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한다’
⊙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는 미로와 같은 삶의 궤적을 방황하면서도 완벽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려 한다. 일러스트=조선DB
200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권지예 작가의 《뱀장어 스튜》(문학사상)를 읽었다. 외설에 가까운 격렬한 성(性) 묘사가 등장하지만 이 묘사는 쓸쓸한 생의 상처를 드러내는 연민에 가깝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다.
〈삶에는 추억이라든가 기억이라는 이름의 구슬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을 어떤 실에 꿰어서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신의 몫일까. 운명의 몫일까 생각해본다. 분명한 것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는 미로와 같은 삶의 궤적을 방황하면서도 완벽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꿰고 싶은 구슬을 놓치는 적도 있을 것이다.〉
동물원을 떠난 암컷 원숭이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산다. 여자는 스무 살 무렵 사랑을 했고 이별을 경험하며 그렇게 낳은 아이를 해외로 입양시켜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른손잡이인데도 오른손 손목에 칼을 댄 상처, 그 지저분한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 그 여자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있는데 이들은 여자의 상처를 응시하지만 아픔의 깊이에 대해 묻지 않는다. 상처는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남자와 한 여자를 상대로 사랑을 둘러싼 성(聖)과 속(俗)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내면의 상처와 용서를 이야기한다. 죽은 어미의 알집에서 살아 나오는 바퀴벌레 새끼를 통해 자기 생을 증오하거나 아이를 입양 보내며 겪은 상처를 응시하는 방식이 충격적이다.
소설 속에 액자처럼 동물원의 암컷 원숭이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여자의 상처를 암시한다. 좀 길지만 소개한다.
〈이 도시에 작은 동물원이 하나 있습니다. 동물원이라면 으레 그렇듯 원숭이 우리도 하나 있지요. 그 우리 안엔 원숭이 가족이 살았는데요. 암수 한 쌍과 새끼 네 마리였답니다.
다른 동물원의 여느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햇빛 좋은 날엔 길게 하품을 하며 해바라기를 하고, 서로의 이를 잡아주며 다정하게 살았답니다. 특히나 그 한 쌍은 흉내 내기의 명수였습니다. 방문객들의 몸짓은 물론 가끔은 암수가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흉내를 내곤 했지요. 마치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 양 말이죠. 새끼들도 온갖 재롱을 떨며 방문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암컷이 없어졌답니다. 사육사가 저녁에 먹이를 주고 문을 열쇠로 잠그는 것을 잊었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새벽녘쯤인가 봅니다.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새벽 이내 속에서 한 산책객이 어슴푸레한 그 짐승의 실루엣을 보았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하도 심상해 보여 그는 새벽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견쯤으로 보아 넘겼답니다. 어쩌면 암컷은 정말로 산보를 잠시 나갔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암컷은 우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암컷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암컷이 없어진 날의 TV뉴스를 기억합니다. 늙수그레한 사육사는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웠고, 원숭이들은 숙소로 돌아가 먹이를 먹으면 곧 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요. 자물쇠만 잊고 안 채웠다뿐이지 문은 얌전히 닫혀 있었어요. 우리 안에서는 문이 열려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일부러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어보지 않는 한 겉보기엔 다를 게 없었거든요. 암놈이 꼭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암놈이 없어지고 나서도 문은 그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짐승들은 일단 빠져나가면 그 흔적이 남거든요. 문이 휑뎅그레 열려 있다든가… 그런데 문은 아귀가 잘 맞도록 닫혀 있었고… 감쪽같았어요. 우리를 빠져나가며 암놈이 원래대로 닫고 나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진작 몰랐던 겁니다.”
암컷은 어디에 갔을까요. 그녀는 정말 탈출을 시도했던 걸까요. 그녀는 갇혀 있는 우리 밖이 자신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평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어쩌면 그녀는 짧은 여행을 떠났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금, 원숭이 우리의 문은 더욱 완강한 자물통으로 잠겨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불행히도 원숭이는 잠긴 문은 못 연답니다….
