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자 김철진의 평양실록 ②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야 사건의 내막

실패로 끝난 북한판 ‘발키리’ 프룬제 사건

정리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러시아인 교수마저 ‘북한은 사회주의 아닌 스탈린식 독재’라고 비판… 소련 군사대학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실체를 알게 된 유학생들
⊙ ‘우리가 정권을 잡자’, 북한판 ‘발키리 작전’이 될 수 있었던 유학생들의 모의
⊙ 5년간 200여 명 숙청, 살아남은 이들도 고위 간부에는 등용 안 돼

[편집자 주]
분단 후 57년, 그 세월 동안 평양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김철진씨는 북한의 당과 군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남으로 넘어온 탈북자다. 평양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갖가지 사건에 대한 그의 증언을 《월간조선》이 입수해 연재한다. 이는 후일 통일 한국이 써나갈 새로운 대한민국 현대사의 사초로 활용될 수 있을 터다. 사실적인 기록을 위해 읽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 한 북한말 표현을 고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프룬제 군사학교 건물 전경. 다른 사관학교와 통합돼 지금은 종합사관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1993년 2월 8일, 평양의 인민무력부 본부. 갑자기 지시가 내려왔다. 본부 구성원 모두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명령이었다. 무슨 일일까, 의아해하는 부원들 사이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이 조선인민군 창건일이니 훈장수여식을 하려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다며 본부 부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석단에는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었던 최광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아래 연탁에는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흥희의 모습이 보였다.
 
  부원들이 모두 회의장에 들어오자 원흥희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인민무력부 안에 잠입해 있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을 모두 숙청하겠다!”
 
  그러자 회의장 양옆에 있던 출입문이 동시에 열렸다. 인민무력부 보위국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두 줄로 쏟아져 들어왔다. 완전무장을 한 채였다. 이들은 회의장 복도에 줄지어 서서 부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원흥희는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불린 이 앞에 득달같이 보위국 하전사 2명이 다가갔다. 한 명이 총을 겨누면, 다른 한 사람은 김일성 초상화 배지와 훈장, 견장을 떼어냈다. 주머니를 뒤져 신분증도 꺼냈다. 손을 뒤로한 채 수갑을 채우고, 어깨에 망토를 걸치게 한 다음 데리고 나갔다.
 
  이 자리에서 즉시 체포된 이만 70명을 넘었다.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이었던 홍계성 상장과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이었던 강영환 중장, 그 외에도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주요 장성들과 고위급 군관들이 줄줄이 끌려나갔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단서는 하나, 그들은 모두 소련의 ‘군사 아카데미야’ 출신이었다.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나뉘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성원들은 온몸이 땀에 전 채 회의장을 나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 5년여 동안 진행된 ‘소련 군사 아카데미야 유학생 숙청’은 이렇게 시작됐다.
 
 
  북한 군부 이끈 소련 군사유학생들
 
붉은군대의 지휘관이었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야는 1918년 레닌이 만든 군사교육기관이다. 붉은 군대의 지휘관을 길러내기 위해 세웠다. 창설 당시 명칭은 ‘참모 아카데미야’였다. 1921년 ‘붉은 군대 아카데미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5년부터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야’로 불렸다.
 
  프룬제는 군인이자 혁명가였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1885년 2월 2일~1925년 10월 31일)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루마니아 출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룬제는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붉은 군대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민병대를 조직해 혁명에 뛰어들었고, 후에는 트로츠키에 의해 동부전선 총사령관에 임명돼 반혁명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85년 김일성은 구(舊) 소련을 방문했다. 이때 김일성이 한 일 중의 하나가 북한의 군사간부들과 국방과학자를 소련으로 유학 보내기로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이듬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 명칭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각 연방국 곳곳의 군사대학에 북한의 군인·대학생들이 군사대학원생과 군사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파견됐다. 사실 소련 군사유학은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에 소련으로 군사유학을 떠났던 이들이 돌아와 북한 군부 요직을 잡고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100여 명에 달했다. 오극렬, 김일철, 조명록이 대표적인 50년대 소련 군유학생 출신들이다.
 
  군사유학생 선발 과정은 까다로웠다. 군사유학생의 경우, 일단 인민무력부 산하의 각 군사대학과 제2자연과학원 산하 평양국방대학(당시엔 강계공업대학), 룡성 약전공업대학에 재학 중인 2~3학년 학생만 선발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3번의 선발시험을 통과했다 해도 최종적으로 선발되려면 출신이 좋아야 했다. 최종 선발된 학생들은 3인조 또는 5인조로 편성이 돼 외국으로 출발했다.
 
  군사대학원생은 인민군대 각 군단과 병종사령부에 복무 중인 군사작전·기술 부문의 현직 군인 중에서 선발했다. 역시 실력과 출신이 좋은 사람으로 뽑았다.
 
