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여기자 구출을 보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혹시 아이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하루하루 최선 다하고 있다”
북한 억류 142일 만에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간 유나 리와 로라 링 기자가 비행기에서 내려 가족과 포옹하던 모습은 모든 이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이 친구 비행기를 빌려 타고 死地(사지)로 날아가 그들을 구출해 온 드라마틱한 과정을 마음 편히 바라보지 못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한때 북한에 환상을 품고 越北(월북)했다가 탈출한 吳吉男(오길남·67)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1942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한 오길남은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유학길에 올랐다.
1985년 독일 브레멘대학원에서 수리경제학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在獨(재독) 反韓(반한)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5년 12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이후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대남 흑색선전 방송요원으로 활동하며 북한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실을 깨달은 그는 가족과 함께 북한 탈출을 꿈꿨다. 그러던 차에 1986년 11월 재독 유학생 두 사람을 포섭해 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침투하던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꾀어 월북시킨 작곡가 尹伊桑(윤이상)이 아내와 두 딸을 북에서 데려와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1986년 12월 독일에 재차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독일 정부가 망명자 신분이었던 북한의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해 줄 것으로 믿었던 그는 윤이상의 방해로 구출이 무산된 사실을 알고 1992년 5월 귀국,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오길남 박사는 헐렁한 체크 무늬 면남방 차림에 천으로 된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2007년 7월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가족과 서신 왕래도 안되니, 의식이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요. 그리움에 사무쳐 가족의 사진, 딸아이의 어릴 적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듣다 보면 눈물이 납니다. 덴마크 공항에서 탈출에 실패해 끌려가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저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꿈을 꾸기도 해요. 과거엔 소주 두 병을 거푸 ‘병나발’을 불고서야 잠을 청했지만, 이젠 제가 오래 살아야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제하고 있습니다.”
부인 신숙자, 越北 강력 반대
오길남 박사는 튀빙겐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같은 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동갑내기 申淑子(신숙자)씨를 만나 1972년 11월 결혼했다. 두 사람은 평상복 차림으로 튀빙겐시 호적계장 앞에서 증인을 세우고, 시내 금은방에서 산 금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오 박사는 지금도 그때의 실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그때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恨(한)이 된다”고 했다. 두 살 터울인 큰딸 혜원과 둘째딸 규원은 각각 1976년, 1978년 독일의 군항 도시 킬에서 태어났다.
오길남은 독일 유학 15년 만인 1985년 브레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43세의 나이에 쉽게 강단에 설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지방대학에서 영입제의가 와 고려해 보기도 했지만, 과거 반한단체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에 신변에 불이익을 우려해 귀국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오길남의 부인 신숙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데다, 간호사로 근무하던 튀빙겐대학 부속병원 내과에서 환자 透析(투석) 치료를 하다 혈액감염으로 간염에 걸려 휴직상태에 있었다. 이때 주변에 작곡가 윤이상, 재독학자 宋斗律(송두율), 金鍾漢(김종한) 등 민건 회원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했고, 오길남은 김종한에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위해 빌린 돈 1500마르크가 ‘미끼’가 돼 북한 공작원을 접촉하게 된다.
공작원을 만난 지 열흘 뒤, 작곡가 윤이상은 오길남에게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북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오길남은 김종한의 소개로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던 공작원을 만나 “북한에 가서 경제학자로 일하게 되면 벤츠 고급승용차도 제공받고, 여러 가지 연구활동이 보장되며 높은 봉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北行(북행) 직전인 1985년 11월경, 오길남은 부인 신숙자와 월북문제를 논의했으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오길남은 “살림도 어렵고,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 간염을 치료하려면 북행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으나, 부인 신숙자는 울면서 “당신은 언젠가 월북 때문에 자신의 눈을 찌르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공작원으로 전락
1985년 12월 13일 오길남은 가족을 데리고 동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오길남 가족은 고려호텔 인근 창광거리에 있는 동흥동 아파트에 살았다. 부인 신숙자는 간염으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오길남의 일가족은 3개월 동안 외부세계와 차단된 채 소위 ‘밀봉 세뇌교육’을 받았다. 1986년 6월부터 11월까지 오길남은 북한이 남한 내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한민전 산하 칠보산연락소에서 근무했다.
