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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의 미학산책 〈10〉 인문 강좌의 선구 합포문화동인회

글 :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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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마산 출신 노산 이은상이 제안, 조민규 전 적십자사 마산지사 사무국장이 40년간 진행
⊙ 2017년 3월까지 470회 기록, 모윤숙, 정비석, 김동리, 구상, 이병주, 황금찬, 이문열, 김훈 등 거쳐 가

김형국
194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 저술
〈도판 4〉 애솔배움터 교장의 수업
애솔배움터는 1986년에 마산적십자사가 청소년 학교로 시작했다. 한글반, 초등반, 중등반이 개설되었는데, 1988년에 애솔배움터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간 교육장소를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가 2013년 경남은행이 산호동 지점 안에 교실을 마련해 주어 마침내 집세 걱정을 덜었다. 개설 이래로 교장 자리를 맡아 온 조민규에게 “버스를 탈 때도, 은행을 이용할 때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 늦게라도 내가 한번 해보자”라고 마음먹고 야학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는 게 큰 보람이 되고 있다.
  이건 국토발전의 오랜 세계적 법칙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선진국에서 흘러 들어온 신문물은 수도 서울에서 먼저 자리 잡았고 그다음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신식 문물 등의 혁신(革新)은 생성시킬 앞선 창의적 두뇌가 있어야 하고 그걸 수용해 줄 인구가 많아야 한다. 이 점에서 단연 서울이 압도적이다. 까닭에 이 나라의 혁신 문물은 거의 절대적으로 서울발이거나 서울 경유였다.
 
 
  지방도시 시발의 시민강좌
 
〈도판 2〉 노산 이은상 시비, 마산역 광장 입구
가곡 ‘가고파’의 가사가 새겨졌다. 시비가 2013년 2월 6일에 제막되고 그다음 날, 이승만 독재 등에 부역했다고 비판하는 조직이 돌비에다 페인트 훼손을 저질렀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공과로 교량(較量)하기보다 일도양단하려는 한국적 정서 탓인지 “치앗삐라”를 연발하는 지방적 정서 탓인지 마산 상징의 명시(名詩)도 시련을 받고 있다.
  법칙엔 예외가 있다. 우리나라 도시들 가운데 최초로 남해안 마산에서 거도적(擧都的) 인문학 강좌가 40년 전인 1977년에 생겨났던 것도 그 하나다. 이래로 줄곧 지속되어 온, 전문적으로 말해 기관형성(機關形成)이 되었으니 서울 등의 대도시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경우로 바로 마산의 합포문화동인회가 펼쳐 온 ‘지역과 세상을 밝힌다’는 인문강좌가 올봄 마흔 돌을 맞았다.
 
  합포는 개항도시로 출발한 마산의 옛 이름이다. 이곳 지방 유지들이 시민의식을 심화시키려고 결집했던 시의(時宜)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 1970년대 중반은 ‘하면 된다’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현대 한국의 경제성장이 한창 탄력을 받았을 때로 절대가난을 뛰어넘는 성장이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세상 추이에 대해 촉각을 세우려고 1968년에 발족한 한국미래학회가 발전이 초래할 갈등에 대해 앞서 염려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무언가 서울보다 한발 늦다고 생각해 온 지방에서 외형적 성장이 초래할 사회계층 간 갈등 등의 사회비용을 놓고 자의식 강한 그곳 마산 시민들이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도판 1 참조)
 
  새로운 일에는 역시 사람이 있는 법이다. 혁신은 먼저 새롭게 생각하는 아이디어맨인 원(原)착상자가, 그리고 착상자의 뜻을 받들어 이를 펼쳐 나가려는 창도자(唱導者)가 있기 마련이다.
 
  합포문화동인회의 원착상자는 마산 태생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1903~1982) 시조시인이었다. 물론 동향 문인에 전국적 사랑의 인물도 있다. 애국가보다 더 많이 불린다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고향의 봄’ 동요를 열네 살 때 지었다는 이원수(李元壽·1911~1981) 아동문학가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귀천’을 노래했던 순진무구의 극치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산을 문향(文鄕)으로 소문나게 만든 주역은 연조로 봐서도 국민애창가곡 ‘가고파’ 작사자 노산일 것이다.(도판 2 참조)
 
  1976년 말 고향을 찾았던 노산이 재향(在鄕) 청년들에게 지방문화 창달의 방편으로 인문강좌를 제안했다. 원로다운 제안이었다. 그해는 칠십대 중반 노산에게 무척 득의의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그의 문학 일대를 기리는 노산문학상이 제정되었고, 이 연장으로 ‘민족문화강좌’를 해마다 6회씩 대학을 순회하며 개최한다는 계획도 세웠다.(《경향신문》, 1976.4.5) 고향을 위해서도 사회의식을 자극할 장치를 찾고 있었다.
 
