極右 시댁과 極左 친정 사이에서 고뇌한 어머니/어머니와 내 마음속의 시계/새벽마다 울리는 어매의 전화/내 人生을 이끈 말 한마디/막내가 못 다한 말/한없이 외로웠던, 그러나 온유했던 사람/평생 직장생활을 한 낙관주의자/「호랑이 아줌마」의 살아가는 방식
◆ 極右 시댁과 極左 친정 사이에서 고뇌한 어머니
이념 갈등에서 벗어난 어머니를 기다린 건 아버지의 바람기였다
趙 周 淸 만화가·여행가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연세大 경영학과 졸업. 여행가·골프 칼럼니스트·사진작가. 1980년대 중반 이후, 1년에 평균 3개월 이상 해외에서 체류하면서 120여 개국을 여행.
남로당 경북도당 副책임자였던 외삼촌
흐뭇한 눈빛으로 황금 들판을 내려다보며 논둑에 홀로 앉아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농부에게 남루한 차림의 길 가던 맹인이 지팡이를 더듬으며 논둑길을 따라 다가왔다.
맹인은 다 떨어진 밀짚모자를 벗으며 『매제, 오랜만이네』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몇 년 만에 맹인이 되어 불현듯 나타난 손위 처남을 본 농부는 깜짝 놀란다.
막걸리 잔이 오가며 두 사람의 목소리는 커진다.
『빨리 무슨 청년단인가 거기서 손을 떼고 남로당에 입당하게. 자네를 위해 하는 소리야. 불원간에 좋은 세상이 올걸세』
맹인 처남의 설득에 매제 농부는 『형님이나 빨리 박헌영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소 마』라고 했다.
그 때 멀리서 우체부가 걸어오자 순경으로 착각한 맹인은 부리나케 일어나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언덕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농부는 나의 아버지였고 가짜 맹인은 어머니의 넷째 오빠인 나의 외삼촌이었다.
2대 독자인 아버지는 10대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어, 中農(중농)인 집안 살림을 더 일으켜 세웠다. 일본에 가서 새로운 영농법을 배워와 다수확王이 되기도 했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심취해 우리 집 사랑방에 야학을 세워 문맹자들을 깨우쳤다.
광복 후 나라가 좌우익으로 편을 가를 때 아버지는 우익의 선봉에 섰다. 무슨 청년단 안동부지부장이 되어 밤이 되면 완장을 차고 자경대(광복 후 마을경비를 맡은 조직)를 독려했다.
어머니의 친정인 나의 외가는 아버지의 고향과 같은 경북 안동 땅이지만 북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북후면의 토호 집안이었다.
일본으로 유학 간 외삼촌들이 셋째만 빼고 모두 좌익 사상에 몰입, 위로 둘은 일찌감치 월북하고 넷째인 가짜 맹인 외삼촌은 남로당 경북도당 副책임자를 지냈다.
오빠의 부음에 소리 없이 울던 어머니
그 외삼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에서 경찰에 사살되었다.
극우 시집과 극좌 친정 사이에서 어머니의 고뇌는 말로써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사상에 관한 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머니는 넷째 오빠의 비참한 부음에도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었다 한다. 나는 그 시절 어머니가 우물가 세숫대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세수하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어깨가 들먹이지 않았으면 우는 줄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가끔씩 외삼촌들을 비방해도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팽팽하던 좌우익의 긴장은 이듬해 6·25가 터지며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청도까지 내려갔다 돌아왔을 때 괴뢰군들이 병원으로 사용했던 우리 집은 「반동분자!」라는 붉은 경고문이 붙었지만 총알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6·25는 어머니에게 「左친정, 右시집」의 갈등을 깨끗하게 해소시켜 주었다. 더 이상 그 문제는 대두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농사에 전념하게 되었다.
6·25 직후의 혼란과 기아는 도시에서 만연했지, 자급자족하는 시골 농촌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와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좋은 시절이 찾아왔다. 2대독자인 아버지 후손으로 4남이 태어나자 할머니는 『우리 에미가 가을 무시(무우)뽑듯이 또 아들을 낳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가을 추수만 하고 나면 매년 한두 마지기 농토를 키웠다.
그러나 어머니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바람이 난 것이다.
마을 어귀 주막집에 이역에서 흘러온 작부 하나를 두고 동네 남정네들의 치열한 쟁탈전 끝에 아버지가 승리한 것이다. 「청계」라 불렸던 그 작부는 국민(초등)학교 2학년인 나의 눈에도 천박스럽지 않고 기품이 있었다.
아버지는 주막집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우리 집엔 먹구름이 덮쳤다. 어머니가 맏아들인 나의 형을 잡고 우는 것을 나는 먼발치에서 몇 번이나 보았다.
어느 저녁 나절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곤혹스런 심부름을 시켰다.
주막집 삽짝(사립문)을 매만지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마당으로 들어가 처마 끝을 보고 겨우 『아부지, 저녁 잡수러 오시래요』 했다.
기어 들어가는 고함을 질렀는데 문이 열리자 놀랍게도 청계가 붉은 치맛자락을 끌며 마당으로 내려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내 바지 주머니에 돈을 찔러 주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주막집에 안 계시더라』고 거짓 보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몇 번 짜릿한 돈맛을 보았지만 마침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돈 간수를 허술하게 하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돼 돈의 출처에 대한 추궁을 받고 실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매 한 대 꾸중 한 마디 하지 않고 돌아 앉아 눈물을 훔치며 『남편 덕 못 보는 여자는 자식 덕도 못 본다더니』 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게는 하늘을 찢고 땅을 가르는 벼락처럼 들렸다.
「청계」가 사라지고 찾아온 화창한 봄날
와락 어머니 치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자 어머니는 푼돈 몇 닢에 적에게 매수당해 제 낳은 에미를 배신한 둘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서해 주셨다.
우리 집안까지 들락거리던 청계는 아버지의 씨를 유산하고 그녀를 찾아온 오빠 손에 이끌려 안동을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어머니는 쓰라린 시련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아울러 어머니의 친정도 안정되었다. 어머니의 셋째 오빠는 일본 유학에서도 좌익에 물들지 않고 돌아와 북후면장으로 봉직하며 천석꾼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꽃 피고 새 우는 어느 봄날,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기차칸에 몸을 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 길에 오른 것이다. 나는 외사촌들과 놀다가 일찍 잠들었지만 어머니는 온 동네 친척·친구들과 얘기꽃을 피우느라 밤을 새웠다.
외가가 조상대대로 뿌리박은 북후면 옹천은 진주 姜氏(강씨) 집성촌이다. 한동네 모두가 친척이다.
쾌청한 이튿날 아침, 진달래로 덮인 마을 뒷산 콸콸 흐르는 개울가에 온 동네 친척들이 다 모였다. 남자들은 돼지와 닭을 잡고 솥을 걸어 불을 지피고, 여자들은 진달래꽃을 치마에 한아름씩 따와 찹쌀가루에 담은 뒤, 엎은 솥뚜껑에 전을 부친다.
지난 가을에 담아 겨우내 잘 익은 머루주·오미자주·더덕주가 나오고, 장구 장단에 창이 흐르자 덩실덩실 춤판이 벌어지고 화전놀이는 질펀하게 이어졌다.
내 평생 그렇게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2년 전에 어머니는 87세로 이승을 하직 했다. 행복했던 시간이 괴로웠던 시간을 상쇄하고도 제법 많이 남았던 인생이라 생각한다.●
◆ 어머니와 내 마음속의 시계
時針과 分針이었던 母子
高 元 政 소설가
1956년 제주 북제주 출생. 경희大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석사.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빙벽」, 「최후의 계엄령」, 「불타는 빙벽」 등.
시계 없는 집
늘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를 둔 탓에, 딸도 없는 외아들인 나와 어머니는 두 사람만의 어려운 생활에 진작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2학년 무렵의 2년 남짓한 기간은 그중에서도 심하게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아들을 위해서 방이 둘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1960년대 후반 내 고향 제주도 하귀리의 거의 모든 주택들이 그러했듯 초가집이었고 게다가 남의 집 바깥채였지만 내게는 궁궐처럼 느껴졌다. 나만의 방이라니….
주인집에서 광처럼 쓰던 방이라 눅눅한 곰팡내가 가시지 않았지만 혼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나만의 공간이 주는 나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어머니는 그런 나를 몰래 살피면서 눈물깨나 흘렸을 것 같다.
동네 형이 쓰던 것이기는 하지만 앉은뱅이 책상이 생겼다. 책상 앞에 앉았다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가를 반복하다가는 그만 자지러질 것 같은 만족감에 허공에 대고 발을 구르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내 고향 하귀리는 제주시에서 12km 정도 떨어진 마을로 당시는 시내버스의 종점이 있었다. 그래서 시내에 있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개 버스로 통학을 하곤 했다.
12km라면 지금은 바로 코앞처럼 느껴지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버스부터 고물인데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게다가 제주시내를 거의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등교길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오전 8시30분인 등교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6시30분에 출발하는 첫차나 6시50분에 떠나는 두 번째 버스를 타야만 했다.
아이들은 늦어도 오전 5시30분이면 일어나서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서야 했다. 그 어머니들은 아이들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우리 마을에서는 대개가 보릿짚이나 솔잎으로 밥을 짓곤 했다. 여름에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겨울이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애로사항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순전히 감으로 시간을 맞춰 일어나 밥을 짓고 나를 깨워야만 했다. 그러나 가난한 어머니의 머릿속 시계는 놀랄 만큼 정확했고, 나는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오전 6시30분 첫차를 타러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숙달이 되어서 어머니가 깨울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뜨였다.
어두운 방에 누워 달디단 잠의 여운을 즐기노라면 어머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 발소리는 아들이 아니라 마치 시아버지를 깨우러 오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부엌에서 나와 내 방 앞까지 불과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이나마 어머니는 아들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모두 헤아려 가면서 누워 있다. 내 방 앞에 멈춰서고도 잠시 망설이다가 어머니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투로 나를 부른다.
『원정아… 원정아』
울리지 않은 사발시계
그게 어머니와 나의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각각 시침과 분침이 된 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의 시계를 날마다 어김없이 작동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었다.
겨울날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머릿속 시계에 따라 일어나 아침을 지으셨다. 밥 뜸을 들이는 동안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살펴도 먼동이 터오는 기척도 없더라는 것이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싶어서 부엌 앞을 서성이는데 대문 밖 골목길로 사람들이 두런거리며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첫차를 타러 나가는 이들이라면 너무 늦은 셈이니까. 어머니는 밖으로 달려나가 물었다고 한다.
