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③ : 월간조선

나는 매일 오전 7시, 스테로이드 알약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스테로이드는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획기적인 약물이라고 불린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막말로 스테로이드가 없었다면 내가 결국 중증 근무력증으로 죽을 확률이 30% 정도였다. 이 병의 특성상 근육의 무기력증이 눈에서 팔, 다리로 옮겨 다닐 수 있다. 만약 호흡을 주관하는 근육에 붙으면, 호흡이 곤란해진다.

스테로이드가 나오기 전에 중증 근무력증 환자의 30%가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숨이 막혀 죽는 것이다. 내게 스테로이드는 고맙기 그지없는 약물이다.

스테로이드는 온갖 기능을 가진 약이다. 우리 몸에 들어가 다양한 기능을 한다. 나에게 스테로이드는 면역 기능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내 몸이 나를 공격하는 자가면역 질환자인 나는 면역 기능을 억제시켜야 한다. 스테로이드는 피부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바르는 약, 관절 치료용으로 주사 등 다양하다. 나는 스테로이드 알약을 먹는다.

스테로이드가 획기적인 치료제이다 보니, 사실 나는 중증 근무력증 확진 판결을 받기 2주 전부터 이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안과, 내과, 이비인후과 친구들 4명이 내 질환 때문에 모여서 ‘일단 스테로이드를 쓰고 보자’고 해서 결정한 일이다. 이렇게 중증 근무력증에는 ‘돌팔이’인 의사들 넷은 내 복용량을 하루 40mg으로 정했다. 내가 솔직한 고백으로 썼지만, 이는 절대 올바른 의료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환자가 되고 보니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어찌 보면 스테로이드를 먼저 복용한 행위 역시 의사라는 지위를 스스로 남용한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다.

스테로이드 복용하면 허기 느껴

확진 판정 후, 나는 주치의로부터 하루에 60mg을 복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부터 나는 한 알에 5mg인 스테로이드 12알을 매일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이 스테로이드는 부작용이 굉장히 크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하루 10mg을 수주일 이내에 투약하면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100% 부작용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는 부작용을 경험한다. 고혈압, 비만, 당뇨, 고관절의 이상, 골다공증 등이 생긴다. 쉽게 말해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 살이 찌고, 살이 찌니 혈압이 오르고, 당뇨가 생기고, 골다공증, 무혈성 고관절 괴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첫 번째 시작은 굉장한 허기를 느낀다는 점이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할 때 그렇다. 다시 말해 하루 종일 배가 고프다.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배고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픔을 얘기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자신의 창피한 얘기라며 들려준 적이 있다. 평소 먹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병으로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뒤 엄청나게 식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지인이 하루는 결혼식장에 갔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메고 온 가방을 자리에 놓지도 않고 곧장 뷔페 음식을 가지러 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스테로이드는 음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에게 이 정도로 식욕을 돋우는 약이다.

정말 사실이었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나니 원래도 좋았던 식욕이 배가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배고픔을 야채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그날 이후 나는 도시락 크기만한 용기에 야채를 들고 다닌다. 최소 하루에 7번씩 드레싱을 뿌리지 않은 생야채를 먹고 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고, 또 먹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한 번 씹을 때 최소 30번을 씹으려 노력한다. 포만감을 주기 위해서다.

‘먹되 살 안 찌는’ 방식의 식사법

의사인 나는 인간이 그리 잘 참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안다. 배고픈 상태인데 애써 참으며 음식을 먹지 말라는 얘기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배고픈 상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생야채로 위장을 채우는 것이 답이다. 영양 밸런스를 위해 여기에 약간의 탄수화물과 다양한 단백질을 추가해 먹고 있다.

나는 병에 걸리기 전에 원래 혈압이 135/95 정도로 혈압약을 복용해야 하는 상태였다.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이 질환에 걸렸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정신없이 먹다 보면 살이 찔 것이고, 또 혈압이 종전보다 더 오를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생야채를 주식으로 하는 것과 동시에 무염식을 해 보기로 했다. 해감하지 않은 해산물에는 소금기가 있으니, 엄밀히 말해서 소금을 첨가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소금기가 없는 음식, 참 맛이 없었다. 하지만 별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원래 굉장히 긍정적인 성격이다. 좀 더 부연하면 매우 빠르게 합리화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금을 첨가하지 않은 음식을 장기간 맛볼 기회가 없겠지만, 나는 그럴 기회가 생겼다’며 받아들였다. 지나친 자기 합리화가 아니냐고 묻는 독자들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어차피 확진 판결 받은 순간부터 내 인생은 남이 경험하지 않은 길을 가도록 억지로 조종당하지 않았는가.

현재 지병으로 인해 저염, 혹은 무염식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달라고 말하면 딱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안다. 그저 내가 조언할 수 있는 것은 긍정으로 살아가자는 것뿐이다.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말고, 그냥 할 수 있다고, 그냥 그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하면서 먹는 것이다.

처음 먹으면 맛이 정말 없지만, 내 경험상 1~2주가 지나니 새로운 맛이 느껴졌다. 야채 각각의 색감이 다르듯, 씹는 맛이 다 달랐다. 단맛 있는 야채, 쓴맛 있는 야채 등 다양하다. 매일 생야채를 먹으면서 살다 보니 야채의 신선도도 구분이 된다.

