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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⑩ 世宗

군사와 외교에도 안목이 높았던 名君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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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과의 관계에서 事大를 오히려 강화해 처녀 조공과 金銀 공물 면제받아
⊙ 북방 여진과 남쪽 왜구에 대해 和戰 양면전략 펼쳐 동북아 정세 안정시켜
⊙ 賤人 출신도 과감히 기용해 외교협상을 맡기는 실용정신 보여줘

張哲均
⊙ 6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 라오스 대사·駐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明나라, 여진족, 일본을 상대로 외교정책을 펼친 세종대왕.
  세종(世宗·1397~1450)은 일반적으로 문화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 배경에는 물론 안정적 통치기반을 물려준 아버지 태종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세종대의 황금시대가 열렸다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15세기 초 조선은 여전히 북으로는 여진(女眞), 남으로는 왜구(倭寇)에 시달려야 했다. 원(元)을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명(明)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세종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외교(事大外交)를 통해 중국의 발달된 문물과 기예를 수용하여 조선의 역량을 확충하는 한편, 국방력을 강화하여 북으로는 여진을 공략해 조선의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확장했으며, 남쪽으로는 적극적인 해양진출로 왜구의 약탈을 근절시켰다.
 
  오늘날에도 한 나라의 발전은 대외관계와 국내정치의 안정 위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국가안보에 관한 경구도 있다. 세종은 힘을 배경으로 한 전략적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세종은 문화 군주의 위상 못지않게 국가안보 태세를 튼튼히 하고 대외관계를 안정시켜 조선의 외교와 안보에도 크게 기여한 군주였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사대교린 체제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몽고 제국의 중국 지배가 끝나고 원(元)-명(明) 교체가 완성되어 1391년 한족(漢族)에 의한 명조(明朝)가 출범했다. 한반도에서는 다음해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었으며,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장기간 내란상태였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1336~1392)가 끝나고 통일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북아 세 나라 모두 국내정세와 국가체제가 변화하면서 기존질서는 동요하고 국제정세는 불투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이 당면한 대외관계의 우선적 과제는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자리 잡은 명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였다.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인 사대교린 체제의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외교문제였다.
 
  국제사회에는 국가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는 중국이 주도했다. 중국은 주(周)시대로부터 황허지역이 중원(中原)이고 그 문화의 우월함은 화(華)로 중화(中華)이므로, 주변의 이민족들을 야만으로 차별화한 후, 화이(華夷)의 2분법으로 이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구분했다.
 
  이후 진(秦)이 통일왕조를 건설하면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 특히 효(孝)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논리가 중화사상과 접목되어 새로운 가부장(家父長) 통치질서를 창출했다. 이 질서가 한무제(漢武帝)대에 제정된 황제의 연호(年號)와 정삭(定朔)의 사용, 책봉·조공과 같은 제도와 격식을 갖추어 정형화하면서 동아시아의 사대제도(事大制度)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이 아닌 소국들 간의 관계를 대등한 교린(交隣)관계라 하였는데 이 규범과 질서가 곧 동아시아 지역의 사대교린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책봉은 주변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를 군주로 인정하고 황제는 주변국의 왕을 자신의 보호하에 있는 군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연호와 정삭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그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절차에 따라 계기별로 사신을 파견 접수하고 일정한 규범에 따른 예물을 교환하는데 그 규모가 컸고 이를 조공이라 했다.
 
  이러한 불평등한 사대관계는 작금의 주권평등(主權平等)의 국제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규범이나 지난 2000년 동안 동아시아는 이러한 가부장 사대질서가 지배하는 ‘주권차등(主權差等)의 시대’였다. 사대제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대국과 소국 간에 ①책봉, 조공, 정삭, 연호 사용의 외교 형식을 통하여 ②소국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승인(오늘날의 국가승인 또는 정부승인)하고 ③소국의 왕위 결정이나 국정에 간섭하지 않으며(오늘날의 내정불간섭의 원칙) ④소국은 이중의 사대관계를 맺지 않으며 ⑤대국은 소국의 영토를 존중(오늘날의 영토불가침)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주권평등사회는 1648년 유럽 국제사회에서 체결된 협약에 따라 국민국가(nation state)를 구성원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체제’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체제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화’해 오늘날의 전 지구적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사대교린체제는 붕괴되고 국가 간에 주권이 평등한 사회가 도래하기는 하였으나, 베스트팔렌 체제에 있어서도 과거와 다름없이 대국과 소국은 똑같이 존재하고 있으며 주권평등이 대소국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의 至誠事大 외교
 