『지금 시간이 몇 시요?』
『첫차 타러 나가는 길인가요?』
지나가던 마을 청년들이 낄낄거리고 웃더란다.
『첫차 타러 가는 게 아니고 지금 막차 타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막차는 밤 12시경에 하귀리 종점에 닿게 되어 있었으니 어머니는 늦은 게 아니라 무려 네댓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버린 것이었다. 후에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겁이 덜컥 나더라…』
당신의 머릿속 시계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며칠 후 사발시계를 하나 사 오셨다. 어떻게 돈을 마련하셨는지 지금도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 책상 위에는 사발시계가 놓이게 되었고, 잠이 들기 전에 그 시계를 어머니 방으로 옮겨 놓는 것이 우리 母子의 생활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의 사발시계는 「때르릉」거리며 요란하게 울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 시계는 그저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일 뿐, 어머니와 나의 마음속 시계는 단 한 번의 고장으로 족하다는 듯 다시 이상 없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나는 어머니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미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나를 깨우시는 그 목소리….
『원정아…』●
◆ 새벽마다 울리는 어매의 전화
세상을 긍정하는 새로운 힘을 주는 어머니의 목소리
趙 熙 文 상명大 영화학과 교수·同 예술대학장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大 영화과 졸업. 중앙大 대학원 영화 석사·박사. 공연윤리위원회 전문심의위원,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現 문화관광부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회 위원.
宗家의 흥 많은 셋째 딸
『내다. 별일 없나?』
오전 6시쯤에 집에 걸려오는 전화는 고향의 「어매」가 보내는 「모닝 콜」이다.
말은 자식의 안부를 묻는 것이지만 정말로 안부가 궁금해서 하는 전화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힘들게 지내고 있는데, 큰 자식이라고 부모 안부도 제대로 챙기지 않느냐는 핀잔과 하소연이 섞인다. 이럴 때는 맞장구가 최선이다.
우선 어디 불편한 데가 없냐고 안부를 묻고 『힘든 일 하느라 고생 많으시네』라며 기분을 맞춰 드려야 한다. 그러면 『어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느냐』, 『여러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다 해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는 설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다.
어매는 동래 정씨 매오공派(파)의 18대 宗家(종가)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와 언니 둘이 있었지만 오빠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의 별실 마을은 동래 정씨 집성촌이다. 200여 호쯤 되는 마을은 모두가 한집안이어서 서로가 「아재」와 「아지매」들이었고 어린 축들은 「히야」(형)거나 「오빠」나 「누야」(누나)였다.
집성촌 동네는 마을 전체가 한가족이나 마찬가지여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과 서열이 엄하다. 종갓집 장손의 위상은 동네 안에서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친척이라도 종손에게는 깍듯이 예를 갖추며 대한다.
종손 또한 어릴 때부터 예절을 몸에 익히고 배워 어른이 된 뒤의 위엄이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하다. 아들이건 딸이건 종갓집 출신들은 대체로 과묵하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우면서 위엄이 배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래 정씨 매오공파의 종가집 가풍도 셋째 딸의 흥을 막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안 분위기가 엄하고, 남녀 유별이 분명한 집안이지만 셋째 딸은 온 동네를 놀이터 삼아 마실(마을) 다니는 일을 일과처럼 즐겼다.
단오날의 그네판, 씨름판을 빼놓지 않고 다녔다. 첫째와 둘째 딸에게는 엄했던 외조부셨지만 셋째 딸의 행동을 귀여운 재롱쯤으로 여겼다고 한다. 종갓집 셋째딸은 부족한 것 없이 고생 모르고 성장기를 보냈다.
모든 게 정반대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매의 인생이 바뀐 것은 결혼을 하면서였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인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나마 조부는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가난한 집안의 유복자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성장기 동안 스스로 생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를 몸에 새기며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군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했는데, 시골인 경북 상주 출신의 청년으로서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혼인으로 새 살림을 꾸렸지만 생각과 행동은 너무도 달랐다. 부족한 것 없이 명랑 쾌활하게 자랐던 종갓집 셋째 딸은 숟가락 하나 변변하게 없는 집안에 오로지 신랑 하나 믿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편모 슬하에서 사무치도록 가난하게 살다가 성혼한 아버지는 기어코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오로지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모으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는 논과 밭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그럴수록 스스로 감격했고 자부심은 더 커졌다.
군청에서 면사무소로 근무지가 바뀌고, 여기저기 전근을 다녀도 몇십 리 길을 자전거로 출퇴근했고, 도시락은 꼭 챙겼다. 술값에 돈을 쓰거나, 비싸다 싶은 옷이나 가재도구를 사는 일들은 「정신 나간 짓」들이었고, 유행을 좇아 멋을 내는 사람들은 「나라 망하게 할 놈들」로 단정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방식을 아버지는 철저하게 믿었다.
아버지가 40여 년 동안 타던 자전거는 얼마 전에 상주市에서 세운 자전거 박물관에 전시 중이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쓰던 교과서와 영어사전을 지금도 가끔씩 들여다보며 교재로 삼고 있을 정도다.
이런 두 사람이라 일을 처리하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이 늘어날수록 품앗이가 늘어난다. 농사일은 때를 놓치면 결딴난다. 하루 이틀 사이에 함께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온 동네가 같은 시기에 바빴다가 놀았다가 한다. 필요할 때 품앗이 일손을 구하는 일은 동네 사람들의 인심에 따라 달랐다.
어매는 어떻게든 동네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웬만하면 손해보며 남 섭섭하게 하는 일은 삼갔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손해라도 아까워 했고, 이해가 걸리는 일에는 완강하고 단호했다.
50년 한결같은 夫婦의 다툼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적었지만 그럴수록 주변의 인심은 썰렁했다. 어매는 천성적인 인정과 낙천성으로 그 틈을 메웠다. 험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새색시는 몸을 쪼개다시피 논일, 밭일을 감당하는데도 퇴근하자마자 안달을 하며 집에 들어서는 남편은 모자라고 마음에 안 드는 일만을 집어내 타박을 하거나 역정을 냈다. 같은 시골 출신인데도 성장 환경과 성격의 차이는 부부가 된 뒤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50년 세월에도 그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만큼 주름이 늘었고, 4명의 자식들이 커서 저마다 살림을 꾸리고 있지만 농사는 여전히 주업이다.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한 아버지가 직접 농사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옛날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잔소리에 어매가 반격하는 일이 잦아지기는 했지만 물건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모으고 쌓아두려는 아버지의 성격과 만사에 너그럽고 편안하게 살면 좀 좋으냐는 어매의 천성은 여전하다.
이제는 힘든 농사일 그만두고 편히 지내시라 하면 어머니는 『일을 하니까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자식들에게 쌀이며 반찬거리들을 나눠주는 것이 낙인데 왜 그만두느냐』며 손을 젓는다.
오전 6시쯤에 울리는 어매의 전화는 항상 긍정하며 살아온 당신의 한평생에 대한 확인이자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세상을 긍정하며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은 전화를 받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내 人生을 이끈 말 한마디
『얘야 일어나라!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얘야』
愼 達 子 시인·명지전문大 문예창작과 교수
1943년 거창 출생. 숙명女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박사. 「현대문학」으로 등단. 평택大 국문과 교수 역임. 現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대한민국 문학상 등 수상. 저서 「물위를 걷는 여자」, 「어머니, 그 삐뚤비뚤한 글씨」 등.
『일어나야제』
3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다. 어머니가 눈을 감으신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가 딱 막힌다. 내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내 어머니가 땅에 묻히셨는데도, 세상은 아무런 표정 없이 잘 돌아가는 데서 끓어오르는 배신감을 받은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내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다른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내 어머니는 달랐다. 죽음이 제아무리 능청맞고 냉혹하고 무지하다 할지라도 내 어머니에게 손을 뻗쳐 올 줄은 몰랐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나를 일으키는 두 팔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다정하게 나를 안아 일으킨 적은 없다. 두 팔의 이미지는 순전히 정신적인 명령이요 힘이라고 해야 맞다.
일곱 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다 나는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금방 피가 흘러 나는 으앙으앙 울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놀란 기색 없이 『일어나야제』 한 마디뿐이었다.
일어나지 않으면 어머니 혼자 발걸음을 옮길 기세여서 나는 어리광을 피울 여유 없이 혼자 일어났다. 그런 날 이후 어머니는 늘 내게 『일어나라』라는 말을 했다. 은유이기도 하고 실제적이기도 한 이 일어나라라는 말은 지금 어머니 이름과 함께 늘 내 가슴에 도는 말이다.
튼튼한 두 발을 가졌음에도 어머니는 내가 늘 부실하게 넘어지는 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땅의 길에서 아니면 인생 길에서 조마조마하게 넘어질 것 같은 불안을 어머니는 내게서 감지한 모양이다.
어머니의 그런 감지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젊은 날의 나는 궁금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이 들면서 어머니가 되고 자식을 길러 보면서 그 뛰어난 神의 능력 같은 감지력은 바로 사랑이었고, 어머니라는 초인에게만 얻어지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안 먹는 아이에게는 먹으라고 말하고, 잠을 못 자는 아이에게는 잘 자라고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것이 어머니인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불안을 보았던 것일까. 어린아이 때는 「넘어지지 마라」라고 당부하던 것이 서서히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일어나라, 자 혼자 일어나야지」로 말이 바뀌었던 것이다.
「혼자 일어나는 일」이 인생
이미 넘어진 아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배신하고 좋아하는 남자를 찾아 떠나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내 인생에서 넘어진 아이로 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 맞아요, 나는 넘어진 아이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자꾸만 넘어집니다. 한번 넘어지니까 아무리 바로 서려고 해도 넘어지고 다시 넘어지는 아이입니다. 어머니, 무릎은 이미 흠집투성이고 온몸은 멍이 들었습니다.
피가 엉겨 까맣게 늘 딱지가 앉아 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나는 다시 걷고 다시 걸어갑니다. 때문에 어머니 목소리는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예순이 될 때까지 어머니는 내게 말합니다. 얘야 일어나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났을 때 나는 혹심한 고통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에 있었다.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 과로가 거의 절정에 있을 때 나는 쓰러졌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차라리 죽는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땅속 아래로 땅속 아래로 꺼질 듯 빠져 늪의 함몰처럼 생명이 꺼지는 마지막 찰라 나는 낯익은 목소리를 듣는다.
