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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⑭ 金指南

‘세 치 혀’로 백두산 국경을 매듭지은 역관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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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외교관이 별도로 없던 시절의 역관은 통역과 외교 업무를 모두 수행
⊙ 백두산을 탐사하는 청국의 목극등에게 ‘백두산은 조선 땅’이란 확답 받아내
⊙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게 된 과정 등을 기록한 《북정록》도 귀중한 역사적 자료

張哲均
⊙ 6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1929년 일본 사진집 《국경》에 실린 백두산정계비 사진. 이 비석은 조선과 청의 국경을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한다’고 명기했다.
  우리나라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 한국의 영토에 북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한반도의 북방 경계는 1712년 조선 숙종(肅宗) 때 청국(淸國)과 함께 세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기준점이 되고 있다. 그 후 1907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해 압록강-두만강 경계가 획정되었다.
 
  청국이 붕괴되고 중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 중국 간에 국경 마찰을 빚어오다가 1962년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을 통해 양국의 경계를 압록강-백두산 천지-두만강으로 하여 백두산과 천지를 양분하였다. 앞으로 한반도가 통일되면 통일한국의 북방 경계는 소위 ‘간도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의 소지가 남아 있다.
 
  어쨌든 한반도의 북방 경계는 백두산정계비가 출발점이 되는데 이 정계비의 설치에 역관(譯官) 김지남(金指南)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역관의 신분이었지만 청 측 대표를 능숙한 화술로 설득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조선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김지남은 화약을 제조하는 ‘자초법(煮硝法·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도입하여 국방과 안보에 기여하고, 조선 외교의 지침서나 다름없는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저술하는 등 조선 외교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그의 외교 업적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간도 문제가 아직 말끔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통일한국을 내다보며 백두산정계비를 중심으로 김지남의 외교 활동을 복원해 보고 이와 함께 조선시대 역관의 외교적 역할을 재조명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직업외교관과 유사한 조선시대의 역관
 
조선시대 중국어 교재인 《노걸대》.
  김지남은 숙종 때의 한어(漢語) 역관이다. 그는 1671년(현종 12) 역과(譯科)에 급제한 이후 평생을 역관이자 외교관으로 대외관계에 봉사하면서 조선 외교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에서 역관은 역학인(譯學人)·설인(舌人)·상서(象胥)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주로 통역을 담당하면서 해외사절단 일원으로 외교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등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왕과 대신들 사이에서 통역을 맡는 등 역관은 조선의 외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였다.
 
  역관이 사료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 말 충렬왕 때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했다는 기록부터라고 한다. 역성(易姓)혁명으로 새로이 창건된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의 중요성 때문에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고 대외관계의 필수요원인 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역과를 실시하였다. 조선의 외교는 예조(禮曹)에서 관장했고 실무는 사역원과 승문원(承文院)이 나누어 맡았다. 사역원은 역관 지망생의 교육, 시험 및 통역 업무를 맡았고 승문원은 외교문서의 작성과 배포 그리고 보존 업무를 맡았다.
 
  사역원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배웠다. 한학청(漢學廳), 몽학청(蒙學廳), 청학청(淸學廳), 왜학청(倭學廳)이라 불리는 각 관청에서 외국어 학습을 전담하였다. 사역원의 연혁과 주요 역관의 행적을 기록한 책도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세계 최고의 중국어 학습교재인 《노걸대(老乞大)》는 가상의 현장을 구어체로 엮은 교습서로 오늘날의 중국어 회화교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역관은 추천을 받은 뒤 심사를 통해 적격자 선별 후 사역원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역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고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역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종일 공부하고 매월 두 번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은 중간고사에 해당하는 원시(院試)를 쳤다. 수련 과정을 거친 후에는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역과에 응시해서 초시와 복시를 모두 통과해야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외교는 이러한 엄격한 교육 과정과 경쟁적인 시험제도를 통해 성장한 역관들이 외교의 일선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헌신한 데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中人 신분으로 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한 역관
 
  조선은 과거(科擧)와는 별도로 역과를 포함해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 등 4개 분야의 잡과(雜科)를 운영하였다. 4대가 같은 잡과에서 합격한 가문도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보고 들어 대물림받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역관 김지남이다.
 
