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딥페이크 범죄 빈발하는 가운데 ‘가해자’ 좌표 찍기 하는 ‘보복방’ 등장
⊙ 양육비 주지 않는 부모 신상 정보 공개, 범죄자 신상 정보 공개 웹사이트 등
⊙ 사회적으로 위축된 이들일수록 권력 감정 맛보고자 ‘정의’ 명분으로 온라인상 등에서 갖가지 행각 펼쳐
⊙ 웹툰 원작을 드라마로 만든 경우 많아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양육비 주지 않는 부모 신상 정보 공개, 범죄자 신상 정보 공개 웹사이트 등
⊙ 사회적으로 위축된 이들일수록 권력 감정 맛보고자 ‘정의’ 명분으로 온라인상 등에서 갖가지 행각 펼쳐
⊙ 웹툰 원작을 드라마로 만든 경우 많아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사적 제재’ 콘텐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더 글로리〉.
‘딥페이크 사건’이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2024년 텔레그램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사건’으로도 불린다.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 개설된 단체 채팅방을 통해 학생과 교원 등에 대한 딥페이크 음란물이 유포돼온 사건이다. 가해자들은 대상이 된 피해자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네이버 블로그 등에서 피해자의 사진들을 무단 수집, AI에 학습시킨 뒤 기존 음란물에 얼굴만 갈아 끼워 유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 19일 MBC 〈뉴스데스크〉가 단독 보도하면서 파문을 일으켰고, 이어 수많은 언론미디어를 통해 후속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이 범죄의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으로 다수 얽혀 엄중한 시선으로 다뤄진 탓에 〈뉴스데스크〉 보도 이후 하루 수백 건씩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사건의 사회·문화적 진단과 분석에서부터 기술 발전에 의한 신종 범죄 전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제시 가능한 모든 상황이 언론미디어를 통해 논의되었다고도 볼 만하다.
그러나 그 빗발치는 보도 러시 와중에도 근래 ‘뜨거운 감자’로 여겨져 온 또 다른 사회적 문제가 이번 사건 아래 다시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점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바로 ‘사적 제재 광풍’ 문제다. 《중앙일보》 2024년 8월 29일 자 기사 〈“○○중 ○학년 ○반 ○○○, 이게 딥페이크 범인” 보복방 등장〉을 보자.
‘보복방’ 등장
〈딥페이크 합성물 성범죄가 확산한 데 따른 후폭풍이 나타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딥페이크 범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신상 정보를 유포하고, 사적 제재에 나서는 이들이 생겨나면서다. 이른바 무차별 ‘좌표 찍기(온라인상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과 연락처 등 신상을 공개하는 것)’를 당한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은 딥페이크와 무관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28일 텔레그램에는 딥페이크물을 제작·유포한 가해 남성들이라며 이름과 얼굴 사진, 연락처 등을 공유하는 그룹 대화방이 등장했다. 350여 명이 참여한 이 대화방에선 “○○중 ○학년 ○반 ○○○, 딥페이크 범인입니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지목된 남학생이 접속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프로토콜(IP) 주소와 가족 연락처까지 공유됐다. 이 대화방에선 또 다른 인스타그램 아이디(ID) 50여 개가 나열된 명단도 올라왔다. 대화방 참여자들은 전화·문자·다이렉트메시지(DM) 등으로 욕설을 해가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한 통씩만 걸어도 300통”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전화를 건 뒤 상대방의 반응 등을 공유하고 “경찰이 가해자를 못 조지면 우리가 조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위 기사에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공권력을 믿지 못하는 국민들이 이른바 ‘사적 제재’에 나서는 참담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現) 공권력의 ‘무엇’이 ‘왜’ 못 미더운지에 대해선 그간 발생한 사회 사건에 대한 미숙한 대응 때문은 아닌지 싶다. 이렇게 위와 같은 사적 제재 시도들은 근래 온라인상에서 이목을 끄는 사회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마치 당연한 듯 함께 딸려 나오곤 한다. 이제 한국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회 사건들에 대한 ‘사적 제재 광풍’ 문제는 아예 디폴트(default)처럼 안고 가야 할 고정적 부작용(副作用)이라고까지 불린다.
미디어가 사적 제재 콘텐츠 제공
나아가 진행 중인 사회 사건에 ‘딸려오는’ 흐름조차 아닌 경우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뜬금없이 미디어가 알아서 사적 제재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선 이 점이 더 큰 문제다. 예컨대 지난 6월에는 무려 20년 전인 2004년 벌어졌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두고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에서 갑자기 당시 가해자들 신상을 폭로하는 사적 제재를 가하면서 다시 한 번 세간을 뜨겁게 달군 바 있다. 이 밖에도 많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 정보를 공개했던 웹사이트 ‘배드파더스(현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 폐쇄 심의를 받고 사라졌다가 계속 다시 등장해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자 신상 정보 공개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 등등 끝도 없다.
