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 南 準
1932년 서울 출생. 日本 도쿄大 문학부 미술사학과 졸업. 독일 뮌헨大 수학. 대통령 자문 새천년 준비위원회 위원. 이화여대 미술대학 석좌교수.
<수상 경력>
美國 뉴욕시장 자유상,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1993년), 20세기 미술작가 120명에 선정됨(독일 루드비히 미술관ㆍ1999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2000년), 제8회 빌헬름 렘브루크상(獨逸 두이스부르크市ㆍ2001년).
<주요 활동>
백남준전(프랑스 파리 시립미술관ㆍ1978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전시(1989년), 백남준 회고전(스위스 취리히 현대미술관ㆍ1989년), 백남준-세기를 넘어서(박영덕 화랑ㆍ2001년), 백남준-보이스 그리고 케이지 전(하나은행 본점ㆍ2001년).
金 容 沃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고려大 철학과 졸업. 국립 대만大 대학원 졸업. 美國 하버드大 박사과정 수료(철학 박사). 원광大 한의대 졸업. 고려大 철학과 교수. EBS 「도올 김용옥의 알기 쉬운 동양고전-노자와 21세기」 강의. KBS 1TV 「도올의 논어 이야기」 강의. 주요 저서로는 「고전번역론」(1984년), 「석도화론」(1992년),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1998년), 「노자와 21세기」(2000년), 「도올 논어」(2000년) 등.
1932년 서울 출생. 日本 도쿄大 문학부 미술사학과 졸업. 독일 뮌헨大 수학. 대통령 자문 새천년 준비위원회 위원. 이화여대 미술대학 석좌교수.
<수상 경력>
美國 뉴욕시장 자유상,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1993년), 20세기 미술작가 120명에 선정됨(독일 루드비히 미술관ㆍ1999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2000년), 제8회 빌헬름 렘브루크상(獨逸 두이스부르크市ㆍ2001년).
<주요 활동>
백남준전(프랑스 파리 시립미술관ㆍ1978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전시(1989년), 백남준 회고전(스위스 취리히 현대미술관ㆍ1989년), 백남준-세기를 넘어서(박영덕 화랑ㆍ2001년), 백남준-보이스 그리고 케이지 전(하나은행 본점ㆍ2001년).
金 容 沃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고려大 철학과 졸업. 국립 대만大 대학원 졸업. 美國 하버드大 박사과정 수료(철학 박사). 원광大 한의대 졸업. 고려大 철학과 교수. EBS 「도올 김용옥의 알기 쉬운 동양고전-노자와 21세기」 강의. KBS 1TV 「도올의 논어 이야기」 강의. 주요 저서로는 「고전번역론」(1984년), 「석도화론」(1992년),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1998년), 「노자와 21세기」(2000년), 「도올 논어」(2000년) 등.
『예술은 사기다』
나는 白南準(백남준)이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나의 관심의 대상으로서 그가 내 의식에 浮上하기에는 너무도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 무지한 나였다. 1984년 그가 서울에 와서 『예술은 사기다』는 말을 남겼다는 정도의 스치는 한마디가, 또 그가 비디오 아트라는 예술의 창시자로서 국제적 명성이 드높은 사람이라는 정도의 매우 피상적인 사실만 나의 귓전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더욱 白南準 선생이 날 알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내가 白南準 선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순전히 도도회 멤버들 때문이다. 장상의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국제적 전시에 경험이 있는 멤버들이 말끝마다 「백남준, 백남준」 하면서 그는 진정한 天才(천재)며, 한국이 낳은 예술가로서(넓은 의미에서 미술이라는 의미에 국한하여) 국제무대에서 참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白南準 이외의 어느 누구도 현재 국제적 벽을 뚫고 있지 못하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시작품을 보면 참으로 천재성이 번뜩인다고 나에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 미술계의 후학들을 위하여 내가 한번 꼭 白선생을 만나보고 그분과 대담한 내용을 내 글로 한번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작가의 이해가 너무 전문적으로, 그리고 피상적으로 흘러 있기 때문에 그 본질적 핵심을 좀 내 느낌으로 표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白南準 선생이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실존적으로 와닿는 교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분의 리서치를 감행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고, 시간도 없었고 또 그런 방식으로 그분을 고문해 드리기도 죄송스러웠다.
그러던 중 1992년 8월1일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白南準 선생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왜 대학생이 공연장에서 피아노를 깨부수면 야단을 맞고, 白南準이 피아노를 깨부수는 것은 합리화되고 칭송되어야만 하는가? 물론 여기에 대한 대답은 명료하다. 대학생의 파괴는 창조의 기나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시적 「창조의 모방」이요, 백남준의 파괴는 지루하리만큼 기나긴 창조의 고심의 反語(반어)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주관성의 엄밀성이다.
