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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34〉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한 소나무의 죽음〉

한 세기는 더 서 있을 것처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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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든(Walden)》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에 동화되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꿈꾼 자유인
⊙‌나무와 나뭇잎, 산 등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매개물… 이육사 ‘교목’, 정지용 ‘장수산’, 김광규 ‘나뭇잎 한 장’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 자유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한 소나무의 죽음
  헨리 데이비드 소로
 
  오늘 오후 페어헤이븐 언덕에 올라갔을 때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후에 언덕의 벼랑에서 내려다보니, 저 아래 200m쯤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를 톱으로 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소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 소나무는 우거진 소나무숲이 잘릴 때 남은 열두어 그루의 나무 중 맨 마지막까지 남은 나무였다. 그 소나무들은 지난 15년 동안 어린나무들만이 싹터 자라는 땅을 내려다보며 고독한 위엄 속에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난쟁이 인형처럼 나무 두께보다 더 길 것 같지 않은 동가리톱으로 자르는 모습은 이 고귀한 나무의 밑동을 갉아 먹고 있는 비버나 곤충처럼 보였다. 나중에 가서 재보니 이 나무의 높이는 30m나 되었다. 이 읍에서 자라는 가장 큰 나무 중 하나일 이 나무는 화살처럼 미끈하게 뻗었으며 언덕 쪽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나무의 수관 옆으로는 얼어붙은 콩코드강과 코낸텀 언덕이 보였다.
 
  나는 언제쯤 나무가 쓰러지나 주의 깊게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톱질을 멈추더니 나무가 기우는 방향의 톱질한 곳을 도끼로 찍어서 조금 더 틈을 벌린다. 나무가 더 빨리 쓰러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톱질을 계속한다. 이제 나무는 틀림없이 쓰러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4분의 1쯤 기울어져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나무가 꽝하고 쓰러지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나무는 1cm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과 똑같은 각도로 서 있다.
 
  나무가 쓰러진 것은 그로부터 15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쓰러지기 전의 상태에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마치 한 세기 동안은 더 서 있을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말이다. 그전과 마찬가지로 솔잎 사이로 바람이 살랑이고 있다. 아직까지 이 나무는 숲의 나무이며, 머스키타퀴드 강변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 중 가장 위풍당당한 나무이다. 솔잎으로부터 은빛 광택 같은 햇빛이 반사되고 있다. 접근을 불허하는 나무의 아귀들은 아직도 다람쥐가 집을 지을 만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나무 이끼 중 그 어느 것도 이 나무의 돛대 같은 줄기를(고물 쪽으로 기울어진 이 돛대에 대해 선체의 역할을 언덕이 하고 있다) 떠나지 않았다.
 
  자, 이제 운명의 순간이다.
  나무 밑에 있던 인형 같은 인간들이 범죄 현장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죄를 저지른 톱과 도끼를 내동댕이친 채 말이다. 아주 서서히 그리고 장엄하게 나무가 움직인다. 그 모습이 이 나무는 여름의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며, 소리 없이 공중에 있는 자신의 원위치로 돌아갈 것만 같다.
 
  이제 나무가 쓰러진다.
  쓰러지면서 언덕 비탈에 바람을 보내고는 계곡에 있는 자신의 잠자리,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자리에 눕는다. 전사처럼 자신의 녹색 망토로 몸을 감싸면서 깃털처럼 부드럽게 눕는다. 서 있는 것이 이제는 싫증이 난다는 듯 자신의 구성분자들을 흙으로 돌려보내며 말 없는 기쁨으로 지구를 감싸 안는다.
 
  그런데 들어보라.
  이 광경은 눈으로만 보고 귀로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낭떠러지의 바위 쪽으로 이제 귀를 멍하게 할 정도의 큰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나무마저도 죽을 때는 신음을 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무는 땅을 감싸 안으며 자신의 구성원소를 흙과 뒤섞는다. 이제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하다. 다시 한 번 그리고 영원히 말이다.
 
  나는 언덕을 내려가서 나무의 크기를 재보았다.
  톱질한 부분의 지름은 1.2m가량이고 길이는 30m가량이었다. 내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나무꾼들은 도끼로 나뭇가지들을 이미 반쯤이나 쳐내고 있었다. 아름답게 가지들을 뻗치고 있던 나무의 수관 부분은 마치 유리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산산조각이 되어 언덕 옆에 흩어져 있었고, 꼭대기에 매달려 있던 1년 정도 자란 어린 솔방울들은 뒤늦게 그리고 헛되이 자비를 호소하고 있었다. 나무꾼은 이미 도끼로 나무의 길이를 재고는 몇 개의 판자를 잘라낼 수 있는지 표시를 해놓고 있었다.
 
