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九는 11월 26일에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내외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李承晩과 金九는 연일 敦岩莊에서 獨促中協問題를 중심으로 要談했다.
12월 1일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 要人 귀국 환영식이 열렸고, 바로 이날 제2진이 귀국했다.
獨促中協의 中央執行委員 선정을 위한 전형위원회의는 12월 14일에 左右翼을 망라한 中央執行委員 39명을 선정했다. 그러나 共産黨의 朴憲永은 左右翼이 5:5의 비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15일에 소집된 中央執行委員회의에 左翼人士 15명은 참가하지 않았다.
共産黨의 참가 포기에 李承晩은 12월 19일 共産黨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폭탄연설’을 했고, 共産黨도 李承晩을 親日派, 民族反逆者의 ‘救主’라고 매도하면서 獨促中協 탈퇴를 선언했다.
臨時政府人士들도 金九, 金奎植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臨時政府가 귀국하기 전에 李承晩이 “民意의 대표기관”을 자처하면서 별도의 기관을 조직한 것을 못마땅해 했다. 臨時政府의 左派人士들은 獨促中協이 임시정부와는 “법적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李承晩의 反共연설을 비판했다. 임시정부는 特別政治委員會를 구성하기로 했다.
1. 獨促中協의 中央執行委員會 결성
11월 10일쯤이면 김구가 귀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활동을 중지하고 있던 이승만은 김구의 도착이 늦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 결성 작업을 서둘렀다. 김구가 도착한 11월 23일 저녁에 누구보다 먼저 죽첨장(竹添莊)으로 가서 김구를 만난 이승만은 11월 26일까지 매일 김구를 만났다. 국내 상황을 설명하고 독촉중협의 활동에 김구가 참여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면담은 주로 김구가 돈암장(敦岩莊)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11월 24일에는 돈암장으로 답방한 김구를 하지(John R. Hodge) 사령관과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에게 안내했다. 11월 25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오전에 정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본 김구는 오후 2시쯤에 돈암장을 방문하여 저녁까지 이승만과 같이 있었다.
敦岩莊에서 두 사람이 매일 만나
11월 26일부터 김구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전 10시에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내외기자들과의 공식 회견이 열렸다. 이승만이 미 국무부를 당혹스럽게 한 도착 제1성을 피력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김구도 하지 장군의 안내를 받으며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하지는 먼저 “김구 선생은 그 일생을 한국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며, 어떤 때는 국내에서, 또는 해외에서 여러 방면으로 한국의 해방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셨다. 이번에 해방된 고국에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하였으나, 한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이 있을 줄 믿는다”라고 김구를 소개했다. 통역은 김규식(金奎植)의 아들 김진동(金鎭東)이 했다. 이날의 김구의 태도도 이틀 전에 죽첨장에서 있었던 기자회견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여러분이 본인에 대해서 제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하지 장군의 말과 같이 한국의 장래와 건국사업에 어떠한 정책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인은 귀국한 지 불과 수일밖에 안되어 국내의 제반사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과 또 임시정부의 각원(閣員)들이 다 귀국하지 못한 까닭에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으므로 확언할 수 없다. 앞으로 국내에서 조국해방에 애쓰신 선배와 국사를 위해서 노력하신 제씨를 방문도 하고 초집(招集)도 하야 시급한 자주독립과 건국경륜을 의논하는 한편 미주둔군 당국자와도 절실히 협의한 뒤에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려고 한다.”1)
이러한 김구의 신중성은 그의 말이 “불을 토할 것인지 쇠를 토할 것인지”를 기대하고 있던 기자들을 적이 실망시켰다.2) 도하 신문에 일문일답 기사가 없는 것이 그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기자회견을 마친 김구는 돈암장으로 가서 이승만과 오랫동안 요담했다. 이날은 이승만의 정례 기자회견일이었으나, 이승만은 김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윤치영(尹致暎)으로 하여금 대신 기자들을 만나게 했다.3)
4大政派 대표들과 個別面談 가져
김구는 11월 27일에는 오전 오후에 걸쳐서 국내 4대정파 대표들을 각각 회견하고 그들로부터 국내 사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4) 맨 먼저 만난 사람은 국민당의 안재홍(安在鴻)이었다. 안재홍은 인민공화국이 결성되어 혼란을 격화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천명한 대로 과도정권을 새로 수립할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직접 집권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김구는 “각 각료들의 입국을 기다려서, 또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만 대답했다.5)
다음으로 김구는 한국민주당의 송진우(宋鎭禹)와 회담했다. 송진우는 몇 가지 구체적인 대책을 건의했다. 그것은 첫째로 몇 개조의 친선사절단을 조직하여 각 연합국에 파견할 것, 둘째로 임시정부의 사무조직을 시급히 정비할 것, 셋째로 시급히 광복군을 모체로 하여 국군을 편성할 것, 넷째로 재정문제는 국내외의 유지들의 회사를 받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6)
오후에는 먼저 인민당의 여운형(呂運亨)과 회담했다. 여운형의 이야기는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로 회고담이었고, 변명조였다. “이제 선생께서 들어오셨으니 제가 할 일은 없어진 줄로 압니다”하는 여운형의 말에 김구의 입가에 이날 처음으로 미소가 스쳐갔다. 오후 4시에 인민공화국의 국무총리 허헌(許憲)이 사무국장 이강국(李康國)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허헌은 사무적인 언행으로 인민공화국이 조직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김구 선생께서 돌아오셨으니 잘 지도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말하고 자신은 백지로 돌아가서 받들겠다고 말했다. 이에 김구는 “아직은 국내 사정에 어둡고 임시정부 각원들도 대부분이 입국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잘 생각해 보자”고 간단히 대답했다.7)
그런데 김구와 회담한 뒤에 기자단과 만난 허헌은 김구가 인민공화국의 성과를 칭찬하고 전폭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을 부탁했다고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8) 이튿날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은 허헌을 불러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보도를 부인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구는 12월 1일에도 돈암장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장시간 요담했다.9) 이승만과 김구가 계속해서 만난 것은 미군정부와 이승만의 예상과는 달리 독촉중협 참가문제에 대한 김구의 태도가 너무나 신중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구로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환호 분위기 속에서 결국은 임시정부의 해산을 전제로 한 별도의 ‘민의의 대표기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혼자서는 단안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머지 각원들이 귀국하고 또 국내 정세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관망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第2陣 要人의 歸國과 임시정부 국무회의
12월 1일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속에서 이인(李仁), 윤보선(尹潽善) 등의 임시정부환국봉영회가 주최하는 환영식과 기행렬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는 3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감격의 눈물을 자아내었다. 손에손에 태극기를 든 행렬은 계속 눈이 내리는 가운데 안국동 로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빌딩 2층에 나란히 앉아 축하를 받는 김구와 이승만 앞을 지나면서는 “김구 주석 만세”와 “이승만 박사 만세”를 외쳤다.10)
바로 이날 임시정부요인 제2진이 귀국했다. 일행을 태운 미군수송기는 오후 1시반에 김포비행장에 닿았으나 눈 때문에 착륙이 불가능했다. 비행기는 김포비행장 상공을 두 번이나 선회하다가 기수를 돌려 오후 3시나 되어 옥구(沃溝)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장에는 미군대형트럭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트럭이 논산(論山)에 닿은 것은 어두워서였다. 이튿날 아침 10시에 논산을 떠난 귀국 제2진은 오후 4시에 유성(儒城)에 닿았고, 서울에서 보낸 수송기로 유성비행장을 떠나서 김포비행장에 내린 것은 오후 5시였다. 일행은 바로 경교장으로 갔다가 숙소로 마련되어 있는 진고개의 한미(韓美)호텔로 이동했다.11)
이튿날 오전 11시에 경교장에서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가장 먼저 경교장에 도착한 사람은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이었다. 도하 신문들은 “동경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 등의 표제를 달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 ‘국무회의’는 일반국민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제2진으로 귀국한 국무위원들의 표정은 당장 불만과 비난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김구는 개회사에 이어 유동적인 국내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어 엄항섭이 경과보고 형식으로 정당 난립을 이루고 있는 국내 정세와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 및 이에 대한 임시정부의 조치 등을 설명했다. 이승만은 경각심을 일깨우는 그 특유의 논법으로 국내외 정세,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하는 일장의 연설을 했다. 제2진으로 귀국한 한 국무위원이 자신들도 국내정정에 직접 접해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제의하여, 회의는 바로 간담회로 바뀌었다. 간담회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12) 이날부터 국무위원들의 개별행동이 시작되었다.
2진과 함께 입국한 중국 무전사 3명은 중국국민당과의 무전연락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부가 대중국 전파 발신을 금지하여 이들은 이따금 외국의 단파방송이나 청취하는 정도의 일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13)
韓民黨人士 중심의 銓衡委員會議 流會돼
이승만은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으로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백남훈(白南薰), 김동원(金東元), 허정(許政), 원세훈(元世勳) 7명을 선정하고 11월 28일에 돈암장에서 제1회 전형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안재홍은 불참하고, 여운형은 전형위원 선정의 편파성을 지적하며 퇴장하고 말아 회의는 유회되었다. 여운형이 반발한 것은 송진우를 비롯한 참석자 5명이 모두 한국민주당 총무들인 한편 공산당 인사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이들 다섯 사람이 모두 한민당원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14)
이승만은 전형위원 선정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안재홍을 비롯하여 인민당의 김지웅(金志雄), 조선공산당의 김철수(金?洙), 천도교의 손재기(孫在基), 한민당의 백남훈, 한국독립당의 김석황(金錫黃), 무소속의 정노식(鄭魯植) 7명이 전형위원으로 새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도 말썽이 없지 않았다. 인민당의 김지웅이 당의 승인을 받지 못해 참가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이여성(李如星)으로 바꾸어 교섭했으나, 이여성도 당의 승인없이는 참가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하여 결국 6명의 전형위원으로 12월 5일부터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15) 공산당의 김철수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박헌영(朴憲永)이 거부했으나, 김철수가 소속정당의 승인이 전형위원 선정의 조건이 아닌 점을 강조하며 항의하자 박헌영이 마지못해 동의했다고 한다. 전형위원회의는 12월 14일까지 돈암장에서 10여 차례 거의 매일 계속되었는데, 회의에는 이승만의 정치고문인 장덕수(張德秀)도 투표권 없이 참석했다.16)
하지가 5人지도자 만나 재촉해
하지 장군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승만은 “(이 무렵) 군정부 하지 장군은 우리를 위하여 신이야 넋이야 하면서 2주 내로 이 결성을 속히 보여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하지는 11월 27일에 미국정부와 소련정부가 모스크바에서 남북 양 지역 간 통신의 개시, 경제생활의 통일과 양 지역 간의 물자교류, 자유로운 교통왕래 등 38도선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불편을 철폐하기 위하여 협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17) 그러고는 각 정파의 지도자들과 일련의 면담을 가졌다. 면담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먼저 11월 30일에는 여운형을 만났다. 이튿날 여운형은 기자들에게 하지가 좌-우 어느 쪽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복안을 제시했으므로 자신은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다.18) 하지는 12월 6일에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 세 사람을 시차를 두고 군정청으로 초치하여 회담했다.19) 이승만과는 아널드와 함께 오전 9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20) 또 12월 7일에는 국민당의 안재홍을 군정청으로 초치하여 하지의 고문관 윌리엄스(George W. Williams)가 만났고21), 그 이튿날에는 한민당의 송진우를 초치하여 하지가 만났다.22)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아널드 군정장관이 12월 11일에 군정청으로 초치하여 회담했다. 아널드는 박헌영에게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국가평의회를 설립할 계획임을 설명하고 “만일 1개월 안에 정당들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평의회는 다른 나라의 후견(後見)에 맡겨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3)
15人 이내로 구성되는 國政會議 또는 國務會議
하지와 각 정파 영수들과의 일련의 회담내용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나, 12월 15일에 열린 독촉중협의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이승만의 다음과 같은 발언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하지가 각 정파 지도자들을 만나서 촉구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앙집행위원회의 조직을 군정부에서는 초조히 고대하고 있다. 그들의 바라기는 40인가량으로 결성하는 것이었는데, 그 수에 이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군정부에서 이 회에 대하여 바라는 것은 대내 대외관계에서 이 기관을 경유하게 하여 이 기관을 권위 있게 하자는 데 있다. … 군정부는 나에게 말하기를 인도자의 회를 종합하여 민의의 대표기관으로 만들어 민의의 소봉(所奉)이 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 머지않아 개최될 모스크바의 각국 외상회의의 관계가 우리 문제에 심대한 것이 있는데, 이 회의 구성이 지연되어 유감이다. …