강에서 새벽 안개가 피어오를 때쯤이면 이상하게 잠을 설치게 된답니다. 잠긴 우리 밖에서 서성거릴 것 같은 암컷의 환영 때문에….〉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찾지 말아야 할까?
암컷의 상처, 여자의 아픔을 수컷과 남자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알아도 그 상처와 아픔을 여자와 암컷이 스스로 견뎌낼 수 있게 내버려 둬야 한다. 여자가 혼자 힘으로 다시 남자에게 돌아가고, 암컷 원숭이가 새끼와 수컷 원숭이가 있는 우리로 돌아가듯 말이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찾지 말아야 할까?
이 소설은 화자의 시점이 바뀌는데 소설의 마지막은 돌아온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그려져 있다.
〈나는 지금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강변을 향한 아파트 부엌창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다. 창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슈미즈 바람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벗은 어깨가 부풀었다 내려온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지만 평온한 모습이다.
비인지 안개인지 모를 물 입자가 강 주위를 떠다닌다. 이 비 오는 날, 멀리서 보면 집 안에 있는 그녀는 꽤나 아늑해 보인다. 부엌에선 삼계탕 끓는 소리가 자작자작, 빗소리에 잦아들고 있을 것이다. 소리 죽여 우는 여자의 흐느낌처럼, 격렬한 섹스를 끝내고 잠든 남자의 박동소리처럼 고요히 끓고 있을 것이다. 삼계탕이 끓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즈넉한 평화로움에 젖는다.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모두 스튜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 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밑줄을 그어본다. 용서란 집요하게 사과를 받아 내거나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아니다. 큰 솥에 온갖 감정을 다 담아 펄펄 끓여 녹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살의나 열정보다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이명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2024)에 ‘청춘은 멈추었고’라는 시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늙어가는 우리는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에 앉아 하루를 준비하고 하루를 보내며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한다. 시인은 ‘해 저무는 저녁 시간/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늙음은 그렇게 익숙함을 견뎌가는 시간일까.
청춘은 멈추었고
나는 아침저녁으로 늙고 있다.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에 앉아
생각은 겨울 들녘처럼 건조하고
자주 고장이 나는 손발과
흐린 눈동자
늙는다는 것은
버스정류장에 무거운 짐을 내리고
걸어가야 할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잠시 가늠이 안 되고
잠시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가야 할 집이 있으니
무거운 짐을 껴안고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일
청춘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그대가 나에게 묻고
오랜 시간 나는 울었다.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생각 없이 빠져나가듯
나는 나의 젊은 목숨을
생각 없이 하대하였으므로
해 저무는 저녁 시간,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한다.
청춘은 박살이 났고
강변역을 지나는 기차처럼
이제는 익숙해야 할 내 그림자의 자국들
늙음은 서둘러 내 풍경이 되었다.
-이명희의 시 ‘청춘은 멈추었고’ 전문
시인은 ‘청춘은 박살이 났’다며 ‘늙음은 서둘러 내 풍경이 되었다’고 했지만 비극적이지 않다. ‘잠시 가늠이 안 되고/ 잠시 걱정이 되지만’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 앞에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함을 잘 안다.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말이다. 늙음은 어쩌면 용서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최영미 시인의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2019)에 실린 시 ‘꽃들이 먼저 알아’를 읽는다. 남자는 여자의 깊은 곳에 물을 뿌리고 싶고 여자는 물이 말라가는 화분 같다. 가끔 물만 주면 된다지만 봄과 여름을 보내고 첫눈이 오기 전에 헤어지고 말했다. 남자와 여자 주변엔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이 있다. 누구의 잘못인지 사람은 몰라도 꽃들은 더 잘 아는 법이다.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지 않을 것이란 맹세는 어디로 간 것일까. 먼저 버린 것은 누구일까. 당신일까. 나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들에게 용서할 시간은 더 없는 것일까.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나비가 날아든다는 난초 화분을 집 안에 들여놓고
우리의 사랑처럼 싱싱한 잎을 보며 그가 말했다
가끔 물만 주면 돼.
