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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범의 해상 실크로드 기행

舟山群島와 台州

중국 浙江 곳곳에 남아 있는 1000여 년 전 신라인들의 발자취

글·사진 : 허우범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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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저우 곳곳에 新羅礁·新羅奧村·新羅嶼·新羅山 등 신라 관련 지명 남아 있어
⊙ 해상 실크로드 따라 해양 신앙인 관음신앙이 한반도로 전래돼
⊙ 沈家門 항구는 심청 설화의 고향

許又笵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타이저우에서 송나라와 무역하는 고려상인을 표현한 貿易圖.
  바다 위에 직선으로 펼쳐진 길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저우산(舟山) 군도(群島)로 향하는 첫 번째 다리인 진탕대교(金塘大橋)다. 저우산 군도는 저장성(浙江省)의 동북부 바다에 이루어진 1390여 개의 도서(島嶼)를 말한다. 중국의 섬 중 5분의 1이 이곳에 모여 있다. 제일 큰 섬인 저우산까지 가려면 3개의 대교를 건너야 한다. 진탕대교에서부터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저우산에 도착한다.
 
  저우산은 배후의 항저우(杭州)·상하이(上海)·닝보(寧波)라는 거대 도시들과 클러스터를 이루고, 창장(長江)과 대운하(大運河)의 수로를 이용한 중국 내륙 곳곳으로 이어지는 물류(物流)의 출입구이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통로로서 매우 중시되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은 고대(古代)로부터 치수(治水)를 제일 중시하였다. 대륙의 물길을 트고 돌려 순탄하게 바다로 흐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최우선 과제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대양(大洋)에 점점(點點)이 고립된 섬들을 잇는 치도(治道)에 열중한다. 수로가 중국의 혈관을 이루었다면 이제 육로를 통해 중국의 신경망(神經網)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海上佛國
 
  아침 식사 후 곧장 저우산 부두로 향하였다. 중국 4대 불교 명산의 한 곳인 푸퉈산(普陀山·보타산)에 가기 위해서다. 아직 출항시각이 아님에도 관광객들로 넘친다. 승선표를 사는 것부터 전쟁터를 방불케 하니 오늘 푸퉈산을 돌아보는 일 역시 보통 일이 아니리라. 햇살도 한껏 기승을 부리니 다부지게 마음먹고 배에 오른다.
 
  푸퉈산은 한(漢)나라 때는 매잠산(梅岑山)으로 불렸고, 송(宋)나라 때에는 백화산(白華山)으로 불렸다. 지금의 명칭은 원(元)나라 때 바뀐 것이다. 푸퉈산은 관음정토(觀音淨土)인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서 유래된 것으로 섬 전체에 불교 사원과 유적들이 많다. 이런 까닭에 옛날부터 ‘해천불국(海天佛國)’ ‘남해성경(南海聖境)’이라고 중시되었다.
 
  이곳이 불교성지로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 중국의 내륙과 동북아시아의 바다로 통하는 요충지(要衝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항해술은 계절풍과 조류(潮流)에 의존하였다. 신라와 발해, 고려와 일본 등지로 항해하는 상인과 승려, 사신들은 모두 이곳에서 바람과 조류를 살폈다가 출항하였다. 이때마다 모든 사람은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관음보살께 기도하고 불사(佛事)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푸퉈산을 해상불국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와서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푸퉈산이 불교성지가 된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매잠산 깊은 산기슭에는 소량(蕭梁)이 세운 보타원(寶陀院)이 있고, 불전(佛殿)에는 신령스럽게 감응하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옛날 신라 상인이 중국의 오대산에 가서 그 상을 조각해 본국으로 실어가고자 바다에 나갔으나, 암초를 만나 배가 걸려 나아가지 못했다. 이에 암초 위에 관음상을 올려놓았다. 이를 보타원의 승려 종악(宗岳)이 불전에 맞아들여 봉안하였다. 그 이후 항해하는 선박은 반드시 이곳에 이르러 복을 빌었는데,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新羅礁
 