물론 이 같은 현상에 대한 해석도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이 경우는 알 권리보다는 오히려 공개적 망신주기를 통한 ‘일반 억제(general deterrence)’를 기대하는 것이 더 크다”면서 “사적 제재라는 것이 사실은 공적 제재, 형사사법제도를 통한 공식적 제재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불만’과 ‘불신’이 정확히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애매한 얘기다.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앞선 언론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한민경 경찰대 범죄학과 교수는 “(사적 신상 공개로) ‘사이다’를 느끼는 그 감정을 그 사이트를 운영하거나 누군가의 정보를 공개하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 피해자 측이 느껴야 하는데, 정작 이로 인해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하면 이미 다 틀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적 제재도 명분 자체는 거창하지만 실제 대중적으로는 그저 ‘사이다’로 상징되는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적 제재 콘텐츠 붐’
아닌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사적 제재 광풍’이 처음 포착, 화제가 됐던 곳도 사실 엔터테인먼트, 대중문화 분야다. 엄밀히 위 사적 제재 유튜브 채널들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만, 갖가지 사회적 명분으로 포장돼 있어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어찌 됐든 대중문화 분야에선 특히 지난해부터 ‘사적 제재 콘텐츠 붐’이 언론미디어를 통해 본격적으로 짚어지기 시작했다. 일련의 TV 드라마 성공작들이 비슷비슷한 사적 제재 소재를 다루면서 눈에 띄게 됐고, 지난해 말이 되자 한 해를 마감하는 대중문화계 유행 진단에서 ‘사적 제재 콘텐츠 붐’이 2023년 대중문화계 대표 키워드 중 하나로 떠올랐다.
지난 한 해 동안만 해도 가해자들이 제대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아 억울함을 안고 있는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적 복수를 대행해주는 이들을 그린 SBS 〈모범택시〉, 잔인한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부와 권력으로 처벌을 피해나간 가해자들을 놓고 피해자 본인이 오랜 준비를 거쳐 직접 복수를 꾀한다는 내용의 넷플릭스 〈더 글로리〉, 낮에는 평범한 경찰대생으로 살아가다가도 밤이 되면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을 직접 심판하는 주인공을 다룬 디즈니플러스 〈비질란테〉, 그리고 법이 처단하지 못한 악질 범죄자들에 대해 국민사형투표를 진행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집단을 그린 SBS 〈국민사형투표〉 등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상황을 담은 김선영 칼럼니스트의 《시사인》 2023년 11월 29일 자 기고 〈〈비질란테〉 〈모범택시〉 〈더 글로리〉의 공통점은? [K콘텐츠의 순간들]〉을 보자.
〈이처럼 사적 복수와 사적 제재는 근래 국내 드라마계에서 제일 눈에 띄는 키워드 중 하나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복수심은 원래도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야기 소재였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복수물은 양상이 좀 다르게 보인다. 단순한 해원의 판타지를 넘어 부조리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사회 고발물 성격이 짙어졌다. 주인공은 단지 억울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보호와 구제를 받지 못한 약자의 대변자로 그려지고, 그의 복수는 정의의 대리 실현적 의미를 띤다. 특히 최근에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더욱 높아지면서, 주인공이 심판자를 자처하며 악인을 처단하는 자경단물의 성격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상당수가 웹툰 원작
물론 올해도 〈모범택시〉 〈더 글로리〉 〈비질란테〉 〈국민사형투표〉 등과 같은 드라마계의 ‘사적 제재 콘텐츠 붐’은 계속되는 중이다. 무작위(無作爲)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 대상이 모두 ‘죽어 마땅한’ 이들로 밝혀지는 초현실적 살인마, 복역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흉악범을 놓고 누구든 그를 살해하면 200억원이라는 거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선 정체불명의 인물을 그린 드라마 등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경향은 드라마계에서만 툭 불거져 나온 유행이 아니다. 위 소개된 드라마 중 〈모범택시〉 〈비질란테〉 〈살인자ㅇ난감〉 〈국민사형투표〉 등 상당수가 웹툰이 원작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0~30대가 많이 보는 웹툰계에선 이미 2014~2015년 무렵부터 해당 소재가 주목을 받아 그 기반으로 드라마화가 뒤늦게 진행됐고, 드라마도 대부분 인기를 얻어내니 오리지널 각본으로 승부하는 단계까지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략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행된 흐름이며, 접근성 높은 TV드라마로 전 연령층에 노출돼 일대 붐을 형성한 것이 코로나19 팬데믹 시작 즈음부터라 볼 만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사적 제재, 자경주의(自警主義) 콘텐츠 붐이 시작된 1970년대만 해도 이 같은 콘텐츠는 ‘당연히’ 우파 성향 콘텐츠로 여겨졌었다. 〈더티 해리〉 〈워킹 톨〉 〈데스 위시〉의 시대 말이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신좌파 어젠다들을 정치권에서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어 한껏 약화(弱化)된 공권력에 대한 불만, 그리고 사회·문화적 자유를 부르짖으며 바이크를 타고 미국 땅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지역공동체까지 침범해 위화감을 조성하는 히피족들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된 형태였다.
