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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⑦ 광해군

외교로 부활한 패륜 군주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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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哲均
⊙ 64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 라오스 대사·駐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고 유배되었다.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 이복동생인 영창대군,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을 죽이고 결국 인목왕후까지 유폐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 때문이다.
 
  광해군은 사후에도 폭군(暴君), 혼군(昏君·어리석은 군주), 폐주(廢主) 등으로 매도되면서 조선 후반기 내내 ‘정치적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야 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있었음에도 연산군과 함께 왕의 묘호(廟號·국상을 마친 뒤 붙여지는 祖나 宗)가 없고, 실록도 일기로 폄하되었으며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해군은 그러나 역사 속에서 비슷하게 기억되는 연산군과는 달랐다. 수년간 임진왜란의 현장을 누비면서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후에는 전란을 수습하고 복구하는 데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파괴된 창덕궁과 경덕궁·인경궁을 중건하여 폐허가 된 서울을 복구했으며 왜란 때 소실된 서적들을 다시 간행하기도 했다.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이 이 시기에 쓰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後金·훗날 청)의 갈등관계에서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후금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끝내는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명·청 교체기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조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재조지은의 명분보다는 실리에 입각한 광해군의 자주적 외교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오히려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를 역사교과서에서는 중립외교 또는 중립 양단(양면)외교로 기술하고 있다. 중립이 외교정책 또는 안보전략이기는 하지만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구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조선으로서는 명과 청 어느 나라와도 외교를 하는 것이므로 양단외교가 광해군 외교의 특징을 잘 설명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광해군의 외교를 지는 명과 뜨는 청 사이에서 ‘등거리 균형외교’를 전개한 것으로 개념화해 보려고 한다.
 
 
  서얼의 둘째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폐주가 되는 배경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어려운 서얼의 둘째 왕자였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선조(宣祖)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좌의정 정철 등이 건저(建儲·세자 책봉) 문제를 제기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한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국 정철은 파직당하고 유배를 가게 됐다. 이 일로 인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졸지에 왕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많은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자 서울을 떠나 파천(播遷)했던 선조는 민심을 잃고 광해군이 추앙받게 되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광해군은 아침마다 선조의 처소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지만 선조는 그를 접견조차 하지 않았다. 선조의 태도는 분명 광해군에 대한 견제였다.
 
  선조는 1602년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았다. 선조가 새로이 맞이한 중전 인목왕후(仁穆王后)는 광해군보다 아홉 살 연하인데 결혼 4년 차에 아들을 낳았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나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파쟁이 확대됐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아야 한다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이 크게 대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07년 선조가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선조는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릴 수는 없어 병석에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하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세력의 후원에 힘입어 광해군은 파란만장했던 16년의 왕세자 세월을 마감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 ‘킹메이커’ 대북은 서인, 남인, 소북에 비해 그 세가 매우 미약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등에 업고 권력을 독차지한 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대북의 손을 들어주고 폐모살제까지 묵인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패륜아’가 된 것이다.
 
 
  전란에서 체득한 광해군의 외교·안보 감각
 
  광해군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세자가 없는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 조선은 다급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선조는 더 이상 세자책봉을 미룰 수 없었다. 결국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분조가 탄생한 것인데 분조란 ‘조정의 분소’로 조정을 둘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의 책임자로서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했다. 조선 역사에서 광해군만큼 왕궁에 기거하지 못하고 전란의 현장을 누벼야 했던 왕이나 왕세자는 없을 것 같다.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이 군량과 군수물자를 더 지원해 주도록 강압했다. 그 와중에 시달리는 것은 조선 민중이었다. 싸울 의지는 없이 장기 주둔에 들어간 명군의 민폐는 극심했고 군기가 풀어진 명군은 약탈과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군과 명군 양쪽으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했다. 민중 사이에서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한탄도 나왔다.
 
  그러자 명군 지휘부는 광해군에게 남방으로 내려가 명군에 대한 지원업무를 총괄하라고 요구했다. 선조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남행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곳곳을 순행했다. 각종 세금과 노역 때문에 도망하는 백성이 속출하고 있던 상황을 파악하고 포악한 지방관들을 처벌하여 지역 민심을 위로했다.
 