 
  아이디어에는 튼실한 실행가가
 
  마산의 뜻있는 청장년 여럿이 한국 문화계의 원로 노산을 적극, 그리고 즉시 호응했다. 이듬해 1월, 민족문화협회의 마산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 선임과 함께 곧이어 3월에 ‘마산 태생’ 제1회 민족문화강좌를 열었다. 그 시절은 문화행사용 도시 인프라가 다방이 고작이었다. 전국적 문화인사 노산의 ‘충무공의 구국정신’ 특강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산에 전해진 참신한 아이디어의 착상과 실행에 앞장선 창도자들 가운데는 지성(至誠)의 리더도 있어야 했다. 그 노릇을 감당한 이가 그때 여당 사무국 마산지부 간부 조민규(趙敏奎·1936~)였다. 시민의식 고취형 인문강좌 아이디어가 특히 그에게 솔깃했음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때 몸담고 있던 정당 사무국 요원들은 공익(公益) 실현에 앞장서야 하는 직분도,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기 일쑤인 그 판에서, 자칫 빈말에 그치기 쉬웠고 그만큼 손에 잡히는 구체적 실행의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던 점이 스스로 실망스러웠고 한편으로 노산의 제안이 가슴에 와 닿았음은 마산 창신학교의 선후배 사이라는 진한 유대감도 작용했다.
 
  고등학교로 구실하고 있는 창신학교가 어제오늘 전국적으로 알 만한 존재가 더 이상 아닐지라도 아는 사람은 알듯이, 1906년 설립의 오랜 역사에다 무엇보다 일제 때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던 자랑스런 역사의 학교였다. 그때 저명 국학자들이 교편을 잡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를테면 일제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 《성웅 이순신》을 펴냈던 이윤재(李允宰·1888~1943)도 그 한 분이었다. 나중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옥사한 그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 것인가는 능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창신학교는 그때 그곳 기독교 수용에도 앞장섰던 마산 개화의 주역 이승규(李承奎·1860~1922)가 세운 학교였다. 바로 노산의 아버지였다. 노산 또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겨우 풀려났다.
 
 
  민족문화강좌의 진행
 
〈도판 3〉 김훈 작가 특강
이순신의 행적을 알리려고 애썼던 노산에 이어 더욱 폭넓게 감동으로 ‘민족의 태양’을 만나게 해준 《칼의 노래》의 동인문학상 작가가 장군의 승첩에 합포해전(1592년 5월 7일)도 들어 있음을 일깨우고 있음인가.
  그렇게 시작한 민족문화강좌는 사회 각계의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론형 식자들과 실무형 리더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소견, 식견을 육성으로 경청하는 방식이었다. 세상 일이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는 게 상투어인데, 문화강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유명한 강사 섭외가 어려웠다. 요로를 통하긴 해도 그 섭외는 항상 아쉬운 부탁일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확보한 강사를 마산까지 모셔오는 일도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서울과 마산을 오가는 KTX 운행이 시작된 2010년 말 이전만 해도 서울 출발 강사들은 대개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김해비행장 출영도 지부장 조민규의 몫이었다. 이런 부담성 과업에 대처하자면 일자리가 아예 공동체 봉사형이어야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 대한적십자사가 경남지사를 출범한다기에 거기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합포문화강좌는 마흔 돌 기념식이 열렸던 2017년 3월 17일 현재로 470회를 기록했다. 그 사이 이어진 강사진은 한마디로 이 나라의 명사 족보와 다름이 없었으니 이 강좌를 즐겨 온 마산 시민의 자부심도 ‘좀 넘치게’ 도저(到底)했다. “합포문화강좌에 서지 못한 이는 아직 한국 명사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기실, 자부심도 가질 만했다. 서울 쪽에서 보면 한미하다 할 천리 밖 도시인데도 청중의 열의에 감복한 나머지, 일단 다녀간 연사들은 장차의 또래 연사를 즐겨 추천해 주었다. 초치된 연사들 가운데 누구라 하면 알 만한 전국적 인사는 문단 쪽이기 쉬운데 그 사이 다녀간 이로 모윤숙, 정비석, 김동리, 구상, 이병주, 황금찬, 이문열, 김훈을 우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2016년 말에는 백 세를 바라보는 높은 나이에 《백년을 살아보니》(2016)를 펴내 시중의 화제를 모았던 철학자 김형석(金亨錫·1920~)도 다녀갔다. 그의 특강에 회원들의 호응이 컸다.(도판 3 참조)
 
  기함(旗艦) 행사인 합포문화강좌를 주축으로 1976년부터 개최해 온 ‘노산가곡의 밤’은 35회, 젊은 주역을 상대로 2007년부터 시작한 ‘영리더스강좌’는 38회, 1999년부터 시작한 ‘여성강좌’는 66회, 1988년부터 시작한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세미나’는 15회를 기록했음이 대표적 방계 활동이었다.
 
  동인회의 대표적 강좌가 계속되고 거기에 좀 전문적인 강좌들로 가지를 칠 수 있었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마흔 돌 기념의 제470회 강좌는 바로 동인회의 대표 얼굴이던 조민규의 그간 내력에 대한 성찰로 갈음했다. 무엇보다 동인회의 활동비용을 정부나 기업 등 외부에 일절 기대지 않고 개인 회원들이 취지에 적극 찬동해서 물심양면으로 직접 참여해 왔던 덕분이었다. 이를 더욱 제도로 굳히기 위해 출범 20년이던 1996년에 사단법인을 결성했다.
 