물, 에 힘을 주며 그는 푸른 웃음을 뿌렸다
밤마다 나의 깊은 곳에 물을 뿌리고픈 남자와
물이 말라가는 여자의 불편한 동거
꽃가루 날리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첫눈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버렸다
아니, 화분을 버렸다
소설을 쓴답시고 정원을 배회하며
화분에 물 주기를 잊어버렸다
꽃들이 더 잘 알아.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난초 화분 옆에서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지 않을 거야
먼저 버린 건, 당신 아니었나?
-최영미의 시 ‘꽃들이 먼저 알아’ 전문
문학은 허구라지만 허구 속에 지어진 모래성은 때로 미로처럼 견고하다. 그 미로라는 문학에서 독자는 자신만의 미로를 완성한다. 문학상자 안에 암호처럼 숨겨진 의미를 공감(共感)한다. 잊었던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생각한다.
5월의 봄이 오고 시를 읽었으며 새벽을 뜬눈으로 보냈고 주말에 다시 밀린 글을 썼다. 출근하고 밥 먹고 말하고 글 쓰고 다시 퇴근하고 잠들고 다시 출근 버스에 올랐다. 그사이 지인이 보내준 김소월 시인 탄생 120주년 기념 시집을 읽었다. 속으로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1. 봄날
개나리가 피려면
따뜻한 하루면 충분한데,
내게도 봄이 올까?
2. 동서울터미널에서
차가운 샌드위치로 허기를 때우는데
오래된 공허가 몰려왔다
3. 시 창작교실
시를 가르치는 동안,
나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4. 새벽 1시
부연 하늘에 반짝이는 십자가
내가 버린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5. 교통사고
빠르게 구르는 것들은 보이지 않지
시원스레 달리는 너희들을 보면
그 밑에 누워 푸른 하늘을…
6. 토요일 오후
상품을 주문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먹고 말하고 피우며
허무를 태워 없애는 입술
55년 벌리고 닫느라 늘어진 입구
아름다움이 썩는 냄새를 맡은 적 있니?
향기가 진할수록 서러운 거야
7. 오래된 일기
지겨운 이 땅을 나는 떠나지 못했다
답답한 문학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징그러운 내 가족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
-최영미의 시 ‘오래된’ 전문
투명한 나, 사각지대의 나, 무의식적인 나
연세대 연문희 명예교수가 쓴 《참 만남을 위한 한 쌍의 대화》(2004)를 다시 꺼내 읽었다. 내[我]가 누군지 궁금해서다. 인간은 누구나 다 4가지의 ‘자기(自己)’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유리창 모양의 이 그림은 함께 창안한 사람들의 이름 조셉(Joseph Luft)과 해리(Harry Ingham)의 머리글자를 따 ‘조해리의 창(Jahari Window)’이라고 부른다.
창문으로 표시된 왼쪽 위칸은 ‘투명한 나’, 오른쪽 위칸은 ‘나는 알지만 남들에게는 숨겨진 나’, 왼쪽 아래칸은 ‘나는 모르는데 남들에게는 알려져 있는 나’, 그리고 오른쪽 아래칸은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나’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투명한 나’의 영역이 훨씬 넓다. ‘거짓 자기’와 ‘진실한 자기’가 따로 있지 않다. 너무 투명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여서 좋지만 너무 솔직하면 부담스럽기도 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개인적인 비밀이 없을 수 없다. ‘숨겨진 나’의 영역이 클수록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그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두려워하여 대인관계를 회피하거나 남들과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홀로 지내기 쉽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일 생각은 못 하고 남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기 쉽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상처와 단점을 용기를 내어 노출시키기 시작하면 뜻밖에도 다가오는 따뜻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알고 있는’ ‘사각지대의 나’의 영역은 서로 신뢰하는 절친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까운 이들에게만 진심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각지대의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기는 어렵다. 그러니 한층 자신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다.
