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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연해주 의병과 柳麟錫 (上)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대장은 유인석이었다!

글 : 정우택  前 세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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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 의병 倡義 과정에서 유인석의 역할 밝혀낸 성과
⊙ 안중근이 ‘한국 의병의 총대장’이라 언급한 김두성은 유인석의 가명

鄭禹澤
⊙ 75세. 연세대 경제학과 졸. 인하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 경희대 대학원 사학과 졸(문학박사).
⊙ 서울은행 LA지점장, 세명대 교수·대학원장, 現 화서학회 고문, 한국유림총연합 부총재.
구한말 항일의병들. 이들은 이후 연해주, 만주 등지로 이동해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10월26일은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연해주(沿海州) 한국 의병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거사했다면서 “연해주 한국 의병의 총대장은 김두성(金斗星)”이라고 진술했다. 이 김두성이 누구인가는 그동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은 안중근이 말한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倡義·의병을 일으킴)대장이 유인석(柳麟錫·1842~1915)임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유인석은 1908년 4월과 6월 두 차례 연해주에 건너가 항일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했다. 유인석은 그 후 8월 말~9월 초에 연해주에 망명하였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는, 을미(乙未·1895년)의병 후 2차의 만주 망명에서 돌아와 연해주 의병을 일으킨 후 1908년 가을에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유인석의 《의암집》 외에 이정규(李正奎)의 《종의록》, 조창용(趙昌容)의 《백농실기》 등을 주로 참고한 것이다. 또한 《의암집》과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등 일제 수사 기관의 정보 자료를 사실로 보고 활용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 자료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느냐는 것은 불확실하다. 일제가 작성한 만큼 한계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의암집》의 경우도 큰 줄거리는 연결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유인석의 사후 2년이 지난 1917년에 적지나 다름없는 만주 회인현에서 일제의 감시 속에 간행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책 발간이 안 될 것을 염려해 연해주 의병 창의 과정 모두를 스스로 뺐거나, 일제의 검열에 삭제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1908년 4~7월 4개월간의 공백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싶다.
 
  그해 4~5월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유인석은 연해주를 왕복했다. 6~7월에 다시 연해주에 건너가서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의암집》을 근거로 하고 이 공백 기간을 《독립운동자료》로 보충하여 연해주 의병사(史)에서 유인석의 역할을 밝히고자 한다. 이 연구를 하다가 안중근 의사가 연해주 의병의 총대장이라고 진술한 김두성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음을 밝힌다.
 
 
  기존 연구는 《독립운동자료》에 별다른 비중 두지 않아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 선생. 안중근 의사가 연해주 의병 총대장이라고 했던 김두성은 유인석의 가명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특정 자료는 《독립운동자료》와 《의암집》을 말한다. 《독립운동자료》에는 연해주 의병 창의와 관련한 유인석의 기록이 10건에 이르지만, 《의암집》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존 연구는 《독립운동자료》에 대해 별 비중을 두지 않았다. 일제 수사 기관의 수사 정보 보고서에 불과한 부정확한 자료라거나, 단지 의병의 동향 파악에 필요한 정보 정도로 취급한 탓이리라. 그러나 《독립운동자료》의 ‘1908년 8월 함경도 정보(헌기 제432호)’와 같은 기록은 사실성을 검증한 결과 자료 가치가 상당히 높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의암집》이 누락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유인석이 사망한 2년 뒤인 1917년에 문인들이 그의 글을 모아 적지와 다름없는 만주에서 편집했다면 당연히 사실을 숨기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문인들이 간과하여 편집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일제의 검열에 따라 본의 아니게 삭제되었거나 문인·지인·가족과 동포의 안위를 배려하기 위해 뺐을 가능성도 있다.
 
