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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⑪ 사명대사 유정

國難극복에 앞장선 護國승려의 佛僧외교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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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를 도와 僧兵 일으켜 평양탈환 작전에서 戰功 세워 …, 성곽 구축, 軍器 제조 등에도 기여
⊙ 戰後 비공식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와 회담…, 포로 송환 등 관계 정상화의 기틀 닦아

張哲均
⊙ 6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 교섭을 한 사명대사.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는 1592년(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승군(僧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운 승병장(僧兵將)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15만 일본군이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명분하에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7년간 계속된 이 전쟁을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之役)’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면, 대마도를 거점으로 고려와 조선을 약탈해 온 왜구(倭寇)가 일으킨 전쟁이 된다. 이 전쟁은 왜구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 막부가 조선을 정조준해서 침략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명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된 ‘동북아 7년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단순히 임진년에 발생한 왜란이라고 하는 것은 검토를 요한다. 본문에서는 ‘조선·일본 전쟁’ 또는 약칭으로 ‘조·일 전쟁’으로 부르기로 한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참전한 명나라는 7년의 전쟁기간에 4년이나 휴전하면서 일본과 비밀리에 강화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에서 조선이 소외된 것은 물론이고 일본은 명 측에 조선의 분할을 제의하는가 하면, 명은 조선을 직할통치(直轄統治)하려고 했다. 전시에도 치열한 외교가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일 전쟁은 열전(熱戰)과 외교전(外交戰)이 혼합된 이중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전란 중에 사명대사(이하 사명·四溟 또는 그의 법명인 유정·惟政으로 호칭)는 외교밀사로 일본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만나 이러한 명·일 간의 음모를 탐지하고, 전란 후에는 조선의 외교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담판하는 등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올해는 을사조약 110주년, 광복과 분단 70주년 그리고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의 불편한 한·일 관계를 돌아보면서 불승(佛僧)에서 호국(護國) 승병장으로 그리고 외교사절로 변신하며 조선을 구하는 데 앞장섰던 사명대사의 생애를 추적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파란만장했던 사명대사 일대기
 
  사명대사에 대한 호칭은 다양하다. 그의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사명대사의 외교활동은 우리 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활동에 관해서는 현존하고 있는 허균(許筠)의 석장비(石藏碑), 사명의 고향 밀양에 있는 영당비(影堂碑),건봉사에 있는 기적비(紀蹟碑),그리고 파괴된 석장비를 복원한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 등 네 개의 비를 통해 복원되고 있다. 그리고 사명의 행적으로는 그의 제자 해안 등이 남긴 글들을 모은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에 전해지고 있다.
 
  이들을 통해 사명대사의 생애를 재구성해 보면, 그는 1544년(중종 39) 현재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7세에 이미 조부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13세에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황여헌(黃汝獻)으로부터 《맹자》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가 18세 되던 1561년(명종 16)에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승과에 급제하면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당시의 쟁쟁한 문사들과도 교유하게 된다.
 
  사명의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가족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증조부 효곤(孝昆)과 조부 종원(宗元)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사족(士族) 출신이었다. 현존하는 그의 시문과 외교활동에서 보여주었던 탁월한 협상능력은 사족 집안의 학문적 소양을 반영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1575년(선조 8)에는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어 선리(禪理)를 참구하다가 43세 되던 해 옥천산의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上)의 법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1589년에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己丑逆獄)에 휘말려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상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그는 스승 휴정을 도와 승병을 일으키고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1594년(선조 27)에는 외교밀사로 일본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 회담하면서 명과 일본의 비밀회담 내용을 탐지해 내 조선의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하여 강화를 협의하는 등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러한 외교활동에 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0여 년의 호국활동 후 64세에 세속의 일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내려가 정양(靜養)하다가 1610년(광해군 2) 67세에 법문하였다.
 