불가능을 뚫고 만난 너와 나
그런가 하면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나’의 모습도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의식 속 갇혀 있는 저마다의 욕망, 소원, 두려움, 불안, 죄책감 등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영역은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남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 차원에서 통제하거나 다루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인간관계를 통해 속과 겉이 투명한 진실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무비판적인 태도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자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연문희 교수는 《참 만남을 위한 한 쌍의 대화》에서 “누구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단점이나 허물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상대방은 안도감을 느낀다”며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모험을 감행하면, 상대방도 점점 정직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다음은 《참 만남…》 중 일부다.
〈우리가 모두 눈송이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생은 정말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눈송이처럼 절대적으로 독특한 존재이고 저마다 아름답다. 그토록 아름답고 독특한 눈송이가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잠시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30쪽)
인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다. 이 생명의 등가(等價)는 없다. 생명은 기적이다. 한 인간은 저마다 창조의 산물이다. 혹자는 “지구에 생명이 출연할 확률은 고물이 쌓인 야적장에 태풍이 불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낼 확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런 불가능을 뚫고 생명, 인간, 너와 내가 나왔다.⊙
〈삶에는 추억이라든가 기억이라는 이름의 구슬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을 어떤 실에 꿰어서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신의 몫일까. 운명의 몫일까 생각해본다. 분명한 것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는 미로와 같은 삶의 궤적을 방황하면서도 완벽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꿰고 싶은 구슬을 놓치는 적도 있을 것이다.〉
동물원을 떠난 암컷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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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 작가의 《뱀장어 스튜》(문학사상) |
소설은 두 남자와 한 여자를 상대로 사랑을 둘러싼 성(聖)과 속(俗)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내면의 상처와 용서를 이야기한다. 죽은 어미의 알집에서 살아 나오는 바퀴벌레 새끼를 통해 자기 생을 증오하거나 아이를 입양 보내며 겪은 상처를 응시하는 방식이 충격적이다.
소설 속에 액자처럼 동물원의 암컷 원숭이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여자의 상처를 암시한다. 좀 길지만 소개한다.
〈이 도시에 작은 동물원이 하나 있습니다. 동물원이라면 으레 그렇듯 원숭이 우리도 하나 있지요. 그 우리 안엔 원숭이 가족이 살았는데요. 암수 한 쌍과 새끼 네 마리였답니다.
다른 동물원의 여느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햇빛 좋은 날엔 길게 하품을 하며 해바라기를 하고, 서로의 이를 잡아주며 다정하게 살았답니다. 특히나 그 한 쌍은 흉내 내기의 명수였습니다. 방문객들의 몸짓은 물론 가끔은 암수가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흉내를 내곤 했지요. 마치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 양 말이죠. 새끼들도 온갖 재롱을 떨며 방문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암컷이 없어졌답니다. 사육사가 저녁에 먹이를 주고 문을 열쇠로 잠그는 것을 잊었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새벽녘쯤인가 봅니다.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새벽 이내 속에서 한 산책객이 어슴푸레한 그 짐승의 실루엣을 보았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하도 심상해 보여 그는 새벽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견쯤으로 보아 넘겼답니다. 어쩌면 암컷은 정말로 산보를 잠시 나갔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암컷은 우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암컷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암컷이 없어진 날의 TV뉴스를 기억합니다. 늙수그레한 사육사는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웠고, 원숭이들은 숙소로 돌아가 먹이를 먹으면 곧 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요. 자물쇠만 잊고 안 채웠다뿐이지 문은 얌전히 닫혀 있었어요. 우리 안에서는 문이 열려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일부러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어보지 않는 한 겉보기엔 다를 게 없었거든요. 암놈이 꼭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암놈이 없어지고 나서도 문은 그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짐승들은 일단 빠져나가면 그 흔적이 남거든요. 문이 휑뎅그레 열려 있다든가… 그런데 문은 아귀가 잘 맞도록 닫혀 있었고… 감쪽같았어요. 우리를 빠져나가며 암놈이 원래대로 닫고 나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진작 몰랐던 겁니다.”
