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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9〉 “헤엄쳐야지 별 수 있나요. 세상은 바닥 없는 물이기도 하고”(구병모)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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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을 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깨어졌다’(오정희)
⊙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 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최은영)
⊙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기형도)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린’ 그 슬픔의 고갯길은 미끄럽고 웅덩이가 패 있는 길과 이어져 있다. 오르막을 걷다 길모퉁이를 지나고 다시 긴 골목 끝에서 내리막길을 만난다. 일러스트=조선DB
  
오정희의 소설집 《유년의 뜰》(2017)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왔다는 등신대(等身大)의 거울은 이 방에서 유일하게 흠 없이 온전하고 훌륭한 물건이었다.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남루해져 가는 우리들의 가운데서 거울은, 어머니가 매일 닦는 탓도 있지만, 나날이 새롭게 번쩍이며 한구석에 버티고 있었다. 그 이물감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실체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거울 속에는 언제나 좁은 방 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략)
 
  삽시간에 방은 발 디딜 자리도 없이 잘디 잔 거울 조각으로, 잔인하게 번득이며 튀어 오르는 빛으로 가득 찼다. 저녁마다 화장을 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깨어졌다.〉
 
  -오정희의 소설집 《유년의 뜰》(2017) 중에서

 
  여기 거울이 있다. 등신대의 거울 안에는 방 구석구석이 모두 들어서 있다. 거울은 우리의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점점 우리의 의식까지 지배한다. 거울 앞에선 누구나 적나라(赤裸裸)하다. 자신의 치부를 숨길 수 없다. 감정까지도. 거울 앞에서 ‘나’는 가끔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다.
 
등신대(等身大)의 거울은 이 방에서 유일하게 흠 없이 온전하고 훌륭한 물건이었다. 사진=조선DB
  프랑스의 정신분석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1901~1981년)에 따르면 ‘나’는 바라보는 주체일 뿐 아니라 보이는 ‘나’이기도 하다. 이 분열된 주체를 라캉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통해 설명한다.
 
 
  상상하는 ‘나’와 현재하는 ‘나’ 사이의 거리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2019)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된 아기는 처음엔 자신의 몸을 조각난 몸으로 여긴다고 한다. 얼굴, 목, 가슴, 팔, 손이 따로따로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이 총제적이고 완전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걸 알고 크게 기뻐한다. 이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부른다. 아이는 이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면서 그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반면 침팬지는 인간과 다르다. 침팬지는 거울 속 제 얼굴에 익숙해지면 더는 거울 속의 자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침팬지는 실재계만 존재할 뿐 상상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알게 되는 상징계 역시 침팬지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내’가 아닌 다른 타자(他者)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내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자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상상하는 ‘나’와 현재하는 ‘나’ 사이의 거리는 늘 존재한다. 이 거리를 솔직히 인정해야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 차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면 결국 ‘나’와 타자는, 다시 말해 ‘상상하는 나’와 ‘현재하는 나’의 관계는 깨지고 만다. 거울 속 ‘나’의 얼굴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깨지고 만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 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한지와 영주〉(2016) 중에서

 
 
  온갖 기억이 덕지덕지 붙은 네버 엔딩 이야기
 
김민정의 소설집 《홍보용 소설》(2016)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거울 앞에서 감정을 드러낸다. 기쁘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 순간만은 가장 진솔한 모습으로 ‘나’와 마주한다.
 
  고백하자면 우리는 늘 거울 앞에서 감정의 고갯길을 넘는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린’ 그 슬픔의 고갯길은 미끄럽고 웅덩이가 패 있는 길과 이어져 있다. 오르막을 걷다 길모퉁이를 지나고 다시 긴 골목 끝에서 내리막길을 만난다. 끝없이 이어진 길, 그 미로와 같은 길[삶]에서 우리는 온갖 기억이 덕지덕지 붙은 네버 엔딩 이야기를 만난다. 마치 평행우주의 판본 가운데 하나인 작고 사소한 이야기 말이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봉은 처음 이 집에 들어온 시간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한 시간 후에 작업반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죽은 남자를 치운 다음 유품 정리를 할 작업자 명단에 적혀 있던 단어들을 되뇌었다. 부탄, 몽골, 부 탄, 몽골…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누워 그는 동료들을 기다렸다. 죽은 남자와 그의 곁에 혼자 남아 있던 개. 그들이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들이 느리게 흘러갔다. 아주 느리게.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탄 출신 동료가 서랍에 있던 죽은 남자의 양말과 속옷을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몽골 출신 동료가 특수비닐에 싸인 소파를 트럭에 실어 소각장으로 보내는 모습도 보였다. 동료들이 죽은 남자의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면 모든 작업이 끝난다. 텅 빈 집은 진봉과 그의 외국인 동료들이 잠시 머물다 간 흔적이었다.
 