「얘야 일어나라!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얘야」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나를 향한 마음의 화살은 어머니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나를 향한 돌보심의 눈길은 돌리시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어머니는 갔지만 죽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자꾸만 넘어지는 딸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아,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가장 긴요할 때 비상약으로 나를 구하시려고 이 말을 오래 연습을 하고 계셨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치명적으로 넘어질 것을 어머니는 일찍 보셨던 것일까. 혼자 일어서는 일이 내 생애에 잦을 것을 어머니는 염려하고 계셨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떠나 도회지로 갈 때 어머니는 내게 『이젠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라고 입술을 꾹 누르고 말했다.
내 어머니는 천재다. 그렇다, 혼자 일어나는 일,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망망한 도회지 생활에서의 자립심을 혼자 일어서기의 은유로 말했겠지만 결국 어머니의 말은 내 인생의 확실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대로 나는 오래 혼자 일어섰다. 어리광도 피우지 못하고 못 일어나겠다고 깡을 부리지도 못하고, 『나 안 일어나!』 하고 협박할 곳이 없이 나는 혼자 넘어지고 혼자 일어섰던 것이다.
굶주린 호랑이의 벌린 입보다 더 무서웠던 외로움을 밥으로 먹으며 나는 일어서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살아 있으나 늘 평지를 걸어도 넘어질 것 같아 한발 한발을 조심히 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조심하는데도 어쩌다 넘어지면 나는 입을 닫고 귀를 연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연히 내게 속삭이기 때문이다.
『얘야 일어나라,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얘야!』●
◆ 막내가 못 다한 말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이겨 낸 어머니, 당신의 삶은 위대했습니다
具 孝 書 소설가
1958년 경기 강화 출생. 목원大 국어교육과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現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저서 「애별」,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등.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
어머니.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으면서도 어머니 생전에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줄곧 「엄마」라고 불렀지요. 그랬습니다. 저는 당신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당신의 어린 막내며느리도 마흔을 훌쩍 넘겼습니다. 저는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마흔이라면 이제 조금은 어리게 느껴집니다. 그 마흔에, 어머니는 이미 자식을 열이나 낳으셨습니다. 그중에 제가 끝이었지요. 어머니는 10년 동안 임신 중이셨습니다. 그 몸으로 고된 농사를 지으시고, 숟가락 하나밖에 없던 집안 경제를 지탱하시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저는 도무지 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막내인 저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기억들이야 평생을 되짚은들 다함이 있겠습니까마는, 왜일까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경기도 부천 대현9차 19평짜리 제 아파트를 다녀가시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생각나세요? 제 집에 오실 때마다 꼭 바나나 우유 두 통을 비닐봉지에 싸서 들고 오셨던 거. 그때 애들이 바나나 우유를 유난히 좋아했었잖아요. 굽은 허리로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온 할머니에게 애들은 인사하는 것도 잊고 당신의 손에 들린 바나나 우유를 빼앗다시피 차지했습니다.
어머니는 편안히 눕지도 드시지도 못 하고 아버지 저녁 해드려야 한다며 일찌감치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당시 75번 버스를 타고 개봉동에 가서 다시 33번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요. 저는 어머니를 겨우 아파트 모퉁이에서 배웅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들어가란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와 버리곤 했습니다. 그 장면이 이토록 오래 남아 가슴을 오그라들게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고생한 누님들, 쌀밥 먹은 아들들
형제들 중에 대학까지 나온 것은 저뿐이었습니다. 누님들은 학교를 겨우 2~3년 다니다 말거나, 기껏해야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위의 누님들은 밑의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농사를 돕느라 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큰누님은 오줌 싸는 동생들 업어 키우느라 「등짝이 썩어나던」 일들을 기억하며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요.
낮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고, 밤에는 물레질을 하거나 무명을 짜느라 누님들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물을 긷고 텃밭을 매고 새참을 내 가고 무명실을 표백했습니다. 쌀밥이란 것도 형이 태어나고 나서야 처음 했다는데, 그것도 형을 위해 달랑 한 그릇을 따로 지었을 뿐이랍니다. 귀한 쌀을 볶은 미음을 먹은 것도 제가 처음이라더군요. 누님들이 어쩌다 쌀밥 몇 알갱이를 몰래 입에 넣었다가 어머니에게서 경쳤다고도 하네요.
지난해 봄이었던가.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왔습니다. 어머니 얘기를 시리즈로 찍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무척 좋아하셨던 탤런트 「고두심」 편도 찍었다기에 저도 찍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한테 마지막으로 짜 주신 강화도 화문석 위에 앉아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풀어 나갔지요. 그 화문석을 짜던 어머니의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정월이면 펼쳐 보던 「토정비결」 책도 찍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답니다.
새벽 아궁이 앞에서 暗算(암산)으로 가계부를 정리하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화문석을 짜 제 학비를 대던 얘기를 했고, 한겨울 농한기에 추운 들판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하던 모습들을 떠올렸습니다.
이틀 방영분을 채우기 위해 촬영팀은 누님들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큰누님은 6·25 때 어머니와 풀죽을 쑤어 먹던 얘기를 했고, 둘째 누님은 육십갑자를 달달 외우는 어머니의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했고, 셋째 누님은 병으로 다 죽어 가던 자신을 정성으로 살려낸 어머니를 기억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넷째 누님은 중학교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진학하지 못했던 설움을 말했습니다.
이틀분을 촬영하는 데 나흘이나 걸렸습니다. 촬영 덕분에 오랜만에 모든 형제들이 어머니를 맘껏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촬영도 방영도 잘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 차례로 등장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머니의 不在(부재)가 문득 사무쳤습니다.
방영이 끝난 뒤 저는 형제들께 묻고 싶어졌습니다.
『누님들 말 듣고 울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형님과 누님들은 한결같이 어머니의 온화하고 지극했던 사랑만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어머니 편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두심」 편도 그랬고, 「백기완」 편도 그랬거든요. 다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얘기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막내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고 부족함을 정말 못 느꼈지만, 누님들은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생을 등에 업어 줄 때마다 어머니는 공연히 등짝을 후려쳤었다』고 큰누님은 언젠가 말했고, 둘째 누님도 언젠가, 『야야, 말도 마라. 어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분인 줄 아니』 라고 말했던 걸 저는 기억하거든요.
쌀밥도 형과 나를 위해서만 지었다지 않습니까. 어찌 어머니에 대해 좋은 기억만 있겠습니까. 그토록 많은 노동에 비해 우리 가족이 끝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안에 숨겨진 숱한 원망과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묻고 싶어졌던 거지요. 정말 어머니가 누님들한테도 좋기만 한 분이셨냐고, 솔직히 말해 줄 수 있겠느냐고….
어머니.
누님들의 대답만 들려 드리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큰누님의 말입니다.
『그럼, 세상에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은 없으셨어』
둘째 누님의 말입니다.
『그래, 그러셨지』
제 질문입니다.
『정말요? 누님들한테도 정말 그랬나요?』
셋째 누님이 저한테 하는 말입니다.
『쟤는… 몰라서 묻니?』
넷째 누님의 말입니다.
『나도 아직 우리 엄마 같은 분 못 봤어』
어머니.
텔레비전 다 볼 때까지 저 울지 않았는데요, 누님들 말 듣고 울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이렇게 기억되는 어머니는 행복한 거 아닌가요?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어머니. 당신의 생은 위대했습니다.●
◆ 한없이 외로웠던, 그러나 온유했던 사람
열세 살 딸의 詩를 읽던 어머니의 수줍음
李 珍 明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작가세계」로 등단. 한국문학학교 시창작 강사.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등.
13세 소녀 시절
어머니의 이름은 玉順(옥순)이었다. 이름처럼 온유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 삶이야 온유하고 온순한 것이 결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性情(성정)은 내내 그러하였다.
어머니는 큰소리가 없었고 짜증을 내거나 화내거나 하는 적이 없었다. 신경질내는 일도 없었다. 참을성이 많았고 책임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특별하게 드러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어머니의 부끄러워하는 얼굴 모습에서 살짝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때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내내 동시를 짓고 상을 받고 그랬는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도 여전했던 것 같다. 국어숙제에 자유시 지어오기가 있는 날이면 그 숙제만큼은 심혈을 기울여 밤이 늦도록까지 기껍게 쓰곤 했으니, 한 편 써 오라고 하면 두 편 써 가고, 두 편씩 써 오라고 하면 세 편을 써 갔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나는 불량한 쪽으로는 빠지지 못했고, 문학책 읽기와 일기쓰기, 詩짓기에 빠졌던가 보다. 詩쓰기 숙제를 마쳐 놓고는 제 흥에 겨워 밥상머리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읽어 주고 싶어 했다. 밥상머리에다 내가 쓴 詩 좀 보라고 노트를 디밀기도 했다.
우리 가정의 분위기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하다면 어색할 「내가 쓴 詩 좀 보라」는 주문에 아버지는 무표정, 유구무언이었다. 한 가닥 표정의 움직임도 없이 뜨던 밥과 국을 그대로 뜰 뿐이었다.
13세 소녀의 기대가 너무 무참하게 깨졌겠다고? 그렇진 않았다. 내 뜬금에 겨운 일이었으니 봐주면 좋았고 안 봐줘도 그만이었다. 어른들에겐 내가 모르는 어른들만의 고민이 많지 않겠는가.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의 경우란 소통 不在(부재)의 독존이니까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아주 수줍게 웃음 가득 띤 얼굴로 말했다. 자신은 여학교 때 작문시간만 되면 제일 부끄러웠다고. 발표도 못 하고 정말 혼났다고. 작문시간이 제일 어려웠다고. 내 詩 낭독을 다 듣고 내 詩 노트를 한 손에 쥐고 들여다보며 여학생 시절 작문시간을 떠올리셨다.
외로운 사람
그때 어머니의 만면에 띤 수줍은 웃음은 어머니 여학생 시절의 수줍음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여학생 교복을 입은 어머니의 옛 사진이, 어머니가 일제시대 때 공부한 수학공책, 기하공책, 가사공책, 한문공책 등이 떠올랐다. 그 공책마다 정확하고 단정하고 반듯하게 쓰인 글자들이 단아했다. 수예공책에 끼워진 명주 색실들의 여태껏 변하지 않고 있는 선연한 빛깔들이 떠올랐다.
지금 옛날의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약간 굳어지고 땀이 솟는 듯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겐 인자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한테는 인자하지 못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라고 무슨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무엇으로 배우기라도 했는지 자신에 대한 표현이란 게 없었다. 아예 잊은 것인지 그래서 잃은 것인지 어머니에게는 자기 표현욕구라는 게 없었다.
