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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35〉 조선 文宗 암살(?)사건과 사라진 안견의 〈몽유도원도〉

“허리 위의 종기에서 제일 기피하는 것이 몸을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입니다. 전순의는 문종께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구운 꿩고기를 기피하지 않고 올렸습니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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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은 세종이 심혈 기울여 키운 최고의 王才… 서른 살 때부터 대리청정하며 훈민정음 창제 등에 공헌
⊙ 아버지 세종과 달리 文武 겸전… 새 진법 마련하고 火車 개발해 환란에 대비
⊙ 고질병인 종기 치료에 賤人 출신 전순의가 대신들과 상의도 없이 처방, 곧 낫는다더니 急死
⊙ 단종 즉위 후 사헌부에서 전순의의 진료 의혹 찾아냈으나 수양대군의 개입으로 흐지부지
⊙ 수양대군의 흑심 감지한 풍수가 목효지와 이현로가 잇따라 단종 생모와 문종의 능 이장 상소, 그 역시 수양대군이 제지한 뒤 쿠데타
⊙ 동생 안평대군과 그 아들마저 賜死… 안평대군이 소장한 당대 최고의 컬렉션 222점 사라져. 그중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세조가 동생 안평대군을 죽이면서 사라졌다가 일본에서 발견됐다.
  조선시대 5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왕이 스물일곱 명이다. 그때 백성(百姓)들의 평균수명은 40세 언저리고 왕의 평균수명도 그들과 별 차이 없는 45세 정도다. 이 통계는 조금 이상하다. 최고의 영양과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받은 왕이 단명(短命)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개국 후 네 번째 왕까지 오십 이전에 사망한 왕은 없다. 태조(74세), 정종(63세), 태종(56세), 세종(54세)이 그랬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이 확 낮아진 것은 몇몇 요절한 왕들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과연 조선시대 당시 사십 이전에 죽은 왕은 11명이나 된다.
 
  요절한 사유는 과도한 방사(房事) 때문이었다. 궁궐 안 여자가 다 제 차지니 과도한 욕심은 역시 화를 부른다. 8대 왕 예종은 왕비와 정사를 즐기다 20세에 복상사(腹上死)했다. 13대 명종도 비슷한 사유로 33세에 세상을 떴다. 24대 헌종도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다 23세에 사망했다.
 
  질병으로 사망한 왕도 꽤 된다. 28명의 자식을 둘 만큼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던 9대 성종이 38세에 사망했을 때 공식 진단은 등창과 폐병이다. 10대 연산군은 괴질(怪疾)로 죽었고, 12대 인종은 이질을 앓다 황천으로 떠났다. 18대 현종은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사망했고, 25대 철종은 폐결핵으로 33세에 삶을 마쳤다.
 
  장희빈의 아들인 20대 경종은 게장을 먹다 어처구니없이 37세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 외에 단명한 왕은 5대 문종(39세)과 6대 단종(17세) 부자(父子)다.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한 뒤 후환을 우려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단명한 왕들은 삶이 짧아서인지 대개 국민들의 뇌리에 뚜렷한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 5대 왕 문종의 요절은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조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고 만다. 그의 죽음이 아쉬운 이유는 그가 우리 역사상 최고 성군인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최고의 왕재(王才)였기 때문이다.
 
문종이 묻힌 동구릉이다. 문종 사후 풍수가들 사이에서 능 터가 좋지 않다는 반론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한사코 반대했다.
  문종이 왕위를 이은 것은 세종 사후인 1450년 2월 22일이다. 태종 14년에 태어나 37세가 될 때까지 문종은 왕위 계승을 준비했는데, ‘대리청정’ 형식으로 국정에 참여한 것은 30세인 1443년부터다. 이 기간 문종은 ‘훈민정음’ 창제, 전세법(田稅法) 제정, ‘용비어천가’ 완성 등에도 기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세종을 닮아 시와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1425년 5월, 그는 지금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이 바뀐 ‘희우정(喜雨亭)’에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귤을 선물했는데, 귤이 담긴 쟁반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희우정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지은 정자다.
 
  ‘향나무는 코에만 향기롭고
  고기는 입에만 맞으나,
  동정귤은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다니 내가 가장 사랑하노라.’

