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KBS는 기사 ‘조작’을 인정하고 기사를 삭제할 수밖에 없었던가? KBS의 특종이라던 ‘6월 27일자 일본 외무성 전보’는 없었다. 그날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지난 6월 25일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질문에, KBS가 하루 전에 보도한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일본 망명(亡命) 요청 기사 건을 넣겠다고 했다. 나(조갑제)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라고 일단 묵살하고는 문제의 기사를 인터넷으로 읽어본 뒤 생각을 바꾸었다. 항일(抗日)독립정신의 화신(化身)인 이승만이 사투(死鬪) 중인 국군의 등 뒤에서 일본, 그것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고향인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도망을 가서 망명 정부를 세우겠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야기는 ‘3류 공상소설’ 수준에도 미달하지만 공영방송의 뉴스로, 그것도 특종(단독 보도)으로 포장되어 보도되었으니 기자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침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오보(誤報)는 기사 문장 속에 오보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증거가 숨어 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KBS 기사가 오보임을 확인하는 데는 10분으로 족하였다.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요청’ 기사가 나간 뒤 논란은 “KBS가 제시한 자료는 믿을 수 없다” “이승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식의 논란은 결론 없이 이어지고 그러는 사이에 ‘망명 요청’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 사실로 찍혀버린다. 그런 뒤에는 바로잡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KBS의 오보를 ‘조작’으로 규정하도록 한 것은 조갑제닷컴 조성호(趙成豪) 기자가 7월 2일에 쓴 기사였다. 조 기자는 KBS가 방송 화면에서 조금 보여준 야마구치현사(縣史)의 원문(原文)을 검색, KBS 기자가 기사 전개의 핵심인 ‘6월 27일’이란 날짜를 조작, 기사문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KBS의 보도 관계자들에게 이메일 등으로 해명을 요구한 상태에서 ‘조작 의혹’이라고 온건하게 제목을 단 기사를 올렸다.
造作
조 기자의 기사를 읽어본 필자는 ‘KBS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핵심적 ‘사실’에 확신을 가질 때 생기는 ‘감(感)’이었다. 다음날 KBS는 〈9시 뉴스〉를 통하여 사실상 정정(訂正)보도를 하였다.
〈KBS가 보도한 야마구치현 기록은 망명 정부 요청이 전쟁 초기 상황으로 묘사돼 있을 뿐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을 줄이면 ‘조작’ 또는 ‘날조’이다. KBS는 인터넷에 올라 있는 문제 기사와 동영상도 삭제하였다. 사실상 기사 취소를 한 셈이다. 공영방송으로서 당연한 조치였지만 전례(前例)가 드물다. 워낙 조작 사실이 명백하고 중대하기도 하였지만 KBS 지도부에 희망을 걸 수 있는 양식(良識)이 남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KBS가 문제 기사를 삭제한 다음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YTN이 같은 날 더 확실한 오보를 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YTN은 영어문서까지 자신만만하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일본 교토 오타니대학의 정우종 박사는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 당시 일본 정부에 망명 정권 설치를 요청했던 문서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공개했습니다. 문서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권이 미 대사관과 일본 정부에 야마구치현에 6만명 규모의 망명 정권을 설치하는 방안을 타진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방송대로라면 결정적 공문서(公文書)까지 찾은 것이다. YTN 보도가 하도 구체적이라 필자는 화면(畵面)을 정지시켜 가면서 영어문서를 읽어보았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KBS에서 소개한 영문 ‘비상조치 계획서’였다. 이 계획서에는 YTN이 보도한,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권이 미 대사관과 일본 정부에 야마구치현에 6만명 규모의 망명 정권을 설치하는 방안을 타진〉한 기록이 없다.
조성호 기자가, YTN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독자적인 취재를 하지 않고, KBS의 자료를 받아 썼다는 설명이었다.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관련 기사는 조심하지만 이승만·박정희(朴正熙)에 대하여는 아무리 과장, 왜곡, 날조해도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안심감이 기자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에게 이승만·박정희는 동네북이고 김대중·노무현은 성역(聖域)이다.
논란?
KBS의 2015년 6월 24일자 뉴스는 특종임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역사적 논란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 망명 요청설’인데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제로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을까요?〉
이 문장부터 틀렸다. ‘일본 망명 요청설’이 논란거리였다는 전제(前提)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전(韓國戰) 전문가들이 수천 명이지만 그것을 논란거리로 삼은 이는 없다. 역사 수정론에 빠진 좌익 학자들 중에서도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일부 수준 낮은 음모론자가 아니라면 이승만이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일본 망명 요청설’이란 말 자체가 KBS의 창작이다. ‘태양이 서쪽에서 뜬다’는 주장을 추적하기로 한 것처럼 KBS의 보도는 시작부터가 허망하다. 다음 문장도 문제적이다.
〈한국전쟁 발생 직후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다급한 상황이라,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망명 지역’으로 거론됐던 일본 야마구치 현청의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엇을 적은 ‘공식 기록’을 말하는가? 한국전 당시의 정부 공식 기록은 많다. ‘없다’는 것은 ‘일본 망명을 뒷받침하는 공식 문서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한국 정부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려 하니 쓸데없이 일본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것이다. KBS 기자는 그런 헛수고 대신에 외교부나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대한민국 정부가 1950년 6월 27일 일본에 망명 요청을 한 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어야 했다.
다나카 지사의 회고
〈야마구치현의 역사를 기록한 《야마구치 현사》에서 1950년의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다나카 다쓰오’ 야마구치현 지사(知事)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핵심적인 문장은 KBS도 인정한 허위이다. 《야마구치 현사》에는 6월 27일에 그런 전보를 받았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KBS가 이승만이 적전(敵前) 도망을 꾀했다고 조작하기 위하여 만들어 넣은 날짜가 6월 27일이다. 화면에서 6월 27일을 문서 위에 파 넣는 식으로 편집, 사실임을 강조하였다.
이 보도가 좌익 진영을 넘어 국내외로 급속히 퍼져간 이유는 ‘남침 이틀 뒤에 벌써 일본으로 도망치려 했다고?’하는 호기심과 분노를 자극한 때문일 것이다. KBS가 지난 7월 3일 스스로 ‘단독 보도’의 핵심적 사실인 6월 27일을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으므로 이 기사 전체는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었다.(조성호 기자는 기사 작성자와 보도 책임자에게 반론이나 해명을 요청하였으나 답신을 받지 못하였다.)
조성호 기자가 KBS에 소개된 《야마구치 현사》의 원문을 찾았는데, 당시 지사 다나카 다쓰오의 회고담이었다.
〈…釜山の北のね,洛東江の川の所まで北朝鮮軍ママが来てね。それで,このまま行ったならば,釜山は第二のダンケルクになると。そういった時にどうするかという問題ですが,外務省の方から電報が入ってね,韓国政府は六万人の亡命政権を山口県に作るということを希望しとると.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이대로 가면 부산은 ‘제2의 됭케르크’(注: 프랑스의 해안 도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르덴 숲 지대를 돌파한 독일군에 포위당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탈출한 곳)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인데, 외무성 사람으로부터 전보(電報)가 와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만들길 희망한다고.〉
6월 27일은 없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몰려온 것은 8월이다. 이 무렵 유엔군은 이승만 정부를 제주도로 옮기는 계획을 세우고, 8월 14일 무초 주한미국 대사가 한국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 대통령은 무초 미국 대사 앞에서 권총을 꺼내 휘두르면서 “이 총으로 적(敵)과 아내를 쏘고 마지막에 나를 쏘겠다”면서 정부 이전 계획을 거부하였다(프란체스카 일기). 이 무렵 일본 중앙정부에서도 한국인 난민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비상계획을 검토한 것을 다나카 지사는 ‘6만명의 망명 정권 운운’이라고 과장한 듯하다.
