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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증명한다 〈5〉 손원일과 한국 해군 창설의 무대를 찾아

건국 이후 처음 창설된 해군이 6·25 때 첫 전과 올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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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원일 제독, 해군은 선비여야 한다며 11월 11일 군 창설
⊙ 그의 흔적 인사동과 남산 일대에 산재해 있어
⊙ 손 제독의 부친이 김일성 살렸지만 그 아들이 김일성 야욕 분쇄
⊙ 손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 100세 넘기며 해군 응원
6·25 당시 손원일 제독이 전선 시찰에 나섰다.
  대한민국은 지금 건국 이후 최대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북한이 원자폭탄에 이어 핵 탄도미사일과 원자력 잠수함까지 건설해 안보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의 압력은 갈수록 심각해지는데 내부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을 사드 배치를 놓고 전자파 유해 논쟁이 끊이지 않는 등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월간조선》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100일’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적한다. 그 시작은 71년 전인 1945년 8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은 우리 민족이 광복(光復)한 바로 다음날이다. 그날 중국 봉천(奉天)에서 한 젊은이가 귀국한다. 그는 조국의 해방 소식에 무조건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손원일 제독은 한국 해군의 아버지다.
  그가 탄 기차는 24시간을 넘게 달려 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 젊은이가 서둘러 조국을 찾은 것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역에 도착한 지 닷새 뒤인 1945년 8월 21일, 당시 서른여섯 된 손원일(孫元一·1909~1980)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로 갔다.
 
  1909년 설립된 이 교회에서 그는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前身)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한다. 안동교회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저택 ‘윤보선가(家)’ 맞은편에 있다. 1979년 지금 같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됐다. 손원일은 왜 안동교회에서 해군을 만든 것일까?
 
  교회 내부에서는 이와 관련된 안내문이나 설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추측건대 중국 만주 지방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孫貞道·1882~1931) 목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원일은 다시 일주일 후인 8월 28일 해사대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옛 충훈부 건물로 옮겼다.
 
  이곳은 안국역에서 인사동 거리 초입이다. 9월 30일 해사대는 조선해사협회로 이름이 바뀌고 본부는 ‘조선해사보국단 사무소’로 바뀐다. 11월 11일 손원일은 옛 충훈부 건물, 즉 8월 28일 해사대를 옮긴 그곳에서 회원 70명과 함께 ‘해방병단(海防兵團) 창설식’을 거행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안동교회는 손원일 제독이 해군 건설에 나선 장소다. 맞은편이 윤보선 전 대통령 저택이다.

종로구 인사동 초입에 있는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지석.
  한국 해군이 출범한 것인데 11월 11일로 택일(擇日)한 사연은 잘 알려져 있다. 손원일은 해군이야말로 신사(紳士) 중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선비 사(士)자를 파자(破字)하면 십일(十一)이 되기에 11월 11일로 날짜를 정했다는 이야기다. 이 터에는 ‘해방병단 결단식 터’라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해방병단 결단식을 마친 후 손원일과 초기 해군 창설 멤버 70여 명은 오후 7시 미 군정청 운수부에서 마련해 준 특별열차 편으로 진해역으로 향했다. 12일 새벽 6시 진해에 도착한 일행은 역 맞은편 태화여관에 묵었다.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퍼시픽호텔도 해군과 관련이 있다.
  11월 14일 손원일과 해방병단 단원들은 진해군항 1-2부두에 있는 옛 일본 해군 항무부 건물로 이동해 시무식을 연다. 여기에도 ‘해방병단 시무지지’라는 표석이 남아 있다. 손원일이 해군을 건설하는 사이, 서울에 있던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는 남산동 퍼시픽호텔로 사령부를 옮겼다. 1946년 10월 1일의 일이다.
 
  이곳은 원래 통위부 부속건물이었다.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는 다음해인 1947년 7월 옛 일본 해군 무관부 부속건물로 옮긴다. 이곳은 명동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와 왕돈가스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 가는 곳 바로 못미처에 있다. 서울시 소유 건물 옆이다.
 
  이렇게 우리 건군(建軍) 역사상 최초로 해군을 설립하고 인력을 정비한 손원일은 1949년 10월 1일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전투함 백두산함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백두산함 구매와 관련해서는 필자가 2011년 9월 8일 《조선일보》 칼럼 ‘태평로’에 쓴 ‘백두산함은 증언하다’ 기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윤숙이,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돼요. 뉴욕의 존 스태거 씨에게 꼭 전해야 합네다.” 문서를 건네주는 노(老) 대통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 받아든 이는 시인 모윤숙(毛允淑)이었다. 1949년 어느 날 경무대(景武臺)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진해를 미군에게 맡길 테니 군사원조를 해달라!’ 이런 민감한 내용의 친서를 외교관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맡긴 사연이 있었다. 한 달 전 같은 일을 공직자에게 시켰더니 일본 하코네(箱根) 온천에서 기생 끼고 농탕치다 편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60년 전 우리 수준은 그랬다. 인적자원이 이 지경에, 팔아먹을 천연자원도 없었다. 그래서 일제가 만든 군항(軍港)에 미군을 끌어들여 안보도 다지고 달러를 받아 맨주먹뿐인 군대까지 무장시키자는 일석이조의 꾀를 낸 것이다. 트루먼이 무시하는데도 자존심 센 이승만이 끝내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독립운동 시절 진주만 기지에서 본 미국 함대와 해군 때문이었다. 그때 받은 감명이 하도 깊어 그는 항상 ‘육해공(陸海空)’을 ‘해육공(海陸空)’으로 바꿔 불렀다.
 
