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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⑮ 吳慶錫

조선의 자주개혁을 선도한 근대화 운동의 선각자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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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집단인 중인들에 주목했던 정조
⊙ 사대부 박규수, 김옥균, 박영효 등 젊은 인재들에게 근대화 개혁 필요성 가르쳐
⊙ 중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조선도 곧 같은 상황에 처할 것이라 예측

張哲均
⊙ 6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역관 출신으로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가 된 오경석.
  조선 후기 구한말,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던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청국(淸國)을 자주 여행할 수 있었던 역관(譯官)들은 주변정세의 변화와 몰락해 가는 청국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조선의 낡은 체제(앙시앵레짐)를 혁파하고 서양 문물을 도입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자주개혁 필요성을 가장 먼저 깨닫고 근대화 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다.
 
  우리 역사는 오경석과 그와 생각을 함께한 한의(韓醫) 유홍기(劉鴻基·1831~1884), 그리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1807~1876) 등 3인을 ‘개화파(開化派)의 비조(鼻祖)’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개화파는 수구파와 대립되는 개념인데 개화라는 용어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 이 시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은 자신을 개화국(開化國), 청국을 반개국(半開國), 조선을 미개국(未開國)으로 분류하고 탈아입구(脫亞入毆)를 선언한 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우며 정한론(征韓論)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오경석 등 비조는 일본이 주장하는 ‘미개한’ 조선의 개화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자주개혁과 근대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시기와 별 차이가 없다. 이들 비조의 교육으로 무장된 김옥균(金玉均) 등 급진적 개혁론자들이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들도 미개한 조선의 개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의 소견으로 개화파의 비조라는 평가보다는 ‘자주개혁과 근대화 운동의 선각자’ 또는 줄여서 ‘근대화 운동의 선각자’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개화와 근대화의 용어 문제는 일제 식민사관의 극복과 한국의 주체적 근대화 과정을 규명해 본다는 관점에서 학문적 검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50년 전 구한말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 근대화의 선각자였던 역관 오경석을 중심으로 그 시대적 상황을 복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조선의 근대화 운동을 선도한 7대 역관 가문 출신
 
  오경석은 1831년(순조 31) 한어(漢語) 역관인 오응현(吳膺賢)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오응현은 역관 최고위직인 정3품 당상역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의 선조 오지항(吳志恒)이 처음 역관이 된 이후 7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집안으로 오경석이 8대째 역관이다. 오경석의 아들 4명도 모두 역관이었다. 이들이 조선의 마지막 역관 세대인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 과거(科擧)가 모두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오경석의 아들 역관 오세창(吳世昌)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오경석은 1846년(헌종 12) 16세에 역과(譯科)에 합격했으며, 아우들까지 모두 합격해 5형제가 역관이 되었다. 사위 이창현도 역관인데, 대표적인 중인 집안들의 족보를 종합하여 《성원록(姓源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경석은 단 한 번으로 역과에 합격했는데, 그때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역관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서(詩書)와 금석(金石)의 대가였던 역관 이상적(李尙迪·1804~1865)에게 한어와 금석·서화를 배웠고, 가학(家學)으로 북학파(北學派)의 거두 박제가(朴齊家·1750~1815)의 실학을 공부했다. 오경석의 스승 이상적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역관으로 입문한 오경석의 삶에 분수령이 된 것은 1853년 23세 때로 처음 북경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주변정세에 대해 견문을 넓히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1840년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는 것, 1851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 청국이 외우내환(外憂內患)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천진조약 등 불평등조약이 잇달아 체결되면서 사대교린(事大交隣) 체제가 붕괴되고 서구식 외교공관이 설치되는 등 전대미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는 모두 13차례나 청국을 왕래하면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청국의 퇴조가 조선에도 다가올 민족적, 체제적 위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러한 변화를 조선 조정에 알리기 위해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을 도입했다. 오경석은 중인 신분의 역관으로 중인이 주도하는 국가개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실용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 박규수와 함께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인재들에게 주변정세의 변화와 근대화 개혁 필요성을 가르쳤다. 이후 오경석의 영향으로 성장한 이들이 조선의 정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오경석을 조선 근대화의 비조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그는 역관의 신분이었지만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외교관의 역할뿐 아니라 다양한 첩보활동을 통해 정보를 수집해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또한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체결 과정에 참여하면서 그의 외교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으나 과로로 49세에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높아지는 역관의 위상
 
