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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부대장 김창룡 口述 회고록 ②

5년간 점원·노무감독으로 위장해 소련간첩단 100여 명 검거

정리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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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 왕근례가 차린 가게에서 남자 식모살이 6개월 만에 王이 국제공산당원이라는 사실 알아내
⊙ 왕근례가 소련으로 無電 보내는 것 목격… 왕근례 밑에서 일한 지 1년 반 뒤에 체포
⊙ 체포 후 전향한 왕근례를 逆工作에 투입, 소만국경 일대의 소련-중국인 간첩단 50명 검거
⊙ 왕근례 사건 이후에는 노동자 감독(쿠리토)이 되어 2년간 노동판 전전… 노동자들 사이에 침투한 소련 간첩 검거 건수 50여 건
⊙ 8·15 해방 10일 전 通化省으로 전속명령 받고 하이라루 떠나
⊙ 귀국 도중 강계에서 소련군의 약탈과 무지함 목격
  〈국제공산당원 왕근례의 체포와 그의 전향〉
 
  하이라루시[海拉爾·중국 내몽골자치구 후룬베이얼(呼倫貝爾)시의 일부. 현행 표기법에 의하면 ‘하이라얼’이나, 구술 회고록에는 ‘하이라루’로 되어 있음-편집자 주] 서대가(西大街) 64번지! 이곳이 바로 내가 그 중국인과 같이 상점을 경영하기로 된 집이다. 안방은 그 중국인들의 주택으로 그냥 쓰게 되었고 길가 집만을 뜯어고치어 상점으로 사용하도록 되었다.
 
  그 중국인의 이름은 왕근례(王近禮)였는데 나이는 마흔다섯이었다. 나이에 비하여 많이 늙어 보였으나 그 커다란 몸집이 정력가(精力家)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아마 다른 곳에서 살다가 이사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수토가 맞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곳이어서 일을 착수하려 마음 쓰이는 데도 많았을 것이 사실이다. 키는 보통 키였으나, 목소리가 탁하여 목소리로서 그의 침착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그 왕근례의 돈으로 시작한 상점 일을 보게 되었는데 상점에서는 배추, 무, 두부 등 식료품부터 성냥, 초, 석유 등 가지각색의 잡화를 팔기로 했다. 상점 간판도 공의성(公義成)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였다.
 
  나는 이 상점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구입에서부터 판매 때로는 배달까지 맡아서 보아야 했다. 그러한 뽀이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는 왕근례의 가족 식사까지 지어 바쳐야 했다.
 
  그러니까 물건을 사들이고 물건을 팔고 또 물건을 배달하는 한편 새벽에는 남보다 일찍 일어나 조반을 지어야 했고 저녁에는 그들의 저녁 식사까지 지어주어야 했다. 때로는 마루에 걸레질까지 해야 했으며 또 물을 긷고 집안 소제도 해야 했다.
 
  해야만 했다는 것은 그들이 시키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신용을 보이고 그들과 가까워지려면 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나 스스로의 결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를 알 리 만무했다. 모르기 때문에 관동군 특무부대에 근무하는 나를 자기들의 사환으로 채용했고 또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를 신용했던 것이다.
 
 
  남자 식모 생활
 
  왕(王·왕근례-편집자 주)은 여관에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장사치로 알았지만 어느 정도 사귀어 보면서도 나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가족들까지도 나를 순전히 장사치로 알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환 노릇을 하는데도 충실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 비밀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일 만큼 나의 행동에 있어서 수상한 데가 있어 보여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주의해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의 정체를 알리지 않은 채 순조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사환으로 채용되었다는 것만도 우선 스타트의 성공이라는 생각 밑에 그다음부터는 무슨 일에나 충실하게 보이려 했고 열성 있게 보이려 했다. 그래서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 가루와 콩가루로 만드는 포미빵즈(包米餠子·옥수수떡)를 조금도 불평 없이 구웠다. 그리고 정말 맛이 있는 것처럼 그들과 같이 먹기도 했다.
 
