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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慈乘·明盡 스님의 30년 因緣

“나한테 총무원장 하라더니…”(명진)
“스님은 宗正 하셔야지요”(자승)

서철인    ironin@chosun.com

권세진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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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초 修道 전문 사찰 봉암사에서 처음 만나
⊙ 종단 지킨 자승은 ‘정치의 달인’으로, 선방 떠돈 명진은 ‘언변의 달인’으로 성장
⊙ 자승이 채워준 명진의 虛飢, 명진이 구해준 자승의 危機
⊙ 서로에 깊은 상처 입혔지만 아직도 전략적 관계, 언젠가 화해할 것
  천안함 침몰 사태로 소강상태를 보이던 서울 봉은사 직영 사찰 전환 논란이 4월 들어 재점화됐다. 불교계 내부 문제로 보이던 사태가 ‘정치권 외압설’로 확대되더니 이제는 총무원장과 현 정부의 유착설로 옮아가고 있는 양상이다.
 
  ‘봉은사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불교계 안팎에서는 양측 모두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불교계 한 원로는 “법정 스님이 벌어 놓은 것을 명진(明盡) 스님이 다 까먹고 있다”며 “종단에서 결정한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 종단을 떠나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재가(在家)불자들은 “지난해 출범한 ‘젊은 집행부’가 첫 시험대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교계 위상이 실추되고 있다”고 총무원을 비판했다.
 
  명진 스님의 ‘정치권 외압설’ 주장에 관심을 보였던 일반인들도 이제는 “불교 내부에서 풀어야 할 문제”로 보는 분위기다. 자승 총무원장과 명진 스님이 오랜 세월 우정을 다져온 도반(道伴)이라는 사실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30년 넘게 이어온 두 사람의 남다른 인연(因緣)을 추적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慈乘 스님은 이런 사람

 
  出家 연도 1969년 아닌 1972년
 
2010년 3월 5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명진 스님과 자승 스님. 동계올림픽 금메달 이상화 선수가 두 스님과 환담하고 있다.
  자승(慈乘) 총무원장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속명(俗名)은 이경식. 명진 스님과 달리 그의 출가 전 이야기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주변 인물들도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6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계모 밑에서 자랐고, 춘천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 정도의 확인할 길 없는 정보만 떠돌 뿐이다.
 
  현 조계종 종단의 행정 수반임에도 자승 스님에 대한 정보는 빈약했다. 일부 스님 중에는 그가 계(戒)를 받은 후 강원(講院) 생활을 오래하지 않아 도반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보통 승려들은 계를 받은 후 5~6년 동안 사찰을 돌며 강원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자승 스님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에는 성격 탓인 듯하다. 과거 그와 함께했거나 현재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스님들의 평을 종합해 보면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꼼꼼하며 과거사를 입에 올리지 않는 과묵형 인물이다.
 
  자승 스님은 18세 때인 1972년 해인사에서 지관(智冠)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고, 1974년 범어사에서 석암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언론에 따라 출가 연도가 1969년으로 소개된 곳도 있다. 조계종 총무부장으로 있는 영담(影潭) 스님에 따르면 이는 “종회의원 초선 때 부족한 법랍(法臘)을 채우려 앞당겨 적은 것으로 훗날 문서 견책(경고)을 받고 바로잡았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는 기자들이 오기(誤記)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담 스님의 설명이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이 되려면 속랍(俗臘) 35세, 승랍(僧臘) 20세가 넘어야 한다는 자격요건이 있습니다. 총무원장께서 종회 초선 의원이 되신 게 1992년인데, 이때 승랍 20세가 안 된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승적을 바꿨다가 나중에 발각돼 경고장을 받았지요. 1994년 종단 개혁 때 이미 징계를 받은 사안이라 지난번 총무원장 선거 때 이를 문제 삼은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이 두 사람이라는 것도 구설에 올랐다. 자승 스님의 첫 번째 스승은 제9대 총무원장을 지낸 고(故) 경산(前 적조사 주지) 스님이었고, 두 번째 스승은 제30대 총무원장을 지낸 고(故) 정대(正大·前 용주사 주지) 스님이었다. 불가에서는 은사를 바꾸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지만 자승 스님은 경산 스님이 일찍 열반에 들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두 번째 스승인 정대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대 스님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북대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다. 그는 조계종 사회·재무·총무부장, 종앙종회 의원(8選)·종회의장, 동국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불교계 대표적 행정승으로 명성을 날렸다. 거침없는 직설화법을 구사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도 많았다. 1997년 15대 대선(大選) 당시 총무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 대해 “집권하면 단군 이래 희대의 정치 보복이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인 듯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후 정대 스님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이후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7대 종단 대표들과 지지성명을 발표하며 지원했다.
 
 
  스승 正大 스님, DJ와 각별
 
2009년 12월 15일 민추본이 북한으로 보내는 지원물품 앞에 선 명진 스님(왼쪽 끝)과 자승 총무원장(왼쪽 두번째).
  불교계 한 원로는 “정대 스님은 정치력이 뛰어났던 인물로, 총무원장 시절 당시 박지원(朴智元)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시로 통화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고, 그 힘으로 어려운 종단 재정을 챙겼다”고 술회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2008년 정대 스님의 입적 5주기를 맞아 발간된 법문집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에는 박지원 의원이 쓴 글도 수록돼 있다. ‘스님은 나에게 자비를 주시고 입적하셨다. 감옥에서 입적 소식을 듣고 남몰래 울었다. 지금도 나에게 가장 생각나는 큰 어른이시다’라는 내용이다.
 