조선 후기에 그린 〈燕行圖〉. 조선 사신단이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관의 역할과 위상은 변화해 나갔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명(明)-청 교체기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 청국을 상대로 거의 굴욕적인 외교를 감내해야 했다. 이 시기로부터 역관은 통역의 본분 이외에도 때로는 외교관으로, 때로는 정보원으로 대외관계의 일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이들은 상대국에서 고급 무기와 원료를 빼내고 고급 정보를 얻어오기도 했으며, 무역에 있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조선 외교의 일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일례로 역관 장현(張玄)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국에 인질로 갈 때 수행하여 6년 동안 심양관에 머물면서 외교활동을 전개했고 귀국 후에는 당상관이 되어서 역관의 수장으로서 40년간 30여 차례 북경을 다니며 청국과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이형장(李馨長)도 심양에 소현세자를 모시고 갔던 역관으로 당시 심양관의 대외적인 일, 즉 군사 징발에 대한 것, 포로의 쇄환 문제 등을 도맡아 해결했다.
 
  16세기 선조(宣祖)대의 역관이었던 홍순언(洪純彦·1530~1598)은 ‘종계변무(宗系辨誣)’(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름이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되어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시정해 달라고 사신을 보냈으나 중국이 고쳐주지 않아 200년간 시간을 끌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 임진왜란 때는 파병을 성사시켜 그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파격적으로 정2품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역관들은 때로는 반출 금지된 무기나 원료를 구해 오는 첩보원 역할도 했다. 조선 후기 가장 민감한 교역품이었던 화약 원료인 염초와 유황을 구입하거나 그 제조 비법을 취득하는 일은 매우 중대하고 비밀엄수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역관의 임무가 되었다. 역관 표헌(表憲), 김지남(金指南) 등의 노력으로 조선은 자체적으로 화약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군의 전투력을 대폭 높였다.
 
  유교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은 유교적 가치와 제도의 연구 그리고 정책 수립을 위해 중국으로부터 서책의 도입이 필요했다. 역관들은 이 과정에서 언어 소통이 자유롭고 수차례의 사행으로 지리나 풍속에 익숙해 서책 구입 등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용이했다. 또한 이러한 여건은 역관이 선진문물이나 기술에 보다 일찍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외래문화 수용의 선도적 역할도 담당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사회적 의식의 성장을 선도하며 근대로의 이행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와 함께 역관의 위상은 점차 높아지게 된 것이다.
 
 
  중인사회와 역관
 
  조선 초기까지도 조선의 백성(民)은 사(士)·농(農)·공(工)·상(商)으로 나뉘었다. 선비(士)는 왕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이후 중기에 이르러 사가 사대부 집단을 형성하면서 이들은 양반의 신분으로, 그리고 농·공·상은 평민의 신분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조선사회에는 사대부로 직행하는 과거제도와 역과를 포함한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 등 4개 분야의 잡과(雜科)가 운영되었다. 이들 잡과 출신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인 신분으로 실무와 기술을 전담하는 전문 인력이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庶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들도 자연스럽게 중인 계급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 중인은 오늘날의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 천문지리(음양과), 미술(화원), 음악(악공), 문학(시인) 등의 분야와 예술 및 문화 등의 영역에서 활약하는 전문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직업적 특성상 왕실 및 조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거소가 궁궐 근처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인왕산 기슭과 청계천 일대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문화와 예술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이들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외교관으로,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한의사로, 과학적 사고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온몸으로 실천한 지식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실천적 지식으로 무장된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갈수록 증가되었지만 동시에 성리학의 탁상공론(卓上空論)에 빠져 정쟁만을 일삼던 사대부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최고의 명필로 평가되는 추사 김정희는 중인과 교류가 깊었던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오경석의 스승인 역관 이상적을 제자로 삼았다. 연암 박지원 역시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양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런 연고로 오경석은 추사와 연암 등과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게 되고 그들의 실학과 예술의 영향하에 자신의 사상적 토대와 예술적 재능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들어 중인의 재능에 주목한 왕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였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검서관(檢書官)직을 신설하여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는 등 중인을 활용했다. 정조 시대를 흔히 문예부흥기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중인 전문가 집단의 참여와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에서 가장 먼저 신분에 관계없이 전문가의 역할과 필요성에 주목한 왕이 세종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들 중인 신분의 전문가 집단이 계층의 벽을 디딤돌 삼아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요동치는 동북아시아와 조선의 갈등
 