  역관에 합격하면 종7품에서 종9품(오늘날의 7~9급직 공무원)의 품계를 주어 각 사(司)의 권지(權知·오늘날 공무원 시보에 해당)로 분속시켰다가 자리가 나면 실제 보직을 주었다. 왕의 어전 통역사가 되면 최상위직인 정3품 당하관(堂下官·오늘날의 1~2급직 공무원)이 되는데 여기까지가 역관이 승진할 수 있는 한계였다. 역관을 관장하는 사역원, 승무원의 원장은 정2품(오늘날의 차관급)인데 역관을 임명하지는 않았다. 역관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인 신분으로서 실무와 기술을 전담하는 전문 인력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관의 역할과 위상은 변화해 나갔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명-청 교체기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 청국을 상대로 거의 굴욕적인 외교를 감내해야 했다. 이 시기로부터 역관은 통역의 본분 이외에도 때로는 외교관으로, 때로는 정보원으로 국가 이익을 위해 활약하게 된다. 그들은 조선 외교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전문 외교관으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대외관계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외교사에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이들은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시대를 앞서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했다.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것이 힘들었던 조선시대에 역관은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보고 느낀 사람들이었다. 상대국에서 고급 무기와 원료를 빼내고 고급 정보를 얻어오기도 했다. 또한 무역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역관들은 사행(使行)을 따라 외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역관은 외교관과 통역사의 두 직무 이외에 국제 무역상의 역할도 병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역관 장현(張玄)은 1617년 역과에 수석 합격을 하면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국에 인질로 갈 때 수행하여 6년 동안 심양관에 머물면서 외교활동을 전개했고 귀국 후에는 당상관이 되어 역관의 장으로서 40년간 30여 차례 북경을 다니며 대 청국 외교를 담당하였다.
 
  역관들은 언어 소통이 자유롭고 외국의 지리나 풍속에 익숙해서 문화적인 역할을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해낼 수 있었고 선진문물이나 기술 등 외래문화 수용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구한말 개화기에 역관 오경석(吳慶錫)은 13차례나 중국을 왕래하면서 서양 과학의 해설서인 《박물신편(博物新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병기 기술을 해설한 책인 《해국도지(海國圖志)》, 세계 각국의 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을 가져와 조선의 개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역관의 지침서 《통문관지》와 역관의 아이콘 洪純彦
 
  김지남은 역관으로 활동하며 ‘외교 편람’이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지》도 편찬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 “예부터 우리나라는 인접한 중국·요(遼)·연(燕)·여진·일본 등과 어려운 문제를 타결한 법례가 많지만, 이를 수록한 문헌이 없다. 그래서 고증할 길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 영의정 최석정이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에 김지남이 전고(典故)에 밝다는 사실을 알고, 외교 고사를 수집 정리하여 편찬하게 하였다”고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12권 6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외교 및 역관 담당 관청인 사역원의 연혁과 관제(官制) 그리고 고사(故事), 사대교린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의 자료와 사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중국과 일본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접대하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역관들이 알아야 할 모든 항목이 설명되어 있고, 대표적인 선배 역관들의 간단한 전기도 실려 있다.
 
  《통문관지》는 조선시대에 17회나 재판을 찍을 정도로 많이 읽히고 참고한 책이라고 한다. 1778년(정조 2) 이담(李湛)이 초간본을 증보하여 10권 4책으로 간행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내용을 추가해 속찬(續纂)을 거듭하고, 1888년(고종 25)에는 목판본으로도 간행하였다. 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전해져 그곳 외교관에게도 지침서가 되었다고 한다.
 
  《통문관지》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는 역관의 아이콘인 홍순언(洪純彦)의 이야기가 나온다. 16세기 선조(宣祖)대의 역관이었던 홍순언이 사행으로 명(明)에 갔을 때 일이다. 어느 술집에 갔다가, 부친의 장례비를 벌기 위해 청루에 나온 여인을 위해 출장비를 털어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는 귀국하여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홍순언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엄명을 받고 다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종계변무란 명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름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되어 조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시정해 달라고 사신을 보낸 일로, 중국이 고쳐주지 않아 200년간 시간을 끌고 있던 문제였다.
 
