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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20) 박영효(朴泳孝)

개혁과 권력 사이를 오가다 일본 귀족으로 변절한 조선의 부마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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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옥균과 갑신정변 일으킨 신진 개혁관료
⊙ 한일 강제합병 이후 중추원 부의장, 일본 귀족원 의원 지내
⊙ 인간의 신념과 권력의 불행한 조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1872년(고종9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철종의 부마(駙馬)가 되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그러나 3개월 만에 공주가 요절하면서 영광과 좌절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김옥균(金玉均)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체로 참여하는 등 근대화 운동에 앞장선 신진 개혁관료였다. 그러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혼돈 속에서 그는, 전통과 근대라는 이중의 부조리를 체현하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일본의 문명개화론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으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질과 정한론(征韓論)을 간과한 채, 결국 일본의 조선 병탄에 이용당하는 그릇된 선택을 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며 변절의 생을 마감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조선의 개혁 꿈꿔
 
박영효는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ㆍ왼쪽),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등과 가까운 일족이다.
  박영효는 조선 후기의 명문가 반남박씨(潘南朴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판서 박원양(朴元陽)으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비롯해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 등과 가까운 일족이다. 당시 박규수는 역관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과 함께 조선의 개혁, 개방을 주도하면서 그의 집 사랑방 모임을 통해 유능한 청년들에게 근대화 개혁사상을 교육했던 대표적 근대화 운동 1세대이다.
 
  12살에 홀아비가 된 박영효는 14살 때인 1875년경부터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근대화 개혁 논의와 국제관계의 변화 등을 학습했다. 그는 이 사랑방 모임에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과도 교우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박규수 사후(死後) 오경석과 유홍기의 지도를 받았다.
 
  젊은 나이의 박영효는 서양의 문물과 국제관계의 변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주변정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는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의 개혁을 이루는 한편, 전통적 사대질서를 청산하고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1870년대 후반부터 박영효는 김옥균 등 사랑방 교우들과 함께 개혁세력을 조직화해서 낡은 국정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구상하면서 영국과 일본의 대조선 정책을 파악해 나가는 한편, 일본통인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주변정세를 탐지하고 일본과의 비공식적 인적 교류 채널도 형성해 나갔다.
 
  한편, 고종의 친정(親政) 이래 추진해 온 조선의 대외 개방정책은 1880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계기로 위정척사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영효 등은 영국과의 국교수립을 성사시키려 했는데, 영국 측의 소극적 반응과 밀사 역할을 하던 이동인이 실종되면서 양국 간의 직접 교섭은 진전되지 못했다.
 
 
  반청·친일의 계기가 된 수신사
 
  조선은 1882년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 등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로써 서양 열강이 주도하는 공법체계의 국제사회에 편입돼 형식적으로는 자주독립 국가가 됐다. 그러나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자 친청사대 노선을 견지하던 민씨 외척의 수구파는 청국에 진압을 요청했는데, 청군이 국내에 진입하면서 조선의 독립적 위상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군란에 개입한 청은 조선이 청의 속방(屬邦)임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면서 1882년 10월 체결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에 이를 명문화했다. 조선 국왕의 위상은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동격으로 격하됐고, 통상 분야에서는 청의 배타적 경제적 이득도 보장했다.
 
  박영효 등 신진 소장 개혁파는 수구세력의 이러한 정책과 태도가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을 침해한 행위로 인식했다. 친청 수구세력의 교체와 청의 간섭 배제를 개혁의 우선 목표로 설정하게 된다.
 
  박영효에게 일본 나들이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임오군란 뒤 일본과 체결한 제물포조약 이행을 위한 수신사로 임명돼 방일한 것이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50만원의 손해배상금 문제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예정 체류 기간은 약 1개월이었다. 하지만 불과 5000원밖에 안 되는 체류경비로 인해 일본 정부의 보조를 받았다. 당시 조선의 재정은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 체류 동안 일본의 문물제도와 산업현장 등 근대화 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비약적인 근대화를 이루어 낸 메이지 유신을 조선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 유신을 탄생시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의 운명적 접촉도 갖는다. 박영효 등은 그를 통해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 교섭을 추진하고, 그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계획도 세웠다.
 