  영하 40도 추위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물을 만지며 밥을 짓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왕가의 가족이 전부 잠들어 있는 새벽 혼자서만이 깨어 밥을 지어야 할 때 그리 고생하지 않고 자라난 나로서 어찌 슬픈 생각인들 안 들었을 것인가? 무의식중에 고향 생각이 났으며 어머니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참았을 뿐 아니라 괴로운 것 슬픈 것을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북만(北滿·북만주-편집자 주)에서 공산당원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잡아 없애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천대와 학대와 모욕도 참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 개인에 관한 문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로서 식모의 일까지 참으며 해나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었지만 공산당원을 잡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능히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일을 무엇이든 충실히 해주었고 그중에서도 물건 배달하는 일에 특히 충실했다. 그것은 고생을 돌보지 않고 물건을 판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상점과 거래 있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왕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공산분자들은 상점을 통해서 서로 연락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왕의 충실한 사환임을 안다면 나를 통해서 왕과 연락을 취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외부와의 접촉에서 공산분자들의 동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직책상 나는 배달을 열심히 했다.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척 가장
 
1945년 해방 무렵의 청년 김창룡.
  이렇게 외부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 왕과의 접촉을 긴밀히 가지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왕을 자주 만나 상점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그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늘 바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상점 계산 일로 하루에 한 번쯤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그밖에는 얼굴조차 볼 수 없을 만큼 돌아다녔다. 상점 안채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하고라도 접촉해보려고 틈 있는 대로 안채에 들어갔으나 왕의 처나 그의 아들까지도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왕이 상점을 차린 것은 상점을 경영한다는 표면적 간판을 내세우기 위함이며 생활을 위해서 이익을 얻어야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사는 하는 척만 하고 딴 일들을 보고 다닌 것이다.
 
  왕은 중국인의 독특한 성격으로 내음(內陰) 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초조해하기도 했고 때로는 우울해하기도 했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 중요한 단계에 이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밤에 상점 문을 닫고는 잠자는 척하다가 안채로 들어가서 그들의 동정을 몰래 살펴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살피었으나 아무런 단서가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한 생각으로 매일같이 안채를 살피고 있을 때 하루는 이상한 청년 한 사람이 나타나 왕을 찾았다. 나는 육감적으로 그 청년이 왕의 일파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특별히 친절한 태도로 그 청년을 대해주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사귐으로 왕의 행동을 포착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피압박 민족으로서 선계(鮮系·당시 만주에서는 일본인을 일계, 만주인을 만계, 한국인을 선계라고 부르고 있었다)의 불평을 말하기도 했고 선계와 만계가 꼭 같은 운명이란 말도 했다. 즉 불평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공산당원으로 끌어들이는 그들의 심리를 파악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술책을 썼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며칠 후 나에게 공산주의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그에게 의심을 주지 않도록 하며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해서 그를 사귀는 동안 나는 그 청년의 입을 통해서 왕이 국제공산당원(국제공산당은 소련의 조종을 받는 각국 공산당의 연대체인 코민테른을, 국제공산당원이라고 하면 코민테른 공작원을 의미-편집자 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왕이 국제공산당원이라는 사실 하나 아는 데 나는 만 6개월을 소비했다.
 
 
  6번 유치장 드나들며 신용 얻어
 
  나는 참으로 기뻤다. 그야말로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왕을 체포할 수 있고 왕을 체포함으로 그의 비밀이 탄로될 것을 생각할 때 나의 과거 6개월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진정시켜 자중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규명하여 사건의 전모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 한 사람만을 체포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안 된다. 그의 조직과 임무를 알고 따라서 북만 일대의 공산당원 전부를 체포하기 위해서도 왕이 공산당원이라는 것만을 알아서는 불충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전보다도 왕에게 충실함을 보였다.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던 거지 시대 이야기를 하며 지금 먹을 걱정이 없게 된 것은 오직 왕의 덕택이라고 그를 은인처럼 말해주면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 마음을 털어 보였다.
 
