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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23〉 어윤중(魚允中)

경제 근대화를 설계한 경제통 개혁론자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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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 초기 일본·청나라 드나들며 국제정세 익혀
⊙ 서북경략사 재직 시 두만강-토문강 조사, 간도 영유권 주장
⊙ 갑오개혁·을미개혁에 참여해 재정·경제 근대화 추진, 아관파천 후 피살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경제·통상 전문 개화론자였던 어윤중.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재정과 통상 분야에서 경제개혁을 추진했던 당대의 온건파 엘리트 관료였다.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재직 시에는 청과의 통상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간도지방을 조선의 영역에 포함시키려 노력했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세가 변화되자 낙향하다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어윤중은 9세에 어머니, 1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 때인 1868년(고종 5) 지방 유생 50명에게 기회가 부여된 전시(殿試) 칠석제(七夕製)에 장원급제해 관리로 등용됐다. 이때 박지원과 그의 손자 박규수의 문집을 읽고 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실학과 대외개방론에 눈을 떴다. 박규수를 따르는 김홍집·김윤식 등과 어울리며 주변 정세에 일찍 눈을 떴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강화도 광성진을 지키며 미 해병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순무중군 어재연이 그의 친족이다. 어윤중은 1875년, 경상도 양산군수와 밀양부사를 겸임하던 시기에는 울산과 김해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에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백성들의 고충을 조사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1877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한편, 전라도 농민의 참상 원인이 주로 수취제도의 문란과 조세수탈에 있음을 지적했다. 현지 상황을 근거로 조세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조에 걸친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고종과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잡세의 혁파, 지세제도의 개혁, 환곡제도의 폐지, 삼수포세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등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개혁, 지방수령의 5년 임기 보장, 도량형의 통일, 조운선 제조, 역로(驛路)제도 개혁 등을 건의했다. 이 개혁안은 20여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기에 구체화된다.
 
 
  청·일 근대화 현장 시찰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
  그가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해 조선의 개혁·개방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할 때 조사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면서부터다. 그는 박정양·홍영식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재정·경제 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어윤중은 4개월 정도 일본에 머물면서 메이지 유신의 시설과 문물 등을 시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후 고종의 특명에 따라 일본에서 직접 청의 톈진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김윤식과 청에 유학 온 조선의 공학도(工學徒)를 만나 격려하는 한편 당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해관총독(海關總督) 주복(周馥) 등과 대미(對美)관계에 관해 회담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어윤중은 이런 보고를 했다. “지금 시국을 돌아볼 때 부강이 아니고는 나라를 보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일본)은 상하가 합심하여 오로지 경영에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청국은 일찍부터 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근래에 외국 사정에 밝아 크게 군사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미(朝美)수교 겪으며 청에 대해 비판적 인식 갖게 돼
 
  1881년 당시 청국의 외교수장인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조선 진출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홍장은 1879년, 고종에게 미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권고했다. 고종도 이용숙을 비밀리에 이홍장에게 보내 미국과 수교할 뜻이 있음을 전달했다.
 
  이홍장은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는 한편, 조약의 초안까지 준비하고 조선 측에 영선사(領選使)의 파견을 촉구하면서 톈진에서 협상할 것을 제의했다. 고종은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어윤중을 밀사로, 김윤식을 영선사로 비밀리에 톈진에 파견한 것이다.
 
  이홍장은 1881년 10월 어윤중과 회담을 가진 데 이어 12월에는 김윤식과 회담을 갖고, 조선 측이 조미수호조약 체결 협상을 이홍장에게 위임할 것과 조약상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屬國)’임을 명문화하는 데 대한 동의를 받아냈다. 조선 측이 동의한 것은 전통적인 조공(朝貢)체제와 새로운 공법체제를 조화시키는 한편, 청국을 ‘안보 우산’으로 삼아 조선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당시 온건개혁 노선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1882년 제물포에서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어윤중은 다시 청에 파견돼 이홍장 등과 회담했다. 청측은 종주국과 속국 관계를 들어 초안해 놓은 불평등조약인 조중수륙무역장정(朝中水陸貿易章程)의 체결을 요구했다. 어윤중은 이 불평등조약에 조인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종전의 청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을 바꾸게 된다.
 