백남준의 「파괴」는 창조의 苦心
파괴는 완성의 파괴가 아니라 완성의 완성이다. 다시 말해 파괴는 끊임없이 새로운 완성을 지향해 가는 계기로서만 그 심미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白南準은 분명 그런 혐오의 대상이거나 폭력적 파괴주의자가 아니다. 白南準의 일생을 지배한 삶의 모토는 非폭력이었다.
白南準은 한국이 낳은 예술가이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한국의 예술가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낳음 속에서 이미 그가 세계적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胚胎(배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전통은 분명 파괴되어야 할 저주이지만 전통은 분명 나(我)라는 존재의 연속성의 母體(모체)인 것이다.
白南準을 많은 사람들이 비디오 아트라는 테크놀로지적 선진성 때문에 매우 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白南準은 1932년 7월20일(음력 6월17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옛 서린호텔 자리)에서 태어났으니 一甲(일갑)을 還(환)하고도 또 넘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고전적인, 어찌 보면 李朝人(이조인)의 化石(화석)과도 같은, 다시 말해서 전통적 인간으로서 지니는 모든 감정과 소양을 지닌 純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좀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開明(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말씨나 행동, 감정의 흐름 등 모든 것의 진화가 1949년에서 그쳐버린, 진화가 덜 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白南準이라는 존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 나라 전통문화의 근대적 변용과정에서 축적된 새로운 문화 수준의 가장 밝은 측면, 19세기 말 東學(동학)으로부터 또 19세기 중엽의 崔漢綺(최한기)나 東武(동무) 李濟馬(이제마)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많은 개화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각성된 문화 여명기의 폭발적 창조성의 맥락과 그 패기, 그 깡이, 西유럽 및 미국 문명의 가장 선구자적인 흐름과 일치하고 있었다는 선구자적 역사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白南準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두 가지 주제를 추출해 낼 수가 있었다. 첫번째는 그의 漢字(한자) 및 漢文(한문)에 대한 집착이고, 두 번째는 그의 토속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다.
첫번째의 사태에 관하여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자는 음의 글자가 아닌, 모양의 글이다. 한자야말로 보는 글이요, 구경하는 글이면서 쓰는 글이다. 즉 한자야말로 동양인들의 영원한 「비디오 아트(봄의 예술)」인 것이다.
이 만남에서 나는 白南準이라는 인간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白南準은 情感(정감)이 가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해탈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인간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예술가들을 괴롭히는 것은 無知(무지)다. 그들은 사실 無知하다. 그런데 또 지식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은 거짓된 지식의 桎梏(질곡) 때문에 감수성이 후퇴하거나 속박당한다. 허나 어떤 경우에도 지식과 지혜는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白南準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그를 그렇게 만들기까기 그가 획득한 비전이나 노력을 뒷받침하는 참으로 광막한 지식의 세계가 엄존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해박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매우 자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한 사람들이 발해사를 복원한 것은 참 큰 공헌이라는 등, 삼국유사의 어디어디가 어떻다는 등, 최치원과 김대문이 어떠하다는 등, 조선조가 어떠어떠한 세계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망해 갔다는 등, 광복 후 한국사의 흐름이 어떻다는 등, 그의 관심의 초점이 맞닿는 곳마다 어떤 확고한 典據(전거)와 자기류의 해석을 가지고 내뱉었다.
『예술에 있어 착안점이 중요하다』
8월16일 나는 다시 白南準 선생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는 족보의 원조성 때문에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이름을 얻었다. 그걸 빼면 당신은 별것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창시자는 시각의 이동에서 생겨난다. 즉 우리가 예술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미디어를 과감하게 예술의 대상으로서 그 인식의 영역을 넓히는 데서 생겨난다. 그 최초의 인식의 전환은 어떻게 생겨났나?
『그 최초의 발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고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우연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
나는 고전음악적 세계에서 액션뮤직(행위음악)으로 갔고, 또 전자음악적 실험을 여러 가지로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이가 서른 살이 되면서는 돈이 좀 될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私有재산에 대한 생각이 좀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히트 작품을 구상하다가 전자 텔레비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전자음악을 해 왔던 터라 싸인 웨이브 제너레이터가 여덟 개나 있어서 그것이 결정적 도움이 됐다.
