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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운동의 大변혁 예고

全南·全北·광주지역 대학총학생회의 북한 人權 운동 선언!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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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의 책임을 남한정권에게 책임 추궁하던 한총련은 북한 식량난의 책임을 왜 金正日 정권에게 묻지 않는가. 북한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고 영도자를 바꾸어야 해결된다』

북한정권을 추종하는 親金正日 학생운동의 한복판에서 철저한 반성과 각성을 경험한 湖南 지역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 거의 전부가 한총련 노선을 비판하면서 북한 동포 구출 운동을 다짐하고 나섰다. 두 지역 학생운동 지도자들과 나눈 對話에서 한국 학생운동의 물줄기가 巨大한 전환을 예고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金 美 英 자유기고가

1970년 경남 남해 출생, 서울대 국문과. 同대학원 졸업(석사), 月刊朝鮮 6월호에 「한국 知性史의 일대 사건-金永煥 등 80年代 주사파 활동가들의 대전환」 기고.
  온존하는 韓總聯 세력
 
  한 경찰기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98년 12월15일 현재 1999년도 총학생회장 선거를 끝낸 1백65개 대학 중 65개 대학이 운동권이었다. 서울대, 고려대를 비롯한 종합대학의 총학생회 대부분이 여기에 속했다. 1980년대 후반의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을 이어 93년 출범한 한총련(한국 대학 총학생회 연합)의 NL노선을 포함하여, 좌파 정치운동에 주력하는 학생운동세력이 아직도 1999년의 한국 대학 학생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 65개 대학 총학생회를 다시 분류해 보면 NL이 46개大, PD가 13개大,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6개大를 차지했다. 운동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NL은 다시 경찰측 용어로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류된다. 여기서 북한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적인 세력은 27개 대학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는 NL강경파로, 한총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간부진의 대거 수배 및 투옥 사태와 利敵性(이적성) 논의로 점차 약화 일로에 있지만, 한총련은 여전히 한국 대학생의 최대 정파조직을 이루고 있다.
 
  NL 강경파는 80년대 이후 변함없이 한국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사회경제적 수준을 半자본주의로 규정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 정도를 과소평가한다. 「反美(반미)」구호에 대한 집착도 변함이 없다. 다른 학생운동 노선이 처음부터 「북한도 남한보다 나을 것이 없다」 는 정도로 「온건하게」 파악해 왔다면 NL 강경파들은 북한에 민족적·역사적 正統性(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상정, 북한을 이상화하는 친북·극좌 성향을 띠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른 노선이 계급성을 강조하여 노동자를 변혁의 중심세력으로 특정하면서 대중과 괴리되는 경향을 보이는 동안 광범위한 대중을 변혁의 연대세력으로 포괄하는 현실성을 보여 왔다. 1987년 6월 당시의 「직선제 쟁취」 구호나 대통령 선거 기간 야당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은 NL이 다른 정파로부터 기회주의라는 지탄을 받으면서도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배경이 되었다. NL노선은 북한에서 3백만 명(우리 민족 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의 탈북자 면접 조사방법에 의하면 3백50만명으로 추정)이 굶어죽고(또는 金正日 정권이 굶겨죽이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불가사의한 침묵의 행진
 
  지난 4월22일 미국 방위포럼재단(DFF)의 수잔 숄트 회장은 美 상원에서 개최된 北韓 政治囚(정치수) 수용소 문제 청문회에서 「북한 政治囚 수용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야말로 역사상 일어난 인권 침해 중 最惡(최악)의 사태」로 「囚人은 더 이상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고 꼬리없는 짐승으로 다루어진다」 고 말한 바 있다.
 
  政治囚는 물론이고 보통의 인민이 생존의 최소한의 조건도 확보하기 힘든 이 체제에 대해 한 북한전문가는 「현재 북한의 상황은 수령절대주의가 부른 대규모 재난이며, 북한은 人權(인권)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신빙성있는 증언과 자료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학생들은, 북한 체제에 충성을 다하는, 일종의 미필적 고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대학생 사회에서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인권 침해 현실에 대해 대다수의 지식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침묵하고 있다.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은 시민운동단체 또는 인권단체들이 북한 인권에 대해 거의 침묵한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북한 인권 관련 운동을 해 왔다. 그러나 이 단체는 한 달에 1만원의 회비를 내는 회원을 1백30명 정도 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이곳에서 일하는 단 세 사람의 상근 직원중 한 사람인 金英子(45) 사무국장은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너 나중에 국회의원 출마하려고 그런 일을 하는 거니?』
 