당시의 다급한 정황을 전하는 다나카 다쓰오 지사의 회고담 가운데 한 줄, “외무성 사람으로부터 전보가 와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만들길 희망한다고” 운운하는 대목이 KBS 기자에 의하여 ‘이승만 6월 27일 일본 망명 요청’으로 조작된다. 그런 전보가 있었다고 해도 8월에 작성된 것인데, KBS 기자는 ‘6월 27일자 외무성 전보’라고 조작, 결사항전을 지도하는 이승만을 ‘적전 도망 기도자’로 만든 것이다.
KBS는 문제의 일본 외무성 전보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다나카 다쓰오 당시 지사가 기억해 두었다가 전한 전보의 내용이니, 즉 ‘카더라’식의 ‘전문(傳聞) 증거’라서 믿을 수 없다. KBS는 이 믿을 수 없는 전문을 직접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다나카 지사의 ‘카더라’ 전문 내용은 한국과 미국의 최고급 정부 문서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증거 능력이 없다. 사실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8월에도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KBS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외무성 전보라는 것과 거기에 담겨 있다는 전문 내용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믿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날짜를 남침 직후로 조작, 이승만을 도망자로 만드는 효과를 극대화한다.
1950년 여름과 가을, 한국의 운명이 경각(頃刻)에 달렸을 때 이승만의 적대적(敵對的)인 대일관(對日觀)을 보여주는 증언이 많은데 ‘왜관발언’이라고 알려진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서 요약한다.
〈이승만 박사는 부산 육군병원을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한다.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을 듣고는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 유명한 ‘왜관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것이다.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 의용병이었다. 주일(駐日) 대표부의 김용주(金龍周) 공사는 기자들이 몰려들자 직접 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 지원군이다”고 설명드린 다음, 기자들에겐 이 대통령의 발언이 와전(訛傳)되었다고 하여 수습하였다.〉
이승만이 트루먼에게 망명 요청을 했어야
KBS의 보도대로 이승만이 일본 정부에 망명 요청을 하려면 다음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주권(主權)이 없었다.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을 통치 중이었고, 독립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과 국교(國交)가 없는 상태에서 이 대통령이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우려면 맥아더의 상관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은 1950년 6월 26일(한국시각 6월 27일)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월요일이 되자 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들은 어둡고 실망스러웠다. 이승만은 미 국무부의 전문(電文) 보고 형식으로 쓴 편지를 통하여 (나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6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북한 공산군은 남한에 무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각하와 미국 의회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태를 예상, 동양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군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이런 이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 대사는 낙담하여 울먹였다. 나는 전투가 겨우 48시간 지났을 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서 종국적 승리를 거두어 자유를 지켜냈다고 말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나는 그에게 버티어내라면서 지원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駐美대사에게 트루먼 만나라고 지시
KBS 도쿄 특파원은 바로 이날(6월 27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 요청을 하였다는 보도를 하였는데,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에게 망명 요청은커녕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KBS를 믿을까, 트루먼을 믿을까.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 연구원의 최근 논문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에 따르면 트루먼-장면(張勉) 대사 면담은 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이승만은 6월 27일 01:00시경에 주미(駐美)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한표욱 참사관이 전화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한 참사관에게, “필립(한표욱 참사관의 미국 이름-편집자 주), 일이 맹랑하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각 장 대사를 모시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대통령은 장 대사와 통화를 했다. 장 대사에게도, “우리 국민들은 잘 싸우고 있지만 무기가 없어서 큰 걱정이다. 제일 필요한 것이 탱크다. 그러니 빨리 탱크를 보내도록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표욱 참사관은 국무부의 한국 담당 나일스 본드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그날 27일 04:00시(워싱턴 시각 26일 15:00시)에 백악관에서 장면 대사는 트루먼과 회동했다.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고 난 후 이승만은 다시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복기 비서는, “이 대통령은 전화를 받은 맥아더 보좌관이 ‘원수는 지금 자고 있다’고 대답하자, ‘우리는 지금 잘 싸우고 있으나 무기가 없다. 그러니 탱크를 빨리 보내라. 만일에 당신들이 아니 도와줄 것 같으면 여기 미국 사람들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시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입을 막으시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재일교포 3세 교수님”
6월 24일자 KBS의 보도는 6·25 남침 사흘째인 27일에 이승만 정부가 일본으로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면서 이렇게 계속한다. 〈‘한국인 망명’에 대한 조금 더 정확한 공식 기록은 없을까? 여러 사람에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교토의 한 대학에 있는 ‘재일교포 3세’인 교수님이 한국전쟁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한 미국 공문서보관소의 ‘미 군정 문서’ 마이크로 필름을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토로 달려갔습니다.
이 문서는 한국전쟁 발생 열흘쯤 뒤인 1950년 7월 7일의 기록이었습니다.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일본 츄고쿠 지역 5개 현 지사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인 5만명 수용 계획’을 발표합니다. ‘다나카’ 지사는 영문으로 된 ‘비상조치 계획’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에서 야마구치현 아부 등 4개 자치단체에 20개의 피란 캠프와 마을을 만들고 임시 막사 1곳에 200명씩, 모두 250개 막사에 5만명을 수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재일교포 3세인 교수님’이란 표현은 보도 기사에선 쓰지 않는 존칭이다. KBS 기자가 이 교수를 취재대상이라기보다는 존경하거나 협력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인 망명’에 대한 자료를 추가적으로 찾으려 나선 KBS 기자가 발견한 것은 미 군정문서(맥아더 사령부 문서를 뜻하는 듯)인데 ‘비상조치 계획’이란 제목이다. 이 문서엔 이승만 정부의 망명 요청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한국에서 피란민이 몰려올 때에 대비한 계획서이다. KBS 기자는 이 계획이 이른바 6월 27일자의 외무성 전보(조작)에서 말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내용의 실천이라는 듯이 보도하였다. 즉 6월 27일에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하였고, 일본 외무성은 야마구치현에 준비를 지시, 만든 계획인 것처럼 보도한 것이다. ‘비상조치 계획’은 일본 지방행정 기관이 한반도의 전쟁 사태에 직면하여 세운 대비 계획일 뿐인데, 이승만 정부 망명 요청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소개한 것이다.
이날 KBS 기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승만을 폄하하려는 일념에 충실한다. ‘망명 요청’ 부분이 마무리되자 또다시 이승만을 걸고 든다.