군정부에서는 이 독촉중협을 국정회의(國政會議) 또는 국무회의(國務會議)의 명의로 모아 최고의 인도자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趙素昻), 유동열(柳東說) 네 분을 생각하는데 … 이외에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박헌영 혹은 김철수 이 네 분을 독촉중협에서 추천하면 어떨까 한다. 군정부의 의견은 15인 이내로 구성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널드 군정장관은 먼저는 이 고문제도를 군정부의 부속물로 하려고 생각한 모양인데, 이에 대하여 나는 반대하고 민의의 대표로 군정부에 연락하는 국정회의, 즉 한인 문관의 민의대표로 하자고 했다. …”24)
이승만이 말한 국정회의 또는 국무회의란 아널드가 박헌영에게 설명한 국가평의회였을 것이다. 장덕수는 그것을 ‘국무회의(State Council)’라면서 국무회의 규정을 기초하기도 했다.25)
金日成, 曺晩植도 포함시켜
비밀회의로 진행된 전형위원회의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진행상황을 알 수 없는데, 공산당 대표로 회의에 참가했던 김철수는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한 십여 번 나가서 돈암장에서 만나. 그 자리가 대단히 중요한 자리여. 인제 고 자리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중앙집행위원회]를 뽑아 놓으면, 그 중앙협의회[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정부를 조직혀. 임시정부를 조직해 가지고 거기서 국회소집을 해. 국회를 뫼야. … 어떡허든지 빨리 우리나라 정부를 조직한다고. 그 서른아홉 명인가 뽑았어. 김일성(金日成)이 들어오고 조만식(曺晩植)이 들어오고 송진우, 여운형이, 다들, 박헌영이. 전부 말단이 아닌 사람은 들어갔단 말여.”26)
김철수에 따르면,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가 국회를 소집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며 거기에는 북한의 김일성과 조만식까지도 참여시킨다는 구상이던 것이다. 이처럼 미군정부와 이승만이 합의한 국무회의는 남북한에 걸친 통일된 임시정부를 상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근년에 공개된 한 구소련문서로도 확인된다.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 F. Shtykov)가 1945년 11월 무렵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말렌코프(G. M. Malenkov)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결성한 뒤에 조만식에게 밀사를 보내어 김일성을 초청할 것을 제의했으나 김일성이 반대했다고 기술되어 있다.27)
許憲이 南北韓 각각의 排他的信託統治 제의
하지 장군이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성을 재촉한 것은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3국(미국, 소련, 영국) 외상회의를 의식한 때문이었다. 하지는 번스(James Byrnes) 미국무장관이 모스크바회의에서 한국처리방안으로 지금까지의 미국정부의 공식 정책인 다국 간 신탁통치 대신에 하지의 정치고문대리 랭던(William R. Langdon)이 건의했던 ‘행정위원회’안을 제출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28) 랭던의 건의를 검토한 번스는 11월 29일에 “만일 소련으로부터 한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적절하고 특별한 보장만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탁통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목할 만한 회답을 보내왔었다.29)
랭던은 모스크바회의가 개최되기 이틀 전인 12월 14일에 번스에게 다시 주한미군정부의 건의안을 타전했다. 그것은 1) 이미 보고한 제안[행정위원회안]이 소련의 정책과 일치하는지, 2) 아니면 국제연합 관할 아래 양 지역에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최장 5년 동안의 배타적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동안에는 양 지역 간에 사람과 재산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고 그 뒤에 양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동시에 한국을 국제연합에 가입시키는 방안에 소련이 찬성하는지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0)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방안이 인민공화국의 허헌이 랭던에게 제안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31)
中央執行委員 39명을 선정
독촉중협의 전형위원회의는 12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중앙집행위원 선정작업을 마무리했다. 먼저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등에 배정할 인원수를 결정했다. 정당에서는 4대정당인 한국민주당, 공산당, 국민당, 인민당이 각각 4명, 여성단체로는 부녀동맹 1명, 여자국민당 1명, 무소속 1명, 종교계에서는 예수교 1명, 불교 1명, 천도교 1명, 유교 1명, 청년단체로는 조선청년총동맹(청총) 2명과 그 밖에 8명, 기타단체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2명,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2명, 군소정당 2명 등 모두 39명을 결정했다.32) 14일 오후의 전형위원회의에서 선정된 39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법린(金法麟: 불교) 김석황(金錫璜: 한국독립당)
김승렬(金勝烈: 유교) 김여식(金麗植: 신한민족당)
김지웅(金志雄: 인민당) 김창엽(金昌曄: 기타 청년단체)
김철수(金?洙: 공산당) 남상철(南相喆: 군소정당)
박용희(朴容羲: 국민당) 박헌영(朴憲永: 공산당)
백남신(白南信: 군소정당) 백남훈(白南薰: 한민당)
백용희(白庸熙: 전농) 변홍규(卞鴻圭: 기독교)
서중석(徐重錫: 무소속) 손재기(孫在基: 천도교)
송진우(宋鎭禹: 한민당) 안재홍(安在鴻: 국민당)
엄우룡(嚴雨龍: 국민당) 여운형(呂運亨: 인민당)
원세훈(元世勳: 한민당) 유석현(劉錫鉉: 한국독립당)
유혁(柳赫: 전농) 이갑성(李甲成: 신한민족당)
이걸소(李傑笑: 인민당) 이성백(李成伯: 전평)
이순금(李順今: 무소속) 이시열(李時悅: 군소정당)
이여성(李如星: 인민당) 이응진(李應辰: 천도교)
이의식(李義植: 국민당) 이호제(李昊濟: 청총)
임영신(任永信: 여자국민당) 조동호(趙東祜: 공산당)
조두원(趙斗元: 공산당) 함태영(咸台永: 기독교)
허성택(許聖澤: 전평) 허정(許政: 한민당)
황신덕(黃信德: 건국부녀동맹)33)
그런데 이 시점에 공산당의 박헌영이 개인 자격으로 전형위원 회의에 참석하여 전형위원들의 합의사항을 뒤집는 주장을 했다. 박헌영은 김철수가 사전에 이승만의 허락을 얻어 참석하게 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이 독촉중협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외적인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헌영은 중앙집행위원 수를 민족주의 쪽과 공산당이 반반씩 나누어야 한다고 고집했다.34) 그 논거는 12월 12일에 발표한 박헌영의 성명서에 표명되어 있다. 성명서는 민족통일전선은 밑으로부터 대중을 기초로 하고 결성되는 통일이 가장 기본적이요 내용도 충실하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족통일전선의 상부통일인 정당 간의 협력에 대하야 우리 당에서는 타협점을 명시하였다. 즉 반반수의 세력균형을 가지고 좌우익이 연합하자는 우리의 정당한 제의에 대하야 우익정당은 난색을 보일 뿐 아니라 과반수의 절대다수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들이 현실과 구체적 사정을 파악지 못한 까닭이다. 그들은 좀 더 민주주의를 학습할 필요가 있다.”35)
박헌영의 요구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한민당의 송진우였다. 그의 주장은 인민당도 공산주의 정당이고 전평 등도 공산당의 외곽단체이므로 박헌영의 주장대로 하면 공산주의자들이 반수를 훨씬 넘게 된다는 것이었다.36) 또한 국민당의 안재홍도 박헌영에게 “지금은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이 요청되는 때이니 5대5 등 비율은 문제가 아니되고 민족주의자가 영도하는 국가를 성립시켜야 하니까 공산주의자는 제2선으로 후퇴하도록 하라”고 권고했으나, 박헌영은 “그것이 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서 짜증을 더럭더럭 내었다고 한다.37)
박헌영은 또 12월 12일의 성명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것은 김구 일행이 귀국한 뒤에 처음으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언급한 공산당의 공식 견해였다.
“망명정부가 일종의 임시정부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국제관계와 국내제세력을 옳게 파악한다면 결코 임시정부로서 행세할 리 없고 개인자격으로 본분을 지켜야 국제신의가 서게 될 것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을 착안하고 있는 국내의 진보적 세력과 접근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될 것이니, 그분들은 좀 더 왕가식적(王家式的), 군주식적(君主式的) 생활 분위기에서 해탈하고 나와 조선인민, 특히 근로대중과 친히 접촉하야 조선인의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필요가 있다. 과거 수십 년간 망명생활 중에 조선과 분리한 생활을 계속하던 분들이 또다시 국내에 와서도 그러한 비민중적 생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38)
박헌영의 임시정부 부인성명에 대해 조소앙은 이튿날 기자들을 만나 “대중과 접하라는 점에 대해서는 쌍수 환영이다”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1920년에 소련의 레닌(Vladimir I. Lenin)도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절대 원조를 하여 왔다고 주장하면서, “소련을 위시하여 각 열강과의 역사적 사실을 공산당은 망각지 말기 바란다”고 군색하게 반박했다.39)
共産黨 참가는 단념하기로
드디어 12월 15일 오후 3시부터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들의 첫 회의가 돈암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선정된 중앙위원 39명 가운데 참석자는 한민당의 송진우, 백남훈, 허정, 원세훈, 국민당의 안재홍, 엄우룡, 이의식, 박용희, 신한민족당의 이갑성, 한국독립당의 유석현, 천도교의 손재기, 이응진, 불교의 김법린, 일주일 뒤에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을 결성하는 김창엽, 건국부녀동맹의 황신덕으로 모두 15명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당과 인민당 및 전평, 전농, 청총 등의 좌익단체인사 15명은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전형위원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해 온 공산당의 김철수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철수가 “매우 침착하고 진실하게 보이는 분으로서 타협성이 많아 보였으나 당의 관계로 이와 같이 된 모양”이라면서 아쉬워했다. 우익단체에서도 불참자가 많았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에 공산당을 참가시키는 문제는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식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여러분이 더 협의해서 공산당을 다시 참가하도록 하든지 어쩌든지 … 나의 생각으로는 더 다시 여지가 없지 않을까 한다. … 지금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면 저 공산당 주장은 유럽과 중국의 선례를 보아 확실히 알 수 있는데, 나로서는 대공협동은 심히 어렵다고 본다. … 지금 우리가 부질없이 공산당과 협동한다 하여 해결운운만 하고 있으면 도리어 지방사람들의 심목(心目)을 현황[炫煌: 어지럽고 황홀함]케 할 뿐이니 … 나는 이 공산분자의 심리를 알고 있으므로 끝내는 일에 무익할 것도 짐작하였으나, 이분 저분의 제언으로 가지우지(加之又之)하고 또 감지삭지(減之削之)를 일삼다가 지금 실패라 하면 실패라 하게 되었다. 오늘이 미국인 군정부가 내용으로 이 결속의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한 최후의 한정일(限定日)이다. 적어도 일주일 전쯤에 이 합동을 보여주었더라면 미국인이 우리에게 말하여 줄 것이 있었을 것인데, 참으로 유감이다. …”40)
이렇게 하여 공산당의 참가는 단념한 채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를 성립시켰다.
“金九씨가 임시정부諸公의 속박을 많이 받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임시정부와의 관계 문제였다. 곧 독촉중협이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추대할 것인가,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독촉중협에 참가시킬 것인가, 또는 두 조직을 병행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참석자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이승만은 김구와 합동으로 임시정부와는 별도의 국정최고기관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시정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 독촉중협이 대내 대외 문제 해결의 기관으로 되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이므로 이를 별개 조직의 정부라는 낭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씨 이하 혼성체로 국정(國政)에 대하여 최고지도자로 했으면 한다. 그렇게 하면 중국 주석 장개석(蔣介石)씨 같은 분이 주장하야 우리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게 되든지 이 독촉중협이 성실(成實)되든지 양단 간에 김구 주석과 일을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 … 그리고 독행 독단할 때가 오면 나는 독단 독행하려고 한다. …”
참석자들이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큰 상황에서 몇 사람만 선택한다면 임시정부가 분열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표명하자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어차피 해산할 수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시정부가 환국한다는 말을 듣고 이 독촉중협 진행을 중지한 것은 김구 주석이 온 뒤에 상의 양해하는 것이 좋을까 한 까닭이다. 김구씨와는 말한 바도 있어 양해가 어렵지 아니하나, 지금 와서 본즉 임시정부가 입국하기 전에 임시정부제공이 서로 구속이 견고하게 되어 있는 모양으로서, 임시정부제공의 협의가 없으면 좀 안 될 모양으로 보인다. 내 생각에는 정부조직체는 독촉중협을 견실히 하는 데서 나올 것으로 보는데, 지금 김구씨가 임시정부제공의 속박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 … 사람들은 이 독촉중협을 별동대로 보고 있는 모양인데, 김구씨는 이 독촉중협과 합일하려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조금 난관으로 생각되는 것은 임시정부를 해산치 아니하면 안 되게 되는 점이 이것이다. …”41)
金九는 別室에서 張德秀의 설명 들어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는 이튿날 오후에도 돈암장에서 회의를 계속했다. 전날 참석했던 송진우, 이응진, 황신덕 세 사람이 불참하고 한국독립당의 김석황, 예수교의 변홍규, 민일당(民一黨)의 남상철이 새로 참석하여 참석자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15명이었다. 회의에서는 먼저 장덕수가 기초해 온 국무회의의 성격 규정안이 보고되었으나, 시기상조라는 등의 이유로 토의되지는 않았다. 같은 시간에 돈암장을 방문한 김구는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고 별실에 있었는데, 장덕수는 김구에게 가서 국무회의 규정안을 설명했다.42) 이승만은 독촉중협과 임시정부의 관계에 대하여 김구와 김규식의 양해를 얻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결의문을 만들어 대외선언을 하는 일은 임시정부가 좀 꺼린다면서 “만약 불여의하면 독자적 견지에서 진행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이승만은 12월 19일로 예정된 대대적인 임시정부개선환영식을 독촉중협이 대외선언을 하는 자리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는 공산당의 불참에 대한 노여움을 거듭 털어놓았다.