약속과는 달리 북한은 경제학자로서 일할 여건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길남은 평양시 흥부동에 있는 대남 흑색선전 방송인 ‘민중의 메아리’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종속경제비판’ 등을 녹음해 남한으로 送出(송출)하는 일을 했다. 그는 “하도 기가 차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대동강변 눈 덮인 벌판에 나가 눈을 맞으며 울었다”고 했다.
1986년 11월 초순, 오길남은 북의 대남공작기구 책임자로부터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해 帶同(대동)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경제학자 오길남이 대남 흑색선전 방송요원에서 끝내 ‘공작원’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부인 신숙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곳이 못되니 당신이 먼저 이곳을 탈출해 독일 정부에 호소해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했다. 월북 전까지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1986년 11월 10일, 오길남은 간염에다 심근경색, 동맥경화증으로 초췌해진 아내 신숙자와 열감기를 앓고 있던 두 딸을 북한에 두고 평양을 출발했다. 金正日(김정일)과 許錟(허담)의 심복인 백치완 등 북한 공작원 두 명도 따라붙었다.
11월 21일, 오길남은 북에서 만들어준 ‘오경현’이란 가명 여권을 소지하고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북한 대사와 백치완 지도원이 앞서 검색대를 통과하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리 준비한 박사학위증 사본과 구조요청 메모(hilfe, hilfe-독어·help me-영어)를 공항 직원에게 밀어넣었다.
공항 직원은 황급히 그를 잡아채 옆 사무실로 옮겼다. 창 밖을 통해 보니 공항 주변에 북한 공작원 30여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은 독일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비밀독서회 멤버였던 브라이든슈타인 목사 집에 머물기도 하고, 무작정 하노버로 와 역전에서 無錢取食(무전취식)하다 병원에 실려가기도 하고,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부랑자 기숙사 신세를 지기도 했다.
다시 독일로 탈출
그는 “하노버시에서 주는 식비 보조금을 아껴 괴테의 <파우스트>나 독일·러시아 사전을 구입해 통째로 암기해 버렸다”면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아이들 생각에 벼룩시장에서 양말, 칫솔, 팬티, 물감 등을 사 모았어요. 이렇게 모은 아이들 물건이 네 상자나 됐고, 두 차례에 나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통해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윤이상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윤이상을 통해 1987년 10월, 1988년 10월 두 차례 북한에 있는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1991년 1월 20일, 윤이상은 妻子(처자)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주며 “당신은 美帝(미제)의 고용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金日成(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며 다시 월북하라고 협박했다. 오길남이 “차라리 나와 가족을 맞바꾸게 해달라”고 하자, 윤이상은 “되먹지 않은 소리 말라, 북한의 위신을 그렇게 먹칠해 놓고 고작 그런 소리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5년간 허송세월한 오길남은 가족송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으로 귀국해 당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1992년 4월, 오길남은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 그해 5월 입국했다.
오길남은 헤어지던 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북을 떠나기 전날 밤, 우리 부부는 도청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밤새 ‘가야 한다’ ‘당신과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나만 가느냐’며 다퉜습니다. 1986년 11월 10일 날이 밝기 전, 3호청사 공작원들이 차를 집앞에 댔습니다. 혜원, 규원이는 편도가 붓고 밤새 끙끙 앓아 몸이 불덩이 같았어요. 독일처럼 가정을 방문해 응급처치해 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죠. 집을 나서는데 일곱 살짜리 작은딸 규원이가 ‘아빠, 후케파크(업기) 해줘’라고 해요. 날씨마저 쌀쌀해 둘째 딸아이를 업어 주면서 아내에게 ‘내가 어떻게 이 귀여운 애들과 아픈 당신을 두고 떠나느냐’고 했어요.”
