한국대령이 묵고 있는 객실에 CCTV를 설치했을 겁니다. 재판과정에서 객실 내 대화내용이 공개됐으니까요.”
로버트 김이 전한 마지막 정보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의 상어급 소형 잠수함이 침투해 좌초된 초대형 도발사건이 터졌다. 대대적인 대간첩작전이 펼쳐졌고, 우리 군은 교전 끝에 간첩 13명을 사살했고, 11명은 자결한 것으로 추정(1명 생포)됐다. 우리 군인과 민간인도 17명이 숨졌다.
1996년 9월 19일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두 당사자(two parties)가 추가적 도발을 말아 주기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11월 19일 《뉴욕타임스》는 “국무부 직원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한국 정부라고 생각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미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를 소환하는 등 격노했다.
백동일 대령도 미국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사흘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미 국방부의 정보본부(DIA)와 미 해군성의 정보 참모부(I-2) 등 관계관들을 찾아가 자료를 요청했다. 로버트 김에게도 이와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 잠수함에 대해 파악한 내용은.
“국방부는 원산 송전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잠수함 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잠수함이 출동했으나, 한 척만 송전반도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한 척은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과 연루돼 있음을 파악했고, 미국의 정보력이라면 잠수함의 이동경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주미 대사관에 파악 지시를 했던 겁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북한 잠수함이 한국 영해로 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통보해 주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 거죠.”
― 로버트 김이 그걸 확인해 주었나요.
“결론적으로,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은 확인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어요. 로버트 김은 ‘미국은 북한 잠수함을 거의 3시간 간격으로 이동경로를 관측하고 있었다. 한국의 영해로 들어온 북한 잠수함은 두 척이었다. 그중 한 척이 동해안에 좌초한 것이고, 다른 한 척은 남해안 부근에 행적이 나타났다. 동해 연안을 따라 제주도 남단으로 행적이 이어져 있었다’고 뒤에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게 로버트 김의 마지막 정보제공이었고, 6일 후 간첩 혐의(espionage)를 받고 리셉션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한국에 정보를 안 준 까닭
― 로버트 김이 백 대령님께 컴퓨터로 접하는 정보마다 기밀등급과 제공표시가 있었다고 했다면서요.
“한국으로 제공하는 첩보는 ‘Released: R.O.K(한국군 제공, ‘REROK, 리락’이라 부름)’라고 표시하고, 제공하지 않는 정보는 ‘NOFORN(외국전파금지, No Foreign Dissemination Allowed, ‘노폰’이라 부름)’이라는 자막이 표시됩니다. 당시 높은 레벨의 첩보는 한국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반도 관련 정보조차 영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 다른 우방국에는 전달했지만, 당사자인 한국에는 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북한 관련 민감한 정보는 오히려 한국 측에 전달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보 전문가들은 소위 ‘정보출처 보호’라고 말합니다. 북한정보가 남한에 전달돼 유출되기라도 하면, 북한은 미군을 정보출처로 파악해 곧바로 자신들의 정보출처를 차단합니다. 미국은 이것을 우려하는 것이죠. 제가 로버트 김에게 받아 국방부에 보고한 북한주민의 내부 소요 가능성 첩보도 결국 통일부에서 언론에 유출시키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 미국과는 혈맹인데도, 정보를 제한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무관 생활을 해 보니, 한국은 미국을 동맹이니 혈맹이니 하면서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지구촌을 대상으로 대전략(grand strategy)을 구사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국익(國益)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 미국 정보 관계자들의 마인드는 어떻습니까.
“미국은 정보나 첩보를 ‘목숨’처럼 여기고, 우리는 ‘가십거리’로 여깁니다. 미국은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부어 가며 취득한 정보자산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려 합니다. 첩보(인포메이션)를 수집·융합해 정보(인텔리전스)라는 ‘모범답안’을 만드는 일이 너무나 힘든 과정이거든요. 그렇게 애써 만든 정보를 한국 측에 주면 관계기관 종사자들이 입이 근질거린 나머지 출처 보호를 하지 않고 떠들고 다니는 판에 미군들이 골머리를 앓는 겁니다. 국가안보와 국익차원에서 볼 때, 보안의식이 결여된 자격 미달들입니다.”