“우리의 일이 늦어서 저 군정부 하지 장군은 골이 나 있다. 공산당이 불참가한 것을 들으면 또 불만히 여길 것 같다. 그러나 인사로는 다 할 데까지 하여 보아도 잘 안되는 데야 어찌할 수 있나. 내가 공산당에 대하여 항상 말하여 오는 것은 어제까지 싸웠다 하더라도 오늘은 독립하기 위하여 싸움을 그만두고 손을 잡고 같이 독립하여야 하겠다 하여 왔다. 만약 독립에 반대한다 하면 그 독립반대자와는 분수[分手: 서로 작별함]하는 수밖에 없다. 나라를 파괴하려는 자와 나라를 건설하려는 자가 어찌 같이 일을 할 수 있나. …”43)
이렇게 하여 우파인사들만으로 중앙집행위원회 결성작업을 일단락 지은 이승만은 바로 독촉중협의 지방 지부조직작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남한 전역에 선전대를 파견했다.44)
人民黨이 “獨促中協 살릴 용의” 성명
조선인민당 인사들이 회의에 참가치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1월 30일에 하지 장군과 면담하고, 하지가 좌-우 어느 쪽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복안을 제시했으므로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공언했던 여운형은 독촉중협 중앙위원의 인선이 마무리되고 그 첫 회의가 열릴 무렵에는 서울에 없었다.
김철수에 따르면 인민당 인사들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박헌영의 요구 때문이었다. 일찍이 고려공산당 시절부터 여운형과 공산주의 운동을 같이했고 여운형이 1921년의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할 때에는 그의 여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던 김철수는 이때의 여운형의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여운형씨는 제재받는 공산당원이 아니거든. 근디 … 박헌영한테 꼼짝을 못해. 그렇게 말라고 하면, 못 나가게 하면 안 나가. 여운형씨가 좀 주책이 없어. 자기 주견이 확실하들 못해. 그래서 무엇을 얘기하다가도 아 미국놈이 나쁘다고 하면 그러냐고, 그래놓고는 또 가서는 얘기하는 것은 그대로가 아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 그러고 와서 인제 여러 사람이 공격을 하면 그날 미국놈하고 약조해 놓고도 안 가. 그냥 자기 집이 저 위로 올라가서, 서울 옆에[양평의 시골집] …. 거기 가서 안 와, 그냥. 그래 미국놈이 혼바람이 달아난단 말여. 약조를 해놓고도 안오능게. …”45)
그런데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 제1회 회의가 끝난 이튿날인 12월 17일에 인민당 총무국장 이여성이 눈여겨볼 만한 담화를 발표했다.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가 협동하여 과도적인 연립정부를 수립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독촉중협이 양자 사이에서 매개체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하지가 여운형에게 밝힌 구상이 반영된 말이었을 것이다.
2. 共産黨과 연대 포기하는 ‘폭탄선언’
하지 장군은 11월 말에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인민공화국의 ‘국’자를 ‘당’으로 바꾸라는 자신의 요청을 묵살한 것에 대해 격분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인민공화국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는 11월 25일에 맥아더에게 이러한 자신의 구상을 타전하면서 그것은 한국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지도자들이 최근의 집회에서 그 명칭을 바꾸고 그 명칭에 따른 오해를 제거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그 집회에 참석했던 나의 대리인[아널드 군정장관]의 보고로는 집회에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노력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할 것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나는 그러한 태도 변화의 결과를 볼 수 있기 전에는 그 지지를 신뢰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태도가 앞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이 당파가 정부라는 용어의 지위에 있지 않음을 선언하고 그 당파를 반대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공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조치는 실제로 한국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며, 일시적으로 혼란이 빚어질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빨갱이들과 (미국의) 빨갱이 신문 양쪽으로부터 ‘자유’국가에서의 정치적 차별이라는 비난을 초래할 것이다. 만일 조선인민공화국의 활동이 종전처럼 계속된다면 그들은 한국이 독립할 준비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를 크게 지연시킬 것이다. 논평을 요구함.”46)
이러한 하지의 전보에 대해 맥아더는 그날로 바로 “나는 귀하에게 적절히 조언할 만큼 지역 내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귀하가 내리는 결정은 어떠한 것이든 지지할 것이다”라고 군인정치가다운 답전을 보내어 하지의 용기를 북돋우었다.47)
“人民共和國의 ‘政府’ 행세는 불법행동”
그러나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은 인민공화국의 명칭 변경 요청에 계속 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지는 마침내 12월 12일에 군정청 출입기자단과의 회견과 서울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인민공화국의 ‘정부’ 행세가 불법행동임을 선언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의 어투는 매우 침착했으나 내용은 단호했다. 하지는 먼저 인민공화국 성립과정의 불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전후하여 박헌영과 허헌 등 인민공화국 고위인사들과 교섭했던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인민공화국 인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참고 생각한 끝에 공중의 이해를 위하여” 성명할 필요를 느꼈다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그 자체가 취택(取擇)한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어떤 의미에서든지 ‘정부’도 아니고 그러한 직능을 집행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 남부 한국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정부는 연합군최고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수립된 군정부가 있을 뿐이다”라고 선명했다.
하지는 다음과 같은 경고로 성명을 끝맺었다.
“나는 한국의 통일과 장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와 나의 장병은 한국의 건국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충실하고 공고한 기초 위에 세운 한국을 여러분에게 넘겨 드리려고 한다. 앞으로 올 오해와 긴장된 소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정당이든지 정부로 행세해 보려는 행동이 있다면 이것은 불법행동으로 다루도록 하라고 나는 미주둔군과 군정청에 명령을 내렸고, 미군 점령지역 내의 어느 곳에서든지 연합군이 명시적으로 부여한 권리가 없이 정부행세를 하는 정당이 없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반의 조치를 즉시 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48)
그것은 인민공화국의 불법성에 대한 공식선언이며 경고였다. 미육군부는 12월 12일에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을 해임했는데, 그것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전후한 인민공화국 관계자들과의 협상 실패에 대한 문책성 인사였을 것이다. 아널드는 주한미군 제7사단장으로 복귀하고, 후임 군정장관에는 버지니아 대학교(Virginia University)에 있는 미육군군정학교장 러취(Archer L. Learch) 소장이 임명되었다. 러취는 12월 1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49)
金九는 左派와 右派의 단결 강조
12월 19일 오전에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개선환영대회에는 15만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운집하여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홍명희(洪命憙)와 송진우의 환영사와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에 이어 김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다. 이날의 스포트라이트는 단연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집중되었다. 김구는 “임시정부는 어떤 한 계급, 어떤 한 당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 입장에 입각한 민주 단결의 정부였다”고 말하면서, 단결을 강조했다. 그는 “남한 북한의 동포가 단결해야 하고,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노소가 다 단결해야 한다. … 오직 이러한 단결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반도를 숙청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때에 김구가 한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라는 말은 공산당도 그대로 인용하면서 관심을 표명했다.50)
김구는 결론으로 “우리는 중국, 미국, 소련 3국의 친밀한 합작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3국의 친밀한 합작 기초 위에서만 우리의 자주독립을 신속히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共産黨에 대한 경각심 촉구
김구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비록 명시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소련과 한국공산주의자들의 야심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했다.
“3천리 강산의 한자나 한치 땅도 우리 것 아닌 것이 없다. 3천만 남녀 중에 한 사람도 이 땅의 주인 아닌 사람이 없다. 지금 밖에서는 우리를 넘겨다보는 나라들도 있고 안에는 이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분자들이 있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조석에 달렸다. 그러나 우리 민중이 한몸 한뜻으로 한 뭉치를 이루어 죽으나 사나 동진동퇴(同進同退)만 하면 타국 정부들이 무슨 작정을 하든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연합국이 제삼 선언하기를 모든 해방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우며 무슨 제도를 취하던지 다 그 나라 인민의 원에 따라서 시행한다 하였으니, 우리 민중은 우리의 원하는 것이 완전독립이라는 것과 완전독립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표할 뿐이니, 일반 동포는 내 말을 믿고 나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주어야 될 줄로 믿는다.”51)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독촉중협의 대외선언이 공표되기를 바랐던 것인데, 대회에서는 주최 쪽에서 준비한 4개항의 결의문 채택으로 대체되었다. 환영식에 이어 오후 3시부터는 덕수궁에서 성대한 환영잔치가 베풀어졌다.
임시정부 환영행사로 온 서울 시내가 어런더런한 이날 오후에 하지 장군은 군정청으로 박헌영을 초치하여 장시간 회담했다. 이날의 회담내용은 박헌영도, 지금까지의 몇 차례 회담 때와는 달리, 일체 기자들에게도 발표하지 않았고 러시아인들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하지는 전주에 발표한 자신의 인민공화국에 관한 성명의 취지를 설명하고 인민공화국이 정부행세를 중지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을 것이다. 이날 오전에 미군방첩대(CIC)가 옥인동(玉仁洞)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여 서류 등을 압수하고 간판을 떼어 간 것도 미군정부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일종의 압력이었을 것이다.52)
그렇지만 이러한 하지의 노력은 이날 저녁에 방송된 이승만의 주례연설로 말미암아 무산되고 말았다.
연설원고, 하지의 檢閱 받지 않아
이승만은 12월 19일 저녁 7시30분에 서울중앙방송국의 주례 방송연설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그것은 첫마디가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야 선언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공산당에 대한 폭탄선언이었다. 한 달 전의 방송에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야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세울 때에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고 했던 때와는 크게 달라진 입장 표명이었다. 공산주의를 둘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은 그때와 마찬가지 논리였으나, 이날의 방송에서는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파괴주의”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승만은 먼저 폴란드를 비롯한 2차대전 뒤에 해방된 유럽 여러 나라의 상황과 중국의 상황을 보기로 들어 “공산당 극렬분자들”이 어떻게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승만은 이어 한국의 상황을 독립운동시기의 공산당과 현재의 공산당을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內地)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나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야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인 것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이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권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사리(私利)와 영광을 위하야 부언낭설(浮言浪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당들이 소련을 가리켜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빗대어 신랄하게 매도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사람의 형용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희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놓고 싸울 결심이다. …”
美國 독립전쟁 사례까지 언급하며
이승만은 공산당과 싸우는 방법을 미국의 독립전쟁 때의 상황까지 거론하면서 설명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誨諭)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풍성학려(風聲鶴?)로 따라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우리는 과거를 탕척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오, 종시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이나 친자질(親子姪)이라도 거절시켜서 즉 원수로 대우해야 할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는 애증과 친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미국인들이 독립을 위하야 싸울 적에 그 부형은 영국에 충성하야 독립을 반대하는 고로 자질들은 독립을 위하야 부자 형제 간에 싸워가지고 오늘날 누리는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와는 합동이 못 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 된다.”
이승만은 끝으로 독촉중협은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들과만 협동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 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어 협동하는 각 단체와 합하야 착착 진행 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들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을 것이니,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우리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53)
그것은 강력한 조직력을 과시하면서 인민공화국의 간판을 포기하지 않고 미군정부와 우익정파에 대항하고 있는 공산당과의 합작을 포기하는 결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경고적인 압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하지는 공산당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내용은 방송하지 못하게 이승만의 방송원고를 사전에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날 이승만은 그것을 의식하여 방송원고의 앞부분만 영역하여 하지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윤석오(尹錫五) 비서가 이승만이 구술한 뒷부분 원고를 청서하여 방송국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승만은 앞부분 원고의 마지막 장을 남겨놓고 있었다.54)
“李承晩은 親日派 民族反逆者들의 ‘救主’”
이승만의 이 연설에 대하여 박헌영은 12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장문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박헌영은 먼저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 “놀랄 만한 열의로서” ‘대동단결’이라는 미명 아래 일관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옹호함으로써 그들의 ‘구주’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최고수령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이승만의 오류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세계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막대한 재산과 인명을 희생한 연합국에 대하여 감사하기는커녕 38도선문제, 연합군의 조선민족에 대한 적국 대우 등등의 이유를 들어 공연한 적의를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이승만이 “농촌에서 농민은 농사를 아니한다.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을 아니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를 이렇게 쓰면 그는 자유를 악용하는 무리이다”라면서, 조선의 모든 혼란의 책임을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에게 돌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부르짖는 구호라고 박헌영은 주장했다.
셋째는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는 경제문제나 관계하고 정치문제는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민주주의 건설단계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정치분야에서 물러가라는 요구는 ‘파쇼’정권을 수립하여 민중을 압박하며 민중을 착취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헌영은 “‘박사’는 아직도 1920년대에 조선을 미국의 위임통치하에 두려고 열렬히 활동하던 그 사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아니하였는가”고 묻고, “‘박사’는 조선의 민주주의 건설만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까지 반대하는 자라고 우리는 선언하기를 주저않는다”고 매도했다. 그러면서 해외생활 40년 동안에도 수없는 독립운동자금을 횡령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감행하고, 귀국해서 조선호텔에 묵으면서 보이에게 한꺼번에 만원을 팁으로 주는가 하면 돈암장에서는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봉건무자(封建武者)의 생활에도 비견될 수 있는 호화 사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온갖 있는 말 없는 말로 이승만을 비방했다.
박헌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성명을 끝맺었다.
“이에 우리 조선공산당은 조선 독립을 위하야 그대 같은 위임통치주의자에게, 민주주의 건설을 위하야 그대 같은 파괴적 음모적 파쇼분자에게 단호히 그 반성을 요구한다. 만약 반성치 아니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대와 공동한 일체의 정치행동을 거부하며, 따라서 그대의 지휘하에 있는 반동단체 독촉중협과의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55)
共産黨, 獨促中協과 결별 선언
이튿날 조선공산당은 또 이승만이 남한 각 지방에 자기 임의대로 사람을 파견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망라한 독촉중협 지부를 창설하고 미군정 경찰을 이용하여 인민위원회, 공산당,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을 탄압하고 있다면서 독촉중협이 “반민주주의적이며 통일운동 진행을 방해하는 단체로 화한 것이 명백하다”고 규정하고, 독촉중협과의 일체 관계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56)
같은 날 인민당의 여운형도 이여성을 통하여 “독촉중협은 드디어 반통일의 노선을 걷고 말았다. … 만약 한쪽에서 군림적 태도를 취해서 어디까지 내 것만으로서의 통일을 강행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팟쇼적 독단이요 반통일행동이라 하겠다”라고 비판하고 임시정부의 태도를 주시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57)
이렇게 하여 이승만은 일찌감치 좌익세력의 대표적인 배격대상이 되었다.