  이 책에는 명진 스님의 글도 수록돼 있다. 그는 정대 스님을 ‘종단사 최고의 사판승(事判僧·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스님)이면서 반대파마저 아우르는 넉넉한 품을 가진 큰스님’으로 추억했다.
 
2002년 6월 함께 방북한 자승 총무원장(오른쪽 끝)과 명진 스님(왼쪽 끝).
  정대 스님의 맏상좌인 자승 스님의 행보는 정대 스님이 간 길을 그대로 밟아간 듯하다. 그는 1970년대 초 동화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한 후 수원포교당(현 수원사), 삼막사, 연주암 등의 주지를 지냈다. 삼막사는 정대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곳이고, 수원포교당과 연주암은 정대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용주사의 말사(末寺)다.
 
  자승 스님이 조계종 중앙무대인 종단에 진출한 것은 정대 스님이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있던 1986년 총무원 교무국장이 되면서다. 이후 그는 중앙종회 의원(3選), 사무처장, 총무원 재무·총무부장, 종앙종회 의장 등을 거쳐 지난해 10월 제33대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정대 스님을 잘 아는 한 원로급 스님은 그에 대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직을 이끄는 기본적인 리더십은 은사인 정대 스님에게 배웠지만 성격은 많이 다르다. 정대 스님이 솔직하고 직설적인 데 반해 자승 스님은 부드럽고 우회적이다”라고 평했다.
 
 
 
선거 1년 전부터 5개 정파 아군으로 흡수

 
2009년 11월 5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자승 총무원장의 취임법회에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 이상득 의원 등 정치권 실세들이 대거 참석했다.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은 종단에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 처음으로 계파 간의 갈등이나 불협화음 없이 조계종 집행부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뤘다는 점, 선거인단 321명 중 290명의 표를 받아 역대 최다(最多) 지지율(91%)로 당선됐다는 점 등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와 집행부 교체는 불교계 문중과 계파 간의 다툼으로 지금껏 한 번도 평화롭게 이행된 적이 없다. 1994년 종단 개혁 이후에도 이 같은 선거 풍토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때문에 재가불자들은 4년마다 돌아오는 총무원장 선거에 바짝 긴장하곤 한다. 조계사에서 만난 한 불자의 이야기다.
 
  “선거 때만 되면 이번에는 또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불안해지곤 했어요. 도량이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는 걸 볼 때면 내가 불자라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지요. 그런데 지난번 선거는 너무 고요하고 평화롭게 지나가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이번 봉은사 사태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던 지난 선거에 대해 종단 관계자들은 “형식은 경선이었지만 실제로는 ‘합의추대’나 다름없었으니 소란스러울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자승 스님이 사전에 4개 종책 모임과 전국 24개 교구를 설득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자승 스님은 종단 최대 정파 화엄회(華嚴會) 핵심이다. 종단 관계자들은 자승 스님이 1년 전부터 계파 끌어안기 작전에 돌입했고, 총무원장 후보 등록 무렵에는 이미 폭넓은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분석했다. 우선 2008년 11월 금강회(金剛會) 핵심 보선 스님을 자신의 뒤를 잇는 종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어 2009년 7월에는 동국대 신임 이사장으로 부산 내원정사 정련(定鍊) 스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정련 스님은 보림회(寶林會)가 지지하는 스님이다. 이로써 종단 내 야권으로 분류되는 두 파를 우군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총무원장 선거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지난해 9월 29일 조계사 대웅전에서는 자승 스님을 제33대 총무원장 후보로 추대하는 법회가 열렸다. 이날 법회는 금강회, 무량회(無量會), 무차회(無遮會), 보림회, 화엄회 등 5개 종책 모임으로 꾸려진 후보추대위가 주관했으며, 전국 19개 교구본사 주지와 60여 중앙종회 의원이 참석했다. 200여 스님이 자리를 메워 총무원장 취임식을 방불케 했다. 후보추대위원장은 지홍(至弘·금강회)·토진(土眞·무차회)·영담(影潭·보림회)·노현(老玄·법주사 주지)·정여(正如·범어사 주지) 등 5명의 스님이 공동으로 맡았다. 종단 역사상 유례가 없는 3개 정파의 연대가 이뤄진 것이다. 지난해 10월 23일 선거에서 자승 스님과 경쟁한 두 후보 각명 스님과 대우 스님의 득표는 각각 3표와 4표에 불과했다.
 
  선거 결과에 대한 교계의 반응은 “소통과 화합의 선거”, “전리품을 나눠 갖기 위한 야합”으로 엇갈렸다.
 
  후보 등록을 준비하다 분위기가 자승 스님 쪽으로 기울어 포기했다는 한 중진 의원은 “자승 스님은 한마디로 설득과 협상의 달인”이라고 말했다. 정대 스님처럼 반대파를 설득하는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이다. 종단 관계자는 “종책 모임은 물론 경쟁후보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종단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싸움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설득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싸움 말자 설득
 
  다선(多選)의 한 중앙종회 의원은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법등(法燈) 스님이 암 투병으로 포기하는 바람에 자승 스님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졌다”고 말했다. 현재 호계원 원장이자 구미 도라사 주지인 법등 스님은 불교방송 이사와 종앙종회 의장을 역임한 만만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암 투병으로 후보 등록마저 포기한 법등 스님에 대해 일부 스님들은 “표면적으로는 암 투병 때문이지만, 사실 지지 기반이 돼야 할 무량회 스님들마저 자승 스님 쪽으로 기울어 대항할 힘을 잃은 것”이라고 했다.
 