 
  박영효가 처음으로 태극기를 제작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때 사용한 ‘이응준 태극기’(맨위), 현존하는 국기 중 가장 오래된 ‘주이 태극기(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ㆍ가운데)’, 1890년 고종이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데니(O.N.Denny)에게 하사한 ‘데니 태극기’(맨아래).
  박영효의 수신사 행보와 관련해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태극기이다.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국기인 태극팔괘의 태극기를 최초로 제작해 사용했다는 기록과 연구가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태극기의 호칭과 관련해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의 별칭이지 국기 그 자체는 아니다. 태극기의 호칭은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제작, 사용했다는 기록과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따져봐야 한다.
 
  다음으로, 조선의 국기 제작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의 조정에서 국기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6년(고종13년) 운요호 사건 때 일본 측이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가하였는가”라고 트집을 잡은 것이 계기였다. 조선도 국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1882년 5월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표 슈펠트(Robert W. Shufeldt)가 조선의 독자적 국기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자, 당시 조선 측 실무대표인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李應俊)에게 지시해 태극도형기를 제작해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서 국기로 사용했다. 이 태극도형기는 2004년 미국 해군부 해상국의 자료에서 발견되어 ‘이응준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박영효는 제3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면서 이 태극도형기를 기초로 일부 변형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883년(고종20년) 음력 1월 왕명으로 태극과 4괘가 그려진 박영효의 태극도형기를 조선의 국기로 사용토록 공포함으로써 국기의 효시가 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제작 방법을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1883년 공포된 최초의 공식 국기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기는, 푸트(Luicus H. Foote) 미국 공사의 조선 방문을 수행하던 주이(Jouy)가 1884년 입수해 미국으로 가져간 ‘주이 태극기’로, 현재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인연
 
  박영효 등 젊은 신진 관료들이 메이지 신(新)일본의 설계자와 다름없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게 된 것은 이들 개혁세력의 향후 행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는 1858년 도쿄의 에도(江戶)에 네덜란드어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 교환을 위한 막부 측 사절단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유럽과 미국을 돌아본 후 1866년 《서양사정》을 출판했는데 당대 베스트셀러가 됐다. 후쿠자와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적 가치관의 확립, 막부기구의 개혁과 구습타파 등을 주장했고 부국강병과 국가 중심의 평등론을 역설했다. 이어 일본사회에 시빌리제이션(civilization)이라는 ‘개화’의 개념을 도입하고 막부 철폐를 역설, 1868년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 종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그의 동료들은 신정부에 출사했는데, 후쿠자와는 입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 밖에서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면서 서구화를 지향하는 재야인사로 변모했다. 1873년 언론사인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 개화 청년 양성과 실용적인 학문 등을 장려하여 일본 근대화의 대표적 계몽사상가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의 후쿠자와’를 자처한 이광수는 훗날 후쿠자와를 ‘일본에 복을 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위인’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오늘날 일본의 1만 엔 지폐에 등장하는 후쿠자와는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 일본을 근대적 국민국가로 만든 위대한 사상가로,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한국과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의 기치를 든 탈아론(脫亞論)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다.
 
 
  민씨 수구세력과의 마찰
 
  1882년 11월 귀국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에 강한 영향을 받아 조선의 근대화 개혁에 대한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상황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간섭이 심해진 청국의 힘을 배경으로 친청사대의 민씨 척족세력과 안동김씨의 수구파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박영효는 귀국 후에 한성부윤(오늘날의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어 일본을 ‘벤치마킹’하면서 개혁조치들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사건건 친청 수구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박영효가 한성부에 설치한 치도, 경순, 박문의 개혁 부서는 수구파들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복제 개량, 색의 장려와 종로-동대문 사이의 도로정비를 위한 가가(假家) 철거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와 비판에 시달리다가 이듬해인 1883년 3월에 광주유수라는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박영효 등 소장 혁신세력은 자신들의 개혁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개혁당’ 혹은 ‘독립당’으로 불리는 정파를 조직해 척족세력 중심의 수구세력과 각을 세워 대립했다. 우선 대일차관 300만 엔의 교섭을 위한 고종의 신임장을 얻어 낸 후, 이 자금을 가지고 직속 군대를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연병대를 신설한 후 600명의 장정을 모집해 일본식 군사훈련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교섭이 실패하면서 박영효는 군사양성 계획을 포기함과 동시에 광주유수 자리도 사임했다. 그렇지만 후쿠자와의 지원으로 발행을 계획했던 신문 《한성순보》는 예정대로 창간했다.
 