부인 신숙자는 담담했다. “당신 자식과 마누라의 생명만 소중하냐. 유망한 젊은 부부를 데려와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며 오길남의 멱살을 잡고 울음을 삼키며 뺨을 때렸다. 신숙자는 “우리는 죽어도 그만이다. 내 딸들이 남을 속여 지옥에 빠뜨리는 파렴치범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오길남 박사는 “그날 아침 내 뺨을 때리던 아내의 손길과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가족들 요덕수용소에 수감
오전 7시30분경, 오길남은 딸들에게 “지방공장 시찰하러 가서 한 달 뒤에 돌아올 테니 엄마 말씀 잘 듣거라”는 말을 남기고, 부인 신숙자에게 “당신을 빼내는 데 석 달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며 승용차에 올랐다.
오길남은 귀국 전인 1992년 3월과 4월,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송환을 위해 유엔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적십자사에 가족송환을 탄원했다. 그러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1992년 6월 국제적십자사 홍콩지사로부터 가족의 근황을 알아보겠다는 연락이 왔고,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1994년 독일의 크라우스 킨켈 외무장관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오길남 박사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사무총장을 서울에서 만나 북한의 가족송환을 요청해 주도록 부탁했다”면서 “앰네스티는 스위스 주재 이철 북한대사에게 부탁했고, ‘혜원이 엄마가 사무총장 만나는 것을 거부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뜻밖에도 그의 가족 소식은 1992년 10월 북한의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에 수용돼 있다 탈출한 安赫(안혁), 姜哲煥(강철환)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들려왔다.
안혁은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은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수용돼 있고, 신씨는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는 등 산나물을 뜯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최근 앰네스티가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비롯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행방불명자들의 명단을 파악하면서, 오길남 박사의 가족도 조사 대상자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독일의 유력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너자이퉁>의 우베 슈미트 도쿄특파원은 1994년 5월 18일자 ‘어두컴컴한 삶의 터널(Finsterer Lebens Tunnel)’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오길남 박사의 가슴 아픈 스토리를 대서특필했다.
특히 우베 슈미트 특파원이 “오길남의 외국어 지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감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에 대한 언어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제쳐 두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독일어는 일품이었다. 그의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는 독일 어휘들은 오늘날 독일인들의 일상생활에서 煙滅(연멸)해 버린 것들이었는데, 그가 적절하게 쓴 어휘들의 유려함은 그가 19세기의 거작들을 읽어낸 데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거의 통째로 외우다시피 한다. 악마와 결탁하는 비극의 구절구절들이 괴로움 속에서 잠 못 이루고 지새우는 무수한 밤에 떠오른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오길남이 ‘사상적 잔재’라고 애써 피하지만 언어표현 방식의 거장이 토로하는 것 같은 그의 언설은 나를 때로는 몹시 당혹게 했다….>
오 박사는 “가족과 헤어진 지 햇수로 23년째”라고 했다. 그는 “올해 서른네 살이 되는 큰딸 혜원이는 윤이상 선생과 생일이 9월 17일로 똑같았다”면서 “길을 가다 혜원이나 규원이 또래의 예쁜 여성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고 했다.
“우유나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북에서 저걸 사달라고 조르던 딸들 생각이 나 마음이 아프다”며 “한밤에 아파트에 혼자 누워 수용소에 있는 혜원이 엄마에게 매달 감자 10kg씩만 보내줄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오 박사는 ‘가족 송환을 李明博(이명박)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거대한 국가조직이 노력해도 결국 북한이 응답하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기에 지금 북한의 가족 구출은 ‘흘러간 노래’가 돼 가고 있다”며 “우리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낙담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그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에 강한 제재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이 가능했다”면서 “한국은 북에 ‘퍼주기’식 지원 외에는 특별한 카드가 없기 때문에, 적십자사·통일부 관련자들도 ‘비관적 확신’을 갖고 있을 것이고, 개성공단에 억류된 현대아산 유모씨 문제 해결도 그래서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오길남 박사는 “솔직히 미국의 여기자 구출을 보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면서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혹시 아이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오길남 박사는 사진촬영에 열중이던 月刊朝鮮 徐炅利(서경리) 사진기자에게 “올해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스물여덟”이라고 하자, “카메라가 무거워 우짜노” 하며 “지금이라도 혜원이와 규원이가 서울에 올 수 있다면 여기자 선생처럼 몸을 회복해 예뻐질 수 있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좌파 정권 10년 동안 오길남 박사, 그리고 그와 함께 월북했던 가족은 국가와 국민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오 박사는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나려면 북한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죠”라며 물기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때 북한에 환상을 품고 越北(월북)했다가 탈출한 吳吉男(오길남·67)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1942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한 오길남은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유학길에 올랐다.
