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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의 인문학 〈8〉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옥스퍼드–런던–베를린의 뒷골목

沙漠보다 乾燥한 문체로 陰謀와 그것을 뒤덮는 거대한 음모의 宮殿을 지은 ‘스파이 소설의 황제’ 작가 존 르 카레 / “우리는 二重스파이를 구하기 위한 더러운 공작이 비열하게 끝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어!”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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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표작가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추리소설”(그레이엄 그린)
⊙ 옥스퍼드 등 최고 명문대학 다녔지만 아버지는 희대의 사기꾼… “자식을 최상류층에 넣기 위해서라면 도둑질도 할 수 있다”고 밝혀
⊙ “타고난 스파이, 습관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경험을 ‘제거할’ 필요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하겠는가? 그들은 소설을 쓴다. 그런 소설이 바로 존 르 카레의 소설이다”(번역가 김석희)
⊙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 왜 존 르 카레라는 필명을 썼는지는 밝히지 않아
⊙ 영국 방첩부(MI–5)에서 일하다 첩보부(MI–6)로 전직
⊙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히트치자 곧바로 사직
⊙ 추리소설이란 실로 교묘한 刺繡처럼 정밀한 장르다
국경의 풍경은 언제나 스산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나라인데도 그렇다. 옛 동서 독일의 국경 분위기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드보일드(Hard-boiled)’라는 인터뷰 코너를 4년 넘게 진행했다. 사전적(辭典的)으로 ‘삶은 달걀이 더 단단해진다’는 게 하드보일드의 정의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형사 마동석이 목욕탕에서 거들먹대는 건달에게 계란 껍데기를 까게 하는 장면을 봤다면 이해하기 쉽다. 그가 “계란이 왜 이리 퍽퍽해”라고 타박하자 건달이 변명한다. “삶은 계란이라서….”
 
  문학적으로 하드보일드는 비정(非情) 혹은 냉혹(冷酷)한 문체 스타일을 가리킨다. 그 원조가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1894~1961)이라는 데 이견(異見)이 없다. 〈몰타의 매〉 〈그림자 없는 사나이〉 등의 작품을 남긴 작가다. 그가 ‘하드보일드파 소설’이란 장르를 구축한 뒤 형용사 사용을 자제한 건조(乾燥)한 문체의 걸출한 세 작가가 잇따라 등장했다.
 
베를린은 제1·2차 세계대전 戰禍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다. 검게 불탄 모습은 공습을 받았다는 증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존 르 카레(1931~ ), 프레더릭 포사이드(1938~ )가 그들이다. 세 작가의 작품은 내 서재에서 단 한 번도 비즈니스석(席)을 양보한 적이 없다. 이번에 다룰 작가는 그레이엄 그린이 “내가 지금껏 읽어 온 스파이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의 존 르 카레다.
 
  소설이 시작되는 무대는 냉전시대 동서가 치열하게 격돌하던 베를린 장벽이다. 영국 첩보부 요원 ‘앨릭 리머스’는 동독(東獨)에서 서방세계에 고급 정보를 제공해오다 신분이 발각될 위기를 맞자 탈출을 시도하는 ‘카를’을 국경에서 기다린다. 카를이 동독을 지나 서독으로 오는 관문에서 사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은 그야말로 하드보일드가 뭔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 총알은 그를 앞으로 홱 밀어붙인 것 같았고, 두 번째 총알은 그를 뒤로 잡아당긴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자전거 위에 앉아서 보초 옆을 통과했다. 보초는 여전히 그에게 총을 쏘고 있었다. 그때 카를이 축 늘어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쓰러진 자전거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리머스는 카를이 죽기를 신(神)에 기도했다.〉
 
옛 베를린 장벽은 지금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명소로 변했다. 병사 복장을 한 남자는 사진을 찍으면 손을 내민다. ‘돈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무대는 영국 런던의 케임브리지 스퀘어로 바뀐다. 케임브리지 스퀘어는 내가 옥스퍼드에서 유학할 때 런던행(行) 버스를 타고 와 내리던 마블 아치 건너편이다. 마블 아치를 등 뒤에 두고 봤을 때 왼쪽은 광활한 하이드파크이고 대각선으로 옥스퍼드 스퀘어와 케임브리지 스퀘어가 마주 보고 있다. 케임브리지 스퀘어의 낡은 건물 하나가 스파이들의 사무실이다.
 