 
  문종은 조선 4대 명필로 유명한 안평대군과 자웅을 가리지 못할 만큼 서예에도 능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인 기록이 있다. “문종은 조맹부의 서체를 좋아했는데 여기에 왕희지의 서법을 섞어 써서 등불 아래에서 쓰더라도 정밀하고 기묘한 것이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그 글을 얻은 사람이 천금처럼 여겼다.”
 
  문종은 무예를 싫어한 아버지와 달리 무(武)와 천문지리에 통달했다. “활로 과녁을 쏠 때에도 지극히 신통해서 매번 명중시켰다. 천문을 잘 봐서 천둥이 언제 어디에서 칠 것이라고 말하면 뒤에 반드시 맞았다. 세종과 거둥하실 때 (세종이 문종에게) 천변(天變)을 물으셨는데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문무를 겸전한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진법(陣法) 훈련을 참관하던 중 군기감에 지금의 다연장로켓포와 비슷한 화차(火車)를 만들 것을 명했다. 이 화차 실험에 갑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사용했는데, 70~80보 밖에서 화살이 허수아비를 모두 명중함은 물론 방패까지 꿰뚫는 위력을 발휘했다.
 
  “북쪽 오랑캐에 대한 정보가 해마다 연달아서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강무(强武)에 예리한 뜻을 가져서 군사를 대비하는 일에 생각이 두루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직접 진법을 검열하니 무사들이 모두 그 능력이 뛰어나게 되었다.”(《문종실록》 1년 1월 16일)
 
  “주상이 임영대군 이구(李璆)에게 화차를 제조하라고 명했다. 수레 위에 거치대를 설치하고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나 사전총통 50개를 꽂아두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서 연달아 발사했다.” (《문종실록》 1년 2월 13일)

 
  이 기록만 보면 화차는 동생 임영대군이 만든 것 같지만 실록은 문종이 실제 고안했다고 전한다. 화차는 평지에서는 두 사람이 끌고, 비탈에서는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밀며, 험한 곳에서는 두 사람이 끌고 두 사람이 밀면 움직일 수 있었다. 문종은 평시에 화차가 필요 없다는 대신들에게 핀잔도 주었다.
 
  “화차는 본래 적을 방어하는 무기다. 평상시 쓰지 않으면 반드시 무용지물이 돼 스스로 허물어질 것이다. 일이 없을 때는 각 관청에 나눠줘서 여러 물건을 운반하게 하다가 사변이 있으면 화포를 싣고 적을 방어하도록 하라.”
 
  그러나 몇몇 지방에 화차 20량씩 배치하려던 뜻은 대신들의 반대로 꺾이고 말았다.
 
  문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지도(地圖)의 중요성을 인정한 왕이다. 그는 예조참판 정척이 만든 〈양계지도〉의 부족한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을 때 칭찬은커녕 ‘나라 정보를 적에게 노출시킨다’는 이유로 핍박받은 것과 비교하면 그릇부터가 달랐다.
 
  문종은 진법 관람을 즐겼는데, 함길도 절제사 출신 김종서와 의논해 ‘신진법’을 만들며 이렇게 말했다.
 
  “군사는 주장(主將)의 절도(節度)에 달려 있는데, 조선군은 깃발과 북으로 지휘하고 임기응변하는 데 방법이 없다. 내가 옛 진서를 보니 조선군은 서로 끌고 합치는 것이 통하지 않으니 고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문종의 ‘건강’에 그림자가 엄습한다. 사실 세종은 임종 직전까지 문종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 유교(遺敎)를 영의정 하연이 세종이 승하한 다음 날 문종에게 상기시켜 줬다.
 
  “(상을 치르더라도) 3일 안에는 죽을 조금 먹고, 3일 후에는 밥을 조금 먹어야 병에서 벗어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종에게 가장 큰 화근은 식사가 아니라 고질인 종기였다. 갖은 의술을 시행해도 종기가 사라지지 않자 사헌부 지평 이의문은 어의들이 얼렁뚱땅 의술을 편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는 노중례, 전순의 등 어의가 의서(醫書)를 두루 살피지 않는다고 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은 단종의 무덤이다.
  집권 2년 차인 1452년 5월 5일, 종기는 문종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 때마침 일본 사신들이 한양에 도착했는데, 문종은 종기 때문에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사신을 홀대한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대신들이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 모였다. 어의 전순의(全循義)가 왕을 진단한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왕을 진단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시약청(侍藥廳)을 꾸리는 게 순서다. 시약청은 왕이나 대비, 왕비가 병났을 때 구성하는 임시기구로, 영의정이 책임자인 도제조가 되고 좌의정·우의정이 부제조가 되며, 내의원에 속한 모든 의원이 편입돼 비상근무 하는 진료체계다. 이는 어의의 독단적인 처방을 막기 위함이다.
 