  홍순언이 북경에 이르렀을 때, 청루에서 구해준 여인이 종계변무를 관장하던 예부상서(禮部尙書) 석숭(石崇)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석숭의 노력으로 200년을 끌던 종계변무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 임진왜란을 당하여 파병을 요청하러 갔을 때에는 석숭이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있어 원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 공으로 중인 신분이었던 홍순언은 파격적으로 정2품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또한 그는 석숭의 부인으로부터 ‘보은(報恩)’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비단 100필을 선물로 받았는데, 홍순언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을지로 2가 일대의 사패지가 보은단동(報恩段洞)으로 불리게 된 이유라고 한다.
 
 
  ‘자초법’ 도입과 《신전자초방》
 
  홍순언은 역관의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큰 공을 세워서 역관의 한계를 넘어 정2품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어쩐지 그의 일대기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느낌을 준다. 역관 김지남은 홍순언과 같은 화려한 스토리는 없지만 백두산 국경 획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화약제조법을 전파하는 등 실질적인 국익과 관련해 중대한 업적을 남겼다.
 
  김지남은 특히 안보 분야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청국에 대항하기 위해 화약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자체 개발에 진전이 없자 이를 중국으로부터 도입하려 했지만 명을 제압한 청은 화약 수출을 금지했다. 김지남은 1692년 청에 가는 사행사 민취도(閔就道)의 역관으로 수행했는데, 그로부터 자초법의 입수를 권유받았다. 청국은 자초법의 해외 유출을 국법으로 엄금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자초법에 따라 화약 만드는 여덟 가지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흙을 모으고(取土) 재를 받아서(取灰) 같은 부피의 비율로 섞는다(交合). 섞은 원료를 항아리 안에 펴고 물을 위에 부어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篩水) 가마에 넣고 달인다(熬水). 이 물을 식혀서 모초(毛硝)를 얻고 이 모초를 물에 녹여 다시 달여서(再煉) 정제시킨다. 재련 후에도 완전히 정제되지 않았으면 또 한번 달인다(三煉). 이렇게 얻은 정초(精硝)를 버드나무 재, 유황가루와 섞어서 쌀 씻은 맑은 뜨물로 반죽하여 방아에 넣고 찧는다(合製)”고 요약해 설명하고 있다.
 
  자초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김지남은 마침내 요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서 자초법으로 화약을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곳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 일행에 합류하여 청국에 갔으며, 그 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집요하게 정보를 추적해 결국 그 비법을 알아냈다.
 
  1698년 드디어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과 함께 배워온 자초법을 이용해 화약을 제조하였다. 이렇게 만든 화약은 땅 밑에 10년을 두어도 습기에 변질되지 않고, 흙과 재도 예전의 3분의 1밖에 들지 않아 자주 국방과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성과가 매우 크자 숙종의 윤허를 얻어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해 간행, 반포하였다. 1796년 다시 출판되어 오랫동안 사용되었는데, 정조(正祖)는 이 책을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실록》이 전하고 있다.
 
  자초법 습득의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양사(兩司)에서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의 제수는 부당하다고 반대해 결국 외직인 문성첨사(文城僉使)에 임명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백두산에 대한 조선과 청국의 인식
 
청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강희제.
  김지남의 일대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과 업적은 그의 말년에 조-청 국경을 획정하는 회담에 참여하여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낸 일이다.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이유는 이 일대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의 관점에서 조선 초기 명의 동편 국경선은 개주(開州·지금의 만주 鳳城지방)임에 따라 명과 조선 사이에 위치한 여진족의 거주지를 국가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아 백두산 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명을 정복한 청의 입장은 달랐다. 백두산은 청을 세운 만주족의 발상지이며, 청 황실의 근본이라고 해서 백두산 일대를 봉금(封禁)지대로 지정해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백두산 일대는 피차간에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분명한 국경선이 없었다. 두 나라 사이의 세관 역할을 하는 변문은 압록강 북쪽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청국의 제재를 받지 않고 봉금지대에 들어가 산삼 등을 채취했다. 청국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경계로 되어 있는 백두산 지역을 답사하려 했으나 이곳에 드나드는 조선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청의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후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만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677년 백두산을 장백산 지신(長白山之神)에 봉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고 전국적인 지리(地理)지 편찬 사업을 추진했다.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서도 경계를 측정하도록 계속 요구하면서 백두산 경계가 양국 간 현안 문제로 부상했다.
 
