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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10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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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미군의 철수를 앞두고 이승만과 미 국무부는 심한 갈등을 벌였다. 이승만은 미군정부의 정책이 한국의 공산세력을 양성했다면서 공산군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한국군의 증강을 요구했고,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은 이승만의 태도가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강력한 반공체제 구축에 나섰다. 먼저 공산주의와의 이론투쟁에서 교본이 될 만한 팸플릿을 저술하여 4월 20일 저녁에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으로 발표했다. ‘네 가지 평등’을 강조한 이 방송 내용은 《일민주의 개술(一民主義槪述)》이라는 팸플릿으로 만들어져 전국에 보급되었다.
 
  4월 22일에 전국의 대학생과 중등학교 생도 대표 4만여명이 서울운동장에서 결성한 중앙학도호국단은 반공체제의 대표적인 조직 중 하나였다. 학도호국단이 조직됨으로써 학원을 거점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반민특위(反民特委)의 특경대(特警隊) 문제를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 소장파 의원들의 극한 대립은 마침내 6월 6일 아침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키는 사태로 발전했다.
 
  6월 20일에 임시국회가 폐회되자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나머지 의원들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은 모두 14명이었다.
 
  초대 주북한대사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는 9월에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보낸 <남북한 정세 보고서>에 프락치 사건을 자세히 기술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남로당과는 관계없이 성시백(成始伯)이 주동했다고 주장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국회 소장파 그룹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 “美軍政府가 韓國共産黨 길렀다”
 
   1948년 9월 15일부터 은밀히 진행된 철수 작전에 따라 1949년 1월 현재 주한미군의 수는 7,500명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철수 문제는 여전히 여러 정치세력 사이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2월 5일에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실을 말하자면, 미국보다도 이곳에 민주주의가 더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미국식 민주주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국회가 내가 아는 다른 어떤 대의기관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말이올시다”라며 국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비꼬아 말했다.1) 그만큼 그는 국회와의 알력으로 부심했다.
 
  그런 국회가 2월 7일에 전남 진도 출신의 무소속 김병회(金秉會) 의원을 비롯한 71명이 서명한 긴급동의로 ‘남북화평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한 것은 이승만의 부아를 있는 대로 돋우었다. 신익희(申翼熙) 의장의 연락을 받고 국회의사당으로 간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에게 “만일 지금 당신네들 얘기 내놓은 대로 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파괴운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은 미군이 소수라도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여기 있는 미국 사람들을 다 내보낸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입장은 무엇이냐 하면 미국 군인이 얼마 아니라도 여기 있기만 하고 보면 소련 군사가 여기 내려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합니다. 만일 미국 군인들이 나가야 소련 군사가 여기 들어올 수 있겠으니까 환영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갖는 분들이 있다면 미국은 하루바삐 걷어나가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관계로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세계에 선포해 가지고 나가는 것은 한인 공산당이라는 것이 이남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다 조처할 수가 있고 이북에 가서라도 우리가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은 여기 내려오지 말아야 되겠다, 그것을 우리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장하는 관계로 인연해서 미국 군인이 조금이라도 얼마가 여기 있어야 미국 군인들의 체면이라도 보아서 소련이 넘어올 수 없을 만한 것을 만들어 놓자는 그것이 우리 주장입니다. …”
 
  이승만의 연설에 뒤이은 비공개 회의에서 이 결의안은 재석 159명 가운데 가 37표, 부 95표로 부결되었다.2)
 
 
  張勉과 올리버에게 ‘현재의 한국정치상황’ 보내
 
  이승만은 이어 2월 12일에는 주미대사 장면(張勉)과 올리버 앞으로 ‘현재의 한국 정치 정세(Present Political Situation)’라는 긴 비망록을 보냈다. 이 비망록에서 이승만은 중국 사태에 따른 한국인들의 심각한 불안과 우려를 지적하면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실패한 이유를 자세히 분석했다. 이승만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아무도 미국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책이 때로는 반공이고 때로는 친연안파(親延安派)이며, 또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국민당이 기대할 만한 지속적인 지지자를 얻지 못한 반면 중국공산당은 큰 지지 세력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격려와 시간을 얻었다고 이승만은 기술했다.
 