‘가진 자’ 공격하는 좌파 성향 드러내
그러나 위 한국의 사적 제재 콘텐츠는 대부분 형식 자체는 자경주의에 속하지만 그를 일으키는 계기가 다르다. 상당수가 소위 ‘가진 자’들의 범죄는 그들에게만 유리한 법제도의 맹점에 의해, 또는 법제도가 적극적으로 ‘가진 자’들 편에 서 있기에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이런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을 해소할 길이 없어 자경주의로 나선다는 식이다. 경제적 계층 갈등을 배경으로 삼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좌파 성향 동력이다. 물론 이런 방향이라 해도 현실적 문제들을 가감(加減) 없이 담고 있다면 굳이 이념적 성향을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당장 위 소개한 드라마 중 가장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더 글로리〉만 해도 상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더 글로리〉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끔찍한 학교폭력을 가했던 가해자들이 ‘가진 자’ 부모덕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아 스스로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지만, 〈더 글로리〉의 모티브가 됐던 실제 사건은 달랐다. 드라마 속 가장 끔찍한 학교폭력 장면으로 여겨지는 ‘고데기 학교폭력’이 실제로 벌어졌던 2006년 ‘청주 여자중학교 학교폭력 사건’에서 주범인 가해자는 구속돼 당시 소년법에 근거해 보호관찰 조치를 받았으며, 학교폭력에 대처하지 못한 학교와 교사들은 행정처분을 받았다. 언론 보도가 이뤄지고 난 뒤에 경찰 수사가 빠르게 진행된 부분은 있지만, ‘가진 자’ 또는 ‘권력자’와 관련된 비위(非違) 부분은 발견할 수 없었다.
‘샤덴프로이데’
그럼 대중문화계에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딥페이크 사건’에서까지 소위 ‘신상 털기’ 사적 제재가 일어나는 것도 일정 부분 대중문화 콘텐츠 유행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벌어진 일이라 봐야 하는데, 애초 대중은 어째서 어느 순간 이 같은 사적 제재에 관심을 드높여 대중문화 콘텐츠 붐을 유도하고 나름 고정적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도록 이끌었느냐 말이다. 일각에선 이 같은 현상이 유명 연예인들의 과거 학교폭력 폭로 러시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들어 이른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심리와 연관시키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샤덴프로이데는 독일어로 ‘남의 불행을 봤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를 가리키는 단어이며 그렇게 심리용어로서 굳었다. 친숙한 사자성어로는 ‘행재요화(幸災樂禍)’. 이처럼 사자성어로까지 존재하는 심리인 만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갖게 되는 심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특히 개개인 자존감(自尊感)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더 격렬하고 빈도 높게 이 같은 심리를 경험한다는 관찰이다.
2010년대 소셜미디어 붐 이후 개개인 간 비교가 극심해지면서 각자 자존감이 폭락해온 흐름,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많은 수입을 올리기에 대중의 질투심도 그만큼 크게 자극되는 연예인들부터 이 같은 대중의 사적 제재에 노출돼왔었다는 점 등으로 봤을 때 결국 ‘사적 제재 광풍’도 이 같은 샤덴프로이데 심리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들이 사적 제재 대상으로 떠올랐을 때 대중의 반응이 유난히 격하게 치솟아 언론미디어로 반영되는 수준까지 간 경우들도 대부분 과거 가해자 내지 범죄자들이 과거의 치부(恥部)에도 추후 번듯한 직업을 갖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라는 점을 인지해둘 필요가 있다.