개화 초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위원의 《해국도지》.
  19세기 초엽,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로 무장한 서구 열강들이 상품시장과 원료 공지 확보를 위해 새로운 식민지 쟁탈에 나섰고, 마침내 미개척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서세동점’으로 불리는 시대이다. 특히 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면서 5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천문학적 숫자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영국에 치외법권(治外法權)까지 인정한 사실은 청국의 지식인들을 위기의식 속에 몰아넣었다.
 
  서세동점으로 인한 ‘문명의 충돌’과 함께 청국이 붕괴 위기에 직면하면서 공양학자 위원(魏源·1794~1856)은 《해국도지(海國圖誌)》란 책을 저술하였다. 1847~1852년에 걸쳐 완간된 이 책은 각 나라의 지세(地勢)와 산업·인구·정치·풍습 등을 기술하였고, 세계 주요국의 역사, 정치, 지리 등을 망라한 아시아 최초의 국제편람(國際便覽)이었다. 위원은 책 서두에 양이(洋夷)를 막기 위해 서양의 장기(長技)를 채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훗날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양무운동(洋務運動)’의 단초를 제공했다. 오경석은 이 서책들을 구입해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하는 지침서로 삼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흑선(黑船)의 등장으로 개방한 후 내부적 갈등관계를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식 체제를 수용하면서 극복해 나갔다. 신일본은 근대화를 재촉하면서 청국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한편 조선은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밖에 있는 ‘은둔의 나라’였다.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하고 《한국과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비숍은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은 신비스런 존재였으며, 따라서 영국의 지식인들조차 한국이 적도에 있다거나 지중해 또는 흑해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조선 스스로가 청국의 변방으로 자처하며 서양과의 교류를 거부한 것도 은둔의 나라로 인식된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오랫동안 사대교린 체제에 안주해 온 은둔의 조선도 서구 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개방이냐 쇄국이냐의 갈림길에서 당시 조선의 섭정(攝政) 대원군(大院君)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강력한 척화(斥和)의 쇄국정책으로 대응하였다.
 
 
  개혁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생각한 오경석
 
  국제사회의 전환기적 상황에서 조선 개혁과 근대화의 필요성에 가장 먼저 눈뜬 사람이 역관 오경석이었다. 그는 1853년 23세 때 처음으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청국은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 남경을 함락하고 북경까지 위협하는 중이었다. 태평천국 운동은 기독교의 만민평등사상에 영향받은 농민혁명으로 이러한 혁명을 목도한 오경석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1840년대의 아편전쟁과 1851년의 태평천국 운동 등 안팎의 위기로 기울어가는 청국의 모습을 현장에서 목도하게 된 것이다.
 
  오경석은 북경을 오가면서 같은 20대의 청국 지식인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스승 이상적의 소개로 빠른 시일에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북경에 갈 때마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그들로부터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책들을 소개받아 구입해 왔다. 특히 오경석은 북경의 청년들 가운데 동방과 남방 출신의 양무파(洋務派) 개혁사상가들을 주로 사귀었는데, 이는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의 영향으로 아버지 오응현이 박제가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저술을 읽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영향으로 오경석은 국내학자 가운데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놓고 그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추사에서 이상적으로 내려오는 중인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추사의 스승이 바로 박제가였기 때문에 오경석의 집안에서는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가 교과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오경석은 청국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청의 위기가 조선에도 머지않아 닥칠 문제임을 직시하고 미리 그 대응책을 세워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국내 지도층도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필요성을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성리학에 젖어 있는 조선의 지배층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서양의 다른 이론을 조선의 지도층에 자세히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화한 세계상을 담고 있는 서적, 이른바 신서(新書)들을 조선으로 반입해 사대부들에게 읽히려고 했다. 그래서 《해국도지》뿐 아니라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10여 권의 서적들을 구입했다.
 