  이 와중에 1685년(숙종 11) 강희제의 명을 받은 늑초(勒楚)가 백두산을 탐사하고 압록강 상류에서 측량을 하다가 조선인이 발사한 총에 맞아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늑초가 무력으로 조선인 월강자(越江者)를 막으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조선인들이 무력으로 맞대응한 것이다. 청국이 개입해 치밀한 조사를 시작하자 그 지역 책임자는 자결하고 주범 한득완 등 6명은 참형에 처해졌고 온 가족까지도 가중처벌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득완과 함께 있던 20여 명도 모두 참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숙종실록》은 “청이 주상을 침책한 것이 처음에 염려하였던 것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움과 치욕스러움이 결코 얕지가 않다.… 일찍이 와신상담할 계획을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없는 곤욕을 영구히 받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일은 진실로 한심하다”고 적고 있어 백두산 일대의 봉금지대를 조선의 영유권으로 인식하거나 주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 국경 분규와 조선의 ‘영고탑 회귀설’
 
  이 시기에 청국은 북쪽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와 잦은 충돌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을 맺고 국경을 획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은 처음으로 산, 강 등을 경계로 하는 일종의 ‘면에 의한 경계’가 아니라 서양(西洋)에서 사용하는 ‘선에 의한 국경’을 알게 되었고, 이후 주변국들과의 경계를 실사하고 선에 의한 국경 획정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국은 조선과 압록강-토문강(두만강) 두 강을 경계로 하지만 그 중간 지역에 위치한 백두산 일대의 경계가 불확실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 지역 경계를 확정짓기 위해 조선의 북방(평안, 함경도) 경계를 조사하다가 늑초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조선은 갑작스런 청국의 사계(査界)와 조선에 사계를 요구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했다.
 
  조선은 청에 병자호란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한 후 효종(孝宗)대부터 북벌(北伐)론과 소중화(小中華) 건설을 기치로 배청의식을 가져왔는데, 이러한 조선의 대외노선은 ‘호운불백년(胡運不百年)’과 ‘영고탑(寧古塔) 회귀설’이라는 가설(假設)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 몽골의 원(元)이 100년 이상 가지 못했던 것처럼 오랑캐의 나라인 청 또한 100년을 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호운불백년’이고, 중원에서 한족이 다시 일어나서 청을 몰아낼 것이고, 오랑캐는 그들의 본거지인 영고탑(현 흑룡강성 영안현성 일대)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영고탑 회귀설’이다.
 
  당시 청국에서는 남부에서 소요가 있었고 사천 일대에서는 지진이 일어나는 등 혼란했는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조선은 청이 드디어 쇠락해서 영고탑으로 복귀하게 되고 퇴로에 조선에 침입할 것이라는 설이 유포된 것이다. 그러자 명의 멸망 후,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했지만 조선이 중화(中華)를 지킨다면 언젠가 중원에서 오랑캐를 몰아낸 이후 우리의 사상이 중화를 다시 교화시킬 것이다”는 소위 ‘소중화’ 사상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그래서 청의 국경 경계를 조사하자는 제안에 대해 조선 조정은 청이 영고탑으로 돌아갈 때를 위해 조선의 서북방 지리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일지도 모르니 협의를 피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더욱이 청이 영고탑으로 돌아갈 경우, 만주를 통해 갈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서북을 통해 갈 것인지 논쟁하면서 그들이 북경에서 만주를 통해 영고탑으로 갈 경우 위에 있는 몽골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의 서북변을 통해 갈 수 있으므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조선 조정은 조선과의 경계를 확정짓기 위한 청의 요구를 ‘영고탑 회귀설’과 같은 가설에 근거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이러저러한 핑계를 들어 청의 요구를 거절하는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강희제의 청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청을 북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청의 몰락 징후도 없었다.
 
  이 명백한 정책 결정의 오류는 정권유지와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북벌과 중화를 이념화해 온 당시 집권층이 민생을 구제하지 못한 자신을 방어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지나치게 명분론에 치우친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이념은 조선을 고립시켜 청국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였고, 근대화로 치닫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조선을 완전히 이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백두산정계비와 김지남의 ‘세 치 혀’
 
  1712년(숙종 38) 마침내 청의 강희제는 오랄(烏喇·길림성)의 총관(總管) 목극등(穆克登)에게 백두산을 탐사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도록 명했다.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 방면으로 내려오자 조선은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를 내세웠다. 역관 김지남은 수역(首譯)으로 임명받았는데 아들 김경문(金慶門)을 데리고 갔다. 김지남은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기록해 《북정록(北征錄)》을 남겼는데 이 책의 내용과 《숙종실록》의 관련 기사들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목극등은 혜산진에 도착해 박권 일행을 만나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그러나 90여 리쯤 올랐을 때 목극등은 박권과 이선부에게 길이 험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동행하지 말고 무산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박권과 이선부는 조정에 보고하면서 “접반사와 도신(관찰사)이 뒤처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라 하고 결국 따라가지 않았다.
 