‘정의감 중독’
그런데 또 다른 부분도 종종 언급된다. 연구자들은 앞선 샤덴프로이데를 일으키게 하는 심리적 기반으로 공격성, 경쟁성, 그리고 공정성에 대한 집착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근래 사적 제재 분위기는 여기서 공정성 부문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는 관찰이다. 일본에서 분노 조절(Anger Management) 전문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안도 스케의 저서 《정의감 중독 사회: 분노는 어떻게 정의감을 내세운 마녀사냥이 되었나?》는 이 같은 시대 경향을 ‘정의감 중독’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글에서 ‘정의 중독’을 검색하면 기사가 많이 뜨는데, 대부분 2020년 이후에 작성된 기사다. 일본에서 정의 중독이라는 단어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한 후 급속히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중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체내에 독성을 가진 물질이 일정량 이상 들어와서 기능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것이 없거나 부족하면 못 견디는 병적인 상태’이다.… 정의에 중독되고, 거기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정의를 내세울 때는 활력과 보람을 느낀다. 또한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항상 내 편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했을 때부터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것만으로 소속할 집단을 발견하고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정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은 내면의 갈등과 혼란을 덜어준다.〉
이러면서 자신이 그간 상담해온 내담자들 중 정의감을 폭주시키며 화를 내는 사람들은 평소 세상에 내 자리가 없고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이들, 곧 고립되고 고독한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한다. 이런 사람들이 저성장 국면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진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면 매번 ‘희생양’을 찾는 식으로 갖가지 이상행동의 발화(發火)를 일으키게 되고, 각자의 해소되지 못한 심리적 문제가 ‘정의감 중독’이란 형태로 비화(飛火)되는 상황도 흔히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 효능감(效能感)과 권력 감정의 역할도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무력감(無力感)을 느끼는 이들, 자기 뜻을 사회에서 좀처럼 펼쳐 보이기 힘든 이들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효능감을 확인하고 권력 감정을 맛보고자 ‘정의’라는 차원의 명분으로 온라인상 등에서 갖가지 행각을 펼치게 된다는 것이다.
‘고립의 시대’
한편, 앞선 고독과 고립의 문제는 또 다른 식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시점, 이는 특정 기질이나 성향, 혹은 조건을 지닌 사람들이 겪는 특수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 부분 2010년대 이후 전 세계가 이 같은 문제를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볼 수 있다.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세계번영연구소 명예교수로 재직 중인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의 저서 《고립의 시대: 초연결 세계에 격리된 우리들》이 해당 문제를 심도 있게 짚고 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렇게 외로워지고 원자화된 이유를 설명해주는 원인과 사건들, 즉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그리고 소셜미디어는 주변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을 빼앗고 우리 내면에 자리한 최악의 것들을 부채질함으로써 분노와 종족주의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또한 우리가 ‘좋아요’와 ‘리트윗’과 ‘팔로우’를 쫓느라 보이는 것을 중시하고 강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효과적이고 공감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갉아먹는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깔린 도덕 원칙은 분열을 조장하고 분노에 찬 메시지를 퍼 나르는 행동에 보상을 주는 동시에 혐오 공동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서 책은 “전체주의는 외로움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분석도 함께 전하며, 나치즘을 추종한 이들의 주요 특성은 야만과 퇴보가 아니라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였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터넷, 뉴미디어의 등장과 새로운 미디어 기기(器機)의 탄생, 그리고 풍요와 함께 찾아온 전반적인 개인주의화 풍조는 굴곡진 과정들을 거쳐 개개인의 고립과 고독으로, 또 정의감 중독으로, 다시 ‘사적 제재 광풍’과 사적 제재 콘텐츠 붐으로 계속 낯선 사회·문화 현상들을 일으키며 모두를 당황케 하는 것일 테다. 이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전체주의적 분위기의 만연으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이 과정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버 렉카’
끝으로, 다시 서두의 ‘딥페이크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일단 유튜브 공간에는 ‘사이버 렉카’라 불리는 유튜버들이 따로 존재한다. 사이버 렉카는 온라인상에서 분야 관련 없이 일단 화젯거리가 생기면 마치 견인차처럼 달려와 이와 관련된 자극적 영상을 만들고 수익을 얻어내는 유튜버들을 가리킨다. ‘신상 털기’ 등도 이 중 일부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적 제재 광풍’은 이 사이버 렉카들이 접근성 좋은 유튜브 공간에서 상황을 부풀려 키우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딥페이크 사건’에서 이들 사이버 렉카들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못해 사실상 감지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가해자들의 ‘신상 털기’ 사적 제재가 벌어지는 현상도 이번에는 다소 폐쇄적인 텔레그램 공간 안에서 제한적으로만 일어나고, 대중 입장에선 언론미디어 기사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 셈이다. 그럼 그 많은 사이버 렉카들은 왜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는 나서질 않는 걸까.