  1597년 정유재란(왜군의 2차 침략)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다시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아야 했다.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로 광해군의 분조 활동이 포함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민초들과 함께했던 분조의 활동은 광해군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또한 광해군은 지원하러 온 명군의 부패한 모습에서 기우는 명과 북방에서 일어나는 여진의 새로운 흥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전란의 현장이 동북아의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고 조선의 안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 후 명과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분명 그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명·청 교체기의 광해군 외교가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7년에 걸친 왜란의 현장에서 체득한 광해군의 경험과 안목이 그 배경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 책봉의 발목 잡고 조선을 흔드는 明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상은 확고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 조정이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1594년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명 조정에 주청(奏請)했다. 광해군이 전란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워, 온 백성이 그를 추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명 조정은 조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광해군이 맏이가 아니라 둘째이므로 그를 책봉하면 ‘장유(長幼)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주청사(奏請使)가 여러 번 북경에 갔지만, 명은 오히려 광해군에게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명은 후금의 도전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조선을 명에 붙잡아두기 위해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었던 왕세자 책봉 문제까지도 문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원해 준 자신들의 재조지은을 상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위계승을 승인해 달라는 주청에 대해서도 명은 다시 차서(次序) 문제를 걸어 여전히 둘째 아들 광해군은 승인할 수 없다고 했다. 즉위한 지 1년이 돼서도 명은 광해군을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도 임시로 국사를 담당하는 권서국사(權署國事) 광해군이란 호칭을 썼다.
 
  조선의 사절이 임해군이 중풍에 걸려 왕세자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이유를 대자 명은 임해군이 왕위를 사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명의 사절이 서울로 와서 임해군을 직접 만나겠다고 우겼다. 당시 임해군은 역모 혐의를 받아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들 사절에게 은 수만 냥을 주고 위기를 넘겼다. 정치적 곤경은 넘겼지만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다.
 
  드디어 1609년 명의 책봉사(冊封使)로 태감 유용(劉用)이 서울에 왔다. 태감이란 환관 또는 내시(內侍)를 말한다. 유용은 노골적으로 은을 요구했고 정식으로 책봉을 마치는 것이 급했던 광해군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으로서는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부패로 몰락해 가는 명의 모습을 확인하게 됐을 것이다.
 
 
  기우는 明, 떠오르는 淸 사이에서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의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동안 명은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키는 가운데 임진왜란에 파병까지 하면서 국세가 크게 기울었다. 반면 누르하치의 건주위 여진(후에 후금 건국)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 누르하치는 남만주는 물론이고 동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진족의 부족을 통합했다.
 
  명과 후금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북경으로 가던 동지사(冬至使) 신설(申渫)로부터 광녕총병(廣寧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조선을 정벌하고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자’고 황제에게 건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명이 조선을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었음을 광해군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성량은 왜란 시 조선에 파견된 명군 수장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자, 요동의 막강한 군벌(軍閥)로 조선의 내부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성량의 상주에 대한 명 조정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조선이 비록 흠이 있지만, 연개소문(淵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명나라를 섬겨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누르하치는 초피(貂皮)를 선물로 보내왔다. 광해군은 이들에 대해 기존의 유화책인 기미책(羈靡策)을 활용했다(‘기미’란 굴레를 가지고 소나 말의 얼굴을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한다. 중국 한무제가 흉노(匈奴) 등 주변 세력을 무력이 아닌 세폐 또는 물자 지원의 방식으로 대했던 유화책이다).
 
  광해군은 북방의 현장에서 여진의 흥기를 체득한 바 있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한편,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크고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조선은 쇠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후금과 누르하치에 대해 오랑캐로 무시하던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현실적 시각에서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선린 관계를 유지한다는 유연한 정책을 구사했다.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고 자강책 추진
 
  광해군이 즉위했던 그해에 후금이 오라 및 동해지방을 공략했다. 명과 후금 관계의 변화와 조선의 주변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던 광해군은 왜란 시의 전란의 경험을 토대로 전투상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견지하면서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해군이 무엇보다 필요로 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그 기마군을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 안에서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남방으로 눈을 돌렸다.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이지만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형세판단과 남방전략은 탁월한 것이었다. 국교 재개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을 왕래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오도록 했다.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각종 화포의 주조와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임진왜란에서의 체험이 작동한 것이다.
 
  또한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윤근수(尹根壽), 황신(黃愼)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신료들을 비변사(備邊司)에 포진시켜 변방 관련 대책과 국제정세에 대해 협의했다. 왜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일선에서 수행했고, 명군이나 일본군 지휘부와 직접 대면했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광해군이 조선을 침략했던 어제의 적인 일본과 전란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일본의 무기를 도입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명분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현대에 들어 미국은 전후 소련이 등장하자 하와이를 공격한 일본과 군사동맹을,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프랑스와 독일은 전후 유럽연합을 추진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원한 것은 국가이익뿐이다’라는 현실주의 논리를 광해군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북방의 위기를 대처하는 데 있어 남방의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접근 또한 뛰어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明의 파병 요청과 광해군의 파병불가론
 
  후금은 경제적 자급자족을 위해 요동지방의 비옥한 농토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명은 분명한 경계선을 정하고 여진족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금으로서는 무력침공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요동을 공격하고 무순을 점령했다.
 