  총무원장 선거는 선거인단 321명의 투표로 결정된다. 선거인단은 조계종 전국 24개 교구를 대표하는 스님 240명(1교구당 10명)과 중앙종회 의원 81명으로 구성된다. 조계종단은 총무원(행정), 중앙종회(입법), 호계원(사법) 등의 기구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중앙종회는 국회와 같다. 중앙종회 의원들은 24개 교구(조계사 4명, 해인사 3명, 그 외 22개 교구는 2명씩)에서 선출된 의원 50명과, 직능직 의원 20명, 비구니 의원 10명이며, 총무원장과 마찬가지로 4년마다 한 번씩 선출된다.
 
  이들 종회 의원 중 생각이나 활동 방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갖는 모임이 종책 모임이다. 이 모임은 1998년 무렵부터 의원들 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하나둘 생겨났다. 화엄회, 무량회, 무차회, 보림회, 금강회 등이 그것인데, 이 중 금강회가 계파 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며 자진 해산해 현재는 4개 종책 모임만 존재한다.
 
 
 
원장 취임 후 요직 按配

 
2007년 3월 한나라당 탈당 직전 봉은사 법회에 참석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주지 명진 스님이 손 전 대표의 탈당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책 모임은 애초에 친목단체로 출발했지만 점점 힘을 얻어 현재는 종단의 정책을 개발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국회 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총무원장 선거 때면 종책 모임별로 후보를 추대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2~3개의 종책 모임이 연대해 단일 후보를 밀기도 한다. 전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은 무량회, 화엄회, 무차회가 연대해 당선됐다. 보림회와 금강회는 부산 내원정사 주지인 정련 스님을 밀었지만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낙선해 ‘야당’이 됐다.
 
  총무원장은 당선만 되면 1994년 종단개혁 이후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전국 24개 교구의 본사·말사 주지 임명권과 연간 300억원에 이르는 총무원 집행 예산권, 종단 소속 사찰의 재산 감독 및 처분 승인권 등이다.
 
  총무원 집행부 구성은 물론 종회의 구성과 상임분과위원장 선정,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 주지 선임, 동국대와 불교방송 이사진 구성도 총무원장이 좌지우지한다.
 
  여러 개의 정파가 연대해 탄생한 만큼 주요 보직에 대한 공평한 분배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조계종 종단에서도 ‘선거 공신(功臣)’들에 대한 분배 작업 과정에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등 공신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많은데 그들을 만족시킬 주요 보직은 한정된 까닭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자승 총무원장의 인사가 시작됐다.
 
  예상했던 대로 집행부는 그를 만든 각 정파의 핵심 인사들로 골고루 채워졌다. 총리 역할인 총무부장에 영담(보림회) 스님, 기획실장에 원담(圓潭·무차회) 스님, 재무부장에 상운(금강회) 스님, 사회부장에 혜경(화엄회) 스님, 문화부장에 효탄(비구니) 스님 등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세속 나이로 50대 초·중반이다. 그래서 불교계 안팎에서는 ‘젊은 집행부’ 자체를 하나의 실험으로 보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주요 보직 ‘천하통일’한 영담 스님
 
조계종 총무부장 영담 스님. 동국대 이사, 불교방송국 이사장 등 주요보직을 겸하고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최근 들어 종단 관계자들 사이에서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다. 조계종 총무부장 영담 스님이다. 그는 현재 총무부장 외에 동국대 이사와 불교방송국 이사장을 맡고 있다. 조계종단을 세속에 비유하면 ‘정계’와 ‘학계’,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불교계 안팎에서는 “영담 스님이 천하를 통일했다”고 표현한다. 동국대에 몸담고 있는 한 재가불자는 “동국대와 불교방송국은 종단의 권력을 견제·감시하는 곳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라 권력 집중화를 막기 위해 1994년 종단 개혁 후 겸직을 못 하도록 돼 있다”며 “그런데도 겸직을 허용한 총무원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담 스님은 “동국대 이사는 종단 추천이 아니고,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생긴 개방형 이사로 들어간 것이고, 불교방송국은 출연 이사장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단 내부에서는 “영담 스님이 총무원장을 능가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며 우려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일부 재가불자 사이에서는 “조계종단의 숨은 실세는 영담 스님”이라는 말이 노골적으로 오가기도 한다.
 
  충남 서천 출신인 영담 스님은 개척 사찰이나 다름없는 부천 석왕사를 부자 절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도 석왕사 주지이면서 교단 못지않게 정계나 재계 쪽으로 인맥이 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도량 밖 인맥이 그리 많지 않은 자승 총무원장과는 대조적이다.
 
  두 사람은 1992년 나란히 중앙종회 초선 의원이 되면서 알게 됐다고 한다. 영담 스님은 자승 스님에 대해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어서 돌다리도 여러 번 두드리고 건널 사람, 무슨 일이든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인 반면 소심해서 정면돌파보다 에둘러서 가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반면 자신은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에게 불교계 안팎에서 들은 몇 가지 궁금증을 직설적으로 물었다.
 
  ―스님이 조계종의 실세라고 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실세는 무슨…. 저는 자승 스님이 총무원장 후보에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아 자신있게 출마하라, 함께 선거 혁명을 일으켜 보자고 제안한 사람일 뿐입니다.”
 
 
  “함께 선거 혁명 일으키자”
 
  ―스님이 직접 출마하면 될 것을 굳이 다른 분을 추대한 이유는 뭔가요.
 