  소나무가 이제까지 공중에서 차지했던 자리는 앞으로 200년간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는 이제 단순한 목재가 되었다. 나무꾼은 하늘의 공기를 황폐케 한 것이다. 봄이 와서 물수리가 머스키타퀴드 강변을 다시 찾아올 때 그는 소나무 위에 자신이 늘 앉던 자리를 찾으려고 허공을 헛되이 맴돌 것이다. 그리고 솔개는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만큼 높이 솟았던 나무가 사라진 것을 슬퍼하리라. 완전한 모습으로 자라기까지 200년이나 걸린 나무가, 한 단계 한 단계 천천히 뻗어올라 마침내 하늘에까지 도달했던 나무가 오늘 오후 사라져버린 것이다. 소나무 꼭대기 부분의 어린 가지들은 이번 정월의 따뜻한 날씨를 받아들여 한창 부풀어오르고 있지 않았던가?
 
  왜 마을의 종은 조종(弔鐘)을 울리지 않는가?
  내 귀에는 아무런 조종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마을의 거리에 그리고 숲속의 오솔길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는다. 다람쥐는 또 다른 나무로 뛰어 달아났고 매는 저쪽에서 빙빙 돌다가 새로운 둥지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나무꾼은 그 나무의 밑동에도 도끼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처=《시민의 불복종》, 강승영 옮김, 은행나무 刊)
 
나무가 잘려진 모습. 헨리 소로는 〈한 소나무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비정함을 드러냈다.
 
  Death of a Pine Tree
  by Henry David Thoreau
 
  This afternoon, being on Fair Haven Hill, I heard the sound of a saw, and soon after from the Cliff saw two men sawing down a noble pine beneath, about forty rods off. I resolved to watch it till it fell, the last of a dozen or more which were left when the forest was cut and for fifteen years have waved in solitary majesty over the sproutland. I saw them like beavers or insects gnawing at the trunk of this noble tree, the diminutive manikins with their cross-cut saw which could scarcely span it. It towered up a hundred feet as I afterward found by measurement, one of the tallest probably in the township and straight as an arrow, but slanting a little toward the hillside, its top seen against the frozen river and the hills of Conantum. I watched closely to see when it begins to move. Now the sawyers stop, and with an axe open it a little on the side toward which it leans, that it may break the faster. And now their saw goes again. Now surely it is going; it is inclined one quarter of the quadrant, and, breathless, I expect its crashing fall. But no, I was mistaken; it has not moved an inch; it stands at the same angle as at first. It is fifteen minutes yet to its fall. Still its branches wave in the wind, as if it were destined to stand for a century, and the wind soughs through its needles as of yore; it is still a forest tree, the most majestic tree that waves over Musketaquid. The silvery sheen of the sunlight is reflected from its needles; it still affords an inaccessible crotch for the squirrel’s nest; not a lichen has forsaken its mast-like stem, its raking mast - the hill is the hulk. Now, now’s the moment! The manikins at its base are fleeing from their crime. They have dropped the guilty saw and axe. How slowly and majestically it starts! as if it were only swayed by the summer breeze, and would return without a sigh to its location in the air. And now it fans the hillside with its fall, and it lies down to its bed in the valley, from which it is never to rise, as softly as a feather, folding its green mantle about it like a warrior, as if, tired of standing, it embraced the earth with silent joy, returning its elements to the dust again. But hark! there you only saw, but did not hear. There now comes up a deafening crash to these rocks advertising you that even trees do not die without a groan. It rushes to embrace the earth, and mingle its elements with the dust. And now all is still once more and forever, both to eye and ear.
 
  I went down and measured it. It was about four feet in diameter where it was sawed, about one hundred feet long. Before I had reached it the axemen had already divested it of its branches. Its gracefully spreading top was a perfect wreck on the hillside as if it had been made of glass and the tender cones of one year’s growth upon its summit appealed in vain and too late to the mercy of the chopper. Already he has measured it with his axe, and marked off the millions it will make. And the apace it occupied in the upper air is vacant for the next two centuries. It is lumber. He has laid waste the air. When the fish hawk in the spring revisits the banks of the Musketaquid, he will circle in vain to find his accustomed perch, and the hen-hawk will mourn for the pines lofty enough to protect her brood. A plant which it has taken two centuries to perfect, rising by slow stages into the heavens, has this afternoon ceased to exist. It sapling top had expanded to this January thaw as the forerunner of summers to come. Why does not the village bell sound a knell? I hear no knell tolled. I see no procession of mourners in the streets, of the woodland aisles. The squirrel has leaped to another tree; the hawk has circled further off, and has now settled upon a new eyrie, but the woodman is preparing to lay his axe to that also.
 