  신라 상인이 관음상을 내려놓은 암초는 지금까지도 신라초(新羅礁)로 불린다. 부두를 출발한 여객선이 길을 잡을 즈음, 배 옆으로 갓 모양의 시커먼 암초가 보인다. 신라초다. 언뜻 살펴보니 섬 사이를 지나는 뱃길 가운데다. 거대한 바위가 마치 몸체의 한 귀퉁이만을 내놓고 오가는 배들에 긴장을 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다. 크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인들은 삼국통일 이전부터 뱃길을 통해 이곳을 드나들었다. 조공(朝貢)무역으로 시작된 교류는 유학승(留學僧)과 같은 인적(人的) 교류로까지 확대되었고, 중국의 강남 지역이 아랍 상인들까지 모여드는 국제무역도시로 번성하자 신라 상인들도 대거 강남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축적된 항해술과 진일보한 조선술을 바탕으로 서해와 남중국해의 바닷길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신라인들 사이에서 남중국의 저장 지역은 왕래하기 편하고 물산이 풍요로운 곳으로 인식되었다. “헌덕왕(憲德王) 8년(816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饑饉)이 심하여지자 당(唐)의 절동(折東) 지방으로 건너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을 오가는 신라인들은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이를 관장하는 관음보살께 기도를 드렸다. 이때마다 그들은 사찰에 많은 시주를 하였다. 송나라 때의 문인(文人) 장방기(張邦基)의 《묵장만록(墨莊漫錄)》을 보면, 신라인들이 오래전부터 푸퉈산에 왔음을 알 수 있다.
 
  〈해선(海船)이 이곳에 도착하면 반드시 기도를 드렸다. 사찰에는 종경(鐘磬)과 구리로 만든 물건들이 있는데, 모두 계림(신라) 상인들이 시주한 것으로 그 나라의 연호가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이제현의 발자취를 따라
 
푸퉈산을 海上佛國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普濟禪寺.
  섬을 일주하는 버스는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바쁘다. 차장은 1인당 5위안짜리 차표를 쉴 새 없이 끊어주고 있다. 밀물처럼 보제선사(普濟禪寺)에 들어섰다. 사찰의 중심 건물에는 ‘대원통전(大圓通殿)’이라 쓰여 있다. 관세음보살의 별호(別號)가 ‘원통(圓通)’이니 관세음보살을 모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통전에는 8.8m 높이의 황금빛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32존(尊)의 관음상이 있다. 많은 사람이 피우는 향(香)이 대전과 사찰을 덮고 푸퉈산 전체로 퍼지는 듯하다.
 
  관세음보살은 불안과 두려움 등 현세에서의 고난을 벗어나게 해주는 보살이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여 세상을 구하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사찰을 방문할 때면 한 무더기의 향을 들고 전각(殿閣)마다 향불을 피운다. 불교·도교는 물론 공자·관우 등 민간신앙도 가리지 않는다. 스스로가 위안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면 기도하는 대상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충선왕(忠宣王)도 이곳에 들렀다. 원나라의 대도(大都)인 베이징(北京)에 체류하고 있던 왕은 1319년 3월에 황제에게 허락을 받고 장저(江浙) 지방을 유람하면서 푸퉈산에 들렀다. 권한공(權漢功)과 이제현(李齊賢) 등이 함께 수행했는데 왕은 이들에게 산천의 좋은 경관을 글로 적게 하였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명사(名士)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는데, 이때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화는 국보 110호로 지정되었다.
 
 
  海神 남해관음
 
70톤의 구리와 6.5㎏의 순금으로 만든 높이 33m의 남해관음상.
  푸퉈산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남해관음상(南海觀音像)이다. 푸퉈산의 상징인 남해관음은 동쪽 바다가 보이는 산 정상에 우뚝하게 서 있다. 크기가 실로 거대한데 기단부를 포함하여 33m다. 70톤의 구리가 사용되었고 특별히 얼굴 부분은 6.5kg의 황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남해관음상 입구부터 많은 참배객이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다.
 
  “중국인들이 제일 중시하는 남해관음상입니다. 그래서 중국인뿐만 아니라 멀리 대만, 홍콩 등지에서도 소원을 빌러 옵니다.”
 
