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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姜禎求 교수의 家族史
『姜교수의 장인은 일제시대 副면장이었고 해방 후 남로당원이었다』

할아버지·아버지 창씨개명한 姜교수는 親日인명사전편찬委 부위원장 지내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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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교수의 장인은 일제시대 副면장이었고 해방 후 남로당원이었다』
(姜교수와 부인 盧在烈 교수의 고향인 경남 창녕군 고암면 사람들의 증언)
국가 정보기관의 제보: 『姜교수의 부친과 장인이 남로당 활동을 했다』
姜교수가 지난 10월4일 경찰의 3차 소환조사를 위해 옥인동 대공분실에 들어가기 앞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께 기자는 국가 정보기관에 간부로 재직했던 사람으로부터 姜禎求(강정구·60) 동국大 사회학과 교수와 관련된 제보를 받았다.
 
  당시 姜교수는 『6·25는 통일 전쟁』 등의 발언이 문제가 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고, 千正培(천정배) 법무장관이 헌정 사상 초유의 수사지휘권을 발동,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검찰에 姜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면서 金鍾彬(김종빈) 당시 검찰총장이 이에 반발,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이른바 「지휘권 파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 취재원의 제보는 姜교수의 가족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2001년 8월 발생한 姜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과 관련, 경찰의 내사 과정에서 姜교수의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 姜교수의 부친 姜貞出(강정출·작고)씨와 장인 盧相用(노상용·작고)씨가 6·25 전후에 남로당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 조사 결과는 검찰에 보고됐고, 국정원에서도 자료를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그 취재원의 제보를 반신반의했다. 姜교수가 과거 그런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면 親北(친북)인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토록 「자신 있게」, 『6·25는 內戰(내전)이고 북한 지도부에 의한 통일 전쟁이다』, 『미국과 맥아더는 은인이 아닌 원수』,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 개입이 없었다면 남북을 통틀어 조선 사회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은 우리 역사의 필연』이라는 식의 발언을 공공연히 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경대 방명록 사건」이라는 것도 姜교수가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 당시 金日成(김일성)의 생가라는 만경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고 적은 게 문제가 돼 검찰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지금까지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다.
 
  며칠 후 기자는 사전에 姜교수의 집안 내력과 관련해 확인을 요청한 후 국가 정보기관에 근무했던 또 다른 간부를 만났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아는 루트로 확인을 해보니까 金기자가 받은 제보가 거의 맞는 것 같다. 오래된 기록이라 확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기자는 「좌익사건 실록」, 「요시찰 인명록」 등의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姜교수 부친과 장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
 
姜교수의 부친 姜貞出씨의 호적. 友山貞出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보인다.
  만경대 방명록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을 찾아 전화를 했다. 그는 다른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기자는 이 수사관으로부터 만경대 방명록 사건 당시 姜교수의 집안 내력과 관련된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은 그 수사관과의 통화 내용 요약이다.
 
  ―만경대 방명록 사건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1년 전에 그 업무를 떠났어요』
 
  ―姜禎求 교수의 집안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안다고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姜禎求 교수 문제를 이야기하기가 그렇네요. 요즘 예민한 문제고. 제가 그 보직에 있다면 모를까』
 
  ―그러면 어떤 분을 만나야 할까요.
 
  『다들 이야기를 안 할 겁니다. 姜교수 문제는 뜨거운 감자죠』
 
  ―경남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가 姜교수의 고향 맞습니까.
 