 
미국 서부개척기 시절, 나무꾼들이 나무를 베고 있는 그림이다.
  〈한 소나무의 죽음〉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1817~1862)의 짧은 수필이다. 서사시 혹은 산문시처럼 느껴지는 것은 문장 속에 시적 음성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 음성은 메마르지 않다. 연극무대 위에서처럼 낮고 굵다. 단단하다.
 
헨리 소로가 쓴 《월든》. 19세기에 쓰인 위대한 책 중 하나다.
  산책길에 소로는 톱질 소리를 우연히 듣는다. 다가가서 보니 키 큰 소나무였다. 우거진 솔숲이 잘리고 남은 12그루 나무 중 맨 마지막 나무가 ‘고독한 위엄으로’ 서 있었다.
 
  그는 두 나무꾼을 ‘난쟁이 인형’, 나무 밑동에 기생하는 ‘비버’ ‘곤충’에 비유한다. 이 표현에 위트를 못 느끼는 이유는 소로의 ‘인간’에 대한 묘사가 정확해서일지 모른다.
 
  톱질을 멈춘 나무꾼이 톱질한 곳을 도끼로 찍었다. 나무가 더 빨리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다. 꽈당하고 쓰러지기를 기다렸지만 놀랍게도 나무는 1cm도 안 움직였다. 무려 15분 동안을 서 있었다. 쓰러지기 전의 나무를 소로는 깊게 응시했다. 나무의 늠름함은 ‘마치 한 세기 동안은 더 서 있을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나무가 쓰러졌다. 소로는 그 모습을 ‘서서히 그리고 장엄하게 움직인다’ ‘전사처럼 녹색 망토로 몸을 감싸면서 깃털처럼 눕는다’로 표현했다. 나무를 의인화한 표현이 감동적이다. 반면, 나무꾼 두 사람(‘나무 밑에 있던 인형 같은 인간들’)은 ‘범죄 현장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비꼬았다. 죄를 저지른 톱과 도끼는 내동댕이친 채로 말이다.
 
국내 번역된 헨리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 〈한 소나무의 죽음〉이 이 책에 실렸다.
  소로는 나무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리고 ‘왜 마을은 조종(弔鐘)을 울리지 않는가?’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슬픔, 나무의 죽음에 동조하지 않는다. 목석같은 일상(日常)은 나무가 쓰러지기 전과 후가 그대로다. 소로는 신(神)의 침묵을 원망했을까.
 
  〈한 소나무의 죽음〉은 소로의 작품집이나 문학지에 실린 글이 아니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 실렸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부터 죽기 바로 전해까지 25년간 일기를 썼다. 이 글은 ‘19세기에 쓰인 위대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는 《월든》(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생활한 2년간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 나오기 전인 34세(1851) 무렵 쓴 글이다. 1854년 《월든》 초판이 티크노어 앤 필즈 출판사에서 출판됐으니 〈한 소나무의 죽음〉이 《월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사상가이자 시인, 자연에 동화되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꿈꾼 자유인이었다. 소로는 《월든》에서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여라.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했다. ‘옛날 농경시대로 돌아가 느림의 삶을 살자’는 구호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처음엔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후 20세기 생태환경운동의 원천으로 재발견되어 수많은 사상가와 환경운동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소로의 대표작인 《시민의 불복종》(1849)에서 그의 신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 p.21, 《시민의 불복종》

 
 
  김광규의 ‘나뭇잎 하나’
 
시인 김광규.
  문학에서 나무와 숲, 산 등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매개물이다. 나뭇잎, 가지, 뿌리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 소나무의 죽음〉이 벌목을 통해 인간의 비정함을 고발한다면, 시인 김광규(金光圭·78)의 ‘나뭇잎 하나’는 나무(잎)를 통해 인간 삶의 생성과 소멸을 노래한다. 시집 《누군가를 위하여》(2001)에 실렸다.
 
  크낙산[큰악산(嶽山)을 연상케 함. 김광규는 다른 시에서 마음속의 이상 세계를 ‘크낙산’으로 명명] 골짜기가 연록색으로 부풀어 오르거나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 화자(話者)는 나뭇잎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뭇잎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은 오히려 겨울이 되어 앙상한 가지에 나뭇잎 하나만 남아 있는 나무에서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가장 소중한 존재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른다.
 
  ‘나뭇잎 하나’는 자유시·서정시의 틀을 갖고 있지만 산문을 운문처럼 행갈이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와 산문의 경계가 모호하다.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 김광규의 ‘나뭇잎 하나’

 
 
  이육사와 정지용의 나무
 

  ‘나무’와 관련된 시 중에서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교목(喬木)’만큼 인상적인 시가 또 있을까. 간결하면서도 강인한 어조로 표현한 아름다운 시다. 이 시는 1940년 7월에 간행된 《인문평론》에 실렸다.
 