상당 부분 ‘딥페이크 사건’ 직전인 지난 7~8월에 걸쳐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이른바 ‘쯔양 사건’의 여파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쯔양 사건’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사이버 렉카 연합회의 쯔양 공갈 논란’이다.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국내 초대형 ‘먹방’ 유튜버 쯔양(본명 박정원)이 이 사이버 렉카들에게 협박받아 거금을 갈취당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쯔양 사건’
지난 7월 10일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사이버 렉카에 해당하는 유튜버 구제역(본명 이준희)의 휴대폰에서 확보한 녹취 중 구제역, 전국진, 카라큘라 등 사이버 렉카들이 쯔양에게 전(前) 남자친구와 관련된 과거사를 폭로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금 갈취를 모의하는 정황이 담긴 녹취 부분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그러자 쯔양이 직접 나서 현재 사망한 전 남자친구의 수십억 원대 수익금 갈취, 데이트 폭력, 그리고 사이버 렉카 등이 가세한 협박과 공갈 등의 범죄 피해를 스스로 밝히기에 이른다. 이에 검찰이 즉각 대응해 구제역, 전국진, 카라큘라와 전 남자친구의 변호사였던 최우석 등이 차례로 구속되고, 8월 14일에는 구제역, 전국진, 카라큘라 등이 기소되는 수순에 이른다.
해당 사건은 애초 쯔양이 전 남자친구에게 당한 데이트 폭력 관련으로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쯔양 본인이 데이트 폭력 상황을 담은 녹취를 공개하면서 그 충격적인 내용 탓에 관련 논의에 불이 붙었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의 커다란 화두 중 하나로 지목돼온 여성 인권 문제와도 직결되는 부분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중심은 사이버 렉카 문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갔고, 특히 8월 한 달 동안은 사이버 렉카들을 그토록 인기 있는 유튜버로 만든 한국 사회 ‘사적 제재 광풍’의 문제점을 되짚어보는 흐름으로 점철(點綴)돼온 분위기다.
‘사이버 렉카’들의 몸사리기
애초 ‘신상 털기’ 등부터 시작해 그보다 더 심각한 종류의 사적 제재 콘텐츠로 직접적 수익을 얻어온 이들인데 이들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며 신뢰하고 지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는 점, 그런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유사(類似) 언론의 입지를 얻어 협박 및 갈취 등의 범죄 행위까지 벌여온 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이제 대중 정서 차원에서 긍정적 역할로 보여온 부분들까지도 회의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생겼다는 점 등이 꾸준히 제시되고 공감을 얻어왔다. 이렇듯 사이버 렉카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다 보니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선 모두들 몸을 사리며 가능한 한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이럼에도 ‘사적 제재 광풍’을 일으켜온 대중 심리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언급했듯 일정 수준 이상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사회 병리(病理) 현상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 ‘광풍’의 확산에 지대한 역할을 해온 사이버 렉카들이 어느 정도 억제됐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겠지만, 그 기반이 되는 심리가 변치 않는 이상 마치 풍선효과처럼 한쪽이 눌리면 또 다른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점에서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 현상이 오히려 더 음성적(陰性的)인 영역에서 펼쳐져 더더욱 제어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만큼 집요한 관찰을 요구하는 부분이라는 얘기다.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이 범죄의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으로 다수 얽혀 엄중한 시선으로 다뤄진 탓에 〈뉴스데스크〉 보도 이후 하루 수백 건씩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사건의 사회·문화적 진단과 분석에서부터 기술 발전에 의한 신종 범죄 전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제시 가능한 모든 상황이 언론미디어를 통해 논의되었다고도 볼 만하다.
그러나 그 빗발치는 보도 러시 와중에도 근래 ‘뜨거운 감자’로 여겨져 온 또 다른 사회적 문제가 이번 사건 아래 다시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점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바로 ‘사적 제재 광풍’ 문제다. 《중앙일보》 2024년 8월 29일 자 기사 〈“○○중 ○학년 ○반 ○○○, 이게 딥페이크 범인” 보복방 등장〉을 보자.
‘보복방’ 등장
〈딥페이크 합성물 성범죄가 확산한 데 따른 후폭풍이 나타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딥페이크 범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신상 정보를 유포하고, 사적 제재에 나서는 이들이 생겨나면서다. 이른바 무차별 ‘좌표 찍기(온라인상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과 연락처 등 신상을 공개하는 것)’를 당한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은 딥페이크와 무관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28일 텔레그램에는 딥페이크물을 제작·유포한 가해 남성들이라며 이름과 얼굴 사진, 연락처 등을 공유하는 그룹 대화방이 등장했다. 350여 명이 참여한 이 대화방에선 “○○중 ○학년 ○반 ○○○, 딥페이크 범인입니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지목된 남학생이 접속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프로토콜(IP) 주소와 가족 연락처까지 공유됐다. 이 대화방에선 또 다른 인스타그램 아이디(ID) 50여 개가 나열된 명단도 올라왔다. 대화방 참여자들은 전화·문자·다이렉트메시지(DM) 등으로 욕설을 해가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한 통씩만 걸어도 300통”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전화를 건 뒤 상대방의 반응 등을 공유하고 “경찰이 가해자를 못 조지면 우리가 조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위 기사에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공권력을 믿지 못하는 국민들이 이른바 ‘사적 제재’에 나서는 참담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現) 공권력의 ‘무엇’이 ‘왜’ 못 미더운지에 대해선 그간 발생한 사회 사건에 대한 미숙한 대응 때문은 아닌지 싶다. 이렇게 위와 같은 사적 제재 시도들은 근래 온라인상에서 이목을 끄는 사회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마치 당연한 듯 함께 딸려 나오곤 한다. 이제 한국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회 사건들에 대한 ‘사적 제재 광풍’ 문제는 아예 디폴트(default)처럼 안고 가야 할 고정적 부작용(副作用)이라고까지 불린다.