  《의암집》에 기록이 없는 1908년 4~7월간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료 누락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경기도 김포의 통진에서 4월 6일경 길을 나선 유인석은 하룻길 거리의 부평에 두 달 후인 5월 말경에 도착한다. 두 달간의 행적이 실종된 것이다. 또 9개월 전(1907년 9월 12일) 순국한 신재봉(申在鳳)을, 7월로 추정되는 시기에 새삼 조문했다면, 이것은 황해도 동북부의 평산을 갔다왔다는 증거다.
 
  검증 결과, 유인석은 1908년 4월 말경 창의를 결의하는 블라디보스토크 회합에 참석하였다. 또 그해 6월 말경 창의에도 참석하여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자료》에 있는 유인석의 연해주 의병 활동기록은 사실이다. 사실로 확인된 유인석의 연해주 의병 활동에 관한 《독립운동자료》의 기록이 《의암집》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면, 기록의 누락이 확실한 것이다.
 
 
  《독립운동자료》와 《의암집》에 기초한 가설
 
의병장 유인석 선생의 글씨.
  이 글에서 중요하게 다룰 《의암집》의 1908년 기록 원문(原文)이다.
 
  〈戊申 先生六十七歲 正月 與諸陣別紙… 言東南諸陣 宜往西北 定根據於白頭山附近 茂山 三水甲山等地 連結淸俄舊境… 哭尹陽燮 二月 移留富平鵲村 後移通津 四月復還富平 五月還入京城 哭申在鳳 七月 發入俄地 留海蔘港…〉
 
  다음은 《독립운동자료》의 1908년 8월 일제 수사 기관이 보고한 ‘함경도 정보’이다.
 
  〈暴徒 巨魁 柳麟錫 及 李範允의 부하가 되어 其 財務官으로 目下 활동 중이라고 하는 金奭永이라는 자의 소식에 대하여 聞知한 要領은 左와 如하다.
 
  一. 柳麟錫은 본년 四月頃 만주 길림성에 있어서 馬賊을 募集 中이던 바 同月 中 李範允을 海蔘威(浦鹽)로 방문 大擧할 約束을 結하고 길림성으로 돌아와 盛히 馬賊을 召集 당시 渠의 子弟 급 部下이었던 약 五六千名의 다수에 달하고 항상 李範允과 교통하고 있었으나 본년 六月 下旬頃 李範允에 가려고 길림성을 출발하였다고 하나 其 後 渠의 소식은 불명이라고 한다.
 
  一. 金奭永은 元 外部主事로… 韓國有意의 士로서… 今回 李範允 等의 事를 擧하자 直時 李範允을 訪問(場所 不明)… 其 部下가 되어 財務官으로 武器의 買收 及 軍糧 等의 職에 當하고 또 自己에게 있었던 有志者라고 하는 輩 八九名도 같이 李의 部下가 되게 하고 海蔘威 及 北間島에서 크게 活動하고 있다고 한다.〉
 
  1908년 4~7월 사이에 연해주 한국 의병진에는 중요한 여러 사건이 있었다. 의병 창의에 관한 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며, 국내 진공을 감행하여 승패를 거듭하였다. 그렇다면 이 계획의 창안자인 유인석은 《의암집》에서 왜 이렇게 연해주 의병 활동을 소극적으로 다뤘을까.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먼저 《의암집》에서 통진을 떠난 시기는 양력 4월 6일로 추정된다. 통진서 부평까지는 하룻길밖에 안 된다. 약 2개월 후인 5월 말경 부평에 돌아왔다면 어디인가를 돌아서 왔다는 얘기다. 그동안 유인석은 연해주를 왕복했다는 추리이다. 《독립운동자료》를 보면 이 기간 유인석은 만주 길림성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李範允·1856~1940)을 만나 연해주 의병의 창의를 결의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5월 부평을 거쳐 서울에 돌아온 6월(음력 5월)~8월(음력 7월)까지 약 2개월간 유인석의 행적이다. 이 기간 유인석은 1908년 6월 말경 이범윤을 만나기 위해서 만주 길림성으로 떠났다. 그리고 6월 말경 연해주 의병을 창의하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는 증거가 《독립운동자료》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안중근이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을 시작한 때이다. 귀로(歸路)의 근거는 황해도 평산의 문인 신재봉 조문에서 확인된다.
 
