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의 與奪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申欽)
⊙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공민왕)
⊙ “우왕이 신돈의 소생이라면 우왕을 폐위하였을 때… 어찌 이색에게 묻고 하였으며 이색 또한 당연히
전왕(우왕)의 아들 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겠는가?”《逐睡篇》
金丁鉉
⊙ 78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공민왕)
⊙ “우왕이 신돈의 소생이라면 우왕을 폐위하였을 때… 어찌 이색에게 묻고 하였으며 이색 또한 당연히
전왕(우왕)의 아들 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겠는가?”《逐睡篇》
金丁鉉
⊙ 78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 고려말 우왕과 창왕의 혈통에 대해 조선의 공식 역사와는 다른 기록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원천석.
정사(正史)에 실린 고려 말기의 기록들 중에는 그 내용이 진실일까 싶은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왕(禑王)의 혈통 문제가 그렇다. 과연 우왕은 선왕(先王)인 공민왕(恭愍王)의 핏줄인가, 아닌가.
조선 초기에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한 여러 수사관(修史官)들이 찬술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을 신우(辛禑)라 표기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니 공민왕이니 하는 왕의 시호(諡號)를 붙이지 아니한 것으로 단지 성(姓)과 이름 자(字)만 표기하여 사적(史蹟)을 기록해 둔 것이다.
《고려사》는 원래 고려시대의 조정(朝廷) 신하인 황주량(黃周亮), 이제현(李齊賢) 등이 편찬한 고려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고해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사》를 엮은 것은 조선 개국(開國)에 참여한 옛 고려의 신하들이었다. 고려 말 역사의 상당 시기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의 집권 시대였다.
이성계의 집권 시기에 우왕의 핏줄 문제가 부단히 제기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해 뒷날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한 조정 신료들은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고 공민왕의 혈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왕의 탄생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우왕은 승려 출신인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되어 있다. 신돈은 공민왕 시대에 정승 못지않은 지위에 있던 권신(權臣)이었다. 그는 소싯적에 사찰 노비(奴婢) 자식이었다. 자라서 승려가 된 그를 공민왕에게 소개한 사람은 조정 신료(臣僚)인 김원명(金元命)이었다. 이후 그는 왕과 가까워지면서 신임을 얻어 왕의 스승이 되었고, 국정(國政)에 참여하여 토지개혁과 노비해방 등의 개혁정치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그는 한동안 민심을 얻었다. 반면에 상류계층으로부터는 반감을 많이 샀다. 이렇듯 신돈은 처음에는 선정(善政)을 하는 듯했지만, 오래지 않아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다. 국정을 전횡하면서 정적(政敵)을 많이 갖게 되었고, 결국 그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공민왕은 사부로 삼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한 젊은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 여인의 이름은 반야(盤若)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반야는 신돈의 비첩(婢妾·첩이 된 여자 종)이라 하였다. 공민왕은 이 반야를 좋아하여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고 한다.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왕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하였다. 신돈이 죽은 후엔 모니노(牟尼奴)를 데려다가 명덕태후(明德太后)의 궁에 두고 수시중(守侍中·부총리) 이인임(李仁任)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맏아들이 있으니 근심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다 하여 그녀와 가까이하였더니 아이가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런 내용의 기사도 있다.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권중화(權仲和)를 전정당문학(前政堂文學·종2품벼슬) 이색(李穡)의 집에 보내 모니노란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이에 이색은 문신(文臣)들을 모아 놓고 이름으로 쓸 여덟 글자를 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그중에서 우(禑)를 선택하였다.〉
모니노란 이름은 불가(佛家)에서 ‘석가모니의 종’이란 뜻을 가진 말이었다. 그리고 반야는 ‘여러 부처의 어머니’란 뜻을 지닌 말이었다. 공민왕은 모니노를 데려다가 죽은 궁인(宮人·궁녀)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삼았다는 기사도 《고려사》에 있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우왕이 신돈이 낳은 자식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고려사》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 신우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비판이 있었다.