〈당시 식량부족으로 배급을 받는 등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지도 못한 일본의 한 지방정부인 야마구치현이 이렇게 한국 관련 문제에 정통하고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정보실’이라는 별도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발생 이틀 전인 6월 23일에도 야마구치현 지사가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일본 총리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한국이 북한과 중국·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1차 저지선’이고, 야마구치현은 일본 본토의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한반도 정세 변화를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야마구치현의 대비 태세를 이렇게 칭찬하는 이유는 다음의 이승만 비판을 위한 포석(布石)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은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생 직전,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한국전쟁 발생 직후 이승만 정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마구치현이 남침을 예상할 정도인데, 이승만은 무능하였다는 뜻으로서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라는 표현을 썼는데, 왜 하필이면 만주사변으로 가는 길을 연 관동군의 ‘장작림(張作霖) 폭살 사건’을 덮었던 대표적인 일본 군국주의 총리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아들, 다나카 다쓰오 지사를 치켜세우면서 이승만을 폄하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시 미국의 CIA, 한국 육군의 정보국은 남침이 임박하였다는 판단을 하고 상부에 수많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전부터 “미군이 나가면 북한군이 틀림없이 남침한다”고 미국의 지도층에 호소하고, 나간 후엔 군사력 증강을 위한 지원을 끌어내는 데 전력(全力)을 다하였다. 육군 정보국은 하루 전에 ‘남침 임박’이란 첩보를 입수, 상부에 보고하였다. 당시 6사단 7연대 임부택 연대장은 춘천 정면의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6월 25일 직전 장병들의 외출까지 금지시키고 기다렸다(그 덕분에 춘천을 3일간 지켜냄으로써 북한군의 한강 이남 우회 포위 전략을 좌절시켰다). 이런 피나는 노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KBS 기자가 멀리 떨어진 야마구치현에서 이뤄진 한가한 정보활동을 미화(美化), 이승만을 격하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2년 전 ‘오마이뉴스’ 기사의 복사판
이승만 정부가 1950년 6월 27일에 일본에 망명 요청을 하였다고 단정한 KBS가 내어놓은 두 가지 자료(《야마구치 현사》와 미 군정 문서)에는 6월 27일이란 날짜가 없는데 기자는 어디서 이 날짜의 근거를 찾았을까? 구글을 검색해 보았다.
‘오마이뉴스’ 2013년 8월 29일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에는 〈일본 망명 정부 구상한 이승만, 선조와 닮았다〉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KBS가 지난 6월 24일에 특종이라면서 보도한 내용과 흡사하다. 이 글에 문제의 ‘6월 27일’이 등장한다.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일본 교도통신을 인용해서 보도한 바와 같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일본 망명 계획을 세웠다. 교도통신이 제시한 자료는 전 야마구치현 지사이자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다. 한·일 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 자료들에 따르면, 6월 27일 새벽에 수원 천도를 결정할 때에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이때 이승만이 심리적 공황 상태였다는 점은 존 무치오 대사가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외교관계’에 수록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존 무치오 대사는 “한국 지도부는 절망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내각은 망명 정부가 되어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능성에 대해 문의해 왔다”고 보고했다.〉
‘오마이뉴스’가 인용한 무초 대사의 6월 27일자 전문의 영어 원문을 찾았더니 위의 기사 내용과 전혀 달랐다.
〈서울, 1950년 6월 27일 오전 8시(미국시각 6월 26일 오후 6시45분에 접수). 국무총리 서리가 오전 7시에 나를 찾아와 대통령은 오전 3시에 진해를 향해, 내각은 오전 7시에 남쪽 지방을 향해 특별 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선장 신’(注: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선장 출신)은 전투가 오늘 오후까지는 모두 종료될 것이라면서 전권(全權)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위임했으며, 북한군 전차(戰車)가 서울에 들어오면 문을 닫고 집에 조용히 있으라고 국민들에게 방송했다고 말했다. 신은 육군 지휘부와 함께 최후까지 서울에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이었고,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에 망명 정부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물었으나, 나는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이 정보를 극동군 사령관에게도 보냄.〉
무초 대사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신성모는 서울이 함락되기 전의 절박한 심정에서 개인적으로 ‘일본으로 망명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며 미국 대사는 이를 묵살하였다. 신성모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그런 타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초가 간단하게 무시한 점으로 증명이 된다. 그런 중대사를 논의하려면 이 대통령이 직접 무초 대사를 부르든지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당시 일본을 통치 중)이나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어야 했다(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오마이뉴스’는 이 전문을 이렇게 왜곡하였다.
〈6월 27일 새벽에 수원 천도를 결정할 때에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신성모가 아니라 이 대통령이 직접 망명 타진을 했다고 변조(變造)한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왜곡
‘오마이뉴스’는 또, 〈‘미국 외교관계’에 수록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존 무치오 대사는 “한국 지도부는 절망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내각은 망명 정부가 되어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능성에 대해 문의해 왔다”고 보고했다〉고 왜곡하였다. 절망한 것은 ‘한국 지도부’가 아니라 신성모이며 망명 가능성에 대하여 문의해 온 사람 또한 ‘대통령과 내각’이 아니라 신성모였던 것이다.
이 짧은 문장 속의 거의 모든 정보가 허위이다. 이승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왜곡된 것이다. 문제는 이 기사가 이번 KBS 조작 기사의 원형(原型)처럼 비슷하다는 점이다.
KBS 기자는 기사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2년 전 ‘오마이뉴스’의 왜곡된 기사를 읽고서 일본 외무성의 전보(實在한다면 1950년 8월 작성)를 6월 27일자 신성모의 일본 망명 타진과 연관 지으면서 ‘6월 27일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을 창작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마이뉴스’의 왜곡 보도는 KBS 날조 보도의 ‘어머니’인가?
KBS의 6월 24일자 보도는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2년 전 ‘오마이뉴스’ 기사의 사실상 ‘복제판’이다. 그런데 KBS는 다른 언론사가 이미 2년 전에 보도한 내용에다가 ‘단독 보도’라는 월계관을 씌워서 그것도 6·25에 맞춰서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이승만을 죽이려는 집념 앞에서는 언론의 원칙이나 기자의 명예심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는 주로 좌파 성향 매체들을 타고 국내외로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KBS가 단정하였고, 기사의 진실성을 ‘단독 보도’라고 보증까지 하였으니 안심하고 퍼 날랐을 것이다.
KBS의 석혜원 기자는 ‘KBS 인터넷뉴스’에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 선조와 이승만〉이란 제목의 수필을 썼다. 날조된 정보에 근거,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한반도의 아침에 포성이 울려 퍼지고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망명을 타진하고 있던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망명 시도보다 350여 년 앞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 역시 ‘파천’하면 빼놓을 수 없다. (중략) 심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지도자의 자리를 감당하기에 당사자 역시 버거웠으리라. 하지만 그 결과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았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영남일보》의 사설은 제목이 〈36계 줄행랑과 이승만 망명 정부〉였다. 이 사설은 북진(北進)하는 왜군 앞에서 도성을 버린 선조와 이승만을 동급으로 비교하더니 이런 막말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신했다. 이승만은 바로 이날 6만명 규모의 망명 정부를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타진했다고 한다. ‘서울사수’ ‘북한군 격퇴’ 공언이 메아리로 채 사라지기도 전 어투 느린 노(老)대통령의 놀라우리만치 민첩한 행동이었다. 혼자 살겠다고 하는 리더의 도망은 ‘줄행랑’이란 속어조차 분에 넘치는,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망동이다. 도망도 도망 나름이다.〉
KBS가 망명 주장의 근거가 된 6월 27일자 전보의 날조를 자인(自認)한 지금 《영남일보》는 어디로 36계 줄행랑을 칠 작정인가. 도망도 도망 나름이다.