  다시 유인석은 음력 7월 러시아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전 국내에서는 그를 창의대장으로 삼고 활동하는 근거가 확인되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발견된 통문의 기록이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가설을 설정하고 그를 검증했다. ‘가설1’과 ‘가설2’는 물론, ‘가설3’ 중 ‘국내외 창의대장’ 부분은 앞선 연구에서 설정할 수 없는 가설이다.
 
  가설1: 유인석은 1908년 4월 말 연해주에 건너가 이범윤과 회동하여 한국 의병의 창의 계획에 직접 참여했다.
 
  가설2: 유인석은 다시 같은 해 6월 말 연해주에서 한국 의병을 창의하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때 부장수는 이범윤 등이다.
 
  가설3: 유인석은 같은 해 8월 부산 동래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연해주로 망명했다. 6월 창의부터 국내외 창의대장이 되었으며 1914년 초까지 한국 의병을 지휘하였다.
 
 
  연해주 한국 의병에서 유인석의 활약
 
  《의암집》을 다시 살펴본다. “1908년 음력 2월 부평 작촌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이어 통진으로 갔다. 4월에 다시 부평에 돌아왔다가 5월에 서울에 돌아왔다. 7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러시아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머물렀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단순하게 기록한 《의암집》의 내용과 달리 《독립운동자료》에는 이 기간 연해주 의병과 유인석이 관련된 10건에 이르는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유인석의 연해주 의병 연구는 《독립운동자료》의 ‘1908년 8월 함경도 정보(헌기 제432호)’가 사실이며, 《의암집》의 ‘1908년 4~7월간’에 유인석의 연해주 의병 활동의 누락을 전제로 하였다. 가설 검증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유인석이 통진을 떠난 4월 6일 이후 부평에 돌아온 5월 말(음 4월 말)이 ‘유인석의 연해주 의병 창의 계획’(가설1)이다. 다음 6월 초부터 연해주 망명 이전인 7월 말~8월 초까지를 ‘연해주 의병 창의대장 유인석’(가설2)으로 논증하였다. 그 후 유인석은 ‘연해주에 망명’(가설3)하였다.
 
 
  연해주 의병 창의
 
안중근 의사.
  그동안 관련 연구의 일반적인 방향은 연해주 의병의 창의 지도부에 이범윤과 최재형(崔才亨·1858~1920)을 거론하고 국내 진공을 지휘한 장수로서는 안중근을 말한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후 여순 공판정에서 창의대장을 김두성으로 진술하였다. 이 글에서는 유인석이 연해주 의병의 창의 계획부터 참여하고 창의에서 대장에 추대되었다고 했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연해주 의병 창의 후 1908년 8월 말~9월 초에 그가 처음 러시아에 망명했다는 논지와는 다르다.
 
  유인석은 창의 구국의 뜻을 담은 결연한 의지의 시를 남기고 4월 6일경 통진을 떠났다. 그가 가는 곳이 북지(北地)라면 의당 행선지는 의병 전쟁의 최적지로 이미 결정했던 러시아 땅이다. 그의 연해주 의병 창의 계획 참여를 《독립운동자료》에 의거해 기술한다.
 
  1908년 8월 함경도 정보인 ‘헌기 제432호’ 기록을 참고하였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앞서 밝힌 바 있다.
 
  유인석은 1908년 4월 말경 길림성 경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이범윤을 만났다. 유인석이 이범윤과 만나 창의 계획을 결의한 때가 4월 말이라는 추정은 여러 자료의 연계 분석에서 가능하다.
 