申欽의 비판
조선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은 《상촌집(象村集)》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려사》의 여탈(與奪·주는 것과 빼앗는 것)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 말년의 사적(事蹟)은 더욱 어긋나 있고 틀렸다. 그것이 비록 조선 왕실에 관한 것이라 하여도 역사에 어찌 사실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덮어 버릴 수 있는가? 창(昌·창왕)을 세운 일, 우(禑·우왕)를 보낸 일,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일들, 이 3건의 일은 큰 범죄로 기록될 사안인데도 오히려 그 일들로 원신(元臣)과 고로(故老)들을 전락시키고 떠나보내고 하였으니 마침내는 나라(고려)를 빼앗은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이다, 윤소종(尹紹宗)이다, 조준(趙浚)이다, 하는 자들은 하늘이 없었는지? 《고려사》를 엮은 이는 정인지였다. 정인지는 세종(世宗), 문종(文宗) 두 왕조에서 신임과 사랑을 받아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국은 임금(단종)을 음해(陰害)한 역적이 되었다.〉
이런 내용도 있다.
〈우왕과 창왕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元天錫)의 기록을 진실한 역사로 삼아야 한다. 최영(崔瑩)이 죽으니 고려에는 사람이 없어졌고 정도전이 들어오니 고려에는 역적이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조선)가 일어나고 나라(고려)가 망하였다. 대개 고려가 망한 것은 무진년(戊辰年)에 임금(우왕)을 폐한 데 있었다.
임금을 폐한 뒤에도 이색 같은 분들이 남아 있어서 한 가닥 공정(公正)한 의논들이 없어지지는 아니 하였다. 그래서 그때 정도전, 윤소종 등의 무리가 우왕을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충신이라 일컫고 왕씨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반역자라 몰아세우는 소리가 높았다. 그리하여 조정을 혼란케 만들었고 인심을 현혹토록 하였다.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이 있는 선비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하여 입을 봉하게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5년 만에 나라(고려)가 망한 것이다. 그 시대에 나서 바르고 곧은 마음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삶이 얼마나 고생스러웠겠는가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재갈 물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골구석에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역사를 기록해 남기려 한 원천석의 붓도 있었으니 죽순(竹笋)을 돌이 누르면 옆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어찌 같다 하지 않겠는가?〉
이인임과 우왕
원천석은 호가 운곡(耘谷)이고 이색과 더불어 학문이 뛰어났던 학자였다. 그는 조선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이 몇 차례나 찾아가서 조선에 입사(入仕·벼슬에 오르는 것)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끝내 응하지 아니 하였다.
원천석은 누구보다도 우왕을 공민왕의 혈통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우왕과 우왕의 아들 창왕이 폐위된 것에 남달리 애통해하였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詩)를 남기기도 하였다.
윤이와 이초는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아울러 이색 등 중신(重臣)들이 살해되었다고 무고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무고에 의해 이색, 권근(權近), 이숭인(李崇仁) 등이 배후로 지목받고 당시 시중(侍中·총리)이었던 이성계에 의해 옥에 갇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回軍) 이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면서 실권자(實權者)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성계보다 앞서 실권자였던 이인임과 그의 일당은 귀양을 가면서 조정에서는 흔적을 감추다시피 하였다.
이인임은 모니노, 즉 어린 우를 데리고 온 후 수하 사람을 시켜 반야를 살해하였다. 우왕은 열 살 때 즉위했다. 일부 조정 신료들은 우를 왕위에 올리는 데 반대했다. 우가 공민왕의 혈통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으니 다른 왕족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 왕으로 세우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은 반대 여론을 제압하고 어린 우를 왕위에 올렸다. 우를 낳은 반야는 살해했다. 이후 이인임은 정권을 잡고 국정을 전횡했다.