  전순의는 “환후가 어떠신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종기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는 조금 덜하셨고 농즙(濃汁·고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콩죽을 드렸더니 성상께서 기뻐하시면서 ‘음식 맛을 조금 알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순의의 말에 대신들이 기뻐했다. 시약청을 꾸리자는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원래 전순의는 세종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다. 천인(賤人) 출신으로,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의 병을 낫게 하자 세종이 기뻐하며 그에게 옷을 하사했다. 그는 《의방유취》 발간에 기여하기도 했다. 세종은 전순의를 대마도로 보내 일본 의술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했다. 한마디로 전순의는 내의원의 간판 어의였다.
 
  한편 전순의는 세종에게 처벌받은 적도 있다. 세종이 숨지기 석 달 전인 1449년 12월, 세종은 황보인, 정인지 등을 불러 “내의 전순의 등은 동궁(문종)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삼가지 않았으니 참상 이상의 직첩을 빼앗고 조교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참상은 종6품 이상, 조교는 종9품이었다.
 
  ‘삼가지 않는다’는 말은 의서 처방대로 치료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하들이 더 강한 벌을 내리자고 주장했지만 세종은 직급을 강등시키는 데서 끝내고 말았다. 세종은 이들을 강등시킨 채 원직에 복직시키지 않고 세상을 떴다. 그런 전순의 등을 복직시킨 왕이 바로 문종이니 묘한 인연이다.
 
  문종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 전순의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밀성군 이침의 병을 완쾌시킨 데 따른 포상이었다. 그때 밀성군은 겨우 13세였다. 이처럼 어린아이의 병까지 잘 고치던 전순의가 자신을 돌봐준 문종의 병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단종 영정.
  1452년 5월 6일, 문종의 세자(단종)는 아버지의 쾌차를 위해 신하들을 명산대천(名山大川)으로 보내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수양대군은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 격인 강맹경(姜孟卿)과 함께 지금의 돈암동에 있는 흥천사로 갔다. 흥천사는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를 위해 세운 절이었다.
 
  이 부분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차도가 있다는 전순의의 말에 따라 시약청이 꾸려지지 않았으므로 문종의 병 수발과 치료의 총책임은 도승지인 강맹경의 몫이었다. 그래서 의정부에서 “성상이 편안하지 못한 때에 도승지가 궁궐을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힐난하자, 강맹경은 우부승지 권준에게 자기 일을 맡겼다.
 
  5월 8일, 전순의는 문종의 증세가 계속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상의 종기에서 농즙이 흘러나와서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혔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니 예전의 평일과 같습니다.”
 
  여기서 ‘예전의 평일과 같다’는 말은 병이 다 나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실상은 전순의의 말과 달랐다.
 
  5월 14일 상황이 급변했다. ‘성상의 병세가 위급해졌다’는 전갈이 퍼지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도승지 강맹경, 직집현 김예몽, 의관 전순의 등이 그제야 《의방유취》를 들쳐보기 시작했다. 문종의 병은 예나 지금이나 종기였는데, 상태가 악화되어서야 의서를 펼쳐놓고 약을 찾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의서를 상고하는 자리에 다른 대신들은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수양대군과 도승지 강맹경이 대신들에게 임금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의 《문종실록》에는 문종의 죽음과 관련해 의문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남아 있다.
 
  “무릇 의료에 관한 모든 일과 기도하는 모든 일은 강맹경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여쭌 후 두 대군의 말을 받아 의정부에 고한 후 시행했다.”(《문종실록》 2년 5월 14일)
 
  이것은 열두 살 세자(단종)를 제치고 문종의 두 동생인 장성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치료를 주도했다는 뜻이다.
 
  조선은 종친의 정치 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러한 상황에 왕의 병 치료를 장성한 종친들이 주도하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처사였다. 며칠 전까지 두 대군과 함께 왕이 쾌차한다던 어의 전순의가 의서를 뒤지는 사이 문종은 그날 오후 5시 강녕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월에서는 단종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매년 단종문화제가 열린다.
  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수양대군이 실권을 쥐고 있을 때 편찬한 《문종실록》에도 사관(史官)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대궐 안팎이 서로 통하지 않은 가운데 오직 내의 전순의, 변한산, 최읍만이 날마다 나아가 진찰했지만 모두 용렬한 의원들이어서 병세가 어떤지도 알지 못하면서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임금에게 활 쏘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게까지 했다.”
 