  소련 곳곳에 꽤 많은 북한 군사대학원생·유학생들이 파견됐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모스크바의 프룬제를 비롯한 여러 군사 아카데미야와 군사기술대학에서 공부한 인력이 약 250여 명에 달했다. 모스크바가 아닌 다른 도시에도 파견이 됐는데, 크라스노다르(Krasnodar)에는 미그(MIG)기 조종사 육성 과정에 약 스무 명이 파견됐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잠수함 관련 인력 양성을 위해 역시 스무 명가량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보따리 장사하며 유학생활비 충당
 
군사유학생 숙청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었던 최광.
  군사유학생들은 꽤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인민무력부에서 장학금으로 매월 110루블가량의 생활비를 지급했고 지하철과 버스 등 모든 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줬다. 공연장이나 영화관 이용도 무료였다. 방학 때는 관광도 다닐 수 있게 해줬는데 모두 무료였다. 매해 1월 1일에는 최고사령관 이름으로 인삼술 한 병과 달력 두 개씩을 특별 지급해 줬다.
 
  매년 한 번씩 북한에 다녀갈 수도 있었다. 매해 7월 방학이 되면 모스크바에 있는 북한대사관 무관부에 모여 다함께 비행기를 타러 갔다. 평양에서 다시 소련으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로 비행기를 타고 나갔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 자격으로 유학을 나와 있던 일반 사회유학생들은 이보다 덜한 대우를 받았다. 일반 유학생들은 매월 장학금으로 85루블을 받았고, 다른 무료 혜택은 전혀 없었다. 북에도 2년에 한 번 다녀갈 수 있었고,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군사유학생이나 일반 유학생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대학의 구내식당의 한 끼 식사비가 보통 1루블이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하고 담배라도 사서 피우면 110루블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래서 시작한 게 장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외국에서 가져오는 물건은 대인기였다. 소련의 물건을 북한에 가져가서 팔고, 북한의 물건을 소련으로 가지고 나와서 팔면서 유학생활비를 댔다.
 
  방학이 시작돼 평양에 들어갈 때 여러 가지 물품을 사서 들고 갔다. 소련산 냉장고, 텔레비전, 손목시계, 카메라, 사진 필름, 사진 인화용지, 사진 현상액, 옷가지 등의 물건이었다. 평양에서 소련으로 나올 때도 물건을 사가지고 나왔다. 고려인삼 엑기스, 인삼차, 사슴표 운동화, 일본산 비디오녹화기, 세이코 손목시계 같은 물건이었다. 이 물건들을 수업이 끝난 후 팔았다. 구매하는 사람 중에는 소련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도 있었다.
 
  인민무력부에서는 군사유학생들이 장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학생들이 사상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다가 들키면 북한으로 소환을 당하기도 했다. 유학생들이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북한에서 감시하기 위해서는 ‘스파이’가 필수적이다.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는 유학생들이 속한 조에서 한 명씩을 선택해 보위부 스파이로 삼았다. 다른 사람의 사상이 어떤지 편지로 보고하게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스파이’는 동료를 감쌌다. 다 잘하고 있다는 보고만을 올렸다.
 
 
  ‘김일성 부자 연봉이 얼마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일단 장학금이 너무 적어서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장사를 해야만 하는 데에 불만이 컸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사상적인 의구심이 곁들어지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외국 유학생 중에는 독일, 뽈스까(폴란드의 북한말), 웽그리아(헝가리의 북한말), 벌가리아(불가리아의 북한말), 체스꼬(체코의 북한말), 쿠바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군인들이 있었다. 북한 유학생들은 이들을 통해 동유럽의 실상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매달 한 번씩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때 북한 유학생들이 조선(북한)의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면 다른 나라 유학생들은 신랄하게 비판을 해댔다. 이들은 조선식 사회주의와 자신의 나라의 정치체제를 비교하며 조선의 사회주의는 ‘스탈린식 독재’라고 말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여기에는 심지어 소련인 교수들도 가세했다. 북한 유학생들은 다른 나라 학생들에게 김일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김일성은 20세에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1937년 6월 4일 150명을 데리고 양강도 보천보를 기습했고, 1937년 6월 30일에는 600명을 거느리고 일본군 1500명과 중국 위만군 500명, 도합 2000명을 소멸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을 패망시키고 우리나라를 해방시켰으며, 해방 후 당과 군대를 창건하고 나라를 세웠다. 지금은 해마다 2월 16일과 4월 15일에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으로 1kg의 당과류를 선물로 주는 은정을 베푼다.’
 
  이렇게 말하면 군사대학 교수들과 다른 나라의 유학생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있나?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을 뿐이고, 일본은 소련과 미국 연합군이 패망시켰다. 김일성 부자의 연봉은 도대체 얼마이기에 전국의 아이들에게 당과류를 나눠줄 수 있나? 그야말로 개인을 숭배하는 독재정권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거듭해서 들은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조선식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이 싹텄다. 왜 우리나라만 ‘리조봉건’시기(조선시대)처럼 오직 한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통치하는가 하는 의구심과 불만도 쌓이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발각된 모의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1950년대 소련 군유학생 출신이다.
  결정적으로 유학생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 계기는 ‘북한으로의 전원 철수’였다. 소련이 붕괴한 후, 북한 정권은 군사유학생들을 전원 북한으로 불러들였다. ‘인민군대의 기둥이 되고 골간이 되어야 할 군사유학생들이 자본주의 황색바람과 날라리풍에 물 젖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유학생들은 북한의 군사대학으로 분산 배치됐다. 이들은 ‘북한 정권은 우리를 믿지 못하는가’하는 의문을 품었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자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들을 달래려 군사계급을 한 계급씩 높여줬다.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학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의 대우가 너무 달라진 것도 원인이었다. 유학을 떠날 때는 행여 이들이 남한으로 넘어갈까 봐 유학생들을 장성급으로 우대해 주다가, 북한으로 돌아오자 당 회의를 열어 사상투쟁을 한다며 사상 비판까지 해댔기 때문이다.
 
