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2년 5월 19일 한민족은 민족지도자 손병희 선생을 잃었다. 3·1운동 후 1년간 치른 옥고(獄苦) 때문이었다. 출감 후 넉 달 만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천도교 지도자이기도 했던 손병희 선생은 좌우 진영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을 펼쳤다. 오히려 그런 탓인지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감이 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은 손 선생 서거 100주기를 맞아 《미완의 평화혁명가 손병희》를 출간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과 손병희를 비교해 동아시아 근대화 혁명을 조감했다.
후쿠자와는 서양문명을 배우자며 탈아입구(脫亞入毆)를 주장했다. 쑨원은 중화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동도(東道)를 추구했다. 손병희는 동도와 서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양쪽을 아우르는 중도회통사상에 기초해 근대화를 추구했다.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대한 평화적 근대화혁명이자 독립운동으로 이끌었다. 진영 논리가 난무하는 현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상이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은 손 선생 서거 100주기를 맞아 《미완의 평화혁명가 손병희》를 출간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과 손병희를 비교해 동아시아 근대화 혁명을 조감했다.
후쿠자와는 서양문명을 배우자며 탈아입구(脫亞入毆)를 주장했다. 쑨원은 중화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동도(東道)를 추구했다. 손병희는 동도와 서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양쪽을 아우르는 중도회통사상에 기초해 근대화를 추구했다.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대한 평화적 근대화혁명이자 독립운동으로 이끌었다. 진영 논리가 난무하는 현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