  말만 할 뿐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충실하다는 증거를 보여주려고 연구를 거듭했다. 나를 전적으로 신용할 만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루는 물건 가격을 엄청나게 비싸게 붙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폭리취체범이라는 것이 있어서 행정가격보다 비싼 값으로는 물건을 팔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행정가격보다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면 폭리취체법에 걸려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상점의 이익을 위해서 값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갈 것을 연구했다.
 
  과연 내 계획이 들어맞아 가격을 올린 다음 날 경찰서에서 정복 경관 두 명이 나왔다. 그들은 공정판매가격을 위반하고 폭리를 취했다는 이유로 왕에게 책임을 지우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역설하여 내가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는 약간의 벌금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왕에게 내가 상점을 위해 얼마나 충실한지 보이기 위해서는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뒤 여섯 번이나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 유치장에서 나올 때마다 “경찰 하라는 대로만 하다가야 이익이 납니까? 며칠 구류쯤 힘들지 않아요. 상점을 벌여놓고 손해를 보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를 먹었기 때문에 상점 하는 사람들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을 불평 삼아 이야기했다.
 
 
 
왕근례가 無電 발신하는 모습 발견

 
  왕과 왕의 가족들은 나를 절대로 신용하게 되었다. 자기들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라도 바칠 줄 알고 있는 모양 같았다. 그래서 나를 경계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졌으며 따라서 내가 들어가도 자기네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내 앞에서 했다. 그리고 자기네가 그 일을 위해서 현재 여론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그들이 비밀을 조금씩 말하기 시작할 때에도 나는 그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밤잠을 조금도 안 자면서 안채로 들어가 그들의 동정을 살폈던 것이다.
 
  그것은 10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몇 달 동안 매일처럼 안채를 감시하면서도 통 발견할 수 없었던 사실을 이달에 발견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왕이 휴대용 무전기를 책상 위에 놓고 무전을 발신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호흡이 가쁠 만큼 가슴이 두근거림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하리만큼 전신에 열이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흥분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의 임무는 완수되어가고 있으나 좀 더 큰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참아야 했다.
 
  나는 그 뒤 매일 밤 잠을 자지 않으며 왕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 결과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3시에 무전으로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 가지를 알면 두 가지를 아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은 법이다. 왕이 국제공산당원인 동시에 상해(上海)에서 하이라루로 특별 파견이 되어 현재 흥안북성(興安北省·만주국 서북부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편집자 주) 일대의 간첩단장이라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그들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왕과 그의 가족들은 나를 여전히 신용하고 의심치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한국인인 나를 점원으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관헌(官憲)에 대한 의심을 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에 대하여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서도 서로의 인생관이 다르다는 것이 서글픈 인생의 운명 같았던 것이다. 더구나 나를 전적으로 신용하고 있는 왕가 일족에게까지 가면적인 생활을 해온 나 자신이 인간성에서 벗어난 것 같은 생각도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감상주의(感傷主義)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때까지 고생을 하였을까? 정말 육체의 고생을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 싸워왔다. 그것은 오직 공산주의를 없애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신념을 한가한 감상주의에 흘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왕도 나를 이용하기 위하여 나를 채용했고 또 나를 신용하는 것이지 내가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채용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내가 자기의 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죽일지도 몰랐다. 한가한 감상주의에 잠길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왕은 처음부터 나의 적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없애야 하는 적이었다.
 
 
  체포, 轉向
 
  그동안 1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1년 반 동안의 뽀이 생활에서 왕의 정체를 분명히 파악했다. 이제는 시일을 더 지연시킬 필요가 없었다. 민속(敏速)하게 왕과 왕의 일당을 검거해야 했다.
 