  그 사무실에서 영국 첩보부 MI-6의 관리관과 실패한 스파이 리머스는 동독의 이중스파이 카를의 정체를 밝혀낸 동독 첩보부의 실력자 ‘문트’에 대한 복수를 결의한다. 리머스가 영국 첩보부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위장한 뒤 동독으로 전향(轉向)해 동독 첩보부 내 문트의 라이벌 ‘피들러’를 이용해 문트를 제거키로 한 것이다. 이 결의를 굳힌 뒤 관리관이 말한다.
 
  〈“당분간은 옛 동료들을 만나더라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는 말게. 사실….” 관리관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나 같으면 그들한테 무뚝뚝하게 굴겠네. 우리가 자네를 심하게 다루었다고 그들이 생각하도록 만들게. 일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시작이 중요하니까. 안 그런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다 보면 소화불량에 걸린 느낌을 받는다.
 
독일 수도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이다. 문 꼭대기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있다. 이 동상을 나폴레옹이 떼어갔는데 훗날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면서 도로 가져왔다.
  문트는 리머스가 애써 구축해놓은 첩보망을 궤멸시킨 장본인이다. 그런 자를 속이기 위해 리머스는 첩보부 내 한직(閑職)으로 좌천됐다가 결국 첩보부를 떠난다. 공업용 접착제를 만드는 회사, 백과사전 외판원을 전전하다 베이스워터 심령학 도서관의 사서(司書)로 취직한다. 구글에 찾아보니 베이스워터 심령학 도서관은 예상처럼 가공(架空)의 장소였다.
 
  거기서 리머스는 두 여자를 만난다. 현진건의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을 연상케 하는 ‘미스 크레일’과 리머스와 인연을 만드는 ‘미스 리즈 골드’. 이 미스 리즈 골드가 리머스에게 연정(戀情)을 느끼고 그것이 결국 리머스의 원모심려(遠謀深慮)가 실패로 끝나는 단초가 된다. 그것을 암시하는 문장이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에서 나온다.
 
  〈“앨릭… 무슨 일이에요? 이별인가요?” 그는 식탁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랫동안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리즈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어렴풋이 이해했을 뿐이다. “안녕, 리즈. 잘 있어.” 그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나를 따라오지 마. 다시는 그러면 안 돼.” 바깥 거리로 나온 리즈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어둠에 감사했다. 눈물을 감추어주었기 때문이다.〉
 
옛 동독의 도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많이 파괴된 도시가 드레스덴이다. 드레스덴은 동독 도시 가운데 연합군의 공습을 가장 많이 받았다.
  리즈와 헤어진 리머스는 이후 식료품 가게 주인을 두 차례 때려 감옥 속으로 사라진다. 리머스의 일격으로 주인은 광대뼈에 금이 갔고, 두 번째 가격으로 턱뼈가 빠졌다. 석 달의 수감생활이 끝난 뒤 리머스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봄날의 하이드파크다. 그때 그에게 동독 스파이가 접근한다. 이때 리머스의 내면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놈들이 성급하게 나오고 있군. 게다가 노골적이야. 언젠가 뮤직홀에서 들은 농담이 생각났다. ‘정숙한 여자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지만 실제로 해보지 않고는 그 진가를 알 수 없습니다.’ 전술적으로는 일을 빨리 해치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완전히 몰락했고 빈털터리야. 감옥에서 쌓은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고 사회에 대한 원망은 아주 강해. 나는 새삼 길들일 필요가 없는 늙은 말이야. 그들은 한편으로는 ‘사실상의’ 거부를 예상할 것이다. 그들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신의 눈이 황야를 건너는 카인을 뒤쫓았듯 영국 첩보부는 배신자를 끝까지 추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머스는 스스로 ‘철의 장막’ 안으로 건너가 조국을 배신하고 첩보를 넘기는 이중스파이가 된다. 문트를 없앨 주인공인 피터스 앞에서 말이다. 그러면서 리머스는 피터스에게 문트를 몰락시킬 ‘정보’를 슬쩍 흘린다.
 
존 르 카레가 나온 옥스퍼드대학을 공중에서 내려다본 전경이다.
  존 르 카레는 1931년 10월 19일 영국 잉글랜드 남부의 도싯주(州)에서 태어났다. 세인트앤드루스 퍼블릭스쿨을 거쳐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옥스퍼드대학의 링컨칼리지에서 근대유럽어학을 전공했다. 존 르 카레는 1956년부터 명문 이튼스쿨에서 어학을 가르쳤고, 1959년부터 외무부 서기관으로 서독의 본과 함부르크에 주재했다.
 