申欽의 鄭道傳 비판
신흠의 《상촌집》에는 우왕이 공민왕의 혈통임을 시사(示唆)하는 대목이 있다.
〈김진양(金震陽)이 정도전을 탄핵하는 소(訴)에서 “형벌할 수 없는 것에 형벌을 하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 ‘형벌을 할 수 없는 것에 형벌을 한다’고 한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父子)를 말하였다.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한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大夫·높은 벼슬의 품계 칭호)를 말한 것이다.
만일에 김 공(김진양)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다면 고려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의 상소가 있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일부 조정 신하들과 유생들이 궐문 앞에서 읍소(泣訴)를 한 뒤에야 겨우 처리에 들어갔으니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읽다가 이 대목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이다.〉
〈정도전이 이숭인 공과 더불어 이색을 스승으로 삼았다. 재주와 명성이 서로 비슷했는데 정도전은 공이 가는 길과 달랐다. 공이 앞서 나가 있는 데서 정도전은 불평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권신이 되어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시켜 공이 귀향 간 고을의 수령으로 내려보내서 공을 매질하여 죽게 하였다. 심한 일이었다. 소인(小人)의 마음 씀이여!
얼마 안 있어 정도전이 방석(芳碩)의 난(亂)에 가담하여 육신(肉身)이 갈라졌고 황거정은 정도전의 문객(門客)인 데서 태종에게 거슬려 공훈이 삭제되고 회복하지 못하였다. 자손이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의 논의가 허락되지 않아 역시 회복을 못하였다. 정도전이 입은 화(禍)는 이숭인보다 더 참혹하였다.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났는데 하늘의 도리는 헛됨이 없었다. 족히 훗날의 소인배에게는 마땅히 경계 삼을 일이었다.〉
김진양은 나라의 제반 정사(政事)를 맡은 최고의 관청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인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있으면서 “정도전, 조준 등이 변란을 획책하고 있는데 이에 민심이 흉흉하다”는 상소를 왕께 올려 그들을 유배 가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병중인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해서 자신이 멀리 귀양을 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우왕과 창왕은 辛씨 아니다”
이숭인은 정몽주(鄭夢周), 이색과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린 인물이었다. 벼슬은 역시 정3품인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있었다. 이 벼슬은 학문이 뛰어난 신하가 주로 제수 받는 관직이었다. 그의 문장은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名士)들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종은 정도전의 수하 황거정이 이숭인을 죽였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 듣고서는 크게 노하여 “내가 일찍 그분의 문장과 덕망을 존경하였는데 그분의 죽음이 바로 네 짓이라니!” 하고 당장 공훈을 빼앗고 귀양을 보냈다고 하였다.
고려의 조정 신하로 조선 개국에 나서지 않거나 협력을 하지 아니한 중신들은 대개가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 아닌 공민왕의 혈통으로 믿고 있었다. 조선에 와서 조선에 벼슬을 한 사람들 중에서도 양심(良心)과 양식(良識)이 있는 신하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곤륜(崑崙) 최창대(崔昌大)의 시문집(詩文集)을 보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글에 ‘국가가 만세(萬世)를 지난 뒤에는 당연히 운곡(耘谷)이 말한 것을 따를 것이다’ 하는 대목이 있었다. 최창대는 곧은 성질의 학자였고 숙종 때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일화(逸話)를 모아 엮은 책 《축수편(逐睡篇)》(작자 미상)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조(前朝·고려)에서 보인 혁명 때의 역사 기록은 극히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우왕과 창왕의 일 그것이다. 만약 우왕이 진실로 신돈의 소생이라면 우왕을 폐위하였을 때 마땅히 종실(宗室·왕가)의 사람 중에 어진 분을 선택해 세워야 할 일이었지 어찌 이색에게 묻고 하였으며 이색 또한 당연히 전왕(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겠는가? 그러니 우왕과 창왕은 결코 신씨(辛氏)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원천석의 野史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원천석이 남긴 기록’이란 무엇인가? 원천석의 유고(遺稿) 가운데 야사(野史)로 보이는 책 6권이 있었다. 이 야사는 고려 말의 나랏일을 직필(直筆)한 것인데, 여기에 ‘우왕은 분명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천석은 이 여섯 권의 책을 아들에게 주면서 “이 중 두 권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열어 보라. 고려 말의 국사(國史)가 그간 알려진 내용과 다른 것이 많아 조정에서 이 내용을 알면 집안이 큰 화(禍)를 입을 수 있다”면서 “책은 증손자 대에서나 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천석의 집안에서는 호기심 때문에 당부를 어기고 일찍 책을 열어 보았는데, 원천석의 말대로 집안이 멸족(滅族)될 수도 있는 위험한 내용임을 알고 즉시 그 두 책을 불태워 버렸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글이 《축수편》에도 있었다.