  당시 우리에겐 함정이 36척 있었지만, 미국제 소해정(掃海艇) 몇 척 빼면 어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번듯한 전함(戰艦)은 이승만의 염원이자 해군의 바람이었다. 그 비원(悲願)으로 1949년 6월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가 발족했다. 해군이 봉급에서 성금을 떼자 아내들은 천막에서 작업복을 지어 팔았다. 이렇게 석 달간 1만5000달러를 모았다. 딱 중고 전함 한 척 값이었다. 전함구매단이 미국에 가서 1만8000달러를 주고 산 게 무게 450t짜리 구잠함(驅潛艦)이었다. 퇴역해 벌겋게 녹슨 배를 되살리려 구매단은 수리공·페인트공이 됐고 그해 12월 26일 오전 10시 명명식이 열렸다.
 
  백두산함은 가는 곳마다 동포를 울렸다. 마스트에 태극기가 처음 걸릴 때는 군인이, 포·레이더를 구하러 간 하와이에선 사탕수수밭 노동자가, 포탄 사러 간 괌에선 징용 갔다 미처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울었다. 처음엔 배가 너무 초라해, 나중엔 그래도 조국의 첫 전함이라는 뿌듯함이 눈물샘을 건드렸다. 백두산함은 진해에 도착한 한 달 반 뒤 6·25전쟁이 터지자 진가를 발휘했다. 부산항으로 접근하던 소련제 수송선을 대한해협에 수장(水葬)시킨 것이다. 거기엔 북한특공대 60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남한 항구 중 접안(接岸)시설은 부산에만 있었다. 백두산함이 없어 부산이 함락됐다면 한국에 온 100만 병력과 물자는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밀리던 국군은 뒤통수를 맞고 전멸하고 그와 함께 대한민국도 사라졌을 것이다. 해군과 군항은 이렇게 운명을 가른다. 문제는 우리 해군의 발전에도 상황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위에는 북한, 왼쪽엔 중국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한국 해군을 반나절 안에 궤멸시킨다는 전력의 일본이 있다.
 
  이 중 누구라도 제주 남방해로를 일주일만 틀어막아도 한국은 고사(枯死)한다. 원유·곡물·원자재가 그곳을 지나기 때문이다. 그런 요충이기에 군을 그렇게 싫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지 않았다. 거기서 종북(從北) 얼간이들이 날뛰고 겁쟁이 정권은 끌려다녔다. 백두산함의 넋이 살아 있다면 몇 줌 안 되는 김정일 추종 세력에 앞서 그들을 겁내 국민의 생명줄조차 못 지키는 비겁한 정권을 향해 분노의 포신(砲身)을 돌렸을 것이다.

 
경남 진해 해군기지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의 옛 모습.
  이렇게 분전한 손원일은 해군 첫 참모총장으로 6·25를 치렀고 휴전이 되기 한 달 전인 1953년 6월 30일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이후에는 초대 주서독대사를 지냈으며 1980년 2월 15일 타계해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아내로 ‘바다로 가자’ 같은 우리 군 사상 최초의 군가(軍歌)를 작곡한 홍은혜 여사는 100세를 넘기면서도 우리 해군을 돌보고 있다. 그런데 최근 고 손원일 제독과 관련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다. 전남대 노기욱 교수가 추적한 바로는 손원일은 17세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25년 4월 30일 중국 길림성에서 길림유자회(吉林幼者會)와 같은 해 11월 18일 여길학우회(旅吉學友會)를 조직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손원일 제독 같은 유명인사의 독립운동 경력이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던 것일까?
 
  노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그가 일제의 눈을 피해 가명(假名)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 발굴이 수준 이하였다는 뜻도 된다. 손원일의 독립운동은 두 갈래로 펼쳐졌다. ‘길림유자회’에서는 조선 청년들에게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여길학우회’에서는 ‘단군기념식’을 열어 민족정기를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었다.
 
  이 때문에 손원일은 일본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됐다. 그러자 손원일은 22세 되던 해인 1930년 7월 16일 중국해군부(中國海軍部) 시험에 응시해 해군보관(海軍補官)이 된다. 해군보관이 된 손원일은 세계 항해에 나서게 된다. 노 교수에 따르면 세계를 항해하면서 손원일이 모델로 꼽은 위인이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 때문인지 손원일이 해군을 건설할 때 첫 발언이 “충무공 정신에 살고 충무공 정신에 죽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구한말 조선 수군제도와 함께 폐지된 해군사관학교를 다시 설립했다. 그가 초창기 건조한 함정 이름도 ‘충무공정(艇)’이었다.
 