‘이 땅 보수파라는 사람들은…’
‘서울의 소리’라는 인터넷 매체도, KBS의 날조 보도를 사실로 전제한 뒤 〈이 같은 정권이므로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울 계획까지 했다는 것은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땅 보수파라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칭해야 한다는데 더 할 말이 없다〉면서, 〈한국전쟁 발발 65년이 되기 전날 공영방송 KBS를 통해 전해진 이 뉴스는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는 없고 민간만 있는 현재의 상황이 겹치면서 더욱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썼다.
사실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기자가, 나라가 왜군과 공산군에 기습을 당하여 혼란에 빠진 절망적 상황에서 어떻게 하든지 국가와 민족을 구해내려고 몸부림친 이승만과 선조를, 그 두 분의 성공적 전쟁 지도가 없었더라면 사라졌을 나라에 앉아서 한가하게 그 역사를 난도질을 하는 ‘거룩한’ 모습에서 조선조의 사대부(士大夫)를 이어가는 ‘양반기자’의 그림자가 보인다. 안보를 포기한 정치가 추해지듯이 사실을 포기하고 논평에 주력하는 기자는 이 모양이다.
KBS의 是正노력을 ‘굴욕’이라고 반발한 언론 단체
《한국기자협회보》 인터넷판은 지난 7월 8일 〈기사 삭제하고 반론 리포트까지… 황당한 KBS〉란 제목의 황당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자사 보도에 오류가 있어 반론을 전할 수 있지만 이례적으로 당초 보도와 같은 분량의 리포트로 전한 데다 단독이라고 내보낸 ‘이승만 정권 일본 망명설’ 기사를 온라인에서 삭제해 논란이 일고 있다〉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특히 KBS는 기념사업회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항상 6·25사변 중에서도 권총을 옆에다 놓으시고 주무셨다” “이 땅에 일본인들이 오게 되면 공산당에 겨누었던 총을 그놈들한테 먼저 겨누겠다고 그러셨다”며 당초 보도에 대한 반론과는 무관한 주장까지 담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군과 사투 중이던 1950년 6월 27일에 일본의 야마구치현으로 정부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KBS의 조작 보도를 반박하려면 당연히 이승만의 평소 반일(反日) 성향을 알려야 하는데 기자는 이것을 ‘무관한 주장’이라고 한 것이다. 이 기자는 또 KBS 기사가 삭제된 것은 단순한 오보여서가 아니라 기사의 핵심인 6월 27일이란 날짜가 조작돼서였음을 애써 묵살하였다.
오보나 조작이 밝혀지면 신속하게 정정과 기사 취소 조치를 취하여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여야 언론이다. 특히 공중파를 이용하는 공영방송은 그 파급력 때문에 가장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기자협회는 KBS의 오보 바로잡기 노력까지 ‘황당한 짓’인 양 몰아붙였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위원장 권오훈)는 지난 7월 6일 성명을 내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보수단체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내용의 반론보도를 들어줬다”며 “굴욕적 반론보도”라고 반발했다. KBS본부노조는 “해당 보도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은 일본 외무성이 야마구치현 지사에게 한국 정부의 망명 요청설을 전했다고 한 날인 1950년 6월 27일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뿐”이라고 강변하였다.
KBS의 문제 기사가 가장 크게 다룬 부분은 “남침 이틀 뒤에 벌써 일본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날짜가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던 것을 만들어 넣었음이 밝혀졌는데도 언론노조라는 이들이, “다르다는 것뿐”이라고 한다.
허위기사로 피해를 당한 사람의 반론을 받아준 것을 ‘굴욕적’이라고 했으니 이들은 자신들을 우상이나 성역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특권계층이고 기득권 세력이다. 모든 언론 활동의 중심은 기사이고, 기사의 중심은 ‘날짜’인 것이다. 날짜를 조작하는 기자, 그런 조작을 편드는 기자, 그런 조작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비방하는 이들은 언론이나 기자를 칭할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좌파 성향 전국언론노조에 뿌리를 둔 ‘미디어오늘’ 인터넷판은 지난 7월 8일 〈이승만 보도 관련 KBS 이사회 소집 논란 “‘친일사관’ 이인호 이사장, 방송 독립성 침해… 사퇴해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이 KBS의 이승만 정부 관련 보도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이사회 소집에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 옹호·독재 미화 사관 등을 문제 삼으며 이인호 이사장 선임에 반대했던 KBS 이사들은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KBS 이사회 김주언·이규환·조준상·최영묵 이사는 8일 성명을 내고 “이인호 이사장이 KBS의 ‘이승만 망명’ 보도를 별다른 근거 없이 공격하는 집단과 정파 대변인으로 자처하고 있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기사문이 아니고 무슨 격문(檄文) 같다. 더구나 KBS도 조작을 인정한 사안인데 ‘별다른 근거 없이 공격’한다니….
KBS 조작 사태를 통해 본 선동의 구조
이번 KBS 보도는 우리 사회에서 선동보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산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1.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를 시작으로
2. YTN이 받아서 상상력을 추가, 거의 소설 수준의 오보
3. 국내외의 좌파 선동 매체 일제히 ‘이승만 매도 기사’로 전파
4. 《영남일보》 등 비(非)좌파 매체도 망명 요청을 기정사실화하여 사설 등으로 비방
5. 일부 기자, 임진왜란 때의 선조에 이승만을 비교, 뭇매질 글쓰기
6. 조작 사실이 드러나자 KBS가 정정, 기사 삭제
7. 좌파 언론 단체들, KBS가 굴복하였다고 공격
8. 다른 언론들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KBS를 간접 엄호
9. 이인호 KBS 이사장이 이사회 소집하자 좌파 언론 단체들, 이사장 공격
10. 이사회에서 야당 측 이사들 조작 보도 논의 방해
기자가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형사가 도둑질을 하고, 검사가 공갈을 치고, 군인이 이적(利敵)질을 하고, 정치인이 대역(大逆)하고, 학자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직업적 반역이다. 한국은 공영방송이 건국 대통령을 모함하는 조작 보도를 하고 그 사실이 드러나도 교정이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절대로 체제와 자유를 지킬 수 없다.