― 로버트 김이 왜 우편으로 기밀을 전달했을까요.
“상호 비밀로 분류된 내용은 수수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에 편리한 방법을 취한 것이 우편교환이었지만, 우리 식으로 적당히 생각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요. 그리고 만약 흑색활동을 전개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해서는 안 될 일이고, 더욱이 미국이라는 완벽한 방첩시스템을 갖춘 국가에서 비밀리에 공작차원의 활동을 시도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이고 위험한 처신이지요. 한미 간의 관계를 봐서라도 말이지요. 하여간 첩보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비밀로 분류됐던 자료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유도하지 못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 로버트 김이 왜 주미 무관에게 선선히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십니까.
“로버트 김은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뼛속까지 한국인인 사람입니다. 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미국 주류사회로 편입하는 것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한국을 그리워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스파이를 M(Money), I(Ideology), C(Compromise), E(Ego) 등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로버트 김이나 이스라엘의 조너선 폴라드(Jonathan Pollard)는 이데올로기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조국에 대한 이념이 투철한 사람들이죠. 로버트 김 사건 이후 한국정부의 항의로 ‘노폰’과 ‘리락’이 사라진 것도 그나마 한미 정보교류에 긍정적 효과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향후 북한이 2020년 핵보유국 위치를 확고하게 하면, 미·북 간 제네바합의 때처럼 한국을 배제하고 양자간 대화를 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국익에는 우방이 따로 없습니다. 해군무관 시절, 버지니아 관사 옆에 패망한 베트남 국방무관 육군소장이 살았는데, 함께 조깅을 하면서 그가 ‘공산 적과 싸워 이기는 한국이 부럽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해 우리 머리 위로 치명적인 비대칭 무기가 날아다니는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북한에 쌀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에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조너선 폴라드의 경우
― 로버트 김에게 향응이나 식사대접을 하진 않으셨나요.
“로버트 김은 한국의 첩보수집이 열악한 상황을 알고 아무런 대가 없이 기밀로 지정되지 않은 정보들을 수집해 보내주었습니다. 그분은 의식적으로 저와 식사나 골프를 하지 않았습니다. 체포 직전 식사를 한 번 하고, 골프를 한 번 친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돈은 1센트도 건넨 적이 없고요.”
― 1996년 10월 피터 긴스버그 변호사를 선임하고 검찰 측과 플리바겐(Plea Bargain)을 시작했는데, 협상이 이듬해 5월까지 끌었지요?
“당시 로버트 김의 변호를 맡고 있던 변호사는 제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나 호주 등 다른 우방국에 이미 공개된 자료라며, 정보를 유출시킨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간첩 혐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9년형 징역에 3년의 보호관찰 선고를 받고, 펜실베이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 겁니다.”
―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했습니다만.
“한국 정부와 김영삼 대통령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 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고요, 이후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열심히 정보수집에 몰두한 죄(?)밖에 없는 저에게도 ‘개인적인 욕심으로 빚어진 일’이라며 ‘미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했으니, 모자를 벗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물 간첩 조너선 폴라드는 공교롭게도 로버트 김이 근무하던 미 해군정보국의 군무원으로 재직하던 기간, 스파이 혐의로 1985년 체포된 뒤 사형까지 거론됐다. 중동권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스파이 행위와 관련된 기밀문서 사본을 이스라엘 당국에 넘겨준 혐의였다. 그에게 사형선고까지 거론되자 이스라엘 국민들은 물론 역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폴라드의 석방을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조직적 압박으로 폴라드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노스캐롤라이나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했다. 2014년 3월 벤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폴라드 석방을 위해서라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다. 덕분에 폴라드는 2015년 11월 27일 30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백동일 대령은 “로버트 김 사건으로 로버트 김과 백동일, 두 사람의 청춘은 송두리째 날아갔다”면서 “국가가 국가생명과 국익을 위해 희생한 사람의 공적조차도 ‘개인적 욕심’으로 치부해 외면한다면, 누가 사명감과 명예심을 갖고 국가를 위해 일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씨가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있다 보니 우리말도 어눌해지고 컴퓨터도 잘 다룰 줄 몰랐는데, 많은 분의 도움으로 고국에 ‘러브레터’를 매주 보낼 수 있었고, 책으로까지 선보이게 됐다”고 인사말을 할 때, 건너편 테이블의 한 노신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로버트 김을 응시하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자 로버트 김은 노신사에게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노신사는 ‘로버트 김 사건’의 빌미가 됐던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白東一·68)씨였다. 