〈공이 일찍이 야사를 지어서 상자에 넣고 자물쇠로 굳게 채워 두었다가 운명할 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춰 놓고 조심해 지키라” 하고 그 상자 곁에다 “내 자손이 만약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 하였다. 집안에서는 아들과 손자 대에는 열지 아니 하다가 증손에 이르러 명절 제사 때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인데서 “이미 오래되었으니 열어 보자” 하고 보았는데 그 내용은 나라의 역사와 다른 기록이 많았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종족들이 멸할 위험이 크다며 불태웠다고 했다.〉
원천석은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 부자를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이유로서 폐서인(廢庶人)하여 각각 강원도 강릉과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왕요를 공양왕으로 옹립하자 이런 시(詩)를 썼다.
〈전왕(前王)의 부자 서로 갈려 멀고 먼 하늘가 동(東)에 있고 서(西)에 있네. 그 한 몸을 서인 되게 할 수 있어도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前王父子各分離萬里東西天一涯(전왕부자각분리만리동서천일애)
可使一身爲庶類寸心千古不遷移(가사일신위서류촌심천고불천이)〉
원천석이 지은 시조(時調)에는 청소년들도 잘 아는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하는 것도 있다.
역사의 희생자들
우왕 재위 기간은 100년 동안 종주국 행세를 하던 원(元)나라가 쇠퇴하고 신흥 명(明)나라가 대두하던 시기였다. 고려의 신료(臣僚)들도 친명파(親明派)와 친원파(親元派)로 갈라져 대립했다. 권력다툼에 패한 사람은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당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를 지지하는 친명파가 득세하면서 보수적인 친원파는 몰락했다.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죽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권력다툼이야 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조선 건국 세력이 우왕 부자가 공민왕의 혈통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은 지나치다. 원천석이나 신흠 등이 우왕 부자를 신원(伸寃)하려 한 것도 권력을 쥔 자들의 역사 왜곡을 미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바로 보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날에는 권력이나 이념의 입맛에 따라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없는가….⊙
조선 초기에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한 여러 수사관(修史官)들이 찬술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을 신우(辛禑)라 표기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니 공민왕이니 하는 왕의 시호(諡號)를 붙이지 아니한 것으로 단지 성(姓)과 이름 자(字)만 표기하여 사적(史蹟)을 기록해 둔 것이다.
《고려사》는 원래 고려시대의 조정(朝廷) 신하인 황주량(黃周亮), 이제현(李齊賢) 등이 편찬한 고려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고해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사》를 엮은 것은 조선 개국(開國)에 참여한 옛 고려의 신하들이었다. 고려 말 역사의 상당 시기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의 집권 시대였다.
