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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料발굴] 仁川상륙작전의 英雄 클라크 대위의 手記

팔미도 등대 가동시키고「킬로이 다녀간다」고 낙서까지 했다!

조화유    pearlaga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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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敵의 병참線을 차단하겠다』
한국전쟁 당시 서해안 영흥도에 주둔하고 있던 KLO부대. 맨 오른쪽이 유진 클라크 대위, 그 옆이 계인주 대령, 한 사람 건너 연정 대위.
  
  올해는 맥아더 장군이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을 직접 지휘하여 仁川에 상륙한 지 꼭 55년이 되는 해이다.
 
  이 작전이 없었더라면 한반도 전체는 지금 金正日의 지배下에서 고생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1950년 「통일 내전」에서 金日成이 이겼어야 한다고 원통해하며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라고 주장하는 대학교수가 있는가 하면, 허구로 가득찬 金日成 傳記(전기)를 교육방송을 통해 소개하는 자칭 석학도 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생활을 즐기는 자들이 反美的 영화를 만들어 은근히 金日成·金正日 정권을 찬양하면서 돈벌이를 하고 있지 않나, 요즘 나라 돌아가는 상황이 漸入佳境(점입가경)이다.
 
  1950년 8월4일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가 남한군 및 유엔군과 장기 대치에 들어갔다. 金日成은 『8월15일(광복 5주년)까지 남한을 완전 점령하라』고 인민군에 명령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仁川상륙작전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한반도 해안 어디엔가 상륙작전을 결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한강 남쪽 노량진의 흑석동에서 강 건너 서울을 바라보고 돌아간 6월29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敵은 이미 서울을 점령하고 3일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맥아더 장군은 仁川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노련한 종군기자 몇 명을 불러 놓고 『전쟁의 역사를 보면, 군대가 패전하는 이유의 90%는 병참 공급선이 끊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바로 敵의 공급선을 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950년 9월25일자 「타임」誌에서 인용).
 
  그 당시 북한군의 공급선은 평양에서 낙동강까지 400km나 되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북한군은 철도와 비포장 국도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美 공군의 공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돌파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5000분의 1 확률을 가진 도박
 
  맥아더는 교착상태에 빠진 戰況(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仁川상륙을 계획했다. 敵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 우선 공급선을 끊고, 2개의 전선을 만들어 敵 병력을 분산 격파하는 게 목적이었다. 서울과 가까운 仁川을 탈환하는 것은 전략상으로나 심리전 면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맥아더는 처음엔 비교적 소규모 병력으로 7월22일 仁川에 상륙할 계획을 세웠으나 필요한 병력이 일본으로부터 제때에 수송되어 오지 않아 포기했다. 대신 그는 대규모 仁川상륙작전을 다시 계획하고 「크로마이트 작전」이라 명명했다.
 
  맥아더가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을 美 국방부에 올리자 軍 수뇌부는 반대했다. 仁川 앞바다의 간만의 차가 심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대형 군함들이 개펄에 처박혀 오도가도 못하게 될 위험이 크다는 분석이었다.
 
  로튼 콜린스 육참총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仁川보다 군산에 상륙하라』고 권고했다. 군산은 仁川보다 자연 조건이 훨씬 좋고, 낙동강 전선과 가까워 적군을 바로 등 뒤에서 칠 수 있다는 권고였다.
 
  맥아더는 직접 작전계획을 듣기 위해 東京(도쿄)까지 날아온 육참총장 등 軍 수뇌부에게 45분간 설득 연설을 했다. 그는 『불리한 자연 조건 바로 그것 때문에 仁川을 택했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나는 仁川상륙이 5000분의 1 확률을 가진 도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불리한 조건下에서 작전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우리는 仁川에 반드시 상륙하여 敵을 무찌를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 병사들이 도살장의 소처럼 피를 흘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라고 열변을 토했다(「맥아더 회고록」 중에서).
 
 
 
 맥아더의 결단
 
1950년 9월15일 기함 마운트 매킨리號에서 작전 상황을 지켜보는 맥아더 장군(가운데).
  軍 수뇌부는 1950년 8월29일 일단 仁川상륙작전을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軍 수뇌부는 토를 달았다. 『최종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되는 대로 보고하라』고 맥아더에게 지시했다.
 
  맥아더는 仁川상륙 날짜를 仁川항의 수심이 가장 깊을 때로 예상되는 9월15일로 정했다.
 
  9월10일 맥아더는 그의 부관 한 명(육군 중령)을 도쿄에서 워싱턴으로 보냈다. 그 중령이 크로마이트 작전 최종 계획서를 직접 들고 가 軍 수뇌부에게 전달하게 했다. 극비 사항인 만큼 누설을 염려해 인편으로 보낸 것이다.
 
