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줄거리]
강원도와 함경도의 길은 험하고 인심은 야박했다. 서당과 암자 등 곳곳에서 즉흥시를 남기면서 주로 서당을 중심으로 김병연이라는 이름 대신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병연은 몸이 피곤하고 마음 또한 지쳐 어딘가 정착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 때문에 안변에서는 기생 가련과 1년 기한의 동거를 했고, 다시 단천에서는 두 해 동안 장터 주막 과부의 딸과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에게 「뿌리」를 만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그림 : 이우범
강원도와 함경도의 길은 험하고 인심은 야박했다. 서당과 암자 등 곳곳에서 즉흥시를 남기면서 주로 서당을 중심으로 김병연이라는 이름 대신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병연은 몸이 피곤하고 마음 또한 지쳐 어딘가 정착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 때문에 안변에서는 기생 가련과 1년 기한의 동거를 했고, 다시 단천에서는 두 해 동안 장터 주막 과부의 딸과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에게 「뿌리」를 만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그림 : 이우범
빈손으로 얻어먹으며 다니는 길에 어디라고 쉬운 길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강원도와 함경도는 더 어려웠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이 서너 채 있으면 고작이고 종일 산길을 허위허위 걸어도 마을은커녕 화전을 일구는 오두막 하나 찾아낼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게다가 이런 고장들은 봄이 늦었다. 춘삼월에도 찌푸린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날렸고, 사월이면 여름의 초입인데도 하늘이 가까운 산길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병연의 무명 겹옷 속으로 이른 봄날의 매서운 바람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사람의 체온 덕분에 창궐한 蚤(이)와 서캐들만 대낮에도 스멀거리며 몸속을 기어 다녔고, 더러는 머리에까지 기어올라 삿갓을 벗으면 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四月咸關嶺(사월함관령) 사월의 함관령
北靑郡守寒(북청군수한) 북청군수는 추위에 떨고
杜鵑今始發(두견금시발) 진달래는 이제 겨우 피기 시작하니
春亦上山難(춘역상산난) 봄도 힘이 드는가, 산을 오르지 못하네
도망치듯 단천을 떠날 때는 초봄으로 봄 같지 않은 쌀쌀한 날씨였으나 북청을 거쳐 함흥땅에 이르렀을 때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고, 안변땅을 밟았을 때는 가을이 제 먼저 와 있었다. 병연의 발길은 계절보다 느렸다. 어찌하여 다시 안변인가. 이대로 남쪽으로 내려가 가을 금강산, 풍악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눈과 가슴에 담아 두고 싶은 거라고 애써 스스로 변명했으나 억지였다. 원산을 지날 무렵부터 공연히 발길이 빨라지더니 안변도호부가 있는 문내리의 낯익은 주막에 앉자마자 가련의 소식부터 물었다.
주모는 몇 해 전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허리가 더 구부정해졌고, 삼베 천으로 동여맨 머리카락에 서리가 많이 내려 있었다.
『주모, 늙었구랴. 백발이 성성하이. 나 오늘 엽전 몇 냥이 고이에 있다네. 탁배기 좀 걸러 오소』
『돈은 어디서 생겼수?』
주모가 엉덩이를 평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원산에서 어느 미친 놈이 환갑잔치를 한다고 떠들썩하기에 말석에 끼어 詩 한 수를 헌상했지. 아, 그랬는데 이 무지한 놈들이 나를 이태백이보다 더한 詩仙(시선)에다 酒仙(주선)으로 떠받들어 놓고 사흘 동안 술을 퍼먹이고는 떠날 때 행자까지 챙겨 주더만』
『무슨 詩를 지었기에 공짜술에 행자까지 벌었수? 들어보고 나도 삿갓어른에게 공짜술을 대접할지 돈을 받을지 요량할 테니 읊어 보시우』
『들어보게』
병연은 히죽거리며 환갑잔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원산에 닿으니 인심이 어찌나 고약한지 먹을 것은 고사하고 잘 곳조차 없는지라. 關王廟(관왕묘)에서 雲長(운장)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배가 등가죽에 붙어 거리를 지나는데 어느 부잣집에서 환갑잔치를 합디다. 마당에 차일 치고 떡 벌여 놓고 잔치를 해요. 들어갔지. 종놈들이 앞을 막고 乞床(걸상)을 내놓는 것을 발로 차버렸지. 건장한 아들놈 하나가 와서 멱살을 잡기에 「환갑연에 문장도 詩도 없는 이런 상놈의 잔치는 처음이다」 했더니 「詩를 지을 줄 아느냐?」고 묻더군. 「천하의 김삿갓 이름도 모르는 놈들에게 詩를 지어 바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이놈이 저희 일곱 형제끼리 의논을 하더니 회갑 맞은 아비 앞에 나를 데리고 가서 지필묵을 내놓더라고.
그래서 첫 구를 휘갈겼지. 「彼坐老人不似人(피좌노인불사인)이라. 저기 앉은 저 노인 사람 같지 않구나」 했지. 했더니 등 뒤에서 아들놈 하나가 낮은 소리로 「사람 아니면 짐승이라는 말이냐, 이놈 몽둥이로 두들겨 내쫓읍시다」 그래요. 얼른 다음 구를 썼지. 「疑是天上降眞仙(의시천상강진선)이라. 하늘에서 참 신선이 내려온 것 같네」 하고. 했더니 지켜보고 있던 놈들이 「와악」 하고 탄성을 내지르고 야단이 납디다. 말로만 듣던 김삿갓이 정말 시선이라고도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구를 지었소. 「其中七子皆爲盜(기중칠자개위도)라.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라」 했더니, 뒤에서 또 구시렁거리는데 금방 몽둥이가 대갈통에 날아올 것 같더라고. 서둘러 다음 구를 휘갈겼지. 「偸得王桃獻壽筵(투득왕도헌수연)이라. 옥황상제의 천도를 훔쳐다 회갑연에 바쳤구나」 환갑을 맞은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제 옆에 앉히고 술을 권해요. 그것으로 끝이지. 술이 깨고 보니 사흘이 지났습디다. 서둘러 안변땅으로 달려왔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 주모요. 처음 마시는 술이 이 잔이오』
병연은 탁배기 잔을 들어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고 주모를 바라보았다.
『주모, 울고 있소?』
주모는 술 지게미가 말라붙어 있는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울기는, 삿갓 어른이 울고 있지 않수』
『이건 술이 튀었지』
병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를 닦았다.
『말해 보시오. 가련이 소식을 알고 있구먼? 설혹 이승 사람이 아니라 해도 놀라지 않겠소』
주모는 술청 안쪽의 작은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손에 물건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낯익은 銅鏡(동경)이었다. 왈칵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솟구쳐 올랐으나 병연은 애써 눌러 앉혔다.
『이걸 내게 맡겼수다. 그 가련한 인간이. 김삿갓 어른이 행여 이 고을을 지나게 되면 천상 주막을 그냥 지나지는 않을 터, 그때 이 물건을 전해 달라고 내게 맡겼수. 이제 임자를 만났으니 가져가시우. 나는 이것을 장롱 속에 묻어 두고 가슴앓이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
병연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닦지 않아 흐릿한 거울 표면에 늘 속앓이를 하여 찡그리고 있던 가련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떻게 갔소?』
『삿갓 어른이 떠난 후 속병을 앓다가 작년 봄에 갔다우. 무덤도 없수. 태워서 강물에 뿌렸다고들 합디다. 불쌍한 것. 그런데 더 불쌍한 인생은 삿갓 어른이우. 한 가지 물어봅시다』
주모가 정색하고 물었다.
『왜 사시우?』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병연은 술을 마시면서 대답했다.
『술을 마시면 잊을 수 있수? 詩를 쓰면 맺힌 것이 풀리기라도 하우?』
『술을 마시면 잊었던 일이 더 새록하게 생각날 수도 있지. 그러나 대개는 잊어요. 詩를 쓰면 더 맺힐 수도 있지. 그러나 대개는 풀어져요. 한숨처럼 말이오』
『그럼 詩 한 수 써 보시우』
병연은 바랑 속에서 벼루와 붓과 먹을 꺼냈다. 종이는 주모가 가지고 왔다.
一從別後豈堪忘(일종별후기감망) 한 번 헤어졌다고 어찌 그대를 잊으리.
汝骨爲粉我首霜(여골위분아수상) 그대 뼈가 가루 되어 내 머리에 서리가 되었네.
鸞鏡影寒春寂寂(난경영한춘적적) 임자 잃은 거울은 봄이 와도 적적하기만 한데
豊簫音斷月茫茫(풍소음단월망망) 퉁소 소리 끊기니 달빛만 망망하다.
早吟衛北歸薺曲(조음위북귀제곡) 일찍이 북쪽 위나라의 귀제곡을 부르더니
虛負周南采藻章(허부주남채조장) 이제는 남쪽 주나라의 채조장도 부르지 못하네.
舊路無痕難再訪(구로무흔난재방) 예 다니던 길 흔적 없어 다시 오기 어려우니
停車坐愛野花芳(정차좌애야화방) 가던 길 멈추고 앉아 들꽃이나 사랑하리.
병연이 詩를 읽고 뜻을 새겨 주자 주모는 말없이 詩가 적힌 종이를 곱게 접어 귀한 보물처럼 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장롱 속에 넣어 두고 나왔다.
『그걸 뭣에 쓰려고 간직해 두는 거요? 글도 읽을 줄 모르고 詩를 경멸하면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 맞수. 하늘 天(천) 자도 모르우. 詩라는 것을 경멸하는 것도 맞수. 평생을 바쳐 천 편을 지어 봐야 쌀 한 톨 만들어 내지 못하는 허망한 글놀음을 경멸하지 않으면 뭘 경멸하겠수? 하지만 이 詩는 쓸모가 있구먼. 딱 한 군데에』
『그게 어디요?』
『다음달이면 그 불쌍한 것 세상 떠난 지 일년이 된다우. 젯밥 한 술 떠줄 연고가 없으니 탁배기 한 잔에 이 詩라도 차려 놓을 작정이우. 그년은 글줄을 아니 읽고 응감하겠지』
그 다음날, 병연은 남대천 강가에 앉아 있었다. 주모가 마련해 준 호리병을 기울여 청주를 질금질금 몇 번 강물에 뿌렸다. 그리고는 병 아가리에 입을 대고 남은 술을 한꺼번에 마셔 버렸다. 호리병을 강물 위에 던졌다. 첨벙, 물을 튕기면서 병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병연은 발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하마터면 물속으로 뛰어내릴 뻔했다. 가련의 얼굴이 흐르는 물 위에 떠올라 자신을 향해 웃으며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이 강둑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때의 그 강물일까? 아닐 것이다. 모습은 같아도 그때의 물은 아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흘러가면 뒤에서 따라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멀리서 보면 끊이지 않고 유장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때 그 사람은 가고 없다. 돌아오지도 않는다. 어느 마파람에 날리어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 옷섶을 적셔 줄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병연은 벌떡 일어났다.
『오냐, 나도 간다』
어제까지 걷는 것, 흐르는 것은 사는 것이었지만 오늘부터 걷는 것, 흐르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녀가 갔고, 할아버지가 갔고, 아버지 김안근과 형 병하가 젊은 나이에 갔던 그 길을 나도 가는 것일 뿐. 누가 『왜 걷느냐?』고 물으면, 그저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해 주리라.
병연은 서북 방향을 한 번 쳐다보고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늘 그랬듯이 새 걸음은 금강산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금강산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가슴에 불을 지르는 여인과 같았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지를 옭아매는 신비한 힘이 있었고, 가까이 가서 묻히면 한없이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그런 여인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금강산은 더 큰 매력으로 사람을 끌었다. 적어도 김삿갓, 김병연에게 금강산은 마음속에 그리던 여인이었고, 용화세계였고,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금강산이 그리웠고, 금강산에 오기만 하면 편했다.
그러나 금강산의 골짜기마다, 봉우리마다 붙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금강산에 주인이 없는데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중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웬만한 중들은 김삿갓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이 자가 다시 금강산에 나타나면 밥이나 잠자리는커녕 혼을 내어 쫓아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神溪寺(신계사)에서 먼저 그 꼴을 당했다. 금강산 사대 사찰이라고 하나 이름뿐으로 불에 타고 퇴락하여 대웅전을 중심으로 龍船殿(용선전), 說禪堂(설선당)만 현란한 단풍의 색조 속에 그림처럼 파묻혀 있을 뿐 허물어져 가는 인상의 절간인데, 살고 있는 중들의 행태는 고아한 맛이 전혀 없고 자못 거칠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삿갓은 왜 쓰고 다니시오?』
행자의 전갈을 받고 대웅전 뒤뜰의 요사에서 옷섶을 여미며 나온 원주 스님이 물었다.
『길을 다니다 보면 날씨가 좋은 날도 있고 궂은날도 있습니다.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었으니 좋거나 궂거나 가리지 않고 머리 위에 붙어 다닙니다』
『부처님을 아시오?』
『모릅니다』
『난 또, 아는 이가 있어 만나러 온 줄 알았소. 부처님을 모르니 용무도 없을 터인즉 그만 가보시오』
『부처님에게 물어보고 가라시면 가겠습니다』
병연이 대웅전 계단으로 올라가자 원주가 황급하게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처사께서는 김삿갓 맞지요?』
『내 이름까지 아는 스님이 이리 박대하십니까?』
『보면 알 것 아닙니까. 고찰이라고 하나 이름뿐입니다. 그보다 처사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금강산 내에 많은데 하필이면 여기서 머뭇거릴 까닭이 뭡니까?』
『이 거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라면 모를까』
그가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자 원주가 황급하게 팔을 잡았다.
『아직 해가 남았고, 普光庵(보광암)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거기 가시면 詩 잘하기로 금강산은 말할 것 없고 조선 천지에서 제일이라 자부하는 耕雲(경운) 스님이 있습니다. 그 스님이 「김삿갓이라는 자가 금강산 禪風(선풍)을 조롱하고 갔다 하는데 내가 무서워 찾아오지 못하니 가소롭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닙니다』
원주의 말투로 보아 그냥 나그네를 쫓아내려고 꾸며서 하는 말은 아닌 성싶었다. 원주의 말 그대로 보광암은 신계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퇴락한 신계사보다는 암자의 위세가 당당했고, 젊은 대중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채공간에서 나오는 젊은 스님에게 경운 스님을 찾자 『아, 수좌스님 말이지요? 詩를 겨루려 왔습니까』 하고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내 마흔 줄의 나이에 울퉁불퉁한 머리통의 중이 방 안에서 나왔다.
『왜 이제야 오셨소?』
경운은 대뜸 김삿갓을 알아보았고, 병연도 이 중의 범상하지 않은 文氣(문기)를 느꼈다. 차를 따르며 경운이 말했다.
『금강산 내에 처사의 이야기가 자자한데 할 일 없는 중들이 과장하여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오. 처사의 재주가 그저 허명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겠소이다. 내가 먼저 한 句(구)를 부를 테니 對句(대구)를 적으시오. 적지 못하거나 격이 떨어지면 당신 이빨을 하나 뽑겠소이다.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처사의 재주가 나를 능가하거나 대등하면 이 암자에서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겠소이다』
『이빨을 뽑아요?』
『그럼 몸속의 다른 뼈다귀를 추려 낼까요?』
『나는 뭐 해골 바가지를 들어낸다 해도 좋습니다만 해골 바가지는 들어내기 어려울 테니 이빨로 하지요. 내 이빨을 모두 뽑아 가도 좋소』
지필묵이 준비되었다. 나이 지긋한 중 한 사람과 젊은 중 한 사람이 방 안에 들어와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젊은 중은 병연이 질 경우 이빨을 뽑기 위해 집게를 들고 있었다. 경운이 먼저 한 句를 적어 내려갔다.