로버트 김의 부인 장명희(張明熙)씨, 동생인 김성곤(金星坤) 전 국회의원(한민족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로버트 김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 박성현(朴成鉉) 청해엔지니어링 대표 등이 이들의 재회를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미국 비자신청 두 차례나 거부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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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1일 강남구 샹제리제센터에서 열린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에서 저자 로버트 김(왼쪽 둘째)과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씨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김씨의 부인 장명희(왼쪽)씨가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1978년 미국 해군정보국(ONI)에 들어가 그곳에서 19년간 손꼽히는 베테랑 정보분석가로 일하던 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북한 관련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형을 받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백동일 대령의 운명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나가던 해군의 정보장교 백 대령은 졸지에 미국의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됐다. 백 대령은 외교관의 면책특권으로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군과 관련한 모든 업무에서 백 대령을 배제시키라고 한국 국방부에 요구했다.
― 로버트 김 사건이 터지면서 곧바로 전역하셨나요.
“무관이 기피인물로 지목된다는 것은 진급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와 관련된 보직은 일절 맡을 수 없습니다. 미 국방부는 주한 미군과 거의 접촉이 없는 기술정보부대장 보직까지도 문제로 삼았고, 그 바람에 국군정보사 해군정보여단 내 공작기지(UDU) 부대장으로 갔습니다. 사건 후 1999년 김동진(金東鎭) 국방부장관님과 유삼남(柳三男) 해군참모총장님의 배려로 대령 계급장을 달고 해군준장 보직인 국군정보사 해군정보여단장(910여단장)을 지냈습니다. 2001년 1월 28년간의 군 생활을 접고 회한을 품은 채 군복을 벗었습니다.”
현재 백동일 대령은 20년째 미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심지어 미 교통안전국(TSA)이 ‘주요 경계대상 인물’로 등재해 놓는 바람에 국내외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항관리의 허락을 받아야 탑승이 가능했다. 백 대령은 “미국에서 치러진 큰아들의 결혼식도, 둘째 아들의 졸업식도 참석할 수 없는 아버지가 돼 버렸다”며 “미국 비자를 두 차례에 걸쳐 신청했으나 모두 거부당하는 바람에 미국에 거주하는 큰아들 가족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 로버트 김의 구속으로 인해 심적 고통의 나날을 보내셨군요. 로버트 김 구명활동에도 참여하셨습니까.
“수감 직후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을 때, 로버트 김은 ‘당신과 나는 하늘이 점지해 준 형제’라고 카드를 보내 오히려 저를 위로했어요. 저도 사건의 당사자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달려가 재판에서 그를 변론하려고도 했으나, 국방부에서 사건의 확산을 우려해 미국행을 막았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미국과 정상회담 때 로버트 김 조기석방과 보호관찰형 면제를 요청해 줄 것을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를 조직해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UDU 지옥훈련 이수하고 해군 UDT에 EOD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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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미국 ‘혼합공기(헬륨+산소) 잠수과정’ 유학시절, 약 150kg에 달하는 심해잠수 장비를 착용 중인 백동일 소령. 사진=백동일 단장 |
1976년 7월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 폭발물처리과정(EOD)을 이수하고 귀국한 그는 1977년 해군 최초의 해군특수전여단(UDT/SEAL)으로 발령받아 폭발물처리반(EOD) 학교를 창설했다. 그는 내친김에 1979년부터 2년간 ‘지옥훈련코스’라는 심해잠수과정(Diving & Salvage HeO2 Officer’s Course)에 도전한다. 그는 수도 워싱턴과 버지니아주 훈련장에서 쌀 두 가마 무게인 150kg의 혼합공기(헬륨+산소) 다이빙키트를 착용하고 국내 최초로 100m 심해잠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0년 뒤늦게 정보로 병과를 옮긴 그는 해군 정보부대의 UDU와 관련한 부대에서 활동했다. 1988년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1990년에는 해군본부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평가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988년 국방정보본부의 러시아 주무장교로 3년간 근무하다 1992년 대령 계급장을 달고 버지니아주 미 국방정보본부 연합전략정보과정(CSITP)을 이수하러 떠난다. 본격적인 정보전문가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1994년 그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 해군무관으로 선발돼 파견된다.