  명의 병부우시랑(국방차관)이 국서를 보내 누르하치가 공공연하게 반역을 행하였으니 토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의 파병을 요청했다. 명분은 왜란 시 파병한 재조지은이었다. 조선은 징병이 불가피하다는 것과 파병하면 후금과 적이 되어야 하는 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이 보인 반응은 신중했다. 후금은 최강의 기마군을 갖고 있어 미약한 조선군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음에도 명이 파병을 청한 것은 조선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만약에 조선이 명에 원병을 보낸다면 여진이 마땅히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할 것이므로 조선으로서는 영토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 명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비변사 신료들의 주장은 달랐다. 그들은 명이 문서에서 대의(大義)를 내세워 ‘재조지은’에 보답하라고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병력은 보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자 광해군은 곧 장마철이 다가오는데 대병을 동원하여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모험을 벌이려는 명군은 패전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자 광해군은 원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내온 주체가 명의 병부와 요동도사라는 것을 문제 삼았다. 정식으로 황제가 칙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원병을 보낼 수는 없다고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광해군은 명의 병력으로 누르하치를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파병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파병을 미루면서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후금을 위무하는 국서 왕래에 그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많은 양의 모시·종이·소금 등의 물자를 지원하는 등 실질적인 유화정책을 강화했다.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한 이유는 임진왜란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잘 알기 때문에 조선이 다시 전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명의 군사력이 후금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후금과 적이 되지 않겠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으로 사료된다.
 
 
  조선군 파병과 강홍립 항복의 진위논란
 
강홍립 등이 후금군에 투항하는 모습을 그린 김후신의 <양수(兩帥)투항도>.
  그런데 북경에 갔던 성절사 윤휘가 황제 명의의 칙서를 받아왔다. 내용은 속히 원병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 조정에서 조선의 관망 태도에 불만이 커져 가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왔다. 광해군은 안팎으로 몰렸다. 파병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졌다. 군대는 보내되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그리고 그간 유화해 온 후금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마침내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痛使·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원정군 사령관에 무장을 택하지 않고 언어에 능통한 측근을 임명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광해군은 출전하는 강홍립에게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작전지시를 했다. 조선의 정예병이 쓸모없이 희생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지침이다.
 
  조선군은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강홍립은 후금군의 호위 속에 누르하치를 만났다. 조선군의 일부는 풀려났지만 최고 지휘관인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 억류되었다. 그는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보냈다. 그가 보낸 정보는 광해군의 형세 판단과 대외정책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 강홍립의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에 대한 서술은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선군이 애초부터 후금군에게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와 특히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했는지 여부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작전지시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밀지를 내려 항복하도록 사전에 지시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광해군이 국왕 직속의 통역관 강홍립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과 사료에 나타난 작전지시 내용으로 미루어 명군을 위해 조선군이 궤멸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전세를 보아 후금에 투항하는 것을 용인했을 가능성은 높다. 광해군은 후금에 보여준 그간의 유화책도 고려했을 것이다.
 
  전장에서도 강홍립 등 조선군 지휘부가 뚜렷하게 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고, 후금군에 항복한 것은 사실이며, 억류된 강홍립이 계속 정보를 보내온 것과 신료들이 강홍립을 역적으로 몰아세운 데 대해 광해군이 그를 감싸고 돈 것도 광해군의 의도된 별도 밀지가 있었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광해군의 치밀한 정보전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누르하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명과 후금이 싸우면 양자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해군은 정책 결정에 앞서 먼저 상대방과 관련된 치밀한 정보수집에 주력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으로 긴장했다. 1610년에는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하려고 이미 조선의 병마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조선과 후금이 오판에 의한 군사적 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광해군은 척후(斥候)를 보내고, 첩자를 활용하여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전을 통해 대처했다.
 
  일례로 광해군은 1611년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하세국(河世國)을 중용해서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했다. 문치(文治)에 치중한 조선의 정보전 능력은 취약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달랐다. 임진왜란을 일선에서 겪었던 체험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정보감각은 강홍립 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신료들은 강홍립 때문에 명의 의심을 사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광해군은 묵살했다. 광해군에게 강홍립의 정보는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오히려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주고, 가족들이 강홍립과 서신과 물자를 주고받는 것도 허락했다.
 
