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지 강한 ‘보리’… 김수영의 ‘풀’, 이성부의 ‘벼’와 닮아
⊙ ‘풀잎들이 바람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정호승)
⊙ ‘풀잎들이 바람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정호승)

- 미국의 여류 시인 사라 티스데일.
사라 티스데일
휘는 보리와 같이
바닷가 낮은 들,
모진 바람 속에서 노래하는
끊임없이;
휘는 보리와 같이,
다시 일어서서,
그렇게 나, 꺾이지 않고,
고통에서 일어나련다;
그렇게 나 그윽하게
긴 낮, 긴 밤,
나의 설움을 바꾸련다
노래 속에서.
Like Barely Bending
Sara Teasdale
Like barely bending
In low fields by the sea,
Singing in hard wind
Ceaselessly;
Like barley bending
And rising again,
So would I, unbroken,
Rise from pain;
So would I softly,
Day long, night long,
Change my sorrow
Into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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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숙인 보리. 사라 티스데일은 시 ‘휘는 보리처럼’에서 보리처럼 다시 일어나자고 노래했다. |
여성스러우며 아름답고 정갈한 시를 썼다. 그녀는 1918년 《사랑의 노래(Love Songs)》(1917)로 시 부문 퓰리처 상을 받았다. 잘 알려진 시 ‘잊으리(Let It Be Forgotten)’는 《불꽃과 그림자(Flame and Shadow)》(1920)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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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 티스데일은 아름답고 정갈하며 단아한 시를 썼다. |
이 시가 언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안타깝게도 티스데일은 이혼 후 칩거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휘는 보리처럼’ 살겠노라 노래했지만, 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나 무거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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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수영. |
‘풀’은 시인 이성부(李盛夫·1942~ 2012)의 ‘벼’를 떠올리게 한다. 1974년 시집 《우리들의 양식(糧食)》에 실린 이 시는 벼의 강인한 생명력을 예찬하는데, 벼는 ‘민중’을 상징한다. 의인화된 벼는 서로 어우러지고 기대어 사는 생명의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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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부의 시집 《우리들의 양식(糧食)》(1974). |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 이성부의 ‘벼’
상처와 진주조개의 영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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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성부는 ‘벼’를 통해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라고 노래했다. |
답은 감동적이다. 새는 부러진 날개를 펼쳐 서편 하늘로 날아갔다. 풀잎은 바람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달팽이는 웃다가 울면서 절벽 위로 기어갔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던진 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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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의 시집 《여행》(2013). |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상처받아본 적이 있는가
새가 부러진 날개를 펼치고
저녁 하늘 너머로 날아갔다
길을 가다가 풀잎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상처의 깊이를 쓰다듬어본 적이 있는가
풀잎들이 바람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길을 가다가 돌아서서 달팽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두 손 모아
상처의 눈물을 이슬처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달팽이가 웃다가 울면서 절벽 위로 기어갔다
길을 가다가 돌아서서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상처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무릎을 꿇고 나의 상처의 꽃만 꺾어들고
다시 길을 걸었다
- 정호승의 ‘상처’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상처’의 의미를 알아보려 그의 다른 시 ‘상처는 스승이다’를 읽어보았다. 이런 문장이, 시어가 눈에 들어왔다. ‘별을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상처는 스승이다/ 남의 흉은 사흘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가족을 대하라/ 사람은 실패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영롱한 진주는 조개 속에 생긴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탄생한다. 진주처럼 사람도 상처를 통해 인생을 배우며, 그 아픔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이 ‘상처가 스승’이라 말했나 보다.
기도 시인 조창신의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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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신 시인의 시집 《내 사랑은 하나》(2018). |
‘들꽃1’에서 시인은 ‘자유스런 구속’으로 들꽃을 표현한다. ‘파아란 미소’ ‘숨어서도 몰래 피어나는 숨결’이라는 공감각적 심상으로 ‘자신을 태워버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발버둥도 필요치 않는’ 들꽃을 아름답게 그린다. 이름 없는 들꽃은 어쩌면 태어나는 것 자체가 상처일지 모른다. 하지만 들꽃은 자신을 지움으로 자연과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의미조차 없지만, 시인은 무의미가 의미라고 역설하고 있다.
자유스런 구속 안에
파아란 미소로
숨어서도 몰래 피어나는 숨결이여
햇볕 속에
바람 속에
자신을 태워버려
이름 없는 풀들 사이
소리 없이 감추어 버리고
다시 되돌아온다는 기약 없이
자연 안에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자연스러움으로 부각시킨 아름다움에
빛이 되는 사랑이여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발버둥도 필요치 않는
자연스러운 그대로
소박한 의미가 되는
들꽃의 빛남이여
- 조창신의 ‘들꽃1’ 중
사슴과 낙타, 노천명과 이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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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노천명. |
‘사슴’은 보리와 풀, 벼의 연약한 이미지와 가장 닮았다. 초식동물인 사슴은 언제나 육식동물의 먹잇감이다.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맹수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연약할망정 세속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다스린다. 시인은 이 삶의 자세를 ‘사슴’에 비유하며 고고한 풍모를 노래한다. 사슴은 ‘관(冠)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인 것이다. ‘사슴’은 1938년 간행된 시집 《산호림(珊瑚林)》에 실렸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의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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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한직. |
그리고 화자인 ‘나’가 이 둘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화자는 어느 날 동물원에서 낙타를 바라보다가, 문득 옛날의 늙은 선생님을 떠올리며 지난 시절을 그리워한다. ‘낙타’에서 선생님과 낙타와 나는 동일하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 오신다.
회초리를 들고서
선생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 옛날에 옛날에 —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 이한직의 ‘낙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