 
  사명이 활동했던 시대의 조선 정국과 불교의 위상
 
  사명 시대의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불행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조선을 창건하면서 표방한 정도전(鄭道傳)의 유교주의는 고려의 쇄망이 불교의 지나친 국정개입과 속세참여로 정치와 사회가 문란해진 데 따른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일이 경과하면서 점차 불교에 대한 배척이 도를 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사원과 승려 수를 제한하고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감축시켰고, 세종은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흥천 흥덕사를 제외한 도성 내 모든 사원을 철폐했다. 세조 대에 일시 흥불 시책들이 추진되었으나, 연산군에 이르러 선종본사인 흥천사와 교종본사인 흥덕사까지도 철폐하여 관청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승들을 궁방의 종으로 삼게 하는가 하면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게 하였다. 이어 중종도 사원의 전답을 향교에 부속시켰고, 불상과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불교의 경제적 기반은 거의 대부분 무너져 파불(破佛)의 지경에 이르고, 사회적 위상과 승려의 신분도 철저하게 격하된 것이다.
 
  명종 대에 이르러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승과가 부활되고 도승제(度僧制)가 다시 시행되면서 휴정과 사명이 발굴되기도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불교가 위치할 곳은 산간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산중승단불교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도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등 4대사화(四大士禍)의 여파로 축적되어 온 갈등과 모순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었다. 사화의 영향은 그 후 조선의 역사에서 치명적 상처를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이 사화들을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어 갔다. 선조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파 간의 치열한 내부 투쟁이 일어나고 여기에 잔존 훈구파들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당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세력이 붕당(朋黨)화하면서 정치가 더욱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러한 붕당정치의 지속은 지배계층의 혼란과 부패로 이어지고 국가재정이 고갈되면서 다시 일반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이어져, 농민들이 수취를 피해 도망하거나 도적이 되는 위기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사명이 살던 시대는 이러한 조선사회의 내부 모순으로 인해 국가체제가 효율적으로 운용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승병장으로 변신한 사명대사
 
서산대사는 승병을 지휘하여 평양탈환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의 상황에서 일본군이 침략하자 조선은 위기 대처 역량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파당적 이해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던 상황을 감안하면 전쟁 초기의 비참한 패퇴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592년(선조 25) 일본군의 침공 사실도 3일 후에나 알게 된 조선 조정은 일본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자 선조는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어기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파천(播遷)했다.
 
  임진강 전투에서도 패전하자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삼아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선조는 압록강 의주로 피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발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평양성을 함락하자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랴오둥으로 가서 명에 내부(內附)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임금이 한 발짝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닙니다(朝鮮非俄有也)” “동북의 여러 고을이 아직 건재하고, 충의에 찬 의병이 곧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선조를 계속 설득해 겨우 랴오둥 내부를 막았다.
 
  의주 행재소로 피란한 조선 조정은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静)을 초치해 세란(世亂)을 구해 줄 것을 당부하고 그에게 승군(僧軍)을 관장하게 하였다. 휴정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한편, 스스로 모집한 승병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 법흥사에 주둔했다. 당시 금강산에 머물던 사명은 의승(義僧)을 모으고 있었는데 휴정의 격문을 보고 법흥사에 합류했다.
 
  사명이 법흥사에 합류하자 73세의 고령인 휴정은 실전의 모든 책임을 사명에게 맡기고 그를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삼았다. 그는 승병군을 이끌고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 인근에 주둔했는데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의승군의 수는 무려 5000여에 이르렀다. 1592년 12월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자 1593년 1월 관군과 사명의 승군이 합동으로 평양성을 공략해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양성 탈환 후 개성까지 회복한 관군과 명의 원군은 서울 수복을 위해 일본군을 추격하며 전투를 벌이던 중 벽제관(碧蹄館) 부근에서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승병군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고, 이어 노원평(蘆原坪) 전투에서도 사명의 승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선조는 사명을 당상직(堂上職)에 오르게 해 승려를 당상관으로 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1594년(선조 27) 4월 이후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하고 사실상 휴전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산성수축에 착안하여 산성개축에 노력하는 한편,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고, 투항한 일본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전수받도록 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明·日 비밀회담과 소외된 조선
 