「朝登立石雲生足(조등입석운생족) 아침에 입석대에 오르니 구름이 발 밑에서 일고」
병연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對句를 적었다.
「暮飮黃泉月掛脣(모음황천월괘순) 저녁에 황천의 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렸도다」
경운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潤松南臥知北風(윤송남와지북풍) 소나무가 남쪽으로 누우니 북풍을 알겠고」
병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었다.
「軒竹東傾覺日西(헌죽동경각일서) 대나무 그림자 동쪽으로 기우니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줄 알겠도다」
경운이 붓을 멈추고 병연을 바라보았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을 감추지 않았다. 병연도 마찬가지였다. 중의 詩句(시구)가 워낙 절묘해서 자신의 對句가 절로 나오는 듯했다. 장단이 좋으면 절로 춤이 나오듯이. 금강산의 절경을 소재로 세 번을 더 문답한 후 경운은 작심한 듯 다음 句를 내놓았다.
「影浸綠水衣無濕(영침녹수의무습) 그림자가 물에 잠겼으나 옷이 젖지 않고」
자신의 詩句가 스스로 절묘하다 생각했는지 경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병연의 對句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연이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對句를 적어 내려갔다.
「夢踏靑山脚不苦(몽답청산각불고) 꿈에 청산을 거닐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네」
경운이 병연을 바라보았다. 오랜 지기를 만난 눈빛이었다. 병연도 이제껏 승속 간에 이런 재주를 지닌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었다. 한양의 문사들은 고답적이어서 옛 시인들을 모방하기에도 힘이 부쳐 자신의 詩를 지을 엄두조차 못 내는 위인들이었다. 자신들이 선인의 詩句를 모방하는 데 평생을 소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아는 인물도 없었다. 그랬는데 금강산에서 마침내 詩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빨도, 해골 바가지도 모두 잊고 흥에 겨워 몰입했다. 일곱 구절을 더 읊은 다음 경운은 大尾(대미)를 그릴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가 희고」
금강산의 겨울 풍광으로 옮겨 가자 병연은 그 풍경의 내면을 드러냈다.
「山深夜深客愁深(산심야심객수심) 산은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시름도 깊더라」
경운이 붓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두 중이 넋을 잃고 있었다.
『우리가 이런 詩를 지었소?』
한참만에 경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금강산이 지었지요』
병연이 대답하자 경운은 무릎을 쳤다.
『맞소. 금강산이 이 詩를 지었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닐 거요. 佛緣(불연)에 이런 고사가 있소. 六祖(육조)가 어느 법회에 참석해 보니 바람에 깃발이 날리는 것을 보고 한 중이 「깃발이 날린다」고 하자, 다른 한 중이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지라 육조가 나서서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날리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뿐」이라 했다고 합니다. 오늘 금강산이 詩 짓는 경지를 알았다면 육조대사도 움직이는 것은 금강일 뿐 마음은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닌 줄 알았을 텐데, 애석하고 애석한 일입니다. 자, 그러니 곡차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겠소?』
곡차 마시기를 시작하자 사흘 낮밤 동안 계속했다. 이틀째 되는 날에는 산중 통문을 들은 법기 스님이 술 항아리를 안고 달려와 통음대작은 계속됐다.
금강산에서 보낸 세월 중 최고의 날들이었다. 많은 詩를 지었다. 경운과 법기 두 스님의 덕분으로 산중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염려는 놓게 되었으나 다른 사암들은 달랐다. 어디를 가든 냉랭한 거절이었고 거지 취급이었다. 그럴 때는 특유의 비아냥으로 詩 한 수를 던져 놓고 나왔다. 지난날의 분노와 비아냥 대신 연민을 문자에 담아 내놓은 것들이었다. 가련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생사의 끈을 놓아 버리자 詩도 저절로 생각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억지로 짜내는 詩는 없어지고 저 아득한 세월이나 공간의 어느 곳에서 떠돌던 언어들이 절로 조합되어 나오는 것처럼 운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병연은 더 자주 술을 마셨다. 마셨다 하면 기절하여 깨어나지 못할 때까지 마셨다. 돈이 없어 술을 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탈일 뿐 술만 보았다 하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금강산에는 봉우리도 많았고, 골짜기도 많았고 절도 암자도 많았다. 덩달아 중도 많았고, 도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 많았다. 어느 날 밤 법기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병연은 문득 깨달았다. 속인인 자신보다 출가 승려인 법기가 더 술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노장 회해의 열반 이후 안양암에는 열반한 회해 대사의 가피를 입으려는 시주가 끝이 없었다. 浮屠(부도)와 塔婆(탑파)가 세워졌고, 가람의 堂宇(당우)도 중창되었다. 법기는 저절로 회해 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상좌로 큰스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낮에는 큰스님이었으나 밤만 되면 술을 마셨고, 대중방이나 법당에서는 청정 비구였으나 돌아서서 지대방이나 요사로 들어오면 고주망태로 얼어 있었다. 암자 뒤의 대나무 숲 속에는 온갖 산열매로 빚은 술들이 항아리마다 넘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법기가 마른 입술을 술로 축이면서 시비를 걸었다.
『그만하면 알 만큼 알았을 텐데 무엇이 부족해서 금강산을 기웃거리는가, 거지 양반아. 그만하면 알 만큼 알았을 텐데 무엇이 부족해서 암자를 기웃거리는가, 거지 양반아』
『내일 떠나려 하네』
『어디로?』
『모르지』
다음날 병연은 금강산을 떠났다. 늦은 봄이었다. 금강산에서 나와 철령을 넘어서자 비로소 봄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다. 금강산에 머물 때는 금강산 밖의 세상이 안개 속처럼 흐리고 어두워 보였는데 금강산 밖에 나와서 돌아보니 금강산 속이 몽환인 양 흐릿하고 감옥처럼 어두웠다.
배고픔도 추위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전에는 몇 끼를 굶어 참기 어려우면 지나던 길 옆의 밭에서 무를 뽑아 먹기도 했고, 여린 채소 잎을 아무거나 따서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몇 끼가 아니라 며칠쯤은 참을 수 있었다. 밥 한 끼와 하룻밤의 잠자리를 구걸하다가 거절당하거나 내쫓기면 말없이 돌아섰다.
그냥 밥을 구걸하기보다 먼저 무엇인가 주어야겠기에 때로는 소리도 하고 때로는 춤도 추었다.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둘러싸면 어른들까지 합세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뭇매를 맞으면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에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
안변 땅을 멀리 남쪽으로 돌아 문천, 고원을 지나고 孟山(맹산)의 龍德(용덕)에 이르렀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마을에서 떨어진 후미진 강에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었다. 병연도 물에 몸을 담갔다. 새까맣게 먼지가 앉은 삿갓도 씻고 옷도 빨아 땀 냄새를 지웠다. 낯선 사람을 보고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멱을 감던 아이들이 다가왔다.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이냐?』
열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에게 물었다.
『馬灘江(마탄강)이라고 해요』
『마탄강에 말은 어디 있느냐? 이 강은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말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요, 흘러서 대동강으로 간다고 해요. 그 다음에는 바다로 가겠지요』
『너는 바다를 보았느냐?』
아이는 고개를 젓더니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로 가버렸다.
그날 저녁 옷을 말려 입고 마을로 들어간 병연은 먼저 서당을 찾았다. 서당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전에 院(원)으로 쓰다가 폐쇄한 후 마방지기가 살던 집을 서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서당 안에 들어간 병연은 조금 놀랐다. 저녁 공부를 위해 모여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낮에 멱을 감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병연을 보고도 알은 척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놈들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훈장 어른은 어디 계시냐?』
그 말에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놈이 없었다. 대신 방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사내 두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병연의 팔을 비틀어 일으켜 세웠다.
『이놈이냐? 닭을 훔쳐 가서 강가에서 삶아 먹은 놈이?』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들은 병연을 끌고 나가 마을 가운데의 큰 기와집 마당으로 데리고 갔다.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휘영청 달이 밝아 대낮처럼 잘 보였으나 짐짓 마당 구석에 장작으로 화톳불도 피워 놓았다. 집의 대청 바로 앞에 이 집의 주인인 듯한 노인이 큰 상을 펴놓고 그 위에 위엄을 부리며 앉아 있었다. 병연을 그 노인의 앞에 꿇어앉혔다.
『어디서 온 누구인고?』
노인이 짐짓 목청을 돋우며 물었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죄인 다루듯 무례하게 대접하는 노인장은 뉘시며 이 마을은 대체 어느 오랑캐의 동네입니까?』
『누구인지는 모르나 너의 패악한 행실은 알고 있느니라. 너는 오늘 낮에 이 마을 김서방네 집에 몰래 들어가 닭을 잡아 강가로 가서 삶아 먹었다』
병연은 그냥 아니라고 우겨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좋소. 누가 이 사실을 고해 바쳤소?』
『닭을 잃은 김서방네와 서당 아이들이 두 눈으로 보았느니라』
『먼저 김서방을 데리고 오시오. 그리고 서당 아이들도 데리고 오시오』
『데리고 오너라』
병연을 끌고 왔던 사내 둘이 나가더니 한참 만에 김서방과 서당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김서방이라는 자는 서른두어 살 돼 보이는 농부였다.
『김서방은 말해 봐라. 너희집 수탉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이 언제더냐?』
김서방이 쭈볏거리며 말했다.
『며칠 전에 소인의 딸년을 치우는 잔치를 벌였습지요』
『그거야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고. 닭 이야기만 하라니까』
『잔치에 왔던 일가붙이 장년들이 닭장을 들여다보면서 유난히 살 찐 그놈의 수탉에 눈독을 들였거든요. 소인은 그것만은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지켰습지요. 하지만 바로 오늘 아침에 나가 보니 그 수탉이 없어졌습니다요』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하느냐?』
『당장 일가붙이 놈들에게 닦달을 했습지요. 한데 한 놈도 서리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둑의 짓입지요』
『그 사실을 훈장에게 알렸느냐?』
『아닙니다. 훈장 어른께서 「뭐 잃어버린 것이 없느냐」 물으시기에 사실대로 고해 올렸습니다』
『알았다. 다음. 서당 학동들 앞으로 나오너라』
아이들이 우루루 앞으로 나와 섰다. 노인은 그중에 좀 똑똑해 보이는 아이를 지목하여 물었다. 낮에 병연이 강의 이름을 물어본 그 아이였다.
『저 사람이 강가에서 닭을 삶아 먹는 것을 보았느냐?』
『저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뭣이냐?』
『훈장 어른께서 「틀림없이 저 사람이 닭을 삶아 먹은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훈장님께서 허튼 말씀을 하실 까닭이 없으니 저 사람이 삶아 먹은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은 담뱃대를 힘들게 빨았다. 담뱃대 꼭지에서 빨간 불빛이 살아나자 노인의 입에서 연기 몇 모금이 솟아나와 여름밤의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훈장을 모시고 오게』
사내 둘이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휘둘러 본 다음 말했다.
『보이지 않습니다. 서당에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돌아온 사내들은 서당에서 훈장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잡아 와. 그자가 도둑이야. 도둑이 아니라면 무슨 함정을 파서 억울한 사람을 빠뜨리려는 흉계야. 그건 그렇고 당신은 누구요?』
『저는 이름은 있으나 쓸모 없어 잊은 지 오래됐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김삿갓이라고 부릅니다』
『글을 잘 짓는다는 그 김삿갓 말이오?』
『글을 짓기는 합니다만, 잘 짓는지 어떤지는 제 입으로 말하기 염치 없습니다. 그저 얻어먹으며 다니는 거지라는 것이 옳겠지요』
노인은 김서방에게 말했다.
『일가붙이들에게 말하게. 내일 아침까지 닭 잡아 먹은 것을 실토하지 않으면 여기 억울한 사람 하나가 관가로 잡혀 갈 것이고, 그의 죄를 밝히는 동안 틀림없이 진짜 닭 잡아 먹은 놈이 밝혀져 물고를 당할 테니 미련하게 그때까지 발뺌하고 버티지 말고 당장 실토하라고. 친척집 잔치에 와서 닭 서리 하는 것쯤 무어가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그 죄를 무고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면 마침내 그 사람이 물고를 당한단 말일세』
『하지만 훈장 어른이 왜 그런 짓을?』
다른 노인 한 사람이 나서며 말했다. 주인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자가 겁을 먹은 거야. 김삿갓이라는 대문장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무지가 탄로날까 봐 겁을 먹고 미리 함정을 판 것이야』
그날 밤 노인의 집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김삿갓이라는 대문장가에게 잠시 누명을 씌워 박대한 것을 사과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김서방이 기르던 닭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또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술이 있는 집에서는 술을 가져왔고, 나물이 있는 집에서는 나물을 가져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삿갓 양반, 달리 대책이 없소이다』
주인 노인이 병연에게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우리 아이들 말이외다. 훈장을 잃지 않았소? 삿갓 양반이 이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훈장이 좀 모자라기는 하나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살았을 것 아니오? 한데 삿갓 양반 온다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듣고 지레 겁을 먹어 못된 짓을 하다가 스스로 달아났으니 인생이 가엾기는 하나 잘된 일이오. 그렇지 않아도 그 훈장이 못마땅하던 참이니 말이오. 그러니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을 훈도해 주시오』
갈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으니 서둘러 갈 필요가 없었다. 아니, 내심으로는 가능하다면 뒤로 미루어 이승에서의 행로가 끝날 즈음에 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叛軍(반군)에게 투항했던 곳, 叛軍의 수괴인 홍경래가 장정들을 모아 훈련시키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목숨을 걸었던 다복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부군과 맞서 장렬하게 죽어 갔던 정주성… 그 서북지방의 주막집 골방이나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어느 정자에서 술 한 잔 손에 잡고 이 고달픈 나그네길을 마감하고 싶었다. 나그네길의 원인을 만들어 주었던 그곳에서 생을 마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때를 뒤로 미루고 싶었다. 병연은 노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학동은 용덕 마을에서 일곱 명, 이웃에 있는 다섯 개 마을에서도 마을마다 한 명씩 배우러 오는 아이들이 있어 모두 열 두 명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韓振卨(한진설)로 젊어서부터 향시에 도전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이 지방 최고의 토호였고, 아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고 똑똑한 열다섯 살의 韓滿基(한만기)는 노인의 손자였다.