이성계의 집권 시기에 우왕의 핏줄 문제가 부단히 제기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해 뒷날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한 조정 신료들은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고 공민왕의 혈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왕의 탄생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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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공민왕 世家’에는 공민왕이 우왕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공민왕은 사부로 삼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한 젊은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 여인의 이름은 반야(盤若)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반야는 신돈의 비첩(婢妾·첩이 된 여자 종)이라 하였다. 공민왕은 이 반야를 좋아하여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고 한다.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왕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하였다. 신돈이 죽은 후엔 모니노(牟尼奴)를 데려다가 명덕태후(明德太后)의 궁에 두고 수시중(守侍中·부총리) 이인임(李仁任)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맏아들이 있으니 근심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다 하여 그녀와 가까이하였더니 아이가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런 내용의 기사도 있다.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권중화(權仲和)를 전정당문학(前政堂文學·종2품벼슬) 이색(李穡)의 집에 보내 모니노란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이에 이색은 문신(文臣)들을 모아 놓고 이름으로 쓸 여덟 글자를 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그중에서 우(禑)를 선택하였다.〉
모니노란 이름은 불가(佛家)에서 ‘석가모니의 종’이란 뜻을 가진 말이었다. 그리고 반야는 ‘여러 부처의 어머니’란 뜻을 지닌 말이었다. 공민왕은 모니노를 데려다가 죽은 궁인(宮人·궁녀)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삼았다는 기사도 《고려사》에 있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우왕이 신돈이 낳은 자식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고려사》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 신우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비판이 있었다.
申欽의 비판
조선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은 《상촌집(象村集)》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려사》의 여탈(與奪·주는 것과 빼앗는 것)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 말년의 사적(事蹟)은 더욱 어긋나 있고 틀렸다. 그것이 비록 조선 왕실에 관한 것이라 하여도 역사에 어찌 사실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덮어 버릴 수 있는가? 창(昌·창왕)을 세운 일, 우(禑·우왕)를 보낸 일,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일들, 이 3건의 일은 큰 범죄로 기록될 사안인데도 오히려 그 일들로 원신(元臣)과 고로(故老)들을 전락시키고 떠나보내고 하였으니 마침내는 나라(고려)를 빼앗은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이다, 윤소종(尹紹宗)이다, 조준(趙浚)이다, 하는 자들은 하늘이 없었는지? 《고려사》를 엮은 이는 정인지였다. 정인지는 세종(世宗), 문종(文宗) 두 왕조에서 신임과 사랑을 받아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국은 임금(단종)을 음해(陰害)한 역적이 되었다.〉
이런 내용도 있다.
〈우왕과 창왕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元天錫)의 기록을 진실한 역사로 삼아야 한다. 최영(崔瑩)이 죽으니 고려에는 사람이 없어졌고 정도전이 들어오니 고려에는 역적이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조선)가 일어나고 나라(고려)가 망하였다. 대개 고려가 망한 것은 무진년(戊辰年)에 임금(우왕)을 폐한 데 있었다.
임금을 폐한 뒤에도 이색 같은 분들이 남아 있어서 한 가닥 공정(公正)한 의논들이 없어지지는 아니 하였다. 그래서 그때 정도전, 윤소종 등의 무리가 우왕을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충신이라 일컫고 왕씨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반역자라 몰아세우는 소리가 높았다. 그리하여 조정을 혼란케 만들었고 인심을 현혹토록 하였다.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이 있는 선비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하여 입을 봉하게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5년 만에 나라(고려)가 망한 것이다. 그 시대에 나서 바르고 곧은 마음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삶이 얼마나 고생스러웠겠는가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재갈 물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골구석에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역사를 기록해 남기려 한 원천석의 붓도 있었으니 죽순(竹笋)을 돌이 누르면 옆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어찌 같다 하지 않겠는가?〉
이인임과 우왕
원천석은 호가 운곡(耘谷)이고 이색과 더불어 학문이 뛰어났던 학자였다. 그는 조선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이 몇 차례나 찾아가서 조선에 입사(入仕·벼슬에 오르는 것)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끝내 응하지 아니 하였다.
원천석은 누구보다도 우왕을 공민왕의 혈통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우왕과 우왕의 아들 창왕이 폐위된 것에 남달리 애통해하였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詩)를 남기기도 하였다.