  《영환지략》은 10권으로 된 세계 각국의 지리서이고, 세계 6대양을 지도를 곁들여 설명하고, 나아가 나라별로 지도와 지지를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어 동양인들이 서양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책이다. 《박물신편》은 서양 과학기술서인데, 모두 서구 열강에 대한 그 대응책을 기술한 책들이다.
 
  오경석은 서양 문물과 제도를 알 수 있도록 세계 지도를 비롯하여 자명종, 망원경 등도 조선에 들여왔다. 대원군이 애용하던 회중시계도 오경석이 청에서 구입해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853년 주청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초상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여 청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 사진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찍은 사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丙寅洋擾와 오경석의 첩보활동
 
쇄국정책을 편 흥선대원군.
  1862년 조선은 대원군이 집권했다. 집권 초 천주교에 관용을 보였던 대원군은 천주교를 불궤(不軌)집단으로 규정하고 조선에 체류하던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했다. 1866년(고종 3)의 병인사옥(丙寅邪獄)이다. 당시 12명의 신부가 있었는데 이 중 살아남은 세 명이 북경으로 도주해 본국에 처참했던 상황을 알렸다. 병인사옥이 국제문제로 비화하자 대원군은 청국에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를 파견했다. 이때 오경석은 통역 겸 뇌자관(賚咨官)으로 동행했다. 뇌자관이란 조선이 청국에 파견하는 사신단의 공식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정사(正使), 부사(副使) 등 대표단이 한어를 못할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 어두워 큰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청국 관리가 주청사의 숙소로 찾아와 조선이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모두 이를 숨기자고 했지만, 오경석은 이실직고한 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청국의 지원을 받는 편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나아가 오경석은 청국 관리에게 프랑스의 국력에 대해 묻고, 그들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 것인지를 자문했다. 청국 관리들이 호의적인 조언을 해줌으로써 주청사 일행은 프랑스에 대처하는 데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오경석은 자신이 그동안 구축해 놓은 청국 인사들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외교첩보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들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조선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그는 서양의 침략에 경험이 있던 청국의 양무파 정객, 외교관들을 방문하여, 프랑스 동양함대의 동태와 대응책을 숙의했다.
 
  오경석은 청국 관리들의 도움으로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상해에 정박 중인 프랑스 전함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냈다. 또한 조선 침공을 지원하는 주청(駐淸) 프랑스 공사관과 청국 총리아문(總理衙門·지금의 외교부) 사이에 오간 왕복 문서를 입수해 필사해서 본국에 보고했다. 보고서에는 조선을 침공할 프랑스 동양 함대는 재정이 부족해 무역상들로부터 군비를 차입했다는 것과 병력의 규모, 전함의 성능, 화포의 위력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오경석은 프랑스 함대가 군량을 3개월분밖에 적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하지 말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하면서 지구전을 전개하면 승산이 있다는 건의안을 대원군에게 제출했다. 그러는 사이 1866년(고종 3)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나타났다. 2개월이 넘는 공방전 끝에 프랑스 함대는 결국 물러갔다. 오경석의 첩보활동과 대책 건의안이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국에 남은 오경석은 청국 총리아문과 프랑스 공사관을 오가며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면서 병인사옥과 병인양요의 사태를 수습했다. 오경석은 이때의 경과를 《양요기록》으로 남겼다. 조정에서도 하지 못한 병인양요 백서를 오경석 개인이 편찬한 것이다.
 