『썩어빠진 과거지만 그래도 급제를 해야 양반 소리를 듣는 게 아니겠소. 또 썩어빠진 것이 양반이지만 그나마 양반도 아니면 인간 구실로 살기 어려운 게 이놈의 세상이오. 우리 손자놈 턱걸이라도 향시에 급제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오. 내 뭐든 다 해 드리리다』
노인이 말했다. 조선 땅 어딜 가나 언제나 듣는 말이었다. 과거는 썩었다. 입 가진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붙어야겠다. 눈 뜬 놈은 모두 같은 소리를 했고, 같은 공부를 했다. 그러면 과거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은 존경받아야 마땅한데 사실이 그런가? 아니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지 간섭하지 마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아이들을 종아리 때리며 사정없이 훈계할 터이니 혹시 삼대독자라 하여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암요. 훈육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전임 훈장은 마음이 약해서 부모들의 눈치를 살폈지요.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맡아 보겠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두 가지 조건을 어길 때는 그 다음날로 떠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노인은 참을성이 있었다. 안목이 넓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병연은 「이런 사람들이라면…」 하고 생각했다. 오래 눌러 살면서 정을 붙여도 무방하지 않겠나. 그러나 아니었다.
열두 명의 아이들 중 절반은 이제 천자문을 외는 수준이었고, 나머지 중에서 다섯은 동몽선습을, 제일 윗길인 한만기만 소학에 들어가 있었다. 병연은 천자문을 외는 놈들에게는 사정없이 매를 들었다. 배운 것을 외지 못하거나 뜻을 모르면 종아리를 쳤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더 엄한 공부를 시켰다. 앵무새처럼 틀에 박힌 풀이만 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내지 못하면 벌을 내렸다. 벌은 역시 종아리 때리기였다. 며칠 사이에 아이들마다 종아리에 시퍼런 뱀 문양이 감겼다.
병연이 훈장 노릇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던 날 한 아이가 서당을 그만두었다. 보름이 되자 다섯 놈이 공부를 포기했다. 그중에는 삼대독자가 하나, 이대독자가 또 하나 있었는데 소문에 듣기로는 이들 부모들은 귀한 자식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며칠 밤낮을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한 달이 되던 날 참을성 많은 한진설 노인이 학동들이 없는 시간을 틈타서 서당을 찾아왔다.
『훈장 어른의 노고를 어떻게 치하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너무 기름져서 느끼하다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말이 짐작했던 대로였다.
『이전의 훈장은 너무 마음씨가 여리고 성질이 순해서 아이들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는 바람에 훈육이 되지 못했지요. 한데 삿갓 훈장께서 오신 다음에는 그런 걱정은 없어 시름을 놓았는데 일부 학동들이 옛날의 훈습을 버리지 못하고, 그 부모들도 귀한 자식 매 맞는 일만 가슴이 아파 서당 보기를 지옥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저들 부모나 아이들도 잘못되었지만 훈장께서도 채찍을 조금만 누그러뜨려 먼저 아이들을 서당에 발붙이게 해놓고 점차적으로 가편하시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혹여나 간섭하는 것이라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노인장께서는 저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적어도 향시의 말석에나마 급제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것을 목표로 아이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맞습니까?』
『그랬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제사 때 紙榜(지방)이나 쓰고 식솔들의 성명 함자나 읽을 줄 아는 것이 목표라면 이전 훈장이 그 정도는 가르쳐 놓았으니 더 배울 것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목표가 과거에 있고, 급제하여 반열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저 아이들 중 한 놈도 그런 그릇이 없습니다. 다만 노인장의 손자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싹이 조금 보입니다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학을 읽어 봐야 바탕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지금 떨어져 나간 아이들 여섯 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서당의 숫자만 채울 뿐이니 공연히 세월 축내지 말고 농사일이나 시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더 가혹하게 채찍질할 것이고, 재목이 안 되면 쫓아 낼 것입니다』
『옳아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일어서면서 한마디 보탰다.
『하늘이 무너져도 훈장을 돕겠소. 그리고 밀어 주겠소. 우리 손자 놈 하나라도 향시에 붙게 해주시오』
노인의 목적은 거기에 있었다. 서당 운영의 경비는 모두 노인이 부담하고 있었고, 병연의 침식도 노인의 집 별채에서 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한진설 노인이 서당의 주인이었다. 서당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구색으로 이웃 마을 아이들까지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 손자만 향시에 붙게 해달라」는 말이 분에 넘치는 주문은 아니었다.
바로 그 손자, 한만기라는 아이가 이 시골의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앞으로 나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병연이 보기에 그것은 공부 중에서도 아주 초보적이고, 아주 쓸모없는 글 외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글의 의미도 외면 그만이고 거기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공부로는 제삿날 지방이나 쓰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지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고 항차 그것을 밑천으로 백성의 위에 군림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도둑의 심보였다.
그러나 병연은 참았다. 떠돌지 않아도 침식이 해결됐고, 탁배기일망정 목이 출출하면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까짓 훈장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건만, 할 때마다 「그래도 이 직업마저 없었다면 세상에 나 같은 거지가 비비고 살 언덕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참고 눌러 앉아 있었다.
한진설 노인의 손자 만기가 소학을 떼고 책거리를 하는 날이었다. 병연이 훈장으로 눌러 앉은 지 일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소학을 떼는 데 일년이 걸렸다면 대학과 논어를 떼어 책거리를 하자면 이 청년의 나이 서른은 넘겨야 할 것이니 그런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기막힌 생각에 술맛을 잃고 있는데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저놈이 살아가는 데는 눈치도 있고, 판단도 기민하여 무슨 일이든 해낼 것 같지만 서책만 잡으면 눈을 내리감고 지지부진하니 아무래도 가망이 없지 않나 싶은데 훈장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병연은 노인의 심중을 짚고 있었다. 스스로의 느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김서방이 몰래 귀띔해 준 바에 의하면 노인은 두어 달 전부터 다른 훈장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고, 이미 후보로 나선 사람도 두 사람이나 된다고 했다. 김서방이 어렵게 입을 열어 열거한 훈장 교체의 이유는 네 가지였다. 첫째, 김삿갓은 글은 잘하나 가르치는 훈장으로서 행실과 자세 모두 모범이 되지 못한다. 둘째,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마실 때마다 가르치는 일을 전폐하여 학동들의 진도가 느리다. 셋째, 훈장 김삿갓은 아이들의 재능을 무시하고 경멸하여 마음속으로 가르칠 의지가 없다. 넷째, 원래 뿌리가 없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므로 자칫하면 풍속을 어지럽힐 염려가 크다. 대충 이런 정도였다. 병연은 승복했다. 내가 노인장이라도 당장 훈장을 바꾸었을 텐데 일년 가까이 참아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병연은 모른 척했다.
『지금은 세상이 무섭게 변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과거가 폐지될 것이고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권세 있는 놈보다는 돈이 있는 놈이 행세하고, 마침내 권세는 돈 밑에 깔리게 될 것이라는 말들도 있습니다. 정감록에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장사를 시키세요. 그럼 잘할 겁니다. 과거는 안 됩니다. 귀한 손자의 평생을 볼모로 잡는 죄악입니다』
『우리 손자가 공부를 포기하면, 그럼 훈장께서는 어떻게 할 셈이시오?』
『내일 떠납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역시 김삿갓이오. 이 인연도 만만치 않을 터이니 글이나 한 수 남기시오』
병연은 노인이 준비한 종이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아무리 취해도 詩를 쓸 때는 글씨를 흘리는 법이 없었다.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 누가 훈장을 좋다고 했던가?
無烟心火自然生(무연심화자연생) 연기도 없이 마음의 불길이 절로 일어나네.
曰天曰地靑春去(왈천왈지청춘거)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 청춘이 가고
云賦云詩白髮成(운부운시백발성) 부니 시니 하다가 백발이 되었구나.
雖誠難聞稱道語(수성난문칭도어) 정성을 다해 가르쳐도 바른 대접받기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잠리이득시비성) 잠시만 자리 떠도 시비가 빗발 같네.
掌中寶玉千金子(장중보옥천금자) 천금 같은 귀한 자식 맡겨 놓고
請囑撻刑施眞情(청촉달형시진정) 종아리 쳐서 가르쳐 달라던 말 그것이 진정인가?
노인은 글을 다 읽고 나더니 병연의 손을 감아쥐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였으나 손은 따뜻했고 힘이 있었다.
『알고 계셨소? 비록 성인이 와도 가르침 받을 그릇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가 어리석었소이다』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글줄이나 읊을 줄 아는 것은 사실이나 훈장으로서는 제격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이유는 머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 떠날 의향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바람이 부는 데로 가야지요. 애당초 태어날 때 생각이 있어 나온 것이 아니었듯이 가는 길 또한 마음에 있겠습니까』
맹산을 떠날 때 병연의 나이 서른이었다. 스물두 살에 강원도 영월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지 벌써 아홉 해째였다. 개울을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젊음은 간데없고 영락없는 노인의 꼴이었다.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고, 갈 곳을 모르니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무작정 흐르는 물도 먼 바다의 힘에 끌려가듯 거지 행각의 병연에게도 할 일은 있었고 갈 곳이 있었다. 물이 바다를 향하여 낮은 곳으로 흐르듯 마침내 청천강 가에 와 있었다.
憲宗(헌종) 6년(丙午, 1840) 4월, 병연은 평안도 안주의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의 百祥樓(백상루) 누각 아래 지팡이를 세워 놓고 뱀처럼 휘어져 산굽이 넘어 사라진 청천강의 물줄기를 좇고 있었다.
淸川江上百祥樓(청천강상백상루) 청천강 백상루에 올라서니
萬景森羅未易收(만경삼라미이수) 아름다운 풍광 쉬이 거두지 못하네.
錦屛影裏飛孤鶩(금병영리비고목) 비단 병풍 같은 산 그림자 속으로 따오기 날고
玉鏡光中點小舟(옥경광중점소주) 거울 같은 물 위에 한 점 작은 배가 떠 있네.
草偃長堤靑一面(초언장제청일면) 긴 강둑에는 풀이 무성하고
天低列峀碧千頭(천저열수벽천두) 산봉우리 치솟아 하늘이 낮아졌네.
不信人間仙境在(불신인간선경재) 세상에 선경이 있다는 말 믿지 않았더니
密城今日見羸州(밀성금일견리주) 오늘 밀성에서 신선 놀던 곳을 보았노라.
글을 지어 놓고 그는 실소했다. 詩라는 것은 아무리 초급한 상황에서도 한가하기 짝이 없는 문자만 나오게 마련이었다. 피가 뚝뚝 돋고 뼈가 시린 현실을 담아 내지 못하고 사흘을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어도 그 절박한 고통마저 풍류가 되고 만다.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서북지방을 찾아온 것이었다.
맹산을 떠날 때 지금까지 쓰던 붓과 벼루를 버리고 새것을 장만했다. 한진설 노인이 『먼 길을 걸을 때는 머리털 하나도 무겁고 귀찮은데 하물며 돌로 만든 벼루이겠느냐』면서 가볍고 작은 벼루를 구해 주었고, 細筆(세필)도 마련했다. 종이는 접어서 미리 서책처럼 묶고 겉장에 콩기름을 먹여 비에 젖어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써 온 詩라는 문장은 종이가 없으면 벽에도 쓰고 기둥에도 휘갈겼다. 그러나 지금부터 기록하려는 이야기는 大河(대하)와 같은 것으로 선후가 분명하고 사실이 명백해야 하므로 기록한 것을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발품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洪景來傳(홍경래전)」을 쓰려고 서북지방을 찾아온 것이었다. 글을 배워 과거를 보지 못하고 장부의 뜻을 펴지 못한다면 끝내 해야 할 일은 일찍이 宮刑(궁형)의 司馬遷(사마천)이 했던 것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 말고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처음에는 할아버지 김익순의 대역죄가 불가함을 밝히고 먼 훗날에라도 선비로서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만 있었다.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혔던 자신의 詩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 과거에 대비하여 공부하는 전국 수만 명의 서생들이 모범 문장으로 달달 외고 또 외는 참고서 「抄集(초집)」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병연은 무덤 속에 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아버지를 하루에도 수천 번 부관참시하는 불효막심을 터럭끝만큼이라도 씻어 내는 길은 스스로 문장으로 역사를 기록하여 김익순의 행실이 비록 겉으로 대역죄이기는 하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역모를 차단하기 위한 고육의 선택이었음을 밝혀 놓고 싶었다. 평가는 후세가 할 것이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해 밝혀 놓는 일뿐이었다.
할아버지 김익순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그때의 일을 상고하다 보니 자연 홍경래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에 병연의 머릿속에서 김익순은 곁가지로 밀려나고 홍경래가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병연은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가 구상한 紀傳(기전)은 홍경래와 서북지방 민초들의 삶과 죽음으로 확대되었다. 금강산에서 함경도를 오가며 유랑하는 동안 늘 서북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때가 왔으므로 그는 청천강에 마음을 씻고 있었다.
그날 밤을 백상루에서 잘까 하다가 해질녘이 되자 싸늘한 밤바람이 뼛속으로 파고들었으므로 병연은 서둘러 누각을 내려와 안주성 밖의 칠불사를 찾았다. 칠불사 주지 無苒(무염) 스님은 일흔에 가까운 노승이었는데 김삿갓의 이름을 듣고 있었다.
『처사가 그 김삿갓이오? 詩를 잘 짓는다는』
『詩를 지을 줄은 압니다만, 무슨 소용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처사의 詩 몇 줄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허나…』
무염은 보리밥 한 그릇을 물에 말아 비우고 포만해진 병연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장을 보니 생각이 어지럽고 情恨(정한)이 가득하니 반드시 몸을 해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근본 하나를 들여다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무상이요, 무명인데 왜 그리 멀리 헤매고 다니시오』
『번뇌가 보리라 했으니 고통이 열반이고 정한이 곧 정각일 텐데 스님께서는 무엇을 더 털어 낼 것이 있어 고려장의 나이에 여전히 칼날을 번득이며 살고 계십니까?』
『자, 자, 절집을 기웃거리며 공양 한 그릇 얻느라 헛소리 몇 마디 챙겼구려. 말해 보시오. 안주에 와서 무엇을 얻었소?』
『보리밥 한 그릇 뱃속에 넣었으니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다만…』
『다만, 뭐요?』
『부질없이 詩나 지어 흘리고 다닌 것은 한 그릇의 밥과 한 잔의 술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글줄을 알고 고금의 도리를 배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빚을 갚기 위해서는 詩로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홍경래전을 써서 다음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병연은 속을 털어놓았다. 나이로 보아 주지 스스로 28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대해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짐작은 적중했다. 주지는 갑자기 승복의 저고리를 벗더니 등짝을 드러냈다.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왼쪽 겨드랑이까지 톱으로 썰었다가 기워 놓은 것 같은 자국이 길게 돋아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화두는 잡히지 않아도 그 사람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나는 당시 나이 마흔을 넘긴 중군으로 두 해 동안 다복동에서 훈련받은 사람인데 상대는 아직 스물도 안 된 애송이었소. 한양의 훈련원 병사는 아닌 듯 평양에서 억지로 끌어 모은 잡병의 냄새가 났소. 나는 난전 속에서 서너 명의 목을 베어 칼바람이 손에 익은 참이었는데 그 젊은 병사가 눈앞에 나타났소.
피차 피할 수 없는 장소에서 딱 마주친 거요. 그 젊은이가 겁을 먹고 피할 생각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내 칼이 그자의 정수리를 쪼개야 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나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그 자리에 눕고 싶은 심정이었소. 전투 중에 노곤하고 손도 꼼짝하기 싫은 순간이 오는데 그 순간이 염라왕이 겨드랑이를 끼는 순간이라고 들어온 터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여 칼자루 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관군 졸개의 겁먹은 눈을 보니 또 맥이 탁 풀리면서 그 자리에 누워 한없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요.