  세종이 즉위하면서 직면한 조선의 외교과제는 명과의 관계였다. 우선 조선과 명과의 관계를 보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4대불가론을 통해 친명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양국 간의 외교마찰로 조선 측에서는 한때 정도전을 중심으로 요동정벌 계획을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명 태조 주원장과 조선에서 정도전이 죽은 후 태종대부터 조공·책봉 체제가 확립되어 사행(使行)의 횟수는 1년 3사제(使制)로 결정되었다. 세종은 선대의 대명 사대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나 해결해야 할 현안은 산적해 있었다.
 
  특히 조선으로서는 명과 불편한 외교 사안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처녀와 금은(金銀)의 조공 문제였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명은 조선에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요구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進獻)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 명에 조공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은 광산에서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종대에 들어서서도 명은 각종 물자의 진상을 요구했다. 물자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조선에 파견되어 온 명사(明使)들을 접대하는 데도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특히 윤봉(尹鳳)으로 대표되는 조선 출신 환관들의 횡포는 매우 심각했다. 윤봉은 명의 내시(內侍) 진헌 요구로 조선에서 차출되어 보내졌는데 황궁의 내시부 장관급인 태감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조선에 명의 사신으로 와 10여 명이나 되는 자기 형제들의 벼슬을 청탁했다. 윤봉의 청탁이 도를 넘자 조정은 이를 거부했는데 윤봉은 돌아가 조선을 헐뜯고 모함하여 세종은 명 황제로부터 자신을 나무라는 국서를 받게 되었다.
 
  이후 세종은 명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명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성사대(至誠事大)’로 명을 섬기기 시작했다. 세종은 윤봉의 요구도 적극 수용하고 윤봉의 동생 윤중부를 2품으로 승진시켜 달라는 요구까지 들어주었다. 계속 명 사신들에게 정성을 다한 결과, 명 황제로부터 “왕은 조정을 공손하게 섬기고 정성스러움이 한결같아 현왕(賢王)이라 할 만하므로 중국 조정도 왕을 앞에서나 뒤에서나 성의를 다해 임할 것이오.”(《세종실록》)라는 친서를 받았다.
 
  세종이 명 황제에 대해 자신을 군신(君臣)의 관계로 낮춰 섬김으로써 훗날 ‘인신사대(人臣事大)’라고 평가될 정도로 저자세를 취한 데에는 그만한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세종은 우선 여러 차례 명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너무 심하니 이 조공을 면제해 주도록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요청에 명은 1430년(세종 12)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된 것이다.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
 
明과의 외교를 통해 세종은 이슬람 문물 등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장영실은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또한 세종은 명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자 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다. 태종은 세종에 대해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데 항상 밤새워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독서를 금지시켰는데도 내 큰 책들을 모두 청해 가져갔다.”(《세종실록》)고 했다. 중국으로부터 구해 온 서적들도 모두 탐독해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익히 파악하고 있던 세종은 수시로 명에 사행을 보내 서적, 약재, 악기, 화약 등 조선이 필요로 하는 각종 물자들을 확보하여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열어 나가는 토대를 마련했다.
 
  일례로 세종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측우기와 해시계 등의 발명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이 읽은 책에는 원대로부터 고려에 반입된 서적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는 원대에 중국에 도입된 아랍의 이슬람 문명에 관한 책들과 이에 관한 정보들도 상당히 기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몽고 왕조인 원은 한족(漢族)을 피지배층으로 하고, 아랍인들을 제2계층의 신분으로 하여 행정을 그들에게 맡겼는데 당시 대몽고 제국하에 있던 이슬람권은 천문학, 수학, 과학, 건축 등이 고도로 발달했었다. 명은 원을 접수하면서 이러한 이슬람 문명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세종은 그것을 명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종은 동래현(東萊縣)에 재주가 뛰어난 기술자로 이름이 난 천민(賤民) 장영실(蔣英實)을 발탁한 후 우선 명에 유학시켰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이슬람 문명의 천문학과 과학을 접할 수 있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본 것을 모방한 것으로 완전자동 물시계는 아니었지만 이 공로를 인정해 세종은 그를 노비 신분에서 면제해 주고 곧 이어 정5품 벼슬을 제수했다. 이후 장영실은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해 천문관측대를 건설하고 세종 14년에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渾天儀) 등 최첨단 과학기기들을 고안해 설치했다. 이어서 세계 최초의 독자적인 발명품인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와 자동물시계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어 냈다.
 
