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이츠의 시 〈첫사랑〉은 달을 모티프로 한 시다. 시인은 수줍은 마음으로 ‘그녀(달)는 한동안 걷고 잠깐은 얼굴 붉히며 / 또 내가 다니는 길에 서 있다’고 썼다.
첫사랑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정현종 번역)
비록 떠가는 달처럼
미의 잔인한 종족 속에서 키워졌지만,
그녀는 한동안 걷고 잠깐은 얼굴 붉히며
또 내가 다니는 길에 서 있다
그녀의 몸이 살과 피로 된 심장을
갖고 있다고 내가 생각할 때까지.
하나 나 그 위에 손을 얹어
냉혹한 마음을 발견한 이래
많은 것을 기도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매번 뻗치는 손은 미치광이 같아
달 위를 움직이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웃었고, 그건 나를 변모시켜
얼간이로 만들었고,
여기저기를 어정거린다,
달이 사라진 뒤
별들의 천공운행(天空運行)보다 더
텅 빈 머리로.
First Love
by William Butler Yeats
Though nurtured like the sailing moon
In beauty's murderous brood,
She walked awhile and blushed awhile
And on my pathway stood
Until I thought her body bore
A heart of flesh and blood.
But since I laid a hand thereon
And found a heart of stone
I have attempted many things
And not a thing is done,
For every hand is lunatic
That travels on the moon.
She smiled and that transfigured me
And left me but a lout,
Maundering here, and maundering there,
Emptier of thought
Than the heavenly circuit of its stars
When the moon sails out.
이 시에서 사랑은 달이다. 사랑하는 그녀는 달이다. 그 달은 ‘아름다움의 잔인한(beauty's murderous)’ 종족 출신이다. 달은 그냥 서 있거나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인다. 떠다닌다. 시인은 1행에 ‘the sailing moon’이라고 썼다.
첫사랑의 감정은 달의 운행(sail)이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밤마다 달빛은 부서져 은빛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달 가루가 안개처럼 피어나고 들꽃은 달빛에 베여 아름다운 비명을 지른다. 그녀를 생각하다 달을 올려다보니, 그녀가 달처럼 보이고, 달이 살과 피로 엉킨 심장을 가진 것(her body bore a heart of flesh and blood)처럼 느껴진다. 나는 달빛으로 출렁이는 길 위에서 수줍게 달에게,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싶다.
달은 차오르다가 어느새 몰락한다. 첫사랑은 그렇게 아름답고 잔인하다. 나는 그녀의 냉담함 앞에 많은 기도(I have attempted many things)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달(그녀) 위를 그냥 떠다니는 얼간이(lout), 바보, 머리 푼 미치광이, 백수광부와 같다. 어느새 살과 피로 엉킨 심장의 달은, 하얗게 질린 낮달처럼 변한다.
세상이 나를 비웃고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 사랑은 이지러진 달처럼 사라진다. 방황하는(Maundering here, and maundering there) 나를, 천공의 별들이 하얀 램프를 들고, 내 텅 빈, 머리를 쓸쓸히 내려다본다.
첫사랑은 아름답고 잔인한 감정
〈첫사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5)의 경험이 담긴 시로 알려져 있다. 예이츠는 모드 곤(Maud Gonne, 1866~1953)이란 여성을 1889년 처음 만나 사랑했고 그녀를 숭배했다. 모드 곤은 감수성 짙은 시인과 달리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였고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다. 예이츠는 1891년 청혼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녀가 결혼하던 날, 시인은 이렇게 썼다.
〈번개와 함께 당신이 내게서 떠나던 날 / 내 눈은 멀었고 / 내 귀가 안 들리게 된 바로 그날.〉
오죽하면 이별한 날을,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날’이라 썼을까. 몇 년 뒤 모드 곤이 이혼하자 다시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시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는 순수한 열정과 사랑의 실패는 예이츠의 시적 감성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예이츠에게 사랑에 관한 시가 유달리 많은 것도 첫사랑의 상처에 기인한다. 대개가 설렘과 슬픔이 담겨 있다.
김소월(金素月, 1902〜1934) 시인의 〈첫사랑〉도 달이 모티프다. 1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 내가 만약 달이 된다면 / 지금 그 사람의 창가에도 / 아마 몇 줄기는 내려지겠지〉
달빛이 되어 사랑하는 이의 창가에 내리고픈 소월의 연정은, 시 〈먼 후일〉에 극적으로 그려진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예이츠에게나 소월에게나 첫사랑의 감정은 ‘사랑의 영원한 현재성’에 닿아 있다. 그 감정은 어제도 오늘도 잊히지 않는다. 잊지 못하는 감정이 너무 잔인해 아름답게 느껴지는 모순덩어리, 그게 첫사랑이다.(첫사랑이 이뤄져 결혼까지 이어져도 첫사랑이 아름다울까?)
지금은 소설가로 전업한 한때의 시인 장정일의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 〈첫사랑〉이란 시가 있다. 이 시는 어투가 너무 진지해 우스꽝스럽다.