  맥아더는 중령에게 『워싱턴에 너무 일찍 가지 말고 9월14일(미국 동부 시각)에 도착해 전달하라』고 명령했다. 혹시 軍 수뇌부가 작전을 연기시키거나, 상륙장소 변경을 요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軍 수뇌부는 맥아더가 상륙지점을 군산으로 바꾸기를 거절했을 때, 다시 「보성면」(美 육군 기록에 영어로 「Posung-myon」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로 어느 지점인지 필자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음) 해안을 권고했으나 맥아더는 이것 역시 거절했었다.
 
  중령은 맥아더가 지시한 대로 9월14일 아침 美 국방부에 가서 육참총장 등 軍 수뇌부에게 인천상륙 작전계획서를 내놓았다. 軍 수뇌부는 그 중령에게 많은 질문을 퍼부었고 질문과 답변은 그날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때는 한국시각으로 15일 새벽, 이미 仁川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맥아더, 金日成을 교란하다!
 
  仁川상륙작전은 극비리에 준비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이 정보는 일본 언론에서 공개된 비밀이 되었다. 그런데도 金日成은 仁川 방어를 강화하지 않았다. 그 당시 仁川에는 병력 약 2000명과 월미도에 대함포 몇 문을 가지고 있는 해안포대 1개 대대, 그리고 주변의 작은 섬들인 영흥도·대부도·팔미도 등에 약간의 인민군들이 있었을 뿐이다.
 
  도쿄에는 당시 소련의 첩자들이 많았으므로 金日成이 맥아더의 仁川상륙작전 소문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金日成은 왜 끝내 仁川 방어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군사 전문가들과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고 있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장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金日成이 자연 조건이 나쁜 仁川보다는 군산이나 그밖의 다른 곳을 유엔군 상륙 지점으로 예상했고, 맥아더가 金日成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仁川상륙작전 소문을 일부러 흘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북한軍의 월미도 해안포대를 미리 파괴하기 위해 맥아더는 9월13, 14일 양일간 함정 5척을 월미도 앞바다로 보내 공격을 가했다. 그는 敵이 이것을 仁川상륙의 신호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른 여러 곳도 동시에 공격했다.
 
  美 해군 함정들을 동해안으로 올려보내 강원도 삼척에 함포사격을 가했고, 한국 해병대로 하여금 포항과 군산에 상륙을 시도하는 척하도록 지시했다. 평양 외곽 항구 진남포에도 항공기를 이용한 소규모 공격을 가했다. 모두 仁川상륙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교란작전이었다.
 
  중국이 金日成에게 유엔군의 仁川상륙작전 계획을 마지막 순간에 알려 주었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는 說(설)도 있다.
 
 
 
 
東京서 날아온 美 해군 유진 클라크 대위

 
1950년 9월15일 인천항의 방조제를 넘어 돌진하는 美 해병대원들.
  1950년 9월15일 꼭두새벽 仁川상륙작전 개시 약 2시간 전에 누군가가 仁川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서 상륙 함정들이 좁은 飛魚水路(비어수로)를 통해 仁川항으로 무사히 진입하도록 해주었다, 누가 등댓불을 밝혔을까?
 
  지금까지는 美 해군 유진 클라크 대위가 KLO(한국인들로 구성된 유격대로 정규군 부대가 아님) 소속 A씨(전쟁 당시 28세, 현재 83세로 생존)에게 지시해, A씨가 중심이 되어 팔미도 등대에 점화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클라크 대위(1998년 작고)가 남긴 수기가 발견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그 책에는 A씨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책에 A씨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A씨가 등댓불을 켜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클라크 대위의 책을 토대로 팔미도 등대 점등 경위를 再구성해 본다.
 
  맥아더 사령부는 仁川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仁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8월26일 도쿄의 美 극동군 사령부 G-2(첩보부)에서 일하고 있던 클라크 해군 대위(당시 39세)를 호출했다.
 
  그리고 그에게 仁川 앞바다의 자연 조건(수심, 간만의 차이, 개펄의 넓이 등)과 仁川 및 월미도의 敵 병력 규모, 그리고 敵이 항만 해저에 지뢰를 매설했는지, 仁川항으로 들어가는 두 뱃길에 항해등은 작동하고 있는지 여부 등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클라크 대위는 같이 일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도쿄에서 대구로 날아왔다. 거기서 그는 전에 G-2에서 같이 근무했으며 영어가 유창한 한국 해군 대위 연정(당시 30세)과 한국 육군 방첩부대장을 지냈고 역시 G-2에도 근무한 바 있는 계인주(당시 42세) 대령을 차출해서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작전할 때 필요한 쌀 등 식료품과 한국 돈 100만원도 마련했다.
 