  나는 나의 소속기관에 기묘한 수단으로 왕에 대한 정보를 보고했다. 따라서 왕근례에 대한 검거는 시작이 되었다. 왕뿐 아니라 왕의 일파 전체에 대하여서도 검거의 손이 뻗치었다. 나 역시 왕의 일파로서 검거되었다. 내가 특무부대의 대원이라고 해서 나를 검거하지 않는다면 나의 정체가 그 자리에서 드러나 앞으로의 활동에 적지 않은 지장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검거된 지 48시간도 안 되어 왕근례가 전향(轉向)을 하고 말았다. 진심으로 공산주의가 싫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기했던 것보다도 더 큰 수확을 거두었으며 왕이 아는 범위 내에서 공산당 스파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검거할 수 있었다.
 
  왕의 전향으로 말미암아 나도 석방될 수 있었다. 왕이 전향하지 않았다면 정말 혐의자와 같은 대우는 받지 않는다 해도 상당히 오랫동안 유치장 생활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향한 왕은 역공작(逆工作)에 이용되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3시에는 전과 다름없이 무전으로 소련으로 연락하도록 했는데 그때의 정보는 소련에 불리한 역정보(逆情報)라야만 했다. 그리고 왕을 12차에 걸쳐 국경을 넘어 소련에까지 보내어 직접 이편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 저편 정보를 수집해 오도록 하였다.
 
 
  逆工作
 
  왕은 시키는 대로 임무를 잘 수행했다. 12번씩이나 소련에 갔다 오면서도 명령한 기일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왕은 소련 측에 더욱 신용을 얻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감시가 엄중한 국경을 12번씩이나 넘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편에서 편의를 보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만큼 왕을 신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련에서는 왕에게 소만(蘇滿. 소련·만주-편집자 주) 국경 일대에 있는 소련 스파이망을 알려주었다. 이는 보통 사람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않는 것이다. 공산당 조직이란 종적 관련만 가지게 할 뿐 횡적 관련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왕에게만은 그 횡적 관계를 가지도록 하였다. 그만큼 왕을 신용했던 것이다.
 
  소련은 왕에게 흥안북성에 쳐져 있는 9개소의 스파이망을 알려주는 동시에 무전기를 가진 그 9개소와 연락을 하며 감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북만 일대의 공산당 스파이 전부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왕을 통하여 좀 더 자세한 조직 내용을 알았고 총검거할 시기만을 기다릴 때였다. 왕이 장기간에 걸쳐 아무런 사고가 없이 첩보 행동에 충실하다는 것을 도리어 의심했는지 소련 측에서 국경 일대의 감시원을 증파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시간의 여유를 준다면 그만큼 적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게 된다. 그래서 북만 일대의 스파이망 전체에 대하여 검거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무전기 9개를 압수했으며 중국인과 소련인으로 혼성된 스파이를 50명이나 검거했다.
 
  소만 국경 일대에서는 소련 간첩망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지게 되고 말았다. 나도 간첩단의 혐의자로서 또다시 검거되었다. 이번에는 사건이 사건인 만큼 40일 동안이나 유치장 생활을 했다. 그리고 나올 때도 집행유예로서 형식적이나마 법적 처벌을 받고서야 석방되었다.
 
 
  3년 만의 임무 종료
 
  나는 석방이 되자 상점으로 돌아와 가게를 정리하였다. 이제는 나의 임무가 일단 끝났기 때문에 새로운 임무를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손으로 ‘공의성’의 간판을 만들어 붙인 지 만 3년이 흘렀다. 만 3년이 지난 오늘 내 손으로 그 간판을 떼게 될 때 나의 감격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었다. 3년 동안 갖은 고생도 했지만 나의 임무를 끝낼 때까지 누구에게도 의심 한 번 받지 않고 지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공의성’을 정리한 뒤에도 내가 특무부대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이라루 시내에 한 명도 없었다.
 
 
  〈苦力頭로서 제2의 직업〉
 
쿠리감독(쿠리토) 시절을 회상한 김창룡 구술 회고록 원고의 일부.
  왕근례와 더불어 흥안북성 일대에 잠복한 8개소 공산당 간첩단을 일망타진한 다음 나는 신노무추진대(市勞務推進隊)의 쿠리감독(苦力頭)으로서 직업을 바꾸었다.
 