에라, 전투는 어찌됐든 돌아가 좀 쉬어야겠다고 돌아서는데 등짝으로 짐승의 발톱이 찢고 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서늘한 기분이 들면서 쓰러지고 말았소. 고꾸라지면서 문득 돌아보니 나를 벤 젊은 관군 병사가 오히려 겁을 먹고 공포에 젖어 있습디다. 사람을 처음 죽일 때 나타나는 공포였소. 죽은 병사들의 시체 더미 속에서 밤새 혼절해 있다가 때도 아닌 겨울비를 맞고 정신을 차렸지요. 염라왕이 너무 많은 중생을 한꺼번에 끌고 가다가 힘에 부쳐 나를 빠뜨린 모양이지요. 그 이후 출가하여 이 모양으로 살고 있소』
『평서대원수 휘하에 들어 救人義兵(구인의병)으로 자처했던 장졸들 중에서 스님처럼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까?』
『가물에 콩 나듯이 살아남았지만 대역죄로 몰아 구족을 몰살시켰으니 아마 씨도 남지 않았을 것이오. 나처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머리 깎고 숨어 살았거나 멀리 중국이나 삼남으로 도주하여 거지처럼 떠돌겠지요. 어쨌거나 이곳 서북지방은 그 일 이후 魚肉(어육)이 되고 말았소.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래도』
주지 무염 스님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다복동에 가 보면 그때 살아남은 사람이나 도륙을 당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산속이나 강가에 모여 살고 있더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이오? 叛賊(반적) 홍경래의 얘기라면 장계와 고변서가 있는데다, 실록에 자세하게 올라 있을 터이고, 정시와 김익순의 극명하게 엇갈린 처신에 대해서도 이미 수많은 문사들이 글을 지어 한 사람은 천고의 충절로 칭송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만고의 역적으로 패대기치는 글이 차고 넘칠 정도인데 더 무엇을 보태거나 뺄 것이 있다고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오?』
『그 문사들의 글이 그리지 못한 것을 그리려고 합니다. 조정은 선이고 그에 반하는 세력은 악으로 처단하는 글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 그대로 기록해 두려는 것뿐입니다. 판단은 후세에 십 년, 백 년이 아니라 적어도 몇백 년 후의 사람들에게 맡기려는 것입니다. 그때쯤 세상은 변해 있을 테니까요』
『세상은 천 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것이오. 과거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듯이 말이오』
『과거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조심하시오』
주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사는 하되 내색은 하지 마시오. 글을 짓되 서책은 만들지 말고 혹 만들었다 해도 죽기 전에는 내놓지 마시오』
그렇게 일이 시작됐다.
주지 무염은 28년 전 홍경래軍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가 벌어졌던 청천강변의 송림으로 데리고 가서 당시 양군의 포진과 군세, 그리고 시각에 따라 변한 전투의 양상을 소상하게 들려줬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강가로 나갔고, 달이 밝을 때는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다녔다. 마치 전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생생한 증언이었다.
『하루만 빨리 청천강에 도달했더라면』
무염은 탄식을 섞어 말했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겨울비가 청천강의 얼음을 녹여 놓지만 않았더라도 평양까지는 쉽게 들어갔을 터이고, 평양까지 들어갔더라면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을. 마침내 한양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더라면 지금 문장가들이 역도라고 칼질하는 무리들의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올라 있었겠지』
안주에서 반 년을 보냈다. 그동안 병연은 여전히 거지 행각을 하며 바랑에 엽전 한 닢만 들어도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詩를 읊었고, 노래를 하고 춤도 추었다. 때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어쩌다 문장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술도 얻어 마시고 몇 푼의 노자도 얻었다. 노자를 주면 사양하지 않았다.
안주와 주변 고을의 서당이라는 서당은 모두 거칠 것 없는 그의 사랑방이 되었고 크고 작은 암자들은 그의 잠자리가 되었다. 서당 훈장 자리를 두 번이나 제의받았다. 功令詩(공령시)에 神技(신기)를 지닌 김삿갓이 서북에 왔다는 소문이 서당을 중심으로 돌았다. 향시에라도 붙고 보자는 절박한 심정의 서생들과 그 부모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병연이 걸식하는 등 뒤에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고 서 있다가 구걸이 끝나면 제 집으로 모셔다가 다시 상을 차려 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병연은 훈장질만은 사양했다. 다시는 훈장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한자리에 붙박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동잎이 황톳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 병연은 안주에서의 조사를 끝내고 무염이 가르쳐 준 대로 다복동을 찾았다. 청천강의 지류인 대정강의 굽이를 내려다보는 단애를 끼고 산속으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고 뒤로는 높은 산이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 같은 지형이 나타났다. 다복동이었다. 이름은 「복이 많은 고을」이라지만 지지리도 복이 없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홍경래軍의 도총관이자 모든 물자를 제공했던 가산 토호 이희저의 대궐 같았던 저택은 집이 서 있던 자리에 숯덩이들만 발길에 차일 뿐이었다. 방방곡곡에서 장정들을 끌어모았던 금광은 폐쇄되었고 숫제 채광굴의 입구를 무너뜨려 막아 놓았다. 대원수의 군막이 있던 강 가운데의 작은 섬도 잡초뿐이었다. 1000명 가까운 장졸들이 금광의 노동자를 위장하여 살고 있던 마을도 불에 타서 쑥들만 무성했다. 쑥을 헤치고 걷다가 발에 밟히는 것이 있어 내려다보니 해골 바가지였다. 해골의 크기로 보아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관군이 오기 전에 대부분의 식솔들을 정주성으로 피신시켰다고는 하나 미처 따라가지 못했던 사람들과 노인, 어린아이들을 무참하게 도륙하고 불을 질러 태운 흔적이었다.
병연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앉아 들고 온 술병을 기울여 먼저 쑥이 키높이 자라고 있는 마을 터를 향해 몇 번 뿌렸다. 그 다음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모금 마셨다. 술을 마시다가 등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아 몸을 돌리니 사내 둘이 물고기 몇 마리를 망태기에 담아 들고 서 있었다. 어부들은 말없이 병연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병연을 처음 만나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들도 낯선 사람이 차림새로는 거지가 분명한데 얼굴을 보니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워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람 구경 처음 했소?』
병연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뉘시오?』
사내들이 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그네요. 解寃(해원)굿이나 해볼까 하고 왔소만, 귀신들도 이 땅을 떠난 것 같구먼』
『무당이오?』
『무당만 굿을 하라는 법이 어디 있소』
사내들은 굿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는지 병연을 뒷산 계곡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로 데리고 갔다. 여덟 채의 작은 오두막이 소나무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산속에 살면서도 화전조차 제대로 일구지 못하여 사냥이나 하고 산나물과 강물에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는 식으로 짐승처럼 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염이 말한 홍경래 잔당들이 분명했다.
좌장격인 사내 하나가 움막의 거적을 들치고 나오더니 병연을 심문했다.
『이름이 뭐요?』
『김삿갓이오』
사내는 병연의 머리를 덮고 있는 삿갓을 힐끔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삿갓 양반. 어디서 오시오? 여기는 왜 왔소?』
병연은 무염 스님이 이곳을 알려 주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 30년 전의 그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무염 스님의 이름을 듣자 사내는 대번에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랬소. 우리 있는 곳을 찾아 내어 관가에 고변하고 몇 푼의 양곡을 챙기려는 놈들이 가끔 얼씬거리거든요. 나는 宋千植(송천식)이라 하오』
송천식은 나이 마흔 남짓한 건장한 사내였으나 움막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28년 전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동무 둘과 고기를 잡으러 대정강과 청천강 본류가 만나는 하구로 내려갔다가 다복동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돌아서니 관군이 마을을 덮치고 있었다. 그들은 집 안과 마을 길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없애 버렸다. 그런 후에 불을 질렀다.
불은 사흘 낮밤을 타고도 사그러지지 않았는데 관군은 불씨가 완전히 꺼질 때까지 살아남은 무엇이 있는지 샅샅이 뒤져 생명의 흔적을 없앤 후에야 철수했다. 관군이 철수하고 나자 뒷산 숲 속에 숨어 가슴을 쥐어뜯고 있던 노인과 여자 몇 사람, 그리고 송천식처럼 잠시 마을을 떠났다가 뒤늦게 돌아와 더러운 세상에 남겨진 젊은이 몇 사람이 잿더미 위에서 몸부림쳤다. 그들 대부분이 이 잿더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뒷산 계곡에 숨어 살고 있다고 했다. 그중 노인 몇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그때의 청년은 자신처럼 늙어 가고 있으나 고혼들을 달래지 못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선비께서 굿을 할 줄 아신다 했으니 그들의 원혼을 달래어 구천으로 보내 주시오. 그러면 우리도 여길 떠나 거지 노릇을 하든지 일판을 찾아나서든지, 그도 아니면 화적떼를 찾아가 입당하더라도 여길 떠나서 살고 싶소』
『굿을 할 줄 안다고 한 것은 그냥 해본 소리요』
병연은 송천식의 움막에서 송진 기름으로 호롱불을 밝혀 놓고 밤새 글을 지었다. 鎭魂賦(진혼부)였다. 먼저 한문으로 쓰고 다시 언문으로 풀었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문자를 모르니 귀신인들 한문을 알겠는가, 해서였다. 이때처럼 생명을 다 쏟아 부어 글을 지어 본 적이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피를 토하고 살을 태워 그 기운으로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긴 문장이었다. 다 쓰고 나니 희끔한 새벽빛이 솔숲을 적시고 있었다. 그가 붓을 놓자 밤새 옆에서 먹을 갈며 지켜본 송천식이 깊은 한숨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 좋은 세상을 이리 더럽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 오로지 먹물인 줄 알았는데, 글이라는 것이 명부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진혼제는 그날 저녁 해거름에 올렸다. 소반에 다래로 빚은 술을 올려놓고 대정강에서 잡은 물고기 몇 마리와 산토끼 한 마리가 제물로 올랐다. 병연이 대정강에 내려가 몸을 씻고 제문을 읽었다. 처음에는 작게 감추던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서 제문을 다 읽기도 전에 강언덕은 통곡의 바다가 됐다. 높은 곳에 올라가 망을 보는 사람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 놓고 울었다. 밤기운이 돌 때까지 울고 나서야 사람들은 혼이 빠져 버린 물건처럼 흐느적거리며 산속으로 돌아왔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소』
송천식이 다래술이 담긴 그릇을 병연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선비님을 따라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고 심부름을 하리다. 그러면 선비님은 글이나 지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병연은 거절했다.
『이것은 내 길이오. 송서방은 자신의 길을 가시오』
병연은 다복동 산속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그 사이 몇 사람이 산을 내려갔으나 천식은 병연이 머물며 옛날의 다복동을 낱낱이 기록하는 동안 말 그대로 충직하게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병연이 다복동을 떠나 일찍이 정시의 충절 덕분에 서북지방에서는 유일하게 고을의 위상이 격상된 가산으로 향하는 날 그도 함께 움막을 등졌다. 남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병연은 송천식과 가산을 건너다보는 나루에서 헤어졌다.
『이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면서 천식이 절하며 말했다. 병연은 그가 어디선가 남자답게 죽을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산에는 정시 父子(부자)의 충절비가 두 개나 세워져 있었다. 충절비의 비문을 읽어보니 모두 정시 父子의 충절을 김익순의 훼절에 대비하여 찬양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가산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걸식 행각으로 30년 전의 일을 낱낱이 캐내어 기록하자니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디었고, 많은 세월이 길에서 흘렀다.
가산에서 박천으로, 박천에서 길을 동쪽으로 꺾어 태천을 거친 것은 홍경래軍의 부원수 김사용과 모사 우군칙, 김창시, 그리고 선봉장 홍총각과 이제초 등이 자라난 배경과 일가 중 생존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압록강을 바라보는 의주에서는 주로 홍경래의 행각을 수집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지방에서는 알게 모르게 소문이 돌았다. 김삿갓이 홍경래의 잔당을 모아 민심을 부추기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가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선천에 이르렀을 때는 선천 부사가 미리 사람을 풀어 수배해 놓고 있다가 성 안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포박해 갔다.
『그대가 김삿갓인가?』
『그렇소이다』
『뭐하는 사람인가?』
『떠도는 나그네올시다』
『洪賊(홍적)의 족적을 캐고 다닌다는데 사실인가?』
『요행히 소싯적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서북에서는 흉악한 叛徒(반도)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현혹되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대충 덮어 버리고 교훈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글을 아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기에 후세를 위하여 당시를 기록해 두려는 것입니다. 그뿐이올시다』
『그것인가? 지방 서당의 훈장들이 자네를 수상한 인간으로 고변하고 현감들도 조사해 보라고 알려 오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건 그 사람들의 일이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심이 좋을 듯싶소이다』
『하기야 그렇지』
부사는 병연을 방면했다. 조건이 있었다. 선천에 머물지 않고 당장 떠나라는 것이었다. 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행적을 더듬어 볼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선천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南으로 내려와 마침내 정주에 닿았다.
사람들이 게을러서인가, 아니면 무심해서인가. 정주성에는 곳곳에 홍경래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북지방에서 견고하기로 소문난 성벽은 곳곳에 허물어지고 화공으로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고, 성 안의 거리에도 불에 타서 무너진 집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심했다.
병연은 여기서도 일단 서당부터 찾았다. 그래도 말이 통하여 잘 만 하면 며칠 묵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줄 사람은 훈장들밖에 없었다. 정주성 북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서당을 수소문하여 찾아가자 李淵(이연)이라는 훈장이 버선바람으로 마당에 내려섰다. 이연은 중늙은이었는데 예의가 깎아 놓은 듯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병연이 미처 말문을 열기 전에 이연이 해명했다.
『대문장가 김삿갓 선생의 위명이 관서에 자자합니다. 선천에서 이리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정주의 선비들이 한편으로 긴장하고 한편으로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데 어디로 오셨기에 걸음이 이리 더딘지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고 술지게미에 취하다 보니 부지하세월이지요』
『좋지요, 좋아. 나도 처자식만 아니면 훈장 때려치우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바람같이, 구름같이』
서당 안으로 들어가니 여나믄 명의 학동들이 거지 행색의 선비를 힐끔거리며 글을 외던 소리를 짐짓 더 높였다. 훈장 이연이 서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쳤다.
『정주에서 제일 문장가로 盧鎭(노진)이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특히 공령시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 관서 일대에서 과거를 보려는 서생들이 문전에 줄을 섭니다. 이 사람이 지은 詩가 科詩(과시)의 표본으로 서당에서 회자되고 있는데 그중 몇 구절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선비께서 한 번 보시고 그 격을 촌탁해 주십사 하고 기다리던 참입니다. 사양하지 마시고 읽어 봐 주십시오』
병연은 훈장이 펼쳐 놓은 詩를 읽어 보았다.
曰爾世臣金益淳(왈이세신김익순) 대대로 국은을 입어 온 김익순은 듣거라.
鄭公不過鄕大夫(정공불과향대부) 정공은 한갓 고을의 대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家聲壯洞甲族金(가성장동갑족김) 가문은 장동김씨 명문거족이고
名字長安行列淳(명자장안항렬순) 이름도 장안에 소문난 순자 항렬이로다.