초기에는 많은 놈들이 도둑질해 갔다. 나는 스튜디오를 원(one)과 투(two)를 만들어 놓고 원만 보여 주고, 투는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작품을 도둑질해 간 놈들하고 평론가들을 다 불러 놓고 투를 보여 줬다. 그리고 나의 원조성에 대한 공인을 받았다. 그 뒤로는 군소리 못 하게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아티스트들이 좀 야비한 구석들이 많은 놈들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당신의 성공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노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술에 있어서는 노력이 별 것은 아닌 것 같다. 착안점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당신은 천재가 아닌가?
『난 천부적 재능은 없다. 친구들을 잘 사귀었을 뿐이다. 친구들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유명해진 것이다. 내 인생 체험의 묘사엔 두 가지 속담이 적절하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 「방귀가 잦으면 똥싸기 쉽다」』
―당신은 나만큼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공부 버러지는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박식한가? 지식의 흡수방식은?
『난 당신처럼 그렇게 심각한 공부나 독서를 하지는 않는다. 내 知識源(지식원)은 대강 신문이다. 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반영한다』
―당신은 한국과 같은 변방민족 출신이라는 것이 플러스가 됐나, 마이너스가 됐나?
『플러스도 됐고 마이너스도 됐다. 세상일엔 모두 양면이 공존한다』
나는 白南準에게 당뇨병 조심하고 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말했다. 그는 무심하게 내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만난 白南準의 전부였다.
<편집자 注:이 글은 김용옥 교수의 양해를 얻어 그가 1992년에 펴낸 「石濤畵論」(석도화론)이란 책에 함께 실은 「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임>
나는 白南準(백남준)이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나의 관심의 대상으로서 그가 내 의식에 浮上하기에는 너무도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 무지한 나였다. 1984년 그가 서울에 와서 『예술은 사기다』는 말을 남겼다는 정도의 스치는 한마디가, 또 그가 비디오 아트라는 예술의 창시자로서 국제적 명성이 드높은 사람이라는 정도의 매우 피상적인 사실만 나의 귓전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더욱 白南準 선생이 날 알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내가 白南準 선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순전히 도도회 멤버들 때문이다. 장상의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국제적 전시에 경험이 있는 멤버들이 말끝마다 「백남준, 백남준」 하면서 그는 진정한 天才(천재)며, 한국이 낳은 예술가로서(넓은 의미에서 미술이라는 의미에 국한하여) 국제무대에서 참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白南準 이외의 어느 누구도 현재 국제적 벽을 뚫고 있지 못하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시작품을 보면 참으로 천재성이 번뜩인다고 나에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 미술계의 후학들을 위하여 내가 한번 꼭 白선생을 만나보고 그분과 대담한 내용을 내 글로 한번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작가의 이해가 너무 전문적으로, 그리고 피상적으로 흘러 있기 때문에 그 본질적 핵심을 좀 내 느낌으로 표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白南準 선생이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실존적으로 와닿는 교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분의 리서치를 감행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고, 시간도 없었고 또 그런 방식으로 그분을 고문해 드리기도 죄송스러웠다.
그러던 중 1992년 8월1일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白南準 선생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왜 대학생이 공연장에서 피아노를 깨부수면 야단을 맞고, 白南準이 피아노를 깨부수는 것은 합리화되고 칭송되어야만 하는가? 물론 여기에 대한 대답은 명료하다. 대학생의 파괴는 창조의 기나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시적 「창조의 모방」이요, 백남준의 파괴는 지루하리만큼 기나긴 창조의 고심의 反語(반어)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주관성의 엄밀성이다.
백남준의 「파괴」는 창조의 苦心
파괴는 완성의 파괴가 아니라 완성의 완성이다. 다시 말해 파괴는 끊임없이 새로운 완성을 지향해 가는 계기로서만 그 심미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白南準은 분명 그런 혐오의 대상이거나 폭력적 파괴주의자가 아니다. 白南準의 일생을 지배한 삶의 모토는 非폭력이었다.
白南準은 한국이 낳은 예술가이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한국의 예술가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낳음 속에서 이미 그가 세계적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胚胎(배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전통은 분명 파괴되어야 할 저주이지만 전통은 분명 나(我)라는 존재의 연속성의 母體(모체)인 것이다.