  공의성을 혼자서 경영할 수도 없었지만 같은 직업을 오래도록 계속하면 나의 정체가 탄로될 위험성이 없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임무를 완수한 만큼 새로운 방면에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어 나는 노동자를 상대로 하여 나의 임무를 새로 개척할 결심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운동 대상을 노동자와 농민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은 토지에 정착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생활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따라서 정신적인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농토를 버리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런 만큼 농민은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공산주의에 잘 휩쓸리지 않았다.
 
  반면 노동자란 뜬구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일만 하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불안정한 정신상태에 놓여 있었다. 감언이설로 유혹하기만 하면 불물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더구나 무식하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줄도 몰랐다.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를 이용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노동자들과 같이 술 마시고 도박 해

 
  어쨌든 공산주의자가 가장 노리고 있는 곳이 노동판이었기 때문에 노동자 속에 들어가 공산당의 활동을 쳐부수고 공산분자를 적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아 나는 거지와 상점 뽀이를 가장하던 식으로 이번에는 노동자로 가장했다.
 
  나는 쿠리토로서 노동판에 들어갔기 때문에 노동자와 같이 육체노동은 하지 않았다. 사실 육체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쿠리토로 들어갔던 것이지만 될 수만 있다면 노동자로 들어가 그들과 휩쓸려야만 능률이 더 높을지 몰랐다. 쿠리토라고 하면 노동자와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대립되기가 쉽고 감정이 대립되면 가까이하지를 않을 것이며 가까이하지 않으면 정보를 입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육체노동을 해본 일이 없었다. 해본 일이 없어도 능히 견디어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서툰 일을 하다가 도리어 내 정체가 탄로된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쿠리토이기는 했으나 노동자들과 대립하지 않기 위해서 특별한 주의를 했다. 자기도 그들과 같이 잤고 먹기도 그들과 같이 먹었다. 그러고는 될 수 있는 한 노동자들의 편이 되어 자본주와 싸우는 척하기도 했다. 밤이 되면 노동자와 같이 술도 마셨고 때로는 도박까지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노동자의 편이라는 것을 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나를 따랐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서로 평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노동자들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한편 노동자 속에 숨어 있는 빨갱이를 적발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빨갱이 사상을 좋아하는 척해서 빨갱이의 호기심을 끌어보기도 했으며 때로는 수상한 자들이 모인 곳을 찾아 술을 사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유도(誘導)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어느 정도 단서를 잡으면 밤잠을 안 자고 비밀회의의 내막을 탐색하기도 했다.
 
 
  의심 살까 봐 목욕도 못 해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노동자들과 똑같이 일을 하다가도 밤이 되면 노동자들이 모르는 일을 혼자서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밤잠도 충분히 자지를 못했다. 그뿐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일할 때에도 노동자 속에 숨어 있는 빨갱이를 살펴보기 위하여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른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곤할 때는 모두가 귀찮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의 단서를 포착하고 한 명의 빨갱이를 붙잡으면 그러한 피로도 다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기운이 생기는지 또 계속 근무했다.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도 잠복근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참고 참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빨갱이를 잡는다 해서 누가 특상(特賞)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빨갱이를 없이 하는 것이 나의 천분이기도 한 것처럼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았다.
 
  나는 하이라루뿐만 아니라 만주리(滿洲里) 흥안령(興安嶺) 등 각지를 전전하며 쿠리토로 지냈다. 한 곳에서 빨갱이를 없이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또다시 빨갱이를 잡았다. 노동자 속에서 그리고 노동자 속으로 침투하려는 공산당 스파이들을 샅샅이 이 잡듯 잡았다. 이렇게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나는 2년 동안을 보냈다.
 