將軍桃李聾西落(장군도리농서락) 한나라 장군 이릉은 농서에서 항복하고
烈士功名圖末高(열사공명도말고) 열사의 공명은 (기린각) 그림 가운데 높았네.
한눈에 훑어보고 병연이 물었다.
『이것이 노진이라는 선비의 글입니까?』
『그렇습니다. 명문이지요?』
『자알 지었군요』
갑자기 가슴 밑바닥에서 물컹하는 것이 솟구쳐 올라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붉은 피 한 덩어리가 입에서 쏟아졌다. 피를 보는 순간 병연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한식경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린 병연은 바랑을 찾아 메고 서당을 나섰다. 정주성을 빠져나와 안주로 가는 길에 병연은 바랑 속에서 지난 3년 동안 서북을 돌며 기록해 둔 서책을 꺼내어 잘게 찢었다. 그리고 그것을 청천강 흐르는 물에 띄워 버렸다.●
<다음호 계속>
四月咸關嶺(사월함관령) 사월의 함관령
北靑郡守寒(북청군수한) 북청군수는 추위에 떨고
杜鵑今始發(두견금시발) 진달래는 이제 겨우 피기 시작하니
春亦上山難(춘역상산난) 봄도 힘이 드는가, 산을 오르지 못하네
도망치듯 단천을 떠날 때는 초봄으로 봄 같지 않은 쌀쌀한 날씨였으나 북청을 거쳐 함흥땅에 이르렀을 때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고, 안변땅을 밟았을 때는 가을이 제 먼저 와 있었다. 병연의 발길은 계절보다 느렸다. 어찌하여 다시 안변인가. 이대로 남쪽으로 내려가 가을 금강산, 풍악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눈과 가슴에 담아 두고 싶은 거라고 애써 스스로 변명했으나 억지였다. 원산을 지날 무렵부터 공연히 발길이 빨라지더니 안변도호부가 있는 문내리의 낯익은 주막에 앉자마자 가련의 소식부터 물었다. 주모는 몇 해 전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허리가 더 구부정해졌고, 삼베 천으로 동여맨 머리카락에 서리가 많이 내려 있었다.
『주모, 늙었구랴. 백발이 성성하이. 나 오늘 엽전 몇 냥이 고이에 있다네. 탁배기 좀 걸러 오소』
『돈은 어디서 생겼수?』
주모가 엉덩이를 평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원산에서 어느 미친 놈이 환갑잔치를 한다고 떠들썩하기에 말석에 끼어 詩 한 수를 헌상했지. 아, 그랬는데 이 무지한 놈들이 나를 이태백이보다 더한 詩仙(시선)에다 酒仙(주선)으로 떠받들어 놓고 사흘 동안 술을 퍼먹이고는 떠날 때 행자까지 챙겨 주더만』
『무슨 詩를 지었기에 공짜술에 행자까지 벌었수? 들어보고 나도 삿갓어른에게 공짜술을 대접할지 돈을 받을지 요량할 테니 읊어 보시우』
『들어보게』
병연은 히죽거리며 환갑잔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원산에 닿으니 인심이 어찌나 고약한지 먹을 것은 고사하고 잘 곳조차 없는지라. 關王廟(관왕묘)에서 雲長(운장)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배가 등가죽에 붙어 거리를 지나는데 어느 부잣집에서 환갑잔치를 합디다. 마당에 차일 치고 떡 벌여 놓고 잔치를 해요. 들어갔지. 종놈들이 앞을 막고 乞床(걸상)을 내놓는 것을 발로 차버렸지. 건장한 아들놈 하나가 와서 멱살을 잡기에 「환갑연에 문장도 詩도 없는 이런 상놈의 잔치는 처음이다」 했더니 「詩를 지을 줄 아느냐?」고 묻더군. 「천하의 김삿갓 이름도 모르는 놈들에게 詩를 지어 바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이놈이 저희 일곱 형제끼리 의논을 하더니 회갑 맞은 아비 앞에 나를 데리고 가서 지필묵을 내놓더라고.
그래서 첫 구를 휘갈겼지. 「彼坐老人不似人(피좌노인불사인)이라. 저기 앉은 저 노인 사람 같지 않구나」 했지. 했더니 등 뒤에서 아들놈 하나가 낮은 소리로 「사람 아니면 짐승이라는 말이냐, 이놈 몽둥이로 두들겨 내쫓읍시다」 그래요. 얼른 다음 구를 썼지. 「疑是天上降眞仙(의시천상강진선)이라. 하늘에서 참 신선이 내려온 것 같네」 하고. 했더니 지켜보고 있던 놈들이 「와악」 하고 탄성을 내지르고 야단이 납디다. 말로만 듣던 김삿갓이 정말 시선이라고도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구를 지었소. 「其中七子皆爲盜(기중칠자개위도)라.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라」 했더니, 뒤에서 또 구시렁거리는데 금방 몽둥이가 대갈통에 날아올 것 같더라고. 서둘러 다음 구를 휘갈겼지. 「偸得王桃獻壽筵(투득왕도헌수연)이라. 옥황상제의 천도를 훔쳐다 회갑연에 바쳤구나」 환갑을 맞은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제 옆에 앉히고 술을 권해요. 그것으로 끝이지. 술이 깨고 보니 사흘이 지났습디다. 서둘러 안변땅으로 달려왔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 주모요. 처음 마시는 술이 이 잔이오』
병연은 탁배기 잔을 들어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고 주모를 바라보았다.
『주모, 울고 있소?』
주모는 술 지게미가 말라붙어 있는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울기는, 삿갓 어른이 울고 있지 않수』
『이건 술이 튀었지』
병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를 닦았다.
『말해 보시오. 가련이 소식을 알고 있구먼? 설혹 이승 사람이 아니라 해도 놀라지 않겠소』
주모는 술청 안쪽의 작은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손에 물건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낯익은 銅鏡(동경)이었다. 왈칵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솟구쳐 올랐으나 병연은 애써 눌러 앉혔다.
『이걸 내게 맡겼수다. 그 가련한 인간이. 김삿갓 어른이 행여 이 고을을 지나게 되면 천상 주막을 그냥 지나지는 않을 터, 그때 이 물건을 전해 달라고 내게 맡겼수. 이제 임자를 만났으니 가져가시우. 나는 이것을 장롱 속에 묻어 두고 가슴앓이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
병연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닦지 않아 흐릿한 거울 표면에 늘 속앓이를 하여 찡그리고 있던 가련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떻게 갔소?』
『삿갓 어른이 떠난 후 속병을 앓다가 작년 봄에 갔다우. 무덤도 없수. 태워서 강물에 뿌렸다고들 합디다. 불쌍한 것. 그런데 더 불쌍한 인생은 삿갓 어른이우. 한 가지 물어봅시다』
주모가 정색하고 물었다.
『왜 사시우?』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병연은 술을 마시면서 대답했다.
『술을 마시면 잊을 수 있수? 詩를 쓰면 맺힌 것이 풀리기라도 하우?』
『술을 마시면 잊었던 일이 더 새록하게 생각날 수도 있지. 그러나 대개는 잊어요. 詩를 쓰면 더 맺힐 수도 있지. 그러나 대개는 풀어져요. 한숨처럼 말이오』
『그럼 詩 한 수 써 보시우』
병연은 바랑 속에서 벼루와 붓과 먹을 꺼냈다. 종이는 주모가 가지고 왔다.
一從別後豈堪忘(일종별후기감망) 한 번 헤어졌다고 어찌 그대를 잊으리.
汝骨爲粉我首霜(여골위분아수상) 그대 뼈가 가루 되어 내 머리에 서리가 되었네.
鸞鏡影寒春寂寂(난경영한춘적적) 임자 잃은 거울은 봄이 와도 적적하기만 한데
豊簫音斷月茫茫(풍소음단월망망) 퉁소 소리 끊기니 달빛만 망망하다.
早吟衛北歸薺曲(조음위북귀제곡) 일찍이 북쪽 위나라의 귀제곡을 부르더니
虛負周南采藻章(허부주남채조장) 이제는 남쪽 주나라의 채조장도 부르지 못하네.
舊路無痕難再訪(구로무흔난재방) 예 다니던 길 흔적 없어 다시 오기 어려우니
停車坐愛野花芳(정차좌애야화방) 가던 길 멈추고 앉아 들꽃이나 사랑하리.
병연이 詩를 읽고 뜻을 새겨 주자 주모는 말없이 詩가 적힌 종이를 곱게 접어 귀한 보물처럼 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장롱 속에 넣어 두고 나왔다.
『그걸 뭣에 쓰려고 간직해 두는 거요? 글도 읽을 줄 모르고 詩를 경멸하면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 맞수. 하늘 天(천) 자도 모르우. 詩라는 것을 경멸하는 것도 맞수. 평생을 바쳐 천 편을 지어 봐야 쌀 한 톨 만들어 내지 못하는 허망한 글놀음을 경멸하지 않으면 뭘 경멸하겠수? 하지만 이 詩는 쓸모가 있구먼. 딱 한 군데에』
『그게 어디요?』
『다음달이면 그 불쌍한 것 세상 떠난 지 일년이 된다우. 젯밥 한 술 떠줄 연고가 없으니 탁배기 한 잔에 이 詩라도 차려 놓을 작정이우. 그년은 글줄을 아니 읽고 응감하겠지』
그 다음날, 병연은 남대천 강가에 앉아 있었다. 주모가 마련해 준 호리병을 기울여 청주를 질금질금 몇 번 강물에 뿌렸다. 그리고는 병 아가리에 입을 대고 남은 술을 한꺼번에 마셔 버렸다. 호리병을 강물 위에 던졌다. 첨벙, 물을 튕기면서 병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병연은 발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하마터면 물속으로 뛰어내릴 뻔했다. 가련의 얼굴이 흐르는 물 위에 떠올라 자신을 향해 웃으며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이 강둑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때의 그 강물일까? 아닐 것이다. 모습은 같아도 그때의 물은 아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흘러가면 뒤에서 따라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멀리서 보면 끊이지 않고 유장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때 그 사람은 가고 없다. 돌아오지도 않는다. 어느 마파람에 날리어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 옷섶을 적셔 줄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병연은 벌떡 일어났다.
『오냐, 나도 간다』
어제까지 걷는 것, 흐르는 것은 사는 것이었지만 오늘부터 걷는 것, 흐르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녀가 갔고, 할아버지가 갔고, 아버지 김안근과 형 병하가 젊은 나이에 갔던 그 길을 나도 가는 것일 뿐. 누가 『왜 걷느냐?』고 물으면, 그저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해 주리라.
병연은 서북 방향을 한 번 쳐다보고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늘 그랬듯이 새 걸음은 금강산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금강산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가슴에 불을 지르는 여인과 같았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지를 옭아매는 신비한 힘이 있었고, 가까이 가서 묻히면 한없이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그런 여인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금강산은 더 큰 매력으로 사람을 끌었다. 적어도 김삿갓, 김병연에게 금강산은 마음속에 그리던 여인이었고, 용화세계였고,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금강산이 그리웠고, 금강산에 오기만 하면 편했다.
그러나 금강산의 골짜기마다, 봉우리마다 붙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금강산에 주인이 없는데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중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웬만한 중들은 김삿갓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이 자가 다시 금강산에 나타나면 밥이나 잠자리는커녕 혼을 내어 쫓아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神溪寺(신계사)에서 먼저 그 꼴을 당했다. 금강산 사대 사찰이라고 하나 이름뿐으로 불에 타고 퇴락하여 대웅전을 중심으로 龍船殿(용선전), 說禪堂(설선당)만 현란한 단풍의 색조 속에 그림처럼 파묻혀 있을 뿐 허물어져 가는 인상의 절간인데, 살고 있는 중들의 행태는 고아한 맛이 전혀 없고 자못 거칠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삿갓은 왜 쓰고 다니시오?』
행자의 전갈을 받고 대웅전 뒤뜰의 요사에서 옷섶을 여미며 나온 원주 스님이 물었다.
『길을 다니다 보면 날씨가 좋은 날도 있고 궂은날도 있습니다.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었으니 좋거나 궂거나 가리지 않고 머리 위에 붙어 다닙니다』
『부처님을 아시오?』
『모릅니다』
『난 또, 아는 이가 있어 만나러 온 줄 알았소. 부처님을 모르니 용무도 없을 터인즉 그만 가보시오』
『부처님에게 물어보고 가라시면 가겠습니다』
병연이 대웅전 계단으로 올라가자 원주가 황급하게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처사께서는 김삿갓 맞지요?』
『내 이름까지 아는 스님이 이리 박대하십니까?』
『보면 알 것 아닙니까. 고찰이라고 하나 이름뿐입니다. 그보다 처사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금강산 내에 많은데 하필이면 여기서 머뭇거릴 까닭이 뭡니까?』
『이 거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라면 모를까』
그가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자 원주가 황급하게 팔을 잡았다.
『아직 해가 남았고, 普光庵(보광암)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거기 가시면 詩 잘하기로 금강산은 말할 것 없고 조선 천지에서 제일이라 자부하는 耕雲(경운) 스님이 있습니다. 그 스님이 「김삿갓이라는 자가 금강산 禪風(선풍)을 조롱하고 갔다 하는데 내가 무서워 찾아오지 못하니 가소롭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닙니다』
원주의 말투로 보아 그냥 나그네를 쫓아내려고 꾸며서 하는 말은 아닌 성싶었다. 원주의 말 그대로 보광암은 신계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퇴락한 신계사보다는 암자의 위세가 당당했고, 젊은 대중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채공간에서 나오는 젊은 스님에게 경운 스님을 찾자 『아, 수좌스님 말이지요? 詩를 겨루려 왔습니까』 하고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내 마흔 줄의 나이에 울퉁불퉁한 머리통의 중이 방 안에서 나왔다.
『왜 이제야 오셨소?』
경운은 대뜸 김삿갓을 알아보았고, 병연도 이 중의 범상하지 않은 文氣(문기)를 느꼈다. 차를 따르며 경운이 말했다.
『금강산 내에 처사의 이야기가 자자한데 할 일 없는 중들이 과장하여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오. 처사의 재주가 그저 허명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겠소이다. 내가 먼저 한 句(구)를 부를 테니 對句(대구)를 적으시오. 적지 못하거나 격이 떨어지면 당신 이빨을 하나 뽑겠소이다.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처사의 재주가 나를 능가하거나 대등하면 이 암자에서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겠소이다』
『이빨을 뽑아요?』
『그럼 몸속의 다른 뼈다귀를 추려 낼까요?』
『나는 뭐 해골 바가지를 들어낸다 해도 좋습니다만 해골 바가지는 들어내기 어려울 테니 이빨로 하지요. 내 이빨을 모두 뽑아 가도 좋소』
지필묵이 준비되었다. 나이 지긋한 중 한 사람과 젊은 중 한 사람이 방 안에 들어와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젊은 중은 병연이 질 경우 이빨을 뽑기 위해 집게를 들고 있었다. 경운이 먼저 한 句를 적어 내려갔다.
「朝登立石雲生足(조등입석운생족) 아침에 입석대에 오르니 구름이 발 밑에서 일고」
병연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對句를 적었다.
「暮飮黃泉月掛脣(모음황천월괘순) 저녁에 황천의 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렸도다」
경운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潤松南臥知北風(윤송남와지북풍) 소나무가 남쪽으로 누우니 북풍을 알겠고」
병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었다.