 
  全北 20개 대학 중 17개가 한총련 이탈, 全北 총협 가입
 
  그런데 최근 대학생 사회에서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대협과 한총련의 NL강경 노선에서 출발하여, 가장 「모범적」으로 활동했던 호남지역 학생회가 이들 한총련 질서에 정면 대결을 선포하고 나섰다. 「북한은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民主化(민주화)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전북지역 총학생회와 전남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특히 전북지역 대학 총학생회 협의회(이하 全北총협) 간부진들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북한 민주화」 의제를 내놓고 다른 지역 총학생회와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全北지역 대학 총학생회 연합(전북총련:한총련에 소속되어 있을 때의 명칭)의 별명은 「청소부대」였다고 한다. 1992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 이 지역 환경 미화원들과 함께 전주 시내 곳곳을 청소하는 것을 학생회칙의 의무조항으로 두고 있었다. 폭력 시위에는 맨 후위에 있다가 집회나 시위가 끝나면 청소를 전담하고, 다른 대학의 시설을 숙소로 빌려 쓰고 나면 반드시 청소를 한 후 대자보를 붙여 감사의 인사를 남기는 관례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 청소 잘하는 전통 때문인지 全北大 총학생회실은 일반 회사의 사무실처럼 깨끗했다. 총학생회장 楊埈化(양준화·26·농화학과)씨와 인사를 나누면서 『총학생회실이 내 방보다 좀 더 깨끗하군요』 라고 농담을 던지는 사이 한총련 탈퇴 이후 새로 구성된 全北총협의 간부진들이 한 둘씩 학생회실로 모여 들었다. 그리하여 전북대 총학생회장 겸 全北총협 의장 楊埈化씨, 작년에 全北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姜信三(강신삼·29·전북대 경제학부)씨, 북한동포돕기운동위원장 李泰連(이태연·26·전북대 경영학)씨, 작년 원광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현재 전북총협 사무국장으로 있는 韓정수(28·원광대 경영학)씨, 그리고 崔玹榮(최현영·27·원광대 신문방송학)씨가 참석하여 좌담회를 열었다(이하 문답에서 말한 이는 일일이 밝히지 않기로 한다).
 
  全北에는 전문대를 포함하여 20개 대학이 있다. 그 중 한개 전문대학의 학생회만이 한총련 계열이고 두 개 대학은 非운동권, 나머지 전북대를 비롯한 17개 대학이 과거의 NL노선에서 1백80도 선회한 全北총협에 편입되어 있다.
 
  『우리는 92년부터 화염병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고 한총련에 비폭력을 적극적으로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제기는 번번이 묵살당했죠. 그렇다고 한총련에서 탈퇴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학생회비에서 내는 한총련 분담금을 제 날짜에 정확하게 내고, 한총련에서 필요로 하는 人力(인력)을 정확하게 올려 보낸 곳은 全北총련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金泳三(김영삼) 집권 초기부터 정권 타도 구호를 내놓고, 폭력 자제 건의를 번번이 묵살하는 한총련을 점점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통일운동을 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분열책동을 거듭하는 한총련의 근원을 따라가 보니 북한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민전이란 유령단체의 지령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습니까.
 
  『주체사상을 조금만 공부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핵심이 首領論(수령론)입니다. 여기에 보면 「당과 수령의 무오류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수령이 무슨 일이든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한 변혁운동도 全國的 관점에서, 다시 말하면 북한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남한 변혁운동의 지도부가 누구냐, 노동당이다 이런 식입니다. 수령에 대해 얼마나 충성하느냐가 변혁운동에 헌신하는 기준이 되었고, 우리도 그렇게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북한에서 말하는 것을 NL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북한의 얘기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전달됩니까.
 
  『北韓 통일전선부에서 운영하는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NDF)을 통해서죠. 북한에서는 한국내에 있는 조직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남한내 변혁운동세력의 전위조직으로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이 한민전이라는 유령단체죠. 하지만 이제는 한민전이 남한에 있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아직도 극소수의 북한 추종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장대로 한민전이 남한내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한민전은 남한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조직이고 우리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니까 자신들은 북한 추종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투, 용어 모두 북한의 것입니다. 몇 월 며칠, 서울 무슨 무슨 호텔에서 보낸다는 식의 성명서를 내놓곤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이 한민전이 남한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 왔습니다. 아직도 한총련은 이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죠. 「구국의 소리」 방송이란 바로 한민전에서 운영하는 방송국입니다. 학생들은 이것을 단파라디오로 청취하게 됩니다』
 
 
  북한이 망하지 않는 한 한총련 개혁은 불가능이라 판단
 
  ─한총련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입니까.
 