  목극등이 혼자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마음대로 결정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선의 국경선을 대변해야 할 부담은 역관 김지남에게 지워졌다. 김지남은 《북정록》에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거연히 나아가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 소관은 조선의 백성이요, 백두산 또한 조선의 땅인데, 우리나라의 명산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므로, 원컨대 한 번 올라가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길이 너무 멀어 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대인(목극등)께서는 반드시 유윤길 화사원으로 하여금 산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한 폭을 내려주신다면, 소관의 평생 소원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대인의 은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만약에 그것이 대국의 산이라면 어찌 감히 부탁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잘 알았네.” 목극등이 동반을 허락했다.
 
  “나는 너무나 기쁘고 다행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물러 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두 사또에게 나아가 보고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총관(목극등)을 만나 주고받은 말을 아뢰자, “조정에서 염려하던 것이 오로지 그것이었는데, 총관이 ‘백두산은 그대들의 땅’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계책을 써서 그들의 뜻을 탐색하고, 겉과 속을 꿰뚫어보니 참으로 일을 잘한다고 하겠네”.
 
  결정적인 순간에 김지남의 재치와 ‘세 치 혀(三寸之舌)’가 작동한 것이다. 그는 역관의 신분이었지만 청국의 대표 목극등을 설득해 동반을 허락받아 국경 획정의 증인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목극등으로부터 백두산이 조선 땅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고는 백두산에 올랐다가 정상인 천지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찾아내고, 산정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 이렇게 세운 것이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백두산정계비이다.
 
 
  백두산정계비 건립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북정록》
 
  김지남은 1712년 2월 24일 북경에서 보낸 문서가 조선의 조정에 접수된 때부터 국경회담이 종료된 6월 3일까지 거의 매일 청의 대표인 목극등과 조선의 대표인 박권 사이의 교섭 전말을 낱낱이 기록해 놓았는데 이 기록이 《임진국경사계일기(壬辰國境査界日記)》이다. 훗날 이 기록을 토대로 아들 김경문과 함께 편저해 발간한 책이 《북정록》이다.
 
  《북정록》에 의하면, 청나라 측에서 갑자기 국경을 조사하고 경계를 정하게 된 계기는 청이 국가 영역에 대한 《일통지(一統志)》를 만들고 있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조-청 경계를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과 토문강의 발원 근거지를 살펴 청의 국경을 확정하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같이 동행한 아들 김경문의 기록인 《백두산기(白頭山記)》와 접반사인 박권의 《북정일기(北征日記)》가 있지만 질과 양적인 면에 《북정록》이 훨씬 구체적이고 풍부하다. 박권의 기행문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협상 대상국인 청국에도 이만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위시한 관변의 문헌도 공식적인 기록만을 수록하고 있어 당시 국경의 현지에서 전개된 경계 조사 활동상을 상세히 알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정록》은 당시 그곳 거주민들의 증언과 청국 측의 일방적이며 고압적인 태도에 관해서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특히 사계 과정에서 청국 측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는 데 전제가 되는 두만강의 수원이 불분명했음을 청 측이 인정한 점과 국경 도처에 그들이 정계비를 세우려 한 의도도 알려주고 있다.
 