미디어가 사적 제재 콘텐츠 제공
나아가 진행 중인 사회 사건에 ‘딸려오는’ 흐름조차 아닌 경우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뜬금없이 미디어가 알아서 사적 제재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선 이 점이 더 큰 문제다. 예컨대 지난 6월에는 무려 20년 전인 2004년 벌어졌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두고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에서 갑자기 당시 가해자들 신상을 폭로하는 사적 제재를 가하면서 다시 한 번 세간을 뜨겁게 달군 바 있다. 이 밖에도 많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 정보를 공개했던 웹사이트 ‘배드파더스(현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 폐쇄 심의를 받고 사라졌다가 계속 다시 등장해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자 신상 정보 공개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 등등 끝도 없다.
물론 이 같은 현상에 대한 해석도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이 경우는 알 권리보다는 오히려 공개적 망신주기를 통한 ‘일반 억제(general deterrence)’를 기대하는 것이 더 크다”면서 “사적 제재라는 것이 사실은 공적 제재, 형사사법제도를 통한 공식적 제재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불만’과 ‘불신’이 정확히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애매한 얘기다.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앞선 언론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한민경 경찰대 범죄학과 교수는 “(사적 신상 공개로) ‘사이다’를 느끼는 그 감정을 그 사이트를 운영하거나 누군가의 정보를 공개하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 피해자 측이 느껴야 하는데, 정작 이로 인해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하면 이미 다 틀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적 제재도 명분 자체는 거창하지만 실제 대중적으로는 그저 ‘사이다’로 상징되는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적 제재 콘텐츠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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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재’ 콘텐츠인 〈모범택시〉, 〈살인자ㅇ난감〉, 〈국민사형투표〉. |
지난 한 해 동안만 해도 가해자들이 제대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아 억울함을 안고 있는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적 복수를 대행해주는 이들을 그린 SBS 〈모범택시〉, 잔인한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부와 권력으로 처벌을 피해나간 가해자들을 놓고 피해자 본인이 오랜 준비를 거쳐 직접 복수를 꾀한다는 내용의 넷플릭스 〈더 글로리〉, 낮에는 평범한 경찰대생으로 살아가다가도 밤이 되면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을 직접 심판하는 주인공을 다룬 디즈니플러스 〈비질란테〉, 그리고 법이 처단하지 못한 악질 범죄자들에 대해 국민사형투표를 진행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집단을 그린 SBS 〈국민사형투표〉 등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상황을 담은 김선영 칼럼니스트의 《시사인》 2023년 11월 29일 자 기고 〈〈비질란테〉 〈모범택시〉 〈더 글로리〉의 공통점은? [K콘텐츠의 순간들]〉을 보자.
〈이처럼 사적 복수와 사적 제재는 근래 국내 드라마계에서 제일 눈에 띄는 키워드 중 하나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복수심은 원래도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야기 소재였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복수물은 양상이 좀 다르게 보인다. 단순한 해원의 판타지를 넘어 부조리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사회 고발물 성격이 짙어졌다. 주인공은 단지 억울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보호와 구제를 받지 못한 약자의 대변자로 그려지고, 그의 복수는 정의의 대리 실현적 의미를 띤다. 특히 최근에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더욱 높아지면서, 주인공이 심판자를 자처하며 악인을 처단하는 자경단물의 성격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상당수가 웹툰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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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비질란테〉는 동명의 웹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10~30대가 많이 보는 웹툰계에선 이미 2014~2015년 무렵부터 해당 소재가 주목을 받아 그 기반으로 드라마화가 뒤늦게 진행됐고, 드라마도 대부분 인기를 얻어내니 오리지널 각본으로 승부하는 단계까지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략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행된 흐름이며, 접근성 높은 TV드라마로 전 연령층에 노출돼 일대 붐을 형성한 것이 코로나19 팬데믹 시작 즈음부터라 볼 만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사적 제재, 자경주의(自警主義) 콘텐츠 붐이 시작된 1970년대만 해도 이 같은 콘텐츠는 ‘당연히’ 우파 성향 콘텐츠로 여겨졌었다. 〈더티 해리〉 〈워킹 톨〉 〈데스 위시〉의 시대 말이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신좌파 어젠다들을 정치권에서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어 한껏 약화(弱化)된 공권력에 대한 불만, 그리고 사회·문화적 자유를 부르짖으며 바이크를 타고 미국 땅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지역공동체까지 침범해 위화감을 조성하는 히피족들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된 형태였다.