그런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참 수줍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중심에 놓는 걸 일삼아서야 어떻게 잠잠히 살 수 있겠는가. 본인보다도 주변과의 삶이 어떻게 잠잠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그렇게 살다 더 잃을 것도 없어졌는지 일찍 돌아가셨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아, 나는 그때 어머니가 일찍 잘 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고생이 비로소 그친 거라고 생각했으니. 어머니의 아버지와의 삶이란 반려의 삶이 아니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종일 집안에서 끝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이 세상 마지막에 강력한 자기 표현을 하고 간 셈이 됐다. 아직 성인이 다 되지 못한 고만고만한 네 아이들을 떨궈놓고 「이젠 할 수 없다」, 「이젠 이 몸을 부릴 수 없다」 하고 간 셈이었으니 말이다. 암이라는 병이 어머니를 데려간 것이 아닌 어머니 스스로 가야겠기에 간 것이라 믿어본다. 참는 것이 사는 일이라고만 안 어머니가 마지막 길에는 참지 않는 자기를 마침내 표현한 것이라고.
어머니의 喪中(상중)에 어머니의 동네 친구가 문상 와서 말했다.
『너희 엄마는 손이 노는 걸 본 적이 없다. 일찍 가시려고 평생 할 일을 그렇게 미리 하셨나 보다』
가정적이지 못하고 몰인정한 아버지도 상중에 한마디 했다.
『너희 엄마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제 힘을 다하여 애쓰며 살다 갔다. 진정 외로운 사람만이 애쓰며 제 힘을 다하여 살다 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평생 직장생활을 한 낙관주의자
『좋은 생각만 하고, 최선을 다 해. 다 잘 될 거야!』
金 昌 起 김창기정신과 원장
1963년 전남 광주 출생. 연세大 의대 졸업. 그룹 「동물원」에서 가수 활동. 저서 「당신의 아이에게도 리듬이 있다」, 번역서 「단 일분만이라도 다르게 생각하자」 등.
혜화동의 노을진 언덕길
어머니께선 평생 직장에 다니셨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생 때부터 연애를 했던 아버지와 결혼하신 어머니는 방송국 PD가 되셨다. 연년생으로 우리 형제를 낳으시고 나서 방송국을 그만두셨고, 대사관, 무역회사, 학교, 금은방 등 여러 직장을 다니셨다.
환갑을 한참 넘기신 지금도 아버지께서 운영하는 유학원에서 일하신다. 그렇기에 「어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퇴근하실 어머니를 기다리던 혜화동의 노을진 언덕길이다.
우리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은 저녁이면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에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럴 때면 이웃집에서는 밥 냄새가 났고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에겐 사랑과 그리움이란 감정이 허기짐과 연결되곤 한다.
여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하면, 형은 동생을 안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형은 재미있는 노래를 많이 알았고 노래를 참 잘했다. 지루해서 괜히 돌멩이만 걷어차던 나도, 울보 동생도, 형이 노래를 부르면 따라 불렀다.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할머니는 우리를 고아원에서 구걸 나온 아이들 같다면서 야단 치셨지만, 어머니를 기다리는 우리의 의식을 막지는 못하셨다.
저 멀리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제일 먼저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형은 동생을 데리고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선 언제나 『누구네 집 아이가 저렇게 잘생겼나 했더니 우리 둘째였구나』하는 판에 박힌, 그러나 늘 들어도 기분이 좋은 말씀과 함께 나를 안아 주곤 하셨다.
결국 어머니의 품은 동생의 차지가 되었지만, 언덕길을 올라갈 때 우리는 어머니를 에워싸고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 고주알 말씀드리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야행성 가족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이시다. 내가 어른이 된 지금은 그런 소녀 같은 어머니가 못마땅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낙관적인 말 한마디는 우리 형제의 마음을 밝히는 빛이었다.
친구와 싸웠거나, 선생님이나 할머니께 꾸중을 들었거나, 시험을 망쳤거나, 교회에서 독창을 하게 되어 너무 떨릴 때에도, 어머니는 늘 『좋은 생각만 하고, 최선을 다해. 엄마가 너와 함께 있잖아?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루스가 던질 만한 대사를 읊곤 하셨다.
어머니께선 회사에 다니느라 우리의 주요 대사들에 거의 동참하지 못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엔 어머니께서 볼을 쓰다듬어 주시며 그렇게 말하시면 정말 그렇게 되곤 했었다.
방 두 칸에 쪽마루뿐인 집이었지만 「왕 로맨티스트」들인 부모님께선 TV는 없어도 피아노는 있어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 형제들을 씻겨 주신 후 젖은 우리의 머리카락을 말리는 장난에 지치면, 어머니께서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셨다.
어머니께선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외할아버지 몰래 이화여대 음대에 원서를 내셨는데, 결국 외할아버지에게 들켜 영문과에 가게 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멀리 남산이 보이는 창문 곁에 있는 피아노 앞에 모인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노래에 화음을 넣으며 장난을 치곤 했다. 가끔 남산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면 우리는 더욱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고,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전방에서 집에 오실 때면 우리의 노래는 거의 고함 수준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좁은 어머니의 방에서 어머니와 장난을 치고, 어머니께서 읽어주시는 동화에 귀기울이는 시간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께선 전형적인 야행성 인간이기에 우리는 자정을 알리는 방범대원의 호루라기 소리를 들어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새벽이면 우리는 호랑이 같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언, 전도서 같은 「구약 성경」을 읽거나 「천자문」이나 「명심보감」을 공부해야 했는데, 늘 잠이 부족했던 우리는 당연히 자기가 읽는 차례가 아닐 때는 졸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회초리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 덕분에 우리 형제는 모두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적(혹은 비현실적), 야행성 인간들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낙관적 인생관은 배우지 못했다.
무엇인가 걱정거리가 생기면 어머니께선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시곤 『좋은 생각만 하고, 최선을 다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요즘은 어머니 말씀의 약발이 좀 떨어진 것 같다.●
◆「호랑이 아줌마」의 살아가는 방식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
任 珍 模 음악평론가
1959년 경기 부천 출생. 고려大 사회학과 졸업. 경향신문 내외경제신문 기자. 現 음악평론가. 저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 「우리 대중음악의 큰별들」.
戰士, 女帝, 독재자
학창 시절에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는 속담을 국어선생님한테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뜨끔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도 먼저 말 많은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집 장맛이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 집이든, 동네에서든 알아줄 만큼 말이 많으신 분이었다.
지금이야 말 많은 게 더러 미덕이기도 하지만 과거 우리 삶은 「침묵은 금」이 철칙이었다. 그래서 여러 면에서 자랑스러운 어머니였지만 말이 많다는 점만은 자식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부분이었다. 창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되면 어머니를 이기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승부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행여 두 분이 다투었던 순간에 아버지가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알았어. 제발 그만해! 그만 좀 얘기하란 말이야!』
형, 둘째인 나, 여동생들 누구도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수다는 나중에 며느리들도 깨끗이 손 들 정도였다. 제사나 명절이면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항상 두통약을 사달라며 한마디 소감을 털어놓았다.
『어머님이 재미있으시기는 한데요. 쉬지 않고 계속 말씀하시니까 듣고 나면 머리가 어지러워요』
말이 많으면 필시 거칠고 공격적으로 흐르는 법. 어머니는 논리와 非논리가 뒤엉킨, 그리고 템포와 중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강성의 언어들로 늘 우리 집에선 戰士(전사)요, 女帝(여제)요, 독재자로 군림했다.
고향인 경기도 소사 심곡동은 내가 어릴 적에 열쇠집, 양씨네, 엄씨네, 백화점집, 주유소집, 여관집, 쌀집 등 다채로운 직업군이 모여 도란도란 살아가는 동네였다. 평상시에는 제사떡도 나눠먹고, 여름에는 수박과 콩국수를 돌리는 나름대로 단란한 공동체였지만 사소한 문제로 갈등이 폭발해 분쟁이 생기면 이웃의 어떤 사람도 어머니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터프 우먼, 호랑이 아줌마였다.
동네 창피를 견디지 못한 내가 한 번은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엄마, 좀 조용히 살면 안 돼? 그렇게 세게 말하면 딴 사람들도 당연히 기분 나쁘죠! 나 같아도 열 받겠어』
그러나 어머니의 응대는 한사코 강경하고 단호했다. 자식은 물론, 주위 사람이 선의의 충고를 건네도 요지부동이었다.
『야, 잔소리 마!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고 했어. 그럼 저렇게 나오는데 가만있냐? 난 말 안 하면 죽는다!』
수다가 아름답게 들리던 날
성인이 돼서도 더러 괴로웠던 부분은 혹시 내가 어머니의 그 아킬레스건을 물려받은 것 아니냐는 점이었다. 내가 사람들과 모여 조금 길게 말을 늘어놓게 되거나, 방송에서 주절주절 떠들게 될 때면 「이거 나도 엄마 닮은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실제로 7년째 게스트로 출연 중인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 배철수씨로부터 사석에서 핀잔을 들은 경험도 있다.
『아무리 평론가가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지만 임진모씨 너무한 거 아냐? 오늘 밥은 내가 사는데, 지금 당신이 다 떠들고 있잖아!』
4년 전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 난 음악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면서 자금 부족으로 쩔쩔매고 있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 집에 자주 들르곤 했지만 그날따라 어머니의 표정이 묘했다. 물론 말이 많은 것은 같았지만 왠지 차분한 모습이었다.
『둘째야, 너 요즘 많이 힘들지. 얼굴만 봐도 안다. 말을 안 하고 살면 남도 속 터지는 거야. 나한테 화통하게 말해봐. 돈 좀 빌려 달라구』
그리곤 갑자기 200만원이 담긴 봉투를 내미셨다. 그 돈은 자식들이 생활비로, 용돈으로 틈틈이 드린 돈을 당신께서 안 쓰고 모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받을 수 없었지만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면서 특유의 긴 말씀을 이어가셨다. 세상에 수다가 그렇게 아름답게 들린 적도 없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야. 아무리 자식이라도 할 얘기, 못 할 얘기가 있는데 나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 후련하다. 너 술 한잔 할래? 내가 받아주마!』
우리 자식 다섯은 때로 질리게 할 정도로 많은 말이 어머니만의 인간관계, 상황인식의 방법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임을 이제는 안다. 그리하여 그 수다와 일방적 언사가 「어머니의 實存(실존)」임을 깨우치고 그것을 기꺼이 또 즐거이 청취한다.
올해 들어 어머니는 간경화와 당뇨가 겹쳐 자주 의식을 잃으면서 벌써 세 번째 병원에 입원하셨다. 노화로 말씀이 눈에 띄게 준 데다, 병실에서는 한 마디 하려 해도 무진 애를 쓰셔야 한다. 옆의 여동생은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며 눈물을 쏟는다.