독촉중협이 결성될 때부터 주동적으로 활동해 온 국민당의 안재홍도 12월 25일에 고충 어린 담화를 발표했다. 안재홍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그 기획에 한 돈좌[頓挫: 기세가 갑자기 꺾임]를 오게 한 것은 매우 유감”이라면서, 독촉중협의 기획이 임시정부가 기획하고 있는 특별정치위원회에 의하여 더 발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구 주석께서 말씀하심에 있어 이 박사 사이에 정의(情誼)와 신뢰가 견고한 것을 알 때에 당연에 지난 당연이지만 마음에 퍽 든든하였다. 독촉중협으로서 달성하려던 기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하여 의심치 않는다. 임시정부에서 기획하고 있는 특별정치위원회는 … 독촉중협의 기획하던 바를 잘 발전시킬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58)
안재홍은 이처럼 이승만과 김구의 신뢰관계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特別政治委員會 구성하기로
그러나 이승만의 연설에 대한 임시정부인사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승만의 공산당규탄방송이 있기 전에도 임시정부인사들은 임시정부가 귀국에 앞서 「임시정부 당면정책」으로 귀국하면 국내외 각계각층의 대표들을 망라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겠다고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별도로 독촉중협을 결성한 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리하여 국무위원 겸 국무위원회 비서장 조경한(趙擎韓)은 12월 18일에 “독촉중협은 우리 입국 전에 성립된 것이고 또 우리와 하등 연락도 없었던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정부 보조를 목적으로 한 사회단체의 하나로만 본다”고 말했다.59)
국무회의, 영수회의 등의 이름으로 회의를 거듭하면서 혼선을 빚고 있던 임시정부는 이 시점에는 ‘민족통일의 최고기관’으로 특별정치위원회를 구성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조소앙, 김붕준(金朋濬), 김성숙(金星淑), 최동오(崔東旿), 장건상(張建相), 유림(柳林), 김원봉(金元鳳) 7명이 중앙위원이 되고 좌-우 양 진영의 각 정당과 명망 있는 혁명투사를 총망라하여 명실공히 3천만의 통일전선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독촉중협과는 전혀 별개의 기관이 될 것이라고 했다.60)
이승만의 방송이 있자 임시정부 안의 반대파들은 노골적으로 이승만을 비판했다. 민족혁명당 소속의 국무위원 성주식(成周寔)은 12월 20일에 기자들에게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사절일 뿐이고 임시정부 안에서 결의권이 없다. … 따라서 이 박사의 발표는 어디까지나 박사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와 독촉중협의 관계에 대해서는 “법적 근거는 없다. 임시정부는 앞으로 남북을 한데로 뭉쳐 전국적 통일공작을 계획하고 있다. 이 박사는 임시정부를 협력하나 임시정부와 독촉중협이 협동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좌-우가 서로 반반으로 뭉치자는 박헌영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도 서로 논의하면 해결될 문제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제6항에 따른 각당 각파의 합동회의를 강조했다.61) 같은 민혁당 소속의 국무위원 장건상도 기자들에게 “좌익세력과는 극력 협력하고 악수해야 할 이때에 그러한 말은 우리로서 상상치도 못할 일이며, 나는 절대로 그 방송에 찬동하지 않는다. 좌익을 무시하고 통일 운운은 불가능사라고 믿는다”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와 독촉중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62)
“李 박사는 임시정부를 떠난 사람”
한편 외무부장 조소앙은 이승만의 방송과 그것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비판에 대해서는 “한군데서 실수할 때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양비론을 편 다음, “임시정부를 민족운동의 계통으로 알고 일보 일보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이승만과 독촉중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승만 박사의 독촉중협에 대하야는 국무위원회의 결의로 하는 것이 아니니 임시정부로서 시비를 운운할 것도 없고 책임을 가질 수도 없다. 이 박사가 주미외교위원장일 때에는 그의 행동에 대하야 임시정부가 책임졌으나 그가 입국한 현재는 이미 현직을 떠났고 또 임시정부로서 이 박사에 대한 새 결정이 나지 않았으므로 박사의 정치활동은 임시정부를 돕고 임시정부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하는 일일 것이나, 법규관념으로는 그의 정치행동에 무관한 것이다.”63)
일찍이 상해시절에 이승만의 비밀통신원이기도 했던 조소앙의 이러한 형식논리는 임시정부 주동자들의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확집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구는 12월 27일에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했다. 선전부장 엄항섭이 대독한 김구의 연설 내용은 한국독립당의 「정강」과 「정책」을 국내 분위기에 맞게 첨삭한 것이었다. 그는 먼저 임시정부가 중국, 소련,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의 승인과 같은 지원을 받았음을 강조하면서, 그 보기로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 레닌 선생은 제일 먼저 이 정부와 손을 잡고 거액의 차관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하자고 공산당의 슬로건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의식한 듯한 주장도 했다. 그러면서 또 “그러나 모 일부분, 모 일계급의 독재는 반대한다”고 하여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주장은 반대했다. 그는 경제의 균등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화하여야 하고, 교육의 균등을 실시하기 위하여는 의무교육을 국비로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숙청을 주장했다. 그것은 귀국 직후의 신중한 태도와는 많이 달라진 입장 표명이었다.64)
“信託管理 강요하는 政府 용납 못해”
이승만은 12월 26일의 주례 라디오연설을 통하여 신탁통치를 단호히 배격하면서 독촉중협의 지부를 각 지방에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이승만은 먼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번스 국무장관,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은 모두 한국의 독립을 찬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마치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찬성하는데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승만은 자신은 한국인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구실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정당을 독촉중협으로 통합하려고 노력을 경주해 왔다면서, “통합이 성숙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극단적 공산주의자만 없었다면 통합은 벌써 오래전에 성공하였을 것”이라고 독촉중협이 지연된 이유를 공산주의자들의 소행 때문으로 돌렸다. 이승만은 “만일 우리가 지금 방해자들의 파괴목적 달성을 공수방관(拱手傍觀)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싸워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우리가 신탁관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이상 주저치 말고 중앙협의회 지부를 각 지방에 조직하고, 조직이 완성되면 관계단체와의 연락도 직접 실현될 것이다”라고 독촉중협의 지방지부 결성이 곧 신탁통치 반대운동이라고 주장했다.65)
또한 이승만은 이날 독촉중협과 임시정부의 관계에 대한 구구한 언설과 관련하여 독촉중협은 임시정부의 ‘엄호단체’라고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임시정부 요인이 비록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에는 여러 가지 약속이 있으며 또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승인될 때까지는 대외적으로 그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다. 가령 미국 국무부의 친일파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누가 반박할 것인가. 또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누가 그 정통성을 주장할 것인가. 그것은 조직화된 여론과 개인의 자격으로 있는 자유스러운 입장이 아니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임시정부를 엄호하는 단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곧 독촉중협이다. … 하지 중장의 조선독립에 대한 복안을 실천하는 길도 또한 이외에 없을 것이다.”66)
하지 중장의 조선독립에 대한 복안이란 이승만이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말한 국무회의 또는 국정회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부 신문에는 군정부가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국무협의회(스테이트 카운슬) 같은 기관”을 구성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망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다.67)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부정확한 제목으로 모스크바 외상회의의 결과에 대한 ‘워싱턴 25일발 합동(合同) 지급보’가 도하 신문에 일제히 크게 보도된 것은 이튿날인 12월 27일 아침이었다.⊙
1) 『自由新聞』 1945년 11월 27일자,「主席數日間의 動靜」및「李博士定例會見談」;『中央新聞』1945년 11월 27일자,「金主席內外記者團과 共同會見」. 2) 張俊河, 『돌베개』, 禾多出版社, 1971, p. 444. 3) 『新朝鮮報』1945년 11월 27일자,「李博士와 要談」. 4) 『中央新聞』1945년 11월 28일자,「四首領과 會見要談」;『서울신문』1945년 11월 28일자,「金九先生과 各黨首會見」. 5) 張俊河, 앞의 책, p. 460. 6) 위의 책, p. 463. 7) 같은 책, pp. 464~466. 8) 『中央新聞』1945년 11월 28일자,「四首領과 會見要談」. 9) 『新朝鮮報』1945년 12월 2일자,「金主席 李博士와 要談」.
10) 『自由新聞』1945년 12월 2일자,「歡迎旗行列도 盛大」. 11) 張俊河, 앞의 책, pp. 483~489. 12) 張俊河,「白凡金九先生을 모시고 六個月(四)」,『思想界』1966년 11월호, p. 101. 13)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9, pp. 66~67. 14) 『中央新聞』1945년 12월 6일자,「獨立促成中央協議會 銓衡委員選任不順調」; 李萬珪,『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50~253. 15) 「獨立促成中央協議會 中央執行委員會 第一回會議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建國期文書 1』, 延世大學校現代韓國學硏究所, 1998, pp. 9~12.
16) 金?洙 口述,『遲耘 金?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1999, pp. 182~183. 17) 『서울신문』1945년 11월 28일자,「三十八度線撤廢코저 美蘇間에 協議進行」. 18) 『서울신문』1945년 12월 2일자,「하지中將의 統一案에 積極的協力을 約束」. 19) 『서울신문』1945년 12월 8일자,「金, 李, 呂, 安四氏 하-지中將과 會談」. 20) 『中央新聞』1945년 12월 7일자,「軍政首腦와 李博士, 長時間重大會談」. 21) 『新朝鮮報』1945년 12월 9일자,「윌리암顧問官 安在鴻氏와 會談」. 22) 『東亞日報』1945년 12월 10일자,「하지中將 各黨首要談」. 23) 이정박헌영전집편찬위원회 편,『이정박헌영전집(2)』, 역사비평사, 2004, pp. 111~112. 24)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57~72. 25)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 135.
26) 金?洙 口述,『遲耘 金?洙』, p. 183. 27) 슈티코프가 말렌코프에게,「조선의 정치상황보고」, 기광서,「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재 해방 후 북한정치사 관련자료 개관」,『해방전후사사료연구(Ⅱ)』, 선인, 2002, pp. 121~122. 28) 정병준,「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역사와 현실』제19호, 역사비평사, 1996, p. 160. 29) Byrnes to Langdon, Nov.29,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138. 30) Langdon to Byrnes, Dec.14, 1945, FRUS 1945, vol. Ⅵ, p. 1143. 31) Langdon to Byrnes, Dec.11, 1945, FRUS 1945, vol. Ⅵ, p. 1141. 32) 『新朝鮮報』1945년 12월 16일자,「獨立促成中央協議會 各黨別委員?九名內定」. 33)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3~5.
34)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13~15. 35) 『自由新聞』1945년 12월 13일자,「民族統一戰線과 亡命政府에 對하야」. 36) 金?洙 口述,『遲耘 金?洙』, pp. 154~155, p. 183. 37) 安在鴻,「八·一五 당시의 우리 政界」,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編,『民世安在鴻選集(2)』, 知識産業社, 1983, p. 473. 38) 주35)와 같음. 39) 『東亞日報』1945년 12월 15일자,「亡命客集團이란 不當」.
40)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23~38. 41)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76~88. 42)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135~136. 43)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136~179. 44) 『自由新聞』1945년 12월 15일자,「南鮮에 宣傳隊, 獨立促成中協서」.
45) 金?洙 口述,『遲耘 金?洙』, p. 152. 46) Hodge to MacArthur, Nov.25, 1945, FRUS 1945, vol. Ⅵ, p. 1134. 47) MacArthur to Hodge, Nov.25, 1945, FRUS 1945, vol. Ⅵ, p. 1134.
48) 『自由新聞』1945년 12월 13일자,「하-지中將重大聲明發表」. 49) 『서울신문』1945년 12월 11일자,「아놀드長官辭任說, 後任에 ‘러-취’少將」;『朝鮮日報』1945년 12월 17일자,「아처 러취新軍政長官 十六日金浦飛行場着 赴任」. 50) 『解放日報』1945년 12월 23일자,「成周寔氏의 發言에 對하야」. 51) 『東亞日報』1945년 12월 20일자,「莊重! 臨政歡迎의 盛典」; 심지연 엮음,『해방정국논쟁사(Ⅰ)』, 한울, 1986, p. 231.
52) 『東亞日報』1945년 12월 22일자,「人民委員會包圍 美軍이 書類等을 押收」;『自由新聞』1945년 12월 25일자,「中央人民委員會經緯發表」.
53) 『서울신문』1945년 12월 21일자,「共産黨에 대한 나의 立場」;『東亞日報』1945년 12월 23일자,「李博士 共産黨에 대한 放送」. 54) 尹錫五 證言, 孫世一,『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196. 55) 『解放日報』1945년 12월 25일자,「老파시스트李博士를 暴露함」;『朝鮮人民報』1945년 12월 24일자,「팟시스트李博士에 反省要求, 共産黨代表朴憲永氏發表」.
56) 『解放日報』1945년 12월 25일자,「獨促中協과의 關係破棄」. 57) 『自由新聞』1945년 12월 25일자,「人民黨呂運亨氏政局談」. 58) 『自由新聞』1945년 12월 26일자,「中協에 對한 安在鴻氏表明」. 59) 『中央新聞』1945년 12월 20일자,「李博士中心의 政治動向」. 60) 『自由新聞』1945년 12월 25일자,「새統一機關樹立目標로 政治特別委員會組織」. 61) 『서울신문』1945년 12월 21일자,「法的根據는 업다」. 62) 『서울신문』1945년 12월 21일자,「左翼無視하고 統一不能」.