7월 8일의 ‘KBS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사건’ 보고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공(對共)수사 기관에서 수십 년간 근무하였던 한 80대 노신사(老紳士)가 벌떡 일어나 화가 난 말투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승만을 미워하는 요사이 KBS를 보면 6월 28일에 북한군에 접수된 서울중앙방송(KBS의 前身)이 이승만 비방에 열을 올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승만 때문에 적화통일에 실패하였다고 판단, 한국에서 ‘이승만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김정일은 한국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이승만에 대하여는 사석(私席)에서라도 그런 말장난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공산당은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 “소련에 충성하는 공산주의자는 한인(韓人)의 탈을 쓴 러시아인이다”라고 했던 이승만이었다. 공산주의의 본질과 국제정세의 흐름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였던(무초 대사의 평) 그의 대전략에 넘어가 한반도 공산화에 실패하였던 김일성이 한국의 민주화를 틈타 국가 심장부에 심어놓은 종북(從北)세력이 성장, 한국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형성된 반이승만 분위기에 KBS까지 휘말려 들어 언론의 정도(正道)에서 탈선한 점이 이번 조작 사건의 본질일 것이다.⊙
대부분의 오보(誤報)는 기사 문장 속에 오보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증거가 숨어 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KBS 기사가 오보임을 확인하는 데는 10분으로 족하였다.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요청’ 기사가 나간 뒤 논란은 “KBS가 제시한 자료는 믿을 수 없다” “이승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식의 논란은 결론 없이 이어지고 그러는 사이에 ‘망명 요청’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 사실로 찍혀버린다. 그런 뒤에는 바로잡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KBS의 오보를 ‘조작’으로 규정하도록 한 것은 조갑제닷컴 조성호(趙成豪) 기자가 7월 2일에 쓴 기사였다. 조 기자는 KBS가 방송 화면에서 조금 보여준 야마구치현사(縣史)의 원문(原文)을 검색, KBS 기자가 기사 전개의 핵심인 ‘6월 27일’이란 날짜를 조작, 기사문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KBS의 보도 관계자들에게 이메일 등으로 해명을 요구한 상태에서 ‘조작 의혹’이라고 온건하게 제목을 단 기사를 올렸다.
造作
조 기자의 기사를 읽어본 필자는 ‘KBS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핵심적 ‘사실’에 확신을 가질 때 생기는 ‘감(感)’이었다. 다음날 KBS는 〈9시 뉴스〉를 통하여 사실상 정정(訂正)보도를 하였다.
〈KBS가 보도한 야마구치현 기록은 망명 정부 요청이 전쟁 초기 상황으로 묘사돼 있을 뿐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을 줄이면 ‘조작’ 또는 ‘날조’이다. KBS는 인터넷에 올라 있는 문제 기사와 동영상도 삭제하였다. 사실상 기사 취소를 한 셈이다. 공영방송으로서 당연한 조치였지만 전례(前例)가 드물다. 워낙 조작 사실이 명백하고 중대하기도 하였지만 KBS 지도부에 희망을 걸 수 있는 양식(良識)이 남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KBS가 문제 기사를 삭제한 다음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YTN이 같은 날 더 확실한 오보를 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YTN은 영어문서까지 자신만만하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일본 교토 오타니대학의 정우종 박사는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 당시 일본 정부에 망명 정권 설치를 요청했던 문서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공개했습니다. 문서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권이 미 대사관과 일본 정부에 야마구치현에 6만명 규모의 망명 정권을 설치하는 방안을 타진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방송대로라면 결정적 공문서(公文書)까지 찾은 것이다. YTN 보도가 하도 구체적이라 필자는 화면(畵面)을 정지시켜 가면서 영어문서를 읽어보았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KBS에서 소개한 영문 ‘비상조치 계획서’였다. 이 계획서에는 YTN이 보도한,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권이 미 대사관과 일본 정부에 야마구치현에 6만명 규모의 망명 정권을 설치하는 방안을 타진〉한 기록이 없다.
조성호 기자가, YTN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독자적인 취재를 하지 않고, KBS의 자료를 받아 썼다는 설명이었다.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관련 기사는 조심하지만 이승만·박정희(朴正熙)에 대하여는 아무리 과장, 왜곡, 날조해도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안심감이 기자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에게 이승만·박정희는 동네북이고 김대중·노무현은 성역(聖域)이다.
논란?
KBS의 2015년 6월 24일자 뉴스는 특종임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역사적 논란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 망명 요청설’인데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제로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을까요?〉
이 문장부터 틀렸다. ‘일본 망명 요청설’이 논란거리였다는 전제(前提)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전(韓國戰) 전문가들이 수천 명이지만 그것을 논란거리로 삼은 이는 없다. 역사 수정론에 빠진 좌익 학자들 중에서도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일부 수준 낮은 음모론자가 아니라면 이승만이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일본 망명 요청설’이란 말 자체가 KBS의 창작이다. ‘태양이 서쪽에서 뜬다’는 주장을 추적하기로 한 것처럼 KBS의 보도는 시작부터가 허망하다. 다음 문장도 문제적이다.
〈한국전쟁 발생 직후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다급한 상황이라,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망명 지역’으로 거론됐던 일본 야마구치 현청의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엇을 적은 ‘공식 기록’을 말하는가? 한국전 당시의 정부 공식 기록은 많다. ‘없다’는 것은 ‘일본 망명을 뒷받침하는 공식 문서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한국 정부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려 하니 쓸데없이 일본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것이다. KBS 기자는 그런 헛수고 대신에 외교부나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대한민국 정부가 1950년 6월 27일 일본에 망명 요청을 한 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어야 했다.
다나카 지사의 회고
〈야마구치현의 역사를 기록한 《야마구치 현사》에서 1950년의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다나카 다쓰오’ 야마구치현 지사(知事)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핵심적인 문장은 KBS도 인정한 허위이다. 《야마구치 현사》에는 6월 27일에 그런 전보를 받았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KBS가 이승만이 적전(敵前) 도망을 꾀했다고 조작하기 위하여 만들어 넣은 날짜가 6월 27일이다. 화면에서 6월 27일을 문서 위에 파 넣는 식으로 편집, 사실임을 강조하였다.
이 보도가 좌익 진영을 넘어 국내외로 급속히 퍼져간 이유는 ‘남침 이틀 뒤에 벌써 일본으로 도망치려 했다고?’하는 호기심과 분노를 자극한 때문일 것이다. KBS가 지난 7월 3일 스스로 ‘단독 보도’의 핵심적 사실인 6월 27일을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으므로 이 기사 전체는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었다.(조성호 기자는 기사 작성자와 보도 책임자에게 반론이나 해명을 요청하였으나 답신을 받지 못하였다.)
조성호 기자가 KBS에 소개된 《야마구치 현사》의 원문을 찾았는데, 당시 지사 다나카 다쓰오의 회고담이었다.
〈…釜山の北のね,洛東江の川の所まで北朝鮮軍ママが来てね。それで,このまま行ったならば,釜山は第二のダンケルクになると。そういった時にどうするかという問題ですが,外務省の方から電報が入ってね,韓国政府は六万人の亡命政権を山口県に作るということを希望しとると.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이대로 가면 부산은 ‘제2의 됭케르크’(注: 프랑스의 해안 도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르덴 숲 지대를 돌파한 독일군에 포위당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탈출한 곳)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인데, 외무성 사람으로부터 전보(電報)가 와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만들길 희망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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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보도 화면에 적어넣은 ‘외무성(1950.6.27)’은 조작이다. (KBS 영상 캡처) |
당시의 다급한 정황을 전하는 다나카 다쓰오 지사의 회고담 가운데 한 줄, “외무성 사람으로부터 전보가 와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만들길 희망한다고” 운운하는 대목이 KBS 기자에 의하여 ‘이승만 6월 27일 일본 망명 요청’으로 조작된다. 그런 전보가 있었다고 해도 8월에 작성된 것인데, KBS 기자는 ‘6월 27일자 외무성 전보’라고 조작, 결사항전을 지도하는 이승만을 ‘적전 도망 기도자’로 만든 것이다.