『엄마, 얘기 좀 해봐. 말하는 것 좋아하잖아, 빨리! 다 들어줄게요!』
어서 어머니가 쾌차해 전처럼 듣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시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수다가 그립다.●
◆ 極右 시댁과 極左 친정 사이에서 고뇌한 어머니
이념 갈등에서 벗어난 어머니를 기다린 건 아버지의 바람기였다
趙 周 淸 만화가·여행가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연세大 경영학과 졸업. 여행가·골프 칼럼니스트·사진작가. 1980년대 중반 이후, 1년에 평균 3개월 이상 해외에서 체류하면서 120여 개국을 여행.
남로당 경북도당 副책임자였던 외삼촌
흐뭇한 눈빛으로 황금 들판을 내려다보며 논둑에 홀로 앉아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농부에게 남루한 차림의 길 가던 맹인이 지팡이를 더듬으며 논둑길을 따라 다가왔다. 맹인은 다 떨어진 밀짚모자를 벗으며 『매제, 오랜만이네』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몇 년 만에 맹인이 되어 불현듯 나타난 손위 처남을 본 농부는 깜짝 놀란다.
막걸리 잔이 오가며 두 사람의 목소리는 커진다.
『빨리 무슨 청년단인가 거기서 손을 떼고 남로당에 입당하게. 자네를 위해 하는 소리야. 불원간에 좋은 세상이 올걸세』
맹인 처남의 설득에 매제 농부는 『형님이나 빨리 박헌영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소 마』라고 했다.
그 때 멀리서 우체부가 걸어오자 순경으로 착각한 맹인은 부리나케 일어나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언덕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농부는 나의 아버지였고 가짜 맹인은 어머니의 넷째 오빠인 나의 외삼촌이었다.
2대 독자인 아버지는 10대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어, 中農(중농)인 집안 살림을 더 일으켜 세웠다. 일본에 가서 새로운 영농법을 배워와 다수확王이 되기도 했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심취해 우리 집 사랑방에 야학을 세워 문맹자들을 깨우쳤다.
광복 후 나라가 좌우익으로 편을 가를 때 아버지는 우익의 선봉에 섰다. 무슨 청년단 안동부지부장이 되어 밤이 되면 완장을 차고 자경대(광복 후 마을경비를 맡은 조직)를 독려했다.
어머니의 친정인 나의 외가는 아버지의 고향과 같은 경북 안동 땅이지만 북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북후면의 토호 집안이었다.
일본으로 유학 간 외삼촌들이 셋째만 빼고 모두 좌익 사상에 몰입, 위로 둘은 일찌감치 월북하고 넷째인 가짜 맹인 외삼촌은 남로당 경북도당 副책임자를 지냈다.
오빠의 부음에 소리 없이 울던 어머니
그 외삼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에서 경찰에 사살되었다. 극우 시집과 극좌 친정 사이에서 어머니의 고뇌는 말로써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사상에 관한 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머니는 넷째 오빠의 비참한 부음에도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었다 한다. 나는 그 시절 어머니가 우물가 세숫대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세수하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어깨가 들먹이지 않았으면 우는 줄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가끔씩 외삼촌들을 비방해도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팽팽하던 좌우익의 긴장은 이듬해 6·25가 터지며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청도까지 내려갔다 돌아왔을 때 괴뢰군들이 병원으로 사용했던 우리 집은 「반동분자!」라는 붉은 경고문이 붙었지만 총알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6·25는 어머니에게 「左친정, 右시집」의 갈등을 깨끗하게 해소시켜 주었다. 더 이상 그 문제는 대두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농사에 전념하게 되었다.
6·25 직후의 혼란과 기아는 도시에서 만연했지, 자급자족하는 시골 농촌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와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좋은 시절이 찾아왔다. 2대독자인 아버지 후손으로 4남이 태어나자 할머니는 『우리 에미가 가을 무시(무우)뽑듯이 또 아들을 낳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가을 추수만 하고 나면 매년 한두 마지기 농토를 키웠다.
그러나 어머니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바람이 난 것이다.
마을 어귀 주막집에 이역에서 흘러온 작부 하나를 두고 동네 남정네들의 치열한 쟁탈전 끝에 아버지가 승리한 것이다. 「청계」라 불렸던 그 작부는 국민(초등)학교 2학년인 나의 눈에도 천박스럽지 않고 기품이 있었다.
아버지는 주막집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우리 집엔 먹구름이 덮쳤다. 어머니가 맏아들인 나의 형을 잡고 우는 것을 나는 먼발치에서 몇 번이나 보았다.
어느 저녁 나절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곤혹스런 심부름을 시켰다.
주막집 삽짝(사립문)을 매만지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마당으로 들어가 처마 끝을 보고 겨우 『아부지, 저녁 잡수러 오시래요』 했다.
기어 들어가는 고함을 질렀는데 문이 열리자 놀랍게도 청계가 붉은 치맛자락을 끌며 마당으로 내려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내 바지 주머니에 돈을 찔러 주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주막집에 안 계시더라』고 거짓 보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몇 번 짜릿한 돈맛을 보았지만 마침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돈 간수를 허술하게 하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돼 돈의 출처에 대한 추궁을 받고 실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매 한 대 꾸중 한 마디 하지 않고 돌아 앉아 눈물을 훔치며 『남편 덕 못 보는 여자는 자식 덕도 못 본다더니』 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게는 하늘을 찢고 땅을 가르는 벼락처럼 들렸다.
「청계」가 사라지고 찾아온 화창한 봄날와락 어머니 치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자 어머니는 푼돈 몇 닢에 적에게 매수당해 제 낳은 에미를 배신한 둘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서해 주셨다.
우리 집안까지 들락거리던 청계는 아버지의 씨를 유산하고 그녀를 찾아온 오빠 손에 이끌려 안동을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어머니는 쓰라린 시련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아울러 어머니의 친정도 안정되었다. 어머니의 셋째 오빠는 일본 유학에서도 좌익에 물들지 않고 돌아와 북후면장으로 봉직하며 천석꾼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꽃 피고 새 우는 어느 봄날,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기차칸에 몸을 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 길에 오른 것이다. 나는 외사촌들과 놀다가 일찍 잠들었지만 어머니는 온 동네 친척·친구들과 얘기꽃을 피우느라 밤을 새웠다.
외가가 조상대대로 뿌리박은 북후면 옹천은 진주 姜氏(강씨) 집성촌이다. 한동네 모두가 친척이다.
쾌청한 이튿날 아침, 진달래로 덮인 마을 뒷산 콸콸 흐르는 개울가에 온 동네 친척들이 다 모였다. 남자들은 돼지와 닭을 잡고 솥을 걸어 불을 지피고, 여자들은 진달래꽃을 치마에 한아름씩 따와 찹쌀가루에 담은 뒤, 엎은 솥뚜껑에 전을 부친다.
지난 가을에 담아 겨우내 잘 익은 머루주·오미자주·더덕주가 나오고, 장구 장단에 창이 흐르자 덩실덩실 춤판이 벌어지고 화전놀이는 질펀하게 이어졌다.
내 평생 그렇게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2년 전에 어머니는 87세로 이승을 하직 했다. 행복했던 시간이 괴로웠던 시간을 상쇄하고도 제법 많이 남았던 인생이라 생각한다.●
◆ 어머니와 내 마음속의 시계
時針과 分針이었던 母子
高 元 政 소설가
1956년 제주 북제주 출생. 경희大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석사.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빙벽」, 「최후의 계엄령」, 「불타는 빙벽」 등.
시계 없는 집
늘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를 둔 탓에, 딸도 없는 외아들인 나와 어머니는 두 사람만의 어려운 생활에 진작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2학년 무렵의 2년 남짓한 기간은 그중에서도 심하게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아들을 위해서 방이 둘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1960년대 후반 내 고향 제주도 하귀리의 거의 모든 주택들이 그러했듯 초가집이었고 게다가 남의 집 바깥채였지만 내게는 궁궐처럼 느껴졌다. 나만의 방이라니….
주인집에서 광처럼 쓰던 방이라 눅눅한 곰팡내가 가시지 않았지만 혼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나만의 공간이 주는 나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어머니는 그런 나를 몰래 살피면서 눈물깨나 흘렸을 것 같다.
동네 형이 쓰던 것이기는 하지만 앉은뱅이 책상이 생겼다. 책상 앞에 앉았다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가를 반복하다가는 그만 자지러질 것 같은 만족감에 허공에 대고 발을 구르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내 고향 하귀리는 제주시에서 12km 정도 떨어진 마을로 당시는 시내버스의 종점이 있었다. 그래서 시내에 있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개 버스로 통학을 하곤 했다.
12km라면 지금은 바로 코앞처럼 느껴지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버스부터 고물인데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게다가 제주시내를 거의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등교길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오전 8시30분인 등교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6시30분에 출발하는 첫차나 6시50분에 떠나는 두 번째 버스를 타야만 했다.
아이들은 늦어도 오전 5시30분이면 일어나서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서야 했다. 그 어머니들은 아이들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우리 마을에서는 대개가 보릿짚이나 솔잎으로 밥을 짓곤 했다. 여름에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겨울이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애로사항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순전히 감으로 시간을 맞춰 일어나 밥을 짓고 나를 깨워야만 했다. 그러나 가난한 어머니의 머릿속 시계는 놀랄 만큼 정확했고, 나는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오전 6시30분 첫차를 타러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숙달이 되어서 어머니가 깨울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뜨였다.
어두운 방에 누워 달디단 잠의 여운을 즐기노라면 어머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 발소리는 아들이 아니라 마치 시아버지를 깨우러 오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부엌에서 나와 내 방 앞까지 불과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이나마 어머니는 아들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모두 헤아려 가면서 누워 있다. 내 방 앞에 멈춰서고도 잠시 망설이다가 어머니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투로 나를 부른다.
『원정아… 원정아』
울리지 않은 사발시계그게 어머니와 나의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각각 시침과 분침이 된 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의 시계를 날마다 어김없이 작동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었다.
겨울날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머릿속 시계에 따라 일어나 아침을 지으셨다. 밥 뜸을 들이는 동안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살펴도 먼동이 터오는 기척도 없더라는 것이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싶어서 부엌 앞을 서성이는데 대문 밖 골목길로 사람들이 두런거리며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첫차를 타러 나가는 이들이라면 너무 늦은 셈이니까. 어머니는 밖으로 달려나가 물었다고 한다.
『지금 시간이 몇 시요?』
『첫차 타러 나가는 길인가요?』
지나가던 마을 청년들이 낄낄거리고 웃더란다.