백 대령은 “국방정보본부에서는 소련을 담당했던 백동일 대령을 러시아 무관 후보로 검토했으나 김홍렬(金弘烈) 해군총장의 추천으로 미국 무관에 지원해 미국 무관요원으로 선발됐다”면서 “당시 미국 무관은 소속군인 해군에서 추천을 받아야 했고, 각 군 총장의 의중을 미국에 잘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실력뿐만 아니라 총장의 신임을 얻어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고 했다.
해군무관의 첫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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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핵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는 로버트 갈루치 대표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오른쪽). 미국은 북핵 폐기 조건으로 중유 50만t 그리고 경수로 제공, 미·북관계 개선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사진=조선일보 |
백 대령은 미국이 북한과의 합의를 위해 어떤 물밑 대화를 나눴는지, 1994년 김일성(金日成) 사망 직후 조문파동 이후 남북관계를 단절한 북한이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일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백 단장의 말이다.
“정보장교 눈에 미국은 첩보의 보고(寶庫)였습니다. 한국에선 한참을 기다려야 파악이 되는 태평양함대의 함정배치 상황, 7함대사령관 등의 교체 등 휴민트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활동한 만큼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에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한국군에 필요한 자료들을 열심히 획득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 국방부에서 매년 발행하는 《국방백서》는 무관들에게 5부만 배당되던 것을 50권씩이나 확보해 본부에 보냈습니다.”
백 대령은 적극적 활동 덕분에 미국 근무 2년 동안 연속으로 최우수 무관에 선발되기도 했다. 한미연례안보회의(SCM)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한 김동진 국방부장관은 주미 대사관을 찾아 박용옥 국방무관에게 “백동일 대령이 누구냐”라며, “자료 잘 보고 있어, 열심히 해”라고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해 주기도 했다.
― 첫 임무는.
“1994년 10월에 부임하자 미·북 간 제네바협상이 막바지로 진행 중이었습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미·북 간 협의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에 크게 상심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핵을 저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한을 배제하고서라도 미·북 관계를 개선하려 했습니다. 미·북 간 ‘밀월관계’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제네바협상은 한국의 외교부, 미국의 국무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미 국방부에서 관련 정보를 얻어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무관들이 죽어났습니다. 훗날 국정원 최고수장에 올랐던 김모 참사관은 ‘백 무관, 운동도 하고 바깥 바람도 쐬 가며 하거래이 …’라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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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24일 미 알링턴국립묘지 내 포트 마이어(Fort Myer) 육군장교회관에서 열린 한국 국군의 날 리셉션 행사. 이날 오후 행사장에서 FBI가 로버트 김을 “당신 자동차가 접촉사고를 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슬며서 연행해 간 직후, 백동일 해군무관 부부가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백동일 단장 |
― 로버트 김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참 선한 인상이셨어요. 19년 동안 한국 군인 구경도 못하다 갑자기 만나니 애국심이 발동했던 것 같아요. 로버트 김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부친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공화당 의원을 지낸 김상영(金尙榮) 선생(로버트 김 석방 5개월 전인 2004년 2월 90세로 작고)이었어요. 고향집엔 부친이 가훈으로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써 놓았다고 했습니다.”
― 처음 만나 나눈 대화를 기억하세요?