KBS는 문제의 일본 외무성 전보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다나카 다쓰오 당시 지사가 기억해 두었다가 전한 전보의 내용이니, 즉 ‘카더라’식의 ‘전문(傳聞) 증거’라서 믿을 수 없다. KBS는 이 믿을 수 없는 전문을 직접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다나카 지사의 ‘카더라’ 전문 내용은 한국과 미국의 최고급 정부 문서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증거 능력이 없다. 사실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8월에도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KBS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외무성 전보라는 것과 거기에 담겨 있다는 전문 내용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믿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날짜를 남침 직후로 조작, 이승만을 도망자로 만드는 효과를 극대화한다.
1950년 여름과 가을, 한국의 운명이 경각(頃刻)에 달렸을 때 이승만의 적대적(敵對的)인 대일관(對日觀)을 보여주는 증언이 많은데 ‘왜관발언’이라고 알려진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서 요약한다.
〈이승만 박사는 부산 육군병원을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한다.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을 듣고는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 유명한 ‘왜관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것이다.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 의용병이었다. 주일(駐日) 대표부의 김용주(金龍周) 공사는 기자들이 몰려들자 직접 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 지원군이다”고 설명드린 다음, 기자들에겐 이 대통령의 발언이 와전(訛傳)되었다고 하여 수습하였다.〉
이승만이 트루먼에게 망명 요청을 했어야
KBS의 보도대로 이승만이 일본 정부에 망명 요청을 하려면 다음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주권(主權)이 없었다.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을 통치 중이었고, 독립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과 국교(國交)가 없는 상태에서 이 대통령이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우려면 맥아더의 상관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은 1950년 6월 26일(한국시각 6월 27일)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월요일이 되자 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들은 어둡고 실망스러웠다. 이승만은 미 국무부의 전문(電文) 보고 형식으로 쓴 편지를 통하여 (나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6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북한 공산군은 남한에 무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각하와 미국 의회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태를 예상, 동양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군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이런 이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 대사는 낙담하여 울먹였다. 나는 전투가 겨우 48시간 지났을 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서 종국적 승리를 거두어 자유를 지켜냈다고 말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나는 그에게 버티어내라면서 지원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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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부산에서 전황 브리핑을 받고 있는 한국 정부 요인들. 표정이 어둡다.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장면 총리, 무초 주한미국대사.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 연구원의 최근 논문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에 따르면 트루먼-장면(張勉) 대사 면담은 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이승만은 6월 27일 01:00시경에 주미(駐美)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한표욱 참사관이 전화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한 참사관에게, “필립(한표욱 참사관의 미국 이름-편집자 주), 일이 맹랑하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각 장 대사를 모시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대통령은 장 대사와 통화를 했다. 장 대사에게도, “우리 국민들은 잘 싸우고 있지만 무기가 없어서 큰 걱정이다. 제일 필요한 것이 탱크다. 그러니 빨리 탱크를 보내도록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표욱 참사관은 국무부의 한국 담당 나일스 본드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그날 27일 04:00시(워싱턴 시각 26일 15:00시)에 백악관에서 장면 대사는 트루먼과 회동했다.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고 난 후 이승만은 다시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복기 비서는, “이 대통령은 전화를 받은 맥아더 보좌관이 ‘원수는 지금 자고 있다’고 대답하자, ‘우리는 지금 잘 싸우고 있으나 무기가 없다. 그러니 탱크를 빨리 보내라. 만일에 당신들이 아니 도와줄 것 같으면 여기 미국 사람들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시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입을 막으시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재일교포 3세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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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내놓은 ‘비상조치 계획’은 일본 지방행정 기관이 한반도의 전쟁 사태에 직면하여 세운 대비 계획에 불과하다. |
이 문서는 한국전쟁 발생 열흘쯤 뒤인 1950년 7월 7일의 기록이었습니다.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일본 츄고쿠 지역 5개 현 지사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인 5만명 수용 계획’을 발표합니다. ‘다나카’ 지사는 영문으로 된 ‘비상조치 계획’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에서 야마구치현 아부 등 4개 자치단체에 20개의 피란 캠프와 마을을 만들고 임시 막사 1곳에 200명씩, 모두 250개 막사에 5만명을 수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재일교포 3세인 교수님’이란 표현은 보도 기사에선 쓰지 않는 존칭이다. KBS 기자가 이 교수를 취재대상이라기보다는 존경하거나 협력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인 망명’에 대한 자료를 추가적으로 찾으려 나선 KBS 기자가 발견한 것은 미 군정문서(맥아더 사령부 문서를 뜻하는 듯)인데 ‘비상조치 계획’이란 제목이다. 이 문서엔 이승만 정부의 망명 요청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한국에서 피란민이 몰려올 때에 대비한 계획서이다. KBS 기자는 이 계획이 이른바 6월 27일자의 외무성 전보(조작)에서 말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내용의 실천이라는 듯이 보도하였다. 즉 6월 27일에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하였고, 일본 외무성은 야마구치현에 준비를 지시, 만든 계획인 것처럼 보도한 것이다. ‘비상조치 계획’은 일본 지방행정 기관이 한반도의 전쟁 사태에 직면하여 세운 대비 계획일 뿐인데, 이승만 정부 망명 요청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소개한 것이다.
이날 KBS 기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승만을 폄하하려는 일념에 충실한다. ‘망명 요청’ 부분이 마무리되자 또다시 이승만을 걸고 든다.
〈당시 식량부족으로 배급을 받는 등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지도 못한 일본의 한 지방정부인 야마구치현이 이렇게 한국 관련 문제에 정통하고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정보실’이라는 별도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발생 이틀 전인 6월 23일에도 야마구치현 지사가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일본 총리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한국이 북한과 중국·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1차 저지선’이고, 야마구치현은 일본 본토의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한반도 정세 변화를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야마구치현의 대비 태세를 이렇게 칭찬하는 이유는 다음의 이승만 비판을 위한 포석(布石)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은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생 직전,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한국전쟁 발생 직후 이승만 정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마구치현이 남침을 예상할 정도인데, 이승만은 무능하였다는 뜻으로서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라는 표현을 썼는데, 왜 하필이면 만주사변으로 가는 길을 연 관동군의 ‘장작림(張作霖) 폭살 사건’을 덮었던 대표적인 일본 군국주의 총리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아들, 다나카 다쓰오 지사를 치켜세우면서 이승만을 폄하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시 미국의 CIA, 한국 육군의 정보국은 남침이 임박하였다는 판단을 하고 상부에 수많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전부터 “미군이 나가면 북한군이 틀림없이 남침한다”고 미국의 지도층에 호소하고, 나간 후엔 군사력 증강을 위한 지원을 끌어내는 데 전력(全力)을 다하였다. 육군 정보국은 하루 전에 ‘남침 임박’이란 첩보를 입수, 상부에 보고하였다. 당시 6사단 7연대 임부택 연대장은 춘천 정면의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6월 25일 직전 장병들의 외출까지 금지시키고 기다렸다(그 덕분에 춘천을 3일간 지켜냄으로써 북한군의 한강 이남 우회 포위 전략을 좌절시켰다). 이런 피나는 노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KBS 기자가 멀리 떨어진 야마구치현에서 이뤄진 한가한 정보활동을 미화(美化), 이승만을 격하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2년 전 ‘오마이뉴스’ 기사의 복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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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인용된 무초 대사의 6월 27일자 電文의 영어 原文. ‘오마이뉴스’ 보도와는 상반된 내용이다. |
‘오마이뉴스’ 2013년 8월 29일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에는 〈일본 망명 정부 구상한 이승만, 선조와 닮았다〉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KBS가 지난 6월 24일에 특종이라면서 보도한 내용과 흡사하다. 이 글에 문제의 ‘6월 27일’이 등장한다.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일본 교도통신을 인용해서 보도한 바와 같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일본 망명 계획을 세웠다. 교도통신이 제시한 자료는 전 야마구치현 지사이자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다. 한·일 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 자료들에 따르면, 6월 27일 새벽에 수원 천도를 결정할 때에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이때 이승만이 심리적 공황 상태였다는 점은 존 무치오 대사가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외교관계’에 수록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존 무치오 대사는 “한국 지도부는 절망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내각은 망명 정부가 되어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능성에 대해 문의해 왔다”고 보고했다.〉
‘오마이뉴스’가 인용한 무초 대사의 6월 27일자 전문의 영어 원문을 찾았더니 위의 기사 내용과 전혀 달랐다.