윤이와 이초는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아울러 이색 등 중신(重臣)들이 살해되었다고 무고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무고에 의해 이색, 권근(權近), 이숭인(李崇仁) 등이 배후로 지목받고 당시 시중(侍中·총리)이었던 이성계에 의해 옥에 갇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回軍) 이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면서 실권자(實權者)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성계보다 앞서 실권자였던 이인임과 그의 일당은 귀양을 가면서 조정에서는 흔적을 감추다시피 하였다.
이인임은 모니노, 즉 어린 우를 데리고 온 후 수하 사람을 시켜 반야를 살해하였다. 우왕은 열 살 때 즉위했다. 일부 조정 신료들은 우를 왕위에 올리는 데 반대했다. 우가 공민왕의 혈통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으니 다른 왕족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 왕으로 세우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은 반대 여론을 제압하고 어린 우를 왕위에 올렸다. 우를 낳은 반야는 살해했다. 이후 이인임은 정권을 잡고 국정을 전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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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방영된 KBS사극 〈정도전〉 속의 우왕.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다가 정치적 격변의 희생양이 되는 인물로 묘사됐다. |
〈김진양(金震陽)이 정도전을 탄핵하는 소(訴)에서 “형벌할 수 없는 것에 형벌을 하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 ‘형벌을 할 수 없는 것에 형벌을 한다’고 한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父子)를 말하였다.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한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大夫·높은 벼슬의 품계 칭호)를 말한 것이다.
만일에 김 공(김진양)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다면 고려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의 상소가 있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일부 조정 신하들과 유생들이 궐문 앞에서 읍소(泣訴)를 한 뒤에야 겨우 처리에 들어갔으니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읽다가 이 대목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이다.〉
〈정도전이 이숭인 공과 더불어 이색을 스승으로 삼았다. 재주와 명성이 서로 비슷했는데 정도전은 공이 가는 길과 달랐다. 공이 앞서 나가 있는 데서 정도전은 불평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권신이 되어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시켜 공이 귀향 간 고을의 수령으로 내려보내서 공을 매질하여 죽게 하였다. 심한 일이었다. 소인(小人)의 마음 씀이여!
얼마 안 있어 정도전이 방석(芳碩)의 난(亂)에 가담하여 육신(肉身)이 갈라졌고 황거정은 정도전의 문객(門客)인 데서 태종에게 거슬려 공훈이 삭제되고 회복하지 못하였다. 자손이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의 논의가 허락되지 않아 역시 회복을 못하였다. 정도전이 입은 화(禍)는 이숭인보다 더 참혹하였다.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났는데 하늘의 도리는 헛됨이 없었다. 족히 훗날의 소인배에게는 마땅히 경계 삼을 일이었다.〉
김진양은 나라의 제반 정사(政事)를 맡은 최고의 관청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인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있으면서 “정도전, 조준 등이 변란을 획책하고 있는데 이에 민심이 흉흉하다”는 상소를 왕께 올려 그들을 유배 가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병중인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해서 자신이 멀리 귀양을 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우왕과 창왕은 辛씨 아니다”
이숭인은 정몽주(鄭夢周), 이색과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린 인물이었다. 벼슬은 역시 정3품인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있었다. 이 벼슬은 학문이 뛰어난 신하가 주로 제수 받는 관직이었다. 그의 문장은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名士)들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종은 정도전의 수하 황거정이 이숭인을 죽였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 듣고서는 크게 노하여 “내가 일찍 그분의 문장과 덕망을 존경하였는데 그분의 죽음이 바로 네 짓이라니!” 하고 당장 공훈을 빼앗고 귀양을 보냈다고 하였다.