  “의정부와 육조에서 날마다 임금의 안부를 물으면 전순의는 ‘임금의 옥체는 오늘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좋아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의정부와 대신들이 임금의 병환이 위급한 때를 당해서 의정부에 앉아서 사인(舍人)을 시켜 문후했을 뿐 한 번도 임금을 뵙고 병을 진찰하기를 청하지 않고 용렬한 의관에게만 맡겨 놓았으니 그때 사람들의 의논이 분개하고 한탄하였다.”(이상은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에서 인용)

 
  자신이 치료하던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뜨면 어의들은 보통 형식적인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금부가 치료과정에 의혹이 있다며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그들은 “세종 때는 어의들이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이번에는 증세의 경중도 말하지 않고 쓰는 약도 대신들에게 묻지 않았다”고 했다.
 
  사흘 뒤 의금부는 강력 처벌을 주청했다.
 
  “전순의는 주범이니 중하게 처벌해 목을 베고 변한산과 최읍은 종범이니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에 처하소서.”
 
  단종은 전순의의 목을 베는 대신 전의감 청지기로 직을 낮췄고, 변한산과 최읍은 전의감의 아전으로 강등시켰다. 그러자 사헌부·사간원, 양사(兩司)가 나섰다.
 
  “옛날 허나라의 세자 지가 약을 먼저 맛보는 것을 하지 않자 ‘춘추’는 시역, 즉 임금 죽인 죄를 가했습니다. 지금 전순의, 변한산, 최읍은 특별히 가벼운 법전을 따를 것이 아니니 청컨대 율에 의해 죄를 결단하소서.”
 
  그런데 도승지 강맹경은 단종에게 “양사의 언관들을 꾸짖으라”고 권했다.
 
  선왕의 죽음에 의혹이 있으면 낱낱이 밝히는 게 원칙인데, 오히려 양사의 언관들을 비판하는 것은 도승지로서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단종은 전순의 등을 모두 복직시켰다. 이에 사헌부가 ‘전순의의 복직에는 문제가 있다’며 문종의 죽음을 재조사하고 나섰는데, 놀라운 사실들이 뒤늦게 드러났다.
 
  “허리 위의 종기에서 가장 기피하는 것이 몸을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입니다. 전순의는 문종께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구운 꿩고기를 기피하지 않고 올렸습니다. 종기의 고름이 짙어지면 침으로 찌를 수 있으나 짙어지지 않으면 찌를 수 없는데, 전순의가 침으로 찌르자고 고집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러 번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됐다. 사진은 〈단종애사〉라는 영화의 포스터다.
  하지만 ‘문종 암살의혹사건’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다시 미궁(迷宮)에 빠지고 만다. 단종의 비극은 아는 이가 워낙 많아서 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수양대군이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 권씨와 문종의 묏자리를 선정하는 데 깊숙이 개입한 것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단종을 낳은 뒤 산후통으로 사망했다. 당대의 명풍수 최양선이 권씨의 장지(葬地)를 경기도 안산으로 정했다. 그러자 외눈박이 풍수로 전농시(典農寺)의 종으로 있던 목효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목효지는 대담하게도 세종에게 상소를 올려 권씨 장지의 그릇됨을 고했다.
 
  상소 요지는 ‘내룡(來龍)이 얕고 약하며 길 때문에 끊어진 곳이 열 군데나 되어서 낳은 아이가 녹아버린다. 최양선이 정한 장지는 장자나 장손이 일찍 죽는 악지(惡地)이니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손이 일찍 죽을지 모른다는 말에 세종이 재조사를 명했는데, 이때 수양대군이 조사를 주도했다.
 
  수양대군이 목효지를 비난했지만, 목효지는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세종은 능 자리는 놔두고 시신이 놓이는 위치만 바꾸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런데 목효지가 이번에는 문종의 능 자리도 문제가 있다며 단종에게 쪽지를 보내는 데 성공한다. 문종 능의 위치가 정룡, 정혈이 아니라고 했다.
 