  “나는 매사에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라 적이 많습니다. 총무원장은 자승 스님처럼 교계에 적이 없고 덕이 많은 사람이 해야 소통도 하고 화합도 하지요.”
 
  “적이 많다”는 말은 과거 명진 스님과 나눈 대화 내용이 최근 설화(舌禍)가 되어 돌아온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했다. 교계 언론인 <법보신문>에 따르면, 지난 3월 27일 영담 스님과 원담 스님은 명진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봉은사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명진 스님이 “봉은사를 직영 전환한 이유가 무엇이냐. 주무부서장인 영담 스님이 한 번 말해 보라”며 이렇게 따졌다고 한다.
 
  “나와의 전화통화에서 ‘법장 스님과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을 하면서 내가 애를 먹고 있을 때 (해인사 주지)선각 스님이 나를 도와줬는데, (봉은사 부주지)진화(스님)가 선각(스님)이를 건드리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말하지 않았느냐.”(명진 스님)
 
  <법보신문>은 영담 스님이 명진 스님과의 전화통화에서 한 발언은 ‘봉은사 부주지 진화 스님이 중앙종회 총무분과위원회의 해인사 의혹 조사 소위원장을 맡는 등 해인사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에 적극 나서자 이에 대한 정치적 보복 차원에서 (영담 스님이)봉은사를 직영 전환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적고 있다.
 
  ‘해인사 의혹’ 건은 사찰 부지를 놓고 경남 합천군이 해인사 측에 요청한 승인 문건과 해인사 측이 총무원에 요청한 문건에 차이가 있어 비롯됐다. 합천군은 ‘대장경 천년 엑스포’ 사업을 위해 해인사 소유 사찰 부지를 매입 또는 임차할 수 있도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해인사 측은 이 부지를 합천군에 매각하지 않으면 강제 수용될 위기니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에 중앙종회는 해인사 측에 의혹을 품고 조사에 들어갔고, 진화 스님이 실무를 담당했다.
 
  중앙종회 총무분과위원회 측은 영담 스님의 발언에 대해 “신성한 의정 활동을 침해하는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며 비판했다. 일부 의원들은 총무부장 탄핵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위기의 慈乘 구한 影潭과 明盡
 
  영담 스님은 과거에도 설화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2007년에는 MBC 에 출연해 “참 의리 없는 게 종교집단이다. 상품 가치가 없다. 그러면 과감히 쳐버리는 게 종교집단이다”며 “확, 목을 따야 한다”고 발언해 불교계 안팎으로부터 “종단의 위상을 실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이듬해에는 주지로 있는 석왕사 토지를 종단 승인 없이 개인 명의로 전환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일은 당시 의혹을 보도한 교계 신문을 영담 스님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소송이 진행 중이다.
 
  종단의 한 관계자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종단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인물을 총무원장은 왜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앞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영담 스님은 명진 스님과도 친분이 꽤 깊다. 명진 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물었다.
 
  ―명진 스님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요.
 
  “1990년대 초 실천불교승가회에서 만났으니 자승 스님을 알고 지낸 것보다 더 오래됐죠. 1994년 종단 개혁 때도 함께했고요. 당시 자승 스님은 서의현 원장 쪽이어서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말입니다.”
 
  ―명진 스님이 개혁 후 징계 대상이었던 정대 스님과 자승 스님의 구명을 위해 운동을 펼쳤다고 들었습니다.
 
  “명진 스님 혼자가 아니라 저와 함께 했지요. 당시 제가 개혁위원회 해종(解宗)특위 위원장으로 있었거든요. 정대 스님과 자승 스님은 서의현 원장에 협조한 점과 승적을 위조한 점 등 죄과가 무거워 징계위원회가 열리면 승복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세 분이 모두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데, 스님께서 자승 스님과 명진 스님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중재할 수도 있겠네요.
 
  “봉은사 문제는 제가 두 사람을 중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직영 여부는 이미 중앙종회에서 투표를 통해 의결된 사안 아닙니까. 중앙종회에서 의결됐다는 것은 법이 발효됐다는 뜻이니 무조건 받아들여야지 이렇다 저렇다 따져서 될 일은 아니죠.”
 
  세 사람은 서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군이고, 어제의 적군이 오늘은 동지인 사이였다. 영담 스님은 “불가에서는 영원한 적군도 없고, 아군도 없다”며 “명진 스님과 요즘도 쌍욕 하며 싸운다”고 말했다. 명진 스님이 주장하는 ‘정치권 외압설’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봉은사 주지
  明盡 스님은 누구인가

 
  어린 시절엔 평범한 기독교인
 
2007년 봉은사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명진 스님.
  명진 스님의 본명은 한기준이며, 195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해인사(海印寺)가 발간하는 <월간 해인> 1995년 4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아버지가 집사로 모태신앙이었으며, 여섯 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고등학교 때까지 새벽기도에도 나가는 등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자살했고, 3개월 후 재혼한 아버지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형제였던 동생은 해군에 입대했다가 1974년 배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명진 스님은 서울에서 고등학교(서울공고)를 다니다가 그를 키워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잇달아 타계하자 3학년 여름방학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무주 구천동의 백련사로 갔다. 그곳 스님에게 “삶이란 각자가 지은 업(業)의 순환 속에서 이뤄지는 변화일 뿐”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지만 모태신앙인 기독교를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다음 날 그곳에 들른 어떤 스님에게 “불교가 기독교와 다른 게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를 보기 위해 애써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 놓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9년 그는 해인사로 떠났다. 그가 해인사로 간 것은 출가했다가 환속한 집안 형님이 소개장을 써 주어서라고 한다. 당시 해인사 백련암에는 성철(性徹) 스님이 있었다. 행자 생활을 하던 그는 백련암으로 찾아가 성철 스님 문하에 1년 있었다. 이때 ‘원일’이라는 법명까지 받았으나 “불경을 읽으려면 일본어를 배우라”는 큰스님의 말에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그 길로 용주사 전강 스님 문하에 들어갔으나 이곳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해 뛰쳐나왔다. 전강 스님은 20대에 조실이 된 선승으로 정대 스님의 은사다. 말하자면 정대 스님과는 이때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군에 입대,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병장 만기 제대 후 그는 1974년 법주사에서 탄성(呑星)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75년에는 같은 절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0여 년간 선방에서 수행만, 1986년부터 사회에 눈떠
 