白南準을 많은 사람들이 비디오 아트라는 테크놀로지적 선진성 때문에 매우 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白南準은 1932년 7월20일(음력 6월17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옛 서린호텔 자리)에서 태어났으니 一甲(일갑)을 還(환)하고도 또 넘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고전적인, 어찌 보면 李朝人(이조인)의 化石(화석)과도 같은, 다시 말해서 전통적 인간으로서 지니는 모든 감정과 소양을 지닌 純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좀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開明(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말씨나 행동, 감정의 흐름 등 모든 것의 진화가 1949년에서 그쳐버린, 진화가 덜 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白南準이라는 존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 나라 전통문화의 근대적 변용과정에서 축적된 새로운 문화 수준의 가장 밝은 측면, 19세기 말 東學(동학)으로부터 또 19세기 중엽의 崔漢綺(최한기)나 東武(동무) 李濟馬(이제마)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많은 개화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각성된 문화 여명기의 폭발적 창조성의 맥락과 그 패기, 그 깡이, 西유럽 및 미국 문명의 가장 선구자적인 흐름과 일치하고 있었다는 선구자적 역사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白南準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두 가지 주제를 추출해 낼 수가 있었다. 첫번째는 그의 漢字(한자) 및 漢文(한문)에 대한 집착이고, 두 번째는 그의 토속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다.
첫번째의 사태에 관하여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자는 음의 글자가 아닌, 모양의 글이다. 한자야말로 보는 글이요, 구경하는 글이면서 쓰는 글이다. 즉 한자야말로 동양인들의 영원한 「비디오 아트(봄의 예술)」인 것이다.
이 만남에서 나는 白南準이라는 인간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白南準은 情感(정감)이 가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해탈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인간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예술가들을 괴롭히는 것은 無知(무지)다. 그들은 사실 無知하다. 그런데 또 지식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은 거짓된 지식의 桎梏(질곡) 때문에 감수성이 후퇴하거나 속박당한다. 허나 어떤 경우에도 지식과 지혜는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白南準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그를 그렇게 만들기까기 그가 획득한 비전이나 노력을 뒷받침하는 참으로 광막한 지식의 세계가 엄존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해박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매우 자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한 사람들이 발해사를 복원한 것은 참 큰 공헌이라는 등, 삼국유사의 어디어디가 어떻다는 등, 최치원과 김대문이 어떠하다는 등, 조선조가 어떠어떠한 세계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망해 갔다는 등, 광복 후 한국사의 흐름이 어떻다는 등, 그의 관심의 초점이 맞닿는 곳마다 어떤 확고한 典據(전거)와 자기류의 해석을 가지고 내뱉었다.
『예술에 있어 착안점이 중요하다』
8월16일 나는 다시 白南準 선생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는 족보의 원조성 때문에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이름을 얻었다. 그걸 빼면 당신은 별것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창시자는 시각의 이동에서 생겨난다. 즉 우리가 예술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미디어를 과감하게 예술의 대상으로서 그 인식의 영역을 넓히는 데서 생겨난다. 그 최초의 인식의 전환은 어떻게 생겨났나?
『그 최초의 발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고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우연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
나는 고전음악적 세계에서 액션뮤직(행위음악)으로 갔고, 또 전자음악적 실험을 여러 가지로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이가 서른 살이 되면서는 돈이 좀 될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私有재산에 대한 생각이 좀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히트 작품을 구상하다가 전자 텔레비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전자음악을 해 왔던 터라 싸인 웨이브 제너레이터가 여덟 개나 있어서 그것이 결정적 도움이 됐다.
초기에는 많은 놈들이 도둑질해 갔다. 나는 스튜디오를 원(one)과 투(two)를 만들어 놓고 원만 보여 주고, 투는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작품을 도둑질해 간 놈들하고 평론가들을 다 불러 놓고 투를 보여 줬다. 그리고 나의 원조성에 대한 공인을 받았다. 그 뒤로는 군소리 못 하게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아티스트들이 좀 야비한 구석들이 많은 놈들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당신의 성공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노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술에 있어서는 노력이 별 것은 아닌 것 같다. 착안점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당신은 천재가 아닌가?
『난 천부적 재능은 없다. 친구들을 잘 사귀었을 뿐이다. 친구들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유명해진 것이다. 내 인생 체험의 묘사엔 두 가지 속담이 적절하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 「방귀가 잦으면 똥싸기 쉽다」』
―당신은 나만큼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공부 버러지는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박식한가? 지식의 흡수방식은?
『난 당신처럼 그렇게 심각한 공부나 독서를 하지는 않는다. 내 知識源(지식원)은 대강 신문이다. 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반영한다』
―당신은 한국과 같은 변방민족 출신이라는 것이 플러스가 됐나, 마이너스가 됐나?
『플러스도 됐고 마이너스도 됐다. 세상일엔 모두 양면이 공존한다』
나는 白南準에게 당뇨병 조심하고 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말했다. 그는 무심하게 내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만난 白南準의 전부였다.
<편집자 注:이 글은 김용옥 교수의 양해를 얻어 그가 1992년에 펴낸 「石濤畵論」(석도화론)이란 책에 함께 실은 「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