  1947년 2월 8일, 충무공정은 첫 항해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충렬사와 한산도 근해를 일주했다. 6·25 때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단독으로 통영을 탈환한 ‘통영수복’의 작전명도 ‘충무공작전’이었는데 작전이 성공리에 끝난 후 손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충무공께 신고합니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단독작전으로 통영을 수복했습니다.”
 
  훗날 충무공 사상연구소 이사장이던 노산 이은상(李殷相) 선생은 손원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손 제독, 당신은 우리나라 해군의 아버지이자 충무공 이순신의 진정한 후예야!” 그러면서 노산은 손원일 제독에게 ‘수향(水鄕)’이라는 호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해군 장병에게 내린 교시도 충무공을 연상시킨다. 6개의 항목을 인용해 보도록 한다.
 
  첫째, 군인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경애하자.
  둘째, 군인은 명령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자.
  셋째, 군인은 명랑 활발하고 신의를 지키자.
  넷째, 군인은 정치담을 말고 도별담을 폐지하자.
  다섯째, 군인은 충무공 정신에 살고 충무공 정신에 죽자.
  여섯째, 군인은 관품을 애호하고 물자를 절약하자.

 
  해군역사기록단 임성채 과장(예비역 대령)은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해군을 창설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신성인한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대한민국 해군 불멸의 정신으로 설정하고 평생을 통해 그것을 실천한 진정한 이순신 정신의 계승자였다. 그래서 오늘날 그는 ‘해군의 창설자’를 넘어, ‘해군의 아버지’라고 추앙되는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손원일 제독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려면 책 한 권도 부족할 정도다. 우선 부친 손정도 목사가 대단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그가 김일성이 일제 경찰에 붙들려 목숨이 경각을 다툴 때 손을 써 구해줬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다. 김일성은 생전에 그런 손 목사에게 고마움을 표했으며 손 목사의 아들 가운데 한 분을 북한으로 초청해 후대(厚待)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손 목사의 따님을 사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손원일 제독 역시 중국에서 선장이 된 뒤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액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전투함이었던 백두산함의 마스트가 해사에 보존돼 있다.
  김일성에 맞서 바다에서 나라를 지켰으니 손 제독 일가와 김일성의 은원(恩怨)도 상당하다. 이런 손 제독의 일화를 젊은 세대는 잘 알지 못한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손 제독의 이름은 지금 우리 해군에 살아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젤 잠수함 1번이 바로 ‘손원일함’이기 때문이다.
 
  해군은 우리 기술로 제작한 214급 잠수함에 초대 해군 참모총장이자 해군 창시자인 손원일 제독의 이름을 붙였다. 이 214급 잠수함은 초보적인 전략무기로 알려져 있다. 아마 지하에 계신 손 제독도 뿌듯하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어디 그뿐인가? 70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해방병단은 지금 7만여 장병과 세종대왕함-율곡 이이함-서애 유성용함 등 세 척의 이지스 구축함과 경항공모함으로 전용 가능한 독도함 등을 보유한 당당한 우리 해군의 모체가 됐다.
 
  변변한 전투함이 없어 미국에 고물 배를 구하러 떠났던 때와 달리 지금은 이역만리 해역까지 파병돼 국제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강한 해군으로 성장했다. 그런 해군의 전통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려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복이 아닐까 싶다. 최근 우리 해군은 동네북 신세가 됐다. 통영함 비리 때문이다. 통영함은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이 북한 몽금포항을 원점 타격하는 데 선봉에 선, 자랑스러운 군함이다.
 
  그런 유서깊은 이름을 이어받은 통영함이 비리로 얼룩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방위사업청에 파견된 영관급 장교 일부가 금품을 받고 고물 장비를 선적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직 해군 참모총장 2명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사실이 훗날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군이 방산 비리의 본산처럼 되면서 우리 해군의 사기는 지금 크게 저하돼 있다. 나는 비리를 발본색원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해군을 도매금으로 넘겨 난도질하는 데는 반대한다. 해군 자체를 부정한다면 우리의 바다는 누가 지키겠는가?
 
  그런가 하면 몇 해 전, 해군은 제주도에 기지를 마련하려다 좌파 세력의 총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슨 돌덩이를 살리겠다는 해괴망측한 핑계를 대며 우리의 생명선인 바다를 지키기 위한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그들은 훼방놓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273억원을 해군이 공사를 진행한 업체에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기도 했다.
 
  독자 여러분도 인사동에 나들이 나갈 기회가 있다면 윤보선 전 대통령 집 앞에 있는 안동교회부터 인사동 초입의 해방병단 표지석까지 살펴보시길 권한다. 혹시 남산에 등산가실 일이 있다면 남산 일대에 남은 해군의 유적을 보며 “아! 우리 해군이 이렇게 시작했구나”하고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손주나 아들과 동행한다면 더 없는 현장교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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