  1593년(선조 26)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명군은 서울 바로 북쪽인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하고는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 역시 벽제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서울에 머물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592년 4월 시작된 조·일 전쟁은 이듬해 6월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 1597년 2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기까지 4년 동안 전투가 없는 소강상태에 이른다. 왜 승리한 일본군이 남쪽으로 퇴각하고 휴전상태로 들어간 것인가? 이 4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명은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군과 격전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과 강화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명군의 총책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우리가 왜와 원수질 까닭이 없다. 속국이 넘어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특별히 군사를 일으켜서 서울과 평양을 수복시켜 주었다. 조선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군의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도 임진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으면서 강화에 적극 응했다. 명은 1592년 9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으로 보내 고니시 유키나가와 회담하고 그 결과를 당시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알려 왔다. “일본군과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50일 기한으로 왜병은 평양 서북쪽 10리 밖으로 나가서 약탈하지 말 것이고, 조선군사도 10리 안으로 들어가서 왜군과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일 양국이 이미 휴전에 합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명·일 강화회담에 조선은 완전히 소외되어 어떤 내용이 오고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 같은 회담의 동향을 눈치챈 사람이 재상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유성룡은 명 제독 이여송에게 일본과 강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간곡히 설명했으나, 이여송은 이 문제가 명 황제와 조정의 결정이니 자신이 바꿀 수 없다고 하면서 방해하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처단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명은 조선에 패문을 보내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휴전을 성사시킨 심유경은 북경을 다녀온 뒤 1593년 4월 용산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시 비밀리에 만나 회담한 후, 명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명의 사절에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 7개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1. 황제의 현숙한 여자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 관선과 상선의 왕래를 허용한다. 3.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서약서를 쓴다. 4. 조선의 8도 중 4도만 조선국왕에게 주고 4개 도는 일본이 갖는다. 5. 조선의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일본에 보낸다. 6. 두 왕자(순화군·의화군)는 돌려보낸다. 7. 조선의 대신이 위약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쓴다.
 
  그런데 심유경이 명에 돌아가 회담결과를 보고할 때는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항을 보고하지 않고 국서를 변조하여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내용만 포함시켰다. 이어 1596년 9월 일본에 파견된 명의 사절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 황제의 칙서를 전달했다. 이것이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은 북경으로 돌아온 명의 사절이 다시 표문을 위조해서 ‘수길(秀吉)이 책봉을 받고 사은(謝恩)하였다’고 보고했다. 양국의 국서가 위조되는 상황에서 화의가 성사될 리 없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1597년 2월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일본군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간 외교밀사 사명
 
사명대사와 교섭을 벌인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고니시와 심유경이 극비리에 강화회담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원수 권율과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사명대사를 외교밀사로 위임해 당시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미 경쟁관계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왜 사명에게 이러한 중대한 일을 맡겼는지 기록된 바는 없으나 가토가 불교신자였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토와 경쟁관계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였던 독실한 천주교도였다.
 
  동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생포 성은 바다와 육지를 잇는 길목으로 당시 일본군의 요새였다. 1594년(선조 27) 4월 12일. 사명대사가 이 성으로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갔다. 사명의 목적은 물론 적정을 탐방하고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명·일 회담의 내용을 탐문하려는 것이었다. 적진에 들어간 사명은 ‘북해 송운(松雲)’이라 자칭하고 ‘대선사(大禪師)’라 소개하면서 가토를 대면하였다고 전해진다. 가토가 휘호를 청하자, ‘자기 물건이 아니면 털끝만치라도 취하지 말라’는 필묵을 써 주었다고 한다.
 
  사명은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른 불승(佛僧)의 필담으로 가토를 압도하는 한편, 가토와 고니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도 적절히 이용했다. 그래서 그동안 명·일 간에 은밀히 추진되어 온 강화조건이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왕자 1인을 일본에 보내 영주시킬 것’ 등이 포함된 5개 항임을 가토로부터 알아냈다. 그리고 이 5개 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 항 중에서 2개 항을 제외시킨 것인데 그것은 고니시가 명나라와 강화를 쉽게 성사시켜 공을 차지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가토와의 경쟁에서도 이기기 위해서였던 것인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가토는 오히려 고니시에게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사명대사에게 그 내용을 털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명은 이 내용을 명의 유정과 조선의 김명원에게 보고(淸正營中 探情記)하여 명·일 강화를 저지시켜야 함을 설파했다. 이후 사명은 1594년(선조 27) 7월 10일,12월 23일 그리고 1597년(선조 30) 3월 18일 등 3회에 걸쳐 서생포로 다시 들어가 가토와 회담했는데, 마지막 회담은 가토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두 번째 왕래 후에는 선조에게 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보전할 글(討賊保民事)을 올렸다. 또 네 번째 방문 후인 1597년(선조 30) 4월에는 일본의 재침이 분명히 예상되므로 사태를 방치하지 말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육로와 수로로 협공하여 적을 섬멸시킬 것을 건의했다.
 