“‘출처개척’ 차원에서 로버트 김에게 ‘백색요원’으로 첩보수집에 한계를 토로하며 기밀이 아닌 사항에 한해 북한군 관련 첩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주한 미군들이나 국방부에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들 모두 내 소관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상황이었거든요. 한국의 열악한 정보력을 알게 된 로버트 김은 기밀로 정해지지 않는 정보에 한해 협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로버트 김은 백동일 대령에게 비밀로 지정되지 않는 자료 중 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취합해 ‘K파일’로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 왔다. 로버트 김에게 받은 정보는 70여 건으로, 일반적인 북한 동향도 있었지만 비중이 있는 내용도 30여 건에 달했다.
백 대령은 “주미 대사관이 파악한 김대중, 최형우(崔炯宇) 등 당시 한국의 차기대권 주자들의 성향에 대한 분석자료도 받았지만, 북한 군사 동향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본부에 보고하지 않고 세절(細切)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로버트 김이 전달한 정보가 전체적으로 미국 측 주장처럼 국가 안위와 직결될 정도로 비도(秘度)가 높은 내용은 아니었다”며 “스파이라면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우편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내부 소요 가능성도 로버트 김에게 타진했습니까.
“민감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내부 소요 진압용 무기 구매 첩보였습니다. A4 2장짜리 문건으로, 미국 첩보수집부서에서 무기 중개상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죠. 북한이 내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권총과 수류탄을 구매하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방부의 ‘북한붕괴 시나리오’를 만들 때 큰 기여를 했습니다.”
― 엄청난 정보들이 올라오니까 국방부는 깜짝 놀랐겠습니다.
“신문기자로 말하면 특종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보본부 담당자들은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브이아이피(VIP)께 들고 가는 정보라는 뜻이죠. ‘추가자료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아 밤낮없이 뛰느라 무좀까지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독이 든 사과
―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한 미국의 정보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당시 북한은 잠수함을 동해로 자주 보내 남한의 정세를 살폈고, 심지어 제주도 근해까지 잠수함을 보내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북한의 이 같은 동향은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임에도 우리의 감시수단 부족으로 ‘눈뜬장님’이었습니다. 미국은 무기를 수송한 북한 선박들을 주목해 추적했죠. 우리의 대잠초계기가 남포항에서 빠져나온 북한 선박 A를 서해상에서 촬영하면서 컨택은 하지만, 이후 행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한미해군정보회의 때, 그들은 5분도 안 걸려 북한 선박 A의 경유지와 함께 그 선박이 파키스탄 항구에서 물품을 하역 중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줘요. 한국군 정보장교들은 미군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죠.”
기자가 “평소 FBI가 로버트 김과 만나는 것을 감시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느냐”고 하자, 백 대령은 “오랜 기간 전화를 감청하고 우편물을 검열해 왔다는 것을 사건이 터진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 재판과정에서 검사가 ‘한국의 백동일 무관은 주한 미군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장교(inquisitive officer)였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 미국 도착 직후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한 것으로 본다”며 “결국 미국이 건넨 ‘독이 든 사과(poisoned apple)’를 베어 물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미국 FBI의 백 대령 감시는 조직적이었다. 미 해군은 1995년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를 한국에 팔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에게 미국의 C4I 상황을 문의했고, 로버트 김에게 한미 해군 대 해군회의(ROK-US Navy to Navy Talks)에 참석한 해군 대표단 가운데 해군대령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1996년 3월 30일 백 대령은 워싱턴 셰러턴호텔에서 그 해군 대령을 소개받았고, “이 시스템이 한국 실정에 잘 맞지 않으니 심사숙고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백 대령의 말이다.
“로버트 김과 유선상으로 한국 해군대령이 투숙하고 있는 셰러턴호텔 객실 번호를 이야기해 주며, 랑데부 시간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 FBI가 이것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미간 회의를 마치고 복귀 시 호텔 측으로부터 ‘숙소에 폭발물 설치가 의심되니 묵고 있는 투숙객 전원을 소개(疏開)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때 FBI가 한국대령이 묵고 있는 객실에 CCTV를 설치했을 겁니다. 재판과정에서 객실 내 대화내용이 공개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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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18일 무장간첩 25명을 싣고 왔던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안에 좌초된 채 떠있다. 사진=조선일보 |
1996년 9월 19일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두 당사자(two parties)가 추가적 도발을 말아 주기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11월 19일 《뉴욕타임스》는 “국무부 직원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한국 정부라고 생각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미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를 소환하는 등 격노했다.