  말이 2년이지 익숙지 않은 노동 생활 2년이란 것은 절대로 짧은 것이 아니었다. 목욕을 하고 싶어도 노동자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목욕도 하지 못했다. 일부러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척해야 했다. 아니 더러운 것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해야 했다. 양치도 할 수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세수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하나의 쿠리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캄푸라치(camouflage·위장-편집자 주)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2년 동안의 쿠리토 생활에서 소련 스파이를 건수로만 해서 50여 건을 검거했다. 스파이가 있기만 하면 있는 대로 남김없이 검거했던 것이다. 물론 내 손으로 직접 검거하지 않기 때문에 스파이가 검거되어도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백 명의 스파이를 검거하고 나니 만주 국경지대에서는 공산당 스파이가 씨도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방면으로 들어가 새로운 스파이들을 잡아 보았으면 하고 생각할 때였다. 그러니까 그것이 단기 4278년(서기 1945년-편집자 주) 8월 5일이었다. 이날 오전 9시 뜻밖에도 근무처로부터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나의 생각과 같이 다른 곳으로 전속을 보내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근무처로 달려갔다. 내가 근무처로 정식 출입한 것은 5년 동안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새 근무처를 찾아간 일도 그야말로 한 번도 없었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사람을 통해서 모르게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화성으로 전속 명령
 
  그런 만큼 정식 출두 명령을 받고 대낮에 출두를 하게 되니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전과를 올린 뒤 개선을 하는 장군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근무처로 가자 상관은 즉시로 통화성(通化省·만주국 남동부의 행정구역-편집자 주)에 전속 갈 것을 명령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날 15시까지 출발하라는 단 한마디의 명령만 내리었다.
 
  무척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만 국경에 저비(低備)하고 있던 암운(暗雲)이 바야흐로 폭풍(暴風)을 일으킬 분위기였으니까….
 
  일본은 오랫동안 태평양전쟁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소만 국경이 점차 위험 상태에 들어가고 있으니 군인으로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곧 근무처를 나와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라야 별로 있을 턱이 없었다. 고리짝 한 개도 못 되는 짐뿐이었다. 같이 음식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숨기고 있던 나의 직책을 말하며 급히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뜻하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생겨서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말밖에 달리 떠나는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섭섭하다는 뜻을 표했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나 역시 5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지내온 하이라루라서 그런지 떠난다는 마음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청춘의 가장 중대한 초년을 바친 곳이었다.
 
  나는 3년 동안 상점 뽀이로 있으면서 갖은 추억을 만들어낸 서대가 46번지의 공의성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물론 안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속을 들여다보면서 지난날의 회상을 혼자서 즐겨보았다. 그러고 한국 동포가 사는 거리를 마지막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하이라루를 떠나는 데 대하여 감상(感傷)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날 나는 예정대로 하이라루를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하이라루를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며칠만 더 머물러 있었다면 소련군에게 붙잡혀 낯선 고장에서 어떠한 일을 당했을지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8·15를 맞이하기 바로 10일 전 나는 하이라루를 떠나 고향이 가까운 통화로 향했던 것이다.
 
 
  〈조국의 품으로〉
 
해방 이후 귀향 과정을 회상한 구술 회고록 원고의 일부.
  고향으로
 
  하이라루를 떠난 지 나흘이 지난 8월 9일 나는 통화에 도착했다. 마침 통화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일·소(日蘇) 개전(開戰)의 소식을 들었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한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나의 제2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이라루의 소식을 들었다. 즉 소련이 선전포고를 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소만 국경으로 밀려 들어와 하이라루를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하이라루의 거리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조용하던 하이라루는 하루 사이에 무지스러운 소련군에게 짓밟히고 말았을 것이다. 거리거리마다 소련 군인의 구두 소리에 떨고 있으리라.
 
  내가 소련의 스파이를 잡아 죽이던 곳. 그러나 지금은 소련군이 세력을 잡고 자기들의 적들을 함부로 죽이고 있을 하이라루! 나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나흘만 더 있었다면 그놈들에게 붙잡혀 죽었을 것 아닌가? 생각하면 나는 하느님의 지시로 그 죽음의 도시를 탈출해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이 물밀듯이 만주로 밀려 들어온다는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따라서 일본군은 어찌할지를 몰라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통화로 전속 받은 나에게 어디로 배속시키지도 못했다. 초조 가운데서 덤빌 뿐 갈피를 잡아가며 일을 하지 못했다.
 