63) 『新朝鮮報』1945년 12월 26일자,「政黨間의 統一과 臨政擴充竝行中」. 64) 『東亞日報』1945년 12월 30일자,「三千萬同胞에게 告함」. 65) 『東亞日報』1945년 12월 28일자,「信託制와 우리의 決心」. 66) 『東亞日報』1945년 12월 27일자,「中協은 臨政의 掩護體」. 67) 『中央新聞』1945년 12월 21일자,「人民各層各界代表網羅國務協議會를 組織」.
12월 1일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 要人 귀국 환영식이 열렸고, 바로 이날 제2진이 귀국했다.
獨促中協의 中央執行委員 선정을 위한 전형위원회의는 12월 14일에 左右翼을 망라한 中央執行委員 39명을 선정했다. 그러나 共産黨의 朴憲永은 左右翼이 5:5의 비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15일에 소집된 中央執行委員회의에 左翼人士 15명은 참가하지 않았다.
共産黨의 참가 포기에 李承晩은 12월 19일 共産黨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폭탄연설’을 했고, 共産黨도 李承晩을 親日派, 民族反逆者의 ‘救主’라고 매도하면서 獨促中協 탈퇴를 선언했다.
臨時政府人士들도 金九, 金奎植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臨時政府가 귀국하기 전에 李承晩이 “民意의 대표기관”을 자처하면서 별도의 기관을 조직한 것을 못마땅해 했다. 臨時政府의 左派人士들은 獨促中協이 임시정부와는 “법적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李承晩의 反共연설을 비판했다. 임시정부는 特別政治委員會를 구성하기로 했다.
1. 獨促中協의 中央執行委員會 결성
11월 10일쯤이면 김구가 귀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활동을 중지하고 있던 이승만은 김구의 도착이 늦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 결성 작업을 서둘렀다. 김구가 도착한 11월 23일 저녁에 누구보다 먼저 죽첨장(竹添莊)으로 가서 김구를 만난 이승만은 11월 26일까지 매일 김구를 만났다. 국내 상황을 설명하고 독촉중협의 활동에 김구가 참여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면담은 주로 김구가 돈암장(敦岩莊)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11월 24일에는 돈암장으로 답방한 김구를 하지(John R. Hodge) 사령관과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에게 안내했다. 11월 25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오전에 정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본 김구는 오후 2시쯤에 돈암장을 방문하여 저녁까지 이승만과 같이 있었다.
敦岩莊에서 두 사람이 매일 만나

“지금 여러분이 본인에 대해서 제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하지 장군의 말과 같이 한국의 장래와 건국사업에 어떠한 정책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인은 귀국한 지 불과 수일밖에 안되어 국내의 제반사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과 또 임시정부의 각원(閣員)들이 다 귀국하지 못한 까닭에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으므로 확언할 수 없다. 앞으로 국내에서 조국해방에 애쓰신 선배와 국사를 위해서 노력하신 제씨를 방문도 하고 초집(招集)도 하야 시급한 자주독립과 건국경륜을 의논하는 한편 미주둔군 당국자와도 절실히 협의한 뒤에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려고 한다.”1)
이러한 김구의 신중성은 그의 말이 “불을 토할 것인지 쇠를 토할 것인지”를 기대하고 있던 기자들을 적이 실망시켰다.2) 도하 신문에 일문일답 기사가 없는 것이 그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기자회견을 마친 김구는 돈암장으로 가서 이승만과 오랫동안 요담했다. 이날은 이승만의 정례 기자회견일이었으나, 이승만은 김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윤치영(尹致暎)으로 하여금 대신 기자들을 만나게 했다.3)
4大政派 대표들과 個別面談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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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지 이틀 뒤인 11월 25일 郭岩莊을 방문한 金九를 안내하는 李承晩. |
이에 대해 김구는 “각 각료들의 입국을 기다려서, 또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만 대답했다.5)
다음으로 김구는 한국민주당의 송진우(宋鎭禹)와 회담했다. 송진우는 몇 가지 구체적인 대책을 건의했다. 그것은 첫째로 몇 개조의 친선사절단을 조직하여 각 연합국에 파견할 것, 둘째로 임시정부의 사무조직을 시급히 정비할 것, 셋째로 시급히 광복군을 모체로 하여 국군을 편성할 것, 넷째로 재정문제는 국내외의 유지들의 회사를 받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6)
오후에는 먼저 인민당의 여운형(呂運亨)과 회담했다. 여운형의 이야기는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로 회고담이었고, 변명조였다. “이제 선생께서 들어오셨으니 제가 할 일은 없어진 줄로 압니다”하는 여운형의 말에 김구의 입가에 이날 처음으로 미소가 스쳐갔다. 오후 4시에 인민공화국의 국무총리 허헌(許憲)이 사무국장 이강국(李康國)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허헌은 사무적인 언행으로 인민공화국이 조직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김구 선생께서 돌아오셨으니 잘 지도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말하고 자신은 백지로 돌아가서 받들겠다고 말했다. 이에 김구는 “아직은 국내 사정에 어둡고 임시정부 각원들도 대부분이 입국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잘 생각해 보자”고 간단히 대답했다.7)
그런데 김구와 회담한 뒤에 기자단과 만난 허헌은 김구가 인민공화국의 성과를 칭찬하고 전폭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을 부탁했다고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8) 이튿날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은 허헌을 불러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보도를 부인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구는 12월 1일에도 돈암장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장시간 요담했다.9) 이승만과 김구가 계속해서 만난 것은 미군정부와 이승만의 예상과는 달리 독촉중협 참가문제에 대한 김구의 태도가 너무나 신중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구로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환호 분위기 속에서 결국은 임시정부의 해산을 전제로 한 별도의 ‘민의의 대표기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혼자서는 단안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머지 각원들이 귀국하고 또 국내 정세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관망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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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의 臨時政府귀국환영회에 나란히 참석한 李承晩과 金九. |
바로 이날 임시정부요인 제2진이 귀국했다. 일행을 태운 미군수송기는 오후 1시반에 김포비행장에 닿았으나 눈 때문에 착륙이 불가능했다. 비행기는 김포비행장 상공을 두 번이나 선회하다가 기수를 돌려 오후 3시나 되어 옥구(沃溝)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장에는 미군대형트럭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트럭이 논산(論山)에 닿은 것은 어두워서였다. 이튿날 아침 10시에 논산을 떠난 귀국 제2진은 오후 4시에 유성(儒城)에 닿았고, 서울에서 보낸 수송기로 유성비행장을 떠나서 김포비행장에 내린 것은 오후 5시였다. 일행은 바로 경교장으로 갔다가 숙소로 마련되어 있는 진고개의 한미(韓美)호텔로 이동했다.11)
이튿날 오전 11시에 경교장에서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가장 먼저 경교장에 도착한 사람은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이었다. 도하 신문들은 “동경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 등의 표제를 달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 ‘국무회의’는 일반국민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제2진으로 귀국한 국무위원들의 표정은 당장 불만과 비난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김구는 개회사에 이어 유동적인 국내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어 엄항섭이 경과보고 형식으로 정당 난립을 이루고 있는 국내 정세와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 및 이에 대한 임시정부의 조치 등을 설명했다. 이승만은 경각심을 일깨우는 그 특유의 논법으로 국내외 정세,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하는 일장의 연설을 했다. 제2진으로 귀국한 한 국무위원이 자신들도 국내정정에 직접 접해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제의하여, 회의는 바로 간담회로 바뀌었다. 간담회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12) 이날부터 국무위원들의 개별행동이 시작되었다.
2진과 함께 입국한 중국 무전사 3명은 중국국민당과의 무전연락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부가 대중국 전파 발신을 금지하여 이들은 이따금 외국의 단파방송이나 청취하는 정도의 일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13)
韓民黨人士 중심의 銓衡委員會議 流會돼
이승만은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으로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백남훈(白南薰), 김동원(金東元), 허정(許政), 원세훈(元世勳) 7명을 선정하고 11월 28일에 돈암장에서 제1회 전형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안재홍은 불참하고, 여운형은 전형위원 선정의 편파성을 지적하며 퇴장하고 말아 회의는 유회되었다. 여운형이 반발한 것은 송진우를 비롯한 참석자 5명이 모두 한국민주당 총무들인 한편 공산당 인사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이들 다섯 사람이 모두 한민당원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14)
이승만은 전형위원 선정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안재홍을 비롯하여 인민당의 김지웅(金志雄), 조선공산당의 김철수(金?洙), 천도교의 손재기(孫在基), 한민당의 백남훈, 한국독립당의 김석황(金錫黃), 무소속의 정노식(鄭魯植) 7명이 전형위원으로 새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도 말썽이 없지 않았다. 인민당의 김지웅이 당의 승인을 받지 못해 참가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이여성(李如星)으로 바꾸어 교섭했으나, 이여성도 당의 승인없이는 참가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하여 결국 6명의 전형위원으로 12월 5일부터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15) 공산당의 김철수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박헌영(朴憲永)이 거부했으나, 김철수가 소속정당의 승인이 전형위원 선정의 조건이 아닌 점을 강조하며 항의하자 박헌영이 마지못해 동의했다고 한다. 전형위원회의는 12월 14일까지 돈암장에서 10여 차례 거의 매일 계속되었는데, 회의에는 이승만의 정치고문인 장덕수(張德秀)도 투표권 없이 참석했다.16)
하지 장군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승만은 “(이 무렵) 군정부 하지 장군은 우리를 위하여 신이야 넋이야 하면서 2주 내로 이 결성을 속히 보여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하지는 11월 27일에 미국정부와 소련정부가 모스크바에서 남북 양 지역 간 통신의 개시, 경제생활의 통일과 양 지역 간의 물자교류, 자유로운 교통왕래 등 38도선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불편을 철폐하기 위하여 협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17) 그러고는 각 정파의 지도자들과 일련의 면담을 가졌다. 면담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먼저 11월 30일에는 여운형을 만났다. 이튿날 여운형은 기자들에게 하지가 좌-우 어느 쪽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복안을 제시했으므로 자신은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다.18) 하지는 12월 6일에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 세 사람을 시차를 두고 군정청으로 초치하여 회담했다.19) 이승만과는 아널드와 함께 오전 9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20) 또 12월 7일에는 국민당의 안재홍을 군정청으로 초치하여 하지의 고문관 윌리엄스(George W. Williams)가 만났고21), 그 이튿날에는 한민당의 송진우를 초치하여 하지가 만났다.22)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아널드 군정장관이 12월 11일에 군정청으로 초치하여 회담했다. 아널드는 박헌영에게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국가평의회를 설립할 계획임을 설명하고 “만일 1개월 안에 정당들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평의회는 다른 나라의 후견(後見)에 맡겨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3)
15人 이내로 구성되는 國政會議 또는 國務會議
하지와 각 정파 영수들과의 일련의 회담내용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나, 12월 15일에 열린 독촉중협의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이승만의 다음과 같은 발언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하지가 각 정파 지도자들을 만나서 촉구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앙집행위원회의 조직을 군정부에서는 초조히 고대하고 있다. 그들의 바라기는 40인가량으로 결성하는 것이었는데, 그 수에 이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군정부에서 이 회에 대하여 바라는 것은 대내 대외관계에서 이 기관을 경유하게 하여 이 기관을 권위 있게 하자는 데 있다. … 군정부는 나에게 말하기를 인도자의 회를 종합하여 민의의 대표기관으로 만들어 민의의 소봉(所奉)이 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 머지않아 개최될 모스크바의 각국 외상회의의 관계가 우리 문제에 심대한 것이 있는데, 이 회의 구성이 지연되어 유감이다. …
군정부에서는 이 독촉중협을 국정회의(國政會議) 또는 국무회의(國務會議)의 명의로 모아 최고의 인도자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趙素昻), 유동열(柳東說) 네 분을 생각하는데 … 이외에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박헌영 혹은 김철수 이 네 분을 독촉중협에서 추천하면 어떨까 한다. 군정부의 의견은 15인 이내로 구성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널드 군정장관은 먼저는 이 고문제도를 군정부의 부속물로 하려고 생각한 모양인데, 이에 대하여 나는 반대하고 민의의 대표로 군정부에 연락하는 국정회의, 즉 한인 문관의 민의대표로 하자고 했다. …”24)
이승만이 말한 국정회의 또는 국무회의란 아널드가 박헌영에게 설명한 국가평의회였을 것이다. 장덕수는 그것을 ‘국무회의(State Council)’라면서 국무회의 규정을 기초하기도 했다.25)
金日成, 曺晩植도 포함시켜