백동일 대령도 미국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사흘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미 국방부의 정보본부(DIA)와 미 해군성의 정보 참모부(I-2) 등 관계관들을 찾아가 자료를 요청했다. 로버트 김에게도 이와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 잠수함에 대해 파악한 내용은.
“국방부는 원산 송전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잠수함 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잠수함이 출동했으나, 한 척만 송전반도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한 척은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과 연루돼 있음을 파악했고, 미국의 정보력이라면 잠수함의 이동경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주미 대사관에 파악 지시를 했던 겁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북한 잠수함이 한국 영해로 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통보해 주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 거죠.”
― 로버트 김이 그걸 확인해 주었나요.
“결론적으로,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은 확인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어요. 로버트 김은 ‘미국은 북한 잠수함을 거의 3시간 간격으로 이동경로를 관측하고 있었다. 한국의 영해로 들어온 북한 잠수함은 두 척이었다. 그중 한 척이 동해안에 좌초한 것이고, 다른 한 척은 남해안 부근에 행적이 나타났다. 동해 연안을 따라 제주도 남단으로 행적이 이어져 있었다’고 뒤에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게 로버트 김의 마지막 정보제공이었고, 6일 후 간첩 혐의(espionage)를 받고 리셉션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한국에 정보를 안 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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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오른쪽)이 2004년 6월 1일 오전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 소재 자택으로 귀가, 부인 장명희씨와 식사를 마친 뒤 나란히 앉아 있다. 사진=조선일보 |
“한국으로 제공하는 첩보는 ‘Released: R.O.K(한국군 제공, ‘REROK, 리락’이라 부름)’라고 표시하고, 제공하지 않는 정보는 ‘NOFORN(외국전파금지, No Foreign Dissemination Allowed, ‘노폰’이라 부름)’이라는 자막이 표시됩니다. 당시 높은 레벨의 첩보는 한국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반도 관련 정보조차 영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 다른 우방국에는 전달했지만, 당사자인 한국에는 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북한 관련 민감한 정보는 오히려 한국 측에 전달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보 전문가들은 소위 ‘정보출처 보호’라고 말합니다. 북한정보가 남한에 전달돼 유출되기라도 하면, 북한은 미군을 정보출처로 파악해 곧바로 자신들의 정보출처를 차단합니다. 미국은 이것을 우려하는 것이죠. 제가 로버트 김에게 받아 국방부에 보고한 북한주민의 내부 소요 가능성 첩보도 결국 통일부에서 언론에 유출시키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 미국과는 혈맹인데도, 정보를 제한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무관 생활을 해 보니, 한국은 미국을 동맹이니 혈맹이니 하면서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지구촌을 대상으로 대전략(grand strategy)을 구사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국익(國益)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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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한국대사관 국방무관대리로 근무 중이던 백동일 무관(가운데)이 1996년 6월 25일 워싱턴의 한국전쟁기념비(Korean War Memorial)를 찾아 6·25전쟁 참전기념 행사에서 박건우 주미대사(왼쪽)와 함께 헌화하고 있다. 사진=백동일 단장 |
“미국은 정보나 첩보를 ‘목숨’처럼 여기고, 우리는 ‘가십거리’로 여깁니다. 미국은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부어 가며 취득한 정보자산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려 합니다. 첩보(인포메이션)를 수집·융합해 정보(인텔리전스)라는 ‘모범답안’을 만드는 일이 너무나 힘든 과정이거든요. 그렇게 애써 만든 정보를 한국 측에 주면 관계기관 종사자들이 입이 근질거린 나머지 출처 보호를 하지 않고 떠들고 다니는 판에 미군들이 골머리를 앓는 겁니다. 국가안보와 국익차원에서 볼 때, 보안의식이 결여된 자격 미달들입니다.”
― 로버트 김이 왜 우편으로 기밀을 전달했을까요.