  『네』
 
  ―姜교수의 부친과 장인이 남로당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 미안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나설 수 없는 입장입니다. 나중에, 지금은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나의 모델』
 
지난 10월17일 동국大에서 열린 姜禎求 교수 관련 비상 교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시각, 자유개척청년단 회원들이 동국大 교정에서 姜禎求 교수 구속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기자는 지난 11월2일 姜교수의 고향인 경남 창녕군 고암면으로 향했다. 기자의 가방에는 인물과 사상사에서 발간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2000)와 姜禎求 교수가 저술한 「통일 시대의 북한학」(1996) 그리고 姜교수가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던 反美(반미)와 親日(친일)과 관련된 발언록이 정리된 자료 등이 들어 있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에는 전북大 康俊晩(강준만) 교수가 姜禎求라는 인물을 분석한 「민중에 대한 애정을 실천으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고, 「통일 시대의 북한학」에는 年譜(연보)를 대신해 쓴 姜교수의 自傳的(자전적) 글인 「늦깎이의 삶을 돌아보며」가 실려 있었다.
 
  「늦깎이의 삶을 돌아보며」에서 姜교수는 가족들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나의 할아버지(信赫)는 우리가 살던 마을인 경남 창녕군 고암면 高淵亭(고연정)에서 700m 정도 떨어진 산 속 제실에서 사셨다. 네 살 때부터 비슷한 또래의 4촌과 5촌들이 매일 할아버지에게 가서 큰절(읍)을 올리고는 천자문과 중국고사 등을 배웠다. (중략)
 
  그는 우리집에서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였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긴 도포를 벗는 법이 없었고, 낮잠 주무시는 일 없이 항상 정좌하셔서 책만 보셨다. 아버지나 큰아버지를 나무라시면 온 산이 쩌렁거렸다. 종종 창녕읍에 가셔서 경찰서장이나 군수에게 호통을 치시곤하셨다. 또 하얀 수염과 긴 도포자락, 늘어진 갓끈, 비가 와도 뛰지 않으시고 의연하게 걸으시던 모습, 한시를 읊던 낭랑한 목소리, 근엄한 얼굴표정 등은 어린 나에게 하나의 모델이었다.
 
  할아버지는 과거시험을 보러 가셨다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것을 목격하시고는 어떤 「정승」에게 호통을 치고는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3·1 운동 전 파리장서(1919년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편집자 注) 때 창녕 유림 대표로 서명을 하셨다가 일본놈에게 끌려가 고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역시 우리 할아버지라는 뿌듯함을 간직하게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거의 하루 한 번씩 주경야독, 불의에는 죽음으로 맞서 싸울 것, 正道(정도)가 아니면 가지도 말고 보지도 말 것, 재물을 탐하지 말 것, 현실에 야합하지 말 것 등을 교습받았다. 그래서 뒤틀리는 세상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 일상화된 것 같다>
 
 
 
 宗中의 논을 소작하며 살아
 
서울지방경찰청 보안과는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한 칼럼을 통해 6·25 전쟁을『북한에 의한 통일 전쟁』이라고 주장한 동국大 姜禎求 교수를 지난 9월2일 소환 조사했다.
  어려웠던 집안살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넷째였기 때문에 상속거리가 적어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다. 상속받은 논밭으로 살아가기 힘들어 항상 큰할아버지 논, 宗中(종중)의 논을 소작하면서 살았기에 어머니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는 『중국의 농민은 모두 땅을 가졌다는데 우리 조선은 언제 그렇게 되지』 하고 한탄하셨다. 한국전쟁 직후였던가 흉년이 하도 심해 굶어 죽은 사람 이야기가 종종 들렸다.
 
  사방공사장에 나이 어린 형님이 일 나가 밀가루를 타오자 우리 가족 모두가 반색을 했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어릴 때부터 왜 어떤 사람은 논을 많이 가지고 우리 같이 못사는 사람은 논을 적게 가지는지 불만이 가득했다.
 
  노동력이 많은 집은 저수지 공사 같은 일을 하고는 밀가루도 타올 수 있는데 우리 같은 집은 이것도 못 하니 굶어죽으라는 이야기냐고 혼자 열을 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에 대한 언급도 있다.
 