  1908년 4월 5일 한식날 밤 자작시에서 소남을 동반하였다는 기록과 안중근이 유인석을 만날 때 15세가량의 남자를 대동한 것을 보았다는 진술이다. 그때가 봄이면 4월에 속하며 4월 6일에 통진을 떠났다면 4월 말경일 것이다. 안중근이 이 회합에 동석하였다는 근거는 동의회 간부들이 동참한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아래 기록인 유인석이 5월 중순 평남 개천을 경유한 것 또한 그의 블라디보스토크 출발 시점이 4월 말경임을 뒷받침한다.
 
  ‘헌기 제432호’를 참조할 때 유인석은 4월 말경에는 길림성에 있었다. 따라서 유인석은 1908년 8~9월에 연해주에 처음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해 4월 창의 계획의 주역이다. 유인석의 4월 말 창의 계획 주도와 함께 국내 진공을 위한 국내 의병의 모병 활동 등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창의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다.
 
  일제 수사 기관의 ‘1908년 5월 평안도 정보’로서 귀로의 의병 활동이다.
 
  〈暴徒 柳麟錫 一. 右는 現時 평안남도 개천군에 在하여 부하 천여 명을 인솔하고 또 殷山 成川 등 지방에 檄文을 發하여 曰 國家多事의 금일 衆民은 安業할 수 없다. 二十歲 이상 四十歲 이하의 남자는 마땅히 각 戶로부터 一名式 반드시 出陣해야 할 旨 命하여 만약에 출진하지 않을 時는 가옥을 燒棄하겠다 하고 威嚇하고 있다. 따라서 該 지방은 점점 賊勢가 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유인석이 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 계획을 이범윤 등과 결의하였다, 다시 평남 개천에 들러 문인을 중심한 의병세력의 협조를 얻어 모병과 창의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다시 부평에 돌아왔다는 증거이다. 그가 4월 6일 통진을 출발했다면 연해주까지 25일 이내에 도착이 가능하며, 다시 5월 초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길림성, 개천을 경유하여 부평에 귀환한 때가 5월 말이면 역시 25일 이내로서 대개 2개월의 기간이다.
 
  《독립운동자료》에 나타나는 1908년 봄 안중근이 유인석을 만났다는 진술과 5월 중 개천에서 유인석의 모병 활동은 4월 말로 추정되는 시기 연해주 의병 창의 계획에 그가 동참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유인석이 연해주 한국 의병의 주도적 입장에서 활동한 사례를 좀 더 살펴본다.
 
  〈情報 一, 西間島 右便(右方의 意) 四十里地 松山下 廣地를 韓鵬擧(韓登擧와 동일인인가)가 수 년 전에 점령하고 거주하였던바 자기의 부하 수천 명을 同地에 이주시키고 평시 무기를 휴대하고 훈련하여 그 토지를 永興國이라 칭하고 있었던바 본년 5월경 李範允·柳麟錫 등이 창의하였다는 것을 듣고 동시 右 兩名方에 書面을 發하고 共히 國權을 回復하고자 하는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1908년 5월의 이 정보는 첫째, 연해주 한국 의병의 창의는 사실이며, 둘째 창의에 이범윤·유인석이 함께 참여했다는 기록이다. 유인석이 1908년 5월경 창의했다는 내용은 창의를 결단한 때로 볼 수도 있고, 창의를 한붕거(韓鵬擧)가 그때 들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 동의회 창립시기로 볼 수도 있다. 동의회는 의병조직에 근접한 단체로 볼 수 있다. 실제 이때 모인 기부금이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의 밑거름이 되었다.
 