『첫차 타러 가는 게 아니고 지금 막차 타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막차는 밤 12시경에 하귀리 종점에 닿게 되어 있었으니 어머니는 늦은 게 아니라 무려 네댓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버린 것이었다. 후에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겁이 덜컥 나더라…』
당신의 머릿속 시계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며칠 후 사발시계를 하나 사 오셨다. 어떻게 돈을 마련하셨는지 지금도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 책상 위에는 사발시계가 놓이게 되었고, 잠이 들기 전에 그 시계를 어머니 방으로 옮겨 놓는 것이 우리 母子의 생활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의 사발시계는 「때르릉」거리며 요란하게 울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 시계는 그저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일 뿐, 어머니와 나의 마음속 시계는 단 한 번의 고장으로 족하다는 듯 다시 이상 없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나는 어머니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미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나를 깨우시는 그 목소리….
『원정아…』●
◆ 새벽마다 울리는 어매의 전화
세상을 긍정하는 새로운 힘을 주는 어머니의 목소리
趙 熙 文 상명大 영화학과 교수·同 예술대학장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大 영화과 졸업. 중앙大 대학원 영화 석사·박사. 공연윤리위원회 전문심의위원,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現 문화관광부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회 위원.
宗家의 흥 많은 셋째 딸
『내다. 별일 없나?』 오전 6시쯤에 집에 걸려오는 전화는 고향의 「어매」가 보내는 「모닝 콜」이다.
말은 자식의 안부를 묻는 것이지만 정말로 안부가 궁금해서 하는 전화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힘들게 지내고 있는데, 큰 자식이라고 부모 안부도 제대로 챙기지 않느냐는 핀잔과 하소연이 섞인다. 이럴 때는 맞장구가 최선이다.
우선 어디 불편한 데가 없냐고 안부를 묻고 『힘든 일 하느라 고생 많으시네』라며 기분을 맞춰 드려야 한다. 그러면 『어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느냐』, 『여러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다 해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는 설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다.
어매는 동래 정씨 매오공派(파)의 18대 宗家(종가)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와 언니 둘이 있었지만 오빠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의 별실 마을은 동래 정씨 집성촌이다. 200여 호쯤 되는 마을은 모두가 한집안이어서 서로가 「아재」와 「아지매」들이었고 어린 축들은 「히야」(형)거나 「오빠」나 「누야」(누나)였다.
집성촌 동네는 마을 전체가 한가족이나 마찬가지여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과 서열이 엄하다. 종갓집 장손의 위상은 동네 안에서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친척이라도 종손에게는 깍듯이 예를 갖추며 대한다.
종손 또한 어릴 때부터 예절을 몸에 익히고 배워 어른이 된 뒤의 위엄이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하다. 아들이건 딸이건 종갓집 출신들은 대체로 과묵하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우면서 위엄이 배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래 정씨 매오공파의 종가집 가풍도 셋째 딸의 흥을 막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안 분위기가 엄하고, 남녀 유별이 분명한 집안이지만 셋째 딸은 온 동네를 놀이터 삼아 마실(마을) 다니는 일을 일과처럼 즐겼다.
단오날의 그네판, 씨름판을 빼놓지 않고 다녔다. 첫째와 둘째 딸에게는 엄했던 외조부셨지만 셋째 딸의 행동을 귀여운 재롱쯤으로 여겼다고 한다. 종갓집 셋째딸은 부족한 것 없이 고생 모르고 성장기를 보냈다.
모든 게 정반대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매의 인생이 바뀐 것은 결혼을 하면서였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인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나마 조부는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가난한 집안의 유복자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성장기 동안 스스로 생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를 몸에 새기며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군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했는데, 시골인 경북 상주 출신의 청년으로서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혼인으로 새 살림을 꾸렸지만 생각과 행동은 너무도 달랐다. 부족한 것 없이 명랑 쾌활하게 자랐던 종갓집 셋째 딸은 숟가락 하나 변변하게 없는 집안에 오로지 신랑 하나 믿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편모 슬하에서 사무치도록 가난하게 살다가 성혼한 아버지는 기어코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오로지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모으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는 논과 밭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그럴수록 스스로 감격했고 자부심은 더 커졌다.
군청에서 면사무소로 근무지가 바뀌고, 여기저기 전근을 다녀도 몇십 리 길을 자전거로 출퇴근했고, 도시락은 꼭 챙겼다. 술값에 돈을 쓰거나, 비싸다 싶은 옷이나 가재도구를 사는 일들은 「정신 나간 짓」들이었고, 유행을 좇아 멋을 내는 사람들은 「나라 망하게 할 놈들」로 단정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방식을 아버지는 철저하게 믿었다.
아버지가 40여 년 동안 타던 자전거는 얼마 전에 상주市에서 세운 자전거 박물관에 전시 중이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쓰던 교과서와 영어사전을 지금도 가끔씩 들여다보며 교재로 삼고 있을 정도다.
이런 두 사람이라 일을 처리하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이 늘어날수록 품앗이가 늘어난다. 농사일은 때를 놓치면 결딴난다. 하루 이틀 사이에 함께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온 동네가 같은 시기에 바빴다가 놀았다가 한다. 필요할 때 품앗이 일손을 구하는 일은 동네 사람들의 인심에 따라 달랐다.
어매는 어떻게든 동네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웬만하면 손해보며 남 섭섭하게 하는 일은 삼갔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손해라도 아까워 했고, 이해가 걸리는 일에는 완강하고 단호했다.
50년 한결같은 夫婦의 다툼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적었지만 그럴수록 주변의 인심은 썰렁했다. 어매는 천성적인 인정과 낙천성으로 그 틈을 메웠다. 험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새색시는 몸을 쪼개다시피 논일, 밭일을 감당하는데도 퇴근하자마자 안달을 하며 집에 들어서는 남편은 모자라고 마음에 안 드는 일만을 집어내 타박을 하거나 역정을 냈다. 같은 시골 출신인데도 성장 환경과 성격의 차이는 부부가 된 뒤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50년 세월에도 그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만큼 주름이 늘었고, 4명의 자식들이 커서 저마다 살림을 꾸리고 있지만 농사는 여전히 주업이다.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한 아버지가 직접 농사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옛날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잔소리에 어매가 반격하는 일이 잦아지기는 했지만 물건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모으고 쌓아두려는 아버지의 성격과 만사에 너그럽고 편안하게 살면 좀 좋으냐는 어매의 천성은 여전하다.
이제는 힘든 농사일 그만두고 편히 지내시라 하면 어머니는 『일을 하니까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자식들에게 쌀이며 반찬거리들을 나눠주는 것이 낙인데 왜 그만두느냐』며 손을 젓는다.
오전 6시쯤에 울리는 어매의 전화는 항상 긍정하며 살아온 당신의 한평생에 대한 확인이자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세상을 긍정하며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은 전화를 받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내 人生을 이끈 말 한마디
『얘야 일어나라!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얘야』
愼 達 子 시인·명지전문大 문예창작과 교수
1943년 거창 출생. 숙명女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박사. 「현대문학」으로 등단. 평택大 국문과 교수 역임. 現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대한민국 문학상 등 수상. 저서 「물위를 걷는 여자」, 「어머니, 그 삐뚤비뚤한 글씨」 등.
『일어나야제』
3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다. 어머니가 눈을 감으신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가 딱 막힌다. 내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내 어머니가 땅에 묻히셨는데도, 세상은 아무런 표정 없이 잘 돌아가는 데서 끓어오르는 배신감을 받은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내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다른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내 어머니는 달랐다. 죽음이 제아무리 능청맞고 냉혹하고 무지하다 할지라도 내 어머니에게 손을 뻗쳐 올 줄은 몰랐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나를 일으키는 두 팔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다정하게 나를 안아 일으킨 적은 없다. 두 팔의 이미지는 순전히 정신적인 명령이요 힘이라고 해야 맞다.
일곱 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다 나는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금방 피가 흘러 나는 으앙으앙 울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놀란 기색 없이 『일어나야제』 한 마디뿐이었다.
일어나지 않으면 어머니 혼자 발걸음을 옮길 기세여서 나는 어리광을 피울 여유 없이 혼자 일어났다. 그런 날 이후 어머니는 늘 내게 『일어나라』라는 말을 했다. 은유이기도 하고 실제적이기도 한 이 일어나라라는 말은 지금 어머니 이름과 함께 늘 내 가슴에 도는 말이다.
튼튼한 두 발을 가졌음에도 어머니는 내가 늘 부실하게 넘어지는 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땅의 길에서 아니면 인생 길에서 조마조마하게 넘어질 것 같은 불안을 어머니는 내게서 감지한 모양이다.
어머니의 그런 감지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젊은 날의 나는 궁금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이 들면서 어머니가 되고 자식을 길러 보면서 그 뛰어난 神의 능력 같은 감지력은 바로 사랑이었고, 어머니라는 초인에게만 얻어지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안 먹는 아이에게는 먹으라고 말하고, 잠을 못 자는 아이에게는 잘 자라고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것이 어머니인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불안을 보았던 것일까. 어린아이 때는 「넘어지지 마라」라고 당부하던 것이 서서히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일어나라, 자 혼자 일어나야지」로 말이 바뀌었던 것이다.
「혼자 일어나는 일」이 인생
이미 넘어진 아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배신하고 좋아하는 남자를 찾아 떠나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내 인생에서 넘어진 아이로 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 맞아요, 나는 넘어진 아이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자꾸만 넘어집니다. 한번 넘어지니까 아무리 바로 서려고 해도 넘어지고 다시 넘어지는 아이입니다. 어머니, 무릎은 이미 흠집투성이고 온몸은 멍이 들었습니다.
피가 엉겨 까맣게 늘 딱지가 앉아 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나는 다시 걷고 다시 걸어갑니다. 때문에 어머니 목소리는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예순이 될 때까지 어머니는 내게 말합니다. 얘야 일어나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났을 때 나는 혹심한 고통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에 있었다.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 과로가 거의 절정에 있을 때 나는 쓰러졌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차라리 죽는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땅속 아래로 땅속 아래로 꺼질 듯 빠져 늪의 함몰처럼 생명이 꺼지는 마지막 찰라 나는 낯익은 목소리를 듣는다.
「얘야 일어나라!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얘야」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나를 향한 마음의 화살은 어머니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나를 향한 돌보심의 눈길은 돌리시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어머니는 갔지만 죽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자꾸만 넘어지는 딸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아,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가장 긴요할 때 비상약으로 나를 구하시려고 이 말을 오래 연습을 하고 계셨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치명적으로 넘어질 것을 어머니는 일찍 보셨던 것일까. 혼자 일어서는 일이 내 생애에 잦을 것을 어머니는 염려하고 계셨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떠나 도회지로 갈 때 어머니는 내게 『이젠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라고 입술을 꾹 누르고 말했다.
