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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22) 유길준(兪吉濬)

근대화 개혁의 이론적 토대 마련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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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일본·미국 유학생으로 일어·영어 가능한 유학파 1세대
⊙ 《서유견문》은 한국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제정치학 교본
⊙ 양절체제兩截體制, 중립화론 주장해 조선의 외교적 활로 모색
⊙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균형잡힌 개화노선 추구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19세기 말 조선에서 쇄국주의를 비판하는 근대적 개방론이 등장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에 의해 선도되고 김옥균, 박영효 등 세상의 변화를 느낀 젊은 양반 자제들에 의해서다. 이들 개혁세력은 청(淸)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점진적 개혁노선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성공모델을 추구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적 개혁노선으로 분화된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근대화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정립한 이가 유길준(兪吉濬·1856~1914) 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선각자였다. 조선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유학했으며 최초로 국한문(國漢文) 혼용 신문과 서적을 발간했다. 그는 일어와 영어로 말하고 쓸 줄 아는 ‘유학파’ 1세대로, 한문 지식이 해박했음에도 국한문 혼용체로 저술한 최초의 ‘사대부’였다. 또한 유길준은 서학과 동학을 접목시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정립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박규수와의 인연
 
  유길준은 조선의 명문가 출신으로 서울 북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 이경직에게서 한문을 배우면서 양반 자제들과 어울렸다. 그가 당대의 실세 가문 자제인 민영익과 함께 공부하면서 인연을 맺은 것이 그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1873년 17세에 당시 근대화 개혁사상의 선구자로서 젊은이들을 교육 중이던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가 《과정록(過庭錄)》에 전해오고 있다. 유길준은 유한준의 자손인데 박규수의 조부 박지원과 유한준은 당대 쌍벽을 이루던 문우(文友)였다. 박지원이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며 유한준을 혹평하자, 유한준은 연암에게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 하여 둘은 끝내 원수가 됐다. 박규수가 유길준에게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구원(舊怨)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하여 그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박규수를 스승으로 예우하게 됐다고 한다.
 
  유길준은 박규수의 문하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뒤로 실학과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한다. 그는 이 사랑방 모임에서 박영효, 김옥균 등과 사귀면서 근대화 개혁세력에 합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문명개화론’을 배우다
 
개화파를 자극했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1881년 5월, 조선은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조정에서는 이 기회에 메이지 유신 이후 발전한 신(新)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배우게 하려고 유능한 청년들을 선정해 일본으로 보냈다. 이때 유길준은 민영익의 도움으로 유정수, 윤치호 등과 함께 수행원에 합류해 일본에 갔다. 사절단은 3개월 여정으로 일본을 돌아보고 귀국했지만 유길준은 근대지식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남았다.
 
  이렇게 해서 유길준은 최초의 일본 유학생 중의 한 명이 됐다. 그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요람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 후쿠자와가 저술한 《서양사정(西洋事情)》과 《문명논지개략(文明論之槪略)》은 당시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882년 7월,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임오군란의 진사사절단이 일본에 왔다. 김옥균과 서광범을 비롯한 개혁파 인사들도 함께 방문했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은 후쿠자와를 만나 그와 의기투합했다. 유길준은 사절의 통역을 맡아 이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귀국 후 유길준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오늘날의 외교부)에 들어가 일하면서 다른 개혁파 동료들과 함께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만들어 상신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경고하는 등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책도 건의했다. 《한성순보(漢城旬報)》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도 창간했다. 박영효가 한성부윤이 되면서 그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국민계몽을 위해 국한문 혼용체로 신문을 발간했다는 점이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 보빙사 일행이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홍영식·민영익·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최경석·유길준·고영철·변수.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민영익은 미국으로 가는 보빙사(報聘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유길준을 수행원으로 대동했다. 보빙사 일행은 40여 일 일정으로 미국을 시찰한 뒤 귀국했지만, 유길준은 다시 민영익의 후원으로 미국에 남아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다. 조선에 비하면 청국과 일본의 해외유학은 훨씬 앞섰다. 청국 유학생은 1850년대에, 일본 유학생은 1860년대에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바 있다.
 
  유길준이 미국 유학을 시작할 당시에는 아직 공사관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일본에서부터 면식이 있던 사회진화론자 모스(Edward Morse) 박사를 찾아갔다. 유길준은 그의 집에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그의 사회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8개월 후, 유길준은 더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영어를 배운 지 7개월 만에 영문 편지를 쓸 정도로 어학 능력이 남달랐다고 한다.
 