  이승만은 해방 뒤 미국의 남한 정책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어떤 정치 기구에서든지 공산당 지도자들과 협력해야 했고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참여시키지 않고는 정부도 국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미국 친구들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그는 경비대에 입대한 공산당의 존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3)
 
  이승만은 2월 17일에 같은 주제를 더욱 강조하는 편지를 올리버에게 썼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만큼의 무기를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적당한 경로를 통하여 많은 것을 요청했으나 얻은 것은 매우 빈약합니다. 38도선 저쪽의 병사는 아직도 사정거리가 긴 소총으로 사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소총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 경찰은 적의 손아귀에 들어 있습니다.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하여 우리 군대는 38도선을 따라 주둔하지 못하게 되어 있거든요.
 
  우리는 침략전쟁을 시작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우리 자신을 지킬 권리는 보유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요. 우리는 탱크와 화염방사기와 그 밖의 현대식 무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지금 오고 있다’, 그리고 ‘탱크는 이곳에는 맞지 않는다’ 등등의 말만 들었습니다. 지금은 생각건대 주제를 피하기 위한 마지막 ‘변덕’으로, 기갑부대를 창설한다고 하는군요. 책임자로 남은 사람(로버츠·William L. Roberts 장군)에 대하여 우리는 아주 절망을 느낍니다. 그는 퇴역을 앞두고 어떤 실랑이에도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계획은 3월 31일이나 6월 30일에 철수(퇴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이 ‘너무 작고 너무 늦은’ 또 하나의 실패담으로 될 것이 큰 걱정입니다.”4)
 
  요컨대 이승만은 주한미군의 철수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미군철수의 대안으로 한국군의 건설과 현대 장비의 공급을 강력히 요청한 것이었다.
 
 
  ‘韓國에 대한 美國의 입장(NSC 8/2)’ 확정돼
 
  주한미군의 철수 시기는 3월 22일에 열린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채택된 ‘한국에 관한 미국의 입장(NSC 8/2)’에서 확정되고, 이튿날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미 국무부의 ‘개입’ 요청과 미 육군부의 ‘철수’ 요청을 최종적으로 조정한 정책문서였는데,5) 이 문서는 “유엔한국위원단 및 한국정부와 협의를 통한 잔류 미 점령군의 철군 준비는 늦어도 1949년 6월 30일 이전이나 그 날짜에 철군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행해야 하며, 미군의 최종 철군에 앞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보안군(육군, 해안경비대, 경찰)용 장비를 이양하고, 비상저장용 및 6개월분의 보충 및 소모요구량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비보급품 비축을 제공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6)
 
  미군철수와 그에 따른 한국군의 인원과 장비 강화에 대한 교섭은 무초(John J. Muccio) 특사가 이승만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무초는 3월 29일에 이어 4월 1일에도 이승만을 방문하고 장시간 협의했다. 무초는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의 안보가 위협받지 않는 한 자국의 군대를 철수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 보안군의 훈련이 최근 몇 달 동안 많은 진전을 보여 미국 병력의 철수가 매우 빠른 시일 안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초는 NSC 8/2가 최종시한을 6월 30일로 확정했다는 사실은 이승만에게 밝히지 않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승만은 미군 병력이 한국 안에 영원히 진주하도록 붙잡아 둘 수 없음을 알았다고 말하고, 다만 한국이 자체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병력과 그 병력에 대한 무기와 탄약 공급을 조달할 수 있을 때까지 주둔해 주기를 희망했다.7)
 
  미군철수에 따른 이승만의 불안은 집단안전보장 제도의 제안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4월 7일에 유럽의 마셜플랜(Marshall Plan·유럽부흥계획)과 같이 태평양 제국에 대한 ‘맥아더플랜’의 설치를 제창했다.
 