 
  외교문제로 다투게 된 간도 영유권
 
1887년에 만들어진 백두산정계비 지도. 백두산정계비에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명시된 ‘토문강’이 어디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의 의견 불일치를 한눈에 보여준다.
  1882년,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 참의에 임명된 어윤중은 국가재정 확보에 힘을 쏟는 한편, 20개조로 된 정부기구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 때문에 민씨 척족과 집권 세력의 미움을 사서 서북경략사라는 변방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1883년 3월 청측과 중강(中江)무역장정을, 6월에는 회령통상장정을 체결하는 등 북방무역에서 조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북경략사로 재직하면서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豆滿江)의 국경지대를 조사, 숙종 때 세운 백두산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했다. 그리고 답사 결과를 토대로 토문강이 쑹화강 상류로 간도 지방은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어 청의 현지 관료에게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를 통해 국경을 획정하자고 제기했다.
 
  조선 정부도 청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이후 1885년부터 1888년에 걸쳐 3차례의 간도문제에 관한 조청 감계회담(勘界會談)이 개최되었으나 양측이 기존 입장을 고수해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초의 근대학교 원산학사(元山學舍)
 
원산 주민들과 관리들이 힘을 합쳐 만든 원산학사. 최초의 근대식 학교다.
  조선 정부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886년에 세워진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로는 Royal English School 또는 Royal College라고 표기)으로 알려져 있다.
 
  육영공원보다 3년 앞서 1883년(고종 20)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가 세워졌다. 당시 원산은 1880년 개항된 이후 일본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는 등 일본의 경제활동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1883년 덕원부사로 부임한 정현석이 일본에 대응하기 위한 근대적인 학교를 세우려 했다. 이 지역 책임자인 서부경략사 어윤중도 학교 건립에 적극 나섰다.
 
  설립기금은 덕원·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원산항의 통상을 담당하던 정헌시, 그리고 외국인 등이 참여해서 모았다. 1883년 8월에 학교 설립을 정부에 보고하여 정식 승인도 받았다. 설립 초기에는 학교를 문예반과 무예반(武藝班)으로 편성하였는데, 무예반은 정원 200명을 뽑아서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는 이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신정변에 연좌되어 굶어 죽은 스승 박원양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가 비판을 받아 귀향해야만 했다. 1893년 봄, 충북 보은(報恩)에 수만 명의 동학도가 교주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모여들었다. 보은은 어윤중의 고향이다.
 
  조정은 어윤중을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순무사로 임명해 보은으로 급파했다. 어윤중은 동학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동학도들은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주장했다. 어윤중은 조정의 관대한 처분을 약속했고 동학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다. 동학도를 비도(匪徒)라 칭하면서 탄압하는 분위기에서 어윤중은 장계를 올려 동학을 ‘비도(匪徒)’가 아니라 ‘민당(民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어윤중은 동학농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관료들과 재야 선비들로부터 식언을 했다는 빈축을 샀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어윤중이 장계에서 동학교도를 가리켜 비도라 하지 않고 민당이라 한 점을 비판했다.
 
 
  강직한 원칙주의자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내정(內政)개혁을 담당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영의정 김홍집으로 하여금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이 개혁내각에 어윤중은 탁지부(度支部)의 대신(기획재정부장관)에 임명된다. 내각은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되어 왔던 여러 제도 및 관습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재정·경제부문의 개혁은 어윤중이 중심이 되어 단행했다. 우선 국가재정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조세수납을 탁지부로 일원화했다. ‘신식화폐장정’을 의결하여 은본위제(銀本位制)를 채택하는 한편, 종래의 물납세제(物納稅制)를 금납제(金納制)로 대체하고, 전국적으로 도량형(度量衡)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과거부터 자신이 건의해 온 비리와 수탈로 얼룩진 조세개혁안을 시행했다.
 