  계를 받은 후 명진 스님은 일반적인 승려들과 달리 강원과 율원(律院·계율을 연구하는 교육기관)으로 가지 않고 ‘나를 찾는 게 더 급하다’고 하여 명산명소의 선방(禪房)을 찾아다녔다. 주로 해인사와 봉암사(鳳巖寺)에서 수행했다. 그러다 용주사 정대 스님 문하에 잠깐 들어갔는데, “수좌(수행승)들이 화두(話頭)를 놓치면 수좌가 아니듯, 사판승이 주지를 못하면 사판승이 아니다”라는 정대 스님의 말에 거부감을 느껴 나왔다고 한다.
 
  운동권과의 인연은 1985년 해인사 선방에서 시작됐다. 당시 해인사에는 현응, 여현, 학담 등의 젊은 승려들이 <월간 해인>을 창간해 발간하고 있었고, 그가 있는 선방에는 수배를 피해 다니는 대구 지역 운동권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는 이들과 독서 모임을 만들어 인문사회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 무렵 ‘5·3인천 사태’로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한 사람이 산사에 숨어들었다. 그 수배자는 “스님, 감옥 한 번 갔다 오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돼요. 무문관(無門關·독방 문을 폐쇄하고 1년 이상 계속하는 정진) 갈 필요 없어요. 독방도 줘요”라고 말했고, 명진 스님은 이때 ‘감옥에 한 번 가봐야지’ 생각했다.
 
  명진 스님을 만난 스님들은 그에 대해 “선동가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의 내재된 선동가 기질이 터져 나온 것이 1986년 9월에 열린 해인사 승려대회 때다. 당시 선방에 있던 그는 수경·학담·도법·현응·성문·효림 등 젊은 승려들과 뜻을 모아 승려대회를 주관했고, 직접 사회를 봤다. 대회 안건은 ‘불교관리재산법 철폐’, ‘국립공원 지정에서 사찰 땅 제외’ 등 주로 정부와 불교의 불평등한 관계 정리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아는 한 불교학자는 “승려대회는 전국에서 3000명의 스님이 참석했으나 보수적인 종단의 외면으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회를 계기로 불교계에 두 개의 운동권 단체가 생겨났다. 하나는 동국대 80년대 학번들이 주축이 돼 만든 ‘정토구현승가회’이고, 다른 하나는 명진 스님을 비롯해 현응(玄應)·여연(如然)·성문 스님이 공동대표를 맡은 ‘대승불교승가회’다. 두 단체는 훗날 ‘실천불교승가회’로 합쳐진다.
 
  해인사 승려대회 한 달 후 봉은사(奉恩寺)에서 ‘10·27 법난(法亂) 규탄대회’가 열렸다. 명진 스님은 이 대회에서도 연설 실력을 발휘하는 등,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석 달 동안 수감돼 있던 구치소에서 그는 변화를 겪게 된다. 규탄대회 이틀 후 ‘건국대 사태’가 터지면서 운동권 대학생과 재야 단체 인사들이 그가 있는 구치소로 대거 들어온 것. 그들과 교류하면서 리영희(李泳禧) 전 한양대 교수의 책을 비롯한 ‘운동권 교과서’들을 읽게 됐다. 또 대학생들을 통해 광주 문제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게 됐다. 수감돼 있는 석 달 동안 1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출감 후인 1987년부터 1년간 개운사(開運寺) 주지를 맡게 됐다. 개운사는 서울 안암동 고려대 인근에 위치해 당시 ‘(학생)운동의 핵심처’로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 명진 스님은 여기서 주지로 일하는 동안 춤꾼 이애주씨를 초빙해 ‘민주열사 위령제’를 지냈고, 김대중 전(前) 대통령 해금 후 첫 연설을 마련하기도 했다.
 
 
  90년대 대표적인 ‘운동권 스님’
 
1998년 3월 26일 과천종합사회복지관의 개관식에는 봉은사 직영전환 논란의 주인공들이 모두 참석했었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왼쪽 두번째)가 왼쪽에서 테이프커팅을 준비하고 있으며, 오른쪽 뒷줄에는 당시 연주암 선원장 명진 스님과 복지관장 자승 스님이 나란히 서 있다.
  그는 개운사 주지를 그만둔 후 대승불교승가회 상임위원장(1988년)으로 추대된다. 개혁 성향이 강한 스님들의 모임인 이 단체는 권력에 예속된 종단현실과 상투적인 폭력문화, 의사결정구조의 비민주성 등 불교계 내부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대승불교회는 1992년 역시 개혁 성향 스님의 모임인 정토구현승가회와 손을 맞잡고 실천불교승가회로 다시 태어났다.
 