내 어머니는 천재다. 그렇다, 혼자 일어나는 일,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망망한 도회지 생활에서의 자립심을 혼자 일어서기의 은유로 말했겠지만 결국 어머니의 말은 내 인생의 확실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대로 나는 오래 혼자 일어섰다. 어리광도 피우지 못하고 못 일어나겠다고 깡을 부리지도 못하고, 『나 안 일어나!』 하고 협박할 곳이 없이 나는 혼자 넘어지고 혼자 일어섰던 것이다.
굶주린 호랑이의 벌린 입보다 더 무서웠던 외로움을 밥으로 먹으며 나는 일어서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살아 있으나 늘 평지를 걸어도 넘어질 것 같아 한발 한발을 조심히 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조심하는데도 어쩌다 넘어지면 나는 입을 닫고 귀를 연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연히 내게 속삭이기 때문이다.
『얘야 일어나라,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얘야!』●
◆ 막내가 못 다한 말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이겨 낸 어머니, 당신의 삶은 위대했습니다
具 孝 書 소설가
1958년 경기 강화 출생. 목원大 국어교육과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現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저서 「애별」,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등.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
어머니.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으면서도 어머니 생전에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줄곧 「엄마」라고 불렀지요. 그랬습니다. 저는 당신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당신의 어린 막내며느리도 마흔을 훌쩍 넘겼습니다. 저는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마흔이라면 이제 조금은 어리게 느껴집니다. 그 마흔에, 어머니는 이미 자식을 열이나 낳으셨습니다. 그중에 제가 끝이었지요. 어머니는 10년 동안 임신 중이셨습니다. 그 몸으로 고된 농사를 지으시고, 숟가락 하나밖에 없던 집안 경제를 지탱하시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저는 도무지 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막내인 저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기억들이야 평생을 되짚은들 다함이 있겠습니까마는, 왜일까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경기도 부천 대현9차 19평짜리 제 아파트를 다녀가시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생각나세요? 제 집에 오실 때마다 꼭 바나나 우유 두 통을 비닐봉지에 싸서 들고 오셨던 거. 그때 애들이 바나나 우유를 유난히 좋아했었잖아요. 굽은 허리로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온 할머니에게 애들은 인사하는 것도 잊고 당신의 손에 들린 바나나 우유를 빼앗다시피 차지했습니다.
어머니는 편안히 눕지도 드시지도 못 하고 아버지 저녁 해드려야 한다며 일찌감치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당시 75번 버스를 타고 개봉동에 가서 다시 33번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요. 저는 어머니를 겨우 아파트 모퉁이에서 배웅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들어가란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와 버리곤 했습니다. 그 장면이 이토록 오래 남아 가슴을 오그라들게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고생한 누님들, 쌀밥 먹은 아들들
형제들 중에 대학까지 나온 것은 저뿐이었습니다. 누님들은 학교를 겨우 2~3년 다니다 말거나, 기껏해야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위의 누님들은 밑의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농사를 돕느라 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큰누님은 오줌 싸는 동생들 업어 키우느라 「등짝이 썩어나던」 일들을 기억하며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요. 낮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고, 밤에는 물레질을 하거나 무명을 짜느라 누님들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물을 긷고 텃밭을 매고 새참을 내 가고 무명실을 표백했습니다. 쌀밥이란 것도 형이 태어나고 나서야 처음 했다는데, 그것도 형을 위해 달랑 한 그릇을 따로 지었을 뿐이랍니다. 귀한 쌀을 볶은 미음을 먹은 것도 제가 처음이라더군요. 누님들이 어쩌다 쌀밥 몇 알갱이를 몰래 입에 넣었다가 어머니에게서 경쳤다고도 하네요.
지난해 봄이었던가.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왔습니다. 어머니 얘기를 시리즈로 찍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무척 좋아하셨던 탤런트 「고두심」 편도 찍었다기에 저도 찍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한테 마지막으로 짜 주신 강화도 화문석 위에 앉아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풀어 나갔지요. 그 화문석을 짜던 어머니의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정월이면 펼쳐 보던 「토정비결」 책도 찍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답니다.
새벽 아궁이 앞에서 暗算(암산)으로 가계부를 정리하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화문석을 짜 제 학비를 대던 얘기를 했고, 한겨울 농한기에 추운 들판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하던 모습들을 떠올렸습니다.
이틀 방영분을 채우기 위해 촬영팀은 누님들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큰누님은 6·25 때 어머니와 풀죽을 쑤어 먹던 얘기를 했고, 둘째 누님은 육십갑자를 달달 외우는 어머니의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했고, 셋째 누님은 병으로 다 죽어 가던 자신을 정성으로 살려낸 어머니를 기억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넷째 누님은 중학교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진학하지 못했던 설움을 말했습니다.
이틀분을 촬영하는 데 나흘이나 걸렸습니다. 촬영 덕분에 오랜만에 모든 형제들이 어머니를 맘껏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촬영도 방영도 잘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 차례로 등장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머니의 不在(부재)가 문득 사무쳤습니다.
방영이 끝난 뒤 저는 형제들께 묻고 싶어졌습니다.
『누님들 말 듣고 울었습니다』카메라 앞에서 형님과 누님들은 한결같이 어머니의 온화하고 지극했던 사랑만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어머니 편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두심」 편도 그랬고, 「백기완」 편도 그랬거든요. 다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얘기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막내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고 부족함을 정말 못 느꼈지만, 누님들은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생을 등에 업어 줄 때마다 어머니는 공연히 등짝을 후려쳤었다』고 큰누님은 언젠가 말했고, 둘째 누님도 언젠가, 『야야, 말도 마라. 어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분인 줄 아니』 라고 말했던 걸 저는 기억하거든요.
쌀밥도 형과 나를 위해서만 지었다지 않습니까. 어찌 어머니에 대해 좋은 기억만 있겠습니까. 그토록 많은 노동에 비해 우리 가족이 끝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안에 숨겨진 숱한 원망과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묻고 싶어졌던 거지요. 정말 어머니가 누님들한테도 좋기만 한 분이셨냐고, 솔직히 말해 줄 수 있겠느냐고….
어머니.
누님들의 대답만 들려 드리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큰누님의 말입니다.
『그럼, 세상에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은 없으셨어』
둘째 누님의 말입니다.
『그래, 그러셨지』
제 질문입니다.
『정말요? 누님들한테도 정말 그랬나요?』
셋째 누님이 저한테 하는 말입니다.
『쟤는… 몰라서 묻니?』
넷째 누님의 말입니다.
『나도 아직 우리 엄마 같은 분 못 봤어』
어머니.
텔레비전 다 볼 때까지 저 울지 않았는데요, 누님들 말 듣고 울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이렇게 기억되는 어머니는 행복한 거 아닌가요?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어머니. 당신의 생은 위대했습니다.●
◆ 한없이 외로웠던, 그러나 온유했던 사람
열세 살 딸의 詩를 읽던 어머니의 수줍음
李 珍 明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작가세계」로 등단. 한국문학학교 시창작 강사.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등.
13세 소녀 시절
어머니의 이름은 玉順(옥순)이었다. 이름처럼 온유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 삶이야 온유하고 온순한 것이 결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性情(성정)은 내내 그러하였다. 어머니는 큰소리가 없었고 짜증을 내거나 화내거나 하는 적이 없었다. 신경질내는 일도 없었다. 참을성이 많았고 책임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특별하게 드러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어머니의 부끄러워하는 얼굴 모습에서 살짝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때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내내 동시를 짓고 상을 받고 그랬는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도 여전했던 것 같다. 국어숙제에 자유시 지어오기가 있는 날이면 그 숙제만큼은 심혈을 기울여 밤이 늦도록까지 기껍게 쓰곤 했으니, 한 편 써 오라고 하면 두 편 써 가고, 두 편씩 써 오라고 하면 세 편을 써 갔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나는 불량한 쪽으로는 빠지지 못했고, 문학책 읽기와 일기쓰기, 詩짓기에 빠졌던가 보다. 詩쓰기 숙제를 마쳐 놓고는 제 흥에 겨워 밥상머리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읽어 주고 싶어 했다. 밥상머리에다 내가 쓴 詩 좀 보라고 노트를 디밀기도 했다.
우리 가정의 분위기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하다면 어색할 「내가 쓴 詩 좀 보라」는 주문에 아버지는 무표정, 유구무언이었다. 한 가닥 표정의 움직임도 없이 뜨던 밥과 국을 그대로 뜰 뿐이었다.
13세 소녀의 기대가 너무 무참하게 깨졌겠다고? 그렇진 않았다. 내 뜬금에 겨운 일이었으니 봐주면 좋았고 안 봐줘도 그만이었다. 어른들에겐 내가 모르는 어른들만의 고민이 많지 않겠는가.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의 경우란 소통 不在(부재)의 독존이니까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아주 수줍게 웃음 가득 띤 얼굴로 말했다. 자신은 여학교 때 작문시간만 되면 제일 부끄러웠다고. 발표도 못 하고 정말 혼났다고. 작문시간이 제일 어려웠다고. 내 詩 낭독을 다 듣고 내 詩 노트를 한 손에 쥐고 들여다보며 여학생 시절 작문시간을 떠올리셨다.
외로운 사람
그때 어머니의 만면에 띤 수줍은 웃음은 어머니 여학생 시절의 수줍음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여학생 교복을 입은 어머니의 옛 사진이, 어머니가 일제시대 때 공부한 수학공책, 기하공책, 가사공책, 한문공책 등이 떠올랐다. 그 공책마다 정확하고 단정하고 반듯하게 쓰인 글자들이 단아했다. 수예공책에 끼워진 명주 색실들의 여태껏 변하지 않고 있는 선연한 빛깔들이 떠올랐다. 지금 옛날의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약간 굳어지고 땀이 솟는 듯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겐 인자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한테는 인자하지 못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라고 무슨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무엇으로 배우기라도 했는지 자신에 대한 표현이란 게 없었다. 아예 잊은 것인지 그래서 잃은 것인지 어머니에게는 자기 표현욕구라는 게 없었다.