  허균이 쓴 석장비문에는 서생포에서 가토와 사명이 나눈 ‘설보화상(說寶和尙)’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가토가 “너희 나라에 보배가 있느냐”고 묻자 사명은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고 대답했다. 가토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자 사명은 “우리나라에서는 네 머리를 보배로 알고 있다. 그러니 보배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답했는데 이 말에 가토는 놀라서 탄복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 때문에 사명은 설보화상 즉, ‘보배를 말한 스님’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비공식 외교사절로 대마도 방문
 
  서생포 회담은 명·일 간의 조선영토 분할 획책 등 중대한 정보를 파악해 이를 저지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가토와 고니시 사이의 갈등조장으로 적진의 분열을 유도했으며, 적정탐문을 통해 군사적 대비를 가능케 했다는 점을 성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일 전쟁은 열전을 방불케 하는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시에도 중단되지 않고 전개된 사명과 가토와의 서생포 회담은 명·일 비밀회담으로 분할될 위기에 있던 조선을 구한 최고의 외교전이었다고 평가된다.
 
  전쟁은 본국에서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선조 32) 일본이 조선과 화친을 원한다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그 뜻을 조선에 보내 왔다. 조선으로서는 원수와 화친을 맺을 수 없다는 대의명분론과 중신들의 파쟁으로 인한 의견불일치로 결정을 미루어 왔다. 이렇게 여러 해를 끌던 중 1604년(선조 37) 대마도주가 다시 사신을 보내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이라면서 강화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전해 왔다.
 
  조정에서는 우선 사절을 만나 진의를 파악하는 한편, 일본의 동향을 직접 살펴보기로 하고 사명을 대마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왜 대마도가 조·일 강화에 적극 나섰는지부터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일 전쟁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이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조·일 간의 길목일 뿐 아니라 조선과 무역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곳인데 조선과 무역이 10년 동안이나 단절됐기 때문이다. 새로이 일본 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가 조선과의 강화를 열망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마도가 먼저 앞장서서 조선과의 화의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왜 이러한 대마도의 제의와 일본의 재침의지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의 정식 사절이 아닌 사명을 보내야만 했을까? 우선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던 명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명과 상의 없이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과 외교교섭을 재개하면 명과의 정치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이 정식 대표를 파견하기 곤란했을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정식 사절을 일본 수도에 보내지 않고 비공식 사절을 대마도에 보내 진위 여하를 타진해 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외교에서는 ‘막후채널’로 불리는 이러한 비공식 외교통로를 자주 이용한다. 그리고 특별히 사명을 선택한 이유는 이미 서생포 회담에서 검증된 사명의 외교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에 도착한 사명은 양국 화친을 추진하고 있는 대마도주와 평조신(平調信) 승려 겐소(玄蘇) 등을 만났으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대마도에 도착해서 서산사에 머물렀으며 겐소 스님으로부터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고, 대마도주도 일본이 재침 의지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사명에게 알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대마도 측에서 후일 조선에 보내 온 서한을 보면, 사명이 대마도 측과는 물론 일본과의 화친의 필요성에 공감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대마도에 있던 조선인 포로의 송환을 요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과 포로 3000명 송환의 진실공방
 