환자가 되고 나서야 인간은 꽤 잘 적응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적응당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예전에 모든 사물이 둘로 보였을 때, 눈을 감고 벽을 손으로 짚으며 걷는 연습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손끝에 느껴졌던 느낌, 눈 감은 채 느껴지는 세상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

생야채 9개월 먹으니 혈압 정상으로 돌아와

나의 경우 생야채를 위주로 한 무염식을 한 지 3주가 지나면서부터 맛없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처음 3주를 버티는 것이 관건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무염식을 시작한 지 3주 만에 고혈압이었던 내 혈압이 정상 범위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스테로이드 복용의 부작용 중 하나가 고혈압인데, 고혈압 환자였던 내가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서 오히려 혈압을 떨어뜨렸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난 뒤, 나는 내가 선택한 무염식 식단이 오히려 고마워졌다.

흔히 어떤 운동이나 하기 싫은 것들을 언급할 때, 재미를 붙이기까지가 어렵지, 재미 붙인 뒤에는 일사천리로 실력이 는다는 말들을 한다. 무염식 3주 만에 나는 그렇게 재미가 붙었다. 내 집사람은 2~3일에 한 번씩 전국 각지에서 나오는 제철 야채를 주문하고 유기농 식료품점에서 야채를 산다. 우리집 냉장고는 말 그대로 야채 창고가 됐다.

나의 고백으로 인해 혹시 병을 앓고 있는 가족에게 ‘저 의사는 저렇게 의지가 강한데 왜 당신은 못하느냐’는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라면, 먹든 말든 냉장고를 야채로 가득 채워 놓기를 바란다. 먹지 않아 야채가 시들면 버리고, 또 채워 넣기를 몇 번 해 보라. 그 가족의 성의가 눈물겨워서라도 환자는 스스로 야채를 찾아 먹는다.

주위에서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환자가 된 지금 나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 생야채를 위주로 무염식을 시작한 지 9개월째인 지금, 내 혈압은 120/80으로 정상이다.

피부과 전문의인 나는 스테로이드 처방을 많이 해 왔다. 피부과 질환 중에 물집이 생기는 질환, 홍반성 남창 등이 오면 스테로이드를 처방했다. 스테로이드를 처방해 주면서 환자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심했던 것 같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는 환자가 되고 보니 나의 지난날이 반성된다.

우선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 엄청난 식욕이 생긴다는 것을 환자들에게 아주 충분히 설명을 해 줬어야 했다. 스테로이드 복용 환자들은 대부분 한 달 만에 얼굴이 달덩이가 돼서 병원으로 돌아온다. ‘문페이스(moon face)’라고 말한다. 들소의 목 뒤 살처럼 신체 목 뒤에 살이 쪄서 ‘버팔로 험프’가 되기도 한다.

의사들이 환자에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줘야

나는 과거에 환자들에게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면서 얼마나 배고픈지, 왜 야채로 배를 채워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뚱뚱한 채로 온 이들에게 “왜 그렇게 조절을 못했느냐”고 혼내기만 한 것 같다. 그저 “먹는 양을 좀 줄여 보세요”라고만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실천 불가능한 얘기만 의사의 입으로 내뱉은 거다.

나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싶다. 내분비내과 전문의인 내 친구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나는 이런 식이요법으로 7개월 만에 9kg을 뺐다. 혈압이 올라가는 약을 먹으며 혈압을 내렸고, 살찌는 약을 먹으며 살을 뺀 것이다. 내 친구는 나와 같은 사례를 본 적이 거의 없다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가 분명히 있지 않은가. 나는 의료진이 ‘어차피 알려줘도 저 환자는 하기 힘들 거야’라든가 그저 건성으로 약을 처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같이 거꾸로 가는 환자도 있듯이, 환자들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 더 성의있게, 진정성있게 병에 대해서, 또 투약하는 약에 대해서 설명해 줬으면 싶다.

환자들에게는 의지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병을 이겨내는 것은 본인이다. 의사들은 옆에서 도와줄 뿐이다. 간혹 의사들이 어떤 조언을 할 때 “그건 너무 힘들어요”라는 말을 하는 환자가 있다.

하지만 의사들이 무엇 때문에 어려운 일을 하라고 지시를 할까. 그건 전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다. 의사가 알아서 해 줄 것이라고, 현대의학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느긋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누구보다 의지를 가져야 한다.

내 병원에 환자들이 온다. 나는 “일주일 뒤에 방문토록 스케줄 잡으세요”라고 한다. 정말 꼭 병을 고치고 싶은 환자들은 “알았다”고 하고 방문을 나선다. 하지만 딱히 그 병이 최우선 순위가 아닌 환자들은 “그날은 무슨 일이 있는데, 혹시 다른 날은”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나는 이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무염식을 시작한 이후 나는 김치, 라면과 모두 이별했다. 딱 한 번, 모 회사의 도넛을 사 먹은 적이 있다. 친구와 길을 걷다가 그 친구가 먹고 싶다고 해서 50대 아저씨 둘이 도넛가게에 들어가서 사 먹었다. 세상에, 도넛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니! 나는 내 평생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억이 없다. 도넛을 입에 베어 무는 순간이 천국이었다. 스테로이드 장기 복용이 가져다준 순간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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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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