  어윤중의 긴축정책과 조세개혁을 세간에서는 어윤중을 ‘전(田)조림(성씨 魚의 중간 부분인 田를 따서 붙인 별명)’이라고 부르면서 응원했다. 어윤중은 고종과 민비의 요청도 법에 어긋나면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본 측이 300만원의 차관을 일본화폐로 주려고 했지만, 어윤중은 은(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어윤중의 이러한 태도에 관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고종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군부대신 조희연을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대신들이 반대했다. 고종이 화를 참지 못하고 “대신 하나도 물리치지 못한다면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옥새를 집어던졌다.
 
  “짐은 임금이 아니니 경들이 이것을 가져가라.” 이때 어윤중이 일어나 말했다.
 
  “성인이 말하길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忠)으로써 섬긴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신들을 이렇게 대하시니, 장차 신들은 어떻게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바라건대 노여움을 푸시고 굽어 살피시어 공의를 펴소서.” 고종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전리품으로 만주의 요동반도를 점유하자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개입했다. 삼국간섭이다.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일본은 이미 수중에 넣었던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소위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으로 러시아를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시켜 세력균형을 이루자는 전략을 세웠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K. I. Veber)와 손을 잡고 친일파를 추방하고 친러파 이윤용과 이완용(이전에는 친미였으나 이때에는 친러로, 후에 친일로 변신)을 입각시킨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러시아와 당장에 일전을 결할 수 없었던 일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친러외교의 배후인 민비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1895년 8월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고종은 이제 궁궐에 있는 것도 불안했다. 독살을 피하기 위해 눈앞에서 딴 깡통 연유와 날달걀 외에는 먹지 않고, 미국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침실을 지키게 했다. 고종은 하루바삐 왕궁을 탈출하려고 했다. 이것이 친미파와 친러파 성향의 인사들이 주동이 돼1895년 11월 28일 발생한 춘생문 사건이다.
 
  어윤중은 현장에 나타나 거사에 참여한 군사들을 설득하였다.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고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이범진은 해외로 탈출했다. 한편, 일본 측은 이를 ‘국왕탈취사건’이라 규정하고 서양인도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면서 이를 기화로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전원 석방하는 데 이용했다.
 
 
  단발령과 아관파천
 
  ‘춘생문 사건’으로 친러파는 축출되고, 일본의 영향하에 김홍집을 주축으로 하는 제3차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은 1895년 7월부터 12월에 걸쳐 전문 수십 조에 달하는 개혁 법령을 반포하였다. 이른바 ‘을미개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중 11월 15일에 양력시행령과 함께 공포된 단발령(斷髮令)은 일파만파로 문제를 키웠다.
 
  단발령에 대해 학부대신 이도재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 직을 사임하였다. 원로 김병시도 단발령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다.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은 단발을 강행하려 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을 단호히 거부했다.
 
  한편, 두 달 전 을미사변 때문에 시작된 의병운동은 단발령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재야유림 및 전직관료의 주도로 전개된 의병운동은 다양한 항일운동을 촉발시켰다. 일본의 횡포에 불만을 품어 온 전국의 유생, 농민, 춘생문 사건 때 흩어진 친위대 출신의 군인, 동학교도들이 곳곳에서 합세했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했다. 이때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긴 틈새를 이용해 해외로 탈출했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 등 친러 인사들과 고종의 파천(播遷) 계획을 다시 모의했다.
 
  고종이 동의하자 러시아는 1896년 2월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토록 했다. 그리고 다음 날 11일 고종은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른다.
 