  실천불교승가회 설립 이후 명진 스님은 선방으로 다시 돌아갔고, 봉암사·해인사·송광사·용화사·상원사 등의 선방에서 안거를 마쳤다. 그가 다시 세상에 나선 것은 1994년 종단개혁 때다.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 당시 그는 원로 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복을 벗어 대웅전 불전에 올린 뒤 “종단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이대로 승복을 벗겠다”며 열변을 토했고, 이를 본 참석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명진 스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탁월한 언변은 이때 불교계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한 관계자는 “전국에서 올라온 스님과 비구니들이 저녁이 되어 내려가려다 명진 스님의 연설에 감동해 조계사 근처에 방을 잡고 개혁 운동에 동참했다”고 설명했다.
 
  개혁에 성공한 후 그는 새로 꾸려진 종단에서 개혁위원회 상임위원, 중앙종회 의원과 부의장까지 지냈다.
 
  1995년에는 가까운 사이였던 자승이 주지로 있던 연주암에서 선원장(禪院長)을 맡았고, 이후 선방생활을 계속했다.
 
  2001년에는 술집에 출입한 것이 불자의 제보로 일부 언론에 알려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명진 스님을 비롯해 조계종 중진 스님 4명이 함께 술집을 찾았는데, 이 사실이 불교단체 홈페이지에 제보된 것. 당시 참여불교재가연대 대표 박광서 서강대 교수는 “스님들이 룸살롱에 출입하고 여성종업원들과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많은 불자가 알고 있으며, 종단 차원에서 대응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정대 스님은 불교단체들의 항의방문을 받고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으나 종단 차원의 중징계를 내리지는 않았다. 해당 스님들은 “봉은사 신도가 운영하는 업소에 인사차 들른 것”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2006년에는 봉은사 선원장을 맡았다. 노무현(盧武鉉) 정권과 가까운 관계가 된 것은 봉은사에 몸담으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권양숙(權良淑) 여사가 1988년부터 봉은사 신도였고, 권 여사는 가족과 함께 봉은사에서 가끔 새벽기도를 올리곤 했다. 명진 스님은 노무현 정권 당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명진 스님은 수행을 주로 해 온 선승이다. 선승들의 모임인 전국선원수좌회 의장을 2007년 맡기도 했다. 그는 봉암사에서 20여 년 동안 동안거와 하안거를 수행하며 ‘봉암사 결사’의 맥을 잇고 있기도 했다. 봉암사 결사란 1947년 성철 스님과 청담(靑潭) 스님 주도로 법전(法傳)·서옹(西翁)·서암(西庵) 등 큰스님들이 수행단체를 결성, 일제 식민지 불교의 폐습을 혁파하고 승단 정화운동에 나선 사건이다. 봉암사 결사를 계기로 한국 불교는 조계종을 건립할 수 있었다. 2007년 10월 18일 봉암사에서 열린 ‘봉암사 결사 60주년 대법회’에서 명진 스님은 ‘제2의 결사운동’을 주창했다.
 
 
  대북 지원 활동 활발히 해
 
  명진 스님은 조계종 내에서 대북(對北)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2005년 1월부터 조계종 산하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본부장을 맡고 있다. 민추본은 2000년 창립돼 북녘동포 돕기 운동, 종단 통일종책 연구사업, 금강산 신계사 복원 기원협회, 쌀과 의약품 지원 등 활발한 대북활동을 펼쳐 왔으며, 명진 스님은 민추본 상임집행위원장(2000~2002)과 부본부장(2003~2005)을 역임하는 등 민추본에서 10년간 중책을 맡아 왔다.
 
  또 2002년 3월 창간된 잡지 <민족21>의 발행인을 2006년 5월부터 맡고 있다. 이 잡지는 ‘남북관계 월간지’로 북한 <통일신보>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기사를 여과 없이 싣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통일신보>는 북한이 발행하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조선신보>는 조총련이 발행하지만 북한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는 1990년 결성된 재야 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후원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범민련은 1991년과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사법부에 의해 ‘이적(利敵) 단체’로 규정된 곳이다.
 
  명진 스님은 2005년 2월 27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범민련 9기 중앙위원 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미국의 악질적 행동을 고발하는 선봉에 범민련이 서 있으며, 나는 그런 범민련을 후원하게 된 것을 당대와 후대까지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봉은사 1000일 기도로 ‘강남불교 중흥’ 꾀해
 
  명진 스님은 2005년 11월 32대 총무원장 선거 당시 지관의 경쟁자인 정련(現 동국대 이사장) 편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각종 논란이 있었던 선거 후 그는 종단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선방으로 떠난다고 했지만, 2006년 11월 봉은사 주지에 취임했다. 불교계 한 관계자는 “장윤 스님(前 동국대 이사장, 現 전등사 주지)이 명진 스님을 봉은사 주지로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명진 스님은 “선거 때 총무원장(지관)의 반대편에 선 나에게 큰 절 주지직을 준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3번 거절했었다”며 총무원장에게 “큰 절 주지가 관례적으로 (총무)원장 스님께 드리는 용돈은 못 드린다. 대신 임명하길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해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봉은사는 강남구 삼성동에 땅 6만6000㎡(약 2만 평)를 보유한 대형 사찰이다. 개발 시 지가(地價)는 약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명진 스님은 주지 취임 후 12월 5일부터 1000일 기도에 돌입했다. 1000일 동안 매일 3차례(새벽 4시30분, 오전 10시, 오후 6시)에 걸쳐 매일 1000배씩 한 것이다. 재가불자들 사이에서는 종무행정을 내려놓고 기도만 하는 데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투명한 재정공개와 불전함 신도관리는 기존 불교계의 관행을 깨는 혁신적인 행보로 평가받고 있다. 신도수는 30% 가까이 늘었고(현재 20만여 명), 재정도 80억원에서 120억원으로 늘었다. 2010년 예산 목표액은 136억원이다. 기존 참석자가 100여 명 수준이었던 일요법회에는 최근 1000명 이상이 참가한다.
 