「軒竹東傾覺日西(헌죽동경각일서) 대나무 그림자 동쪽으로 기우니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줄 알겠도다」
경운이 붓을 멈추고 병연을 바라보았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을 감추지 않았다. 병연도 마찬가지였다. 중의 詩句(시구)가 워낙 절묘해서 자신의 對句가 절로 나오는 듯했다. 장단이 좋으면 절로 춤이 나오듯이. 금강산의 절경을 소재로 세 번을 더 문답한 후 경운은 작심한 듯 다음 句를 내놓았다.
「影浸綠水衣無濕(영침녹수의무습) 그림자가 물에 잠겼으나 옷이 젖지 않고」
자신의 詩句가 스스로 절묘하다 생각했는지 경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병연의 對句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연이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對句를 적어 내려갔다.
「夢踏靑山脚不苦(몽답청산각불고) 꿈에 청산을 거닐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네」
경운이 병연을 바라보았다. 오랜 지기를 만난 눈빛이었다. 병연도 이제껏 승속 간에 이런 재주를 지닌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었다. 한양의 문사들은 고답적이어서 옛 시인들을 모방하기에도 힘이 부쳐 자신의 詩를 지을 엄두조차 못 내는 위인들이었다. 자신들이 선인의 詩句를 모방하는 데 평생을 소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아는 인물도 없었다. 그랬는데 금강산에서 마침내 詩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빨도, 해골 바가지도 모두 잊고 흥에 겨워 몰입했다. 일곱 구절을 더 읊은 다음 경운은 大尾(대미)를 그릴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가 희고」
금강산의 겨울 풍광으로 옮겨 가자 병연은 그 풍경의 내면을 드러냈다.
「山深夜深客愁深(산심야심객수심) 산은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시름도 깊더라」
경운이 붓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두 중이 넋을 잃고 있었다.
『우리가 이런 詩를 지었소?』
한참만에 경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금강산이 지었지요』
병연이 대답하자 경운은 무릎을 쳤다.
『맞소. 금강산이 이 詩를 지었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닐 거요. 佛緣(불연)에 이런 고사가 있소. 六祖(육조)가 어느 법회에 참석해 보니 바람에 깃발이 날리는 것을 보고 한 중이 「깃발이 날린다」고 하자, 다른 한 중이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지라 육조가 나서서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날리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뿐」이라 했다고 합니다. 오늘 금강산이 詩 짓는 경지를 알았다면 육조대사도 움직이는 것은 금강일 뿐 마음은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닌 줄 알았을 텐데, 애석하고 애석한 일입니다. 자, 그러니 곡차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겠소?』
곡차 마시기를 시작하자 사흘 낮밤 동안 계속했다. 이틀째 되는 날에는 산중 통문을 들은 법기 스님이 술 항아리를 안고 달려와 통음대작은 계속됐다. 금강산에서 보낸 세월 중 최고의 날들이었다. 많은 詩를 지었다. 경운과 법기 두 스님의 덕분으로 산중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염려는 놓게 되었으나 다른 사암들은 달랐다. 어디를 가든 냉랭한 거절이었고 거지 취급이었다. 그럴 때는 특유의 비아냥으로 詩 한 수를 던져 놓고 나왔다. 지난날의 분노와 비아냥 대신 연민을 문자에 담아 내놓은 것들이었다. 가련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생사의 끈을 놓아 버리자 詩도 저절로 생각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억지로 짜내는 詩는 없어지고 저 아득한 세월이나 공간의 어느 곳에서 떠돌던 언어들이 절로 조합되어 나오는 것처럼 운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병연은 더 자주 술을 마셨다. 마셨다 하면 기절하여 깨어나지 못할 때까지 마셨다. 돈이 없어 술을 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탈일 뿐 술만 보았다 하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금강산에는 봉우리도 많았고, 골짜기도 많았고 절도 암자도 많았다. 덩달아 중도 많았고, 도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 많았다. 어느 날 밤 법기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병연은 문득 깨달았다. 속인인 자신보다 출가 승려인 법기가 더 술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노장 회해의 열반 이후 안양암에는 열반한 회해 대사의 가피를 입으려는 시주가 끝이 없었다. 浮屠(부도)와 塔婆(탑파)가 세워졌고, 가람의 堂宇(당우)도 중창되었다. 법기는 저절로 회해 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상좌로 큰스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낮에는 큰스님이었으나 밤만 되면 술을 마셨고, 대중방이나 법당에서는 청정 비구였으나 돌아서서 지대방이나 요사로 들어오면 고주망태로 얼어 있었다. 암자 뒤의 대나무 숲 속에는 온갖 산열매로 빚은 술들이 항아리마다 넘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법기가 마른 입술을 술로 축이면서 시비를 걸었다.
『그만하면 알 만큼 알았을 텐데 무엇이 부족해서 금강산을 기웃거리는가, 거지 양반아. 그만하면 알 만큼 알았을 텐데 무엇이 부족해서 암자를 기웃거리는가, 거지 양반아』
『내일 떠나려 하네』
『어디로?』
『모르지』
다음날 병연은 금강산을 떠났다. 늦은 봄이었다. 금강산에서 나와 철령을 넘어서자 비로소 봄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다. 금강산에 머물 때는 금강산 밖의 세상이 안개 속처럼 흐리고 어두워 보였는데 금강산 밖에 나와서 돌아보니 금강산 속이 몽환인 양 흐릿하고 감옥처럼 어두웠다.
배고픔도 추위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전에는 몇 끼를 굶어 참기 어려우면 지나던 길 옆의 밭에서 무를 뽑아 먹기도 했고, 여린 채소 잎을 아무거나 따서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몇 끼가 아니라 며칠쯤은 참을 수 있었다. 밥 한 끼와 하룻밤의 잠자리를 구걸하다가 거절당하거나 내쫓기면 말없이 돌아섰다.
그냥 밥을 구걸하기보다 먼저 무엇인가 주어야겠기에 때로는 소리도 하고 때로는 춤도 추었다.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둘러싸면 어른들까지 합세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뭇매를 맞으면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에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
안변 땅을 멀리 남쪽으로 돌아 문천, 고원을 지나고 孟山(맹산)의 龍德(용덕)에 이르렀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마을에서 떨어진 후미진 강에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었다. 병연도 물에 몸을 담갔다. 새까맣게 먼지가 앉은 삿갓도 씻고 옷도 빨아 땀 냄새를 지웠다. 낯선 사람을 보고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멱을 감던 아이들이 다가왔다.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이냐?』
열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에게 물었다.
『馬灘江(마탄강)이라고 해요』
『마탄강에 말은 어디 있느냐? 이 강은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말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요, 흘러서 대동강으로 간다고 해요. 그 다음에는 바다로 가겠지요』
『너는 바다를 보았느냐?』
아이는 고개를 젓더니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로 가버렸다.
그날 저녁 옷을 말려 입고 마을로 들어간 병연은 먼저 서당을 찾았다. 서당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전에 院(원)으로 쓰다가 폐쇄한 후 마방지기가 살던 집을 서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서당 안에 들어간 병연은 조금 놀랐다. 저녁 공부를 위해 모여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낮에 멱을 감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병연을 보고도 알은 척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놈들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훈장 어른은 어디 계시냐?』
그 말에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놈이 없었다. 대신 방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사내 두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병연의 팔을 비틀어 일으켜 세웠다.
『이놈이냐? 닭을 훔쳐 가서 강가에서 삶아 먹은 놈이?』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들은 병연을 끌고 나가 마을 가운데의 큰 기와집 마당으로 데리고 갔다.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휘영청 달이 밝아 대낮처럼 잘 보였으나 짐짓 마당 구석에 장작으로 화톳불도 피워 놓았다. 집의 대청 바로 앞에 이 집의 주인인 듯한 노인이 큰 상을 펴놓고 그 위에 위엄을 부리며 앉아 있었다. 병연을 그 노인의 앞에 꿇어앉혔다.
『어디서 온 누구인고?』
노인이 짐짓 목청을 돋우며 물었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죄인 다루듯 무례하게 대접하는 노인장은 뉘시며 이 마을은 대체 어느 오랑캐의 동네입니까?』
『누구인지는 모르나 너의 패악한 행실은 알고 있느니라. 너는 오늘 낮에 이 마을 김서방네 집에 몰래 들어가 닭을 잡아 강가로 가서 삶아 먹었다』
병연은 그냥 아니라고 우겨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좋소. 누가 이 사실을 고해 바쳤소?』
『닭을 잃은 김서방네와 서당 아이들이 두 눈으로 보았느니라』
『먼저 김서방을 데리고 오시오. 그리고 서당 아이들도 데리고 오시오』
『데리고 오너라』
병연을 끌고 왔던 사내 둘이 나가더니 한참 만에 김서방과 서당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김서방이라는 자는 서른두어 살 돼 보이는 농부였다.
『김서방은 말해 봐라. 너희집 수탉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이 언제더냐?』
김서방이 쭈볏거리며 말했다.
『며칠 전에 소인의 딸년을 치우는 잔치를 벌였습지요』
『그거야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고. 닭 이야기만 하라니까』
『잔치에 왔던 일가붙이 장년들이 닭장을 들여다보면서 유난히 살 찐 그놈의 수탉에 눈독을 들였거든요. 소인은 그것만은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지켰습지요. 하지만 바로 오늘 아침에 나가 보니 그 수탉이 없어졌습니다요』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하느냐?』
『당장 일가붙이 놈들에게 닦달을 했습지요. 한데 한 놈도 서리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둑의 짓입지요』
『그 사실을 훈장에게 알렸느냐?』
『아닙니다. 훈장 어른께서 「뭐 잃어버린 것이 없느냐」 물으시기에 사실대로 고해 올렸습니다』
『알았다. 다음. 서당 학동들 앞으로 나오너라』
아이들이 우루루 앞으로 나와 섰다. 노인은 그중에 좀 똑똑해 보이는 아이를 지목하여 물었다. 낮에 병연이 강의 이름을 물어본 그 아이였다.
『저 사람이 강가에서 닭을 삶아 먹는 것을 보았느냐?』
『저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뭣이냐?』
『훈장 어른께서 「틀림없이 저 사람이 닭을 삶아 먹은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훈장님께서 허튼 말씀을 하실 까닭이 없으니 저 사람이 삶아 먹은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은 담뱃대를 힘들게 빨았다. 담뱃대 꼭지에서 빨간 불빛이 살아나자 노인의 입에서 연기 몇 모금이 솟아나와 여름밤의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훈장을 모시고 오게』
사내 둘이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휘둘러 본 다음 말했다.
『보이지 않습니다. 서당에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돌아온 사내들은 서당에서 훈장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잡아 와. 그자가 도둑이야. 도둑이 아니라면 무슨 함정을 파서 억울한 사람을 빠뜨리려는 흉계야. 그건 그렇고 당신은 누구요?』
『저는 이름은 있으나 쓸모 없어 잊은 지 오래됐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김삿갓이라고 부릅니다』
『글을 잘 짓는다는 그 김삿갓 말이오?』
『글을 짓기는 합니다만, 잘 짓는지 어떤지는 제 입으로 말하기 염치 없습니다. 그저 얻어먹으며 다니는 거지라는 것이 옳겠지요』
노인은 김서방에게 말했다.
『일가붙이들에게 말하게. 내일 아침까지 닭 잡아 먹은 것을 실토하지 않으면 여기 억울한 사람 하나가 관가로 잡혀 갈 것이고, 그의 죄를 밝히는 동안 틀림없이 진짜 닭 잡아 먹은 놈이 밝혀져 물고를 당할 테니 미련하게 그때까지 발뺌하고 버티지 말고 당장 실토하라고. 친척집 잔치에 와서 닭 서리 하는 것쯤 무어가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그 죄를 무고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면 마침내 그 사람이 물고를 당한단 말일세』
『하지만 훈장 어른이 왜 그런 짓을?』
다른 노인 한 사람이 나서며 말했다. 주인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자가 겁을 먹은 거야. 김삿갓이라는 대문장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무지가 탄로날까 봐 겁을 먹고 미리 함정을 판 것이야』
그날 밤 노인의 집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김삿갓이라는 대문장가에게 잠시 누명을 씌워 박대한 것을 사과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김서방이 기르던 닭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또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술이 있는 집에서는 술을 가져왔고, 나물이 있는 집에서는 나물을 가져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삿갓 양반, 달리 대책이 없소이다』
주인 노인이 병연에게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우리 아이들 말이외다. 훈장을 잃지 않았소? 삿갓 양반이 이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훈장이 좀 모자라기는 하나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살았을 것 아니오? 한데 삿갓 양반 온다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듣고 지레 겁을 먹어 못된 짓을 하다가 스스로 달아났으니 인생이 가엾기는 하나 잘된 일이오. 그렇지 않아도 그 훈장이 못마땅하던 참이니 말이오. 그러니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을 훈도해 주시오』
갈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으니 서둘러 갈 필요가 없었다. 아니, 내심으로는 가능하다면 뒤로 미루어 이승에서의 행로가 끝날 즈음에 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叛軍(반군)에게 투항했던 곳, 叛軍의 수괴인 홍경래가 장정들을 모아 훈련시키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목숨을 걸었던 다복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부군과 맞서 장렬하게 죽어 갔던 정주성… 그 서북지방의 주막집 골방이나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어느 정자에서 술 한 잔 손에 잡고 이 고달픈 나그네길을 마감하고 싶었다. 나그네길의 원인을 만들어 주었던 그곳에서 생을 마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때를 뒤로 미루고 싶었다. 병연은 노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학동은 용덕 마을에서 일곱 명, 이웃에 있는 다섯 개 마을에서도 마을마다 한 명씩 배우러 오는 아이들이 있어 모두 열 두 명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韓振卨(한진설)로 젊어서부터 향시에 도전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이 지방 최고의 토호였고, 아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고 똑똑한 열다섯 살의 韓滿基(한만기)는 노인의 손자였다.
『썩어빠진 과거지만 그래도 급제를 해야 양반 소리를 듣는 게 아니겠소. 또 썩어빠진 것이 양반이지만 그나마 양반도 아니면 인간 구실로 살기 어려운 게 이놈의 세상이오. 우리 손자놈 턱걸이라도 향시에 급제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오. 내 뭐든 다 해 드리리다』
노인이 말했다. 조선 땅 어딜 가나 언제나 듣는 말이었다. 과거는 썩었다. 입 가진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붙어야겠다. 눈 뜬 놈은 모두 같은 소리를 했고, 같은 공부를 했다. 그러면 과거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은 존경받아야 마땅한데 사실이 그런가? 아니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지 간섭하지 마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아이들을 종아리 때리며 사정없이 훈계할 터이니 혹시 삼대독자라 하여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암요. 훈육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전임 훈장은 마음이 약해서 부모들의 눈치를 살폈지요.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맡아 보겠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두 가지 조건을 어길 때는 그 다음날로 떠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노인은 참을성이 있었다. 안목이 넓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병연은 「이런 사람들이라면…」 하고 생각했다. 오래 눌러 살면서 정을 붙여도 무방하지 않겠나. 그러나 아니었다.