비밀회의로 진행된 전형위원회의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진행상황을 알 수 없는데, 공산당 대표로 회의에 참가했던 김철수는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한 십여 번 나가서 돈암장에서 만나. 그 자리가 대단히 중요한 자리여. 인제 고 자리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중앙집행위원회]를 뽑아 놓으면, 그 중앙협의회[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정부를 조직혀. 임시정부를 조직해 가지고 거기서 국회소집을 해. 국회를 뫼야. … 어떡허든지 빨리 우리나라 정부를 조직한다고. 그 서른아홉 명인가 뽑았어. 김일성(金日成)이 들어오고 조만식(曺晩植)이 들어오고 송진우, 여운형이, 다들, 박헌영이. 전부 말단이 아닌 사람은 들어갔단 말여.”26)
김철수에 따르면,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가 국회를 소집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며 거기에는 북한의 김일성과 조만식까지도 참여시킨다는 구상이던 것이다. 이처럼 미군정부와 이승만이 합의한 국무회의는 남북한에 걸친 통일된 임시정부를 상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근년에 공개된 한 구소련문서로도 확인된다.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 F. Shtykov)가 1945년 11월 무렵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말렌코프(G. M. Malenkov)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결성한 뒤에 조만식에게 밀사를 보내어 김일성을 초청할 것을 제의했으나 김일성이 반대했다고 기술되어 있다.27)
許憲이 南北韓 각각의 排他的信託統治 제의
하지 장군이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성을 재촉한 것은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3국(미국, 소련, 영국) 외상회의를 의식한 때문이었다. 하지는 번스(James Byrnes) 미국무장관이 모스크바회의에서 한국처리방안으로 지금까지의 미국정부의 공식 정책인 다국 간 신탁통치 대신에 하지의 정치고문대리 랭던(William R. Langdon)이 건의했던 ‘행정위원회’안을 제출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28) 랭던의 건의를 검토한 번스는 11월 29일에 “만일 소련으로부터 한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적절하고 특별한 보장만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탁통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목할 만한 회답을 보내왔었다.29)
랭던은 모스크바회의가 개최되기 이틀 전인 12월 14일에 번스에게 다시 주한미군정부의 건의안을 타전했다. 그것은 1) 이미 보고한 제안[행정위원회안]이 소련의 정책과 일치하는지, 2) 아니면 국제연합 관할 아래 양 지역에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최장 5년 동안의 배타적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동안에는 양 지역 간에 사람과 재산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고 그 뒤에 양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동시에 한국을 국제연합에 가입시키는 방안에 소련이 찬성하는지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0)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방안이 인민공화국의 허헌이 랭던에게 제안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31)
中央執行委員 39명을 선정
독촉중협의 전형위원회의는 12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중앙집행위원 선정작업을 마무리했다. 먼저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등에 배정할 인원수를 결정했다. 정당에서는 4대정당인 한국민주당, 공산당, 국민당, 인민당이 각각 4명, 여성단체로는 부녀동맹 1명, 여자국민당 1명, 무소속 1명, 종교계에서는 예수교 1명, 불교 1명, 천도교 1명, 유교 1명, 청년단체로는 조선청년총동맹(청총) 2명과 그 밖에 8명, 기타단체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2명,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2명, 군소정당 2명 등 모두 39명을 결정했다.32) 14일 오후의 전형위원회의에서 선정된 39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법린(金法麟: 불교) 김석황(金錫璜: 한국독립당)
김승렬(金勝烈: 유교) 김여식(金麗植: 신한민족당)
김지웅(金志雄: 인민당) 김창엽(金昌曄: 기타 청년단체)
김철수(金?洙: 공산당) 남상철(南相喆: 군소정당)
박용희(朴容羲: 국민당) 박헌영(朴憲永: 공산당)
백남신(白南信: 군소정당) 백남훈(白南薰: 한민당)
백용희(白庸熙: 전농) 변홍규(卞鴻圭: 기독교)
서중석(徐重錫: 무소속) 손재기(孫在基: 천도교)
송진우(宋鎭禹: 한민당) 안재홍(安在鴻: 국민당)
엄우룡(嚴雨龍: 국민당) 여운형(呂運亨: 인민당)
원세훈(元世勳: 한민당) 유석현(劉錫鉉: 한국독립당)
유혁(柳赫: 전농) 이갑성(李甲成: 신한민족당)
이걸소(李傑笑: 인민당) 이성백(李成伯: 전평)
이순금(李順今: 무소속) 이시열(李時悅: 군소정당)
이여성(李如星: 인민당) 이응진(李應辰: 천도교)
이의식(李義植: 국민당) 이호제(李昊濟: 청총)
임영신(任永信: 여자국민당) 조동호(趙東祜: 공산당)
조두원(趙斗元: 공산당) 함태영(咸台永: 기독교)
허성택(許聖澤: 전평) 허정(許政: 한민당)
황신덕(黃信德: 건국부녀동맹)33)
그런데 이 시점에 공산당의 박헌영이 개인 자격으로 전형위원 회의에 참석하여 전형위원들의 합의사항을 뒤집는 주장을 했다. 박헌영은 김철수가 사전에 이승만의 허락을 얻어 참석하게 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이 독촉중협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외적인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헌영은 중앙집행위원 수를 민족주의 쪽과 공산당이 반반씩 나누어야 한다고 고집했다.34) 그 논거는 12월 12일에 발표한 박헌영의 성명서에 표명되어 있다. 성명서는 민족통일전선은 밑으로부터 대중을 기초로 하고 결성되는 통일이 가장 기본적이요 내용도 충실하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족통일전선의 상부통일인 정당 간의 협력에 대하야 우리 당에서는 타협점을 명시하였다. 즉 반반수의 세력균형을 가지고 좌우익이 연합하자는 우리의 정당한 제의에 대하야 우익정당은 난색을 보일 뿐 아니라 과반수의 절대다수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들이 현실과 구체적 사정을 파악지 못한 까닭이다. 그들은 좀 더 민주주의를 학습할 필요가 있다.”35)
박헌영의 요구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한민당의 송진우였다. 그의 주장은 인민당도 공산주의 정당이고 전평 등도 공산당의 외곽단체이므로 박헌영의 주장대로 하면 공산주의자들이 반수를 훨씬 넘게 된다는 것이었다.36) 또한 국민당의 안재홍도 박헌영에게 “지금은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이 요청되는 때이니 5대5 등 비율은 문제가 아니되고 민족주의자가 영도하는 국가를 성립시켜야 하니까 공산주의자는 제2선으로 후퇴하도록 하라”고 권고했으나, 박헌영은 “그것이 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서 짜증을 더럭더럭 내었다고 한다.37)
박헌영은 또 12월 12일의 성명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것은 김구 일행이 귀국한 뒤에 처음으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언급한 공산당의 공식 견해였다.
“망명정부가 일종의 임시정부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국제관계와 국내제세력을 옳게 파악한다면 결코 임시정부로서 행세할 리 없고 개인자격으로 본분을 지켜야 국제신의가 서게 될 것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을 착안하고 있는 국내의 진보적 세력과 접근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될 것이니, 그분들은 좀 더 왕가식적(王家式的), 군주식적(君主式的) 생활 분위기에서 해탈하고 나와 조선인민, 특히 근로대중과 친히 접촉하야 조선인의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필요가 있다. 과거 수십 년간 망명생활 중에 조선과 분리한 생활을 계속하던 분들이 또다시 국내에 와서도 그러한 비민중적 생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38)
박헌영의 임시정부 부인성명에 대해 조소앙은 이튿날 기자들을 만나 “대중과 접하라는 점에 대해서는 쌍수 환영이다”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1920년에 소련의 레닌(Vladimir I. Lenin)도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절대 원조를 하여 왔다고 주장하면서, “소련을 위시하여 각 열강과의 역사적 사실을 공산당은 망각지 말기 바란다”고 군색하게 반박했다.39)
共産黨 참가는 단념하기로
드디어 12월 15일 오후 3시부터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들의 첫 회의가 돈암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선정된 중앙위원 39명 가운데 참석자는 한민당의 송진우, 백남훈, 허정, 원세훈, 국민당의 안재홍, 엄우룡, 이의식, 박용희, 신한민족당의 이갑성, 한국독립당의 유석현, 천도교의 손재기, 이응진, 불교의 김법린, 일주일 뒤에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을 결성하는 김창엽, 건국부녀동맹의 황신덕으로 모두 15명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당과 인민당 및 전평, 전농, 청총 등의 좌익단체인사 15명은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전형위원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해 온 공산당의 김철수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철수가 “매우 침착하고 진실하게 보이는 분으로서 타협성이 많아 보였으나 당의 관계로 이와 같이 된 모양”이라면서 아쉬워했다. 우익단체에서도 불참자가 많았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에 공산당을 참가시키는 문제는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식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여러분이 더 협의해서 공산당을 다시 참가하도록 하든지 어쩌든지 … 나의 생각으로는 더 다시 여지가 없지 않을까 한다. … 지금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면 저 공산당 주장은 유럽과 중국의 선례를 보아 확실히 알 수 있는데, 나로서는 대공협동은 심히 어렵다고 본다. … 지금 우리가 부질없이 공산당과 협동한다 하여 해결운운만 하고 있으면 도리어 지방사람들의 심목(心目)을 현황[炫煌: 어지럽고 황홀함]케 할 뿐이니 … 나는 이 공산분자의 심리를 알고 있으므로 끝내는 일에 무익할 것도 짐작하였으나, 이분 저분의 제언으로 가지우지(加之又之)하고 또 감지삭지(減之削之)를 일삼다가 지금 실패라 하면 실패라 하게 되었다. 오늘이 미국인 군정부가 내용으로 이 결속의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한 최후의 한정일(限定日)이다. 적어도 일주일 전쯤에 이 합동을 보여주었더라면 미국인이 우리에게 말하여 줄 것이 있었을 것인데, 참으로 유감이다. …”40)
이렇게 하여 공산당의 참가는 단념한 채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를 성립시켰다.
“金九씨가 임시정부諸公의 속박을 많이 받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임시정부와의 관계 문제였다. 곧 독촉중협이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추대할 것인가,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독촉중협에 참가시킬 것인가, 또는 두 조직을 병행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참석자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이승만은 김구와 합동으로 임시정부와는 별도의 국정최고기관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시정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 독촉중협이 대내 대외 문제 해결의 기관으로 되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이므로 이를 별개 조직의 정부라는 낭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씨 이하 혼성체로 국정(國政)에 대하여 최고지도자로 했으면 한다. 그렇게 하면 중국 주석 장개석(蔣介石)씨 같은 분이 주장하야 우리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게 되든지 이 독촉중협이 성실(成實)되든지 양단 간에 김구 주석과 일을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 … 그리고 독행 독단할 때가 오면 나는 독단 독행하려고 한다. …”
참석자들이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큰 상황에서 몇 사람만 선택한다면 임시정부가 분열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표명하자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어차피 해산할 수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시정부가 환국한다는 말을 듣고 이 독촉중협 진행을 중지한 것은 김구 주석이 온 뒤에 상의 양해하는 것이 좋을까 한 까닭이다. 김구씨와는 말한 바도 있어 양해가 어렵지 아니하나, 지금 와서 본즉 임시정부가 입국하기 전에 임시정부제공이 서로 구속이 견고하게 되어 있는 모양으로서, 임시정부제공의 협의가 없으면 좀 안 될 모양으로 보인다. 내 생각에는 정부조직체는 독촉중협을 견실히 하는 데서 나올 것으로 보는데, 지금 김구씨가 임시정부제공의 속박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 … 사람들은 이 독촉중협을 별동대로 보고 있는 모양인데, 김구씨는 이 독촉중협과 합일하려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조금 난관으로 생각되는 것은 임시정부를 해산치 아니하면 안 되게 되는 점이 이것이다. …”41)
金九는 別室에서 張德秀의 설명 들어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는 이튿날 오후에도 돈암장에서 회의를 계속했다. 전날 참석했던 송진우, 이응진, 황신덕 세 사람이 불참하고 한국독립당의 김석황, 예수교의 변홍규, 민일당(民一黨)의 남상철이 새로 참석하여 참석자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15명이었다. 회의에서는 먼저 장덕수가 기초해 온 국무회의의 성격 규정안이 보고되었으나, 시기상조라는 등의 이유로 토의되지는 않았다. 같은 시간에 돈암장을 방문한 김구는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고 별실에 있었는데, 장덕수는 김구에게 가서 국무회의 규정안을 설명했다.42) 이승만은 독촉중협과 임시정부의 관계에 대하여 김구와 김규식의 양해를 얻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결의문을 만들어 대외선언을 하는 일은 임시정부가 좀 꺼린다면서 “만약 불여의하면 독자적 견지에서 진행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이승만은 12월 19일로 예정된 대대적인 임시정부개선환영식을 독촉중협이 대외선언을 하는 자리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는 공산당의 불참에 대한 노여움을 거듭 털어놓았다.
“우리의 일이 늦어서 저 군정부 하지 장군은 골이 나 있다. 공산당이 불참가한 것을 들으면 또 불만히 여길 것 같다. 그러나 인사로는 다 할 데까지 하여 보아도 잘 안되는 데야 어찌할 수 있나. 내가 공산당에 대하여 항상 말하여 오는 것은 어제까지 싸웠다 하더라도 오늘은 독립하기 위하여 싸움을 그만두고 손을 잡고 같이 독립하여야 하겠다 하여 왔다. 만약 독립에 반대한다 하면 그 독립반대자와는 분수[分手: 서로 작별함]하는 수밖에 없다. 나라를 파괴하려는 자와 나라를 건설하려는 자가 어찌 같이 일을 할 수 있나. …”43)
이렇게 하여 우파인사들만으로 중앙집행위원회 결성작업을 일단락 지은 이승만은 바로 독촉중협의 지방 지부조직작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남한 전역에 선전대를 파견했다.44)
人民黨이 “獨促中協 살릴 용의” 성명
조선인민당 인사들이 회의에 참가치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1월 30일에 하지 장군과 면담하고, 하지가 좌-우 어느 쪽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복안을 제시했으므로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공언했던 여운형은 독촉중협 중앙위원의 인선이 마무리되고 그 첫 회의가 열릴 무렵에는 서울에 없었다.