  명진 스님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이 계기가 됐다. 그는 봉은사 외벽에 ‘대한민국 검찰 중수부 검사 출입금지’ 플래카드를 붙였고, 1000일 기도를 마치지 않은 채 절 밖으로 나와 노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불교식 장례를 주관했다.
 
  2009년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절친한 사이인 자승 스님과 사전조정을 통해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진 스님은 총무원장 선거기간 동안 자승 스님에게 봉은사 방을 내주고 서울을 떠나있다가 취임식 때 올라왔는데, 후배격인 자승 스님을 위한 배려였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주로 야권 정치인들과 친분
 
  명진 스님은 불교 내에서도 대표적인 친야 인사로 분류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와의 관계도 각별하지만, 그 외의 친분관계도 주로 야권에 집중돼 있다. 봉은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정치인들과 두루 친분을 쌓아 왔다. 봉은사 법회에 참여한 정치인은 적지 않다. 손학규(孫鶴圭) 민주당 전 대표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손 전 대표는 2007년 3월 14일 봉은사 법회에 참석해 108배를 올렸고, 불자들 앞에서 “명진 스님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때 풀포기 하나 잡으려고 안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손 전 대표는 5일 후인 3월 19일 한나라당을 전격 탈당했다.
 
  명진 스님은 2007년 4월 손학규 전 대표를 지지하기 위해 결성된 ‘선진평화포럼’에도 참여했다. 이 포럼에는 시인 김지하(金芝河), 소설가 황석영(黃晳映), 화가 임옥상(林玉相), 박형규(朴炯圭) 목사 등 진보좌파성향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어 5월 24일 부처님오신날 열린 봉은사 봉축법요식에는 한화갑(韓和甲) 전 민주당 대표가 참석했다.
 
  또 그는 2007년 6월 ‘봉은사 미래위원회’를 발족했는데, 박원순(朴元淳) 위원장과 위원으로 위촉된 인사들(최열, 손석춘, 신계륜, 지은희 등)이 대부분 야권인사들이다. 2007년 10월 13일 자승 스님과 한나라당 이상득(李相得) 의원의 방문을 받았지만, 이명박(李明博) 당시 후보가 신도들에게 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이 의원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안상수 원내대표의 ‘좌파’ 발언은 명진 스님의 강도 높은 ‘반(反) 이명박 정권 행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봉은사 사태 이전에도 명진 스님은 일요법회 법문을 통해 현 정권과 세종시, 4대강 사업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이 대통령에 대해서도 ‘불자들에겐 해방 이후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공공연히 말해 왔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정부 산하기관이 만든 지도에 사찰을 모두 뺀 것에 대해 ‘사람에겐 호적에서 지운 일과 마찬가지’라며 법회와 언론을 통해 분노를 표출한 바 있다. 당시 불교방송에서 명진 스님은 “이명박 정부는 도덕적·철학적 가치가 부재한 정권으로 국민을 분노케 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5월 촛불집회 때는 “이명박 정권은 방패와 곤봉 경찰력으로 지탱하는 후안무치·몰염치·파렴치라는 3치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또 2009년 8월 용산 참사 때는 현장을 찾아 위로금 1억원을 쾌척하며 “이명박 정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정권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봉은사 직영 전환과 명진 스님의 앞날
 
지난 1월 13일 총무원장과 불교단체 대표들과의 접견자리에서 명진 스님(왼쪽 세번째)이 자승 총무원장(왼쪽끝)을 바라보고 있다.
  명진 스님은 법회를 통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외압을 넣어 갑작스레 총무원이 봉은사 직영을 결정했다고 비난했고, 총무원장이 정권과 야합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청와대가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명진 스님의 주장은 “봉은사 직영 문제는 사부대중의 뜻에 맡겨야 하는데, 총무원장과 정치권의 야합으로 정치인이 총무원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단을 비롯한 불교계 대부분이 직영 문제는 총무원이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과 불교계 현안 해결을 위해서는 총무원-정치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명진 스님은 현재 ‘사면초가’에 몰린 상태다.
 
  그러나 총무원장 퇴진을 요구하거나 총무원 전체를 상대로 싸우지는 않고 있어 명진 스님의 언행이 ‘보여주기’ 또는 ‘現 총무원에 대한 경고’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원로스님을 비롯해 많은 스님이 (불교계의 상처를)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총무원장 퇴진 같은 극단적인 요구는 하지 않았다”며 “정치권과의 관계를 정당한 시스템으로 재편하기 위해 한 번의 진통을 겪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법회에서 “자승이 권력과 밀통하고 있다”거나 “안상수는 사퇴하라”며 불자들을 선동하는 것에 비하면 인터뷰에서는 상당히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계 한 인사는 “명진 스님이 11월까지 임기를 보장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전에 물러날지도 모른다”며 “설령 물러나더라도 지난 허물은 감싸안고 가는 불교계 관행으로 보면 다른 자리를 맡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달변으로 할 말 다 하는 리더형
 
  명진 스님은 불교계에서도 흔치 않은 ‘달변(達辯)’으로 유명하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 덕에 여성 불자들에게 인기도 높다. 불교계 한 인사는 “고집 세고 자신의 주장이 강하며 밀어붙이기 잘하는, 전형적인 리더형”이라고 평했다.
 