암컷은 어디에 갔을까요. 그녀는 정말 탈출을 시도했던 걸까요. 그녀는 갇혀 있는 우리 밖이 자신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평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어쩌면 그녀는 짧은 여행을 떠났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금, 원숭이 우리의 문은 더욱 완강한 자물통으로 잠겨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불행히도 원숭이는 잠긴 문은 못 연답니다….
강에서 새벽 안개가 피어오를 때쯤이면 이상하게 잠을 설치게 된답니다. 잠긴 우리 밖에서 서성거릴 것 같은 암컷의 환영 때문에….〉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찾지 말아야 할까?
암컷의 상처, 여자의 아픔을 수컷과 남자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알아도 그 상처와 아픔을 여자와 암컷이 스스로 견뎌낼 수 있게 내버려 둬야 한다. 여자가 혼자 힘으로 다시 남자에게 돌아가고, 암컷 원숭이가 새끼와 수컷 원숭이가 있는 우리로 돌아가듯 말이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찾지 말아야 할까?
이 소설은 화자의 시점이 바뀌는데 소설의 마지막은 돌아온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그려져 있다.
〈나는 지금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강변을 향한 아파트 부엌창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다. 창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슈미즈 바람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벗은 어깨가 부풀었다 내려온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지만 평온한 모습이다.
비인지 안개인지 모를 물 입자가 강 주위를 떠다닌다. 이 비 오는 날, 멀리서 보면 집 안에 있는 그녀는 꽤나 아늑해 보인다. 부엌에선 삼계탕 끓는 소리가 자작자작, 빗소리에 잦아들고 있을 것이다. 소리 죽여 우는 여자의 흐느낌처럼, 격렬한 섹스를 끝내고 잠든 남자의 박동소리처럼 고요히 끓고 있을 것이다. 삼계탕이 끓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즈넉한 평화로움에 젖는다.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모두 스튜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 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밑줄을 그어본다. 용서란 집요하게 사과를 받아 내거나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아니다. 큰 솥에 온갖 감정을 다 담아 펄펄 끓여 녹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살의나 열정보다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이명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2024)에 ‘청춘은 멈추었고’라는 시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늙어가는 우리는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에 앉아 하루를 준비하고 하루를 보내며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한다. 시인은 ‘해 저무는 저녁 시간/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늙음은 그렇게 익숙함을 견뎌가는 시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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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2024) |
나는 아침저녁으로 늙고 있다.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에 앉아
생각은 겨울 들녘처럼 건조하고
자주 고장이 나는 손발과
흐린 눈동자
늙는다는 것은
버스정류장에 무거운 짐을 내리고
걸어가야 할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잠시 가늠이 안 되고
잠시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가야 할 집이 있으니
무거운 짐을 껴안고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일
청춘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그대가 나에게 묻고
오랜 시간 나는 울었다.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생각 없이 빠져나가듯
나는 나의 젊은 목숨을
생각 없이 하대하였으므로
해 저무는 저녁 시간,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한다.
청춘은 박살이 났고
강변역을 지나는 기차처럼
이제는 익숙해야 할 내 그림자의 자국들
늙음은 서둘러 내 풍경이 되었다.
-이명희의 시 ‘청춘은 멈추었고’ 전문
시인은 ‘청춘은 박살이 났’다며 ‘늙음은 서둘러 내 풍경이 되었다’고 했지만 비극적이지 않다. ‘잠시 가늠이 안 되고/ 잠시 걱정이 되지만’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 앞에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함을 잘 안다.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말이다. 늙음은 어쩌면 용서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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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의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2019) |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나비가 날아든다는 난초 화분을 집 안에 들여놓고
우리의 사랑처럼 싱싱한 잎을 보며 그가 말했다
가끔 물만 주면 돼.
물, 에 힘을 주며 그는 푸른 웃음을 뿌렸다
밤마다 나의 깊은 곳에 물을 뿌리고픈 남자와
물이 말라가는 여자의 불편한 동거
꽃가루 날리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첫눈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버렸다
아니, 화분을 버렸다
소설을 쓴답시고 정원을 배회하며
화분에 물 주기를 잊어버렸다
꽃들이 더 잘 알아.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난초 화분 옆에서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지 않을 거야
먼저 버린 건, 당신 아니었나?