그런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참 수줍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중심에 놓는 걸 일삼아서야 어떻게 잠잠히 살 수 있겠는가. 본인보다도 주변과의 삶이 어떻게 잠잠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그렇게 살다 더 잃을 것도 없어졌는지 일찍 돌아가셨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아, 나는 그때 어머니가 일찍 잘 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고생이 비로소 그친 거라고 생각했으니. 어머니의 아버지와의 삶이란 반려의 삶이 아니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종일 집안에서 끝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이 세상 마지막에 강력한 자기 표현을 하고 간 셈이 됐다. 아직 성인이 다 되지 못한 고만고만한 네 아이들을 떨궈놓고 「이젠 할 수 없다」, 「이젠 이 몸을 부릴 수 없다」 하고 간 셈이었으니 말이다. 암이라는 병이 어머니를 데려간 것이 아닌 어머니 스스로 가야겠기에 간 것이라 믿어본다. 참는 것이 사는 일이라고만 안 어머니가 마지막 길에는 참지 않는 자기를 마침내 표현한 것이라고.
어머니의 喪中(상중)에 어머니의 동네 친구가 문상 와서 말했다.
『너희 엄마는 손이 노는 걸 본 적이 없다. 일찍 가시려고 평생 할 일을 그렇게 미리 하셨나 보다』
가정적이지 못하고 몰인정한 아버지도 상중에 한마디 했다.
『너희 엄마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제 힘을 다하여 애쓰며 살다 갔다. 진정 외로운 사람만이 애쓰며 제 힘을 다하여 살다 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평생 직장생활을 한 낙관주의자
『좋은 생각만 하고, 최선을 다 해. 다 잘 될 거야!』
金 昌 起 김창기정신과 원장
1963년 전남 광주 출생. 연세大 의대 졸업. 그룹 「동물원」에서 가수 활동. 저서 「당신의 아이에게도 리듬이 있다」, 번역서 「단 일분만이라도 다르게 생각하자」 등.
혜화동의 노을진 언덕길
어머니께선 평생 직장에 다니셨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생 때부터 연애를 했던 아버지와 결혼하신 어머니는 방송국 PD가 되셨다. 연년생으로 우리 형제를 낳으시고 나서 방송국을 그만두셨고, 대사관, 무역회사, 학교, 금은방 등 여러 직장을 다니셨다.
환갑을 한참 넘기신 지금도 아버지께서 운영하는 유학원에서 일하신다. 그렇기에 「어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퇴근하실 어머니를 기다리던 혜화동의 노을진 언덕길이다.
우리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은 저녁이면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에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럴 때면 이웃집에서는 밥 냄새가 났고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에겐 사랑과 그리움이란 감정이 허기짐과 연결되곤 한다.
여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하면, 형은 동생을 안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형은 재미있는 노래를 많이 알았고 노래를 참 잘했다. 지루해서 괜히 돌멩이만 걷어차던 나도, 울보 동생도, 형이 노래를 부르면 따라 불렀다.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할머니는 우리를 고아원에서 구걸 나온 아이들 같다면서 야단 치셨지만, 어머니를 기다리는 우리의 의식을 막지는 못하셨다.
저 멀리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제일 먼저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형은 동생을 데리고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선 언제나 『누구네 집 아이가 저렇게 잘생겼나 했더니 우리 둘째였구나』하는 판에 박힌, 그러나 늘 들어도 기분이 좋은 말씀과 함께 나를 안아 주곤 하셨다.
결국 어머니의 품은 동생의 차지가 되었지만, 언덕길을 올라갈 때 우리는 어머니를 에워싸고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 고주알 말씀드리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야행성 가족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이시다. 내가 어른이 된 지금은 그런 소녀 같은 어머니가 못마땅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낙관적인 말 한마디는 우리 형제의 마음을 밝히는 빛이었다.
친구와 싸웠거나, 선생님이나 할머니께 꾸중을 들었거나, 시험을 망쳤거나, 교회에서 독창을 하게 되어 너무 떨릴 때에도, 어머니는 늘 『좋은 생각만 하고, 최선을 다해. 엄마가 너와 함께 있잖아?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루스가 던질 만한 대사를 읊곤 하셨다.
어머니께선 회사에 다니느라 우리의 주요 대사들에 거의 동참하지 못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엔 어머니께서 볼을 쓰다듬어 주시며 그렇게 말하시면 정말 그렇게 되곤 했었다.
방 두 칸에 쪽마루뿐인 집이었지만 「왕 로맨티스트」들인 부모님께선 TV는 없어도 피아노는 있어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 형제들을 씻겨 주신 후 젖은 우리의 머리카락을 말리는 장난에 지치면, 어머니께서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셨다.
어머니께선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외할아버지 몰래 이화여대 음대에 원서를 내셨는데, 결국 외할아버지에게 들켜 영문과에 가게 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멀리 남산이 보이는 창문 곁에 있는 피아노 앞에 모인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노래에 화음을 넣으며 장난을 치곤 했다. 가끔 남산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면 우리는 더욱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고,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전방에서 집에 오실 때면 우리의 노래는 거의 고함 수준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좁은 어머니의 방에서 어머니와 장난을 치고, 어머니께서 읽어주시는 동화에 귀기울이는 시간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께선 전형적인 야행성 인간이기에 우리는 자정을 알리는 방범대원의 호루라기 소리를 들어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새벽이면 우리는 호랑이 같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언, 전도서 같은 「구약 성경」을 읽거나 「천자문」이나 「명심보감」을 공부해야 했는데, 늘 잠이 부족했던 우리는 당연히 자기가 읽는 차례가 아닐 때는 졸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회초리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 덕분에 우리 형제는 모두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적(혹은 비현실적), 야행성 인간들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낙관적 인생관은 배우지 못했다.
무엇인가 걱정거리가 생기면 어머니께선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시곤 『좋은 생각만 하고, 최선을 다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요즘은 어머니 말씀의 약발이 좀 떨어진 것 같다.●
◆「호랑이 아줌마」의 살아가는 방식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
任 珍 模 음악평론가
1959년 경기 부천 출생. 고려大 사회학과 졸업. 경향신문 내외경제신문 기자. 現 음악평론가. 저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 「우리 대중음악의 큰별들」.
戰士, 女帝, 독재자
학창 시절에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는 속담을 국어선생님한테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뜨끔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도 먼저 말 많은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집 장맛이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 집이든, 동네에서든 알아줄 만큼 말이 많으신 분이었다. 지금이야 말 많은 게 더러 미덕이기도 하지만 과거 우리 삶은 「침묵은 금」이 철칙이었다. 그래서 여러 면에서 자랑스러운 어머니였지만 말이 많다는 점만은 자식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부분이었다. 창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되면 어머니를 이기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승부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행여 두 분이 다투었던 순간에 아버지가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알았어. 제발 그만해! 그만 좀 얘기하란 말이야!』
형, 둘째인 나, 여동생들 누구도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수다는 나중에 며느리들도 깨끗이 손 들 정도였다. 제사나 명절이면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항상 두통약을 사달라며 한마디 소감을 털어놓았다.
『어머님이 재미있으시기는 한데요. 쉬지 않고 계속 말씀하시니까 듣고 나면 머리가 어지러워요』
말이 많으면 필시 거칠고 공격적으로 흐르는 법. 어머니는 논리와 非논리가 뒤엉킨, 그리고 템포와 중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강성의 언어들로 늘 우리 집에선 戰士(전사)요, 女帝(여제)요, 독재자로 군림했다.
고향인 경기도 소사 심곡동은 내가 어릴 적에 열쇠집, 양씨네, 엄씨네, 백화점집, 주유소집, 여관집, 쌀집 등 다채로운 직업군이 모여 도란도란 살아가는 동네였다. 평상시에는 제사떡도 나눠먹고, 여름에는 수박과 콩국수를 돌리는 나름대로 단란한 공동체였지만 사소한 문제로 갈등이 폭발해 분쟁이 생기면 이웃의 어떤 사람도 어머니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터프 우먼, 호랑이 아줌마였다.
동네 창피를 견디지 못한 내가 한 번은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엄마, 좀 조용히 살면 안 돼? 그렇게 세게 말하면 딴 사람들도 당연히 기분 나쁘죠! 나 같아도 열 받겠어』
그러나 어머니의 응대는 한사코 강경하고 단호했다. 자식은 물론, 주위 사람이 선의의 충고를 건네도 요지부동이었다.
『야, 잔소리 마!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고 했어. 그럼 저렇게 나오는데 가만있냐? 난 말 안 하면 죽는다!』
수다가 아름답게 들리던 날
성인이 돼서도 더러 괴로웠던 부분은 혹시 내가 어머니의 그 아킬레스건을 물려받은 것 아니냐는 점이었다. 내가 사람들과 모여 조금 길게 말을 늘어놓게 되거나, 방송에서 주절주절 떠들게 될 때면 「이거 나도 엄마 닮은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실제로 7년째 게스트로 출연 중인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 배철수씨로부터 사석에서 핀잔을 들은 경험도 있다. 『아무리 평론가가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지만 임진모씨 너무한 거 아냐? 오늘 밥은 내가 사는데, 지금 당신이 다 떠들고 있잖아!』
4년 전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 난 음악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면서 자금 부족으로 쩔쩔매고 있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 집에 자주 들르곤 했지만 그날따라 어머니의 표정이 묘했다. 물론 말이 많은 것은 같았지만 왠지 차분한 모습이었다.
『둘째야, 너 요즘 많이 힘들지. 얼굴만 봐도 안다. 말을 안 하고 살면 남도 속 터지는 거야. 나한테 화통하게 말해봐. 돈 좀 빌려 달라구』
그리곤 갑자기 200만원이 담긴 봉투를 내미셨다. 그 돈은 자식들이 생활비로, 용돈으로 틈틈이 드린 돈을 당신께서 안 쓰고 모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받을 수 없었지만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면서 특유의 긴 말씀을 이어가셨다. 세상에 수다가 그렇게 아름답게 들린 적도 없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야. 아무리 자식이라도 할 얘기, 못 할 얘기가 있는데 나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 후련하다. 너 술 한잔 할래? 내가 받아주마!』
우리 자식 다섯은 때로 질리게 할 정도로 많은 말이 어머니만의 인간관계, 상황인식의 방법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임을 이제는 안다. 그리하여 그 수다와 일방적 언사가 「어머니의 實存(실존)」임을 깨우치고 그것을 기꺼이 또 즐거이 청취한다.
올해 들어 어머니는 간경화와 당뇨가 겹쳐 자주 의식을 잃으면서 벌써 세 번째 병원에 입원하셨다. 노화로 말씀이 눈에 띄게 준 데다, 병실에서는 한 마디 하려 해도 무진 애를 쓰셔야 한다. 옆의 여동생은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며 눈물을 쏟는다.
『엄마, 얘기 좀 해봐. 말하는 것 좋아하잖아, 빨리! 다 들어줄게요!』
어서 어머니가 쾌차해 전처럼 듣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시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수다가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