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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7

고선지(上)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십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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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지,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20세 때 안서도호부 유격장군으로 발탁돼
⊙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 경략
⊙ 이건희, 백색가전에 안주하지 않고 私財 털어 반도체 투자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
고선지. 디지털복원 전문가 박진호씨의 작품.
  고구려 유민(遺民)의 아들로서 당(唐)나라 제6대 황제 현종(玄宗·재위 712~756) 때 서역(西域)을 누빈 불세출(不世出)의 명장(名將) 고선지(高仙芝)는 대표적인 실크로드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는 고선지의 서역 원정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인데, 고선지가 서역 원정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시기는 740년부터 755년까지 약 15년 동안이다. 그러므로 고선지가 태어난 것은 대체적으로 700년 이후로 짐작되나 중국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그의 출생 연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왕족을 비롯한 3만 호(약 20만명)에 달하는 유민들을 서쪽 변경으로 강제 집단 이주시켰다. 이는 장안이나 동북 지역에 고구려 유민들을 거주토록 할 경우 반란의 여지가 있어, 중원의 서남 내지 서북 방향으로 보내 시시때때로 준동하는 서역 제국들의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때 왕족 출신으로 여겨지는 고구려 유민 고사계(高舍鷄)는 하서군(河西軍)에 소속되어 사진(四鎭)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아들 고선지는 20세가 되었을 때 음보(蔭補)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었다. ‘음보’는 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발탁되는 제도이므로, 당시 그의 부친 고사계는 당나라 군대에서 매우 인정받는 장군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0세 때 고선지가 유격장군이 된 것을 보면, 아마 그는 안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안서에서 10대 중반부터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 실전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용맹과 전투력을 눈여겨본 당나라 장수들도 실력을 인정했기에 젊은 나이에 유격장군이 되었을 것이다. 음보라고 하지만 아버지 덕보다는 그의 무술 실력이 우수했음을 《자치통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고선지가 매우 수려한 외모를 가졌으며, 날래고 용감하며, 특히 말 위에서 활을 잘 쏘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역 원정의 동반자 봉상청
 
  고선지는 특히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詧)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안서사진(安西四鎭)인 구자(龜玆·쿠처)·우전(于闐·호탄·허톈)·소륵(疏勒·카슈가르)·언기(焉耆·카라샤르) 중 언기의 군사 총책인 진수사(鎭守使)가 되었다. 740년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가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북상하며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자, 현종은 부몽영찰에게 그들을 격파하도록 하명했다. 이때 부몽영찰은 고선지에게 기병 2000명을 주어 달해부 토벌에 나서도록 했다. 고선지는 달해부 주력군이 쇄엽(碎葉·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호 서북쪽)까지 진출한 것을 알고, 그 길목인 능령(綾 嶺)에 군사를 매복시켜 기습 작전으로 일격에 반군을 궤멸시켰다.
 
  이 달해부 토벌의 승리로 고선지는 당나라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안서로 돌아와 전투 기록을 작성한 사람은 봉상청(封常淸)이었다. 고선지와 봉상청이 인연을 맺은 사연은 《자치통감》에 자세히 나와 있다. 봉상청은 한족(漢族) 출신이었으나 외조부가 죄를 지어 안서로 유배되는 바람에,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렵게 지냈다. 죄수의 외손이므로 천민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몸이 야위었고 눈이 어그러졌으며, 한쪽 다리를 절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으로 봉상청은 고선지가 매일 드나드는 관청의 문 근처에 지키고 섰다가 심부름꾼이 되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수십 일을 끈질기게 따라다니자, 고선지도 그 인내심이 갸륵하여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상청은 고선지가 달해부 반군 토벌에 나설 때도 따라가기를 간청하여 원정군에 참여시켰다. 몸이 부실했던 봉상청은 뭔가 한 가지쯤 자신만의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릴 때부터 외조부에게서 글을 익혀 문장을 만들 줄 알았다. 고선지도 그가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는데, 달해부 원정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봉상청은 자신이 본 전투 장면을 꼼꼼하게 작성해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고선지의 마음에 들었고, 그의 상관인 부몽영찰도 봉상청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현종에게 올리는 첩서(捷書)로 활용했다.
 