  세종이 명에 지성사대한 이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선이 처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안보위협에 대처하고, 북방의 국경을 획정하는 데에는 명의 우호적 태도와 지지를 확보해야 하는 외교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대관계에 대한 우리의 역사인식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대제도는 대소국이 공존하던 동아시아 구성원 상호간에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국제규범이었다. 사대제도는 외교질서로, 이것은 옳고 그름 또는 자긍과 굴욕이라는 이원적, 대립적 구도에서 평가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선린우호 관계를 맺고 안보협력을 하는 것은 전략적 외교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사대외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대의 본뜻 즉, 모화(慕華)의 사대주의(事大主義)로 마음으로부터 큰 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주의 외교이다. 이러한 심정적 사대는 전략적 사대와 구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종의 대명 지성사대 외교를 변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종의 지성사대는 심정적 사대가 아니라 전략적 사대 차원에서 전개하여 조선의 국익을 증진시키고 문화 르네상스를 열어 나가는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자주와 자존을 내세우는 사대주의자도 많이 있었고, 사대제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국익을 확보한 인물도 간혹 있었다. 바로 세종이 후자의 사례인 셈이다.
 
 
  北虜南倭와 有備無患의 군사대비 태세
 
  명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조선이 당면한 외교안보 과제는 북의 여진과 남의 왜구 문제였다. 여진은 본래 고구려에 속한 소수민족이었으며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에 편입되었는데 평안도 방면은 고려의 서희가 거란과의 외교담판을 통해 고려에 편입시킨 바 있었고, 두만강변의 여진은 고려 중반 윤관이 9성을 쌓아 함길도(함경도) 일대를 편입한 바 있으나 여진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여진에 돌려준 적이 있다. 이후 동북방의 여진은 금국(金國)을 세웠다가 후에 원에 귀속되었고 원말명초(元末明初)에는 다시 압록강계에서 고려와 대치하며 경계를 넘어 약탈해 온 바 있었다.
 
  남방에서는 명과 조선 그리고 일본 간의 삼각관계에서 왜구 문제가 현안이었다. 명 태조는 중국 연안을 약탈하던 왜구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할 것을 요구했는데 왜구의 침략이 멈추지 않자, 1380년 막부(幕府)의 장군에게 문서를 보내 왜구의 약탈행위를 책망하면서 일본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신흥 왕조인 조선에 있어서도 대일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왜구였다. 따라서 조선의 대일관계는 왜구를 통제하여 동북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문치(文治)만큼이나 국가안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부왕 태종의 영향도 컸다. 태종은 세종에게 자주 ‘화포는 군국(軍國)의 중대사’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세종은 즉위 후 태종의 군사전략에 따라 군사대비 태세를 강화해 나갔다. 우선 군사제도를 정비했다. 조선 초기의 중앙군제는 태종이 왕권을 장악하면서 사병(私兵)이 혁파되고 중앙군이 핵심을 이루게 되었는데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세종 5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중앙군은 수적·질적으로 증강되었다.
 
  특히 세종은 신무기 개발에 진력했다. 당시의 첨단 신무기라면 화포(火砲), 즉 총통이었다. 최정예 총통위(銃筒衛)를 설치하여 화포·총통 기술을 혁신하였고 북방에는 오늘날의 포병부대에 해당하는 화통군, 화포군이라는 화포부대를 배치해 영토개척과 국토방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군사장비와 군사전략의 혁신을 가져왔다. 또한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대규모의 침입에 대비해 유비무환의 차원에서 상설군(常設軍) 외에 현재의 예비군 제도와 같은 잡색군(雜色軍)을 만들어 국민 총동원 태세를 갖추었다.
 