  단종은 이번에는 목효지가 보낸 쪽지를 도승지 강맹경에게 보였다. 강맹경은 즉각 목효지를 비판했다. 이에 단종이 의정부에 이 문제를 넘기자, 이번에는 수양대군이 나서 자신이 정한 능지를 그대로 쓰자고 고집했다. 영의정 황보인이 풍수에 능한 대신들을 보내자, 목효지는 마전현 북쪽과 장단현 북쪽을 지목했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목효지는 불경죄를 지었으니 국문하고 벌을 줘야 한다”고 단종을 몰아세웠다. 숙부의 반발이 심하자 단종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정한 문종의 장지를 9척쯤 파자 물이 솟아 나왔다. 수양대군은 할 수 없이 문종의 장지를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동쪽 언덕으로 바꿨다.
 
  목효지처럼 수양대군에 맞선 이는 또 있었다. 사대부 이현로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이현로가 말했다.
 
  “백악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종손)이 쇠하고 방룡(傍龍·방계 자손)이 흥합니다. 태종과 세종은 모두 방룡으로 임금이 되셨고, 문종은 정룡이라서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수양대군은 이현로를 찾아가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자신이 왕이 될 길을 가로막았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것이다.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자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는 ‘구타당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으나 수양대군파 강맹경은 이현로를 지방으로 유배시키자고 했다.
 
  불길한 조짐이 계속되자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한명회, 권람 등을 불러 반역의 기치를 들었다. 그날 수양대군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한 김종서를 없앤 후 궁궐로 가서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모았다. 그러고 나서 한명회가 만들어놓은 생살부에 따라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 충신들을 궁궐에서 줄줄이 죽여버렸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조카 단종과 유능한 두 신하 황보인·김종서를 한꺼번에 몰살시킨 만행이었다. 세종의 18남 4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서, 문화적 소양이 가장 높은 안평대군과 그 아들마저 형 수양대군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세종대왕은 큰아들 문종을 준비된 왕으로 조련했지만 결국 아들 간의 반목으로 손자를 잃었다.
사진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이다.
  안평대군은 서예로 명성이 높지만 당대 최고의 회화 수장가였다. 지금으로 치면 최고의 컬렉터였다. 안평대군의 수장품에 대해서는 신숙주(申叔舟)가 쓴 《보한재집》의 ‘화기(畫記)’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화기’는 1445년 안평대군이 자신이 수집한 222점의 수장품을 보여주며 기록으로 남기라고 해 쓴 것이다.
 
  “비해당(안평대군의 당호로 세종이 직접 지어줌)이 서화를 사랑해 남이 한 장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이라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해 그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해서 표구해 수장했다.
 
  하루는 모두 내어서 나 신숙주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천성이 이것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는데 아, 물(物)이라는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에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신숙주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안평대군의 수장품은 당나라 오도자의 불화, 송나라 곽희의 산수화, 원나라 조맹부의 묵죽화 등 중국 5대 왕조에 걸친 화가 35인의 산수화 84점, 화조화 76점, 누각인물화 29점, 글씨 33점이다. 그리고 안견의 〈팔경도〉 〈묵매죽도〉 등 30여 점도 있었다. 신숙주는 안견을 이렇게 평했다.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이다. 지금 호군 벼슬에 있는데 천성이 총민하고 정박하며 고화를 많이 열람하여 다 그 요령을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두 모아서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산수가 더욱 그의 장처(長處)로 옛날에 찾아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을 얻기 드물다. 비해당을 따라 교유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다.”
 
  지금 가치로는 도무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귀중한 문화재가 안평대군의 사망과 함께 뿔뿔히 흩어져 찾을 길이 없다.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은 진도로 유배돼 사사됐고, 집과 재산은 몰수됐다. 그런 파란을 거쳐 안견의 최고작인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국보 238호 〈소원화개첩〉은 2001년 도난당한 뒤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아, 물(物)이라는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에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신숙주가 예언한 것처럼, 수양대군은 조선의 귀중한 문화 전체를 제 욕심 때문에 망쳤다.
 
  사족(蛇足)-수양대군은 쿠데타에 성공하고 3년 뒤인 1455년 술자리에서 동생 임영대군 이구에게 이계전과 신숙주를 때리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약 손으로 때린다면 전순의, 임원준 같은 명의가 좌우에서 서로 교대해 구호해도 끝내 효험이 없을 것이다.”
 
  문종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몰고 가고 명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안평대군과 그의 수장품마저 없애는 데 일조한 전순의는 세조에 의해 ‘명의(名醫)’의 대명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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