  그는 4월 4일에 결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와 같은 태평양동맹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태평양동맹에 가맹하기를 원치 않는 국가를 제외하고 태평양방위동맹은 남태평양 제도 및 호주, 캐나다, 미국, 중국, 중남미 제국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그와 같은 방위동맹 혹은 국제적 제협정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8)
 
  태평양방위동맹 구상은 그 뒤에도 필리핀의 로물로(Carlos P. Romulo) 대통령 등에 의하여 거론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4월 11일 저녁에도 무초와 장시간 회담했다. 무초는 NSC 8/2의 내용을 날짜와 중요한 숫자만 생략한 채 개략적으로 이승만에게 설명했다. 이승만은 결국 한국 보안군이 국가의 방위와 안정을 유지할 능력을 갖추도록 보장한다는 NSC 8/2의 내용에 동의하고, 그것을 일반대중에게 발표하는 것이 그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데도 동의했다. 이승만은 자기 생각을 하루 이틀 사이에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9) 이처럼 이승만은 중요한 외교문제는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직접 챙겼다.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이 유효하다는 확인 요구
 
  그러나 이승만은 선뜻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인 보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몽니 부리는 태도는 무초가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보낸 전보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대통령은 본인의 4월 11일(원문 12일)자 전문 374에 언급된 내용이 담긴 성명을 발표할 것인지에 대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충분한 용기가 아직 생기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어제 늦게 가진 장시간의 토론에 비추어 볼 때에 그는 본인이 그에게 구두상으로 전달했던 군사원조에 대한 보장을 미국이 진실로 수행할 의도가 있다는 것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확언을 얻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늦추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더 많은 무기와 더 큰 군대를 요망하면서 오래도록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대한민국의 독립과 남침 때의 보호를 보장해 준다는 데 대한 어떤 특정한 종류의 협약을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특히 본인에게 1882년의 조약이 아직도 유효하다거나, 혹은 그 제1조—그는 이 제1조가 우호조항이라고 설명했습니다—를 재확인시켜 주는 성명이 워싱턴에서 발표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본인은 오늘 오후에 재차 이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며, 그가 곧 성명을 발표하기를 기대합니다. …”
 
  이승만은 독립운동기간 내내 미국인들에게 1882년의 조미우호통상조약 제1조에 규정된 거중조정(good offices)의 의무를 실행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 이승만은 4월 14일에 무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시금 1882년 조약의 재확인을 요구했다.10)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에 대해 애치슨은 이 조약에 대한 지금까지의 국무부 공식 태도와는 달리 유연한 반응을 보였다. 애치슨은 무초에게 “국무부는 1882년 조약의 조항들은 일본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 사이에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맺어진 일련의 협정들 때문에 적용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조약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해 왔음을 주지하기 바란다”라고 통보하면서도, “귀관의 판단에 따라 미국이 1882년 조약의 제1조(우호조항)에 선언된 원칙들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그에게 통보해도 좋다”는 등의 타협적 대안들을 제시한 것이다.11)
 
 
  미군철수 문제 韓美간 협의하고 있다고 특별성명
 
  이승만은 마침내 5월 7일에 미군철수 문제에 대하여 한미간에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대한민국과 합중국 정부대표자들이 수개월 이내로 어느 날짜를 정하여 미군이 한국에서 철퇴할 것을 협의하는 중에 있다. 유엔한국위원단에 이 협의 진행을 알게 하였으며 유엔위원단의 고문과 협조가 이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을 각오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협의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책임이나 관계를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는 의도는 아니며 도리어 민국의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경제, 군사, 기술, 기타 모든 원조를 강화하는 것이요, 따라서 미 군사사절단은 여전히 계속하여 우리 국방군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기에 모든 장교들을 빌려줄 것이다. 이 협의는 유엔총회의 결의문 제조항에 충분히 순응해서 진행되는 바이다.”12)
 
  이승만이 특별성명을 발표했다는 보고를 받은 미 국무부 극동국장 버터워스(William W. Butterworth)가 그의 비망록에 무초 대사가 이승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미군병력의 조기철수 발표에 대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면서 “나는 이것을 큰 승리로 간주한다”고 적은 것은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동의를 얻는 데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13) 무초는 초대 주한미국대사로 임명되어 4월 20일에는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정중한 신임장 봉정행사가 거행되었다.14)
 
  이승만은 4월 16일에 열린 제41회 국무회의에서 미국 군사원조의 제1착으로 최단시일 안에 M-1 소총 5,000정이 인도된다고 말하고, 이 무기들의 접수 보관위원으로 내무, 외무, 국방 세 장관을 지명했다.15)
 
 
  500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군사고문단 구성한다고
 
  미군철수에 관한 한미 양국간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승만의 특별성명에 자극된 일반국민의 동요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때마침 5월 4일 새벽에 개성지구 38도선에서 남북한 군인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고,16) 강원도에서는 춘천과 홍천에 주둔하는 두 대대 병력이 월북했다.17)
 
  이승만은 연일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을 대동하고 무초와 로버츠 장군 등과 함께 미군철수에 따른 대비책을 협의했다.
 