열두 명의 아이들 중 절반은 이제 천자문을 외는 수준이었고, 나머지 중에서 다섯은 동몽선습을, 제일 윗길인 한만기만 소학에 들어가 있었다. 병연은 천자문을 외는 놈들에게는 사정없이 매를 들었다. 배운 것을 외지 못하거나 뜻을 모르면 종아리를 쳤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더 엄한 공부를 시켰다. 앵무새처럼 틀에 박힌 풀이만 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내지 못하면 벌을 내렸다. 벌은 역시 종아리 때리기였다. 며칠 사이에 아이들마다 종아리에 시퍼런 뱀 문양이 감겼다.
병연이 훈장 노릇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던 날 한 아이가 서당을 그만두었다. 보름이 되자 다섯 놈이 공부를 포기했다. 그중에는 삼대독자가 하나, 이대독자가 또 하나 있었는데 소문에 듣기로는 이들 부모들은 귀한 자식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며칠 밤낮을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한 달이 되던 날 참을성 많은 한진설 노인이 학동들이 없는 시간을 틈타서 서당을 찾아왔다.
『훈장 어른의 노고를 어떻게 치하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너무 기름져서 느끼하다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말이 짐작했던 대로였다.
『이전의 훈장은 너무 마음씨가 여리고 성질이 순해서 아이들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는 바람에 훈육이 되지 못했지요. 한데 삿갓 훈장께서 오신 다음에는 그런 걱정은 없어 시름을 놓았는데 일부 학동들이 옛날의 훈습을 버리지 못하고, 그 부모들도 귀한 자식 매 맞는 일만 가슴이 아파 서당 보기를 지옥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저들 부모나 아이들도 잘못되었지만 훈장께서도 채찍을 조금만 누그러뜨려 먼저 아이들을 서당에 발붙이게 해놓고 점차적으로 가편하시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혹여나 간섭하는 것이라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노인장께서는 저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적어도 향시의 말석에나마 급제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것을 목표로 아이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맞습니까?』
『그랬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제사 때 紙榜(지방)이나 쓰고 식솔들의 성명 함자나 읽을 줄 아는 것이 목표라면 이전 훈장이 그 정도는 가르쳐 놓았으니 더 배울 것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목표가 과거에 있고, 급제하여 반열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저 아이들 중 한 놈도 그런 그릇이 없습니다. 다만 노인장의 손자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싹이 조금 보입니다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학을 읽어 봐야 바탕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지금 떨어져 나간 아이들 여섯 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서당의 숫자만 채울 뿐이니 공연히 세월 축내지 말고 농사일이나 시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더 가혹하게 채찍질할 것이고, 재목이 안 되면 쫓아 낼 것입니다』
『옳아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일어서면서 한마디 보탰다.
『하늘이 무너져도 훈장을 돕겠소. 그리고 밀어 주겠소. 우리 손자 놈 하나라도 향시에 붙게 해주시오』
노인의 목적은 거기에 있었다. 서당 운영의 경비는 모두 노인이 부담하고 있었고, 병연의 침식도 노인의 집 별채에서 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한진설 노인이 서당의 주인이었다. 서당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구색으로 이웃 마을 아이들까지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 손자만 향시에 붙게 해달라」는 말이 분에 넘치는 주문은 아니었다.
바로 그 손자, 한만기라는 아이가 이 시골의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앞으로 나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병연이 보기에 그것은 공부 중에서도 아주 초보적이고, 아주 쓸모없는 글 외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글의 의미도 외면 그만이고 거기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공부로는 제삿날 지방이나 쓰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지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고 항차 그것을 밑천으로 백성의 위에 군림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도둑의 심보였다.
그러나 병연은 참았다. 떠돌지 않아도 침식이 해결됐고, 탁배기일망정 목이 출출하면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까짓 훈장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건만, 할 때마다 「그래도 이 직업마저 없었다면 세상에 나 같은 거지가 비비고 살 언덕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참고 눌러 앉아 있었다.
한진설 노인의 손자 만기가 소학을 떼고 책거리를 하는 날이었다. 병연이 훈장으로 눌러 앉은 지 일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소학을 떼는 데 일년이 걸렸다면 대학과 논어를 떼어 책거리를 하자면 이 청년의 나이 서른은 넘겨야 할 것이니 그런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기막힌 생각에 술맛을 잃고 있는데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저놈이 살아가는 데는 눈치도 있고, 판단도 기민하여 무슨 일이든 해낼 것 같지만 서책만 잡으면 눈을 내리감고 지지부진하니 아무래도 가망이 없지 않나 싶은데 훈장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병연은 노인의 심중을 짚고 있었다. 스스로의 느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김서방이 몰래 귀띔해 준 바에 의하면 노인은 두어 달 전부터 다른 훈장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고, 이미 후보로 나선 사람도 두 사람이나 된다고 했다. 김서방이 어렵게 입을 열어 열거한 훈장 교체의 이유는 네 가지였다. 첫째, 김삿갓은 글은 잘하나 가르치는 훈장으로서 행실과 자세 모두 모범이 되지 못한다. 둘째,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마실 때마다 가르치는 일을 전폐하여 학동들의 진도가 느리다. 셋째, 훈장 김삿갓은 아이들의 재능을 무시하고 경멸하여 마음속으로 가르칠 의지가 없다. 넷째, 원래 뿌리가 없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므로 자칫하면 풍속을 어지럽힐 염려가 크다. 대충 이런 정도였다. 병연은 승복했다. 내가 노인장이라도 당장 훈장을 바꾸었을 텐데 일년 가까이 참아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병연은 모른 척했다.
『지금은 세상이 무섭게 변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과거가 폐지될 것이고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권세 있는 놈보다는 돈이 있는 놈이 행세하고, 마침내 권세는 돈 밑에 깔리게 될 것이라는 말들도 있습니다. 정감록에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장사를 시키세요. 그럼 잘할 겁니다. 과거는 안 됩니다. 귀한 손자의 평생을 볼모로 잡는 죄악입니다』
『우리 손자가 공부를 포기하면, 그럼 훈장께서는 어떻게 할 셈이시오?』
『내일 떠납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역시 김삿갓이오. 이 인연도 만만치 않을 터이니 글이나 한 수 남기시오』
병연은 노인이 준비한 종이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아무리 취해도 詩를 쓸 때는 글씨를 흘리는 법이 없었다.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 누가 훈장을 좋다고 했던가?
無烟心火自然生(무연심화자연생) 연기도 없이 마음의 불길이 절로 일어나네.
曰天曰地靑春去(왈천왈지청춘거)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 청춘이 가고
云賦云詩白髮成(운부운시백발성) 부니 시니 하다가 백발이 되었구나.
雖誠難聞稱道語(수성난문칭도어) 정성을 다해 가르쳐도 바른 대접받기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잠리이득시비성) 잠시만 자리 떠도 시비가 빗발 같네.
掌中寶玉千金子(장중보옥천금자) 천금 같은 귀한 자식 맡겨 놓고
請囑撻刑施眞情(청촉달형시진정) 종아리 쳐서 가르쳐 달라던 말 그것이 진정인가?
노인은 글을 다 읽고 나더니 병연의 손을 감아쥐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였으나 손은 따뜻했고 힘이 있었다.
『알고 계셨소? 비록 성인이 와도 가르침 받을 그릇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가 어리석었소이다』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글줄이나 읊을 줄 아는 것은 사실이나 훈장으로서는 제격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이유는 머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 떠날 의향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바람이 부는 데로 가야지요. 애당초 태어날 때 생각이 있어 나온 것이 아니었듯이 가는 길 또한 마음에 있겠습니까』
맹산을 떠날 때 병연의 나이 서른이었다. 스물두 살에 강원도 영월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지 벌써 아홉 해째였다. 개울을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젊음은 간데없고 영락없는 노인의 꼴이었다.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고, 갈 곳을 모르니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무작정 흐르는 물도 먼 바다의 힘에 끌려가듯 거지 행각의 병연에게도 할 일은 있었고 갈 곳이 있었다. 물이 바다를 향하여 낮은 곳으로 흐르듯 마침내 청천강 가에 와 있었다.
憲宗(헌종) 6년(丙午, 1840) 4월, 병연은 평안도 안주의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의 百祥樓(백상루) 누각 아래 지팡이를 세워 놓고 뱀처럼 휘어져 산굽이 넘어 사라진 청천강의 물줄기를 좇고 있었다.
淸川江上百祥樓(청천강상백상루) 청천강 백상루에 올라서니
萬景森羅未易收(만경삼라미이수) 아름다운 풍광 쉬이 거두지 못하네.
錦屛影裏飛孤鶩(금병영리비고목) 비단 병풍 같은 산 그림자 속으로 따오기 날고
玉鏡光中點小舟(옥경광중점소주) 거울 같은 물 위에 한 점 작은 배가 떠 있네.
草偃長堤靑一面(초언장제청일면) 긴 강둑에는 풀이 무성하고
天低列峀碧千頭(천저열수벽천두) 산봉우리 치솟아 하늘이 낮아졌네.
不信人間仙境在(불신인간선경재) 세상에 선경이 있다는 말 믿지 않았더니
密城今日見羸州(밀성금일견리주) 오늘 밀성에서 신선 놀던 곳을 보았노라.
글을 지어 놓고 그는 실소했다. 詩라는 것은 아무리 초급한 상황에서도 한가하기 짝이 없는 문자만 나오게 마련이었다. 피가 뚝뚝 돋고 뼈가 시린 현실을 담아 내지 못하고 사흘을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어도 그 절박한 고통마저 풍류가 되고 만다.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서북지방을 찾아온 것이었다.
맹산을 떠날 때 지금까지 쓰던 붓과 벼루를 버리고 새것을 장만했다. 한진설 노인이 『먼 길을 걸을 때는 머리털 하나도 무겁고 귀찮은데 하물며 돌로 만든 벼루이겠느냐』면서 가볍고 작은 벼루를 구해 주었고, 細筆(세필)도 마련했다. 종이는 접어서 미리 서책처럼 묶고 겉장에 콩기름을 먹여 비에 젖어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써 온 詩라는 문장은 종이가 없으면 벽에도 쓰고 기둥에도 휘갈겼다. 그러나 지금부터 기록하려는 이야기는 大河(대하)와 같은 것으로 선후가 분명하고 사실이 명백해야 하므로 기록한 것을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발품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洪景來傳(홍경래전)」을 쓰려고 서북지방을 찾아온 것이었다. 글을 배워 과거를 보지 못하고 장부의 뜻을 펴지 못한다면 끝내 해야 할 일은 일찍이 宮刑(궁형)의 司馬遷(사마천)이 했던 것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 말고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처음에는 할아버지 김익순의 대역죄가 불가함을 밝히고 먼 훗날에라도 선비로서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만 있었다.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혔던 자신의 詩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 과거에 대비하여 공부하는 전국 수만 명의 서생들이 모범 문장으로 달달 외고 또 외는 참고서 「抄集(초집)」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병연은 무덤 속에 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아버지를 하루에도 수천 번 부관참시하는 불효막심을 터럭끝만큼이라도 씻어 내는 길은 스스로 문장으로 역사를 기록하여 김익순의 행실이 비록 겉으로 대역죄이기는 하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역모를 차단하기 위한 고육의 선택이었음을 밝혀 놓고 싶었다. 평가는 후세가 할 것이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해 밝혀 놓는 일뿐이었다.
할아버지 김익순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그때의 일을 상고하다 보니 자연 홍경래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에 병연의 머릿속에서 김익순은 곁가지로 밀려나고 홍경래가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병연은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가 구상한 紀傳(기전)은 홍경래와 서북지방 민초들의 삶과 죽음으로 확대되었다. 금강산에서 함경도를 오가며 유랑하는 동안 늘 서북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때가 왔으므로 그는 청천강에 마음을 씻고 있었다.
그날 밤을 백상루에서 잘까 하다가 해질녘이 되자 싸늘한 밤바람이 뼛속으로 파고들었으므로 병연은 서둘러 누각을 내려와 안주성 밖의 칠불사를 찾았다. 칠불사 주지 無苒(무염) 스님은 일흔에 가까운 노승이었는데 김삿갓의 이름을 듣고 있었다.
『처사가 그 김삿갓이오? 詩를 잘 짓는다는』
『詩를 지을 줄은 압니다만, 무슨 소용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처사의 詩 몇 줄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허나…』
무염은 보리밥 한 그릇을 물에 말아 비우고 포만해진 병연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장을 보니 생각이 어지럽고 情恨(정한)이 가득하니 반드시 몸을 해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근본 하나를 들여다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무상이요, 무명인데 왜 그리 멀리 헤매고 다니시오』
『번뇌가 보리라 했으니 고통이 열반이고 정한이 곧 정각일 텐데 스님께서는 무엇을 더 털어 낼 것이 있어 고려장의 나이에 여전히 칼날을 번득이며 살고 계십니까?』
『자, 자, 절집을 기웃거리며 공양 한 그릇 얻느라 헛소리 몇 마디 챙겼구려. 말해 보시오. 안주에 와서 무엇을 얻었소?』
『보리밥 한 그릇 뱃속에 넣었으니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다만…』
『다만, 뭐요?』
『부질없이 詩나 지어 흘리고 다닌 것은 한 그릇의 밥과 한 잔의 술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글줄을 알고 고금의 도리를 배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빚을 갚기 위해서는 詩로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홍경래전을 써서 다음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병연은 속을 털어놓았다. 나이로 보아 주지 스스로 28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대해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짐작은 적중했다. 주지는 갑자기 승복의 저고리를 벗더니 등짝을 드러냈다.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왼쪽 겨드랑이까지 톱으로 썰었다가 기워 놓은 것 같은 자국이 길게 돋아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화두는 잡히지 않아도 그 사람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나는 당시 나이 마흔을 넘긴 중군으로 두 해 동안 다복동에서 훈련받은 사람인데 상대는 아직 스물도 안 된 애송이었소. 한양의 훈련원 병사는 아닌 듯 평양에서 억지로 끌어 모은 잡병의 냄새가 났소. 나는 난전 속에서 서너 명의 목을 베어 칼바람이 손에 익은 참이었는데 그 젊은 병사가 눈앞에 나타났소.
피차 피할 수 없는 장소에서 딱 마주친 거요. 그 젊은이가 겁을 먹고 피할 생각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내 칼이 그자의 정수리를 쪼개야 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나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그 자리에 눕고 싶은 심정이었소. 전투 중에 노곤하고 손도 꼼짝하기 싫은 순간이 오는데 그 순간이 염라왕이 겨드랑이를 끼는 순간이라고 들어온 터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여 칼자루 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관군 졸개의 겁먹은 눈을 보니 또 맥이 탁 풀리면서 그 자리에 누워 한없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요.