  <나는 보통학교 1학년과 3학년 때 담임선생을 증오했다. 일본 군국주의 교육자의 전형인 그는 어리디 어린 1학년생부터 회초리 타작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화장실 가겠다는 말도 못해 교실에서 실례하는 일도 벌어졌다.
 
  청소당번에 걸리면 영락없이 살벌한 군대 검열과 같은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분대장을 맡아서 교무실에 청소완료 보고를 하러 갔다가 복창소리가 작다고 열 번을 되풀이하는 수모를 겪었다. 너무 분해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도 아랑곳없이 매일 아침과 점심에 운동장에서 조례와 조회를 하면서 똑같은 훈시를 하는 교장선생이 지겨웠다. 아침마다 『공산침략자를 때려부수고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날리자』라는 내용의 「우리의 맹세」, 즉 반공·반북·반통일 선서를 목청이 터져라 외쳐야 했다>
 
 
 
 
중학교 때부터 시사문제에 관심 가져

 
  姜교수의 어린 시절 對美觀(대미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중학교 때부터 시사문제에 꽤 많은 관심을 가졌다. U-2 정찰기 사건(1960년 소련 영공에서 미국의 U-2 정찰기 1대가 격추된 사건-편집자 注) 때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드골, 맥밀란 영국 수상 등 4자 영수회담을 하면서 곤혹을 치르는 사진을 보고 얼마나 고소했는지 모른다>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철저한 가사노동 분담자이다. 집에서는 빨래, 청소, 설거지, 식사준비, 시장가기 등 가사노동을 일상적으로 한다. 지금도 아내가 학교일에 너무 바빠 가사노동이 불균형적으로 나에게 쏠리고 있는 셈이다.
 
  진보적이면서도 가사노동을 아내에게 전담시키는 행위는, 金泳三 대통령이 세계화의 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입으로만 외치고 노동자 고통전담을 강요하는 정책과 똑같은 패러독스를 연출하는 꼴일 것이다>
 
 
 
 할아버지·아버지 창씨개명한 姜교수는 親日인명사전편찬委 부위원장
 
재향군인회 등 시민단체 회원 200여 명은 지난 7월29일 姜禎求 교수 규탄집회를 가졌다.
  姜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기자는 사전에 취재했던 자료들을 꺼내 보았다. 자료에 따르면 姜교수가 어린 시절 모델로 삼았다는 할아버지 姜信赫의 일본 이름은 友山信赫이었고, 姜교수의 아버지 姜貞出의 이름은 友山貞出이었다. 姜교수는 「친일인명사전편찬委」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기자가 준비한 자료에는 親日인명사전편찬委와 관련된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2005년 8월30일자도 있었다. 다음은 그 기사를 발췌한 내용이다.
 
  <최근 한 인터넷 매체에 「6·25 전쟁은 통일 전쟁」이라는 글을 실어 논란을 일으켰던 동국大 姜禎求 교수도 편찬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나 한 월간지에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된 시점을 전후해 사퇴했다. 姜교수는 『親日청산 작업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구체적으로 관여한 바가 없고, 이름만 걸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기사에서 언급한 월간지 보도란 月刊朝鮮 2005년 9월호다. 창녕군 고암면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姜교수의 장인 盧相用씨는 일제 시대에 고암면 副면장을 지냈다고 한다.
 
  姜교수는 「민중의 소리」 2002년 3월22일자에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공간의 민족사적 과제는 첫째,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구축된 식민지 잔재와 친일파의 청산이었다. 둘째는 미국의 주도에 의해 두 동강이 난 분단을 해소하여 민족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인의 염원과 과제는 美 군정에 의해 철저하게 분쇄되고 결국 친일파 중에 친일파인 朴正熙가 대통령까지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6·25라는 민족상잔까지 겪는 참화 속에 빠졌고,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과 적대가 남북 사이에 가로놓이게 되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지난 3월16일자 「姜禎求 칼럼」의 제목은 『친일청산은 북한이 앞섰다』이다. 몇 개의 문장을 옮겨본다.
 