  대마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문 사명은 11월경 예정에 없던 일본 본국으로 떠난다. 당시 조선은 사명에게 대마도를 방문하여 도쿠가와의 재침 위협에 대한 진위 여하를 탐문하라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는 문제에 관해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본국은 방문 대상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명이 조정으로부터 위임받지 못한 일본까지 가게 된 것일까? 그 배경에 관해 기록된 바는 없지만, 사명의 일본 방문 결과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동기를 역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후일 대마도주가 조선에 보낸 서한이 실록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명은 대마도와 화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 본국과 화친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을 우려했다. 그러자 대마도주가 도쿠가와에게 편지를 보내 그 뜻을 전달했는데 도쿠가와가 “송운대사(사명)를 인도하여 일본에 오면 성의를 다하겠다”고 연락해 와서 사명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사명은 대마도주의 주선과 도쿠가와의 요청에 의해 일본에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명이 귀국 후 대마도의 승려 겐소와 대마도주의 측근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당시 사명은 일본에 가서 국정을 직접 탐문하고, 신의에 입각한 화평 가능성을 타진하며 일본에 잡혀간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명은 가토와 서생포에서 회담할 때도 불자의 입장에서 일본과의 화평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음을 볼 때 대마도주의 권유와 도쿠가와의 요청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새로운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명은 도쿠가와와 1605년 2월과 3월 두 차례 후시미 성에서 만났지만 일본의 공식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고, 관련 자료들을 통해 이 회담 내용의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되고 연구된 일본 측 기록과 사명의 귀국 보고, 그리고 일본 측과 오고간 서한, 석장비 등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후시미 성에서 협의된 사항을 정리해 보면, 1.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 2. 상호 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를 교환한다. 3.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을 송환한다. 4. 전란 중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조선에 인도한다는 것 등이다. 일본 측 자료에서는 “이 회견에서 일·조 간의 화의가 정해졌다”는 기록도 발견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하는 사명의 신분은 정식 외교사절이 아니고 국서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승려 신분에 불과했지만, 그는 일본 막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외교 담판을 벌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 도쿠가와는 자신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으며 도요토미 막부와는 다른 정부라는 입장을 밝히고 조선과 강화를 맺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 데 대해 사명은 강화에 앞서 그 징표로 먼저 일본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내고, 왕릉 도굴범을 송환하도록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 회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사명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남녀포로 3000여 명을 스스로 준비한 양곡을 먹이면서 데리고 돌아왔다’고 〈석장비문〉과 〈행적(行寂)〉 등에 적혀 있음과 관련하여 이러한 포로쇄환설의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명의 귀국 시 피로인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명은 귀국 후 일본의 승려 겐소 등에게 서한을 보내 도쿠가와가 약속한 포로송환을 이행하도록 촉구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의 귀국 무렵인 1605년 5월에 대마도에서 1390명의 포로가 송환되었고, 2년 후 1607년에는 후시미 성 합의에 따른 제1차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후 송환된 포로가 1249명이었다는 역사 기록은 확인되고 있으므로 사명이 귀국 시에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포로송환 정황을 세월이 지난 후세에 개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마도주가 변조한 외교문서로 국교가 정상화된 조·일관계
 
  사명이 도쿠가와와 회담한 지 몇 개월 후, 소 요시토시 대마도주가 도쿠가와의 인장이 찍힌 국서와 도굴범 두 명을 보내 왔다. 이 국서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우리가 전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지난해 유정(惟政)에게 말한 대로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국서는 대마도주가 변조한 것이었다. 조선은 국서가 변조된 것을 알아챘다. 서체와 연호 등 과거 일본의 국서와 달랐기 때문이다. 도굴범도 선조가 직접 국문했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변조된 국서를 불문에 부치고 도굴범 두 명을 처형한 후 조·일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결정했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조선으로서는 7년의 전란 복구와 민생회복이 시급했다. 이러한 전란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가운데 한반도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넓히면서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남과 북으로부터 적을 두기에는 안보적 부담이 너무 컸다.(실제로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일본과는 끌려간 포로의 송환도 필요했다. 그래서 국서위조를 알고도 눈감고 1607년 사절단을 일본으로 보내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대마도주는 왜 사명을 도쿠가와에게 데리고 가고, 국서를 변조하면서까지 조선과의 국교재개에 적극적이었던 것일까? 이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대마도는 섬의 대부분이 산지로 농작물을 경작할 땅이 거의 없어 오랫동안 한반도를 약탈해 온 왜구의 소굴이다. 세종대에 이르러 대마도를 정벌하고 도주에게 왜구를 단속하는 대가로 독점 무역권을 주어 생존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전쟁으로 조선과 무역이 10년 동안이나 단절돼 타격을 입게 되자 섬은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조선과의 끊어진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지 않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해 조선 사신을 대마도에 파견하도록 유인하고, 국서를 변조해 조·일 관계 정상화를 공작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벼랑끝외교’를 구사했던 것이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는 당시 선조가 1607년 일본 막부의 장군 히데타다(秀忠)에게 보낸 국서가 전시돼 있다. 대마도주의 위조 국서에 대한 조선 국왕의 회답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어 대마도주가 다시 위조한 것이다. 전시관에는 위조한 옥새(玉璽)도 함께 전시돼 있다.
 
