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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한 상징 「폭파된 대동강 철교」 촬영 종군기자 막스 데스포

『사진기자는 역사를 담아내는 직업. 퓰리처상은 단지 한 기사를 특종했다고 주는 상이 아니다』

허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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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 20세의 나이에 AP에 입사,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다. AP 근무 45년을 포함, 50년 동안 사진기자로 뛰었다. 1945년 일본의 미주리호 艦上 항복 서명 장면을 찍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재 87세의 노인이 되어 미국에 살고 있다
  수천 명이 生死의 곡예
 
  6·25 전쟁 때 AP통신 종군기자로 「폭파된 대동강 철교」 특종사진을 찍어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막스 데스포(Max Desfor) 기자가 6·25 전쟁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 그는 오는 6월22일 서울에 와 28일까지 머물 예정이다.
 
  막스 데스포 기자는 6·25 전쟁이 터진 일주일 후 현장으로 급파되어 이후 3년 동안 한국전에 종군했다. 그는 부산에 상륙하여 北(북)으로 진격하던 美 3사단을 따라 38선을 넘었다.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의 大후퇴가 시작될 때 미군과 함께 퇴각하다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南(남)으로 향하던 그 사진을 촬영했다.
 
  데스포 기자는 자신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 사진을 찍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때였다고 말했다. 워커 美 제8군사령관(중장)이 평양 포기 결정을 내린 것은 1950년 12월4일이었다. 유엔군은 운반할 수 없는 군수품과 보급품은 소각하고 탄약고와 유류저장고를 폭파한 뒤, 대동강을 건너 서울 북방의 임진강으로 향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마치 한강인도교를 폭파시켰던 것처럼 그렇게 대동강 철교를 끊어버렸다.
 
  데스포 일행이 대동강 철교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자유를 향한 大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겨울의 대동강을 헤엄쳐 철교에 간신히 이른 다음 망가진 교각(橋脚)을 잡고서 生死(생사)의 곡예를 벌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이때 막스 데스포가 찍은 한 장의 사진 「폭파된 대동강 철교」는 천 마디의 말보다 더 진하게 한국전쟁의 참상을 증언해 주었으며,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 중 하나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는 이 사진으로 1951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막스 데스포 기자는 현재 87세의 노인이 되어, 미국 워싱턴 근교의 실버스프링 타운에 살고 있다. 6·25 전쟁 때 역시 AP통신의 종군기자로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세계적으로 특종보도했던 申化鳳(신화봉·83·미국 LA 거주)씨로부터 그의 주소를 알아 연락이 닿았다. 데스포氏는 요즘의 근황에 대해 『나는 이제 일선에서 퇴직했다. 집사람과 여행을 하고 손자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재미로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음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訪韓(방한)을 준비하고 있는 막스 데스포氏와의 일문일답.
 
  ―퓰리처상을 탄 그 사진을 찍을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나.
 
  『나는 미군을 따라 압록강 근처까지 도달했다.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평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동강 철교는 미군들이 중공군의 渡河(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이미 폭파시켜 놓았다. 나를 비롯한 종군기자들은 지프차를 타고 미군이 부설해 놓은 舟橋(주교)를 건넜다. 그러나 대동강 북쪽의 한국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얼어붙은 대동강의 얼음을 타고 건너려 노력했지만 얼음이 약해 어려웠다. 그때 나는 믿을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을 본 것이다』
 
 
  『당시 사진기자는 나 혼자뿐』
 
  ―당신은 어느 위치에서 그 사진을 찍었는가.
 
  『대동강 남쪽에 도착한 나는,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려는 북쪽 강변의 그들의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빙상渡河를 포기하고 부서진 다리 위로 기어올라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북쪽 해안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남쪽의 부서진 난간을 잡고 올라가 목숨을 건 탈출행렬 사진을 찍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들었다.
 
  『그 광경은 참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폭파된 다리 난간을 잡고 자유를 찾아 南下(남하)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때 몇 장이나 사진을 찍었나.
 
  『정말 추운 날씨였다. 나는 손이 곱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조차 없었다. 더구나 우리는 적군에 쫓겨 후퇴하는 길이었다. 거기서 오래 머물 수도 없었고, 셔터를 제대로 누를 수도 없었다. 내가 거기서 찍은 사진은 단 8장뿐이었다. 그중의 한 장이 바로 퓰리처상을 탄 것이다』
 
  ―다른 기자들은 그곳에 없었는가. 왜 당신의 사진이 퓰리처상을 탔는가.
 
  『많은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진기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글을 쓰는 기자들이었다. 나에겐 행운이었던 것이다』
 
  ―그 사진을 찍은 다음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나.
 
  『우리는 동쪽으로 가 흥남에 도착했다. 거기서 미군 배를 타고 철수했다』
 
  ―당신의 사진은 타임-라이프지에 실린 것으로 아는데, 그 잡지에만 게재되었는가.
 
  『아니다. 타임-라이프를 비롯해 수백 종의 신문과 잡지에 게재되었다』
 
  ―그 사진을 찍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확실한 것은 중공군의 개입 직후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때 초를 다투어 후퇴하고 있었다』
 
  ―당시 당신과 함께 AP 특파원이었던 빌 신(Bill Shin=申化鳳 기자의 영문이름)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특종했다. 그런데 빌 신은 그 기사로 퓰리처상을 타지 못했다. 당신은 그 한 장의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탔다.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빌신은 정말 훌륭한 기자였으며 나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보도한 기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도 인천상륙작전 그날 새벽 인천 바다에서 미국 전함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퓰리처상은 단지 하나의 기사를 특종했다고 해서 주는 상이 아니다. 여러 가지가 고려된다. 내가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그동안의 나의 일들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대동강 철교 사진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대동강 철교 사진은 사진기자로서 나의 성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미주리호 艦上의 日本 항복 장면도 촬영
 
  막스 데스포 기자는 50년 동안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1933년 만 20세의 나이에 AP에 입사, 제2차 세계대전에도 종군했다. AP에만 45년 동안 근무했으며 퇴직 후에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지의 사진담당 국장을 5년 동안 지내기도 했다. 그는 50년의 사진기자 생활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마디로 행운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기자생활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흥미가 있었다. 나는 사진기자란 역사를 담아내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네루와 간디의 사진(1946년)을 찍었다. 내가 찍은 사진은 나중에 인도 정부에서 발행하는 우표에 실렸다. 그것에 나는 큰 자부심을 갖는다.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을 찍은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두 차례에 걸친 서울 탈환 즉 인천상륙작전 후의 서울수복과 중공군 개입에 따른 후퇴 뒤의 재탈환 때마다 그 탈환의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그 대동강 철교이다』
 
  데스포 기자는 1974년 포드 대통령의 訪韓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아온 적이 있다. 한국전 종군 순직기자 추념비가 제막된 1977년에는 AP통신이 발행하는 아시아 포토 편집국장의 신분으로 訪韓, 휴전선을 돌아보기도 했으며, 1999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퓰리처상 수상 사진 전시회에 참석했다. 이번의 訪韓은 6·25 이후 네 번째 한국 방문이다. 그에게 「6·25 전쟁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국을 찾는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갈 때마다 크게 변하고 성장하는 한국의 모습을 본다.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보고싶은 마음이 가득 차 있다.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金正日(김정일)이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만족할 만한 성과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아들 한 명과 네 명의 손자, 그리고 한 명의 증손자를 보았다. 『요즘도 사진 찍는 일을 즐기느냐』는 질문에 대해 『기자로서는 이제 활동하지 않는다. 대신 손자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요즘 내 취미이자 생활의 중요한 기쁨』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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