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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11 / 에고이스트의 사랑 - 실레와 발리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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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클림트가 보낸 발리와 동거하다가 부유한 여인 에디트와 결혼하기 위해 버려
⊙ 발리에게 이별 통보하면서 “원한다면 결혼한 후에도 연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
⊙ 에디트가 임신한 후 〈가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 표현했으나, 스페인독감으로 사망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년)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예술가. 16세 때 명문 빈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학풍과 교수들과의 갈등으로 1909년 그만두었다. 이 학교가 바로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1907년부터 2년간 도전했으나 입학에 실패한 문제의 그 학교. 초기에는 작품 〈키스〉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영향을 받아 탐미적이고 화려한 그림을 선보이다가 점차 급진적인 표현주의자로서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켜나갔다. 인간의 육체를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거칠게 묘사함으로써 관능적 욕망과 실존에 대한 불안, 의심 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노골적인 누드를 그려 ‘문제적 작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슬프지만 인간은 사실 가까운 사람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어떤 타인도 나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사로잡혀 삶의 잣대를 밖에다 두고 살면 허망할 수밖에 없다.
 
  영민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빨리 눈치채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거침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천재예술가들이 그 그룹의 선봉장. 그중에서도 특히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년)는 완벽하게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자기 자신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사탄이 토해놓은 녀석’
 
〈추기경과 수녀(The Cardinal and Nun, 1912)〉
논란이 많은 실레의 그림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문제작.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해 왔던 합스부르크 치하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라면 더욱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지만 이 그림은 실레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클림트의 〈키스〉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실레만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과감하게 드러낸 화가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에로틱한 인체 묘사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울 만큼 직설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남녀를 막론하고 인물의 성기(性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드로잉을 했다. 성관계 장면은 물론 자신의 자위행위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의 시선에선 수치심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의 거침없는 선을 따라 오직 그 순간의 쾌락만이 흐르고 있다. 심지어 〈추기경과 수녀〉라는 작품에서는 수녀를 끌어안은 추기경의 욕정을 그림으로써 성과 속의 욕망 충돌을 파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가히 종교를 넘어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선전포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자화상(Self-Portrait, 1910)〉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지도교수가 그를 가리켜 ‘사탄이 토해놓은 녀석’이라고 비난했던 것이 빈말이 아닌 양 하나같이 깡말라 뒤틀린 채 어둡고 퀭한 눈빛을 하고 있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지도교수가 그를 가리켜 ‘사탄이 토해놓은 녀석’이라고 비난했던 것이 빈말이 아닌 양 하나같이 깡말라 뒤틀린 채 어둡고 퀭한 눈빛을 하고 있다. 정체가 무엇이든 지옥에서 온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 그로테스크함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절정에 다다른 자신감과 자기애(自己愛)가 드러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이토록 비틀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포장을 걷어내고 나약함과 추악함을 있는 그대로, 아니 벌레나 괴물처럼 비하해서 보여주는 그의 자신감은 정말이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실레는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철도청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기차 미니어처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줄곧 철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실레는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평생 매독으로 고통받다가 그가 열다섯 살 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편이 죽었는데도 슬퍼하기는커녕 무덤덤한 어머니를 보고 실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마리의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결혼 전부터 앓은 매독으로 자신까지 감염돼 아이를 사산(死産)했고, 큰딸 엘비라마저 선천성 매독으로 열 살에 떠나보내야 했다. 거기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매독으로 직장을 잃고 발작을 일으키던 중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채권과 주식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세상을 떴으니 티끌만 한 미운 정조차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실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평생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는 고귀한 성품의 아버지를 기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생명체의 불멸(不滅)을 믿는다. 왜 나는 무덤이나 그런 비슷한 것을 자주 그릴까. 그것은 그 불멸이 내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주 강했으며 나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고 사랑도 하지 않았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소회가 담겨 있다. 어머니와의 불화 탓인지 그는 여동생 게르티에게 지나친 사랑과 집착을 보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게르티를 데리고 나가 트리에스테 지역을 여행하며 호텔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는 게르티를 모델로 많은 누드 작품을 그렸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근친상간(近親相姦)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성(性)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떨칠 수 없는 인간적 괴로움, 그리고 퇴폐에 젖어 살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 그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주제를 찾았다.
 