  서독에 있는 동안 존 르 카레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작품이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1961), 두 번째 작품이 〈고귀한 살인〉(1962)이다. 데뷔작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 펼쳐지는 스토리의 원인을 알려주는 프롤로그 격이다. 그 작품에 영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동독 첩보부의 문트가 등장한다.
 
  데뷔작에서 주요 조역으로 등장하는 ‘조지 스마일리’는 이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1974)를 비롯해 〈영예로운 학생〉(1977), 〈스마일리의 사람들〉(1979) 같은 〈스마일리 3부작〉에서 소련 첩보부의 우두머리 ‘카를라’와 사투(死鬪)를 벌인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존 르 카레가 일했다는 ‘외무부 서기관’이란 자리다.
 
  존 르 카레는 다섯 명의 영국 총리를 위해 번역 업무를 맡는 등 외교관으로 근무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주간지 《뉴스위크》가 취재해보니 영국 정보부(SIS와 MI-6)에서 일했으며, 존 르 카레는 부인했지만 외무부에 들어오기 전 방첩부(MI-5)에서 1964년까지 ‘맥스웰 나이트’라는 가명을 사용한 스파이였다고 한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 가운데 하나인 ‘탄식의 다리’다. 시험을 마치고 옆 건물로 이동하는 학생들이 이 다리를 건널 때 한숨을 쉰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
  진짜 ‘직업’을 둘러싼 논쟁 못지않게 재미있는 것이 ‘존 르 카레’라는 이름이다. 그의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이다. 가명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스파이의 속성상 실명으로 책을 출판할 수 없었고, 둘째는 상관들이 자신의 책을 읽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르 카레는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은행에 예금액이 일정한 액수에 도달하면 연락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공전(空前)의 히트를 치자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마침내 존 르 카레는 ‘기분 좋게’ 사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그는 필명에 대해 “내 필명은 그냥 머리에서 떠올랐다.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는 정말로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믿지 않은 기자들이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자 존 르 카레는 “출근길에 늘 다니던 구둣가게에서 그 이름을 훔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가게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르 카레’는 프랑스어로 ‘네모꼴’이라는 뜻인데, 비평가들은 “그 이름은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지만 그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아리송한 해석을 내놓았다.
 
  존 르 카레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상류층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강박증의 소유자들이다. 평론가들은 존 르 카레가 옥스퍼드대학 출신이기에 그를 권력층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소설 속 스마일리에 존 르 카레가 투영(投影)됐다고 봤다. 그런데 존 르 카레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동안 해온 모든 평론을 수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존 르 카레는 링컨칼리지를 나왔다. 사진에 보이는 돔 건물은 ‘카메라’이며 그 왼쪽 골목에 링컨칼리지가 있다.
  존 르 카레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어머니와 이혼했으며 직업이 ‘사기꾼’이었다. 존 르 카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어렸을 때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에 결혼을 두 번 더 하고 수없는 사기행각을 벌여 300억원의 빚을 남기고 화려하게 파산했다. 특권층 자제만 다니는 학교에서 존 르 카레는 ‘돈은 없고 감추어야 할 것은 많은 아이’로 살아야만 했다.
 
  더구나 아버지가 그를 명문학교에 보낸 것이 그를 교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짜 신사’, 즉 ‘나중에 쓸모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존 르 카레가 영국 비밀첩보부에 ‘두더지’처럼 깊숙이 침투한 소련 스파이들과 같은 처지가 됐음을 뜻한다. 번역가 김석희는 “타고난 스파이, 습관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경험을 ‘제거할’ 필요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자문한 뒤 “소설을 쓴다”고 자답했다. 그러면서 “그런 소설이 바로 존 르 카레의 소설”이라고 덧붙였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그에게 국제적 명성뿐만 아니라 ‘서머싯 몸 상(賞)’ ‘영국 추리작가협회 상’ ‘미국 추리작가협회 상’까지 안겨줬다. 소설이 나온 1963년은 1960년 쿠바 위기의 충격이 남아 있을 때였다. 쿠바를 앞세운 이 사태는 미국과 소련 간 냉전(冷戰)이 열전(熱戰)으로 변할지도 모를 위기였기에 다음과 같은 사회학자들의 평가가 뒤따랐다.
 
  “1960년대의 동서 긴장 상황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데는 르 카레의 소설이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그런 갈등의 상황에서 벗어나 가벼우면서도 행복한 무엇을 동경하게 되었는데 그런 소망을 십 대의 더벅머리 청년 네 명이 화끈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여기서 사회학자들이 지목한 ‘십 대의 더벅머리 청년 네 명’은 센세이셔널하게 대중문화의 판도를 바꾼 비틀스다.
 