  이때부터 고선지는 봉상청을 신임하였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다. 봉상청은 첩서 덕분에 겸인(傔人) 신분에서 일약 첩주수주(疊州戍主)에 제수되어 판관으로 활동하였다. 어려서부터 익힌 경서와 병서 덕분에 봉상청은 서역 원정을 나갈 때마다 고선지를 곁에서 적극 도왔으며, 전략을 짤 때 서로 의논할 정도로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사실상 고선지는 학문을 익힐 기회가 별로 없었다. 부친 고사계를 따라 전장을 누비며 무술과 전술·전략을 배웠지만, 봉상청처럼 문장 만드는 재주는 익히지 못했다. 따라서 고선지와 봉상청은 두 몸이면서 한 몸처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관계가 되었다. 전술작전을 짤 때도 봉상청은 고선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기록했으며, 서로 손발이 잘 맞아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고선지는 봉상청에게 자신의 두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토번의 대두
 
토번을 부흥시킨 송첸캄포(가운데)와 문성공주(오른쪽). 사진=퍼블릭도메인
  고선지는 747년 토번국(吐藩國·티베트) 경략에 나섰다. 토번은 7세기 초 송첸감포(松贊干布)가 세운 통일국가로, 당나라로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당 태종(唐 太宗) 때, 토번은 과거의 흉노와 마찬가지로 서역으로 가는 길을 막아 문물교역을 방해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히말라야산맥 속에 들어 있는 토번은 험난하고 거리가 먼 관계로 원정군을 보내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당 태종은 흉노 선우에게 했던 것처럼 송첸감포에게도 정략결혼 전략을 택하여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출가시켰다. 이후 제4대 황제 당 중종(唐中宗)도 금성공주(金城公主)를 토번왕에게 시집 보내 선린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토번은 7세기 중엽 당나라 지배 아래 있던 토욕혼(吐谷渾)을 경략하여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또한 738년에 토번왕은 서돌궐가한(西突厥可汗)과 서로 자신의 딸들을 교환하여 각기 왕비로 삼는 등 정략결혼을 통하여 유대관계를 공고히 했다. 이로써 토번은 서돌궐과 함께 서역에서 당나라로 이어지는 교역의 길을 중간에 차단하여 대상들을 통한 중간 수익을 가로챘다.
 
  당나라는 토번의 본격화된 서역 진출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736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서역을 공략게 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토번군이 기습해오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패배의 원인은 사막과 산지로 이루어진 먼 원정길이라 행군으로 지친 당군이 도중에 토번군에게 기습당해서 패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 현종은 달해부 토벌 때 공로가 컸던 고선지로 하여금 1만명의 병력으로 토번 정벌에 나서도록 황명을 내렸다. 안서도호부를 책임지는 부몽영찰이 번번이 서역 원정에 실패하자, 부하인 고선지에게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라는 관직을 주어 토번 경략에 나서게 한 것이다. 다만, 이때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으므로 당나라 조정에서는 환관 출신인 변령성(邊令誠)을 군사 감독관으로 특파하였다.
 
  고선지는 먼저 상관 부몽영찰이 서역 원정에 실패한 이유가 최악의 기후와 지형 조건임을 감안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물론 이때 손발 역할을 하는 봉상청도 지혜를 함께 모았을 것이다. 토번 원정군 보·기병 1만명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나 결코 진군을 서두르지 않았다. 군사들을 충분히 쉬게 하면서 하루 평균 50리(약 20km) 이상 행군하지 않았다. 또한 토번을 공격하려면 타클라마칸사막 남단의 길을 택해야 하는데, 당군은 안서도호부의 서쪽 끝인 구자를 출발하여 발환성(撥換城·아커쑤)·악비덕(握毖德)·소륵 등 사막 북단의 톈산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였다. 토번을 향해 직행한 것이 아니라 우회하는 작전을 고수한 것이다.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747년 3월 하순에 출발한 고선지의 1만 보・기병은 100여 일간의 대장정 끝에 당나라 우방국인 오식닉국(五識匿國·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당도하였다. 이와 같이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군사를 이동시킨 것은, 주변의 서역 여러 나라가 겁을 먹도록 하는 선무공작(宣撫工作)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소문을 듣고 토번으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는 일종의 허허실실(虛虛實實)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오식닉국에서 전열을 정비한 고선지의 군대는, 세 방향으로 나누어 토번의 주력군이 주둔해 있는 파미르고원의 연운보(連雲堡)를 향해 진격했다. 그는 특히 서역 현지의 지리에 밝은 장군을 작전의 선봉에 세웠다. 소륵수착사 조승빈에게 파미르 북쪽 계곡 길을 택해 진격게 하고, 발환수착사 기승관에게 적불당(赤佛堂)을 따라 올라가도록 했다. 그리고 고선지 자신은 군사감독관 변령성과 함께 호밀국(護密國・타지키스탄)을 경유해 가장 악조건의 지형으로 군사를 이동시켰다. 이렇게 세 갈래 길의 군사들이 동시에 토번의 연운보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전군에게 각기 3일 치 식량을 주어 반드시 3일 만에 연운보에 도착할 수 있도록 무언(無言)의 압력을 행사했다.
 