 
  공세적 해양 정책
 
  국가안보와 관련해 세종시대에 특이할 점은 우리 역사에서는 최초로 일관되고 적극적인 남방으로의 해양진출 정책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병조 참의 박안신(拍案臣)이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사방(四方)으로부터 적을 맞이하는 형세’라며 수군의 강화를 제안한 데 주목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중심으로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전문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생각을 바꿨다. 세종은 “해적을 제어하는 데는 선군(船軍) 같은 것이 없다”(《세종실록》)는 최윤덕 등의 ‘수군중시론(水軍重視論)’을 받아들여 수세로부터 공세적인 해양진출로 선회하였다.
 
  물론 당면한 해양정책은 수시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는 왜구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세종은 병선의 건조와 성능을 개선하는 데 지속적인 노력을 쏟았다. 해안가 천민 출신의 선박 전문가 윤득홍(尹得洪)을 발탁했다. 각국의 배 만드는 기술자도 동원해 외국선박과 우리 병선을 비교하며 개선해 나갔다. 세종은 또한 하삼도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방어에 필요한 성보(城堡)를 축조해서 왜구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후 왜구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이러한 해양정책과 함께 수군대비 태세의 결과였다. 세종은 윤득홍에게 병선(兵船)과 조운(漕運)을 관장하는 2품의 직위를 제수해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전방위 군사대비 태세로 세종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육군(16만)과 수군(5만)을 갖추고 있었다. 뜻밖의 일이지만 세종시대의 국방력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방력을 배경으로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를 공략하는 일방, 이들에 대한 포용외교를 통해 조선의 대외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는데 이러한 대외관계의 안정이 국내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문화적·경제적 황금기를 이룰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세종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유비무환의 경구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북방 여진에 대한 和戰 전략
 
  세종은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마침내 여진 공략에 나섰다. 여진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평안도와 함길도 일대를 약탈해 왔는데 세종은 우선 서북방면의 압록강계부터 공략했다. 이 방면의 여진족은 태종대에는 공민왕 때 설치한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강계부로 승격시켜 압록강 남안(南岸)이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된 바 있었다. 세종은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삼아 이들을 정벌케 하였다. 세종은 먼저 명에 사신을 보내 압록강 북방에서의 여진 공략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 조선군은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섬멸하고 압록강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지역에 4군(四郡)을 설치했다.
 
  압록강계를 확고히 한 세종은 두만강변의 여진을 주목했다. 이 지역은 본래 고려 윤관이 9성을 설치했으나 여진에게 돌려주었던 함길도 지역으로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원으로부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한 데 이어 고려 말기 이성계가 이 방면에서 무공을 세워 개국 초에 조선의 영역은 이미 두만강 하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진의 출몰과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1410년(태종 10)에는 두만강 유역에서 조선군은 이 지역의 가장 큰 여진 부족인 우디거족(兀良哈族), 오도리족(斡朶里族)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우디거족의 내습이 잦아지고 세종 때에 이르러서도 여진의 출몰과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1425년(세종 7) 경부터 조정에서는 경계를 후퇴시키자는 의논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세종은 “조종(祖宗)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며 적극적인 북진책을 견지했다.
 
  1433년 우디거족이 알목하(斡木河·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러한 여진족 사이의 내분 기회를 포착해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하여 북방개척을 과감하게 추진해 갔다. 명에 대해서는 서북면 공략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적 양해를 구했다. 그리하여 1434년(세종 16)부터 시작해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에 육진(六鎭)이 설치되었다.
 
  세종은 사신을 명에 다시 보내 두만강 이남이 조선의 영토임을 설득해 명의 동의를 얻는 외교적 조치도 잊지 않았다. 당시의 사대질서하에서 조선의 경계는 명의 동의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명은 여진의 반발을 고려해야 하고 조선과의 국경선 설정이라는 중대한 외교적 협의과정에서 조선의 입장을 수용했는데 여기에서도 세종의 지성사대 외교가 작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은 이어 강원도와 하3도의 주민들에게 우대책을 실시하여 함길도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도 병행해 영토화를 촉진시켰다. 이 어려운 작업은 김종서의 몫이었다. 그리고 북방경계에서 약탈이 봉쇄당한 여진을 무마하기 위해 기미책(羈靡策)을 실시했다. 그들을 지속적으로 위무하면서 북방경계를 안정시켜 나갔다. 화전양면 전략의 성공사례로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대마도 정벌
 