1985년 독일 브레멘대학원에서 수리경제학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在獨(재독) 反韓(반한)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5년 12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이후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대남 흑색선전 방송요원으로 활동하며 북한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실을 깨달은 그는 가족과 함께 북한 탈출을 꿈꿨다. 그러던 차에 1986년 11월 재독 유학생 두 사람을 포섭해 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침투하던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꾀어 월북시킨 작곡가 尹伊桑(윤이상)이 아내와 두 딸을 북에서 데려와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1986년 12월 독일에 재차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독일 정부가 망명자 신분이었던 북한의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해 줄 것으로 믿었던 그는 윤이상의 방해로 구출이 무산된 사실을 알고 1992년 5월 귀국,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오길남 박사는 헐렁한 체크 무늬 면남방 차림에 천으로 된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2007년 7월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가족과 서신 왕래도 안되니, 의식이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요. 그리움에 사무쳐 가족의 사진, 딸아이의 어릴 적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듣다 보면 눈물이 납니다. 덴마크 공항에서 탈출에 실패해 끌려가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저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꿈을 꾸기도 해요. 과거엔 소주 두 병을 거푸 ‘병나발’을 불고서야 잠을 청했지만, 이젠 제가 오래 살아야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제하고 있습니다.”
부인 신숙자, 越北 강력 반대
오길남 박사는 튀빙겐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같은 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동갑내기 申淑子(신숙자)씨를 만나 1972년 11월 결혼했다. 두 사람은 평상복 차림으로 튀빙겐시 호적계장 앞에서 증인을 세우고, 시내 금은방에서 산 금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오 박사는 지금도 그때의 실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그때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恨(한)이 된다”고 했다. 두 살 터울인 큰딸 혜원과 둘째딸 규원은 각각 1976년, 1978년 독일의 군항 도시 킬에서 태어났다.
오길남은 독일 유학 15년 만인 1985년 브레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43세의 나이에 쉽게 강단에 설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지방대학에서 영입제의가 와 고려해 보기도 했지만, 과거 반한단체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에 신변에 불이익을 우려해 귀국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오길남의 부인 신숙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데다, 간호사로 근무하던 튀빙겐대학 부속병원 내과에서 환자 透析(투석) 치료를 하다 혈액감염으로 간염에 걸려 휴직상태에 있었다. 이때 주변에 작곡가 윤이상, 재독학자 宋斗律(송두율), 金鍾漢(김종한) 등 민건 회원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했고, 오길남은 김종한에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위해 빌린 돈 1500마르크가 ‘미끼’가 돼 북한 공작원을 접촉하게 된다.
공작원을 만난 지 열흘 뒤, 작곡가 윤이상은 오길남에게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북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오길남은 김종한의 소개로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던 공작원을 만나 “북한에 가서 경제학자로 일하게 되면 벤츠 고급승용차도 제공받고, 여러 가지 연구활동이 보장되며 높은 봉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北行(북행) 직전인 1985년 11월경, 오길남은 부인 신숙자와 월북문제를 논의했으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오길남은 “살림도 어렵고,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 간염을 치료하려면 북행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으나, 부인 신숙자는 울면서 “당신은 언젠가 월북 때문에 자신의 눈을 찌르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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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혜원, 아내 신숙자, 그리고 작은딸 규원의 모습. 1991년 1월 20일, 윤이상이 가족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함께 전달한 가족사진 여섯 장 가운데 하나다. 그곳에는 큰딸 혜원과 둘째 딸 규원의 짤막한 편지도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빠! 나 혜원이야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 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아빠! 나는 규원이야요!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평양에서’ |
공작원으로 전락
1985년 12월 13일 오길남은 가족을 데리고 동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오길남 가족은 고려호텔 인근 창광거리에 있는 동흥동 아파트에 살았다. 부인 신숙자는 간염으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오길남의 일가족은 3개월 동안 외부세계와 차단된 채 소위 ‘밀봉 세뇌교육’을 받았다. 1986년 6월부터 11월까지 오길남은 북한이 남한 내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한민전 산하 칠보산연락소에서 근무했다.