  조승빈이나 기승관은 서역 우방국 장수들이므로 파미르고원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진격 명령을 내린 길은 모두 그들에게 익숙한 노선이었다. 그러나 고선지가 택한 길은 고산지대 중간에 파륵천(婆勒川)이 가로막고 있어 연운보를 지키는 토번 군사들조차 지형을 믿고 경계에 소홀할 만큼 악조건이었다. 호밀국은 바로 파미르고원 산중에 있어서 그곳 지리에 밝은 사람이 많았는데, 고선지는 그들에게서 연운보에 이르는 지름길을 안내받았을 것이다.
 
  고선지는 자신의 3000여 명 군사들을 이끌고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해발 4575m)의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계곡을 어렵게 지나 마침내 파륵천에 도착했다. 당도해 보니 파륵천은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험준한 고산이라 멀쩡했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며 폭우가 내려 급격히 물이 불어난 것이었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물 흐름이 빠르고 수심이 사람 키를 넘을 정도여서 군사와 말이 건너기가 불가능했다. 군사들의 불평이 심했다. 특히 군사감독관 변령성은 고선지의 작전이 잘못되었다고 투덜거렸다.
 
  이때 고선지는 특유의 기지로 파륵천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다고 물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군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거짓말처럼 물이 줄어 있었다. 파륵천 계곡은 경사가 심해 폭우가 내리면 금세 물이 불어나지만, 비만 그치면 물이 빠지는 것도 빨랐다.
 
  전날 비가 내려 파륵천 물이 넘치자 연운보의 토번 군사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이때 새벽을 기하여 파륵천을 건넌 고선지의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토번군을 물리쳤다. 약속대로 다른 길로 진격한 조승빈과 기승관의 군대도 연운보에 도착해 세 군데서 협공을 하자 토번군은 갈팡질팡했다. 이때 당군은 하루 종일 연운보를 공략한 끝에 5000명의 토번군을 살상하고, 말 1000 마리와 군사 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소발률국 정복
 
  고선지는 토번군 토벌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들 가운데 약하고 병든 자 3000명을 군사감독관 변령성에게 맡겨 연운보를 수비토록 한 후, 나머지 군사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힌두쿠시산맥의 탄구령(坦駒嶺·해발 4600m)을 넘어 토번의 동맹국인 소발률국(小勃律國·파키스탄)을 공격했다. 탄구령은 항상 얼음이 덮여 있고, 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악천후 지역이었다.
 
  군사감독관 변령성도 고선지의 소발률국 정벌을 반대했다. 현종은 토번의 공략을 명했지 소발률국까지 공격하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약 소발률국을 공략하지 않으면 토번이 우방인 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반기를 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고선지의 군대가 소발률국을 들이치자, 그들은 전투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토번의 소식을 들은 소발률국 왕과 왕비는 급히 산속 동굴로 피신해버렸다.
 
  이렇게 고선지의 원정군이 토번과 소발률을 정복하자, 대식국(大食國·아라비아) 등 서역의 72개국이 당나라에 항복했다. 나중에 소발률국 왕과 왕비(토번 공주)는 산속 동굴에 숨어 있다가 스스로 항복해 나왔으며, 고선지는 그들을 포로로 삼아 개선했다.
 
 
  실크로드 수첩
 
  전쟁로이자 무역로인 실크로드
 
  자고이래로 전쟁의 길은 곧 상업의 길로 통한다. 군사들의 원정은 험난한 지역적 환경 속에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루트를 통해 적을 공략하게 되어 있으며, 전쟁이 끝나면 대상들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지는 루트로 활용되곤 했다. 전쟁은 피아간의 문물을 파괴하는 행위지만, 그 이후 서로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상업을 발달시킴으로써 문명의 대전환이 일어나는 현상이 실크로드상에서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문명의 파괴와 복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은 톈산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북로와 남로, 두 가지 길이 있다. 톈산산맥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사막로(오아시스로)와 초원로의 분계선을 이루고 있다. 이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는 대평야와 초원이 펼쳐져 있고, 남쪽은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사막이 가로놓여 있다.
 
  톈산 북로는 오늘날 시안(西安·당나라 때 장안)에서 출발해 서북쪽 하서회랑~고비사막~둔황~하미~투루판~우루무치~카자흐스탄~터키~로마로 통하는 길이다. 톈산 남로는 둔황에서 출발해 투루판~쿠차~파미르고원을 지나 이란~터키에 다다른다. 또 하나의 길은 서역 남로인데 타클라마칸사막 남쪽으로 둔황~허톈~야르칸트를 통과하는 구간을 말한다.
 