  진봉은 크게 심호흡했다. 악취가 맡아졌다. 그는 심한 허기를 느꼈다.(중략)
 
  그의 앞에 보고서에 붙어 있던 현장 사진 속 남자의 물건들이 펼쳐졌다. 남자가 신던 운동화와 남자가 모아둔 음식점 쿠폰과 남자가 사용했던 재떨이였다. 신발 뒤축이 닳은 걸 보면 남자는 발을 끌면서 걷는 습관이 있었다. 부엌 찬장에 쌓여 있는 수십 장의 김밥 가게와 중국집 쿠폰은 남자가 직접 요리하기보다는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는 편이라는 것을, 먼지가 엷게 앉은 재떨이는 남자가 담배를 피우다가 최근에 끊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민정의 단편소설 〈죽은 개의 식사 시간〉(2016) 중에서

 
  중국과 한국 모두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조선족 이진봉의 이야기인 〈죽은 개의 식사 시간〉의 한 대목이다.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인 이진봉은 고독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치우는 일을 한다. 그가 한 남자의 시신을 치우기 위해 찾아간 길음 아파트 301동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늙어 있었다. 벽면은 빛바랜 살구색을 띠었고 주름살처럼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이진봉은 생각한다. 지도에서 지워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길음 아파트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죽어간 남자에 대해, 남자는 누구에게든 깨끗하게 지워질 운명이었다.
 

  이진봉에게 죽은 남자는 22만원짜리다. 죽은 지 2일이 지난 다음에 발견돼 남자는 기본비용 20만원에 추가로 2만원이 덧붙어졌다. 이 중 이진봉의 몫은 총 견적의 일할인 2만2000원이었다.
 
  유품정리사가 그 남자의 체취[악취]로 가득한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며 그를, 그의 흔적을 지운다. 먼지를 털고 냄새를 닦으며 바닥을 문지른다. 집밖으로 치워진 물건에 엉켜 붙은 남자의 기억을 이웃들은 알지 못한다. 다시는 마음의 기억을 불러 세울 수도 없다. 그렇게 잊힐 운명이란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집착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불행’은 문학 장르의 대표적 서사
 
노인은 활력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오지 않는 가족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일러스트=조선DB
  〈인생의 성취는 보통 직업적 성취와 가정적 성취로 나뉘지. 직업적 성취는 노후에 나타나고, 가정적 성취는 자식들이 뭘 하는지, 누구랑 결혼하는지 보면 알 수 있어. 자네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가정적 성취가 영 엉망이야. 내가 늘 타일렀는데도 자네를 이렇게 무능하게 방치했잖아.
 
  남자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정적 성취에 대해서, 다시 말해 자식들의 성공담을 늘어놓았다. 사위의 안정된 직업과 사돈댁의 경제적 위상, 아들의 촉망된 장래와 그에 걸맞은 며느리에 대하여.
 
  목선이 정갈한 흰색 셔츠에 라운드넥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단정하고 점잖아 보였다. 앞으로도 인지장애는 절대 겪지 않을 듯 건강해 보였다. 남자는 상처하자마자 부하 직원이던 어머니와 지냈다. 장성한 자식들을 떠나 어머니의 동거인으로 지내면서 홀로 된 육신의 보살핌을 받았다. 남자는 반듯한 가르마와 깔끔한 차림새가 어머니의 손길과 보살핌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척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차림이 추레하고 후줄근하며 살비듬이 끼고 찌든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자식들이 돌봐주지 않아 분노를 느끼고 속절없이 늙어간다는 허망함으로 아직 늙지 않은 모든 것을 시기하고, 증오하고, 어리석다 꾸짖었을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남자가 응답하기를 기다려 문을 열더니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남자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려던 어머니는 컵 받침에 물이 조금 쏟아진 것에 당황해 소매로 닦으려다가 남자가 아량을 베풀듯 휴지를 건네주자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받았다.
 
  어머니는 남자를 동지나 친구, 반려자나 동거인이 아니라 상사나 어려운 손님으로 여기는 듯했다. 오래전부터 그랬는지, 어머니의 질환에서 비롯된 일시적 착란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원래 그러했던 것도 같았다. 어머니는 내 앞에도 찻잔을 놓았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손을 떨었다.〉
 
  -편혜영의 단편소설 〈다음 손님〉(2017) 중에서

 
편혜영의 소설집 《소년 이로》(2019)
  간암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남자’와 재혼을 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자랐다.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의 애정에 민감하고, 타인의 의지를 끔찍이 두려워하는, 이기적이고 무뚝뚝한 어른으로 자랐다. 그사이 어머니는 오랫동안 관청에서 함께 근무한 나이 든 남자와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내주는 학비와 생활비를 결국 유용하고, 아르바이트로 주거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다 별로 절실하지 않던 학업을 포기하는 수순을 밟는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군대에 다녀오는 동안 동기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공무원 입시를 준비한다.
 
  편혜영의 소설은 죽음 이후의 남겨진 이들, ‘나’와 어머니, 남자의 삶을 그린다.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이다. 문학이란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데 적합한 장르다. ‘행(幸)’은 문학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불행은 문학을 통해야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섬뜩한 실체를 간파할 수 있다.
 
  ‘나’와 어머니는 아직도 거울 앞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마주한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 떼어 낼 수 없다. 기억[거울] 앞에 ‘나’와 어머니의 시간은 멈춰지고 회귀하며 유예된다. ‘그저 과거의 잔해와 일부 사건 속을 돌처럼 무표정하게 맴돌다가 기어이 자기 자신을 잊을 것이다.’
 