김철수에 따르면 인민당 인사들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박헌영의 요구 때문이었다. 일찍이 고려공산당 시절부터 여운형과 공산주의 운동을 같이했고 여운형이 1921년의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할 때에는 그의 여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던 김철수는 이때의 여운형의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여운형씨는 제재받는 공산당원이 아니거든. 근디 … 박헌영한테 꼼짝을 못해. 그렇게 말라고 하면, 못 나가게 하면 안 나가. 여운형씨가 좀 주책이 없어. 자기 주견이 확실하들 못해. 그래서 무엇을 얘기하다가도 아 미국놈이 나쁘다고 하면 그러냐고, 그래놓고는 또 가서는 얘기하는 것은 그대로가 아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 그러고 와서 인제 여러 사람이 공격을 하면 그날 미국놈하고 약조해 놓고도 안 가. 그냥 자기 집이 저 위로 올라가서, 서울 옆에[양평의 시골집] …. 거기 가서 안 와, 그냥. 그래 미국놈이 혼바람이 달아난단 말여. 약조를 해놓고도 안오능게. …”45)
그런데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 제1회 회의가 끝난 이튿날인 12월 17일에 인민당 총무국장 이여성이 눈여겨볼 만한 담화를 발표했다.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가 협동하여 과도적인 연립정부를 수립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독촉중협이 양자 사이에서 매개체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하지가 여운형에게 밝힌 구상이 반영된 말이었을 것이다.
2. 共産黨과 연대 포기하는 ‘폭탄선언’
하지 장군은 11월 말에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인민공화국의 ‘국’자를 ‘당’으로 바꾸라는 자신의 요청을 묵살한 것에 대해 격분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인민공화국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는 11월 25일에 맥아더에게 이러한 자신의 구상을 타전하면서 그것은 한국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지도자들이 최근의 집회에서 그 명칭을 바꾸고 그 명칭에 따른 오해를 제거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그 집회에 참석했던 나의 대리인[아널드 군정장관]의 보고로는 집회에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노력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할 것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나는 그러한 태도 변화의 결과를 볼 수 있기 전에는 그 지지를 신뢰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태도가 앞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이 당파가 정부라는 용어의 지위에 있지 않음을 선언하고 그 당파를 반대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공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조치는 실제로 한국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며, 일시적으로 혼란이 빚어질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빨갱이들과 (미국의) 빨갱이 신문 양쪽으로부터 ‘자유’국가에서의 정치적 차별이라는 비난을 초래할 것이다. 만일 조선인민공화국의 활동이 종전처럼 계속된다면 그들은 한국이 독립할 준비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를 크게 지연시킬 것이다. 논평을 요구함.”46)
이러한 하지의 전보에 대해 맥아더는 그날로 바로 “나는 귀하에게 적절히 조언할 만큼 지역 내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귀하가 내리는 결정은 어떠한 것이든 지지할 것이다”라고 군인정치가다운 답전을 보내어 하지의 용기를 북돋우었다.47)
“人民共和國의 ‘政府’ 행세는 불법행동”
그러나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은 인민공화국의 명칭 변경 요청에 계속 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지는 마침내 12월 12일에 군정청 출입기자단과의 회견과 서울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인민공화국의 ‘정부’ 행세가 불법행동임을 선언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의 어투는 매우 침착했으나 내용은 단호했다. 하지는 먼저 인민공화국 성립과정의 불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전후하여 박헌영과 허헌 등 인민공화국 고위인사들과 교섭했던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인민공화국 인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참고 생각한 끝에 공중의 이해를 위하여” 성명할 필요를 느꼈다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그 자체가 취택(取擇)한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어떤 의미에서든지 ‘정부’도 아니고 그러한 직능을 집행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 남부 한국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정부는 연합군최고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수립된 군정부가 있을 뿐이다”라고 선명했다.
하지는 다음과 같은 경고로 성명을 끝맺었다.
“나는 한국의 통일과 장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와 나의 장병은 한국의 건국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충실하고 공고한 기초 위에 세운 한국을 여러분에게 넘겨 드리려고 한다. 앞으로 올 오해와 긴장된 소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정당이든지 정부로 행세해 보려는 행동이 있다면 이것은 불법행동으로 다루도록 하라고 나는 미주둔군과 군정청에 명령을 내렸고, 미군 점령지역 내의 어느 곳에서든지 연합군이 명시적으로 부여한 권리가 없이 정부행세를 하는 정당이 없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반의 조치를 즉시 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48)
그것은 인민공화국의 불법성에 대한 공식선언이며 경고였다. 미육군부는 12월 12일에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을 해임했는데, 그것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전후한 인민공화국 관계자들과의 협상 실패에 대한 문책성 인사였을 것이다. 아널드는 주한미군 제7사단장으로 복귀하고, 후임 군정장관에는 버지니아 대학교(Virginia University)에 있는 미육군군정학교장 러취(Archer L. Learch) 소장이 임명되었다. 러취는 12월 1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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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의 臨時政府개선환영회를 보도한 신문지면. |
金九는 左派와 右派의 단결 강조
12월 19일 오전에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개선환영대회에는 15만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운집하여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홍명희(洪命憙)와 송진우의 환영사와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에 이어 김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다. 이날의 스포트라이트는 단연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집중되었다. 김구는 “임시정부는 어떤 한 계급, 어떤 한 당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 입장에 입각한 민주 단결의 정부였다”고 말하면서, 단결을 강조했다. 그는 “남한 북한의 동포가 단결해야 하고,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노소가 다 단결해야 한다. … 오직 이러한 단결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반도를 숙청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때에 김구가 한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라는 말은 공산당도 그대로 인용하면서 관심을 표명했다.50)
김구는 결론으로 “우리는 중국, 미국, 소련 3국의 친밀한 합작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3국의 친밀한 합작 기초 위에서만 우리의 자주독립을 신속히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共産黨에 대한 경각심 촉구
김구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비록 명시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소련과 한국공산주의자들의 야심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했다.
“3천리 강산의 한자나 한치 땅도 우리 것 아닌 것이 없다. 3천만 남녀 중에 한 사람도 이 땅의 주인 아닌 사람이 없다. 지금 밖에서는 우리를 넘겨다보는 나라들도 있고 안에는 이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분자들이 있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조석에 달렸다. 그러나 우리 민중이 한몸 한뜻으로 한 뭉치를 이루어 죽으나 사나 동진동퇴(同進同退)만 하면 타국 정부들이 무슨 작정을 하든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연합국이 제삼 선언하기를 모든 해방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우며 무슨 제도를 취하던지 다 그 나라 인민의 원에 따라서 시행한다 하였으니, 우리 민중은 우리의 원하는 것이 완전독립이라는 것과 완전독립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표할 뿐이니, 일반 동포는 내 말을 믿고 나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주어야 될 줄로 믿는다.”51)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독촉중협의 대외선언이 공표되기를 바랐던 것인데, 대회에서는 주최 쪽에서 준비한 4개항의 결의문 채택으로 대체되었다. 환영식에 이어 오후 3시부터는 덕수궁에서 성대한 환영잔치가 베풀어졌다.
임시정부 환영행사로 온 서울 시내가 어런더런한 이날 오후에 하지 장군은 군정청으로 박헌영을 초치하여 장시간 회담했다. 이날의 회담내용은 박헌영도, 지금까지의 몇 차례 회담 때와는 달리, 일체 기자들에게도 발표하지 않았고 러시아인들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하지는 전주에 발표한 자신의 인민공화국에 관한 성명의 취지를 설명하고 인민공화국이 정부행세를 중지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을 것이다. 이날 오전에 미군방첩대(CIC)가 옥인동(玉仁洞)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여 서류 등을 압수하고 간판을 떼어 간 것도 미군정부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일종의 압력이었을 것이다.52)
그렇지만 이러한 하지의 노력은 이날 저녁에 방송된 이승만의 주례연설로 말미암아 무산되고 말았다.
연설원고, 하지의 檢閱 받지 않아
이승만은 12월 19일 저녁 7시30분에 서울중앙방송국의 주례 방송연설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그것은 첫마디가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야 선언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공산당에 대한 폭탄선언이었다. 한 달 전의 방송에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야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세울 때에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고 했던 때와는 크게 달라진 입장 표명이었다. 공산주의를 둘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은 그때와 마찬가지 논리였으나, 이날의 방송에서는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파괴주의”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승만은 먼저 폴란드를 비롯한 2차대전 뒤에 해방된 유럽 여러 나라의 상황과 중국의 상황을 보기로 들어 “공산당 극렬분자들”이 어떻게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승만은 이어 한국의 상황을 독립운동시기의 공산당과 현재의 공산당을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內地)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나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야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인 것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이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권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사리(私利)와 영광을 위하야 부언낭설(浮言浪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당들이 소련을 가리켜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빗대어 신랄하게 매도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사람의 형용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희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놓고 싸울 결심이다. …”
美國 독립전쟁 사례까지 언급하며
이승만은 공산당과 싸우는 방법을 미국의 독립전쟁 때의 상황까지 거론하면서 설명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誨諭)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풍성학려(風聲鶴?)로 따라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우리는 과거를 탕척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오, 종시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이나 친자질(親子姪)이라도 거절시켜서 즉 원수로 대우해야 할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는 애증과 친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미국인들이 독립을 위하야 싸울 적에 그 부형은 영국에 충성하야 독립을 반대하는 고로 자질들은 독립을 위하야 부자 형제 간에 싸워가지고 오늘날 누리는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와는 합동이 못 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 된다.”
이승만은 끝으로 독촉중협은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들과만 협동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 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어 협동하는 각 단체와 합하야 착착 진행 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들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을 것이니,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우리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53)
그것은 강력한 조직력을 과시하면서 인민공화국의 간판을 포기하지 않고 미군정부와 우익정파에 대항하고 있는 공산당과의 합작을 포기하는 결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경고적인 압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하지는 공산당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내용은 방송하지 못하게 이승만의 방송원고를 사전에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날 이승만은 그것을 의식하여 방송원고의 앞부분만 영역하여 하지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윤석오(尹錫五) 비서가 이승만이 구술한 뒷부분 원고를 청서하여 방송국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승만은 앞부분 원고의 마지막 장을 남겨놓고 있었다.54)
“李承晩은 親日派 民族反逆者들의 ‘救主’”
이승만의 이 연설에 대하여 박헌영은 12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장문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박헌영은 먼저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 “놀랄 만한 열의로서” ‘대동단결’이라는 미명 아래 일관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옹호함으로써 그들의 ‘구주’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최고수령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이승만의 오류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세계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막대한 재산과 인명을 희생한 연합국에 대하여 감사하기는커녕 38도선문제, 연합군의 조선민족에 대한 적국 대우 등등의 이유를 들어 공연한 적의를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이승만이 “농촌에서 농민은 농사를 아니한다.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을 아니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를 이렇게 쓰면 그는 자유를 악용하는 무리이다”라면서, 조선의 모든 혼란의 책임을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에게 돌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부르짖는 구호라고 박헌영은 주장했다.
셋째는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는 경제문제나 관계하고 정치문제는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민주주의 건설단계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정치분야에서 물러가라는 요구는 ‘파쇼’정권을 수립하여 민중을 압박하며 민중을 착취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헌영은 “‘박사’는 아직도 1920년대에 조선을 미국의 위임통치하에 두려고 열렬히 활동하던 그 사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아니하였는가”고 묻고, “‘박사’는 조선의 민주주의 건설만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까지 반대하는 자라고 우리는 선언하기를 주저않는다”고 매도했다. 그러면서 해외생활 40년 동안에도 수없는 독립운동자금을 횡령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감행하고, 귀국해서 조선호텔에 묵으면서 보이에게 한꺼번에 만원을 팁으로 주는가 하면 돈암장에서는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봉건무자(封建武者)의 생활에도 비견될 수 있는 호화 사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온갖 있는 말 없는 말로 이승만을 비방했다.
박헌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성명을 끝맺었다.
“이에 우리 조선공산당은 조선 독립을 위하야 그대 같은 위임통치주의자에게, 민주주의 건설을 위하야 그대 같은 파괴적 음모적 파쇼분자에게 단호히 그 반성을 요구한다. 만약 반성치 아니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대와 공동한 일체의 정치행동을 거부하며, 따라서 그대의 지휘하에 있는 반동단체 독촉중협과의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55)
共産黨, 獨促中協과 결별 선언
이튿날 조선공산당은 또 이승만이 남한 각 지방에 자기 임의대로 사람을 파견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망라한 독촉중협 지부를 창설하고 미군정 경찰을 이용하여 인민위원회, 공산당,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을 탄압하고 있다면서 독촉중협이 “반민주주의적이며 통일운동 진행을 방해하는 단체로 화한 것이 명백하다”고 규정하고, 독촉중협과의 일체 관계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56)
같은 날 인민당의 여운형도 이여성을 통하여 “독촉중협은 드디어 반통일의 노선을 걷고 말았다. … 만약 한쪽에서 군림적 태도를 취해서 어디까지 내 것만으로서의 통일을 강행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팟쇼적 독단이요 반통일행동이라 하겠다”라고 비판하고 임시정부의 태도를 주시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57)
이렇게 하여 이승만은 일찌감치 좌익세력의 대표적인 배격대상이 되었다.