  흔히 키가 큰 나무를 교목이라 부른다. 화자는 삶을 포기할지라도 자신의 결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교목을 통해 드러낸다. 1연의 ‘차라리 봄(이 와)도 꽃피진 말아라’는 적극적인 금지 표현에 섬뜩함을 느낀다. 봄이 와서 꽃을 피울 수 없을지언정, 생명을 포기하더라도 그 결연한 의지만은 버릴 수 없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푸른 하늘’은 ‘조선 독립’을 의미한다. 3연에서도 ‘검은 구름자’가 드리워지는 참담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지듯 자신의 삶을 버림으로써 의지만을 지켜내겠다고 외친다. 생사(生死)를 벗어난 초월성을 느끼게 한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이육사의 ‘교목’

 
  ‘교목’은 혹독한 일제 치하의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굴복하기는커녕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살아온 육사의 삶을 느끼게 한다.
 
  20세기 강력한 의지의 시인이 이육사라면, 정지용(鄭芝溶·1902~1950)은 가장 현대적인 감각의 시인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예스러운 어투를 쓰면서도 팔딱이는 도마뱀 같은 시어를 만든 시의 천재였다. 육사가 없는 20세기 한국시단이나 지용이 없는 현대문학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지용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장수산(長壽山)’은 1939년 《문장》(2호)에 실렸다. 실제 장수산은 황해도 재령군과 신원군 사이에 있는 명산으로, 높이가 747m에 이르고 온갖 기암과 층층절벽이 천태만상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다. ‘장수산’은 깊은 산중의 한밤을 시각적 심상으로 형상화한 산문시다. 겨울 달밤의 정밀(靜謐)과 고요는 자연을 하나의 정신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름드리 큰 솔이 베어짐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 정지용의 ‘장수산(長壽山)Ⅰ’

 
  *‘벌목정정’은 커다란 나무가 베어질 때 나는 소리를 뜻한다.
 
 
  소식의 나무와 신경림의 나무
 
중국 여행사이트에서 확인되는 장강의 절도(絶島).
  중국 북송의 문장가 소식(蘇軾·1037~1101)의 ‘이사훈화장강절도화(李思訓畵長江絶島畵)’도 아름다운 시다. 이 시에서 나무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은 존재다. 푸른 산과 강이 있고 어부와 어부가 부른 뱃노래가 있지만 오직 나무만이 높이 치솟아 자연을 이룬다. ‘이사훈화장강절도화’는 화가 이사훈이 그린 〈장강절도화〉를 이르는 말이다. 〈장강절도화〉는 장강의 대고산과 소고산의 풍경을 담은 작품인데, 그 그림에 대한 정감을 소식이 시로 표현한 것이다.
 
중국 북송의 문장가 소식.
  山蒼蒼, 水茫茫 산은 푸르고 강물은 끝이 없다.
  大孤小孤江中央 대고산, 소고산이 강 가운데 있네.
  崖崩路絶猿鳥去 길조차 끊어진 무너진 절벽엔 원숭이도 새들도 없고,
  惟有喬木攙天長 오직 나무만 높이 치솟아 길게 하늘을 떠받친다.
  客舟何處來 손님 실은 배는 어디에서 오는가.
  棹歌中流聲抑揚 어부의 노랫소리 강 가운데서 울려 나온다.
  沙平風軟望不到 모래사장에 미풍이 불고 눈앞의 고산에 아직 닿지 않았구나.
  孤山久與船低昂 고산은 한참 전부터 일렁이는 파도에 배와 함께 높아졌다 낮아졌다 한다.
  峨峨兩烟鬟 높고 험한 두 산에 구름이 쪽 찐 머리처럼 걸렸고
  曉鏡開新妝 거울같이 맑은 강물에 새로 화장한 얼굴이 비친다.
  舟中賈客莫漫狂 배 안의 장사꾼아, 아름다운 경관에 딴생각 품지 마라.
  小姑前年嫁彭郞 소고(小孤山의 별칭)는 작년에 팽랑에게 시집갔단다.

 
  소식의 ‘이사훈화장강절도화’가 그림을 시로 옮겨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면 신경림의 ‘나무를 위하여’는 의지적인 시다. 시집 《쓰러진 자의 꿈》(1993)에 실렸다. ‘어둠’과 ‘비바람’ 앞에서 ‘작은 손’들을 서로 잡고 숨죽여 흐느끼면서 그 고통을 감내하는 ‘나무’의 모습은 시련 앞에서 조용하고 묵묵히 그 고통을 인내하는 우리 이웃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 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꺾이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목 움츠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 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 지어 설 나무들아
 
  - 신경림의 ‘나무를 위하여’

 
  *‘산비알’은 산비탈의 경상·충청도 방언. ‘바위너설’은 바위가 삐죽삐죽 내민 험한 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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