  한창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그에게 1884년 12월, 충격적인 갑신정변 소식이 들려왔다. 정부는 유학생들의 귀국을 지시했다. 유길준도 연락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로에 유럽을 경유하면서 서양 정세를 살피고 견문을 넓혔다(유길준이 유학했던 미국 더머 아카데미는 120여 년이 지난 2003년, 유길준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에 앞서 유길준은 일본에 들러 망명한 김옥균과 재회했다. 김옥균은 너무 일본에 의지한 게 큰 실책이었다고 자책하면서 귀국을 만류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존경해 온 후쿠자와도 지금은 ‘아시아 연대론(連帶論)’을 부정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랜 연금생활에서 탄생한 《서유견문(西遊見聞)》
 
유길준의 《서유견문》.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제정치학 교본이다.
  김옥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길준은 1885년 12월 귀국했다. 당시 갑신정변의 실패로 주도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유길준도 7년간의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뒤에는 서울 가회동에 위치한 민영익의 별장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연금생활을 했다. 이로 미루어 그는 유폐된 것이라기보다는 민영익과 한규설이 유길준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가옥’에 그를 연금했던 것 같다. 당시 유길준은 실세 민영익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속에서 6년여에 걸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완성했다. 연금 상태였던 관계로 바로 책이 출판되지는 못하고 1895년에 후쿠자와의 출판사를 통해 일본에서 발간되었다. 《서유견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인쇄서이다. 《한성순보》에 이어 다시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다는 점에서 그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입각한 근대화론과 국민계몽 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20편으로 구성된 《서유견문》은 5대양 6대주의 지리학적 개관을 시작으로 국가와 정부, 정치와 정당, 교육과 군사, 화폐와 무역 등 경제, 개화의 등급, 외국의 예의와 풍속, 증기기관과 전신기, 회사, 미국과 영국의 큰 도시들에 대한 소개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이다. 서양의 사회적 배경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평을 추가하여 개혁사상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국제인문지리서이자 서양의 정치, 사회, 교육 제도 등을 소개하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국제정치학 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국한문 혼용체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서유견문》에서 유길준은 국가의 성립조건과 국권의 핵심으로 일국 주재권, 일국 독립권, 일국 동등권을 제시하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서양의 공법적인 국제질서를 상정했다. 또한 유길준은 대표적인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 군주명령제, 귀족제, 입헌군주제, 공화제의 5가지로 분류하고 조선은 군주명령제에 가장 가까운데 이 체제에선 국민들이 국가에 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조선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본다고 했다.
 
 
  조공(租貢)체제와 공법(公法)체제를 절충한 양절체제론(兩截體制論)
 
  이어 유길준은 조선이 독립국이며 청의 속국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조선과 같이 주권이 불완전한 국가들을 세 가지 형태로 분류했다. 첫째는 증공국(贈貢國) 또는 조공국(朝貢國)이다. 둘째는 대내외적으로 자주권이 전혀 없는 속방(屬邦)이다. 셋째는 수호국(受護國)으로 독립국이지만 자위 수단으로 다른 나라의 보호를 받는 약소국의 경우라고 정의했다.
 
  조선은 독립국으로 청의 속방이 아니며, 청과의 관계에서는 증공국이면서 수호국의 이중적 관계에 있는데, 이 관계를 두 개로 접혀 있는 ‘양절체제(兩截體制)’라고 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청의 관계는 상호 독립국으로 전통적 조공관계와 근대적인 국제법 관계를 공유하는 이중적 양절관계라는 것이다.
 
  조선은 청국이 조선의 대미국 외교상의 자주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제시한 ‘영약삼단(另約三端)’에 따라 주미공사 박정양의 ‘자주외교’를 문제 삼자 양절체제의 개념을 현실외교에 적용했다. 조선과 청국 사이는 불평등한 사대(事大)의 관계이나 조선과 타국(미국)은 상호 자주독립국으로 동등한 교린(交隣)의 관계에 있는 양절체제이므로 조선이 미국과 자주적인 외교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개념이다. 이후 이 논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조선의 중립화론 주장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은 러시아를 막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아시아의 여러 대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정략도 될 것이다. … 오직 중립 한 가지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이다.”
 
  유길준이 저술한 《중립론(中立論)》에 나오는 말이다. 유길준은 주변 열강들의 정책을 분석한 후, 일본, 러시아, 미국, 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와 깊은 의존관계를 갖는 것을 경계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열강들 사이에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청국이 주도하고 관련국들이 보장하는 조선의 중립화를 제시했다.
 
  청국이 조선의 중립을 주도해야 하는 이유는 조선이 침략을 받을 경우 청은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므로 조선을 중립화시켜 열강의 침략 밖에 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 것이다. 결국 양절체제의 현실을 감안하여 청국을 이용해 중립국이 되어 조선의 자주권을 유지하려는 방책이다. 그는 이미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순망치한(脣亡齒寒)’ 전략과 ‘완충지대’의 현대적 개념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립론도 제안으로 끝났을 뿐 실현되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의 집권층은 외세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천진조약(天津條約)으로 청일 간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갑오개혁(甲午改革)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의 보호국화를 결정하고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한 후, 대원군을 앞세워 신정권을 수립했다. 그러고 내정개혁을 담당할 군국기무처를 설치해 영의정 김홍집으로 하여금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개혁 추진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이 갑오개혁파, 갑신정변파, 정동파(친미파), 대원군파, 민씨왕정파 등으로 나뉘어 다툼으로써 개혁 추진에 차질을 초래하게 된다. 이 와중에 유길준은 김홍집을 직접 보좌하면서 ‘갑오개혁’으로 불리게 되는 이 내정개혁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좁히기 어려운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인 개혁방안들을 폭넓은 지식과 침착한 태도로 조정하여 ‘내정의 신법’을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혁은 1894년 7월~1896년 2월 기간에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제1차 개혁 중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되어 왔던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 노비법(奴婢法)의 혁파 등은 수구적인 흥선대원군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대원군은 적손자인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청군과 내통했다.
 