독촉중협이 결성될 때부터 주동적으로 활동해 온 국민당의 안재홍도 12월 25일에 고충 어린 담화를 발표했다. 안재홍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그 기획에 한 돈좌[頓挫: 기세가 갑자기 꺾임]를 오게 한 것은 매우 유감”이라면서, 독촉중협의 기획이 임시정부가 기획하고 있는 특별정치위원회에 의하여 더 발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구 주석께서 말씀하심에 있어 이 박사 사이에 정의(情誼)와 신뢰가 견고한 것을 알 때에 당연에 지난 당연이지만 마음에 퍽 든든하였다. 독촉중협으로서 달성하려던 기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하여 의심치 않는다. 임시정부에서 기획하고 있는 특별정치위원회는 … 독촉중협의 기획하던 바를 잘 발전시킬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58)
안재홍은 이처럼 이승만과 김구의 신뢰관계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特別政治委員會 구성하기로
그러나 이승만의 연설에 대한 임시정부인사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승만의 공산당규탄방송이 있기 전에도 임시정부인사들은 임시정부가 귀국에 앞서 「임시정부 당면정책」으로 귀국하면 국내외 각계각층의 대표들을 망라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겠다고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별도로 독촉중협을 결성한 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리하여 국무위원 겸 국무위원회 비서장 조경한(趙擎韓)은 12월 18일에 “독촉중협은 우리 입국 전에 성립된 것이고 또 우리와 하등 연락도 없었던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정부 보조를 목적으로 한 사회단체의 하나로만 본다”고 말했다.59)
국무회의, 영수회의 등의 이름으로 회의를 거듭하면서 혼선을 빚고 있던 임시정부는 이 시점에는 ‘민족통일의 최고기관’으로 특별정치위원회를 구성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조소앙, 김붕준(金朋濬), 김성숙(金星淑), 최동오(崔東旿), 장건상(張建相), 유림(柳林), 김원봉(金元鳳) 7명이 중앙위원이 되고 좌-우 양 진영의 각 정당과 명망 있는 혁명투사를 총망라하여 명실공히 3천만의 통일전선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독촉중협과는 전혀 별개의 기관이 될 것이라고 했다.60)
이승만의 방송이 있자 임시정부 안의 반대파들은 노골적으로 이승만을 비판했다. 민족혁명당 소속의 국무위원 성주식(成周寔)은 12월 20일에 기자들에게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사절일 뿐이고 임시정부 안에서 결의권이 없다. … 따라서 이 박사의 발표는 어디까지나 박사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와 독촉중협의 관계에 대해서는 “법적 근거는 없다. 임시정부는 앞으로 남북을 한데로 뭉쳐 전국적 통일공작을 계획하고 있다. 이 박사는 임시정부를 협력하나 임시정부와 독촉중협이 협동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좌-우가 서로 반반으로 뭉치자는 박헌영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도 서로 논의하면 해결될 문제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제6항에 따른 각당 각파의 합동회의를 강조했다.61) 같은 민혁당 소속의 국무위원 장건상도 기자들에게 “좌익세력과는 극력 협력하고 악수해야 할 이때에 그러한 말은 우리로서 상상치도 못할 일이며, 나는 절대로 그 방송에 찬동하지 않는다. 좌익을 무시하고 통일 운운은 불가능사라고 믿는다”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와 독촉중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62)
“李 박사는 임시정부를 떠난 사람”
한편 외무부장 조소앙은 이승만의 방송과 그것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비판에 대해서는 “한군데서 실수할 때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양비론을 편 다음, “임시정부를 민족운동의 계통으로 알고 일보 일보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이승만과 독촉중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승만 박사의 독촉중협에 대하야는 국무위원회의 결의로 하는 것이 아니니 임시정부로서 시비를 운운할 것도 없고 책임을 가질 수도 없다. 이 박사가 주미외교위원장일 때에는 그의 행동에 대하야 임시정부가 책임졌으나 그가 입국한 현재는 이미 현직을 떠났고 또 임시정부로서 이 박사에 대한 새 결정이 나지 않았으므로 박사의 정치활동은 임시정부를 돕고 임시정부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하는 일일 것이나, 법규관념으로는 그의 정치행동에 무관한 것이다.”63)
일찍이 상해시절에 이승만의 비밀통신원이기도 했던 조소앙의 이러한 형식논리는 임시정부 주동자들의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확집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구는 12월 27일에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했다. 선전부장 엄항섭이 대독한 김구의 연설 내용은 한국독립당의 「정강」과 「정책」을 국내 분위기에 맞게 첨삭한 것이었다. 그는 먼저 임시정부가 중국, 소련,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의 승인과 같은 지원을 받았음을 강조하면서, 그 보기로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 레닌 선생은 제일 먼저 이 정부와 손을 잡고 거액의 차관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하자고 공산당의 슬로건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의식한 듯한 주장도 했다. 그러면서 또 “그러나 모 일부분, 모 일계급의 독재는 반대한다”고 하여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주장은 반대했다. 그는 경제의 균등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화하여야 하고, 교육의 균등을 실시하기 위하여는 의무교육을 국비로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숙청을 주장했다. 그것은 귀국 직후의 신중한 태도와는 많이 달라진 입장 표명이었다.64)
“信託管理 강요하는 政府 용납 못해”
이승만은 12월 26일의 주례 라디오연설을 통하여 신탁통치를 단호히 배격하면서 독촉중협의 지부를 각 지방에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이승만은 먼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번스 국무장관,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은 모두 한국의 독립을 찬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마치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찬성하는데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승만은 자신은 한국인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구실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정당을 독촉중협으로 통합하려고 노력을 경주해 왔다면서, “통합이 성숙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극단적 공산주의자만 없었다면 통합은 벌써 오래전에 성공하였을 것”이라고 독촉중협이 지연된 이유를 공산주의자들의 소행 때문으로 돌렸다. 이승만은 “만일 우리가 지금 방해자들의 파괴목적 달성을 공수방관(拱手傍觀)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싸워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우리가 신탁관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이상 주저치 말고 중앙협의회 지부를 각 지방에 조직하고, 조직이 완성되면 관계단체와의 연락도 직접 실현될 것이다”라고 독촉중협의 지방지부 결성이 곧 신탁통치 반대운동이라고 주장했다.65)
또한 이승만은 이날 독촉중협과 임시정부의 관계에 대한 구구한 언설과 관련하여 독촉중협은 임시정부의 ‘엄호단체’라고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임시정부 요인이 비록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에는 여러 가지 약속이 있으며 또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승인될 때까지는 대외적으로 그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다. 가령 미국 국무부의 친일파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누가 반박할 것인가. 또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누가 그 정통성을 주장할 것인가. 그것은 조직화된 여론과 개인의 자격으로 있는 자유스러운 입장이 아니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임시정부를 엄호하는 단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곧 독촉중협이다. … 하지 중장의 조선독립에 대한 복안을 실천하는 길도 또한 이외에 없을 것이다.”66)
하지 중장의 조선독립에 대한 복안이란 이승만이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말한 국무회의 또는 국정회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부 신문에는 군정부가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국무협의회(스테이트 카운슬) 같은 기관”을 구성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망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다.67)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부정확한 제목으로 모스크바 외상회의의 결과에 대한 ‘워싱턴 25일발 합동(合同) 지급보’가 도하 신문에 일제히 크게 보도된 것은 이튿날인 12월 27일 아침이었다.⊙
1) 『自由新聞』 1945년 11월 27일자,「主席數日間의 動靜」및「李博士定例會見談」;『中央新聞』1945년 11월 27일자,「金主席內外記者團과 共同會見」. 2) 張俊河, 『돌베개』, 禾多出版社, 1971, p. 444. 3) 『新朝鮮報』1945년 11월 27일자,「李博士와 要談」. 4) 『中央新聞』1945년 11월 28일자,「四首領과 會見要談」;『서울신문』1945년 11월 28일자,「金九先生과 各黨首會見」. 5) 張俊河, 앞의 책, p. 460. 6) 위의 책, p. 463. 7) 같은 책, pp. 464~466. 8) 『中央新聞』1945년 11월 28일자,「四首領과 會見要談」. 9) 『新朝鮮報』1945년 12월 2일자,「金主席 李博士와 要談」.
10) 『自由新聞』1945년 12월 2일자,「歡迎旗行列도 盛大」. 11) 張俊河, 앞의 책, pp. 483~489. 12) 張俊河,「白凡金九先生을 모시고 六個月(四)」,『思想界』1966년 11월호, p. 101. 13)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9, pp. 66~67. 14) 『中央新聞』1945년 12월 6일자,「獨立促成中央協議會 銓衡委員選任不順調」; 李萬珪,『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50~253. 15) 「獨立促成中央協議會 中央執行委員會 第一回會議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建國期文書 1』, 延世大學校現代韓國學硏究所, 1998, pp. 9~12.
16) 金?洙 口述,『遲耘 金?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1999, pp. 182~183. 17) 『서울신문』1945년 11월 28일자,「三十八度線撤廢코저 美蘇間에 協議進行」. 18) 『서울신문』1945년 12월 2일자,「하지中將의 統一案에 積極的協力을 約束」. 19) 『서울신문』1945년 12월 8일자,「金, 李, 呂, 安四氏 하-지中將과 會談」. 20) 『中央新聞』1945년 12월 7일자,「軍政首腦와 李博士, 長時間重大會談」. 21) 『新朝鮮報』1945년 12월 9일자,「윌리암顧問官 安在鴻氏와 會談」. 22) 『東亞日報』1945년 12월 10일자,「하지中將 各黨首要談」. 23) 이정박헌영전집편찬위원회 편,『이정박헌영전집(2)』, 역사비평사, 2004, pp. 111~112. 24)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57~72. 25)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 135.
26) 金?洙 口述,『遲耘 金?洙』, p. 183. 27) 슈티코프가 말렌코프에게,「조선의 정치상황보고」, 기광서,「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재 해방 후 북한정치사 관련자료 개관」,『해방전후사사료연구(Ⅱ)』, 선인, 2002, pp. 121~122. 28) 정병준,「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역사와 현실』제19호, 역사비평사, 1996, p. 160. 29) Byrnes to Langdon, Nov.29,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138. 30) Langdon to Byrnes, Dec.14, 1945, FRUS 1945, vol. Ⅵ, p. 1143. 31) Langdon to Byrnes, Dec.11, 1945, FRUS 1945, vol. Ⅵ, p. 1141. 32) 『新朝鮮報』1945년 12월 16일자,「獨立促成中央協議會 各黨別委員?九名內定」. 33)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3~5.
34)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13~15. 35) 『自由新聞』1945년 12월 13일자,「民族統一戰線과 亡命政府에 對하야」. 36) 金?洙 口述,『遲耘 金?洙』, pp. 154~155, p. 183. 37) 安在鴻,「八·一五 당시의 우리 政界」,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編,『民世安在鴻選集(2)』, 知識産業社, 1983, p. 473. 38) 주35)와 같음. 39) 『東亞日報』1945년 12월 15일자,「亡命客集團이란 不當」.
40)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5),『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23~38. 41)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76~88. 42)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135~136. 43) 「獨立促成中央協議會錄」(1945. 12. 16),『雩南李承晩文書(十三)』, pp. 136~179. 44) 『自由新聞』1945년 12월 15일자,「南鮮에 宣傳隊, 獨立促成中協서」.
45) 金?洙 口述,『遲耘 金?洙』, p. 152. 46) Hodge to MacArthur, Nov.25, 1945, FRUS 1945, vol. Ⅵ, p. 1134. 47) MacArthur to Hodge, Nov.25, 1945, FRUS 1945, vol. Ⅵ, p. 1134.
48) 『自由新聞』1945년 12월 13일자,「하-지中將重大聲明發表」. 49) 『서울신문』1945년 12월 11일자,「아놀드長官辭任說, 後任에 ‘러-취’少將」;『朝鮮日報』1945년 12월 17일자,「아처 러취新軍政長官 十六日金浦飛行場着 赴任」. 50) 『解放日報』1945년 12월 23일자,「成周寔氏의 發言에 對하야」. 51) 『東亞日報』1945년 12월 20일자,「莊重! 臨政歡迎의 盛典」; 심지연 엮음,『해방정국논쟁사(Ⅰ)』, 한울, 1986, p. 231.
52) 『東亞日報』1945년 12월 22일자,「人民委員會包圍 美軍이 書類等을 押收」;『自由新聞』1945년 12월 25일자,「中央人民委員會經緯發表」.
53) 『서울신문』1945년 12월 21일자,「共産黨에 대한 나의 立場」;『東亞日報』1945년 12월 23일자,「李博士 共産黨에 대한 放送」. 54) 尹錫五 證言, 孫世一,『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196. 55) 『解放日報』1945년 12월 25일자,「老파시스트李博士를 暴露함」;『朝鮮人民報』1945년 12월 24일자,「팟시스트李博士에 反省要求, 共産黨代表朴憲永氏發表」.
56) 『解放日報』1945년 12월 25일자,「獨促中協과의 關係破棄」. 57) 『自由新聞』1945년 12월 25일자,「人民黨呂運亨氏政局談」. 58) 『自由新聞』1945년 12월 26일자,「中協에 對한 安在鴻氏表明」. 59) 『中央新聞』1945년 12월 20일자,「李博士中心의 政治動向」. 60) 『自由新聞』1945년 12월 25일자,「새統一機關樹立目標로 政治特別委員會組織」. 61) 『서울신문』1945년 12월 21일자,「法的根據는 업다」. 62) 『서울신문』1945년 12월 21일자,「左翼無視하고 統一不能」.
63) 『新朝鮮報』1945년 12월 26일자,「政黨間의 統一과 臨政擴充竝行中」. 64) 『東亞日報』1945년 12월 30일자,「三千萬同胞에게 告함」. 65) 『東亞日報』1945년 12월 28일자,「信託制와 우리의 決心」. 66) 『東亞日報』1945년 12월 27일자,「中協은 臨政의 掩護體」. 67) 『中央新聞』1945년 12월 21일자,「人民各層各界代表網羅國務協議會를 組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