  원근 각처에서 자동차와 기차,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마침내 배를 타고 당도하여 만난 황금빛의 거대한 남해관음상. 영험함이 있는 곳이면 만 리 길도 마다하지 않는 간절함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거룩한 시주(施主)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고대에 바다로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과도 같았다. 낮에는 태양과 지형, 밤에는 별과 바람 등에 의존하는 항해는 공포 그 자체였다. 당(唐)나라가 신라로 사신을 보내려고 할 때에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공포의 바다를 용감하게 헤쳐나간 이는 승려와 상인들이었다. 승려들은 정진(精進)을 위한 두터운 신심(信心)으로,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욕심(慾心)으로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그들은 안전하게 항해를 마치기 위하여 바다를 지배하는 신들께 빌었다. 동해용왕(東海龍王)이나 남해관음(南海觀音)은 이들이 무사를 기원한 대표적인 해신(海神)이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관음신앙이었다.
 
 
  관음신앙의 전파
 
  관음신앙은 1세기 말 남인도의 ‘포탈라카(Potalaka)’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포탈라카는 관음보살이 거처하는 곳으로 이를 음역(音譯)하면 보타락가산이 된다.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법화경(法華經)》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마음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에 관하여 모두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적혀 있다. 이는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관세음보살’만 염송(念誦)하면 어떤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음신앙은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전파되었고, 해상 실크로드를 타고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해양신앙은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었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은 당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동해의 관음굴에서 정진하여 관음진신(觀音眞身)을 보았다. 그는 “쌍죽(雙竹)이 나는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신명(神命)을 받고 낙산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원효(元曉)가 남해의 금산(錦山)에서 관음진신을 친견(親見)하고 보광사(普光寺)를 지었는데, 현재의 보리암(菩提庵)이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금강산에서 관음진신을 친견한 회정(懷正) 스님이 강화도에 보문사(普門寺)를 지어 서해의 관음도량이 되었다. 이 세 곳은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이다.
 
  남해의 금산은 원래 보광산(普光山)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천하 명산을 다니며 기도하던 중 남해 보광사에 이르렀는데 꿈에 관세음보살에게서 금척(金尺)을 하사받았다. 태조가 된 이성계는 불은(佛恩)에 보답하는 뜻으로 보광산 전체를 금색 비단으로 둘러싸려고 하였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비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래가지도 않는 일이었다. 이에 산의 이름을 ‘비단산[錦山]’이라고 고쳤다.
 
 
  심청 설화의 고향 선자먼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이 살았다는 沈家門에 세워진 ‘沈院’.
  푸퉈산을 보느라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른 까닭에 늦었지만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서둘러 배에 올랐다. 아침보다는 한결 편안하게 부두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자먼(沈家門) 항구가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이곳이 최초로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송나라 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다.
 
  〈심가문의 산은 교문(蛟門)의 그것과 같은 모양인데, 사방의 산이 둥그렇게 안고 있으며 두 문을 마주 열고 있다. 그 산세가 연이어 걸쳐 있으며 여전히 창국현(昌國縣)에 속한다. 그 주변으로 어부와 나무꾼 10여 집이 모여 사는데, 그 가운데서 많은 성씨를 이름으로 취한 것이다.〉
 
  선자먼은 지금도 저우산 섬의 어업을 이끄는 항구로 발달하였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고전소설 《심청전》과 관련이 있다. 효녀 심청의 본명은 원홍장(元洪莊)이다. 16세의 홍장은 맹인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홍법사(弘法寺)에 자신을 시주하였다. 마침 백제로 무역하러 왔던 진(晉)나라 심국공(沈國公)이 홍장을 샀다. 그는 저우산 푸퉈 섬의 부상(富商)이었는데, 험한 뱃길을 무사히 건너기 위한 제물로 그녀를 샀다. 하지만 심국공은 풍랑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귀국하였고 홍장을 수양딸로 삼았다. 이름도 ‘심청(深靑)’으로 개명하였다.
 
  이즈음 진 혜제(惠帝)의 황후가 죽었다. 혜제는 새로이 맞이할 황후는 동쪽 나라에 있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심국공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심청을 보고 황후로 맞이하였다. 황후가 된 심청은 고국의 부친을 잊지 못하여 온 정성으로 만든 관음상을 고향으로 보냈다. 관음상을 실은 배는 거친 파도에 표류하다가 성덕처녀에게 발견되었다. 그녀는 관음상을 업고 고향인 곡성(谷城)으로 와서 성덕산(聖德山)에 관음사(觀音寺)를 창건하였다.
 