〈서울, 1950년 6월 27일 오전 8시(미국시각 6월 26일 오후 6시45분에 접수). 국무총리 서리가 오전 7시에 나를 찾아와 대통령은 오전 3시에 진해를 향해, 내각은 오전 7시에 남쪽 지방을 향해 특별 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선장 신’(注: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선장 출신)은 전투가 오늘 오후까지는 모두 종료될 것이라면서 전권(全權)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위임했으며, 북한군 전차(戰車)가 서울에 들어오면 문을 닫고 집에 조용히 있으라고 국민들에게 방송했다고 말했다. 신은 육군 지휘부와 함께 최후까지 서울에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이었고,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에 망명 정부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물었으나, 나는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이 정보를 극동군 사령관에게도 보냄.〉
무초 대사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신성모는 서울이 함락되기 전의 절박한 심정에서 개인적으로 ‘일본으로 망명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며 미국 대사는 이를 묵살하였다. 신성모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그런 타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초가 간단하게 무시한 점으로 증명이 된다. 그런 중대사를 논의하려면 이 대통령이 직접 무초 대사를 부르든지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당시 일본을 통치 중)이나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어야 했다(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오마이뉴스’는 이 전문을 이렇게 왜곡하였다.
〈6월 27일 새벽에 수원 천도를 결정할 때에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신성모가 아니라 이 대통령이 직접 망명 타진을 했다고 변조(變造)한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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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13년 8월 29일자 ‘일본 망명 정부 구상한 이승만, 선조와 닮았다’ 中. |
이 짧은 문장 속의 거의 모든 정보가 허위이다. 이승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왜곡된 것이다. 문제는 이 기사가 이번 KBS 조작 기사의 원형(原型)처럼 비슷하다는 점이다.
KBS 기자는 기사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2년 전 ‘오마이뉴스’의 왜곡된 기사를 읽고서 일본 외무성의 전보(實在한다면 1950년 8월 작성)를 6월 27일자 신성모의 일본 망명 타진과 연관 지으면서 ‘6월 27일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을 창작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마이뉴스’의 왜곡 보도는 KBS 날조 보도의 ‘어머니’인가?
KBS의 6월 24일자 보도는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2년 전 ‘오마이뉴스’ 기사의 사실상 ‘복제판’이다. 그런데 KBS는 다른 언론사가 이미 2년 전에 보도한 내용에다가 ‘단독 보도’라는 월계관을 씌워서 그것도 6·25에 맞춰서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이승만을 죽이려는 집념 앞에서는 언론의 원칙이나 기자의 명예심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는 주로 좌파 성향 매체들을 타고 국내외로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KBS가 단정하였고, 기사의 진실성을 ‘단독 보도’라고 보증까지 하였으니 안심하고 퍼 날랐을 것이다.
KBS의 석혜원 기자는 ‘KBS 인터넷뉴스’에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 선조와 이승만〉이란 제목의 수필을 썼다. 날조된 정보에 근거,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한반도의 아침에 포성이 울려 퍼지고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망명을 타진하고 있던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망명 시도보다 350여 년 앞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 역시 ‘파천’하면 빼놓을 수 없다. (중략) 심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지도자의 자리를 감당하기에 당사자 역시 버거웠으리라. 하지만 그 결과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았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영남일보》의 사설은 제목이 〈36계 줄행랑과 이승만 망명 정부〉였다. 이 사설은 북진(北進)하는 왜군 앞에서 도성을 버린 선조와 이승만을 동급으로 비교하더니 이런 막말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신했다. 이승만은 바로 이날 6만명 규모의 망명 정부를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타진했다고 한다. ‘서울사수’ ‘북한군 격퇴’ 공언이 메아리로 채 사라지기도 전 어투 느린 노(老)대통령의 놀라우리만치 민첩한 행동이었다. 혼자 살겠다고 하는 리더의 도망은 ‘줄행랑’이란 속어조차 분에 넘치는,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망동이다. 도망도 도망 나름이다.〉
KBS가 망명 주장의 근거가 된 6월 27일자 전보의 날조를 자인(自認)한 지금 《영남일보》는 어디로 36계 줄행랑을 칠 작정인가. 도망도 도망 나름이다.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은 국가원수로서 군통수권자로서 해야 될 일을 정확히 수행했다. 그 3일간은 75세의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짜인 이승만의 3일간(72시간) 행적은 완벽, 그 자체였다. 최고의 참모진도 그와 같은 매뉴얼을 작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매뉴얼이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벅찬 업무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국가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기습받은 나라의 지휘부는 보통 공황상태에 빠지는데(스탈린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은 후 며칠간 출근을 하지 않고 지휘도 포기하였다), 이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남 박사가 재구성한 이 대통령의 일정은 이렇다. 〈6월 25일 10:00시, 남침상황을 보고받은 직후, 이승만은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시경)를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의 회동(11:35), 주미대사관 전화(미국 지원 요청, 13:00), 긴급 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 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2차 회동(22:00 이후),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군사경력자 회의 지시(22:00시 이후)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전쟁 다음날인 6월 26일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03:00), 무초 대사에게 전화(04:30),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 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주미대사관에 전화(27일, 01:00 이후), 맥아더에게 전화, 신성모와 조병옥 등 피란 건의 접수(02:00), 청량리에 적의 전차가 진입하였다는 경찰의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이다.〉 이 대통령은 사흘간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남 박사는 “남침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국가위기 해결을 위한 국가 안보 시스템이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그럼에도 이승만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처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나 중앙정보국 그리고 미 국방부 및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을 건의받아 전쟁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력에 의존해 전쟁을 지도해 나갔다”고 했다. 〈전시(戰時) 국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이승만은 두 가지 원칙하에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우선 대통령과 자신과 정부 그리고 군이 해야 될 일을 정하고, 그것부터 처리해 나갔다. 그다음에는 전쟁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미국에 알리고, 그다음부터는 미국으로부터 그것을 얻어내는 데 주력했다. 대신 순수한 군사작전에 관한 사항은 군부에 일임했다. 대미외교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지원과 미국의 참전을 위해 노력했다.〉 남정옥 박사는 “전쟁 중에 이승만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였다”고 했다. 이 박사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야 할 일이라고 다짐한 것은 한국 정부의 해외(제주도 포함) 이전(또는 망명)과 일본군의 참전이었다. 남 박사는 KBS의 ‘6월 27일 일본 망명 타진’ 보도에 대하여 ‘이승만의 머릿속에는 일본 망명이란 말조차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했다. |
‘이 땅 보수파라는 사람들은…’
‘서울의 소리’라는 인터넷 매체도, KBS의 날조 보도를 사실로 전제한 뒤 〈이 같은 정권이므로 일본에 망명 정부를 세울 계획까지 했다는 것은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땅 보수파라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칭해야 한다는데 더 할 말이 없다〉면서, 〈한국전쟁 발발 65년이 되기 전날 공영방송 KBS를 통해 전해진 이 뉴스는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는 없고 민간만 있는 현재의 상황이 겹치면서 더욱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썼다.