 
  연해주 의병 창의대장
 
  유인석은 6월 말 다시 연해주 의병의 이범윤 진영과 합류했음을 앞의 ‘헌기 제432호’에서 밝혔다. 유인석이 당시 이범윤을 만나기 위해 길림성을 떠났다면 이미 4월에 합의한 창의의 목적 외에 다른 임무가 있을 수 없다. 여러 자료를 근거할 때 연해주 의병이 창의한 때는 1908년 6월 말경이다. 안중근이 두만강을 건넌 때가 7월 3일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자료》를 검토할 때 유인석은 연해주 의병 창의 과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창의대장에까지 추대되었다. 아울러 국내외를 아우르는 창의대장으로 한국 의병을 이끌었다. 연해주 의병의 체계는 창의대장 유인석·부장수 이범윤 등으로 구성되었다. 6월 말경 연해주 의병의 창의 후 유인석의 행적을 살펴 그의 의병 활동 행적을 확인한다.
 
  아래 글은 의주 경찰서장이 조선통감부의 장관대리 앞으로 보고한 자료다. 유인석에 관한 정보이며 별지1·2 정보 사본 2부를 첨부했다.
 
  〈賊魁 柳麟錫이 마적과 내통하고 폭도를 선동한 건에 관하여 별지 사본과 같이 의주 경찰서장으로부터 전보가 있었음으로 동 지방 사정에 관하여 특히 주의하시도록 이에 말씀드립니다.〉
 
  1908년 7월 24일자의 첫째 글 정보 ‘별지1’은 의주 경찰서장이 통감부의 국장에게 보낸 전문 사본으로 유인석의 동태에 대한 정보이다. 또 둘째 글 ‘별지2’의 문서로 7월 22일 창성군·초산군에서 활동 중인 유인석의 동태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유인석은 1908년 7월 중순으로 추정되는 때에 평북 초산·창성·의주 부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별지1) 賊魁 柳麟錫은 현재 초산군 내 청국 국경을 배회하면서 마적과 내통하며 열심히 폭도를 선동 모집하고 있는데, 모이는 자가 1000~2000명의 인민 소요가 예측된다는 보고가 있다. 초산 분서의 조사를 명한다.〉
 
  〈(별지2) 요사이 평안북도 창성군으로부터 돌아온 한국인의 말에 의하면 賊魁 柳麟錫은 현재 평안북도 초산군 내 청국과의 국경을 배회하고 있으며, 러시아 재류 한국인의 후원을 바라며 청국 마적과 내통하며 열심히 폭도를 선동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회하고 있는 자가 약 3000여 명에 가깝고 동 지방 인민은 가까운 장래에 일대 소요가 있을 것임을 예기하고 있다고 한다.〉
 
  6월 말경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 후에 안중근이 국내 진공으로 두만강을 건너 전투 중인 것을 감안할 때 이에 호응할 의병의 참여를 국내 의병장들에게 홍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병 등 국내 의병의 정비를 위해 압록강 연변 평안북도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1908년 8월 일제 수사 기관의 정보(헌기 제441호)를 보면 유인석이 이범윤을 부하로 거느린 창의대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보 一, 폭도 수령 姜本 급 李殷瓚은 其 後 철원군 부근에서 相會하여 내지에서는 도저히 事가 成하지 못함을 嘆하고, 如히 길림성인 柳麟錫下에 到하여 事를 謀코저 협의하고 각기 有한 부하 백 명을 해산하고 점차 길림성에 來할 것을 명하고 兩名은 7월 25일경 철원 출발 길림성으로 향하였다고 한다.(經路 불명)
 
  정보 一. 삼남지방의 폭도 즉 李麟榮 급 許蔿 등의 부하는 계속 강원도 회양군 부근을 통과하고, 또 황해도 급 경기도의 폭도는 황해도 토산군 급 강원도 이천군 지방을 통과하여 간도 방면에 至하여 柳麟錫의 부하인 李範允의 黨類와 合陣한다고 하는 설이 있다.〉
 
  연해주 의병의 지휘부 체계에서 늦어도 7월 이전에 유인석의 부하가 이범윤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6월 말경 연해주 의병의 창의 시점에서 유인석이 대장에 추대되었다는 추리는 합리적이다. 또 이 자료는 6월 하순까지 유인석이 길림성에 있었다는 내용과 연관시켜 보면 그는 국내에 들어왔다가 창의에 참여하기 위해서 다시 길림성으로 간 것이다. 그가 6월 초 서울을 떠났을 가능성은 6월 초 서울에 들어왔다는 사실로도 《의암집》에서 확인된다.
 