  『96년 延大(연대) 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폭력 투쟁으로 학생들이 대거 검거된 延大 사태가 명백한 오류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때부터 한총련을 개혁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래서 97년에 「한총련 사수와 개혁 혁신을 위한 비상대책 위원회」를 꾸리게 되었죠. 延大 사건이 너무도 명백한 오류였으므로 각 대학에 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을 하면 한총련 개혁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역시 가서 만나 보면 우리 얘기에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런데 한총련 중앙에서 간부가 한 번 내려왔다 가면 우리 얘기는 다시 수포로 돌아갑니다. 수령 절대주의와 비슷한 것이죠.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의 권위는 대단합니다.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이게 NL운동하는 친구들의 특성이기도 하죠. 이때부터 과연 한총련을 개혁하여 이 깃발 아래 단결하겠다는 것이 옳은지 고민이 시작된 거죠. 북한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겠다는 판단이 나왔어요. 그래서 차라리 한총련을 탈퇴해서 새로운 학생운동 방향을 모색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최종판단을 내린 것이죠』
 
  1996년 延大사태를 계기로 한총련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이래 1997년에는 좀 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997년 6월 한총련 5기 출범식이 한양대에서 열렸다. 공식적으로는 한총련과 결별하지 않은 상태의 全北총련은 「만일 폭력시위가 있을 경우 합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하고 수백명의 학생들이 上京(상경)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폭력시위가 시작되었다. 全北총련은 발길을 돌려 전주로 내려왔다. 시위 과정에서 전경 이석씨가 희생당하고, 광주·전남지역에서는 무고한 시민이 프락치로 몰려 학생들 손에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법륜스님 강연 듣고 北의 참상 절감
 
  이때 全北총련의 간부진은 아직 한총련에 속해 있는 일원이자 학생운동의 주체로서 「우리는 우리대로 이 사건에 대해 책임지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으면 학생운동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 全北총련 단위의 집회를 준비하게 된다. 간부진을 중심으로 한, 약 5백여 명의 학생들이 대학을 빠져나와 전주의 중심을 흐르는 全州川(전주천)으로 향했다.
 
  시민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싸전다리 아래 川邊(천변)에서 한총련 출범식 때 학생들이 저지른 과오를 사죄하는 집회를 시작했다. 그때 사회를 맡았던 원광대 총학생회장은 복받치는 마음에 道民(도민)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全北도민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1992년 이후 폭력시위에 가담한 바 없는 全北총련이 한총련을 대신하여 국민 앞에 사죄한 장면이었다. 이 자리에서 『한총련을 탈퇴하고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겠다』는 全北총련의 독자적 결심을 선포하기에 이른다(1998년 3월에 한총련 탈퇴).
 
  이 사건 이후 全北총련 소속 각 대학 총학생회는 사회봉사단체를 구성해서 이를 학생회 체계내에 두고 운영하고 있다. 소년소녀가장 및 獨居(독거) 노인 돕기, 전주천 살리기 운동은 이때부터 꾸준히 해 나가고 있는 전북식의 학생운동이다.
 
  全北총련의 한총련에 대한 본격 비판은 북한에 대한 비판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해 왔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96년 法輪(법륜) 스님(사단법인 「좋은 벗들」, 사단법인 한국 JTS 이사장)의 강연을 통해 알게 된 북한 식량난의 현실이었다. 대단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全北총련도 출발점에서는 수령관을 받아들였다고 했는데 식량난과 金正日 정권과의 관련성은 어떤 식으로 보았습니까.
 
  『북한 정권에 문제가 있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이미 간부진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때 얘기되기 시작한 것이 주체사상과 북한정권은 따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죠. 월간조선 6월호에 인터뷰 기사가 실린 김영환씨와 생각이 비슷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북한정권의 실체에 접근하다 보니까 남한 사회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기 시작하더군요. 이때부터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독재국가가 아니라 상당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고, 또 실현되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죠』
 
  현재 全北총협은 북한 민주화에 대한 인식을 대학생 사회에 널리 공론화시키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북한 민주화 운동은 기존 통일운동의 관점을 유지하는 세력과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 문제를 비롯하여 역사해석, 통일방안 등에 있어 논점을 형성하고 있다. 논쟁에 대한 준비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제 이에 대한 자신이 섰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론화할 단계라고 말했다.
 