  김지남의 《북정록》은 일차적으로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중국과의 국경선을 최초로 명문화한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백두산은 조선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역관의 신분이었지만 백두산정계비 건립 과정에서 청의 의도와 전략을 꿰뚫어보고 외교적인 수완과 지혜를 발휘해 조선의 국익을 최대한 반영시킨 전문 외교관 이상의 협상 능력을 보여준 대표적 외교협상 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역관이 조선 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토문강과 정계비의 設柵과 墩臺
 
  백두산정계비의 건립으로 조선과 청국은 국경을 명확히 하고 이를 명문화하였다. 청국은 불분명했던 백두산 경계를 확실히 했고, 조선으로서는 청이 자신들의 근원지라고 생각하는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육지가 이어지는 백두산의 남쪽 부분을 조선의 영토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백두산에 대한 숭산(崇山) 의식이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실제로 정계 후에 제작된 지도에서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나아가 비현실적인 북벌론과 영고탑 회귀설 등의 명분론을 극복하고 청에 대한 불안감도 종식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북정록》에 의하면 “압록강과 토문강 두 강이 모두 백두산 근저에서 발원하여 강의 남쪽을 조선의 국경으로 정한 것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의논할 것이 없고 피차간의 경계를 논단하여 분명하게 하는 것이 후환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신이 두 강의 남쪽이 조선의 경계임을 문서에 기록하여 돌아가는 사신에게 황제에게 상주하여 주기를 청국 측에 건의하였다. 또 조선에서는 ‘정해진 경계에 표를 세우는 일은 돌아가 조정에 주달하여 서서히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화답하였다”고 한다.
 
  목극등 일행은 두만강 쪽으로 내려오며 물줄기를 확인하다가 물줄기가 갑자기 복류(伏流·땅속으로 흐름)하는 지점을 확인하고 이 일대에 흙이나 돌로 돈대(墩臺)를 쌓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조-청의 백두산 경계는 그어지고 이후 조선은 청의 요청대로 홍치중(洪致中)을 보내 돈대를 쌓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계를 한 이후에 경계에 따라 설책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 측은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설책 공사를 하던 책임자인 북평사는 공사를 중지하려고 하였지만, 정계를 잘못 정한 책임이 두려워 목극등이 지정한 수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 측이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받고 청 측에서 다른 사신을 보내 문제 삼으면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이를 묵인하였다. 그래서 그냥 그 위치에 돈대를 세워두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정계비가 세워진 후 상당기간 동안 청과 조선의 경계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계비의 토문강에 대한 조선의 인식 변화
 
  백두산정계비에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고 변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며 분수령상에 비를 세워 명기한다(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라고 적혀 있다.
 
  이 정계비 건립 당시에는 조선 측에서도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지의 토문강은 화어(華音·중국말)로 두만강이다’라는 《숙종실록》의 기록이 있다. 또한 청의 사신 목극등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차관접대사의별단(差官接待事宜別單)’에도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같은 단어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이나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도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사계 당시의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조선의 입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 천지의 이남을 조선의 경내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비 수립 당시 김지남이 천지 이남을 조선의 경내로 주장함에 목극등이 이를 크게 다투지 아니하자 접반사 박권이 기뻐하며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즉 당시의 조선은 천지의 이남,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서 이를 조선의 경내로 하는 데 합의한 것을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토문이 어디인가가 논란의 초점이 되었다. 정계비 설치 당시 토문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여기에 설책과 둔대를 세운 바 있다. 즉 비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한 지류로서 토문강이므로 토문강 동편의 이른바 ‘동(東)간도’ 일대가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순조 8년(1808) 서영보(徐榮輔)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의 ‘백두산 정계’조는 《여지도(輿地圖)》를 인용해 ‘토문강 북쪽에 있는 분계강(分界江)에 정계비를 세우든지, 토문강의 발원지에 세워야 했다’고 적고 있다. 더 나아가 ‘고려 때 윤관이 속평강(速平江)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그때 세운 비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실학자 안정복(安鼎福)도 ‘두 나라의 경계가 된 분계강은 두만강 북쪽 300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
 
  고려시대 예종 3년(1108년)에 “윤관이 여진족을 평정하고… 비를 공험진(公嶮鎭)에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고 《고려사》가 전하고 있어 이곳이 조선과 명·청 사이의 국경선이며, 《세종실록》에도 세종이 명에 보낸 국서에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 소속”이라고 해서 세종 때도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인 공험진이 두 나라의 국경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국제정세 변화와 간도 귀속 문제
 
  조선에서 정계비의 토문강의 비정에 대한 이러한 인식 변화가 있는 가운데 170여 년이 지난 고종대에 들어 정계비의 해석이 다시 양국의 현안 문제로 부각된다. 1860년을 전후로 해서 조선인들이 간도 지역으로 많이 흘러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간도 일대가 청의 봉금 지역으로 청인들은 거주가 금지된 지역이었고 청 측의 관리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문 동편 간도 지역으로 조선인의 이주가 많아지자 1880년 청국이 토문은 두만(豆萬)이라고 하면서 1881년부터 길림의 장군 명안을 보내 간도 개척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조선인의 월경을 엄금하도록 조선 정부에 요구하면서 간도의 조선인을 소환하라고 통보해 왔다.
 