‘가진 자’ 공격하는 좌파 성향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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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재’를 다룬 미국의 대표적 영화인 〈더티 해리〉. |
〈더 글로리〉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끔찍한 학교폭력을 가했던 가해자들이 ‘가진 자’ 부모덕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아 스스로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지만, 〈더 글로리〉의 모티브가 됐던 실제 사건은 달랐다. 드라마 속 가장 끔찍한 학교폭력 장면으로 여겨지는 ‘고데기 학교폭력’이 실제로 벌어졌던 2006년 ‘청주 여자중학교 학교폭력 사건’에서 주범인 가해자는 구속돼 당시 소년법에 근거해 보호관찰 조치를 받았으며, 학교폭력에 대처하지 못한 학교와 교사들은 행정처분을 받았다. 언론 보도가 이뤄지고 난 뒤에 경찰 수사가 빠르게 진행된 부분은 있지만, ‘가진 자’ 또는 ‘권력자’와 관련된 비위(非違) 부분은 발견할 수 없었다.
‘샤덴프로이데’
그럼 대중문화계에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딥페이크 사건’에서까지 소위 ‘신상 털기’ 사적 제재가 일어나는 것도 일정 부분 대중문화 콘텐츠 유행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벌어진 일이라 봐야 하는데, 애초 대중은 어째서 어느 순간 이 같은 사적 제재에 관심을 드높여 대중문화 콘텐츠 붐을 유도하고 나름 고정적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도록 이끌었느냐 말이다. 일각에선 이 같은 현상이 유명 연예인들의 과거 학교폭력 폭로 러시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들어 이른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심리와 연관시키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샤덴프로이데는 독일어로 ‘남의 불행을 봤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를 가리키는 단어이며 그렇게 심리용어로서 굳었다. 친숙한 사자성어로는 ‘행재요화(幸災樂禍)’. 이처럼 사자성어로까지 존재하는 심리인 만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갖게 되는 심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특히 개개인 자존감(自尊感)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더 격렬하고 빈도 높게 이 같은 심리를 경험한다는 관찰이다.
2010년대 소셜미디어 붐 이후 개개인 간 비교가 극심해지면서 각자 자존감이 폭락해온 흐름,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많은 수입을 올리기에 대중의 질투심도 그만큼 크게 자극되는 연예인들부터 이 같은 대중의 사적 제재에 노출돼왔었다는 점 등으로 봤을 때 결국 ‘사적 제재 광풍’도 이 같은 샤덴프로이데 심리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들이 사적 제재 대상으로 떠올랐을 때 대중의 반응이 유난히 격하게 치솟아 언론미디어로 반영되는 수준까지 간 경우들도 대부분 과거 가해자 내지 범죄자들이 과거의 치부(恥部)에도 추후 번듯한 직업을 갖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라는 점을 인지해둘 필요가 있다.
‘정의감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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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 중독 사회》 |
〈구글에서 ‘정의 중독’을 검색하면 기사가 많이 뜨는데, 대부분 2020년 이후에 작성된 기사다. 일본에서 정의 중독이라는 단어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한 후 급속히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중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체내에 독성을 가진 물질이 일정량 이상 들어와서 기능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것이 없거나 부족하면 못 견디는 병적인 상태’이다.… 정의에 중독되고, 거기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정의를 내세울 때는 활력과 보람을 느낀다. 또한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항상 내 편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했을 때부터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것만으로 소속할 집단을 발견하고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정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은 내면의 갈등과 혼란을 덜어준다.〉
이러면서 자신이 그간 상담해온 내담자들 중 정의감을 폭주시키며 화를 내는 사람들은 평소 세상에 내 자리가 없고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이들, 곧 고립되고 고독한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한다. 이런 사람들이 저성장 국면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진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면 매번 ‘희생양’을 찾는 식으로 갖가지 이상행동의 발화(發火)를 일으키게 되고, 각자의 해소되지 못한 심리적 문제가 ‘정의감 중독’이란 형태로 비화(飛火)되는 상황도 흔히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 효능감(效能感)과 권력 감정의 역할도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무력감(無力感)을 느끼는 이들, 자기 뜻을 사회에서 좀처럼 펼쳐 보이기 힘든 이들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효능감을 확인하고 권력 감정을 맛보고자 ‘정의’라는 차원의 명분으로 온라인상 등에서 갖가지 행각을 펼치게 된다는 것이다.