  5월 2일에는 미군철수 뒤에 한국에 남을 미 군사고문단 문제를 검토하는 회의가 열렸는데, 무초는 이 회의 내용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무초는 먼저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규모와 앞으로의 계획이 적힌 문서를 이승만에게 전했고, 이승만은 그 문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무초는 로버츠에게 군사고문단의 증강에 대해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설명할 것을 부탁했다. 로버츠는 군사고문단 병력은 최대 500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하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때에 이승만은 그의 개인 비서 맥캔타이어(Mary McKentyre) 양을 불러 회의 내용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로버츠는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최종 구성은 장교 250명과 동수의 사병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단의 장교와 사병은 현재의 주한미군 가운데서 최고 자격을 갖춘 장교와 사병을 선발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16명 내지 20명 가량씩의 장교를 한국 육군의 각 여단에 배치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육군의 가장 큰 취약점인 기술 용역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보급, 병기, 통신 및 엔지니어링 서비스 분야에서 최고의 장교를 선발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취해지고 있다고 했다.
 
  무초는 병기 분야 등의 발전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을 로버츠에게 제안했다. 로버츠는 지난 2월에 로얄(Royall) 육군장관이 방한했을 때에 이범석 총리가 그에게 전투장비와 군수품, 그리고 그 밖의 물품들에 대한 문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로버츠는 한국 육군의 훈련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을 설명했다. 그는 육군의 훈련이 지난 3개월 동안 상당히 진척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국의 모든 젊은이들의 훈련을 지원하도록 얼마간의 장교들을 할애하기를 희망했다. 이승만은 제주도와 그 밖의 지역을 한국 당국이 소탕하고 있는데 이 소탕작전이 끝나자마자 게릴라들이 다시 날뛰지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국민이 협조하지 않으면 정부 단독으로는 지하에 숨어서 활동하는 공산당의 위협을 근절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국민들 스스로 국가와 그들의 생명을 방위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국민회의 전적인 목적은 가능한 최대한의 안전과 평화와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승만은 설명했다. 국민회 운동은 순수한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이승만은 강조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이 무렵 이승만이 가장 의존하고 있는 정치단체가 국민회였음을 말해 준다.
 
 
  “日本이 항복할 때에 韓國에는 공산주의자 없어”
 
  이승만은 이러한 협상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5월 8일에 공보처를 통하여 미국의 철군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들은 미국 국민들이 남한을 미국 자체의 방위의 제1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바이다. 남한에 대하여 공격이 있으면 이것이 미국 국민 자신에 대한 공격과 동일하다고 미국은 판단하는가? 또 외부세력에 의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적 원조에 전적으로 의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현재 잔류하고 있는 미국 군대가 한국에 주둔하느냐 안 하느냐의 단순한 문제보다 월등히 중요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리 자신이 조성하지 않은 공산계열의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
 
  일본이 항복할 당시에 한국에는 공산주의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위협은 미소협정에 의하여 한국 중부를 분할한 데서 야기된 것이며, 미국은 공산당을 타협적 기지 위에서 대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공산당들은 크게 힘을 얻고 강력해진 것이다. 침략자와 타협한다는 것은 이에 대항할 기회도 없이 우리들이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최후의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도 별도의 담화를 발표하게 했다.
 