  이에 조선도 1883년에 정계비를 다시 조사하고, 이미 간도에는 상당기간에 걸쳐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여 땅을 개간해 살고 있음을 이유로 ‘동위토문’의 해석을 문제 삼아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조선이 영유권을 주장한 배경에는 당시 서구 제국 열강이 아시아로 밀려오면서 청국의 힘이 쇠약해졌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측은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며, 간도 지방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통해 국경을 확정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청나라는 1885년에 간도 지역의 조선인을 강제로 추방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 정부는 다시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요청함으로써 간도의 귀속 문제는 양국 간에 물러설 수 없는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간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백두산 북쪽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 길림성 동쪽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한편,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청국을 건립한 만주족이 이 지역을 그들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의 땅으로 삼고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과 청국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이 새로이 정착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로 불리기도 한다.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과 청국은 모두 3차례에 걸쳐 회담하였으나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아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런 사이에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에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협약’을 체결해 간도를 청 측에 넘겼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정계비마저 없앴다. 최근에 한국 연구자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서 남아 있는 정계비의 받침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牛峯 김씨의 입지전적 父子 역관
 
  김지남은 역관 박정시의 딸과 혼인하여 7남 3녀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아들 5형제가 역과에 급제했다. 5형제 중에서 김경문(金慶門·1672~1737년)은 부친과 함께 조선 외교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자는 수겸(守謙), 호는 소암(蘇巖), 본관은 우봉(牛峯·지금의 황해도 금천)이다. 아버지 김지남과 함께 우봉 김씨 부자 역관으로 불린다.
 
  우봉 김씨는 신라 내물왕대부터 1500년이 된 오래된 가문이다. 이들은 고려시대에는 고관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이성계의 집권에 협조하지 않아 고관에 이르지 못하였다. 대신 우봉 김씨는 중인 집안으로 번성했다. 족보에 의하면 17세기 이후 약 250년 동안 95명이 역과에 합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학을 포함하면 115회 이상의 잡과 중인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김경문은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18세 때 역과에 한학으로 장원급제, 첨정(僉正)과 사역원정(司譯院正)을 지내고 1711년(숙종 37) 청에 파견되어 국경 침범자 문제를 협의했다. 1712년에는 살펴본 바와 같이 부친과 함께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동행했고, 1714년에는 두만강 북쪽에 청국이 둔진(屯陳)을 두려는 것을 쟁론하여 철거토록 하였다. 영조 즉위년에는 조공품을 감축시키고 1725년에는 국경 문제를 추론하였으며 청국을 방문하여 무역의 폐해를 일소한 공로로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를 받았다.
 
  청의 사신이 올 때마다 응대에 능해서 왕이 가상히 여겼고, 항상 연석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역사와 제자백가를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눈에 지나친 것은 평생토록 잊지 않았고, 문장이 유장하고 조리 있는 것이 당대에 이름이 났다. 김경문의 부고를 들은 풍원부원군 조현명은 “나라에 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누가 외교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고, 영조는 대신들에게 “사방에 어려운 일이 많은 터에 오늘날 누가 다시 김경문같이 일할 사람이 있겠는가?” 물었다고 전한다.
 
  김경문의 많은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부친과 함께 백두산정계비 건립에 관여한 것이다. 김경문이 백두산정계비 건립 과정에서 보여준 외교력은 아버지 못지않았다. 《숙종실록》은 “공이 돌아와 산도(山圖)를 바치니… 지난날 경계를 다투던 근심이 이로부터 저절로 사라졌다”고 적고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김지남과 김경문 부자가 편찬한 《통문관지》는 조선시대 외교에 관한 필수적인 지침서로 사대교린 외교의 지침서가 되어 조선의 외교력뿐만 아니라 후세의 역관을 양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김지남 부자처럼 사명감이 투철하고 지혜로운 역관들이 대를 이어 조선의 외교를 뒷받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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