영국의 국회 의사당이다. 냉전 시대 이곳은 음모와 스파이전의 상징과도 같았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본다. 리머스가 문트를 잡기 위해 결정적 증거를 피들러에게 하나둘 내놓자 문트의 반격이 시작됐다. 문트는 리머스의 연인 리즈가 영국 공산당원임을 알아낸 뒤 그녀를 동독으로 부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데뷔작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 문트를 고발하는 피들러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문트 동지가 (영국에) 포섭된 것은 런던 근무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문트는 큰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켰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부러 영국 비밀경찰에 걸려들었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문트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이 없었습니다. 나토의 일원인 영국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체포를 피하려고 지하에 잠적했지요. 항구마다 감시망이 퍼졌고 그의 사진과 인상서가 영국 전역에 배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잠적한 지 이틀 뒤 문트 동지는 택시를 타고 런던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여러분은 ‘멋지게 해냈다’고 말하겠지요. 사실 그랬습니다. 영국 경찰력 전체가 경계 태세에 들어가 도로와 철도, 선박과 비행기 등 모든 탈출로에 감시망을 폈는데도 문트 동지는 런던공항에서 버젓이 비행기를 탄 것입니다. 정말 멋지게 해냈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여러분은 문트의 영국 탈출이 ‘너무’ 멋지고 ‘너무’ 쉬웠다고, 영국 당국이 묵인해주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문트는 리머스가 했던 진술의 ‘틈’을 찾아내고 결정적인 순간에 리즈를 불러내 리머스의 이성을 흔든다. 피들러와 리머스가 벌인 이 거대한 연극이 문트를 처단하려는 서방세계의 음모임을 밝혀낸다. 노련한 스파이마저 위기의 순간을 맞자 고뇌하고 만다. 존 르 카레는 당시 리머스의 심경을 이런 독백으로 표현하고 있다.
 
  〈“런던의 녀석들은 머리가 돌아버린 게 분명해. 나는 녀석들한테 말했어. 리즈를 가만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내가 영국을 떠난 순간부터-아니 훨씬 전,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자마자-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뒤처리를 한 게 분명해. 빚을 갚아주고 식료품 가게 주인과 합의하고 집주인한테 밀린 방세를 치르고 무엇보다 리즈 문제를 해결했어. 그건 미친 짓이고 생각도 못 한 짓이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랬을까? 피들러를 죽이려고? 자기네 첩보원을 죽이려고? 자신들의 공작을 방해하려고? 스마일리 개인 생각이었을까? 스마일리가 알량한 양심 때문에 저지른 짓일까?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야. 리즈와 피들러를 이 사건에서 떼어놓고 나 혼자 책임을 지는 거지. 도대체 놈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아냈지? 그날 오후 스마일리의 집에 갈 때 절대로 미행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는데 그리고 돈, 내가 본부에서 돈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를 놈들은 어디서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건 오로지 내부용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는데.” 그는 당혹감과 분노와 수치심에 사로잡혀 교수대로 다가가는 사형수처럼 뻣뻣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결국 피들러는 역습당해 몰락한다. 그 순간 리머스는 오랫동안 속아온 사람이 갑자기 놀라운 명석함을 발휘하듯 이 무시무시한 계략의 전모를 알아낸다. 문트의 배려로 앨릭 리머스는 리즈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베를린 장벽으로 가 서방세계로 탈출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때 문트의 한마디. “당신은 바보요, 리머스. 이 여자는 쓰레기요, 피들러처럼.”
 
런던타워에서는 매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식이 열린다.
런던타워 아래를 장식한 붉은색은 양귀비꽃 모형이다.
  베를린 장벽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리머스는 어리둥절해 하는 리즈에게 이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당신도 모르고 나도 몰랐던 것을 말해주지. 문트는 런던의 첩자야. 그는 영국에 있는 동안 첩보부에 매수당했어. 지금 우리는 문트를 구하기 위한 더럽고 비열한 공작이 비열하게 끝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어. 동독 보위부 내에서 그 교활한 유대인(피들러)이 진상을 눈치채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위험으로부터 문트를 구하기 위한 것이 이번 작전의 목적이었지. 런던은 우리를 이용해서 그 유대인을 죽게 한 거야.”
 
  리머스와 리즈는 베를린 장벽을 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이드는 ‘반드시’ 리머스가 먼저 담장 위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리머스가 담장에서 리즈의 손을 잡아당길 때 사방에서 서치라이트가 켜지면서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런던과 베를린의 스파이 두목들은 ‘쓰레기 같은 여자(리즈)’를 담장 위에서 해치우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던 것이다.
 