  “남한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던 3년 동안에 민족주의 한인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을 금지당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이 박사 및 기타 지도자들의 방송 연설 원고는 전부 공산주의 비평 비난을 없애기 위하여 엄격한 검열을 받았던 것이다. 남한은 자위를 위한 군대를 설치할 권리를 금지당했고, 심지어 공산당의 조직과 선전을 방위하려는 모든 기도조차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미국은 현재 잔류하고 있는 전미군이 철퇴하는 것을 떳떳이 여기며 우리의 자위 태세의 준비가 다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미국은 공산당이 38도선을 침범하여 우리를 공격하여 온다면 우리를 원조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들의 질문에 답변을 할 때까지는 잔류 주둔군을 철퇴하지도 못하며 철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18)
 
 
  李承晩의 특별성명 보고 애치슨이 격노
 
미 국무부 장관 취임선서를 하는 애치슨(왼쪽).
  주한 미대사관과 국무부는 이승만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했다. 무초 대사는 이승만의 특별성명과 김동성의 담화문을 즉시 애치슨에게 타전하고 오후에는 로버츠 장군과 드럼라이트(Drumright) 공사와 함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항의했다. 무초는 이승만의 성명이 한미간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며, 또한 미국 국민들을 향한 선동적인 신문캠페인은 이 시점에서 특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한 추가적인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문제를 고려 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초는 미국은 어떤 개별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음을 지적하고, 현 단계에서 지속적인 여론몰이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자신의 특별성명이 그의 허락 없이 발표된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한국 국민에게 난처한 입장이며 미군철수 이후의 한국 방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어느 정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한 토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무초는 이승만에게 앞으로 언론 발표를 좀 더 신중히 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협의는 최근의 38도선 사건들로 옮겨졌다. 무초는 이승만에게 한국 군대가 공격적인 행동을 삼가게 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한 행동은 한국정부가 소련 블록 이외의 모든 나라와 현재 누리고 있는 우호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은 공격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개성에서도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그러나 침입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땅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을 받든 어떻든 한국 정부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공산당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19)
 
  5월 11일에는 극동국장 버터워스가 주미대사 장면과 유엔특사 겸 대미교섭특사로 미국에 가 있는 조병옥(趙炳玉)을 불러 이승만의 성명에 대한 워싱턴의 미국 정부 반응은 “정말로 매우 비우호적”이라며 훌닦아 세웠다. 조병옥은 미군철수가 임박한 데다가 중국사태의 변화로 한국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서 미국이 한국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보장을 미국으로부터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조병옥은 그 보장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아마 1882년 조약의 재확인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0)
 
  애치슨이나 버터워스의 이러한 반응은 국무부가 한국이 미소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이라는 인식에서 육군부의 조기 군대 철수 주장에 반대해 오면서도 여전히 이승만을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았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초는 5월 11일에 다시 이승만을 방문하고 애치슨의 훈령 내용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도 무초는 주한미군의 철수 작전이 6월 30일에 완료될 것이라는 계획을 이승만에게 밝히지 않았다.
 
 
  정부고위층의 위기감이 일반대중에게까지 확산돼
 
  한국정부가 요구하는 한국군 증강 조치가 실행되지 않은 가운데 미군철수 작전은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철수 완료 1개월 전인 5월 31일 시점의 상황을 무초는 애치슨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 2,200명에 가까운 미군이 5월 28일과 5월 30일에 인천을 떠남으로써, 6월 30일까지 주한미군의 철수 완료를 선도하는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선적하기로 한 육군 장비의 60%가 인천을 떠난 것으로 추정했다.
 
  (2) 병력의 철수에 따라 본인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아우성과 공포가 야기되었다. 한국 정부의 고위층에 퍼져 있던 위기감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어 공황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 책임은 미국 병력의 주둔을 목표로 한국 정부가 조장한 선전, 최근의 한국군과 해군소해정의 월북 및 중국(국민당정부)의 패퇴 등에 있다.
 
  (3) 이곳의 불확실한 상황을 감안할 때에 우리는 위험한 몇 주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철수가 완료된 시점이 그 가운데 가장 나쁜 시기일 것이다.
 
  (4) 그러므로 본인은 우리가 한국정부와 대중의 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이 기간 동안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미국 정부 대표가 병력 철수 완료일을 발표하지 말고, 실질적인 철군 활동에 대한 언급을 피할 것을 제안한다. 긍정적인 조치로 본인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안한다.
 
  (ㄱ) 주한 미 군사고문단 및 미국의 지속적 지원에 대한 일반적 보장에 관한 조기 신문 발표.
 
  (ㄴ) 실현단계에 접어든 경제협조처(ECA) 원조의 완전 공개.
 