  이처럼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인데, 모두 험로여서 전쟁이나 대상들의 교역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 길을 통해 동방에서는 서방으로 비단·칠기·도자기 등의 물품과 양잠·화약·제지 등의 기술이 전해졌다. 또한 서방에서는 유리·옥·보석·향료 등이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물품이나 기술 외에 종교를 포함한 문화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실크로드는 동서 문명교류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영웅 리더십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 이건희
 
삼성의 반도체 투자를 이끈 이병철-이건희 회장.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대표작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詩)는,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을 잘 짚어주는 지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생에서 두 갈래 길이 있다면, 대부분 사람이 평탄한 길을 택한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고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을 선호한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처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였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반도체를 만드는 사업이 큰 모험일 정도로 모두가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내심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확고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1973년 말 제1차 오일쇼크 여파로 웨이퍼 가공 업체인 한국반도체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동양방송 이사였다. 그는 삼성전자 이사진에게 반도체 사업의 전망을 역설하며 부도 나기 직전에 있는 경기도 부천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무도 반도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한국반도체 인수에도 관심이 없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백색가전만으로도 잘나가고 있었는데, 굳이 반도체 사업 같은 어려운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고 안이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건희 이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삼성 주식을 팔고 사재(私財)를 털어 1974년 말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삼성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러나 인수 이후에도 그다지 여건이 나아지지 않아 삼성반도체는 자본 잠식 상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삼성그룹으로서는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1980년 초 삼성전자로 하여금 삼성반도체를 인수·합병토록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반도체 사업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병철의 탄식
 
  1982년 4월, 이병철 회장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가 삼성반도체를 인수하면서 경영진에 합류한 이건희 부회장은 자청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미국에 갔다. 그때 이건희 부회장은 미리 미국의 반도체회사인 IBM·HP 등에 예약하여 반도체 생산라인 견학 일정을 받아놓은 생태였다. 따라서 그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이병철 회장의 남은 일정을 반도체 회사 견학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늦었다, 늦었어!”
 
  미국 굴지의 반도체 회사들을 둘러보고 나서 이병철 회장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매년 음력설을 일본 오쿠라호텔에서 보내며 사업구상을 했는데, 1983년 2월 8일 그는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적극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일명 ‘2·8 동경구상’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삼성그룹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공식 발표했다.
 
  일찍부터 전자산업이 발달한 일본 기업들은 삼성그룹의 반도체 사업 진출 발표를 보고 반신반의했다. 미국에서도 과연 한국이 반도체를 개발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는 기업이 많았다.
 
  1983년 6월 17일 이건희 부회장은 미국 마이크론과 64K D램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반도체 개발팀을 조직해서 미국 현지에 연수를 보냈다. 그러나 마이크론에서 계약상 연수팀 8명 중 공정 엔지니어 2명만 설계실에 출입하도록 하는 바람에, 다른 연수생은 반도체 생산라인만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큰 소득 없이 귀국한 연수팀은 미국 반도체 업체의 기술 이전에 희망을 걸지 않고 자력으로 공정 개발을 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리고 곧 20명으로 된 64K D램 프로젝트팀을 구성하여, 생산 공정 기술을 하나하나 개발해나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팀은 1983년 10월 6일 총 309가지의 공정 개발을 완료한 후, 그 기술을 웨이퍼 생산라인에 적용하였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1월 7일 마침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처음 예상했던 3년의 개발기간을 불과 6개월로 단축시킨 것이었다.
 
  처음 삼성전자가 64K D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미국과 일본 반도체 전문가들은 1986년까지 개발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6개월 만에 성공함으로써 삼성전자는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었다.
 
  64K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였다. 그러자 세계 각국의 반도체 관련 업체들은 삼성전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제품은 글로벌 시장을 빠르게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개척의 리더십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겨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국내에선 거들떠보지도 않던 분야인 반도체 사업의 도전에 있을 것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개발 이후 30년 가까이 되었을 때 연 매출액이 일본 전자회사를 모두 합한 금액보다 더 높을 때도 있었다. 일본 정부로서는 자존심이 부쩍 상할 수밖에 없었다. 2018년 기준 삼성전자는 일본 굴지의 10대 전자회사 총 매출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매출액을 올렸다. 이는 상당 부분 반도체 사업의 성과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사업 선택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개척정신에 있었다. 또한 가장 큰 시장인 미국을 공략한 것은 그 주변국의 반도체 시장을 점유하는 초석의 역할을 했다. 고선지가 가장 가파르고 험한 파미르고원을 택하여 토번군을 공략하고, 이어서 소발률국을 점령해 인근 72개국의 항복을 받아낸 것도 모험정신의 발로이자 남들이 가지 않은 험한 길을 개척한 리더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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