  1607년 우여곡절 끝에 조선은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하는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파견된 1차 사절단의 이름은 ‘회답 겸 쇄환사’였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답하고 조선인 포로를 찾아온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하고 조선은 1811년까지 12회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일본에 보낸 통신사는 조선의 문화외교 사절단
 
1655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 조선통신사는 ‘쇄환사’의 후신이다.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400~500명으로 구성됐다. 일행은 대마도에 도착한 뒤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오사카(大阪)까지는 뱃길로, 오사카에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평균 10개월~1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성심으로 이들을 대접했다. 통신사 접대 경비로 쓰인 돈이 10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1709년 에도 막부의 세입이 약 76만~77만 냥이었다고 하니 그 환영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쇄환사의 명칭은 네 번째 방일 때인 1636년부터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자, 문인, 서예가, 화가 등이 다수 포함됐는데 사절단이 묵는 객사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시문이나 서화를 의뢰하거나 필담을 나누려는 학자들로 줄을 이었다고 한다. 《해유록(海遊錄)》(대마도가 발간한 조선통신사 자료집)에는 ‘조선통신사의 방일로 물자뿐만 아니라 예술 학문 등의 교류도 왕성하게 이뤄져 현재 일본 문화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앞에는 지금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고 새겨진 현창비가 있고 자료관 입구에는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는 1980년 이즈하라 항 축제 때부터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는데 지난해 고려 보살좌상과 신라 금동여래입상이 대마도의 절에서 반출된 사건이 일어나 통신사 행렬 재현이 중단됐다고 한다.
 
  일본은 이 조선통신사 유적 유물들을 2017년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측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반대할 이유는 없겠으나 문제는 조선통신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이 다르다는 데 있다. 일본은 일본 근대산업시설(군함도 등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 포함)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이 과정을 보면서 통신사 유산 등재에 대한 우리의 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통신사 역사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매우 미진한 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의 유적 유물들은 물론 당시 조선통신사들을 안내하고 예우한 기록들까지 잘 보존하고 학계의 연구도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조선통신사’라는 호칭이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조선에서 온 통신사를 부르는 명칭인데 우리나라에서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통신사의 역사가 왜곡될 빌미를 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를 ‘일본통신사’, 혹은 ‘통신사’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을 변경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임이 명백하므로 ‘조선통신사’ 대신에 ‘대일 조선통신사’라고 공식명칭을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저평가, 일본에선 높이 평가
 