세종은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했다.
  북방의 여진과 함께 조선이 당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안보과제는 왜구였다.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약탈하고 만행을 저지르던 일본의 해적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일지도·송포 등 일본 서부지역 도서가 중심이었으며 조선에서는 이들을 삼도왜(三島倭)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왜구는 지방 영주들의 보호와 묵인하에 조직적으로 해적행위를 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전란에서 패배한 북구주의 무사단과 송포당(松浦黨) 등 조직무장 집단,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곤궁에 빠진 생계형 영세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왜구대책은 태조 이성계가 구체화했다. 태조는 해안 요처에 성을 쌓고 봉화를 설치해 왜구를 토벌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 막부와 통교하여 공동으로 왜구를 통제하는 외교적 대처방안도 모색했다. 태조는 즉위 초 실정막부뿐 아니라 왜구에 영향력을 가진 서부지방의 구주 호족들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진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정종과 태종도 계승해 왜구의 발호를 상당부분 통제했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에 왜구의 통제에 적극 협력하였던 대마도주가 죽고 나이 어린 아들이 도주직을 계승하자 왜구가 다시 도내의 실권을 장악하고 흉년으로 생활이 궁핍하였던 왜구의 조선 침입을 묵인하였다. 이에 1419년(세종 1)에 왜적선이 서해 연평곶에 침입한 사건을 계기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다.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침략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정부가 대일외교 체제를 주도적으로 정비하고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정부가 그들을 회유하는 차원에서 입국을 관대하게 열어준 결과 지금의 창원 인근의 항구 내이포(乃而浦)에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는데 1435년(세종 17)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경상도 관찰사는 “내이포에 와서 사는 왜놈 수가 계속 늘어나 수년 동안에 거의 수백 호(戶)나 되었으니, 이것은 뱀을 방안에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독을 마구 뿜을 날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빨리 본토로 돌려보내어 후회가 없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세종실록》)고 조정에 보고했다.
 
 
  왜구에 대한 포용외교
 
  조정 대신들이 무력을 사용해 내이포의 왜구를 축출해야 한다고 격론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세종은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관세를 부과하는 교묘한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부터는 상선으로 운반해 온 물화(物貨)를 판매하기를 이미 마쳤다면, 즉시 돌려보내어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만약 혹시 우리 땅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곧 우리 백성과 다름이 없게 될 것이니, 반드시 모두 세금을 거두어 국용(國用)에 충당할 것이다.”(《세종실록》)
 
  전투 대신 외교로 선회한 세종은 일본을 수시로 왕래하며 피로인((疲勞人)을 송환하고 일본인과 친교가 두터운 이예(李藝·1373~1445)를 내세워 이 문제를 일본과 교섭토록 했다. 그 결과 1438년(세종 20)에 조·일 간에 문인(文引)제도가 채택되었다. 조선으로서는 문인을 발급할 독점적인 권한을 대마도주에 부여하고 관리하게 함으로써 왜구로 인한 폐해를 줄이고 일본 각지로부터의 도항왜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에 대마도주는 문인제도를 이용하여 각처의 사신들을 통제하고 문인발행에 대한 수수료를 받음으로써 대마도내에서의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어 세종은 대마도주에게 인정한 문인제도를 문서로 법제화하고 대마도를 매개로 하는 대일교역의 조건을 확실히 규정하기 위해 1443년(세종 25)에 이예를 다시 대마도에 파견했다. 이예는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과 협의하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이 약정의 내용은, 첫째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하사하고, 둘째 대마도주는 매년 50척의 배를 보낼 수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정해진 숫자 외에 특송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세견선(歲遣船) 정약과 함께 승선 인원수, 체류기간 등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왜인의 횡포와 질서문란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양국의 핵심 외교사안인 교린체제와 무역체계는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2개 항목만 전해져 오고 있는 계해약조는 대마도주와의 세견선과 특송선 등을 약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단순히 대마도주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일본과의 무역을 제도화하고 도항왜인의 규모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힘이 뒷받침하는 외교로 상대를 다스린 성공적 외교로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의 협상이론으로 본다면, 완전승리를 추구하는 게임이론이 아닌 조금씩 양보하여 윈윈(win-win)의 결과를 도출하는 상생적 협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賤人 출신으로 2품까지 오른 李藝
 
일본과의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한 이예.
  세종의 치세에서 주목할 점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서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해시계를 발명해 과학혁명을 가져온 장영실(蔣英實),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을 건축해 종1품에 오른 박자청(朴子靑), 해안가 출신으로 2품의 직위에 올라 병선(兵船)과 조운(漕運)을 관장했던 윤득홍(尹得洪) 등은 모두 천인 신분의 출신 배경을 갖고 있다.
 