약속과는 달리 북한은 경제학자로서 일할 여건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길남은 평양시 흥부동에 있는 대남 흑색선전 방송인 ‘민중의 메아리’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종속경제비판’ 등을 녹음해 남한으로 送出(송출)하는 일을 했다. 그는 “하도 기가 차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대동강변 눈 덮인 벌판에 나가 눈을 맞으며 울었다”고 했다.
1986년 11월 초순, 오길남은 북의 대남공작기구 책임자로부터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해 帶同(대동)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경제학자 오길남이 대남 흑색선전 방송요원에서 끝내 ‘공작원’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부인 신숙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곳이 못되니 당신이 먼저 이곳을 탈출해 독일 정부에 호소해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했다. 월북 전까지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1986년 11월 10일, 오길남은 간염에다 심근경색, 동맥경화증으로 초췌해진 아내 신숙자와 열감기를 앓고 있던 두 딸을 북한에 두고 평양을 출발했다. 金正日(김정일)과 許錟(허담)의 심복인 백치완 등 북한 공작원 두 명도 따라붙었다.
11월 21일, 오길남은 북에서 만들어준 ‘오경현’이란 가명 여권을 소지하고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북한 대사와 백치완 지도원이 앞서 검색대를 통과하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리 준비한 박사학위증 사본과 구조요청 메모(hilfe, hilfe-독어·help me-영어)를 공항 직원에게 밀어넣었다.
공항 직원은 황급히 그를 잡아채 옆 사무실로 옮겼다. 창 밖을 통해 보니 공항 주변에 북한 공작원 30여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은 독일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비밀독서회 멤버였던 브라이든슈타인 목사 집에 머물기도 하고, 무작정 하노버로 와 역전에서 無錢取食(무전취식)하다 병원에 실려가기도 하고,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부랑자 기숙사 신세를 지기도 했다.
다시 독일로 탈출

“아이들 생각에 벼룩시장에서 양말, 칫솔, 팬티, 물감 등을 사 모았어요. 이렇게 모은 아이들 물건이 네 상자나 됐고, 두 차례에 나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통해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윤이상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윤이상을 통해 1987년 10월, 1988년 10월 두 차례 북한에 있는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1991년 1월 20일, 윤이상은 妻子(처자)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주며 “당신은 美帝(미제)의 고용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金日成(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며 다시 월북하라고 협박했다. 오길남이 “차라리 나와 가족을 맞바꾸게 해달라”고 하자, 윤이상은 “되먹지 않은 소리 말라, 북한의 위신을 그렇게 먹칠해 놓고 고작 그런 소리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5년간 허송세월한 오길남은 가족송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으로 귀국해 당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1992년 4월, 오길남은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 그해 5월 입국했다.
오길남은 헤어지던 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북을 떠나기 전날 밤, 우리 부부는 도청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밤새 ‘가야 한다’ ‘당신과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나만 가느냐’며 다퉜습니다. 1986년 11월 10일 날이 밝기 전, 3호청사 공작원들이 차를 집앞에 댔습니다. 혜원, 규원이는 편도가 붓고 밤새 끙끙 앓아 몸이 불덩이 같았어요. 독일처럼 가정을 방문해 응급처치해 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죠. 집을 나서는데 일곱 살짜리 작은딸 규원이가 ‘아빠, 후케파크(업기) 해줘’라고 해요. 날씨마저 쌀쌀해 둘째 딸아이를 업어 주면서 아내에게 ‘내가 어떻게 이 귀여운 애들과 아픈 당신을 두고 떠나느냐’고 했어요.”