  그러자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대원군을 퇴출시키고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그는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고종과 민비의 반발을 사 일본으로 다시 망명했다. 그래서 제2차 개혁도 김홍집 내각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3차 개혁 또한 민비의 친러외교로 일본세력이 퇴조한 가운데 다시 김홍집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서도 김홍집 내각은 계속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을미사변의 미진한 사후처리와 단발령의 무리한 실시는 보수 유생층과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播遷)하면서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과 일본 망명
 
  을미사변 후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이완용 등의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김홍집과 어윤중은 백주에 살해되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귀양,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0년, 그는 일본에서 당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선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손잡고 쿠데타를 계획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는 김옥균이 갇혀 있던 일본의 남해 고도(孤島) 오가사와라 섬에서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일제는 영국, 미국과 손을 잡고 끝내 러일전쟁까지 치르면서 1905년 11월, 마침내 불법적인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설치했다. 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되자 뜻을 이루지 못한 유길준은 기독교에 귀의했다. 한편으로는 미국 유학 시에 영향을 받은 사회진화론에 따라 그는 사회계몽운동을 통해 조선사회를 진화시켜 나가기로 작정했다. 당시의 대세였던 일본의 ‘실력양성론’에 주목한 것이다.
 
  1907년 6월,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일제가 법령제정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 임명권 등을 갖는 한일신협약을 제시했다. ‘정미7조약’이다. 유길준은 《신지신문(新知新聞)》에 비판기사를 발표하는 한편, 일본의 총리대신에게 정미7조약은 무효라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는 등 이 조약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이 하사한 남작 작위 거부
 
유길준이 국민계몽운동을 위해 설립한 흥사단 취지서.
  정미7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면서 일본 망명객들이 고국으로 속속 돌아왔다. 1907년 8월, 일본은 망명객 모두에게 벼슬을 주었지만 유길준은 이를 거부했다. 그동안 유길준을 친일파로 생각했던 고종은 그에게 ‘용용봉정(龍龍鳳亭)’을 하사했다.
 
  유길준은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이 교육이 보급되지 못해 백성들이 개화하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국민들을 근대적 지식과 도덕을 갖춘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론을 제창하고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다. 고종은 1만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배려했다.
 
  흥사단을 통해 유길준은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대중교육을 위해 어려운 한문 대신 한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세운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직접 저술하여 국어 문법의 정리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는 교과서를 스스로 편찬하여 보급했고, 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도 설립했다. 《이태리 독립운동사》 등 유럽의 역사책 또는 멸망사를 써서 구국의 정신적 귀감으로 삼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일제는 한국을 강제병합했다. 그리고 병합에 협조한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제수했다. 유길준에게는 남작(男爵)을 제시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해 조선 사대부로서의 지조를 지켰다.
 
  그가 설립했던 흥사단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1913년 안창호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내세우면서 재건한다. 그는 동료인 박은식, 신채호처럼 청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국민계몽을 통한 근대의식의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 아비는 아무 한 일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동도서기론을 정립한 ‘유학파 사대부’
 
유길준이 공부했던 더머 아카데미의 교실.
  유길준은 메이지 유신으로 성공한 일본을 발전모델로 삼았지만, 전통적 유교사상을 배격하고 서구적 근대화를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과는 생각을 달리했다. 유길준의 근대화는 자기정체성은 지키면서 서구문명의 장점을 수용해 개혁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유학(留學)을 통해 동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학을 조화시킨 동도서기의 근대화론을 설계한 것이다.
 
  그는 시의적절한 개혁을 위해서 전통적 유교 윤리 체계를 보수해야 하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수구당은 ‘개화의 원수’로, 남의 겉모습만 따르는 자는 ‘개화의 병신’이라고 공히 비판했다. 전통적 실학과 근대적 사회진화론을 접목시킨 그의 이러한 노선을 ‘조화와 균형’으로 함축해 본다. 그는 문체에서도 동서고금의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국한문 혼용체로도 표출되었다. 이러한 그의 조화와 균형은 국제정치와 외교의 영역에서도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구한말 만국공법이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사대질서와 근대적인 주권평등질서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이미 아시아와 서구 양측에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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