  심청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니면 소설일까.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사적기(事蹟記)》에는 앞서 살펴본 원홍장의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있다. 역사적인 사실(史實)이라고 믿기엔 미흡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개연성(蓋然性)은 충분하다. 《심청전》은 고대 한반도와 중국 간에 있었던 해상 교류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인당수(印塘水), 용궁과 관음사상, 무역선, 상인 등은 이를 알려주는 증거 자료들이다. 선자먼은 이러한 전설에 근거하여 큼지막하게 심원(沈院)을 건축하고 한국인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신라오촌
 
台州 古城 입구.
  타이저우(台州)로 향하는 곳곳에도 신라인들의 흔적이 넘쳐났다. 샹산(象山)현에는 신라오촌(新羅奧村)이 있다. 남송 때의 지리지인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에는 ‘신라오촌은 노인들이 전하기를 일찍부터 신라국 사람들이 이곳에 선박을 정박했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당나라 때부터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천연항구인 바이둔(白墩) 항구 안쪽이다. 지금도 마을 입구까지 바닷물이 통하고 양식장이 많은 것으로 봐서 옛날에는 배들이 충분히 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린하이(臨海)는 당나라를 세운 이세민(李世民)이 하이저우(海州)라고 하였다가 다시 타이저우로 개명한 곳이다. 이후 오랫동안 행정 치소(治所)가 되어 고성(古城)과 사찰(寺刹)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역사가 유구한 이곳에도 신라인의 발자취인 신라서(新羅嶼)와 신라산(新羅山)이 남아 있다. 남송 때의 책인 《가정적성지(嘉定赤城志)》에는 ‘예부터 신라 상인이 이곳에 배를 정박하였기에 신라서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신라서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린하이박물관에 들러 전시자료를 살펴보았다.
 
  타이저우 고성 앞으로 강이 흐르고 중류쯤에 쇄상암(晒鯗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신라서라고 한다. 이곳에 배를 정박한 신라 상인들은 작은 배를 이용하여 타이저우 성의 통원방(通遠坊)에 위치한 롱싱스(龍興寺)에서 중국 상인은 물론 각국의 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롱싱스는 지금도 높다란 탑과 함께 늠름한 자태로 오랜 역사를 뽐내고 있다. 신라인에 이어 고려인들도 이곳에서 교역을 하였다. 고즈넉한 사찰을 돌아보노라니 각국의 상인들과 교역하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신라산과 신라방
 
臨海 시내 東湖에 있는 新羅山. 전각의 뒤에 보이는 산이다.
  신라인들은 오랫동안 저장 지역을 주 무대로 교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국땅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이들이 묻힌 곳이 신라산이다. 신라산은 타이저우 시내의 둥후(東湖)가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연달아 첩첩한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멀찍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신라산은 한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뤄 살던 신라방(新羅坊)은 타이저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황옌(黃巖)현에 있다. 《적성지》에는 ‘오대(五代) 때부터 신라국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다’고 하니 이곳의 역사도 1000여 년이 넘었다. 지금은 바이수샹(柏樹巷)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간 신라방은 허허벌판이었다.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바이수샹 전체가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수작업 중인 신라방 다리(新羅坊橋)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신라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교류하였다. 사신은 물론 유학승과 유학생, 나아가서는 상인들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발전시켜 고려만의 고유한 문화를 전파하였다. 모두가 바닷길을 중시하고 폭넓게 활용한 결과였다.
 
 
  우물 안 개구리 조선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바다를 중시하지 않은 까닭에 동아시아의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속 좁게 지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를 다녀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었다. 그는 배청의식(排淸意識)이 강한 시대, 점점 뒤처지는 조선의 상황을 보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송의 장삿배들이 해마다 자주 예성강(禮成江)에 닿았으며, 중국의 백화(百貨)가 몰려들었다. 고려왕은 예절을 차려서 그들을 대우했기에 당시에 서적들은 훌륭히 갖추어졌고, 중국의 기물(器物) 중 고려로 안 들어온 것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뱃길로 중국 남방과 통상을 하지 않으므로 문헌에는 더더욱 캄캄하며, 삼왕(三王)의 일(명나라가 망한 뒤에 남방으로 도망한 왕족이 항거했던 일)조차 몰랐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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