‘고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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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시대》 |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렇게 외로워지고 원자화된 이유를 설명해주는 원인과 사건들, 즉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그리고 소셜미디어는 주변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을 빼앗고 우리 내면에 자리한 최악의 것들을 부채질함으로써 분노와 종족주의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또한 우리가 ‘좋아요’와 ‘리트윗’과 ‘팔로우’를 쫓느라 보이는 것을 중시하고 강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효과적이고 공감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갉아먹는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깔린 도덕 원칙은 분열을 조장하고 분노에 찬 메시지를 퍼 나르는 행동에 보상을 주는 동시에 혐오 공동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서 책은 “전체주의는 외로움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분석도 함께 전하며, 나치즘을 추종한 이들의 주요 특성은 야만과 퇴보가 아니라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였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터넷, 뉴미디어의 등장과 새로운 미디어 기기(器機)의 탄생, 그리고 풍요와 함께 찾아온 전반적인 개인주의화 풍조는 굴곡진 과정들을 거쳐 개개인의 고립과 고독으로, 또 정의감 중독으로, 다시 ‘사적 제재 광풍’과 사적 제재 콘텐츠 붐으로 계속 낯선 사회·문화 현상들을 일으키며 모두를 당황케 하는 것일 테다. 이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전체주의적 분위기의 만연으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이 과정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버 렉카’
끝으로, 다시 서두의 ‘딥페이크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일단 유튜브 공간에는 ‘사이버 렉카’라 불리는 유튜버들이 따로 존재한다. 사이버 렉카는 온라인상에서 분야 관련 없이 일단 화젯거리가 생기면 마치 견인차처럼 달려와 이와 관련된 자극적 영상을 만들고 수익을 얻어내는 유튜버들을 가리킨다. ‘신상 털기’ 등도 이 중 일부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적 제재 광풍’은 이 사이버 렉카들이 접근성 좋은 유튜브 공간에서 상황을 부풀려 키우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딥페이크 사건’에서 이들 사이버 렉카들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못해 사실상 감지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가해자들의 ‘신상 털기’ 사적 제재가 벌어지는 현상도 이번에는 다소 폐쇄적인 텔레그램 공간 안에서 제한적으로만 일어나고, 대중 입장에선 언론미디어 기사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 셈이다. 그럼 그 많은 사이버 렉카들은 왜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는 나서질 않는 걸까.
상당 부분 ‘딥페이크 사건’ 직전인 지난 7~8월에 걸쳐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이른바 ‘쯔양 사건’의 여파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쯔양 사건’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사이버 렉카 연합회의 쯔양 공갈 논란’이다.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국내 초대형 ‘먹방’ 유튜버 쯔양(본명 박정원)이 이 사이버 렉카들에게 협박받아 거금을 갈취당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쯔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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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렉카의 피해자인 먹방 유튜버 ‘쯔양’. |
해당 사건은 애초 쯔양이 전 남자친구에게 당한 데이트 폭력 관련으로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쯔양 본인이 데이트 폭력 상황을 담은 녹취를 공개하면서 그 충격적인 내용 탓에 관련 논의에 불이 붙었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의 커다란 화두 중 하나로 지목돼온 여성 인권 문제와도 직결되는 부분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중심은 사이버 렉카 문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갔고, 특히 8월 한 달 동안은 사이버 렉카들을 그토록 인기 있는 유튜버로 만든 한국 사회 ‘사적 제재 광풍’의 문제점을 되짚어보는 흐름으로 점철(點綴)돼온 분위기다.
‘사이버 렉카’들의 몸사리기
애초 ‘신상 털기’ 등부터 시작해 그보다 더 심각한 종류의 사적 제재 콘텐츠로 직접적 수익을 얻어온 이들인데 이들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며 신뢰하고 지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는 점, 그런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유사(類似) 언론의 입지를 얻어 협박 및 갈취 등의 범죄 행위까지 벌여온 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이제 대중 정서 차원에서 긍정적 역할로 보여온 부분들까지도 회의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생겼다는 점 등이 꾸준히 제시되고 공감을 얻어왔다. 이렇듯 사이버 렉카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다 보니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선 모두들 몸을 사리며 가능한 한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이럼에도 ‘사적 제재 광풍’을 일으켜온 대중 심리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언급했듯 일정 수준 이상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사회 병리(病理) 현상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 ‘광풍’의 확산에 지대한 역할을 해온 사이버 렉카들이 어느 정도 억제됐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겠지만, 그 기반이 되는 심리가 변치 않는 이상 마치 풍선효과처럼 한쪽이 눌리면 또 다른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점에서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 현상이 오히려 더 음성적(陰性的)인 영역에서 펼쳐져 더더욱 제어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만큼 집요한 관찰을 요구하는 부분이라는 얘기다.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