에라, 전투는 어찌됐든 돌아가 좀 쉬어야겠다고 돌아서는데 등짝으로 짐승의 발톱이 찢고 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서늘한 기분이 들면서 쓰러지고 말았소. 고꾸라지면서 문득 돌아보니 나를 벤 젊은 관군 병사가 오히려 겁을 먹고 공포에 젖어 있습디다. 사람을 처음 죽일 때 나타나는 공포였소. 죽은 병사들의 시체 더미 속에서 밤새 혼절해 있다가 때도 아닌 겨울비를 맞고 정신을 차렸지요. 염라왕이 너무 많은 중생을 한꺼번에 끌고 가다가 힘에 부쳐 나를 빠뜨린 모양이지요. 그 이후 출가하여 이 모양으로 살고 있소』
『평서대원수 휘하에 들어 救人義兵(구인의병)으로 자처했던 장졸들 중에서 스님처럼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까?』
『가물에 콩 나듯이 살아남았지만 대역죄로 몰아 구족을 몰살시켰으니 아마 씨도 남지 않았을 것이오. 나처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머리 깎고 숨어 살았거나 멀리 중국이나 삼남으로 도주하여 거지처럼 떠돌겠지요. 어쨌거나 이곳 서북지방은 그 일 이후 魚肉(어육)이 되고 말았소.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래도』
주지 무염 스님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다복동에 가 보면 그때 살아남은 사람이나 도륙을 당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산속이나 강가에 모여 살고 있더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이오? 叛賊(반적) 홍경래의 얘기라면 장계와 고변서가 있는데다, 실록에 자세하게 올라 있을 터이고, 정시와 김익순의 극명하게 엇갈린 처신에 대해서도 이미 수많은 문사들이 글을 지어 한 사람은 천고의 충절로 칭송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만고의 역적으로 패대기치는 글이 차고 넘칠 정도인데 더 무엇을 보태거나 뺄 것이 있다고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오?』
『그 문사들의 글이 그리지 못한 것을 그리려고 합니다. 조정은 선이고 그에 반하는 세력은 악으로 처단하는 글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 그대로 기록해 두려는 것뿐입니다. 판단은 후세에 십 년, 백 년이 아니라 적어도 몇백 년 후의 사람들에게 맡기려는 것입니다. 그때쯤 세상은 변해 있을 테니까요』
『세상은 천 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것이오. 과거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듯이 말이오』
『과거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조심하시오』
주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사는 하되 내색은 하지 마시오. 글을 짓되 서책은 만들지 말고 혹 만들었다 해도 죽기 전에는 내놓지 마시오』
그렇게 일이 시작됐다.
주지 무염은 28년 전 홍경래軍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가 벌어졌던 청천강변의 송림으로 데리고 가서 당시 양군의 포진과 군세, 그리고 시각에 따라 변한 전투의 양상을 소상하게 들려줬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강가로 나갔고, 달이 밝을 때는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다녔다. 마치 전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생생한 증언이었다.『하루만 빨리 청천강에 도달했더라면』
무염은 탄식을 섞어 말했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겨울비가 청천강의 얼음을 녹여 놓지만 않았더라도 평양까지는 쉽게 들어갔을 터이고, 평양까지 들어갔더라면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을. 마침내 한양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더라면 지금 문장가들이 역도라고 칼질하는 무리들의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올라 있었겠지』
안주에서 반 년을 보냈다. 그동안 병연은 여전히 거지 행각을 하며 바랑에 엽전 한 닢만 들어도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詩를 읊었고, 노래를 하고 춤도 추었다. 때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어쩌다 문장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술도 얻어 마시고 몇 푼의 노자도 얻었다. 노자를 주면 사양하지 않았다.
안주와 주변 고을의 서당이라는 서당은 모두 거칠 것 없는 그의 사랑방이 되었고 크고 작은 암자들은 그의 잠자리가 되었다. 서당 훈장 자리를 두 번이나 제의받았다. 功令詩(공령시)에 神技(신기)를 지닌 김삿갓이 서북에 왔다는 소문이 서당을 중심으로 돌았다. 향시에라도 붙고 보자는 절박한 심정의 서생들과 그 부모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병연이 걸식하는 등 뒤에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고 서 있다가 구걸이 끝나면 제 집으로 모셔다가 다시 상을 차려 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병연은 훈장질만은 사양했다. 다시는 훈장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한자리에 붙박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동잎이 황톳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 병연은 안주에서의 조사를 끝내고 무염이 가르쳐 준 대로 다복동을 찾았다. 청천강의 지류인 대정강의 굽이를 내려다보는 단애를 끼고 산속으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고 뒤로는 높은 산이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 같은 지형이 나타났다. 다복동이었다. 이름은 「복이 많은 고을」이라지만 지지리도 복이 없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홍경래軍의 도총관이자 모든 물자를 제공했던 가산 토호 이희저의 대궐 같았던 저택은 집이 서 있던 자리에 숯덩이들만 발길에 차일 뿐이었다. 방방곡곡에서 장정들을 끌어모았던 금광은 폐쇄되었고 숫제 채광굴의 입구를 무너뜨려 막아 놓았다. 대원수의 군막이 있던 강 가운데의 작은 섬도 잡초뿐이었다. 1000명 가까운 장졸들이 금광의 노동자를 위장하여 살고 있던 마을도 불에 타서 쑥들만 무성했다. 쑥을 헤치고 걷다가 발에 밟히는 것이 있어 내려다보니 해골 바가지였다. 해골의 크기로 보아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관군이 오기 전에 대부분의 식솔들을 정주성으로 피신시켰다고는 하나 미처 따라가지 못했던 사람들과 노인, 어린아이들을 무참하게 도륙하고 불을 질러 태운 흔적이었다.
병연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앉아 들고 온 술병을 기울여 먼저 쑥이 키높이 자라고 있는 마을 터를 향해 몇 번 뿌렸다. 그 다음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모금 마셨다. 술을 마시다가 등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아 몸을 돌리니 사내 둘이 물고기 몇 마리를 망태기에 담아 들고 서 있었다. 어부들은 말없이 병연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병연을 처음 만나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들도 낯선 사람이 차림새로는 거지가 분명한데 얼굴을 보니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워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람 구경 처음 했소?』
병연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뉘시오?』
사내들이 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그네요. 解寃(해원)굿이나 해볼까 하고 왔소만, 귀신들도 이 땅을 떠난 것 같구먼』
『무당이오?』
『무당만 굿을 하라는 법이 어디 있소』
사내들은 굿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는지 병연을 뒷산 계곡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로 데리고 갔다. 여덟 채의 작은 오두막이 소나무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산속에 살면서도 화전조차 제대로 일구지 못하여 사냥이나 하고 산나물과 강물에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는 식으로 짐승처럼 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염이 말한 홍경래 잔당들이 분명했다.
좌장격인 사내 하나가 움막의 거적을 들치고 나오더니 병연을 심문했다.
『이름이 뭐요?』
『김삿갓이오』
사내는 병연의 머리를 덮고 있는 삿갓을 힐끔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삿갓 양반. 어디서 오시오? 여기는 왜 왔소?』
병연은 무염 스님이 이곳을 알려 주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 30년 전의 그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무염 스님의 이름을 듣자 사내는 대번에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랬소. 우리 있는 곳을 찾아 내어 관가에 고변하고 몇 푼의 양곡을 챙기려는 놈들이 가끔 얼씬거리거든요. 나는 宋千植(송천식)이라 하오』
송천식은 나이 마흔 남짓한 건장한 사내였으나 움막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28년 전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동무 둘과 고기를 잡으러 대정강과 청천강 본류가 만나는 하구로 내려갔다가 다복동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돌아서니 관군이 마을을 덮치고 있었다. 그들은 집 안과 마을 길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없애 버렸다. 그런 후에 불을 질렀다.
불은 사흘 낮밤을 타고도 사그러지지 않았는데 관군은 불씨가 완전히 꺼질 때까지 살아남은 무엇이 있는지 샅샅이 뒤져 생명의 흔적을 없앤 후에야 철수했다. 관군이 철수하고 나자 뒷산 숲 속에 숨어 가슴을 쥐어뜯고 있던 노인과 여자 몇 사람, 그리고 송천식처럼 잠시 마을을 떠났다가 뒤늦게 돌아와 더러운 세상에 남겨진 젊은이 몇 사람이 잿더미 위에서 몸부림쳤다. 그들 대부분이 이 잿더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뒷산 계곡에 숨어 살고 있다고 했다. 그중 노인 몇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그때의 청년은 자신처럼 늙어 가고 있으나 고혼들을 달래지 못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선비께서 굿을 할 줄 아신다 했으니 그들의 원혼을 달래어 구천으로 보내 주시오. 그러면 우리도 여길 떠나 거지 노릇을 하든지 일판을 찾아나서든지, 그도 아니면 화적떼를 찾아가 입당하더라도 여길 떠나서 살고 싶소』
『굿을 할 줄 안다고 한 것은 그냥 해본 소리요』
병연은 송천식의 움막에서 송진 기름으로 호롱불을 밝혀 놓고 밤새 글을 지었다. 鎭魂賦(진혼부)였다. 먼저 한문으로 쓰고 다시 언문으로 풀었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문자를 모르니 귀신인들 한문을 알겠는가, 해서였다. 이때처럼 생명을 다 쏟아 부어 글을 지어 본 적이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피를 토하고 살을 태워 그 기운으로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긴 문장이었다. 다 쓰고 나니 희끔한 새벽빛이 솔숲을 적시고 있었다. 그가 붓을 놓자 밤새 옆에서 먹을 갈며 지켜본 송천식이 깊은 한숨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 좋은 세상을 이리 더럽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 오로지 먹물인 줄 알았는데, 글이라는 것이 명부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진혼제는 그날 저녁 해거름에 올렸다. 소반에 다래로 빚은 술을 올려놓고 대정강에서 잡은 물고기 몇 마리와 산토끼 한 마리가 제물로 올랐다. 병연이 대정강에 내려가 몸을 씻고 제문을 읽었다. 처음에는 작게 감추던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서 제문을 다 읽기도 전에 강언덕은 통곡의 바다가 됐다. 높은 곳에 올라가 망을 보는 사람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 놓고 울었다. 밤기운이 돌 때까지 울고 나서야 사람들은 혼이 빠져 버린 물건처럼 흐느적거리며 산속으로 돌아왔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소』
송천식이 다래술이 담긴 그릇을 병연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선비님을 따라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고 심부름을 하리다. 그러면 선비님은 글이나 지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병연은 거절했다.
『이것은 내 길이오. 송서방은 자신의 길을 가시오』
병연은 다복동 산속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그 사이 몇 사람이 산을 내려갔으나 천식은 병연이 머물며 옛날의 다복동을 낱낱이 기록하는 동안 말 그대로 충직하게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병연이 다복동을 떠나 일찍이 정시의 충절 덕분에 서북지방에서는 유일하게 고을의 위상이 격상된 가산으로 향하는 날 그도 함께 움막을 등졌다. 남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병연은 송천식과 가산을 건너다보는 나루에서 헤어졌다.
『이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면서 천식이 절하며 말했다. 병연은 그가 어디선가 남자답게 죽을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산에는 정시 父子(부자)의 충절비가 두 개나 세워져 있었다. 충절비의 비문을 읽어보니 모두 정시 父子의 충절을 김익순의 훼절에 대비하여 찬양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가산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걸식 행각으로 30년 전의 일을 낱낱이 캐내어 기록하자니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디었고, 많은 세월이 길에서 흘렀다.
가산에서 박천으로, 박천에서 길을 동쪽으로 꺾어 태천을 거친 것은 홍경래軍의 부원수 김사용과 모사 우군칙, 김창시, 그리고 선봉장 홍총각과 이제초 등이 자라난 배경과 일가 중 생존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압록강을 바라보는 의주에서는 주로 홍경래의 행각을 수집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지방에서는 알게 모르게 소문이 돌았다. 김삿갓이 홍경래의 잔당을 모아 민심을 부추기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가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선천에 이르렀을 때는 선천 부사가 미리 사람을 풀어 수배해 놓고 있다가 성 안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포박해 갔다.
『그대가 김삿갓인가?』
『그렇소이다』
『뭐하는 사람인가?』
『떠도는 나그네올시다』
『洪賊(홍적)의 족적을 캐고 다닌다는데 사실인가?』
『요행히 소싯적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서북에서는 흉악한 叛徒(반도)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현혹되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대충 덮어 버리고 교훈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글을 아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기에 후세를 위하여 당시를 기록해 두려는 것입니다. 그뿐이올시다』
『그것인가? 지방 서당의 훈장들이 자네를 수상한 인간으로 고변하고 현감들도 조사해 보라고 알려 오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건 그 사람들의 일이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심이 좋을 듯싶소이다』
『하기야 그렇지』
부사는 병연을 방면했다. 조건이 있었다. 선천에 머물지 않고 당장 떠나라는 것이었다. 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행적을 더듬어 볼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선천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南으로 내려와 마침내 정주에 닿았다.
사람들이 게을러서인가, 아니면 무심해서인가. 정주성에는 곳곳에 홍경래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북지방에서 견고하기로 소문난 성벽은 곳곳에 허물어지고 화공으로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고, 성 안의 거리에도 불에 타서 무너진 집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심했다.
병연은 여기서도 일단 서당부터 찾았다. 그래도 말이 통하여 잘 만 하면 며칠 묵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줄 사람은 훈장들밖에 없었다. 정주성 북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서당을 수소문하여 찾아가자 李淵(이연)이라는 훈장이 버선바람으로 마당에 내려섰다. 이연은 중늙은이었는데 예의가 깎아 놓은 듯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병연이 미처 말문을 열기 전에 이연이 해명했다.
『대문장가 김삿갓 선생의 위명이 관서에 자자합니다. 선천에서 이리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정주의 선비들이 한편으로 긴장하고 한편으로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데 어디로 오셨기에 걸음이 이리 더딘지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고 술지게미에 취하다 보니 부지하세월이지요』
『좋지요, 좋아. 나도 처자식만 아니면 훈장 때려치우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바람같이, 구름같이』
서당 안으로 들어가니 여나믄 명의 학동들이 거지 행색의 선비를 힐끔거리며 글을 외던 소리를 짐짓 더 높였다. 훈장 이연이 서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쳤다.
『정주에서 제일 문장가로 盧鎭(노진)이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특히 공령시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 관서 일대에서 과거를 보려는 서생들이 문전에 줄을 섭니다. 이 사람이 지은 詩가 科詩(과시)의 표본으로 서당에서 회자되고 있는데 그중 몇 구절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선비께서 한 번 보시고 그 격을 촌탁해 주십사 하고 기다리던 참입니다. 사양하지 마시고 읽어 봐 주십시오』
병연은 훈장이 펼쳐 놓은 詩를 읽어 보았다.
曰爾世臣金益淳(왈이세신김익순) 대대로 국은을 입어 온 김익순은 듣거라.
鄭公不過鄕大夫(정공불과향대부) 정공은 한갓 고을의 대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家聲壯洞甲族金(가성장동갑족김) 가문은 장동김씨 명문거족이고
名字長安行列淳(명자장안항렬순) 이름도 장안에 소문난 순자 항렬이로다.
將軍桃李聾西落(장군도리농서락) 한나라 장군 이릉은 농서에서 항복하고
烈士功名圖末高(열사공명도말고) 열사의 공명은 (기린각) 그림 가운데 높았네.
한눈에 훑어보고 병연이 물었다.
『이것이 노진이라는 선비의 글입니까?』
『그렇습니다. 명문이지요?』
『자알 지었군요』
갑자기 가슴 밑바닥에서 물컹하는 것이 솟구쳐 올라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붉은 피 한 덩어리가 입에서 쏟아졌다. 피를 보는 순간 병연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한식경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린 병연은 바랑을 찾아 메고 서당을 나섰다. 정주성을 빠져나와 안주로 가는 길에 병연은 바랑 속에서 지난 3년 동안 서북을 돌며 기록해 둔 서책을 꺼내어 잘게 찢었다. 그리고 그것을 청천강 흐르는 물에 띄워 버렸다.●
<다음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