고려의 조정 신하로 조선 개국에 나서지 않거나 협력을 하지 아니한 중신들은 대개가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 아닌 공민왕의 혈통으로 믿고 있었다. 조선에 와서 조선에 벼슬을 한 사람들 중에서도 양심(良心)과 양식(良識)이 있는 신하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곤륜(崑崙) 최창대(崔昌大)의 시문집(詩文集)을 보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글에 ‘국가가 만세(萬世)를 지난 뒤에는 당연히 운곡(耘谷)이 말한 것을 따를 것이다’ 하는 대목이 있었다. 최창대는 곧은 성질의 학자였고 숙종 때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일화(逸話)를 모아 엮은 책 《축수편(逐睡篇)》(작자 미상)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조(前朝·고려)에서 보인 혁명 때의 역사 기록은 극히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우왕과 창왕의 일 그것이다. 만약 우왕이 진실로 신돈의 소생이라면 우왕을 폐위하였을 때 마땅히 종실(宗室·왕가)의 사람 중에 어진 분을 선택해 세워야 할 일이었지 어찌 이색에게 묻고 하였으며 이색 또한 당연히 전왕(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겠는가? 그러니 우왕과 창왕은 결코 신씨(辛氏)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원천석이 남긴 기록’이란 무엇인가? 원천석의 유고(遺稿) 가운데 야사(野史)로 보이는 책 6권이 있었다. 이 야사는 고려 말의 나랏일을 직필(直筆)한 것인데, 여기에 ‘우왕은 분명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천석은 이 여섯 권의 책을 아들에게 주면서 “이 중 두 권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열어 보라. 고려 말의 국사(國史)가 그간 알려진 내용과 다른 것이 많아 조정에서 이 내용을 알면 집안이 큰 화(禍)를 입을 수 있다”면서 “책은 증손자 대에서나 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천석의 집안에서는 호기심 때문에 당부를 어기고 일찍 책을 열어 보았는데, 원천석의 말대로 집안이 멸족(滅族)될 수도 있는 위험한 내용임을 알고 즉시 그 두 책을 불태워 버렸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글이 《축수편》에도 있었다.
〈공이 일찍이 야사를 지어서 상자에 넣고 자물쇠로 굳게 채워 두었다가 운명할 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춰 놓고 조심해 지키라” 하고 그 상자 곁에다 “내 자손이 만약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 하였다. 집안에서는 아들과 손자 대에는 열지 아니 하다가 증손에 이르러 명절 제사 때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인데서 “이미 오래되었으니 열어 보자” 하고 보았는데 그 내용은 나라의 역사와 다른 기록이 많았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종족들이 멸할 위험이 크다며 불태웠다고 했다.〉
원천석은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 부자를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이유로서 폐서인(廢庶人)하여 각각 강원도 강릉과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왕요를 공양왕으로 옹립하자 이런 시(詩)를 썼다.
〈전왕(前王)의 부자 서로 갈려 멀고 먼 하늘가 동(東)에 있고 서(西)에 있네. 그 한 몸을 서인 되게 할 수 있어도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前王父子各分離萬里東西天一涯(전왕부자각분리만리동서천일애)
可使一身爲庶類寸心千古不遷移(가사일신위서류촌심천고불천이)〉
원천석이 지은 시조(時調)에는 청소년들도 잘 아는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하는 것도 있다.
역사의 희생자들
우왕 재위 기간은 100년 동안 종주국 행세를 하던 원(元)나라가 쇠퇴하고 신흥 명(明)나라가 대두하던 시기였다. 고려의 신료(臣僚)들도 친명파(親明派)와 친원파(親元派)로 갈라져 대립했다. 권력다툼에 패한 사람은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당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를 지지하는 친명파가 득세하면서 보수적인 친원파는 몰락했다.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죽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권력다툼이야 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조선 건국 세력이 우왕 부자가 공민왕의 혈통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은 지나치다. 원천석이나 신흠 등이 우왕 부자를 신원(伸寃)하려 한 것도 권력을 쥔 자들의 역사 왜곡을 미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바로 보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날에는 권력이나 이념의 입맛에 따라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