 
  개혁운동 청년 양성을 위한 사랑방 모임
 
  오경석은 1866년 병인양요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겪은 뒤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해졌다고 판단했다. 오경석은 더 늦기 전에 자주적으로 개국을 실현하고 개혁정책을 실시해 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체성이 강한 대원군이 집권한 기간에 준비를 갖추어 개국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오경석은 청국에서 구입해 온 신서를 우선 그의 친구인 유홍기에게 먼저 읽도록 했다. 그는 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다. 둘은 세상의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개혁 필요성에 공감한 후 일본을 자주 왕래하던 이동인(李東仁)과도 주변정세의 변화와 조선의 개혁 방향에 관해 논의했다. 그리고 오경석은 유홍기에게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켜 개혁운동을 추진해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인 신분의 오경석이나 유홍기로서는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오경석은 1869년 평안도관찰사에서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한 박규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오경석과는 이심전심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의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 자제들을 교육해서 근본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해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1869년 말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완전히 동지로 결합했다. 1870년 초부터는 서울 북촌 재동의 박규수 자택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김옥균·박영효·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서광범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이 오경석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신서들을 교재로 국제정세의 변화와 근대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세력의 정치적 당파가 형성되었다. 이들 청년들은 1877년 박규수가 죽자 이후 오경석과 유홍기 등의 문하에 출입하다가, 오경석이 사망하는 1879년 이후에는 유홍기와 강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조선에서는 오경석의 주도로 근대화 운동이 일어난 셈이다. 그가 한국 최초의 근대화 개혁운동을 선도한 인물로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오경석이 선도한 근대화 운동은 훗날 김옥균의 멘토가 된 일본 개화운동의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와는 무관하고 시기적으로도 비슷한 시점에 시작되었다. 조선의 근대화 운동이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자주적 근대화 노력이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주장처럼 조선이 야만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개화가 필요해서 개화파라고 하는 것은 오경석 등의 자주개혁 개방론과도 차이가 있고 일본의 정한론을 정당화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를 요한다. 따라서 이들 3명을 ‘개화파의 비조’라고 하는 것보다 ‘근대화 운동의 선각자’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 그리고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메이지유신 후 조선이 신정부의 국서 접수를 거부하자 일본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征韓論이 대두했다.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은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 했던 것처럼 조선과의 관계 변화를 시도했다. 미국의 흑선 무력시위에 굴복해 1854년 개국한 일본은 종래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메이지 유신(1866)을 단행해 근대천황제 국가를 출범시켰다. 근대국가로 탄생한 신일본이 조선에 정부 승인을 요청해 왔다. 그런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통해 보내온 외교문서에 ‘황상(皇上)’이나 ‘황조(皇朝)’를 사용하고 있어 조선으로서는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조선이 이 문서를 거부하자 일본의 신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중심으로 정한론을 숙의했다. 그러나 서구에서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의 정객들은 내부적으로 힘을 더 기른 후 추진해야 한다고 급진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정치 다툼을 벌였다. 결국 사이고가 물러나면서 정한론은 잠시 후퇴했다. 한편, 일본에서 권력 변화가 있었던 1873년 조선에서는 대원군이 실각했다. 13년간의 그의 집권이 끝나고 갓 20세를 넘긴 고종의 친정(親政)시대가 열렸다.
 
  쇄국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자 진보·개혁 세력이 정국의 전면에 나서면서 국론이 분열됐다. 이 와중에 1875년 일본이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개국 통상을 요구했다. 1875년에 벌어진 운요호(雲揚號) 사건이다. 조선 조정은 개방론자이자 병인양요 등 외교활동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오경석을 발탁하여 문정관(問情官)에 임명했다.
 
  오경석은 1871년 미국이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요청해 왔을 때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대원군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건의했다. 그는 강요에 의한 타율적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미국이 요청해 온 이상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거부되고 오히려 개항론자라고 지목당해 대원군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바 있었다. 친정을 시작한 고종과 그의 조언자였던 민비가 대원군과는 달리 개항론에 관심이 있었던 점도 오경석의 발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수구세력과 개혁세력 간에 갈등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 등 원로대신들과 대원군은 척화론을 견지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규호(閔奎鎬)·민비(閔妃) 등은 개국론을 지지했다. 오경석은 조선의 힘으로는 군함 5척을 끌고 온 일본과 무력으로 대결해 승산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박규수와 협의했다. 그들은 현 국제정세로 보아 조만간 개국은 불가피하므로 승산 없는 일본과의 전쟁은 피하되 협상을 통해 최대한 자주성을 확보하면서 개국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오경석은 일본 군함을 찾아가 일본 측이 강화도에 상륙하는 것은 불가하니 대신 조선 측의 대신이 군함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일본 측 사신을 접견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무력시위를 계속했다. 결국 강화부 연무당(鍊武堂)에서 양국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오경석은 조선 측 정사 신헌(申櫶)을 도와 우선 일본의 함포 위협을 즉각 중지하도록 하는 한편, 중국 신문에 보도된 일본의 정한론을 들어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경석은 일본의 국기 사용에 대응해 조선도 국기를 제작해 사용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결국 1876년 2월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는 오경석이 생각하는 바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준비가 없는 조선이 일본과 전쟁으로 치달아 더 큰 굴욕을 받지 않도록 개국하는 방향으로 사태 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는 강화도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하면서 노심초사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일본의 군함이 되돌아간 직후인 1876년(고종 13) 쓰러져 병석에 눕고 말았다. 1877년 그는 그동안의 외교 공적을 인정받아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중추부지사로 임명되었으나 바로 4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갑부 역관의 골동품 수집과 《천죽재차록》
 