 
  히틀러와 분리파
 
  실레는 1906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명문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 학교가 바로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1907년부터 2년간 도전했으나 입학에 실패한 문제의 그 학교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당시 실레의 후배가 됐다면 어쩌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훗날 히틀러는 총통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 클림트와 실레를 비롯한 분리파(分離派)들의 작품을 전부 ‘퇴폐 미술’로 매도해 금지시켜버렸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 것은 물론이고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어버린 이들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순수예술’이라 부르는 고전 스타일의 미술을 지향했던 히틀러의 입장에선 ‘전위(前衛)예술’을 지향한 분리파가 예술을 모독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거기다 분리파 예술 작품 소유주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실레는 아카데미에 그리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3년 동안 미술의 기초와 기술적인 부분을 익혔다. 이 시기에 그의 멘토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가 속한 분리파에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분리파의 작품 관람을 금지하는 지도교수 때문에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몇몇 친구와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당시 지도교수는 기존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반항기 넘치는 실레에 대해 그림 실력이 형편없다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던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이었던 발리를 그에게 보내준다. 당시 클림트의 여자관계가 문란하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세간에선 “클림트가 자기 여자를 실레에게 줬다”는 천박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때부터 발리는 실레의 모델이자 연인이자 내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발리는 그의 그림을 배달하는 일까지 했는데 그녀가 모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에는 모델에 대한 인식이 직업여성의 수준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발리와 동거(同居)를 하면서 실레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누드화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답답한 도시 생활에 질린 실레는 발리와 함께 한적한 시골 크룸로프로 떠났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그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분방하고 퇴폐적인 생활은 물론 동네 소녀들의 누드화를 그려대는 바람에 3개월 만에 마을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912년 그는 다시 짐을 싸서 시골 노이렝바흐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사회의 惡

 
〈예술가가 활동을 못 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Self-Portrait, 1912)〉
1912년 실레는 ‘공공 부도덕’ 혐의로 감옥에서 24일을 보냈다. 동네 아이들이 드나드는 곳에 에로틱한 그림을 두고 있었다는 이유로 풍기문란죄를 선고받은 것. 이 자화상에서 그는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자신을 마치 박해받는 성자처럼 그려놓았다. 실레는 자신의 그림이 ‘사회의 악’이라는 판결을 받은 것에 분노했다.
  당시 열일곱 살인 발리와 동거를 하며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는 그를 노이렝바흐 사람들 역시 못마땅해하긴 마찬가지였다. 동네 불량청소년들은 실레의 집을 아지트 삼아 드나들었고 이번에도 실레는 그 소녀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결국 실레가 아이들의 옷을 벗겨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실레와 발리는 아버지와 싸우고 가출한 소녀를 며칠 재워주었는데, 소녀의 아버지가 실레를 유괴범으로 신고했고 그는 졸지에 범죄자로 법정에 끌려가게 된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은 그의 집에서 100점이 넘는 누드화를 압수해 갔다.
 
  재판 결과 미성년자 유괴 및 성추행 혐의는 무죄를 받았지만, 아이들이 드나드는 곳에 에로틱한 그림을 두고 있었다는 이유로 풍기문란죄를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 판사가 그의 그림 한 점을 직접 촛불로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재판을 위해 21일간 구치소에 갇혔고 유죄 판결로 3일간 투옥되는 곤욕을 치렀다.
 
  며칠간 그림을 그리지 못하자 죽을 지경이었던 그는 발리의 노력으로 간단한 그림 도구를 받아 옥중에서 열세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중 하나가 〈예술가가 활동을 못 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라는 긴 제목의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자신을 마치 박해받는 성자(聖者)처럼 그려놓았다. 실레는 자신의 그림이 ‘사회의 악(惡)’이라는 판결을 받은 것에 분노했다. 다행히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가 워낙 퇴폐적 풍조에 젖어 있었고 외설적 그림과 사진이 만연했던 터라 실레의 투옥 사건은 그리 큰 스캔들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실레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의 예술세계도 나름대로 절제(節制)의 미학(美學)이 가미되기 시작한다.
 