  군사유학생들은 서로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군사유학생들의 부모는 대부분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 같은 조직의 고위 간부들이었다. 출신성분과 성장배경이 비슷하다는 점과 소련에서 공부하며 나라 바깥의 실상을 보고 들었다는 점이 이들을 뭉치게 했다. 부모들이 고위직에 있으니 누가 우리를 잡을 수 있겠나 하는 자신감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뭉치게 한 이런 점이 훗날 군사유학생들을 사지로 몰고 간 올무로 작용했다.
 
  군사유학생들은 김일성 정권의 독재성과 부패, 사회주의 제도의 취약성을 정면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동유럽 나라들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사유학생들끼리 모여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모의는 너무 일찍 발각돼 버렸다.
 
  발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비밀을 지키는 데 허술했다’는 점이다.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다. ‘그 누가 우리를 잡겠느냐’하는 생각에 너무 공개적으로 행동했다. 뿔뿔이 서로 다른 대학과 부대에 흩어져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자주 만났다. 술도 마시면서 비밀리에 정권을 잡을 모의를 했는데 공개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결국에는 꼬리를 밟힐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군사유학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품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사유학생들끼리만 똘똘 뭉쳐 어울리고 ‘만약 정권을 잡는다면 군사유학생들끼리 나라를 이끌어 나가자’는 식으로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들의 모의를 지지할 이유가 있었을까. 결국 인민무력부 보위국이 군사유학생들의 모의를 염탐해 김정일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5년간 軍유학생 중 80% 총살
 
1940년대 프룬제 군사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모습.
  김일성과 김정일은 보고를 듣자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배반한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믿었던 군사유학생 출신들이었기 때문이었을 터다. 김 부자는 인민무력부 보위국에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소련 군사 아카데미야 사건이 시작됐다.
 
  숙청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1993년 2월 8일의 대대적인 체포 이후에도 숙청이 이어졌다. 소련 유학 시절 각 조에서 스파이 역할을 했던 이들이 가장 먼저 숙청당했다. 유학생들이 변절한 것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5년 동안 군인을 숙청하는데 그 과정이 어찌 순조롭기만 했겠는가. 1993년 말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김책공군대학에서 공부하던 17명의 군사유학생을 체포할 때의 일이다. 이들을 물자호송 식으로 평양에 데리고 온 다음, 평양역에서 체포하려고 하자 이 17명은 격투도 마다 않고 저항해 보위중대가 동원돼 이들을 진압한 일도 있었다. 숙청이 길어지면서 유학생뿐만 아니라 군사유학생들이 소련에 있을 당시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있었던 이들도 끌려 들어갔다. 당시 소련 주둔 북한대사관 군사 무관이었던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 등 무관부 출신들이 모두 체포됐다. 김학산 중장은 체포 당시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장이었다.
 
  5년의 시간 동안 군사유학생 출신의 80% 이상이 총살당했다. 홍계성 상장과 강영환 중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장성과 170여 명의 고급 군관 등 약 200명의 군사유학생 출신 군관들이 그들이다. 부모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중앙당, 인민무력부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는 이유로 경질됐다. 그 가족은 평양시에서 추방됐다.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사전에 모의를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아 보위사령부로 승격됐다. 보위국장이었던 원흥희는 중장에서 단번에 대장으로 특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준 은인이니 특진이 문제가 아니었을 터다.
 
 
 
‘프룬제 사건, 남한 짓이다’

 
  북한의 숙청 사건들이 으레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고 난 후 프룬제 사건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당에서 돈을 들여 키운 사람들을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이 숙청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2001년 6월 중앙당에서 모든 성급 기관과 당 조직에 비공개 지시문을 내렸다. 여기에는 프룬제 사건에 대한 다른 설명이 들어 있었다. 이들의 숙청이 남한이 보낸 간첩이 한 짓이라는 얘기였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이었던 리봉원은 남조선에서 보낸 간첩이었다. 프룬제 아카데미야 숙청 사건은 리봉원이 소련에서 선진 군사과학기술을 배운 유학생들을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었다. 이제 남은 유학생 출신들을 간부직에 등용해라.’
 
  지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50명 남짓한 군사유학생들은 거의 군복을 벗었다. 고위 간부직에는 등용되지 못했다. 이렇게 군사 아카데미야 유학생 사건은 종결됐다. 프룬제 사건 이후 소련 군사유학 프로그램은 완전 중단됐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