  유인석이 1908년 6월 초 서울을 떠나 어디를 경유했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귀로의 추정은 평북 초산·창성·의주에 들렀다. 그 목적이 의병 모집이었다면, 역시 평안도 용천에서 옥산재, 개천에서 숭화재를 경영한 인연이나 황해도 평산 산두재에서 문인을 양성했던 경험을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연해주 망명과 의병 활동
 
  유인석이 연해주 의병 창의 후 서울로 돌아온 시기는 대략 1908년 양력 7월 말~8월 초로 추정된다. 《의암집》에는 이 과정이 빠져 있거나 확실하지 않다.
 
  《의암집》에 따르면 유인석은 1908년 음력 7월 연해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여러 다른 견해가 있다. 친자 유해동(柳海東)도 1908년 음력 2월 연해주로 떠난 것으로 혼동하고 있으나, 《의암유선생약사》는 ‘무신 추(戊申 秋)’에 연해주에 망명한 것으로 다르게 기술하였다. 다음은 유인석이 언제 서울을 떠나 연해주에 망명했나를 추측할 수 있는 근거 자료이다.
 
  1908년 12월 일제 헌병대 ‘개천 분견소의 정보’이다.
 
  〈車炳律은 8월 20일경 柳麟錫을 從하여 玄熙述 吉鳳珠와 共히 경성을 출발하여 원산으로 赴하였을 時 柳麟錫으로부터 명령을 受하고 헤어졌던바 아직 賊徒의 모집 군자금 징집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크게 부끄러워 其時 赴치 못하였던 것이다.… 我 헌병에게 체포당한 것은 실로 柳麟錫에게 不忠하였음과 또 대망을 누설하지 아니치 못하기에 至하였음은 割腹 외에 없다고 탄식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유인석은 서울을 떠나 8월 20일경 원산에 도착했다. 이에 따르면 유인석이 서울을 출발한 때는 8월 초~중순으로 추정된다. 7월 말~8월 초 연해주로부터 서울에 도착하여 곧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의암집》에 “7월(음력) 서울을 출발하여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머물렀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의암집》과 《독립운동자료》에 근거할 때 유인석은 원산을 경유하여 연해주로 향하였다. 원산에서의 의병 활동이 8월 20일경이라면 블라디보스토크 도착은 8월 말~9월 초로 추석 전 도착이 가능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문인 61명이 연해주에 갔는데 대부분이 평안도 출신이며 평산을 비롯한 황해도 출신과 함경도 등 출신들도 다수이다.
 
  유인석은 8월에 부산 동래를 떠나 추석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영남유생 이대하(李大夏)와 심설(心說) 강론과 그 결과의 수록 등으로 상당 기간 지체 후 9월 말경 연해주 남부에 있는 연추 중별리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곳에서 최재형과 이범윤을 만나 의병의 재건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의암집》은 박치익(朴治翼)을 보내 이범윤·최재형 창의군에 군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짤막하게 기술하였다. 이유는 연해주 의병의 창의 참여를 숨기려 한 때문으로 보인다.
 
  아래 기록을 보면 1908년 9월에 유인석은 국내 의병에서도 창의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면 연추에 정착한 9월 하순, 또 10월 ‘의병규칙’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그는 국내외 한국 의병 창의대장의 이름으로 연해주에서 국내 의병진을 지휘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 시작은 6월 말 창의로 소급되는 창의대장이다.
 
  1909년 3월 충청남도 관찰사의 보고이다. 유인석이 국내외 창의대장이었음을 입증한다.
 