  오경석은 부친 오응현의 배려로 실학의 대가 박제가의 책을 읽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일찍이 문화적 감각, 특히 서화와 금각, 그리고 골동품에 대해서도 시대에 앞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오경석은 청국의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한 양무운동의 선각자들과 교제하면서 조선의 앞길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한편, 학문뿐만 아니라 서화와 감식 분야에서도 견문을 넓혔는데 그는 이 분야에서 조선 최고 수준이었다.
 
  부친 오응현은 당대의 재산가로 맏아들 오경석에게 많은 재산과 장교동의 천죽재(天竹齋)와 이화동의 낙산재(落山齋) 두 채를 상속해 주었다고 한다. 가정형편이 넉넉하고 평소 국내외의 많은 미술품을 접해왔던 오경석은 청국을 13차례나 오가며 청국의 지인들을 통해 고매한 서화의 세계에 접할 수 있었고 이들을 사서 모았다. 때로는 이들 지인들이 북경의 골동품 거리인 유리창에서 원하는 서화나 서책을 구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수장품 중에는 양주팔괴(揚州八怪·상업도시 양주에서 활약한 화가들)의 문인화가 유전복(劉銓福)의 〈묵매도〉 등도 전한다.
 
  골동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오경석은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과 소장 경위를 상세히 기록해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을 편찬했다. 각종 골동품 외에도 범유경(范維卿) 같은 골동품상과 주고받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유실되었다. 그는 골동서화를 구입해 감상만 한 것이 아니라 서화가로도 명성을 남겼다. 그의 《천죽재차록》에 수록된 일부 골동품에 대한 것은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일부 인용되어 전하고 있다.
 
  《천죽재차록》에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화를 좋아하였다. 돌이켜보건대, 이 좁은 나라에 태어나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어서 매양 중국 감상가의 저술을 열람할 적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계축년(1853)에서 갑인년(1854)에 걸쳐 처음 중국을 돌아볼 때 그곳의 해박하고 고상한 선비를 만나본 후로 견문이 더욱 넓어지게 되어 원(元)·명 이래의 서화 100여 점을 차츰 사들이게 되었다. 삼대(三代)와 진한(秦漢)의 금석과 진당(晋唐)의 비판을 사들인 것도 수백 종을 넘었다. … 내가 이들을 구입하는 데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천만 리 밖의 것이라 심신을 크게 쓰지 않고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는 글이 전한다.
 
  그는 금속의 대가이기도 했던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에도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금석문 146종을 수집하고 해설을 붙여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추사의 당대 최고의 금석학 저서인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진일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 역관이 갑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오경석은 부친 오응현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 스스로도 부를 쌓은 재산가였다. 오응현의 가문은 대대로 조선에서 알려진 갑부 집안이었다. 그러나 오씨 집안 외에도 조선의 역관들은 대부분 재산가들이 많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역관이 갑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장하는 조선의 공무역(公貿易) 체제와 관련이 있다.
 