  명이 재파병을 요구하려 하자 광해군은 조선이 원병을 다시 보내면 누르하치는 조선에 쳐들어올 것이니 조선이 조선 영토를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명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계책이 된다고 명을 설득했다. 또한 광해군은 명 조정으로 자주 사신을 보냈다. 명 조정의 분위기를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619년에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오히려 명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실전형 정보전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明의 요동 난민과 모문룡
 
  1618년부터 후금이 본격적으로 명에 대한 공세를 취하자 조선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터가 된 요동에서 요민(遼民·명의 난민)들이 압록강 근처 진강으로 몰려들었다. 1619년 ‘심하 전투’ 이후에는 그 숫자가 훨씬 늘었다. 진강은 바닷길을 통해 산동성으로 갈 수 있으며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평안도에도 난민이 쇄도했다. 일부 난민은 강원도와 경기도까지 흘러들었다. 빈민들은 무리를 지어 조선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민 중에 명과 후금, 조선 사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이 있었다. 그는 1621년 심양과 요양이 후금군에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산동과 요동반도의 요민들을 규합하여 기습적으로 진강을 탈취했다. 명 황제는 병부에 모문룡을 지원하고, 수군을 그와 합세시켜 요동을 수복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배후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식량과 군수물자 지원을 받아냈다.
 
  문제는 후금이었다.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들어온 것이 후금을 크게 자극한 것이다. 요동을 공략한 후금은 북경의 관문인 산해관으로 진군해야 되는데 그 길목에 모문룡이 나타난 것이다. 광해군은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병화를 입을 수 있음을 우려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자 후금과의 접촉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들어오자 요민들과 명군 패잔병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1621년(광해군 13) 후금의 아민(Amin·阿敏)이 모문룡을 치려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모문룡은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모문룡은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간신히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후금과 사단이 생길 것을 우려한 광해군은 고심 끝에 모문룡에게 육지에 머물지 말고 섬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모문룡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던 광해군은 결국 모문룡을 가도라는 섬에 밀어넣은 것이다.
 
  광해군에게 홀대받았던 모문룡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조선의 새 정권이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도록 돕고 조선 조정에 수시로 군량을 요구했다. 지나는 상선에 세금을 거두고 공급되는 군량미도 횡령했다. 모문룡은 그러다가 결국 1629년 명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再造之恩의 허상과 병자호란의 실상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비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의 외교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1619년 광해군이 명의 재파병 요구를 끝내 회피한 것과 항복한 강홍립을 옹호한 것이 후폭풍을 몰고 왔다.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불거지면서 재조지은을 저버리고 오랑캐(후금)와 손을 잡은 광해군이 도마위에 올랐다. 결국 재조지은 명분이 광해군의 현실외교를 압도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상 재조지은은 반정의 명분에 불과했다. 반정의 핵심은 소수파 대북의 전횡이었고 다수의 반정 세력이 이들을 응징한 국내정변이었다. 대외정보에는 그렇게 민감하고 치밀했던 광해군은 국내정치와 국내정보에는 그다지 치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이 신뢰하던 주변 인물의 기습으로 손쉽게 무너진 것이다. 인조반정은 정치와 외교의 간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광해군은 끝내 국내정치에서 실패하고 만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반정세력은 재조지은을 반정의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줄곧 친명기저를 유지했다. 얼마 후 후금(청)은 명을 격파하고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은 칭제건원(稱帝建元)한 청에 의해 정묘, 병자호란을 맞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인조반정은 국내정치에서는 성공했지만 외교에서는 실패한 것이다.
 
 
  광해군이 오늘에 부활한다면?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취했던 광해군 외교의 관점에서 보면 병자호란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오늘날 외교로 부활해 재조명을 받고 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외교문제가 불거질 적마다 그의 외교는 부활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고 G2시대가 예견되면서 두 나라에 샌드위치된 한국의 외교가 화두가 되면서 광해군 외교가 주목을 받고 있다.
 
  광해군의 외교가 주는 교훈은 두 강대국 사이의 균형외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 전략은 치밀한 정보전과 왜란에서 안목을 쌓은 정확한 형세판단이 뒷받침하고 있다. 광해군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할까? 필자는 광해군이 현 상황을 G2의 양극 체제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중국이 양극의 한 축으로 세계 체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이 갖춰졌는지 여부는 앞으로 상당기간에 걸쳐 검증이 따라야 한다고 평가할 것으로 본다.
 
  ‘지는 명, 뜨는 청’ 사이에서 성공한 광해군의 균형외교를 ‘기우는 미국, 떠오르는 중국’에 대치하여 한국외교의 모범답안으로 주장하는 일부 견해에 대해서도 광해군은 시기상조라고 말할 것 같다. 광해군 외교가 부활하는 이유만으로 현재의 상황을 오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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