사실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기자가, 나라가 왜군과 공산군에 기습을 당하여 혼란에 빠진 절망적 상황에서 어떻게 하든지 국가와 민족을 구해내려고 몸부림친 이승만과 선조를, 그 두 분의 성공적 전쟁 지도가 없었더라면 사라졌을 나라에 앉아서 한가하게 그 역사를 난도질을 하는 ‘거룩한’ 모습에서 조선조의 사대부(士大夫)를 이어가는 ‘양반기자’의 그림자가 보인다. 안보를 포기한 정치가 추해지듯이 사실을 포기하고 논평에 주력하는 기자는 이 모양이다.
KBS의 是正노력을 ‘굴욕’이라고 반발한 언론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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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7월 3일자 〈9시 뉴스〉(제목: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 망명 정부 요청설’ 부인)를 통해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라고 해명했다. |
〈특히 KBS는 기념사업회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항상 6·25사변 중에서도 권총을 옆에다 놓으시고 주무셨다” “이 땅에 일본인들이 오게 되면 공산당에 겨누었던 총을 그놈들한테 먼저 겨누겠다고 그러셨다”며 당초 보도에 대한 반론과는 무관한 주장까지 담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군과 사투 중이던 1950년 6월 27일에 일본의 야마구치현으로 정부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KBS의 조작 보도를 반박하려면 당연히 이승만의 평소 반일(反日) 성향을 알려야 하는데 기자는 이것을 ‘무관한 주장’이라고 한 것이다. 이 기자는 또 KBS 기사가 삭제된 것은 단순한 오보여서가 아니라 기사의 핵심인 6월 27일이란 날짜가 조작돼서였음을 애써 묵살하였다.
오보나 조작이 밝혀지면 신속하게 정정과 기사 취소 조치를 취하여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여야 언론이다. 특히 공중파를 이용하는 공영방송은 그 파급력 때문에 가장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기자협회는 KBS의 오보 바로잡기 노력까지 ‘황당한 짓’인 양 몰아붙였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위원장 권오훈)는 지난 7월 6일 성명을 내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보수단체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내용의 반론보도를 들어줬다”며 “굴욕적 반론보도”라고 반발했다. KBS본부노조는 “해당 보도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은 일본 외무성이 야마구치현 지사에게 한국 정부의 망명 요청설을 전했다고 한 날인 1950년 6월 27일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뿐”이라고 강변하였다.
KBS의 문제 기사가 가장 크게 다룬 부분은 “남침 이틀 뒤에 벌써 일본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날짜가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던 것을 만들어 넣었음이 밝혀졌는데도 언론노조라는 이들이, “다르다는 것뿐”이라고 한다.
허위기사로 피해를 당한 사람의 반론을 받아준 것을 ‘굴욕적’이라고 했으니 이들은 자신들을 우상이나 성역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특권계층이고 기득권 세력이다. 모든 언론 활동의 중심은 기사이고, 기사의 중심은 ‘날짜’인 것이다. 날짜를 조작하는 기자, 그런 조작을 편드는 기자, 그런 조작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비방하는 이들은 언론이나 기자를 칭할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좌파 성향 전국언론노조에 뿌리를 둔 ‘미디어오늘’ 인터넷판은 지난 7월 8일 〈이승만 보도 관련 KBS 이사회 소집 논란 “‘친일사관’ 이인호 이사장, 방송 독립성 침해… 사퇴해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이 KBS의 이승만 정부 관련 보도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이사회 소집에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 옹호·독재 미화 사관 등을 문제 삼으며 이인호 이사장 선임에 반대했던 KBS 이사들은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KBS 이사회 김주언·이규환·조준상·최영묵 이사는 8일 성명을 내고 “이인호 이사장이 KBS의 ‘이승만 망명’ 보도를 별다른 근거 없이 공격하는 집단과 정파 대변인으로 자처하고 있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기사문이 아니고 무슨 격문(檄文) 같다. 더구나 KBS도 조작을 인정한 사안인데 ‘별다른 근거 없이 공격’한다니….
KBS 조작 사태를 통해 본 선동의 구조
이번 KBS 보도는 우리 사회에서 선동보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산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1.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를 시작으로
2. YTN이 받아서 상상력을 추가, 거의 소설 수준의 오보
3. 국내외의 좌파 선동 매체 일제히 ‘이승만 매도 기사’로 전파
4. 《영남일보》 등 비(非)좌파 매체도 망명 요청을 기정사실화하여 사설 등으로 비방
5. 일부 기자, 임진왜란 때의 선조에 이승만을 비교, 뭇매질 글쓰기
6. 조작 사실이 드러나자 KBS가 정정, 기사 삭제
7. 좌파 언론 단체들, KBS가 굴복하였다고 공격
8. 다른 언론들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KBS를 간접 엄호
9. 이인호 KBS 이사장이 이사회 소집하자 좌파 언론 단체들, 이사장 공격
10. 이사회에서 야당 측 이사들 조작 보도 논의 방해
기자가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형사가 도둑질을 하고, 검사가 공갈을 치고, 군인이 이적(利敵)질을 하고, 정치인이 대역(大逆)하고, 학자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직업적 반역이다. 한국은 공영방송이 건국 대통령을 모함하는 조작 보도를 하고 그 사실이 드러나도 교정이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절대로 체제와 자유를 지킬 수 없다.
7월 8일의 ‘KBS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사건’ 보고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공(對共)수사 기관에서 수십 년간 근무하였던 한 80대 노신사(老紳士)가 벌떡 일어나 화가 난 말투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승만을 미워하는 요사이 KBS를 보면 6월 28일에 북한군에 접수된 서울중앙방송(KBS의 前身)이 이승만 비방에 열을 올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승만 때문에 적화통일에 실패하였다고 판단, 한국에서 ‘이승만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김정일은 한국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이승만에 대하여는 사석(私席)에서라도 그런 말장난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공산당은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 “소련에 충성하는 공산주의자는 한인(韓人)의 탈을 쓴 러시아인이다”라고 했던 이승만이었다. 공산주의의 본질과 국제정세의 흐름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였던(무초 대사의 평) 그의 대전략에 넘어가 한반도 공산화에 실패하였던 김일성이 한국의 민주화를 틈타 국가 심장부에 심어놓은 종북(從北)세력이 성장, 한국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형성된 반이승만 분위기에 KBS까지 휘말려 들어 언론의 정도(正道)에서 탈선한 점이 이번 조작 사건의 본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