  사명대사의 외교 업적이 다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일본의 역사책 《근대일본국민사》에는 ‘승장군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는 승려로서는 아까운 인물이라 할 정도로 지모와 변론을 구비하였다. 그의 대담함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 같은 승려이지만 일본의 겐소나 승태 등과는 완전히 그 자질의 차원이 다르다’고 기록하면서 사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에도 방문 시 머문 곳으로 알려진 오오츠카 본법사의 지근 거리에 위치한 흥성사에는 ‘만기의 앞을 지나 삼계의 위를 초월한다’는 내용의 유묵이 걸려 있는데 그 말미에 ‘송운(松雲)’이라는 사명의 친필이 선명하다. 불교에서 선(禪)의 득도를 표현한 글로 4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구마모토(熊本)현은 조·일 전쟁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로 그와 관련된 유품만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여기에도 사명의 친필유묵 넉 점이 400년 동안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묵은 절의 초대 주지인 일진 스님이 사명대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일진 스님은 가토 기요마사의 스승으로 조선 침공 시 가토와 함께 조선에 왔는데 이때 사명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사명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주 인색했다. 사명대사의 외교활동과 업적에 대한 역사기록은 조정의 유교주의 관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폄하되고 평가절하된 것이 여러 자료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사명에 대한 인식은 승병장으로서의 전투능력이나 축성 및 노역의 지휘감독으로서 승도의 통솔능력을 인정하는 정도에서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대사가 불교를 배척하는 조선의 외교사절로 대일 외교활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시(詩) 한 수가 항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조정에는 세 정승이 있다고 하지만 나라의 안위는 승려 한 사람의 귀국에 달려 있다(莫通廟三老在 安危都府 一僧歸).’ 당시 왕조실록의 사관(史官)조차도 ‘조정에 얼마나 지모가 없으면 왜적의 사신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여 서로 돌아보며 어쩔줄 몰라 하는가. 승려가 아니고서는 국가의 긴급한 대책을 맡길 사람이 없었는가. 조정의 여러 신료들이 평상시에는 묘당에 높이 앉아 있다가 이같이 급한 일을 당해서는 아무도 계책을 내지 못하니, 나라를 구할 계책을 가진 자가 오직 유정 한 사람뿐이던가! 아아, 통탄할 일이로다’라고 적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일본을 매료시킨 佛僧외교의 소프트파워
 
  사명대사는 세속을 떠난 선문(禪門)에서는 법맥의 적통자였고, 전장에서는 용맹한 승병장이었으며, 외교에서는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 탁월한 외교 인물이었지만 역사에서는 폄하되어 후세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위업은 민중의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었고 민족의 영웅으로 회자되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사명대사의 전설은 조·일 전쟁 당시 민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수록한 《임진록(壬辰錄)》에서부터 시작된다. 70여 종의 이본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책으로 일제 때는 금서(禁書)로 지정되기도 했다. 임진록에는 사명의 활약과 함께 사명이 일본 왕을 항복시킨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암울했던 전쟁 와중에 탁월한 힘을 가진 민족적 영웅의 출현을 소망하는 민중의식이 《임진록》을 통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738년(영조 14)에는 사명대사의 전란수습의 공로가 인정되어 표충비(表忠碑)가 그의 고향 경남 밀양시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경술국치, 3·1운동, 6·25 등 나라의 위기 때마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고 해서 세간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고온 다습한 바람이 찬 비석에 닿아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현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 표충비 땀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표충비가 다시 부각된 것은 아직도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 사명대사의 신비한 힘을 기다리는 민중의 소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명대사의 대일외교는 호국(護國)외교이자 문화외교였다. 사명의 어떤 힘이 가토를 감화시키고 도쿠가와를 설득할 수 있었으며, 400년이 지나도록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외교력의 기반은 불자(佛子)로서 높은 경지의 내공과 법리의 득도(得道), 그리고 과단성 있는 성품과 학문적 소양 등이 기초가 되어 구성된 힘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실천적 지성인이자 문장가였다. 특히 사명의 초서(草書)는 당대 최고의 경지에 있었음을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사명의 외교력을 오늘날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소프트파워에 해당한다. 소프트파워는 물리적 힘이 아닌 문화적 가치로 상대를 감동시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말한다. 외교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도출해 내는 설득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교력의 핵심요소이다. 사명이 수행한 외교교섭의 결과가 사명의 소프트파워의 정도를 웅변해 주고 있다. 사명의 선문(禪門) 필담(筆談)이야말로 일본인을 사로잡는 소프트파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문화재 환수를 주도하고 있는 혜문 스님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를 환수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문화대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조선시대 협상의 대가였던 사명대사의 외교적인 수완을 이어받았다고 인정받은 것 같아 영광”이라고 소감을 피력해서 사명의 불승외교를 부활시켰다. 오늘날 한·일 양국 학계에서 사명대사의 외교활동을 재조명하고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가세해 연구에 진전을 보이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작금의 경색된 한·일 관계를 보면서 사명이 보여준 대일외교 활동과 그의 탁월한 외교력을 다시 주목해 본다. 아직도 한·일 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책임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비,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들은 과거사 처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울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외교력이 국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 사이에서 시험대에 오른 한국 외교의 미래을 생각하면서 사명의 외교력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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