  달변에 다변(多辯)인 만큼 자신과 주변에 관련된 이야기를 숨기지 않으며, 승려들에게 금기시된 출가 전 생활에 대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법회에서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자살했고 동생은 20세 때 차디찬 물에서 죽어갔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종단의 폐해가 심각하다며 “1998년에 주지 했던 스님(밀운)이 ‘나는 조직폭력배 천 명 동원해 들어갔는데(1988년 봉은사 폭력사태를 의미) 돈 한푼 안 들이고 들어간 명진이가 (봉은사 외압논란이라니) 왜 이러느냐’ 그런 소리 하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대해서는 “시정잡배와 같은, 머릿속엔 좌파라는 낱말밖에 모르는 무식한 국회의원”이라고 말했다.
 
  불교계 한 인사는 “명진 스님은 원래 성격이 강하고 배짱이 있으며 여러모로 독특한 캐릭터”라며 “몽둥이 든 깡패들을 제압할 스님은 명진 스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인사는 “명진 스님은 젊은 개혁 성향 스님들의 ‘로망’(환상적인 존재)”이라며 “그렇게 할 말 다 하고 신도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慈乘과 明盡의 30년 인연
 
  자승 스님과 명진 스님은 함께 출가했다고 해도 될 만큼 오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는 사이다. 명진 스님은 ‘자승과 각별한 관계’임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번 봉은사 사태 이후에도 “(자승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라는 말을 법회 및 사석에서 몇 차례나 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82년 봉암사 선방에서다. 당시 젊은 승려였던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성장 환경이 비슷한 것을 알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선방이나 해인사 승려대회 같은 행사장에서도 자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진 것이 1994년 종단 개혁 때다.
 
  당시 두 사람은 보수와 개혁의 대립 관계로 만났다. 명진 스님은 장기 집권을 노리는 서의현 총무원장을 몰아내고 종단 개혁을 주도하는 입장이었고, 자승 스님은 서의현 총무원장을 보호하려는 입장이었다.
 
  개혁이 성공리에 끝나자 새로 꾸려진 종단은 서의현 총무원장을 멸빈(滅?·승려의 신분을 없애고 다시 속인이 되게 하는 일)시키고, 그의 체제에 협조한 스님들까지 중징계하는 작업을 했다. 정대 스님과 그의 상좌인 자승 스님 역시 대상에 포함됐다. 두 사람의 징계 사유는 서의현 총무원장의 장기 집권에 협조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수도권에 있는 한 사찰 스님의 회고다.
 
  “당시 서의현 원장은 장기 집권을 위해 정적을 제거했는데, 그 방법이 정적이 주지로 있는 사찰 주지 자리를 젊은 승려에게 약속하며 어떻게든 내쫓으라는 식이었어요. 그 일에 정대 스님과 자승 스님이 동원됐죠.”
 
  개혁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던 명진 스님은 체제의 희생양이 될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멸빈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특유의 정치력으로 종단을 지켰다.
 
  종단 개혁 후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명진 스님 측근에 따르면 당시 자승 스님은 연주암 주지로 있으면서 종단의 행정승으로 잘나가고 있었고, 명진 스님은 선방을 전전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자승 스님은 명진 스님에게 보은(報恩)의 마음으로 연주암에 선원장 자리를 마련해 준다. 선원장이라 해도 연주암은 작은 기도 도량이라 거처는 따로 없고, 그저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신도들에게 법문을 해 주고 용돈을 받는 자리였다. 불교계 한 인사는 “사실 연주암은 크지 않은 절이라 선원이니 선원장이니 할 것도 없다”라며 “절친한 명진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라고 말했다. 명진 스님은 1997년부터 봉은사 주지로 가기 직전까지 10년 동안 이 생활을 했다. 이때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안상수 의원을 만나기도 했다.
 
  불교계 한 인사는 “자승은 대표적인 사판에 해당하고, 명진은 이판(理判·속세를 떠나 수도에 전념하는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자승이 명진을 ‘후원’하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주지 연임 거래’ 설도 솔솔
 
  두 사람은 현재 민추본 총재(자승)와 본부장(명진)으로 함께 일하고 있으며 지난 1월 말에는 대북지원을 위해 나란히 방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명진 스님이 스스로 밝힌 두 사람 사이의 대화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승 스님이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한다며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자승 스님은 1992년 저를 (총무)원장으로 만들 터이니 준비하시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총무원장 하라더니 자신이 나가냐고 했더니, ‘(명진)스님은 종정(宗正) 하셔야지요’라고 하더군요.” 총무원장은 불교행정의 수반, 종정은 불교의 ‘큰 어른’ 격이다.
 
  명진 스님 역시 33대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으나, 계파지지 기반이 없음을 우려한 주변인들의 만류 때문에 출마를 단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봉은사 주지 연임’이라는 ‘거래’를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명진 스님은 외압논란 후 법회에서 “총무원장이 (내가) 봉은사 재정을 투명하게 하고 신도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봉은사 주지를 오래도록 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자승 스님이 그런 약속을 해놓고 어찌 이런 사태를 일으킬 수 있느냐는 뜻이다. 불교계 한 관계자는 “명진 스님과 자승 스님은 둘도 없는 친구”라며 “명진 스님이 자승 스님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 같지만 아직 자승 스님에 대해 하지 않은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이미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입혔지만 아직도 둘 사이는 전략적인 뭔가가 있어서 언젠가는 화해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관측이 둘 사이가 끝났다는 분석보다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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