  『진정한 통일운동의 시작은 이제부터입니다. 1980년대말부터 시작된 북한 바로알기가 남한 사회 민주화의 일환으로서, 反共(반공) 이데올로기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되었다가 역으로 북한을 심각하게 오판하는 결과를 냈다면, 이제는 진짜 북한의 실체에 접근하는 제2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생생한 증언, 전산망, 그리고 사람을 직접 보낼 수 있으면 보내는 식으로 모든 역량을 최대한으로 동원할 작정입니다』
 
  맨 앞자리에서 총알을 맞을 각오로 시작하겠다는 이들은 총알을 받아낼 튼튼한 갑옷을 준비중이다. 아직 대중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서자」라는 제목의 문건을 받아 읽으면서 이들의 결의가 나온 과정의 치열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全南大 학생회의 男·女 분단
 
  전주를 떠나 光州의 全南대학교로 향했다. 全南大 교정을 들어서자마자 알싸한 풀꽃 냄새가 풍겨 왔다. 학생회관 앞 鳳池(봉지)라는 연못가에 짝지어 앉은 젊은 연인들이 보기 좋았다.
 
  全南大의 활기는 남다른 데가 있다고 한다. 총학생회장 郭大中(26·정치외교학)씨는 『전남대는 총학생회 선거가 대통령 선거에 맞먹는다』고 했다. 40일이 넘는 선거기간 동안 死力(사력)을 다해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현실 정치에서 소외감을 겪는 동안 과대해진 정치열기와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
 
  총학생회실 앞 「언제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오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과격한 구호는 찾아볼 수 없었던 全北大 학생회관과는 대조적으로 학생회관 곳곳에 다양한 政見(정견)과 立場(입장)이 법석대고 있었다. 한총련 계열에서 붙였다는 통일대축전 포스터를 찍느라고 카메라를 들자 어떤 여학생 하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달려 왔다.
 
  『지금 뭘 찍고 있는 거예요』
 
  총여학생회는 한총련 계열이어서 총학생회와는 번번이 마찰을 일으킨다고 한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경찰측에서는 NL온건파로 분류하고 있지만 전북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NL노선과는 1백80도 각도를 달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총련과의 대립 전선을 형성하고, 다른 한축으로는 광주·전남지역 非한총련 계열의 학생회와 함께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 협의회(光全총협, 16개 대학으로 구성)를 출범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전경의 입장에서 본 延大사태
 
  올해 5월 제1기로 출범한 光全총협의 의장을 겸임하고 있는 郭大中씨는 우리 사회가 한총련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10년 넘게 NL운동을 해 오면서 한 번도 빠짐없이 범민족대회에 참가했죠. 그런데 전투경찰로 군복무를 하고 있던 96년 延大사태를 전경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한총련에 대한 중립적 시각을 갖게 되더군요. 학생들이 내리치는 각목, 쇠파이프에 전투경찰들이 맞는 것을 보면서 延大사태는 분명한 실패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총련 측에서는 「영웅적 투쟁」이라고 평가를 하더군요. 답답했습니다.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하면 그건 학생운동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는 史上(사상) 최대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상황이었던 86년 건국대 사건과, 그로부터 10년 후 96년 延大에서 있었던 사태를 비교해 가며 설명했다. 상황은 유사했지만 사건 이후 지도부의 태도는 판이했다고 말했다.
 
  『만일 건국대 사태 이후 당시 애학투련 지도부에서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폭력 시위를 계속했다면 87년 6월 민주항쟁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건대 사태를 계기로 비폭력 무저항을 선언했기 때문에 그 힘이 87년 6월로까지 移轉(이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총련 지도부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96년 사태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올해도 「99년 민중대격돌」 운운하고 있습니다』
 
  한총련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지역은 역시 전남대를 중심으로 한 南聰聯(남총련)이었다. 全南大 총학생회가 남총련을 상대로 싸우면서 학생들의 신임을 얻어내는 과정은 실로 지난했다.
 