  <북한의 친일청산은 일본의 패망이 발표되는 해방공간 시점인 1945년 8월부터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해 곧바로 시작되어 1946년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이 결과 북한에는 친일이라는 과거청산 논쟁이 아예 발붙일 틈이 없게 되었다.
 
  소련 점령군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친일청산에 대해 도와 주고 촉진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곧 소련 점령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친일청산은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욕구에 의해 충분히 청산할 수 있었지만 소련의 도움으로 빨리 청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친일청산 경우 진상규명에서부터 정신계승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청산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부끄럽게도 진상규명조차 안 된 수준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나라정책원장 金光東(김광동) 박사는 이렇게 반박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 등을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親日청산을 하기 위해 영장발부 408건, 기소 221건 등으로 민족정기 확립에 나섰던 데 반해 북한에서는 재판은커녕 親日청산 관련 법도 하나 없었다.
 
  광복 후 북한에서는 親日에 대한 청산작업은 없었고 오직 공산화를 하기 위해 토지·건물·공장과 기업 등을 가진 사람을 친일자란 명목을 붙여 그들의 재산을 약탈해 가는 일만 있었을 뿐이다』
 
 
 
 
姜교수의 고향에 가보니…

 
만경대 방명록에「만경대 정신…」이라고 써 파문을 일으킨 동국大 姜禎求 교수가 김포공항에 들어오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창녕읍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고암면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50代의 택시기사에게 姜禎求 교수를 아는지 물었다.
 
  『요새 시끄러워진 후에 그 사람 고향이 창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잖아요?』
 
  ―고암면 억만리가 고향이라고 하던데.
 
  『억만리가 고향이군요. 창녕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억만리가 고향이라는 것은 몰랐어요. 그분 이야기를 들으려면 노인네들을 만나야 할 겁니다. 나만 해도 그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까』
 
  姜禎求 교수의 고향 고암면 억만리 고연정 마을과 부인 盧在烈(노재열)씨의 고향 고암면 우촌리는 바로 이웃해 있었다. 盧在烈씨는 某 대학 의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두 곳은 모두 면소재인 중대리에서 가까웠다.
 
  수소문 끝에 우촌리에 사는 노인 盧모씨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81세인 그는 姜교수의 장인 盧相用씨와 16촌간이라고 했다.
 
  ―姜禎求 교수에 대해 잘 아십니까.
 
  『요 바로 옆 억만리 고연정에 살았어요. 姜교수는 몰라도 姜교수 부친과 할아버지는 알아요』
 
  ―姜교수의 부친께서 광복 후에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貞出씨는 그런 일 전혀 없어요. 윗대부터 사상관계는 전혀 없어요』
 
  ―姜교수의 장인 盧相用씨는 아시나요. 이곳 우천리에 사셨던데요.
 
  『알죠. 나하고 16촌간쯤 될 거예요.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됐죠. 형제간이 5형제였고, 일본에 가 있던 형제가 한 명 있지요』
 
  ―부면장을 했다면서요.
 
  『부면장을 했어요』
 
  ―이 지역에는 남로당의 활동이 전혀 없었습니까.
 
  『남로당에 가입돼 있는 사람이 많았어요. 해방 후 손정기씨가 고암면장으로 있을 때 그 물이 들었어요. 그래서 면직원들이 물이 좀 들었고』
 
  ―6·25 전쟁 때입니까.
 
  『그 전이지. 1949년인가…』
 
  확인 결과 고암면 직원들이 창녕경찰서로 연행된 때는 1947년 늦가을께로 판단된다. 손정기씨가 면장을 그만둔 때는 1947년 12월이고, 盧모씨는 그 시기를 『추곡 매상을 하던 때』로 기억했다. 경찰에 연행되고 조사를 받은 후 면장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盧相用씨는요.
 