  청국을 등에 업은 수구파들의 견제로 정치적으로 계속 궁지에 몰리던 20대 초반의 젊은이 박영효를 비롯한 개혁세력은 자신들의 근대화 운동에 대한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합심하여 일본의 힘, 즉 외세를 빌려 국정을 개혁한다는 변법적 정변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일본 개화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당시 조선의 근대화 개혁세력은 대청(對淸) 문제와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김홍집, 김윤식 등 온건 노선과 박영효, 김옥균 등의 급진 노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박영효, 김옥균 등 급진 개혁파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일본을 이용해서 정변을 통해 민씨 정권을 타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이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정한론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박영효, 김옥균 등의 정변을 부추겼다. 때마침 1884년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 여파로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3000명 중 절반 정도가 철수한 상태였다.
 
  박영효의 집에 모여 거사를 모의했다. 1884년(고종21년) 12월 우정국 청사 낙성식을 거사 계기로 잡았다. 거사에 필요한 병력 일부를 일본 측이 지원한다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공사의 지원 약속도 받았다. 정변을 일으킨 직후, 박영효는 김옥균, 서광범과 함께 한밤중에 고종을 경우궁(景祐官)으로 옮기게 해 일본군 200명이 왕을 호위하도록 했다. 한편 이들은 민영목, 민태호 등 수구세력의 영수 7인을 살해했다.
 
  정변은 성공한 듯했다. 즉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 박영효는 신내각의 전후영사(前後營使) 겸 좌포장이라는 군사권을 장악하고, 김옥균은 호판서리(戶判署理) 겸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이라는 재정권을 장악했다. 다음 날 12월 6일에는 그들의 숙원이었던 14개조의 시정요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정강이 발표된 날, 서울에 남아 있던 청군이 고종이 돌아온 궁을 공격하자 고종을 호위 감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약속을 저버리고 철수하고 말았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군의 힘만 믿고 있던 정변의 주요세력은 고종을 결국 청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홍영식, 박영교 등은 피살됐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 9명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것이 바로 ‘3일 천하’의 갑신정변이다.
 
  정변에 실패한 박영효는 1884년 12월 일본으로 도피해 10여 년의 일본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박영효 일행은 조선의 신병인도 요청으로 신변위협을 느끼자 도쿄에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은거하기도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 정부의 조선 개입을 기대했으나 일본 측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1885년 4월 서재필(徐載弼)과 같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경제적 궁핍 등의 어려움을 견뎌 내지 못하고 1885년 12월 혼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온 이후 박영효는 조선에서 건너온 자객들로부터의 신변 위협을 피하여,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고 이름을 바꿨다. 1888년(고종25년) 박영효는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 교회에 은거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등의 근대화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갑신정변에 관해서는 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에도 무익하고 자신으로서도 부모형제와 친구들이 죽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을 참회했다.
 
  《고종실록》에는 고종이 박영효의 편지를 받았음을 시사하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이 이전에 나에게 글을 올렸는데 어떻게 이와 같은 변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의 심사가 매우 불측하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 일본발 우편 주소가 남아 박영효는 민씨 세력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할 뻔했다. 이후에도 본국에서 밀파된 자객 이일직(李逸稙), 권동수(權東壽), 권재수(權在壽) 등이 그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이일직 일파와 싸우다 검거된 박영효는 1888년 5월 예심 종결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청일전쟁의 발발과 박영효의 귀국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1894년 박영효가 망명한 지 10년이 되는 시기에 조선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갑신정변 후 10년을 준비해 온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박영효를 이용하기 위해 주한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烏圭介)로 하여금 그의 귀국을 알선하게 했다. 1894년 8월 박영효는 이규완(李圭完) 등 추종자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박영효의 귀국 경비는 일본 측이 부담했고 경호원도 붙여 줬다.
 