  대일본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2품에 오른 이예도 아전 신분의 천인 출신이었다. 이예는 학문에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지적능력과 협상력을 요구하는 외교사절로서 오늘날의 직업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대륙 중국에 집중된 당시 조선의 대외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방의 해양국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사실상 개척한 선구자라는 점에서 그는 입지전적인 외교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세종은 그의 출신성분보다 능력과 전문성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세종은 인재를 등용하면서 적재적소에 배치한 후 지속적인 신뢰를 보임으로써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일례로 최윤덕(崔潤德·1376~1445)은 무과에 급제한 무신으로 1428년 병조판서를 지내고 1433년 다시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압록강 유역에 침입한 여진족을 다시 물리치자 우의정에 올랐다. 최윤덕은 무관이 재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사양했으나 세종은 1435년 좌의정에, 이듬해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에 임명했다. 퇴임 후에는 궤장(几杖·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하기도 했다.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문관으로 행정능력은 뛰어나지만 몸집도 작고 무예를 못해 무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김종서의 근면함과 신중한 일처리 능력을 보고 그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보내 여진을 물리치고 까다로운 사민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세종은 “비록 내가 있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를 재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세종은 대일본 외교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하는 이예를 시기한 대신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세종이 71세가 된 이예에게 일본에 붙잡혀 간 피로인 석방 임무를 다시 맡기자 이예는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사는 것은 염려하지 않습니다”(《세종실록》)고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議政府) 서사제(署事制)를 실시했다. 세종은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윤회(尹淮) 등 세 정승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를,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를, 그리고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 보도록 했다.
 
  세종은 이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로운 균형을 취했다. 이들 재상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종 리더십의 白眉는 실용정신
 
  세종의 성공적 국가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일관성과 지속성을 갖는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일까. 바로 실용(實用)정신이다. 실용은 유용성·효율성·실제성을 의미한다. 이 실용이 세종의 영민함과 근면성, 창의력과 상상력, 결단력과 실천력에 접목되어 그의 리더십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실용정신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각인시킨 한글의 창제 이유가 바로 위민(爲民)의 유용성, 언어의 효율성, 그리고 문자의 실제성을 아우르는 실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실용은 한글 창제뿐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시현되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도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이 그 출발점이었다. 대명외교에서 세종은 인신(人臣)사대로 평가될 만큼 낮은 전략적 자세를 취했는데 그 대가로 북방의 영토를 명으로부터 인정받고 선진문물을 도입할 수 있었으며 처녀와 금의 진헌을 중단시키는 실리를 챙겼다. 외교에도 실용정신이 그 바탕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에 대한 ‘힘을 겸비한 포용외교’, 그리고 대마도주와의 ‘상생 협상’도 실용에 기초하고 있다. 세종은 “은혜가 없으면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가 없다”(《세종실록》)는 인식을 갖고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했던 것이다. 세종은 시대에 앞서 이미 근대 외교의 효용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 황금시대는 세종의 실용에서 비롯되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실용주의는 근대 미국의 국가건설에 한 축을 담당하면서 국가발전의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부상하는 중국의 경제발전은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정경(政經)을 분리해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노선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그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실용주의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세종의 치세는 14~16세기 사이에 진행된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초기에 해당한다. 이 중세의 르네상스가 훗날 실용과 접목되어 근세 과학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지면서 중세와 근세를 이어 주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의 문명을 주도하고 있는 서구문명의 원천인 르네상스의 초기에 지구의 반대편 동방의 조선에서 실용으로 무장된 세종의 르네상스를 찾을 수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의 실용은 유감스럽게도 후대에 그 명맥이 끊겼다가 정조((正祖)대에 정약용(丁若鏞)의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부활했으나 단명했다. 교조적 유교논리의 함정에 빠진 조선은 끝내 구한말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1960년대 남한에 등장한 실용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화는 이어 민주화를 동반했으나, 오늘날 양극화의 역풍(逆風)으로 주춤하면서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고 있는 작금의 한국에서 세종의 실용이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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