 
 
 9월1일 오전 덕적도 근처에 도착
 
  클라크 대위와 두 한국군 장교는 8월 말 일본 사세보 군항에서 마침 한국 전선으로 가는 영국 해군 함정에 편승, 9월1일 오전仁川 앞바다 덕적도 근처에 도착했다. 앞으로 2주일간 클라크 대위의 작전을 지원해 줄 한국 해군 함정 한 척과 덕적도 근해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함정(PC-703호)의 선장은 이성호 중령, 행정장교는 현시학 소령(나중에 미국주재 한국공사가 됨), 후에 해참총장이 된 함명수 대위는 함포사격 담당이었다.
 
  팔미도 등대 점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 A씨는 부산에서 한국 해군 「백구호」를 타고 덕적도로 가서 클라크 대위를 만났고, 그로부터 仁川상륙작전이 있을 거라는 귀띔을 받고 놀랐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8월18일부터 클라크 대위와 일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때는 클라크가 일본에서 특공작전 명령을 받기도 전이다. 날짜가 틀리는 것은 A씨의 기억력 쇠퇴 때문일 수도 있지만, 클라크가 A씨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이다. 클라크 수기에는 한국인 이름이 30개 정도 나오며 중요한 인물은 얼굴 모습까지 묘사했다.
 
 
 
 
9월3일 팔미도 등대 첫 점검

 
1950년 9월15일 旗艦 매킨리號 함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지켜보며 참모들과 파안대소하는 맥아더 元帥.
  영흥도를 주요 거점으로 한 클라크 특공대는 仁川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했다. 클라크는 『仁川 항구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인 비어수로 등 세 군데에 있었던 항해등이 敵에 의해 모두 파괴되어 있다』고 본부에 보고함과 동시에 『팔미도에 있는 등대가 아직 작동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보고했다.
 
  그는 9월3일 밤 연정 등 한국인 특공대원들을 데리고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다. 등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적군이 팔미도에 없다고 판단한 클라크 일행은 곧 그곳을 떠나 영흥도로 돌아갔다.
 
  9월9일 밤 클라크 일행은 다시 팔미도에 상륙, 이번엔 등대 안에 들어가 보았다. 그는 기계에 쓰인 글을 보고 등대에 불을 밝히는 기계가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된 것이며, 석유를 태워서 빛을 내는 석유등임을 알 수 있었다. 석유통에는 기름이 반쯤 남아 있었고 등 자체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는 불을 붙여 보았다. 불꽃이 별로 크지 않아 심지 있는 부분을 깨끗이 닦아 불꽃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등대 불빛을 깜빡거리게 하거나, 불빛 비추는 방향을 바꾸게 하는 장치는 건전지가 낡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빛이 깜빡이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집중적으로 비추도록 고정시켜 놓고 불을 껐다. 그리고 도쿄의 사령부에 「등대 사용 가능. 점등 시각 지시 요망」이라고 무전을 보냈다.
 
 
 
 장난기 발동한 클라크 대위
 
  등대 점검을 마친 클라크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등대 문에다 「Kilroy Was Here! Sept. 9, 1950」 이라고 써 놓았다. 연정 대위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들이 어떤 곳을 먼저 점령했을 때 뒤늦게 오는 군인들을 놀려주려고 장난삼아 「킬로이가 이미 다녀갔다」고 쓰곤 했었다』고 일러 주었다.
 
  킬로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東에 번쩍, 西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가상의 군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홍길동이가 먼저 다녀가네!」라고 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9월14일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다음날(15일) 0시30분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는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이날 영흥도에 있던 클라크 일행은 이 섬을 다시 빼앗으려고 들어오는 인민군들을 피해 밤늦게 작은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로 향했다. 그들이 팔미도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15일 0시30분, 등댓불을 켜야 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클라크와 연정 대위는 팔미도에 미리 와 있던 부하들로부터 오인사격을 받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어 언덕 위 등대까지 올라가 등댓불을 켰을 때는 이미 0시50쯤 되었다. 클라크 대위는 20분이나 늦게 등댓불을 켠 데 대한 불안감을 안고 등대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그는 땅에 드러누워 곧 잠이 들었다(A씨는 등대 점등 장치의 나사못이 빠지고 없어 그 나사를 찾느라고 시간을 많이 보내 오전 2시20분에야 등댓불을 켰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후 연정이 클라크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등대에서 약 70m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손으로 가리켰다. 배의 종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군함 6척이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두웠지만 어슴푸레 군함들의 윤곽이 보였다.
 