 
  조강지처를 버리다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 1915)〉
원제목은 〈남자와 소녀〉였다. 실레의 결별 통보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를 감싸 안으며 매달린 연인 발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레는 자기 자신을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섬뜩하게 그렸는데, 마치 한 여자가 죽음에 매달리는 듯이 보인다. 후에 발리는 종군간호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발칸반도의 야전병원에서 성홍열로 사망했다. 발리의 사망 소식을 접한 실레는 제목을 〈죽음과 소녀〉로 바꾸었다.
  1913년 실레는 클림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예술가동맹’의 회원이 되었으며, 빈 분리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어느 정도 화가로서 입지를 다진 그는 차츰 안정적인 생활을 원하게 되었다. 그는 조강지처(糟糠之妻) 노릇을 해왔던 발리를 버리고 자신을 지원해줄 수 있는 부유한 집안의 딸, 에디트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실레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큰아버지에게 “저는 결혼할 생각입니다. 다행히 상대는 발리가 아니에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때 그는 건너편에 사는 에디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심부름까지 발리에게 시키고 있었다.
 
  늘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발리가 과연 편지의 정체를 알았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실레는 발리에게 이별을 고함과 동시에 에디트와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그러면서 발리가 원한다면 결혼한 후에도 연인(戀人)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이고 매년 단둘이 휴가도 떠날 수 있다고 사악(邪惡)한 제안을 했다. 발리는 절망했다. 그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남자의 실체를 그제야 마주하게 된 것. 실레는 정말로 이기적이다 못해 나르시시즘의 끝판왕이었다.
 
  그의 대표작 〈죽음과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실레를 감싸 안으며 매달린 발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레는 자기 자신을 마치 죽음의 사자(使者)처럼 섬뜩하게 그렸는데, 마치 한 여자가 죽음에 매달리는 듯이 보인다. 발리에게 있어서는 자신과의 이별이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운명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죽음의 낌새를, 다가오는 자신들의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후에 발리는 종군간호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발칸반도의 야전병원에서 성홍열로 사망했다.
 
 
  목전에서 날아간 행복
 
〈가족(The Family, 1918)〉
아기가 곧 태어날 것을 가정해 단란한 자신의 가족을 그린 작품. 실레는 자신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내와 아이를 보호하듯 감싸며 부성애를 드러낸다. 하지만 엇갈리는 시선, 밝게 빛나는 부부의 몸과 이불을 덮은 아이의 머리가 어두운 배경과 극한 대조를 이루며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새로운 탄생에 대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그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암시하는 듯하다.
  1915년, 6월 17일 실레는 에디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실레 부모님의 결혼기념일과 같은 날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을 피하기 위해 1년간 노력했지만 결국 결혼 3일 뒤 징집됐다. 하지만 다행히 에디트의 지원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18년, 스물여덟의 실레는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해 클림트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오스트리아 최고 예술가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에디트는 임신을 했고,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감에 벅차오른 그는 〈가족〉을 그렸다. 아이가 태어난 후의 모습이 그려진 이 그림에서 실레는 그동안의 모습과는 달리 건장한 체격으로 듬직한 가장의 포스를 풍기고 있다. 그의 세계에도 드디어 희망과 행복의 싹이 움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자기암시 탓일까. 같은 해 10월, 안타깝게도 임신 6개월이던 에디트는 스페인독감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곁에서 간호하던 그 역시 독감으로 3일 후에 눈을 감았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안정적인 삶이 목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유럽을 휩쓸었던 스페인독감은 당시 5억 명이 감염되고 3000만 명이 넘게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되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플루엔자였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죽어가는 에디트의 초상화이다. 그는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은 그리지 못하고 사진으로 대신했다. “나는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했던 실레. 그가 말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예술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외설과 예술 사이
 
〈포옹(The Embrace, 1917)〉
결혼 2년 후 그린 작품. 부인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그렸다. 불안하고 격정적인 느낌, 거기다 성을 거칠고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기존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결혼 생활에 대한 실레의 만족감이 엿보인다.
  그는 에로틱한 그림 탓에 여자관계가 난잡하다고 소문난 것과는 달리 실제론 그다지 문란하지 않았다. 동료 화가들에 비하면 오히려 순수하다고 할 정도였다. 작품을 두고 끝없이 이어진 외설 논란에 그는 옥중일기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이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외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술의 가치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상과 시선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실레의 그림을 보고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에로틱한 예술이라고 느낀다면 그는 분명 예술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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