  마흔 돌 기념행사에서 동인회는 조민규의 공덕을 두 가지 방식으로 기렸다. 하나는 옛 선비들의 아취(雅趣)에 따라 마산의 옛 이름을 따서 ‘합포’라는 아호를 봉증했고, 또 하나는 자칫 빠질 수 있는 반목과 질시의 나쁜 버릇을 경계하면서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돕는 지방 분위기 창출을 기대하려고 ‘합포조민규봉사상’을 제정했다.(도판 4 참조)
 
 
  시민강좌가 기대하는 바는?
 
  마흔 돌을 맞아 장차의 사십 년을 기대해 봄은 생명력 있는 조직체의 당연 관심사다. 일단 그간의 관성(慣性)으로 잘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라는 게 동인회 안팎의 공통 인식이었다. 향토사랑은 무엇보다 영토성(領土性)이 그 기반인데, 동인회의 기반이던 마산의 지명(地名)이 명사로는 사라지고 ‘마산 합포구’와 ‘마산 회원구’라는 식의 관형사로 겨우 남았기 때문이다. 행정 경계가 경제생활 경계와 차질이 있다며 2010년 이웃 행정구역끼리 통합할 때 마산·창원·진해 인근 세 시가 창원시로 통합된 결과였다.
 
  마산이라 하면 구마산·신마산·북마산을 지칭하던 세 쪽 마산이, 얼마 뒤에 동마산·서마산이 보태진 다섯 쪽 마산이 그 지리적 구성인 줄 알았던 토박이들이 그만 난감한 상황을 만나고 말았다. 시내외를 오가는 도중에 만나는 도로표지판 행선지에 ‘마산’이 나와야 할 자리에 계속 ‘창원’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창원에 경남도청이 옮겨오긴 해도 개화기 이후 생겨난 이 나라 도시 체계에서 마산의 위상은 인접 도시가 비할 바 아니었다. 19세기 말 개항에다 일제 때는 그 식민 모국과 가까운 근접(近接) 지정학으로 성장세를 얻었고 광복 조국이 동족상잔의 시련에 들었을 때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이 낙동강 최후 방어선이었는데 그 일각인 ‘마산-진동전투’의 승리가 패망 직전의 대한민국을 구출한 보루였다.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기에 일본 밀수의 거점이라며 ‘우마야마갱(馬山縣)’이란 오명을 잠시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자생적 근대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정치혁명이 저 유명한 3·15의거가 일어났던 곳이 바로 마산 아니던가. 이를 계기로 마산은 일거에 이 나라 민주화의 성지(聖地)로 우뚝 솟았고 그 기백이 부마사태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마산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마산정신은 어디로
 
〈도판 1〉 마산수출자유지역
수출자유지역은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외국인의 투자촉진·고용증대·기술향상을 목적으로 수출자유지역설치법(1970)에 따라 경남 마산과 전북 익산 2곳에 지정·개발되었다. 구로공단에서 보았던 산업화의 명암은 마산수출자유지역도 마찬가지였음을 시인(서효인, 《여수》, 문지사, 2017)이 〈마산〉이란 서사시로 성찰하고 있다. ‘자유무역단지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은 여공이었다. 밤이면 학교에 갔지만 엎드려 있었다. 토요일이면 졸업처럼 시내에 나갔고, 시내에 붙은 바다에 떠밀려갔다.…’
  현대 한국 민주화의 선봉이었다는 자부심이야말로, 비록 마산 땅이란 영토성은 희미해졌지만, 기질로 살아 있는 마산정신이라 할 것이다. 통영 쪽 예술정신은 임란이 끝난 뒤 그곳에 자리 잡았던 수병들이 배운 게 바다뿐인 지경에서 체질화된 강한 생활력과 함께 바다의 낭만에서 유래했다는 그곳 출신 박경리 소설가의 소론이 설득력이 있다면 충무공이 승첩을 거두었던 해역이던 마산 또한 그런 환경에서 마산정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서양사에서 혁명성은 항상 낭만성을 동반한다 했다. 어렵사리 말할 게 아니라 이 점은 흘러간 옛 우리 유행가가 단도직입으로 쉽게 말해준다. ‘마도로스 순정’의 한 구절이 바로 그것. “바다에는 강하여도 사랑에는 약한 게 마도로스다!”
 
  합포문화동인회는 바로 혁명과 낭만의 양 날개를 품고 있는 인문성을 지키고 키워나가려는 몸짓이다. 동인회 말고, 땅 근거를 잃었지만, 마산정신을 이으려는 재향 및 출향 인사의 노력도 현재 진행형이다. 마산을 근거로 살았던 명인들과 그 행적을 적은 책(남재우·김영철, 《그곳에 마산이 있었다》, 글을읽다, 2016)도 나왔다.
 
  한편, 현지 당국도 창원을 광역시로 키우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다. 그게 성공하면 광역시 안에서 마산시는 이름으로 옛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란 일말의 기대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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