부인 신숙자는 담담했다. “당신 자식과 마누라의 생명만 소중하냐. 유망한 젊은 부부를 데려와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며 오길남의 멱살을 잡고 울음을 삼키며 뺨을 때렸다. 신숙자는 “우리는 죽어도 그만이다. 내 딸들이 남을 속여 지옥에 빠뜨리는 파렴치범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오길남 박사는 “그날 아침 내 뺨을 때리던 아내의 손길과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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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남 박사가 구출운동을 한창 추진 중이던 1993년 발간한 책,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의 표지. |
오길남은 귀국 전인 1992년 3월과 4월,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송환을 위해 유엔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적십자사에 가족송환을 탄원했다. 그러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1992년 6월 국제적십자사 홍콩지사로부터 가족의 근황을 알아보겠다는 연락이 왔고,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1994년 독일의 크라우스 킨켈 외무장관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오길남 박사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사무총장을 서울에서 만나 북한의 가족송환을 요청해 주도록 부탁했다”면서 “앰네스티는 스위스 주재 이철 북한대사에게 부탁했고, ‘혜원이 엄마가 사무총장 만나는 것을 거부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뜻밖에도 그의 가족 소식은 1992년 10월 북한의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에 수용돼 있다 탈출한 安赫(안혁), 姜哲煥(강철환)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들려왔다.
안혁은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은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수용돼 있고, 신씨는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는 등 산나물을 뜯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최근 앰네스티가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비롯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행방불명자들의 명단을 파악하면서, 오길남 박사의 가족도 조사 대상자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독일의 유력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너자이퉁>의 우베 슈미트 도쿄특파원은 1994년 5월 18일자 ‘어두컴컴한 삶의 터널(Finsterer Lebens Tunnel)’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오길남 박사의 가슴 아픈 스토리를 대서특필했다.
특히 우베 슈미트 특파원이 “오길남의 외국어 지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감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에 대한 언어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제쳐 두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독일어는 일품이었다. 그의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는 독일 어휘들은 오늘날 독일인들의 일상생활에서 煙滅(연멸)해 버린 것들이었는데, 그가 적절하게 쓴 어휘들의 유려함은 그가 19세기의 거작들을 읽어낸 데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거의 통째로 외우다시피 한다. 악마와 결탁하는 비극의 구절구절들이 괴로움 속에서 잠 못 이루고 지새우는 무수한 밤에 떠오른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오길남이 ‘사상적 잔재’라고 애써 피하지만 언어표현 방식의 거장이 토로하는 것 같은 그의 언설은 나를 때로는 몹시 당혹게 했다….>
오 박사는 “가족과 헤어진 지 햇수로 23년째”라고 했다. 그는 “올해 서른네 살이 되는 큰딸 혜원이는 윤이상 선생과 생일이 9월 17일로 똑같았다”면서 “길을 가다 혜원이나 규원이 또래의 예쁜 여성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고 했다.
“우유나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북에서 저걸 사달라고 조르던 딸들 생각이 나 마음이 아프다”며 “한밤에 아파트에 혼자 누워 수용소에 있는 혜원이 엄마에게 매달 감자 10kg씩만 보내줄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오 박사는 ‘가족 송환을 李明博(이명박)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거대한 국가조직이 노력해도 결국 북한이 응답하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기에 지금 북한의 가족 구출은 ‘흘러간 노래’가 돼 가고 있다”며 “우리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낙담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그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에 강한 제재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이 가능했다”면서 “한국은 북에 ‘퍼주기’식 지원 외에는 특별한 카드가 없기 때문에, 적십자사·통일부 관련자들도 ‘비관적 확신’을 갖고 있을 것이고, 개성공단에 억류된 현대아산 유모씨 문제 해결도 그래서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오길남 박사는 “솔직히 미국의 여기자 구출을 보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면서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혹시 아이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오길남 박사는 사진촬영에 열중이던 月刊朝鮮 徐炅利(서경리) 사진기자에게 “올해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스물여덟”이라고 하자, “카메라가 무거워 우짜노” 하며 “지금이라도 혜원이와 규원이가 서울에 올 수 있다면 여기자 선생처럼 몸을 회복해 예뻐질 수 있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좌파 정권 10년 동안 오길남 박사, 그리고 그와 함께 월북했던 가족은 국가와 국민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오 박사는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나려면 북한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죠”라며 물기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