 
  ‘어비(魚肥)울이’ 마을에서 타살
 
  파천을 성공시킨 친러파는 고종을 동원해 김홍집 ‘친일내각’을 응징했다. 단발령도 폐지하고 을미사변 가담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일본의 망명 제의를 거절하고 고종을 만나러 가다가 경복궁 앞에서 성난 민중에 의해 타살됐다.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참형되었다. 놀란 내무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외무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어윤중도 일본 측의 망명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하고 고향인 충북 보은(報恩)으로 낙향하기로 하고 여인이 타는 가마로 위장한 행장을 꾸렸다. 일행은 날이 저물자 안성과 용인 경계에 있는 마을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어윤중이 마을 이름을 알아보니 여기 사람들은 ‘어비(魚肥)울이’라고 부르는데 외지에서는 ‘어사리(魚死里)’라고 부른다고 했다. 원래는 냇물이 좋아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어비울이인데, 살찐 고기가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어사리라는 말이 걸린 어윤중은 행장을 챙겨 이웃 송전리로 옮겨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어비울이 마을 사람들은 여장한 과객이 어윤중임을 알아챘다. 이 사실은 송전리까지 퍼져 그 마을에 사는 정원로와 그의 집에 식객으로 와 있던 유진구에게 알려졌다. 유진구는 궁내부 순사였는데 춘생문 사건 당시 거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추격을 피해 이곳 정원로의 집에 숨어 있다가 어윤중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구는 이진호의 배신과 어윤중 때문에 춘생문 거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참에 그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던 것이다.
 
  정원로와 유진구는 동네 청년들을 이끌고 어윤중의 가마를 추적했다. 마침내 이들은 어윤중 일행이 처음 묵어가려 했던 어비울이에서 일행을 붙잡았다. 어윤중은 몽둥이에 맞아 무참하게 타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장작더미에 얹혀 태워졌다. 이때가 1896년 2월, 그의 나이 47세였다.
 
 
  황현, “세상을 구제할 만한 인재”
 
어윤중을 높이 평가한 매천 황현.
  어윤중이 설계한 경제개혁의 뿌리는 박지원의 ‘이용후생’과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윤중은 박지원의 개방적 중상주의(重商主義)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손자 박규수의 문호개방 ‘근대화론’을 계승해서 생산력을 증대하고 화폐경제를 발달시킬 수 있는 국가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한 경제 근대화를 설계했다.
 
  이러한 근대화 개혁론은 성공하지 못했다. ‘위로부터의 혁명’인 갑신정변도, 10년이 지나 ‘밑으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봉기도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개혁 노력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외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조선 내부의 문제도 적지 않다. 조선 왕정은 개혁을 위해 절대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외세에 의존해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이에 편승한 ‘권력 집착형’ 정치권의 갑론을박(甲論乙駁)과 이전투구(泥田鬪狗)는 개혁 응집력을 분화시키면서 스스로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진정한 이용후생의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 노력이 자체적으로 제기되고 시도되었지만 이를 소화해 내지 못한 조선은 끝내 망국의 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어윤중의 사망 소식을 들은 황현은 “어윤중은 김홍집과 함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인재로 칭해졌다. 그가 살해된 후 개화에 앞장설 사람이 없음을 모두 한탄했다”며 아쉬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권력에 편승하지도, 권력을 위해 투쟁하지도 않았다. 수구 왕정파도 급진 정변파도 아니었으며 더욱이 외세에 의존하는 친청파(親淸派)도, 친일파(親日派)도, 친로파도(親露派)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국민들에게 상당히 신뢰받던 유능하고 시대를 앞서간 명망 있는 엘리트 관료였다. 집권세력이 거부감을 갖고 있던 민감한 조세개혁도 단호히 조치하고 그들로부터의 외압을 거부한 강직한 성품의 원칙주의자였다고 평가해 마땅하다. 아울러 개혁을 외면하고 권력에 편승해 계속 분화하는 오늘날의 정치·사회현상을 돌아보면서 어윤중이야말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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