  〈劉順早는 일찍이 暴徒 一部의 首魁가 되어 各處를 徘徊한 者로 注意手配中이던 바… 此를 逮捕 取調한 바… 其 部下로 判明된 溫陽郡生 趙光華 외 九名은 目下 搜査中이라고 한다.… 追而 別紙記載의 대장 柳麟錫 외 二名은 경기도(군면 미상)에 거주하는 자인 모양이나 본인 등은 일면식도 없는 자로 通文과 如함은 右 趙光華로부터 受한 旨 진술하였다 한다.…(통문 생략)… 무신 구월 일 창의대장 柳麟錫 鄭容大 소모장 朴萬洙…〉
 
  소규모 단위 의병장으로 보이는 유순조(劉順早)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함께 잡힌 부하 조광화(趙光華)로부터 수취한 통문(通文)이다. 의병 지휘부가 창의대장 유인석·정용대(鄭容大)·소모장 박만수(朴萬洙)에 의금 출연을 독려하는 통문이다. 창의대장이 유인석이며 통문의 작성 시기인 ‘1908년 9월 일’은 유인석이 연추 중별리에서 한국 의병진에 합류 이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유순조 등 의병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창의대장 유인석을 거론한 것은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지휘하는 상징적인 국내 창의대장임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용대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창의한 의병장이다. 창의대장 유인석·정용대, 소모장 박만수를 거론한 것은 경기도 의병진의 지휘체계를 말한 듯하며, 각 도마다 유사한 의병진이 있었음을 시사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1910년 2월에 13도 창의군도총재에 추대되었는데 이미 국내외 한국 의병의 창의대장이라면 이 추대는 그 직무의 연장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유인석의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와 관련 있는 1908년 4~5월, 6~7월 두 차례의 연해주 왕래와 이와 연관된 창의 과정이 《의암집》에 빠져 있음이 확실하다.
 
 
 
총대장 김두성은 유인석의 가명

 
일본군의 포로가 된 항일의병들. 비록 포로가 되었지만 의연한 기개가 엿보인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후 “연해주 한국 의병의 총대장은 김두성이며 그는 강원도 출신으로 전직 의병장이다”라는 내용으로 진술하였다. 또 그의 휘하에 있었던 여러 의병장을 거명했다. 총대장 또는 총독 김두성은 누구일까.
 
  김두성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때 金斗星과 李範允 등이 모두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사람들은 전일에 이미 總督과 大將으로 피임된 이들이요. 나는 참모중장의 직책으로 피선되었다.
 
  의군 총대장은 강원도 金斗星인데 그 부하는 각지에 李範允 등 副將帥가 있으며, 나는 김 대장의 직속 특파독립대장이다.
 
  八道의 總督은 金斗星이라 부르며, 강원도 사람이지만 지금의 거처는 모른다. 그 부하에는 許蔿·李康秊·閔肯鎬·洪範圖·李範允·李殷瓚·申乭石 등이 있지만 그중에는 지금 없는 사람도 있다.〉
 
  강원도가 출생지거나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여러 사람을 거론할 수 있다. 을미의병에서 8도 창의대장이었던 유인석이 우선이다. 을미의병의 원주 의병장이며 정미의병의 13도 창의군도총재 이인영(李麟榮·1860~1909) 또한 유명한 유학자 의병장이다. 이 외에도 을미의병 때 춘천에서 창의한 이소응(李昭應·1852~1928) 의병장, 정미년(1907) 원주에서 창의한 민긍호(閔肯鎬·?~1908) 의병장, 원주 출신 이은찬(李殷瓚·1878~1909) 의병장 등이다.
 
  유인석을 제외한 다른 의병장들은 연해주에 간 일이 없다. 강원도 출신으로 유인석만이 1908~14년간 연해주에서 의병장으로 창의 과정 모두에 활동한 경력을 가졌으며, 한국 의병사에 상징적인 인물이다. 더욱 그의 을미의병 8도 창의대장 직책은 총독이라고 부른 안중근의 진술에 가장 근접한다.
 