  〈노인들은 떼를 쓰고 자다 깨서 소리를 지르고 먹을 것이 적다고 투정하고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면 화를 냈다. 하루 종일 누구에게든 욕설을 퍼부었고 자신에게 소홀한 의료진에게 울분을 쏟아내고 함께 병실을 사용하는 노인들과 싸웠다. 그런 활력도 드물어서, 대개는 휠체어나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환자를 쉽게 다루려고 약물을 세게 처방한 탓이었다.(중략)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세계를 겪은 방식이 다를 텐데, 똑같은 생을 겪은 것 같았다. 웃지 않았고 눈빛이 멍했고 박탈감에 사로잡히고 회한만 남았다.〉
 
  -편혜영의 단편소설 〈다음 손님〉(2017) 중에서

 
  여기 울분만 남은 노인들이 있다. 자신을 망치게 놓아두지 않을 작정으로 화를 내며 주위 사람을 들들 볶는다. 날마다 작은 소동을 일으킨다. 밥그릇을 엎거나 침대에 누워 혹은 선 채로 용변을 본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티격태격하다 몸싸움이 벌어진다. 화를 내고 주먹을 뻗고 소리를 지른다.
 
  사실은 그게 자신을 망치고 있음을 잘 안다. 분노도 기운이 남아 있어야 가능하다. 분노마저 소진되었을 때는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오지 않는 가족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혐오한다, 허옇게 센 그의 정신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91)
  기형도 시인의 시 ‘늙은 사람’을 읽는다. 시인은 기껏 서른도 안 돼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늙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딱딱한’ 정신과 ‘그늘 속에 웅크린’ 채 ‘허옇게 센’ 정신을 지닌 자가 노인이다. 그런데 시를 읽다 보면 ‘나’와 ‘그[늙은 사람]’가 헷갈린다. ‘그’가 ‘나’ 같기도 하고 반대이기도 하다. 서로를 경멸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 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기형도의 시 ‘늙은 사람’ 전문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일러스트=조선DB
  어쩌면 ‘늙은 사람’은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나이는 시간의 문제일 뿐 정신은 나이를 뛰어넘는다. 기형도는 정신의 늙음을 탄식하고 경계한다. 세상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시의 행간을 더듬으면 어떤 강렬한 생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외침 속에는 진심 어린 자기애가 담겨 있다. 거울 앞에서 자기를,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를 얼마나 바라봤는가를 알 수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 전문

 
구병모의 소설집 《아가미》(2018)
  구병모의 장편소설 《아가미》는 아가미를 갖게 된 소년 ‘곤’ 이야기다. ‘곤’을 만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강에 빠진 ‘나’는 사람인지 인어인지 알 수 없는 존재에게 구조된다. 그 존재는 ‘나’를 구하고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물속으로 사라진다. 그 아이가 ‘곤’이다.
 
  〈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 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 없는 물이기도 하고.〉
 
  -구병모의 장편소설 《아가미》 중에서

 
  조금 특별한 사람 ‘곤’이, 다섯 살 무렵 때다. 삶을 한 뼘도 더 살아낼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린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아이는 기적처럼, 동화처럼, 노인과 손자 강하의 손에 구조된다. 그리고 ‘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소년은 아가미로 숨을 쉬고 눈부신 비늘을 반짝이며 깊고 푸른 호수 속을 헤엄치면서 한없는 자유를 느낀다. 삶이라는 저주받은 물속에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간절히 숨 쉬고 싶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호흡기관 아가미와 아름다운 비늘을 얻은 ‘곤’의 모습은 환상적이지만 살아남은 ‘곤’의 삶은 숨이 막힌다. 소년이 세상의 아픔을 보고 겪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이 꿈처럼 달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경이로움으로 ‘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예쁘다.”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중략)
 
  “날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것은 강하가 원하면 그렇게 되어도 할 말 없다거나 상관없다는, 가진 거라곤 남들과 다른 몸밖에 없는 곤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그때 라이터에 간신히 불꽃이 일어났다.
 
  “…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가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구병모의 장편소설 《아가미》 중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아가미
 
  소년 ‘곤’을 보며 노인을 떠올린다. 다 자라서 몸도 정신도 다 굳어버린 노인들. 극한의 위기에서 생겨난 ‘곤’의 아가미처럼 노인에게도 저마다의 아가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평생을 살아오며 온갖 일들을 경험한, 죽을 때까지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하고야 말 노인들은 이미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아가미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아가미 때문에 우리는, 노인은 삶을 간절히 대할 수 있고 ‘물에 빠지는’ 절망 속에서도, ‘바닥 없는 물[삶]’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삶의 고비마다 그 아가미가 있었기에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었고 죽음의 욕망 앞에서 등을 돌릴 수 있었다.
 
  울분을 터뜨리는 노인들에게도 아가미는 있다!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아가미는 심장 속에, 아니 겨드랑이 사이에 있거나 머릿속에, 옆구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찾지 못할 뿐 분명 있다! 있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을 때 몸을 뚫고 나올 것이다, 기적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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