  『한총련 대의원 대회에 가 보셨습니까? 쉽게 말하면 북한의 노동당 전당대회와 꼭 같습니다. 의장이 들어서면 대의원 전원이 起立(기립)을 합니다. 그리고 의장이 총노선을 결정하면 다시 기립하여 명찰을 들어 전원 찬성하는 식이죠. 단 한표의 반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97년에 남총련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죠. 1백여명의 대의원 중 20~30명이 총노선에 동의하는 기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자 남총련측에서는 주모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했고 결국 그것을 밝혀 냈던 것이죠. 저희 선배 몇 분이 그 과정에서 주모자로 지목되었는데, 남총련측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모두 간부에서 해임시켰습니다. 이에 반발한 선배들이 「총노선에 반대한다고 해서 간부직을 박탈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했습니다. 게다가 같은 해 한총련 출범식 무렵 여기 전남대의 저기 저 끝방에서 무고한 시민이 프락치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죠.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는데도 남총련은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총련에서 해임당한 선배들이 「학생운동 강화 혁신을 위한 전남대 위원회(학강)」를 만들고 전남대 총학생회를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총련 내부에서 스스로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한총련의 교두보였던 전남대 총학생회를 바꾸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당시만 해도 아무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1997년 7월 청년공동체라는 단체를 만들고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했죠. 저는 단체가 구성된 후에 제대를 하고 결합했는데 학생회와 정치활동의 분리, 비폭력 평화선언, 전남대 5월대 해체 등의 案(안)을 마련하고, 전남대를 공부하는 대학, 아카데미즘이 복원된 대학으로 만들자는 내용으로 학생 2천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청년공동체의 盧永權(노영권)씨가 압도적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제가 청년공동체 2기로 당선된 것입니다. 지금 청년공동체에서는 북한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모든 것을 정권 탓으로 돌리는 한총련이 북한문제에 있어서는 金正日 정권 탓으로 돌리지 않으니…』
 
  ─북한 민주화라는 의제를 내오기까지는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의 교정이 필요했을 텐데요.
 
  『이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저는 한총련의 문제는 전술적인 폭력 노선보다는 사상적인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1989년에 북한 바로알기 운동으로 막연히 북한에 접근해서 주체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상에 심취해서 북한을 무조건적으로 동경하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6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趙赫(조혁)씨가 말한대로 「간첩보다 더 간첩다운 활동」을 하게 된 것이죠. 결국 평양방송과 한민전 방송을 듣고 그대로 학생운동 노선과 방침을 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렸습니다. 한총련에서는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터놓고 말하면 90년대 들어와서는 아예 북한의 노선과 방침을 그대로 접수하는 식이 된 것 아닙니까?
 
  저도 학생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지금부터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애초부터 생각을 잘못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는 정확히 반성을 하는데 우리가 운동을 처음 시작한 그 시점에서부터 세상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때 모든 것을 다 부정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 적군파가 사상을 위해서 아버지까지도 日本刀(일본도)로 내리쳤다는 얘기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지금 북한의 식량난의 원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명백한 정권의 문제지요. 저는 지금 학생운동권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그동안 운동권은 아무리 작은 문제도 다 정권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각계 영역의 문제점을 밑으로부터 바로잡고 개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정권의 탓으로 돌려 對(대)정부투쟁을 일삼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운동의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총련은 북한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정권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지금 북한 식량난의 원인도 미국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물러나야 북한도 풀린다는 식이죠. 反美(반미)투쟁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북한의 문제는 잘못된 경제정책과 인권탄압, 反민중적 독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령의 묘소는 금칠을 하면서 인민은 굶어죽게 한다니 말입니다.
 
  저는 얼마 전 중국에 다녀 왔는데 연변대학생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북한의 문제는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영도자를 바꿔야 한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북한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노동당을 비롯한 김정일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북한의 식량난은 풀리지 않습니다』
 
  총학생회장 郭大中씨는 「북한동포돕기」라는 말도, 그 운동도 식상해져버려 「북한동포살리기」라는 말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가 건네준 전남대 총학생회 기관지 「처음처럼」 6월호에는 특집 「구출! 북한민중」이라는 난이 마련되어 있었다. 「너희가 굶주림을 아느냐」라고 제목을 단 이 기사에서 「북한 민주화」의 필연성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북한 민주화에 관해서 우리 학생운동진영은 무엇을 할 것인가, 대자보 1백장을 붙여 봐도 꿈쩍 안할 정권이 아닌가, 북한 혁명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自生的(자생적)인 민주화세력이 생겨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북한 동포에게 식량과 비료를 보내주어야겠지요. 이제 이것이 남한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북한 사람들도 안다잖아요. 「북한 정권이 해결 안해 주는 것을 남한에서 이렇게 도와주는 구나」 그런 마음을 북한사람들에게 심어주도록 해야 합니다』
 
 
  영호남 지역 감정 해소는 통일준비
 
  광주전남지역의 대학 총학생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또 하나 획기적인 일은 지역감정을 허무는 작업이다.
 