〈당신은 강선실을 압니까 / 나는 강선실을 알고요 / 그녀 마음도 압니다 / (중략) 나는 강선실을 찾고요/ 꿈 속에도 그립니다 / 꿈에도 다시 찾기지 않는 그대 / 나는 강선실에게 가야 합니다 / (중략) 세상을 뒤져 그대를 찾으려 합니다 / 후생에 태어나도 그대를 만나렵니다 / 아름답고 슬프던 그대 / 나는 강선실을 찾아야 합니다 / 그녀는 나의 첫사랑 / 당신은 첫사랑을 만났습니까〉
시는 은유이고 상징인데, 시인은 대놓고 ‘강선실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첫사랑의 이름을 세상에 공개한 시인의 마음이 ‘웃프게’ 느껴진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PS-필자의 글을 읽은 큰딸이 이렇게 말한다. “아빠도 첫사랑이 있어? 깔깔깔.” 비웃음인 것 같아 말없이 따라 웃는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정현종 번역)
비록 떠가는 달처럼
미의 잔인한 종족 속에서 키워졌지만,
그녀는 한동안 걷고 잠깐은 얼굴 붉히며
또 내가 다니는 길에 서 있다
그녀의 몸이 살과 피로 된 심장을
갖고 있다고 내가 생각할 때까지.
하나 나 그 위에 손을 얹어
냉혹한 마음을 발견한 이래
많은 것을 기도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매번 뻗치는 손은 미치광이 같아
달 위를 움직이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웃었고, 그건 나를 변모시켜
얼간이로 만들었고,
여기저기를 어정거린다,
달이 사라진 뒤
별들의 천공운행(天空運行)보다 더
텅 빈 머리로.
First Love
by William Butler Yeats
Though nurtured like the sailing moon
In beauty's murderous brood,
She walked awhile and blushed awhile
And on my pathway stood
Until I thought her body bore
A heart of flesh and blood.
But since I laid a hand thereon
And found a heart of stone
I have attempted many things
And not a thing is done,
For every hand is lunatic
That travels on the moon.
She smiled and that transfigured me
And left me but a lout,
Maundering here, and maundering there,
Emptier of thought
Than the heavenly circuit of its stars
When the moon sails out.
이 시에서 사랑은 달이다. 사랑하는 그녀는 달이다. 그 달은 ‘아름다움의 잔인한(beauty's murderous)’ 종족 출신이다. 달은 그냥 서 있거나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인다. 떠다닌다. 시인은 1행에 ‘the sailing moon’이라고 썼다.첫사랑의 감정은 달의 운행(sail)이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밤마다 달빛은 부서져 은빛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달 가루가 안개처럼 피어나고 들꽃은 달빛에 베여 아름다운 비명을 지른다. 그녀를 생각하다 달을 올려다보니, 그녀가 달처럼 보이고, 달이 살과 피로 엉킨 심장을 가진 것(her body bore a heart of flesh and blood)처럼 느껴진다. 나는 달빛으로 출렁이는 길 위에서 수줍게 달에게,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싶다.
달은 차오르다가 어느새 몰락한다. 첫사랑은 그렇게 아름답고 잔인하다. 나는 그녀의 냉담함 앞에 많은 기도(I have attempted many things)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달(그녀) 위를 그냥 떠다니는 얼간이(lout), 바보, 머리 푼 미치광이, 백수광부와 같다. 어느새 살과 피로 엉킨 심장의 달은, 하얗게 질린 낮달처럼 변한다.
세상이 나를 비웃고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 사랑은 이지러진 달처럼 사라진다. 방황하는(Maundering here, and maundering there) 나를, 천공의 별들이 하얀 램프를 들고, 내 텅 빈, 머리를 쓸쓸히 내려다본다.
첫사랑은 아름답고 잔인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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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이츠가 사랑한 여인 모드 곤. |
〈번개와 함께 당신이 내게서 떠나던 날 / 내 눈은 멀었고 / 내 귀가 안 들리게 된 바로 그날.〉
오죽하면 이별한 날을,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날’이라 썼을까. 몇 년 뒤 모드 곤이 이혼하자 다시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시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는 순수한 열정과 사랑의 실패는 예이츠의 시적 감성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예이츠에게 사랑에 관한 시가 유달리 많은 것도 첫사랑의 상처에 기인한다. 대개가 설렘과 슬픔이 담겨 있다.
김소월(金素月, 1902〜1934) 시인의 〈첫사랑〉도 달이 모티프다. 1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 내가 만약 달이 된다면 / 지금 그 사람의 창가에도 / 아마 몇 줄기는 내려지겠지〉
달빛이 되어 사랑하는 이의 창가에 내리고픈 소월의 연정은, 시 〈먼 후일〉에 극적으로 그려진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예이츠에게나 소월에게나 첫사랑의 감정은 ‘사랑의 영원한 현재성’에 닿아 있다. 그 감정은 어제도 오늘도 잊히지 않는다. 잊지 못하는 감정이 너무 잔인해 아름답게 느껴지는 모순덩어리, 그게 첫사랑이다.(첫사랑이 이뤄져 결혼까지 이어져도 첫사랑이 아름다울까?)
지금은 소설가로 전업한 한때의 시인 장정일의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 〈첫사랑〉이란 시가 있다. 이 시는 어투가 너무 진지해 우스꽝스럽다.
〈당신은 강선실을 압니까 / 나는 강선실을 알고요 / 그녀 마음도 압니다 / (중략) 나는 강선실을 찾고요/ 꿈 속에도 그립니다 / 꿈에도 다시 찾기지 않는 그대 / 나는 강선실에게 가야 합니다 / (중략) 세상을 뒤져 그대를 찾으려 합니다 / 후생에 태어나도 그대를 만나렵니다 / 아름답고 슬프던 그대 / 나는 강선실을 찾아야 합니다 / 그녀는 나의 첫사랑 / 당신은 첫사랑을 만났습니까〉
시는 은유이고 상징인데, 시인은 대놓고 ‘강선실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첫사랑의 이름을 세상에 공개한 시인의 마음이 ‘웃프게’ 느껴진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PS-필자의 글을 읽은 큰딸이 이렇게 말한다. “아빠도 첫사랑이 있어? 깔깔깔.” 비웃음인 것 같아 말없이 따라 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