  조선은 사대교린의 조공(朝貢) 체제라는 외교질서에 따라 중국에 조공하고 중국 측으로부터 사여(賜與)라는 명분으로 답례물품을 받았는데 그 규모가 컸다. 조공 체제가 약소국이 강대국에 일방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제도적인 의례로 보는 것은 실상과는 다르다. 조공은 대국과 약소국 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제도화한 외교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를 거래 혹은 무역이라고 하는 데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운영된 조공 체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양국 간에 공무역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사여품은 행장(行狀)제도라고 해서 5일장 등에서 거래하던 행상들은 정부에 등록을 해야 했고, 국가가 인정한 상인들만이 시전(市廛)을 열고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공무역 제도는 민간의 교역을 어렵게 만들어 교역통제로 인해 많은 물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결과, 가격이 올라가게 되면서 결국 많은 사람을 사무역(私貿易)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무역은 외국을 자주 드나드는 역관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이들은 외교관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사무역도 병행한 것이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갈 수 있었고 현지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던 데다 그 나라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역을 직접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이들은 사행에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에 정부로부터 일정 정도의 사무역을 묵인받았으며, 주로 인삼을 중국에 가져다 팔고 중국의 사치품을 국내에 들여와 파는 식으로 상당한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역관들이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관아(官衙)의 은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관아들은 역관에게 대량의 은을 빌려줌으로써 재정 확충을 도모할 수 있었고, 역관들은 각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중국 물품을 구입하여 관아에 가져다주고 몇 배의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역관의 신분을 담보로 관아의 은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이는 관아에서 역관에게 은을 빌려주면 관아도 큰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역관에서 독립운동가로, 민족문화지킴이로 변신한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
 
오경석의 아들인 독립운동가 오세창.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오경석의 아들로 역관에서 독립운동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으로, 그리고 서화를 집대성한 민족문화운동가로 조선에서 대한제국, 그리고 식민지배 시대를 경험했다. 오세창도 16세 때 역관시험에 합격했으나 시대적 상황은 그를 역관으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옥균, 박영효 등 진보개혁 노선의 청년 지식인들과 인연을 맺게 되고 34세이던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의 조선어과 교사로 1년간 근무하게 된다.
 
  귀국했을 때는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혁 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오세창은 정변역모 사건에 연루돼 1902년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 오세창은 일본에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영향을 받고 천도교 신자가 된다. 또 그의 권유와 후원으로 1906년 귀국해서 항일 구국 신문인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한다. 《만세보》는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난과 일진회(一進會)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만세보》가 1907년 폐간되자 1909년에는 《대한민보(大韓民報)》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도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폐간됐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정치·사회 활동에 손발이 묶이면서 방황하던 그는 가풍인 서화의 세계로 빠져들어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부친 오경석이 남긴 영향은 그의 일생을 관통했다. 오경석이 부친 오응현의 후원과 영향, 그리고 재산을 물려받았듯이 그도 부친으로부터 서화에 대한 열정, 금석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 지식인으로서의 신념까지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는 조선의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1915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는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다. 그는 10여 년 이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음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오세창에게 컬렉션은 부유층의 호사 취미가 아니라 민족주의적 ‘민족문화 지킴’이었던 것이다.
 
  오세창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에 서명했던 33인 민족대표 중의 한 명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독립만세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그는 이 사건으로 2년8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1921년 가출옥 이후 그는 더욱 서화의 세계에 빠졌다. 육순 나이에 접어든 그는 다시 저술, 작품 제작에 몰두하는 한편, 예술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수집품을 서가·화가·서화가로 분류하여 192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서화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출판했다. 솔거 이후 그 당대에 이르는 1117명에 달하는 서화가들의 작품과 생애·출전 등을 표시한 서화사에 길이 남는 책이다. 최남선(崔南善)은 이 책을 가리켜 ‘어두운 바다의 북극성’과 같은 존재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갑부였던 전형필(全鎣弼)의 골동서화 수집과 그가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배경에도 오세창이 있었다. 그는 전형필에게 민족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문화재 식별에 대한 안목까지 전수하였다. 국외로 반출될 뻔했던 국보급 문화재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된 데에는 전형필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오세창, 그리고 그에게 모든 유산을 대물림한 아버지 오경석이 있었다. 망국의 한을 안고 역관, 외교관을 접어야 했던 오세창은 부친 오경석의 유산을 물려받아 미래의 독립에 밀알이 되는 민족 영혼의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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