  『광주, 전남, 전북, 부산, 경남, 대구, 경북의 40~50개 대학이 화합의 행사를 시작합니다. 지역감정 해소운동이라는 말은 어감이 안 좋다고 해서 쓰지 않습니다. 청년들 사이에 무슨 지역감정이 있느냐, 그간의 정치세력이 만든 말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지역감정의 근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지역감정이라는 말 자체가 지역감정을 만들어 낸다, 이런 생각을 모아 嶺湖南(영호남) 화합과 우리 민족의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민족화합위원회」라고 이름을 지어서 저희 光全총협 산하에 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경북대와 전남대는 상호 교환학생을 인정하면서 1백명 이상의 학생이 왔다갔다 하는데 우리 학생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우선 영호남대학 총학생회 수련회를 합동으로 갖기로 했습니다』
 
  필자가 『민족화합이라는 차원이라면 북한도 이런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겠군요』 라고 묻자 郭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통일이 되면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식민지 노예 보듯 할 것 같아요. 이번에 연변에 같이 간 친구들이 조선족 동포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유심히 봤어요. 천민 대하듯 하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 말로 「당신들이 우리 조선족을 보고 순수하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북한 사람들은 순수하다 못해 멍청하더라」 그러더군요.
 
  저는 지역감정 해소는 영호남의 정치적·이데올로기로서의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말씨나 의식이나 그런 차이들에서 오는 거부감을 극복하고 불신의 벽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벽 허물기」 라고 할까요. 이런 작업은 통일 이후에도 남한 사람들이 북한 민중을, 마음을 열고 대할 수 있도록 하는 意識(의식)의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준비의 하나라고 해야겠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이 한 단계 높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도 그리라고 하면 휴전선부터 그리는 한국 사람은 하나도 없다더라』
 
  호남지역의 두 국립대학에서 만난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필자의 의문 하나를 풀어 주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자신의 生業(생업)과 여가에 열중해 있고, 평범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도 얼마간의 불로소득을 꿈꾸며 주식 개장으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어 있는 1999년의 이곳에서 과연 누가 북한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한때 북한을 통해 낙원을 보고자 했던 이들 학생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총련 소속의 대학생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 역시 한총련의 가장 모범적인 일원이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郭大中씨가 말한 대로 「동서의 벽을 허물고, 다시 남북의 벽을 허물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 전체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민족화합을 실현하자」는 명분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번 취재를 위해서 1980년대 학생운동 지도자를 비롯한 정치학자 경제학자 등의 지식인,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서 「지성의 발전소」라고 할 수 있는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과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이 해준 충고는 눈물겹도록 원칙적이었다.
 
  『사랑도 상대방이 좋아하는지 봐 가면서 해야지 진짜 사랑이다. 북한 인권 거론하다가 오히려 더 다치게 한다』, 『한국의 인권은 뭐 그리 신장되었는가. 단 한 사람의 인권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람은 다수의 인권을 말할 자격이 없다』, 『북한 인권 운운하다가 전쟁이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과 설전을 벌이자면 피로가 먼저 밀려 온다. 좌절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1학기를 북한에서 보낸 적이 있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다시 가서 최근 3년 동안 북한 전역을 여행하면서 다녔다는 한 중국 교포(유학생)를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월간조선 7월호에서 「아버지, 아~ 하세요」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마 여기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그 기사의 주인공이 북한의 최하층민이 아니라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라는 것은 도대체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해안지역이고 산간지역이고 어느 곳 하나 배겨 내는 곳이 없습니다. 도저히 눈물이 나서 북한에 갔다 돌아오고 나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 정도가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 중에 지도 그리라고 하면 휴전선부터 그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면서요』
 
  이 사람은 앞으로 북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리라는 사명을 갖고 있다고 했다. 현재로서는 그의 얘기에 가장 절실하게 공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호남의 대학생들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들의 각오는 단단했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9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노동자를 위해 노동현장에 스스로 들어갔듯이 이제는 북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것이 바로 1999년 한국의 희망보고서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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