  ‘조선 보호국화’를 결정한 일본은 친청 노선의 민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원군을 앞세웠다. 민씨 수구파와 다시 집권한 대원군 수구파 사이의 알력이 심해지고 있었다. 민비는 귀국한 박영효를 포섭하려고 그의 과거를 묻지 않고 죄명을 말소해 줬다. 박영효는 명예회복과 동시에 정계에 복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의 왕위 추대 음모 사건이 터져 대원군은 퇴진하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일본공사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894년 12월에 제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됐다. 이 내각에서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사실상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정부나 다름없었다. 그는 점차 서광범(徐光範) 등 갑신정변 가담자 등을 중심으로 급진개혁 노선의 독자내각 구성을 시도했으나 단독정부 구성은 좌절됐다.
 
  이후 박영효는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총리대신서리로 취임했다. 단독정부는 아니지만 실권을 장악한 그는 200여일 동안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다.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국내외에 천명하고 청과의 조공관계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가 의도했던 ‘반청’은, 실제로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실익이 없었다.
 
  이제는 청을 대신해서 일본의 영향이 거세졌다. 그러나 1895년 4월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이 이에 굴복하자 민비와 수구파는 청을 대신해 친러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했다.
 
  박영효는 러시아의 경계대상이 됐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궁중과 러시아 공사관 간의 왕래를 통제할 의도로 궁중 호위병의 교체를 시도했으나 고종과 민비에 의해 달성하지 못했다. 러시아에 발목이 잡힌 일본도 입장을 바꿔 박영효를 견제했다. 결국, 1895년 7월 박영효는 실각했다.
 
 
  2차 일본 도피와 정변계획
 
  민비가 친러정책을 펴자, 일본은 1895년 8월 국모(國母)를 시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친일 성향의 박영효는 왕비시해 음모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 이규완(李圭完)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도피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했다. 1년 후 환궁한 고종은 1897년 2월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이 시기에 박영효는 영국의 힘을 활용해서라도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할 것을 구상했다. 그리하여 사토(Sir Ernest Satow) 주일 영국공사에게 조선이 러시아에 의해 합병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전하면서 영국의 적극적 역할과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 측의 소극적 반응으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일본, 영국 등 외국의 지원이 어렵게 되자 1890년대 후반 들어 박영효는 조선 내(內) 동지들을 규합해 정변을 시도했다. 경남지역의 활빈당(活貧黨)과 연계해 지역 부호들로부터 거사 자금을 모으기도 했지만, 일본에 의해 실패한다. 1900년(광무7년) 7월에는 이승린(李承麟) 등 일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 의화군(義和君) 강(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정변을 계획했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비밀리에 한규설(韓圭卨)과 윤석준(尹錫準) 등 측근을 조선에 파견했지만 발각돼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 박영효는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정한론이 러시아에 의해 발목이 잡히자 절치부심한 일본은 다시 10년을 준비해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마침내 1905년 미국의 중재 협력으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통해 러일전쟁의 승리를 보장받고, 미국과는 가쓰라-테프트(The Katsura-Taft) 밀약을 통해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일본 망명 12년 만인 1907년 박영효는 다시 귀국한다.
 
  그는 조선 내 일본 실권자인 궁내부의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고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받은 후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순종 즉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됐다. 1910년 8월 제주도에서 한일 강제병합을 맞은 박영효는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의 작위와 거금의 매국공채를 받고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로 취임했다.
 
 
  일제의 꼭두각시로 전락
 
  3·1운동을 준비하던 손병희(孫秉熙) 계열의 인사들이 그에게 민족대표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박영효는 거절했다. 이어 유민회(維民會), 동광회(同光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고 일제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1921년 중추원(中樞院) 고문, 1926년 중추원 부의장, 1925년 정(正) 3위의 서훈을 받고 1932년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됐으며 1939년 9월에 생을 마쳤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정2위 훈1등’ 훈장을 추서했다.
 
  박영효는 조선을 일본과 같이 근대화한 나라로 이끌려는 개혁의 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수구세력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일본의 힘에 의존해 정변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자주독립의 이상을 위해 비자주적인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조선침탈에 이용되었으며 끝내 일제(日帝)의 주구(走狗)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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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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