  『부면장이었으니까. 면장이 그러니까 활동은 안 했어도 그랬지. 면직원 가운데 호적을 담당하던 김창기씨를 빼고 손정기씨 이하 全직원이 창녕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 일도 있었어요』
 
  ―손정기 면장은 골수 남로당원이었나요.
 
  『남로당원이었지. 면장이 그러니까 다 물들었던 거예요』
 
  ―면사무소가 남로당의 조직이 된 거네요.
 
  『그렇지. 그 당시는 면장이 남로당이 되다 보니까 그랬지. 면직원이 경찰서에 다 들어가고 나니까, 저게 다 면장 코치로 그렇게 됐다는 말들이 있었어요』
 
  ―姜교수의 친가는 아니고 처가는 맞네요.
 
  『盧相用씨는 남로당원이 분명해요. 살아계시면 백 살 가까이 됐을 거야』
 
  盧相用씨는 1908년생으로 1979년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남로당 조직과 관련해 면직원들 외에 이 지역에서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람은 없나요.
 
  『우리 일가인데 우천리에 노창렬씨 하고 노쾌출씨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행방불명됐어요』
 
  ―좌익활동 때문에요.
 
  『활동을 했으니까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됐지. 아, 중대리에 최순희도 그랬어요』
 
  ―보도연맹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요』
 
  ―盧선생님은 노동당 가입 권유를 안 받았나요.
 
  『쾌출이가 우리 종형한테 찾아와서 가입하라고 했는데, 우리 종형이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땅 다 뺏긴다」고 쾌출이가 얘기하니까, 「뺏기더라도 안 한다」고 했지. 「그러면 토지 분배가 다 되면 너네 오래된 토지는 어떡하려고 하느냐」고 쾌출이가 이야기하니까, 우리 종형이 「뺏기더라도 안 한다」고 했어요. 쾌출이는 당시 면직원이었고 활동을 제일 많이 했어요』
 
  다음날인 11월3일 창녕읍에 머물면서 기자는 다시 우촌리 盧모씨에게 전화를 했다.
 
  ―면직원들이 창녕경찰서로 끌려간 때를 1949년 가을로 기억하셨는데 1948년 1월부터 조병우씨라는 분이 면장으로 있었던데요.
 
  『조병우 면장은 손정기 면장 뒤엡니다. 손정기 면장 시절에 면직원들이 다 경찰서에 끌려갔어요. 그건 틀림없어요』
 
  ―남로당 조직 사건으로 불려갔던 것도 분명한 거고요.
 
  『네, 맞아요』
 
 
 
 1948년 5·10 총선거 때 고암지서 습격 사건 발생
 
  盧모씨와의 통화를 마치고 기자는 창녕에서 오랫동안 경찰생활을 한 金모씨를 만났다. 올해 나이 80세인 金씨는 아직 건강해 보였다. 창녕경찰서 고암지서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다는 그는 자신이 「요시찰 인명부」와 「부역자 명부」를 작성한 적이 있다고 말했으나, 姜貞出씨와 盧相用씨가 남로당 활동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창녕 지역 가운데 고암면의 좌익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金씨는 『그게 영구보존이었으니까 혹시 창녕경찰서에 가면 부역자 명부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창녕경찰서를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창녕경찰서에 오래 근무했다는 경찰관계자는 『그런 명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시찰 명부를 全斗煥 대통령 때까지는 사용했어요. 1987년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경찰이 가지고 있던 기록은 전부 검찰로 넘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보과 근무 시절 신원조회 때문에 요시찰 인명부를 본 적이 있는데 좌익의 우두머리는 창녕에서 고암면이 많았고 그 가운데 우천리에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관련된 분들의 가족은 전부 다 우천리를 떠났어요』
 