  아무 임무도 받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8월 15일이 왔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나는 참으로 기뻤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일본이 항복을 했으니 조국이 독립되리라. 독립! 참으로 꿈과 같은 말이었다. 3·1운동 때 목구멍이 터지도록 불러보고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한 민족의 유일한 그리움… 그 그리움이 독립이 아니었을까? 독립이 되면 우리 민족은 완전한 자유 속에서 그야말로 즐겁게 살 수가 있으리라.
 
  나는 해방된 조국이 보고 싶었다. 독립되었다는 즐거움을 조국의 땅 위에서 맛보고 싶었다. 독립된 즐거움은 조국 땅 위에서만 그 진가(眞價)가 발휘될 것만 같았다. 산천(山川)이 움직이고 초목이 노래 부르고 있을 것 같은 내 조국!
 
  나는 하루도 지체하기가 싫었다. 주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운 내 조국으로 향해 떠나면 그뿐이었다. 아무도 붙잡을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줄 내 조국! 조국의 품 안에 안기어 죽는다면 아무런 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독립된 조국은 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젊은 사람들을 얼마든지 필요로 할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었다. 조국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그새도 적지 않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지만 그것은 남을 위해서 살아온 고생 같기만 했다. 이제는 어떠한 고생을 한다 해도 그것은 조국을 위할 것이요 또 나를 위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빨리 가자! 나의 조국으로!
 
  때 묻은 군복을 던져 버리고 나는 조국을 향해 떠났다. 처음에 내린 곳은 강계(江界)였다. 기차가 강계까지 와서는 남으로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말에 기차에서 내려 거리로 들어갔다.
 
  그때 소련군은 이미 만주 전부를 점령했으며 북한 일대에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들어오든 누가 들어오든 우리나라가 다시 남의 식민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강계의 소련군
 
  강계 곳곳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본 일이 없는 태극기였다. 독립의 상징이요 자유의 상징인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누가 태극기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36년 만에 처음으로 푸른 하늘을 보며 마음껏 휘날리는 태극기! 태극기를 바라보는 나의 감격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런데 거리를 구경하며 걷고 있는 나의 눈에 가시 같은 것이 찌르고 들어왔다. 일본놈 이상으로 어깨를 젖히고 걸어가는 소련 군인들이었다.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의 소련 군인들! 남의 나라에 와 있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도 그럴 수 없을 눈에 거슬리는 태도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나온 일본도(日本刀)를 움켜쥐었다. 나는 군복도 벗어버렸다. 짐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일본도 한 자루만은 만주에서부터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 일본도를 힘있게 잡았던 것이다.
 
  독립된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외국 군대. 더구나 일본놈 이상으로 거만하고 횡포한 소련군. 그놈들을 볼 때 나의 눈에서는 횃불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조국의 해방을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칼을 소중히 보관하리라 생각했다. 아무 때라도 써야 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나는 그놈들의 행동을 살피기 위하여 거기를 빙빙 돌았다.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 더러운 옷을 입은 소련 군인이 시계를 몇 개씩이나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팔에 두세 개를 차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답하는 말이 “시계라는 것을 처음 보는 모양입니다. 신기해서인지 시계를 가진 사람만 보면 반드시 빼앗습니다. 그러고 몇 개라도 한꺼번에 차고 다닙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태엽을 감을 줄 몰라 소리가 나지 않으면 내버린다고 말해주었다.
 
  시계라는 것을 처음 보는 군인! 그리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는 군인! 그것이 소위 소련 군인이었다.
 