-최영미의 시 ‘꽃들이 먼저 알아’ 전문
문학은 허구라지만 허구 속에 지어진 모래성은 때로 미로처럼 견고하다. 그 미로라는 문학에서 독자는 자신만의 미로를 완성한다. 문학상자 안에 암호처럼 숨겨진 의미를 공감(共感)한다. 잊었던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생각한다.
5월의 봄이 오고 시를 읽었으며 새벽을 뜬눈으로 보냈고 주말에 다시 밀린 글을 썼다. 출근하고 밥 먹고 말하고 글 쓰고 다시 퇴근하고 잠들고 다시 출근 버스에 올랐다. 그사이 지인이 보내준 김소월 시인 탄생 120주년 기념 시집을 읽었다. 속으로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1. 봄날
개나리가 피려면
따뜻한 하루면 충분한데,
내게도 봄이 올까?
2. 동서울터미널에서
차가운 샌드위치로 허기를 때우는데
오래된 공허가 몰려왔다
3. 시 창작교실
시를 가르치는 동안,
나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4. 새벽 1시
부연 하늘에 반짝이는 십자가
내가 버린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5. 교통사고
빠르게 구르는 것들은 보이지 않지
시원스레 달리는 너희들을 보면
그 밑에 누워 푸른 하늘을…
6. 토요일 오후
상품을 주문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먹고 말하고 피우며
허무를 태워 없애는 입술
55년 벌리고 닫느라 늘어진 입구
아름다움이 썩는 냄새를 맡은 적 있니?
향기가 진할수록 서러운 거야
7. 오래된 일기
지겨운 이 땅을 나는 떠나지 못했다
답답한 문학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징그러운 내 가족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
-최영미의 시 ‘오래된’ 전문
투명한 나, 사각지대의 나, 무의식적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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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리의 창 |
창문으로 표시된 왼쪽 위칸은 ‘투명한 나’, 오른쪽 위칸은 ‘나는 알지만 남들에게는 숨겨진 나’, 왼쪽 아래칸은 ‘나는 모르는데 남들에게는 알려져 있는 나’, 그리고 오른쪽 아래칸은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나’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투명한 나’의 영역이 훨씬 넓다. ‘거짓 자기’와 ‘진실한 자기’가 따로 있지 않다. 너무 투명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여서 좋지만 너무 솔직하면 부담스럽기도 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개인적인 비밀이 없을 수 없다. ‘숨겨진 나’의 영역이 클수록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그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두려워하여 대인관계를 회피하거나 남들과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홀로 지내기 쉽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일 생각은 못 하고 남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기 쉽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상처와 단점을 용기를 내어 노출시키기 시작하면 뜻밖에도 다가오는 따뜻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알고 있는’ ‘사각지대의 나’의 영역은 서로 신뢰하는 절친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까운 이들에게만 진심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각지대의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기는 어렵다. 그러니 한층 자신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다.
불가능을 뚫고 만난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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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희의 《참 만남을 위한 한 쌍의 대화》(2004) |
인간관계를 통해 속과 겉이 투명한 진실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무비판적인 태도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자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연문희 교수는 《참 만남을 위한 한 쌍의 대화》에서 “누구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단점이나 허물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상대방은 안도감을 느낀다”며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모험을 감행하면, 상대방도 점점 정직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다음은 《참 만남…》 중 일부다.
〈우리가 모두 눈송이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생은 정말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눈송이처럼 절대적으로 독특한 존재이고 저마다 아름답다. 그토록 아름답고 독특한 눈송이가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잠시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30쪽)
인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다. 이 생명의 등가(等價)는 없다. 생명은 기적이다. 한 인간은 저마다 창조의 산물이다. 혹자는 “지구에 생명이 출연할 확률은 고물이 쌓인 야적장에 태풍이 불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낼 확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런 불가능을 뚫고 생명, 인간, 너와 내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