  함정들은 계속해서 줄을 이어 팔미도 등대 불빛을 항해등으로 삼고 仁川항으로 들어갔다. 역사적인 仁川상륙작전 1차 공격, 즉 월미도 점령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2차 공격은 다시 밀물이 되는 오후 5시 이후에 감행되어 밤 사이에 仁川을 거의 전부 탈환하게 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클라크는 망원경으로 맥아더 장군이 타고 있을 旗艦(기함) 마운트 매킨리號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연정, 계인주와 함께 매킨리號 쪽으로 접근해 갔다.
 
 
 
 클라크 대위 도운 한국인 50명 희생돼
 
팔미도 등대.
  기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해군 장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매킨리號 함상에서 누군가가 메가폰을 입에 대고 『접근하지 마라!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매킨리號에서는 클라크 등이 타고 있는 디젤엔진 통통선을 敵의 자살 특공 선박으로 의심했다. 클라크는 통통선 선장(李씨로만 밝혀짐)에게 엔진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기함으로부터 소형 상륙정 한 척이 접근해 왔다. 거기에 탄 해군 소위가 기관단총을 클라크 대위에게 겨눈 채 물었다.
 
  『누구냐?』
 
  『나는 美 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다. 사람 다치기 전에 총은 치워라!』
 
  클라크가 대꾸했다.
 
  소위는 기함으로 돌아가 함장에게 美 해군 대위라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발동선에 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함장이 『그자가 우리 해군 장교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나?』고 묻자 소위는 『우리 해군 장교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클라크가 먼저 기함에 승선, 신분이 확인되자 통통배에 남아 있던 두 한국군 장교 연정 해군 대위와 계인주 육군 대령도 매킨리號에 올라갈 수 있었다.
 
  仁川상륙작전이 끝난 후 클라크 대위는 美 해병대 병력을 영흥도와 대부도에 보내 그곳의 敵을 소탕해 줄 것을 작전사령부에 부탁했다. 그는 『그 두 섬에서 나를 도와준 한국인 50여 명이 敵에게 희생되었다』고 보고하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말했다.
 
  클라크 대위는 仁川상륙작전 후에도 연정과 함께 북한 서부해안 일대에서 한국 KLO 유격대원 150여 명을 지휘하여 해안지역에서 게릴라戰을 수행했고, 압록강까지 가서 중공군의 南下 사실도 가장 먼저 탐지해 본부에 타전했다.
 
  그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원산지역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첩보작전과 게릴라戰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클라크와 연정은 미군 최고 영예인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받았다.
 
 
 
 死後에 발견된 手記
 
  1966년 중령으로 퇴역한 클라크는 캘리포니아州와 네바다州에서 살다가 1998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죽은 후 가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가 쓴 手記를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전쟁 중 그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어서 가족들이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2000년 MHQ(Military History Quarterly, 계간軍史) 잡지에 토머스 플레밍이라는 군사전문 저술가가 유진 클라크 대위에 관하여 쓴 글을 클라크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우연히 읽게 되었다. 가족들은 고인이 남긴 手記를 토머스 플레밍에게 보냈다.
 
  플레밍은 그 글을 읽고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있다고 판단해 유명한 출판 그룹 「펭귄」 계열사의 버클리 출판사를 통해 「仁川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2002년 책을 냈다. 시카고 선 타임스 신문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스릴 넘치는 실화다』라고 격찬했다.
 
  仁川상륙작전에는 7만1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는데, 美 해병 1사단과 육군 보병 7사단을 주축으로 조직된 美 10군단(사령관 알먼드 소장)이었다. 한국군 약 7000명과 在日동포 지원병 641명도 참가했다. 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총 261척, 맥아더 장군은 작전함대 사령관 도일 제독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號에 타고 있었다.
 
  클라크 대위와 연정이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사실이 상륙 당일에는 함상의 맥아더 장군이나 상륙작전 고위 지휘관들에게까지 보고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맥아더 장군을 바로 옆에서 취재한 종군기자 칼 마이던이 「타임」誌에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仁川 항구 쪽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도일 해군 제독이 맥아더 장군에게 『敵이 (고맙게도) 항해등까지 켜 놓았군요』라고 말하자 맥아더 장군은 『(그놈들) 예의 한번 바르군』이라고 말했다> (1950년 9월25일자 「타임」誌 기사에서)
 
  맥아더가 타고 있던 군함에서 팔미도 등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등댓불이 깜박거리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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