  인용문의 ‘8도 총독’은 8도에 각각 다른 김두성이란 총독이 있을 수 없다면 8도 의병을 지휘하는 의병장의 뜻으로 8도 총대장과 같은 직책이다. 즉 8도 총독이란 어휘의 뜻을 그대로 풀어보면 8도의 의병장을 ‘총괄 감독’하는 총대장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 ‘8도의 총독 김두성’과 그 아래 대장들의 언급은 ‘총대장 김두성·8도의 각 대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김두성이 휘하에 이범윤 등 대장을 거느린 단독 총대장으로 8도 총대장인 유인석일 가능성을 암시했다.
 
  김두성 휘하 의병장이라고 말한 7명의 의병장과 유인석의 관련성을 검토해 본다. 허위(許蔿·1855~1908)와 이강년(李康秊·1858~1908)은 유인석과 같이 그의 휘하에서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이강년이 왜적을 토벌할 때 민긍호와 신돌석(申乭石·1878~1908)은 연합하여 싸운 의병장임으로 유인석 의병장과 민긍호·신돌석은 관련이 있다.
 
  홍범도(洪範圖·1868~1943)는 유인석이 을미의병에 실패한 후 요동에 망명할 때 안변 석왕사에서 연합하여 왜적과 싸웠다. 이은찬은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인영 의병 총대장의 중군장이다. 이범윤을 포함한 모두가 유인석과 상하의 관계를 맺었거나 밀접한 영향을 받은 의병장들이다. 국내에서 유인석이 8도 창의대장이면 국내 의병장 모두가 유인석의 휘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안중근이 진술한 몇 사람은 이때 이미 순국했다. 민긍호는 1908년 2월에, 이강년은 같은 해 10월에 사형으로 순국했으며, 신돌석은 같은 해 12월 첩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런 근거로 보아 안중근이 총대장으로 지칭한 김두성은 유인석과 유사한 특징의 인물이다. 비록 안중근이 공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전략으로 김두성을 가짜로 세운 의병장일 수 있다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분명히 유인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적합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김두성과 유인석이 동일인이 되기에는 연해주 의병 창의 활동에서 시간과 공간을 달리했다는 맹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연해주 의병 창의 때인 6월 말경 연해주에 있는 김두성은 같은 때 국내에서 활동 후 그해 가을 연해주에 망명했다는 유인석과 같은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유인석이 1908년 4월 말경에 연해주에서 이범윤과 연해주 의병의 창의를 결의했다고 썼다. 실제 6월 말경 창의하고 창의대장에도 추대되었다. 안중근의 진술에서 ‘총대장 김두성·부장수 이범윤 등’으로 한국 의병진의 창의대장이 단수임을 밝히고 있다. 필자의 검증 결과, 김두성과 유인석이라는 한국 의병 창의대장의 활동 시기와 장소는 같았다. 그 외에 강원도 출신이라는 조건도 들어맞는다. 그래서 필자는 “김두성은 유인석의 가명인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대장이다”라는 결론을 낸 것이다.
 
  다른 의미로는 안중근이 이미 연해주 의병 창의대장 김두성을 부장수 이범윤 등과 함께 거론함으로써 유인석이 창의대장에 추대된 것을 은연중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1908년 6월 연해주 의병 창의 때 이범윤 등의 상관인 다른 창의대장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김두성이 갖는 인물의 특징이 유인석과 같다면 자연스럽게 당시 존재했던 창의대장은 유인석으로 귀결된다.
 
  또한 정보에 밝고 의병의 행적을 집요하게 찾아내려 한 일제 수사 기관이 김두성의 추적을 두세 번의 사찰 후 중단한 이유를 봐도 필자의 결론이 합리적이라 보인다. 즉 일제는 김두성을 유인석의 가명으로 보았거나, 안중근의 진술을 유인석의 인물 특징을 가진 허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연해주 한국 의병 총대장의 추적에 일제가 소홀하게 대처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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