 
  청산가리 빼앗아 먹고 죽은 소련군
 
1945년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곳곳에서 약탈, 강간 등을 자행했다.
  한 곳에서는 이런 것을 보았다. 소련군이 냄비 땜장이를 함부로 때리고 있었다. 왜 사람을 때릴까 하고 가까이 가보니 땜질할 때 쓰는 청산가리를 달라고 하는데 땜장이가 그것을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련군은 땜장이를 몇 차례 갈기고는 파란 병에 든 청산가리를 빼앗았다. 땜장이는 매를 맞고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시 달려들었다.
 
  소련군은 땜장이를 다시 때렸다. 그러고는 청산가리 병을 열고 그 속에 든 청산가리를 한 모금 마시었다.
 
  땜장이가 기겁을 해서 병을 뺏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보기에 먹음직하게 생겼으니까 빼앗아 먹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말을 모르는 소련군이 땜장이가 청산가리니까 먹으면 죽는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도리어 물건이 아까워 그러는 줄 알고 사람을 두들겨 패고 억지로 빼앗아 마셔버린 것이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무식한 백성이 어디 있을 것인가! 보기에 먹음직하면 무엇이든 먹는 걸로 아는 백성! 그러나 땜장이가 무엇 때문에 먹을 물건을 가지고 다니겠는가? 추상력(抽象力)이 그렇게 빈약한 백성은 없을 것이다.
 
  청산가리를 먹은 소련 군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뒤 어떤 곳에서는 소련 군인이 마른 오징어를 들고 와서 구두 수선하는 사람에게 창갈이해달라는 것을 보았다. 납작하고 질기니까 아마도 가죽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자기의 헌 구두와 오징어를 내미는 바람에 구두 수선장이는 어처구니없어 웃고 말았다. 소련 군인의 그 무식함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처음 보는 것이기로서니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생각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식 정도가 아니라 미개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미개한 백성들이 세력을 가진다면 얼마나 야만스러운 행동을 할 것인가 하고….
 
 
  자치대원에게 일본도를 빼앗기다
 
  나는 소련 군인이 보기도 싫어졌다. 그래서 정거장으로 가서 떠나는 기차나 기다리려고 했다. 정거장으로 걸어갈 때였다. 소위 자치대원이라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내가 들고 있는 일본도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내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말 내놓기가 싫었다. 무지스럽고 야만적인 소련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상 내 몸에서 무기를 떼놓을 수가 없었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에 부닥칠 때에는 한 놈을 죽이고 내가 죽는 한이 있다 해도 싸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치대원은 억지로라도 그것을 빼앗으려 했다. 민간인은 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일본도를 내놓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자치대원은 나를 자치대 사무실로 끌고 갔다. 가서는 나를 함부로 때리며 고문을 했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소련놈이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해를 끼칠지 모르니까 우리는 다 같이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스무하루 밤을 유치장에서 잤고 그 일본도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 몸에 무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 서운했다. 매 맞은 것도 분한 줄 몰랐다. 내 동족에게 매를 맞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처음으로 고문이라는 것을 당해보고도 분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기가 없는 나의 장래가 불안할 따름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장차 어떠한 시련이 닥쳐올 것인가 하는 불안이었다.
 
  나는 그러한 불안을 가진 채 강계를 떠나 나의 고향으로 출발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찾아가는 고향이었다. 나는 고향을 그리며 피란열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열차에서 보이는 풍경은 또 한 번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야 말았다. 온 지 며칠 안 된 소련군이 우리나라의 물건을 싣고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장의 기계가 실리었는가 하면 쌀가마니도 실리어 있었다. 이것도 확실히 그놈들이 빼앗아가는 물건들이었다.
 
  한국 땅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놈들이 한국에 들어온 지 며칠도 안 되어 한국의 물자를 빼앗아갈 생각부터 하다니….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주기는커녕 한국을 착취하기 위해 들어온 백성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가난한 한국의 물자를 약탈해가는 국가.
 
  내 가슴 속에는 소련에 대한 증오심이 다시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이 인류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했으니까 임시로 주둔하는 것이라는 생각 밑에 며칠만 참으면 놈들의 꼴을 보지 않으려니 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나마 놈들의 꼴을 본다는 것이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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