  창녕경찰서 정보과에 오래 근무했다는 安모(80)씨를 만났을 때도 창녕경찰서 관계자의 증언과 유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창녕에서는 고암면의 좌익활동이 강했어요.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좌익들에 의해 고암지서 습격 사건도 있었죠. 그때 노○○이가 엽총을 가지고 지서에 들이닥치기도 했습니다』
 
  전현직 경찰 관계자들을 만난 후 기자는 고암면 소재지에 있는 노인복지회관으로 향했다. 오후 2시가 넘으면서 중대리·대암리·억만리·우천리 등 부근에 사는 노인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자가 그곳에서 만난 78세에서 84세에 이르는 노인들의 기억은 대부분 일치했다. 姜禎求 교수의 장인인 盧相用씨는 남로당원이었지만, 부친 姜貞出씨는 평범한 농부로 남로당과 관계가 없다는 증언이었다. 새로운 사실은 盧相用씨가 일제 시대에도 부면장을 했다는 증언이었다. 다음은 기자와 李모씨와의 대화다 (중대리에 거주한다는 李씨의 올해 나이는 78세였다. 그는 8·15 광복 당시 자신의 나이가 18세였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한다고 했다).
 
  ―우천리에 살던 盧相用씨를 아십니까.
 
  『알죠. 광복 전부터 부면장을 했는데 우촌리의 인물이었어요』
 
  ―손정기 면장은요.
 
  『손정기 그분은 누가 뭐래도 우리 창녕군에서 (오른손 엄지를 추켜올리며) 이런 분입니다. 머리가 난 사람이지』
 
  ―6·25 전 면직원들이 전부 창녕경찰서에 붙들려가는 사건이 있었다던데요.
 
  『盧相用씨 하니까 생각나는데 그때는 마을마다 다 인물이 있었다구요. 그 사람들이 전부 남로당 가입해서 하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했던 거지. 그때는 법에서 빨갱이를 만들었다니까』
 
  ―고암면에 남로당 활동한 분들이 많았다던데요.
 
  『손정기 같은 분은 우리 고암에서 손꼽는 인물뿐만 아니라 좀 알고 말이라도 하고 글자나 아는 사람들은 전부 남로당 계열에 가입을 안 한 사람이 누가 있나. 광복 후에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많았어요』
 
 
 
 姜교수의 형은 경찰
 
  대암리에 거주한다는 張모(78)씨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盧相用씨가 姜교수의 장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손정기씨도 광복 전부터 면장을 했나요.
 
  『그래요. 일제 말에 창녕군청에 있다가 면장으로 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남로당이 될 수 있었을까요.
 
  『광복 후에는 좌익계로 몰려서 면장을 못 하게 됐어요. 조병우씨를 후임으로 추천해 놓고 자기는 나갔지. 사상 관계 때문에』
 
  ―姜교수 집안에 대해 잘 아십니까.
 
  『姜禎求는 잘 몰라. 그 형은 잘 알지. 희구라고 경찰을 했어』
 
  ―고암면 우천리에 남로당 가입자가 많았던 이유가 특별히 있습니까.
 
  중대리 李모씨가 거들고 나섰다.
 
  『그때 가입 안 한 사람이 얼마나 돼요. 무상분배라니까 다 가입했지. 글줄이나 아는 사람은』
 
  ―토지를 무상분배해 준다니까 남로당에 가입을 많이 했군요.
 
  『이북서 내려와서 무상분배해 준다니까 전부 공것 주는 줄 알고(웃음)』
 
  ―6·25 전쟁 때 인민군이 이곳에 진주했나요.
 
  『했지』
 
  ―토지 분배가 있었나요.
 
  『없었지. 다 피란 갔어요』
 
  창녕에서의 취재를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기자는 姜교수의 「통일 시대의 북한학」을 다시 집어들었다. 기자의 시선은 이 책 349페이지에 있는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는 『중국의 농민은 모두 땅을 가졌다는데 우리 조선은 언제 그렇게 되지』 하고 한탄하셨다>는 대목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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