  장벽 아래에 쓰러진 리즈를 바라보는 리머스에게 친구 스마일리가 외친다. “뛰어내려, 앨릭. 뛰어내려!” 그러나 리머스는 서쪽보다 동쪽 베를린 쪽으로 내려갔다. 그런 예상치 못한 광경에 동독 경비병들도 당황한다. 존 르 카레는 마지막 장면까지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비장한 문체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하드보일드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이 말이다.
 
  〈그들은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마침내 두세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투우장에 끌려나온 눈먼 황소처럼 주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쓰러질 때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들,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쾌활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을.〉
 
런던타워에서는 종전 기념식이 열릴 때 ‘하나님께서 왕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깃발을 든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인다. 이 문구는 병사를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존 르 카레의 첫 작품이자 이후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스마일리가 처음 등장한다. 1961년 발표된 소설 속 시기는 1년 전인 1960년이다. 스마일리는 전처 ‘앤’과의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았으며 일선에서 물러나 방첩 사무를 보고 있다. 어느 날 스마일리는 공산주의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외무부 직원 ‘페넌’을 면담한다.
 
  이튿날 페넌은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이 예기치 못한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페넌의 집으로 가 페넌의 아내를 만난 스마일리는 페넌에게 자살 다음 날 ‘모닝콜’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페넌은 왜 죽기로 결심한 날 모닝콜을 부탁했던 것일까. 외모가 ‘황소개구리’를 닮았다고 존 르 카레가 묘사한 스마일리는 하나하나 단서들을 모아간다.
 
  그 결과 페넌 부인의 알리바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첫째, 페넌은 죽던 날 밤 윌리스턴 전화국에 전화를 해 다음 날 아침 8시 반 모닝콜을 부탁했다. 둘째, 페넌은 자살 직전 코코아를 타놓았지만 마시지 않았다. 셋째, 페넌은 타자기를 안 쓰는데 마지막 유서를 타자기로 쳤다. 넷째, 페넌은 죽던 날 스마일리에게 급히 전화를 해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하자고 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주인공 리머스는 일부러 식료품 가게 주인을 폭행한 뒤 석 달 동안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그가 처음 찾은 곳이 바로 하이드파크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이 하이드파크를 본뜬 것이다.
  다섯째, 페넌은 자살한 다음 날인 1월 4일 휴가를 신청했다. 죽을 사람이 왜 휴가를 신청했을까. 여섯째, 페넌 부인은 스마일리가 묻자 모닝콜을 신청한 것은 자신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확인 결과 모닝콜을 신청한 사람은 페넌이었다. 일곱째, 페넌 부인을 만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스마일리는 동독 첩보부 요원에 의해 살해 위기를 맞는다.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긴 스마일리는 자기 집 근처에 주차해 있던 차량번호를 조회했는데, 그 차의 주인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차의 주인 ‘아담 스카’는 3주 뒤 템스강의 배터시 브리지 근처에서 사체(死體)로 발견된다. 여덟째, 아담 스카의 고객 전화번호 가운데 동독 철강사절단이 있었고 문트가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아홉째, 페넌 부인은 매 첫째・셋째 주 화요일에 웨이브리지 일정레퍼토리 극장에 가는데 아담 스카에게 차를 빌리는 고객이 차를 쓴 날이 매주 첫째・셋째 주였다. 열 번째, 페넌 부인은 늘 악보 가방을 가져갔으며 그것을 극장의 휴대품 보관소에 남겨두었다. 열한 번째, 극장에서 페넌 부인은 늘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 남자의 외모는 스마일리를 공격한 남자와 아담 스카의 고객과 일치했다.
 
  스마일리의 추적 결과 5년 전 페넌 부부는 휴가지에서 동독 첩보부에 포섭됐다. 정보가 담긴 악보 가방을 문트에게 넘기고 문트에게서 돈과 지령이 담긴 악보 가방을 받아왔다. 그런데 스마일리가 페넌을 조사하는 것을 눈치 챈 문트의 상급자가 문트에게 페넌을 처치할 것을 지시했고, 사실은 동독 스파이인 페넌의 아내는 문트의 행동을 방조 혹은 동조하고 말았다.
 
  사건 뒤 문트는 3주간 영국에 머물다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그가 어떻게 영국 경비망을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힌트가 없다.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남은 이 의문이 바로 영국 첩보부의 매수였음을 밝히는 것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다. 추리소설이란 교묘한 자수(刺繡) 같다. 책을 덮을 때 청량음료를 마시면 막힌 속이 확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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