“상호 비밀로 분류된 내용은 수수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에 편리한 방법을 취한 것이 우편교환이었지만, 우리 식으로 적당히 생각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요. 그리고 만약 흑색활동을 전개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해서는 안 될 일이고, 더욱이 미국이라는 완벽한 방첩시스템을 갖춘 국가에서 비밀리에 공작차원의 활동을 시도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이고 위험한 처신이지요. 한미 간의 관계를 봐서라도 말이지요. 하여간 첩보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비밀로 분류됐던 자료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유도하지 못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 로버트 김이 왜 주미 무관에게 선선히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십니까.
“로버트 김은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뼛속까지 한국인인 사람입니다. 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미국 주류사회로 편입하는 것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한국을 그리워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스파이를 M(Money), I(Ideology), C(Compromise), E(Ego) 등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로버트 김이나 이스라엘의 조너선 폴라드(Jonathan Pollard)는 이데올로기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조국에 대한 이념이 투철한 사람들이죠. 로버트 김 사건 이후 한국정부의 항의로 ‘노폰’과 ‘리락’이 사라진 것도 그나마 한미 정보교류에 긍정적 효과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향후 북한이 2020년 핵보유국 위치를 확고하게 하면, 미·북 간 제네바합의 때처럼 한국을 배제하고 양자간 대화를 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국익에는 우방이 따로 없습니다. 해군무관 시절, 버지니아 관사 옆에 패망한 베트남 국방무관 육군소장이 살았는데, 함께 조깅을 하면서 그가 ‘공산 적과 싸워 이기는 한국이 부럽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해 우리 머리 위로 치명적인 비대칭 무기가 날아다니는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북한에 쌀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에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조너선 폴라드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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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근무했던 미 해군 정보국에서 장교로 재직 중 아랍 국가들의 군사 정보를 이스라엘에 넘긴 혐의로 1985년 미국 수사당국에 체포돼 종신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조너선 폴라드(60)가 가석방됐다. 그동안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오랜 석방 요구를 줄곧 거부해 온 미국이 미국과 이란 간의 핵 협정 타결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냉각될 것을 우려해 오바마 정부가 회유 차원에서 내놓은 처방이란 견해가 나오고 있다. |
“로버트 김은 한국의 첩보수집이 열악한 상황을 알고 아무런 대가 없이 기밀로 지정되지 않은 정보들을 수집해 보내주었습니다. 그분은 의식적으로 저와 식사나 골프를 하지 않았습니다. 체포 직전 식사를 한 번 하고, 골프를 한 번 친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돈은 1센트도 건넨 적이 없고요.”
― 1996년 10월 피터 긴스버그 변호사를 선임하고 검찰 측과 플리바겐(Plea Bargain)을 시작했는데, 협상이 이듬해 5월까지 끌었지요?
“당시 로버트 김의 변호를 맡고 있던 변호사는 제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나 호주 등 다른 우방국에 이미 공개된 자료라며, 정보를 유출시킨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간첩 혐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9년형 징역에 3년의 보호관찰 선고를 받고, 펜실베이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 겁니다.”
―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했습니다만.
“한국 정부와 김영삼 대통령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 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고요, 이후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열심히 정보수집에 몰두한 죄(?)밖에 없는 저에게도 ‘개인적인 욕심으로 빚어진 일’이라며 ‘미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했으니, 모자를 벗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물 간첩 조너선 폴라드는 공교롭게도 로버트 김이 근무하던 미 해군정보국의 군무원으로 재직하던 기간, 스파이 혐의로 1985년 체포된 뒤 사형까지 거론됐다. 중동권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스파이 행위와 관련된 기밀문서 사본을 이스라엘 당국에 넘겨준 혐의였다. 그에게 사형선고까지 거론되자 이스라엘 국민들은 물론 역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폴라드의 석방을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조직적 압박으로 폴라드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노스캐롤라이나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했다. 2014년 3월 벤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폴라드 석방을 위해서라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다. 덕분에 폴라드는 2015년 11월 27일 30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백동일 대령은 “로버트 김 사건으로 로버트 김과 백동일, 두 사람의 청춘은 송두리째 날아갔다”면서 “국가가 국가생명과 국익을 위해 희생한 사람의 공적조차도 ‘개인적 욕심’으로 치부해 외면한다면, 누가 사명감과 명예심을 갖고 국가를 위해 일하겠느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