  (ㄷ) 해안경비대의 경비정과 항공기에 대한 한국의 최소한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ㄹ) 풀브라이트 협정을 위한 협상 시작 발표.
 
  (ㅁ) 병력 철수 완료 직후의 미해군의 방문.”21)
 
  이렇게 하여 1945년 9월에 한국에 진주한 7만명 가량의 미육군 제24군단 병력은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1949년 6월 29일에 모두 한국을 떠났다.22) 주한 미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의 협정은 1950년 1월 26일에 체결되었으나 1949년 7월 1일로 소급하여 효력을 갖는 것으로 양해되었다.23)
 
 
  2. 一民主義의 ‘네 가지 평등’
 
  반민특위 활동과 미군철수 문제로 온 나라가 어런더런한 속에서 이승만은 그 대응방안으로 반공체제 구축 작업을 강화했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시급히 필요한 것은 확고한 이론 무장을 위한 교재였다. 1948년 11월에 창당한 대한국민당은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당시(黨是)로 표방했고, 대한국민당의 일부와 한국민주당이 합당하여 결성한 민주국민당(민국당)도 일민주의를 실천한다고 선언했으나, 정작 일민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정리된 이론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경황없는 속에서도 일민주의 본질과 가치를 설명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렇게 집필한 것이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팸플릿이었다. 이승만의 정치이념이 온축된 《일민주의》의 내용은 4월 20일 저녁에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다음과 같은 서두는 이승만의 일민주의가 절박한 공산주의 비판 이론으로 구상되었음을 말해 준다.
 
  “세계 모든 나라의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는 현재 생존의 위기를 당하지 않은 나라나 민족이 없는 터이니, 이 이유는 즉 공산당 문제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빈천한 사람들을 부귀한 사람들과 동등으로 살게 만들자는 주의라 할 것인데, 이 주의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된 이유는 러시아 제정(帝政)시대에 전제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이므로 맑스주의를 흡수한 레닌(Vladimir I. Lenin)의 대혁명이 성공되어 러시아 황실을 다 전멸시켜 세계에 참혹한 공산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했던 일을 보기로 들면서 소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33년에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이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만날 목적으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06년 8월호, <레만湖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참조).
 
 
  모스크바 방문경험 보기로 蘇聯의 실상 설명
 
  “빈민들은 부민(富民)을 타도해야 산다, 무식자는 유식계급을 몰락시켜야 산다, 상놈은 양반을 없애야 산다, 노동자는 재벌가를 정복해야 산다, 농민은 지주를 박멸하여야 산다, 이러한 것으로 언론과 서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포조직을 아니 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영미 등 부강한 나라나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빈약한 나라에까지 그 세력이 뿌리를 박게 되어,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러시아공산혁명으로 나라도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족하게 자유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로 알 만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의 민중 같이 빈곤하고 압박받는 인민은 더 없을 것이니, 내가 13년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여관 사무원인 독일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매달 미화 8원씩 받아 가지고 일을 보라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간신히 지낸다 하며 자기의 길을 열어서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으며, 기차에서 미국인 몇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뒤에는 이 사람들이 비로소 숨을 쉬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러시아 내지에 있던 곳을 몰래 들어갔다가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니, 이것이 오늘 공산당 사람들이 자랑하는 러시아 극락지의 실정입니다. … 거짓 선전에 빠져서 남의 부속품인 노예가 되거나 공산당과 싸워서 민주국의 자유 복락을 누리게 되거나 이 두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될 것이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해방 뒤에 합작이니 연합이니 하는 구속 아래에서 반공운동을 마음대로 못하는 동안 공산주의 세력을 길렀다고 미군정부의 책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틈에 끼어서 해방 후 처음 양년간은 반공운동을 마음대로 못하고 합작이니 연합이니 하는 등 구속하에서 공산세력을 길러서 화근을 양성하여 왔으니, 이것은 미국이 그때의 공산의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협의적 정책으로 해결되기를 바랐던 연고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충분한 각오로 우리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여 절대로 우리 정책을 지지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우리의 앞길이 점점 밝아지고 남북통일의 길이 점차로 열려 가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마다 각각 저희를 위해서 싸우는 것 같이 우리도 우리를 위해서 공산당과 싸우는 것이니, 이 싸움이 아직은 사상적 싸움이므로 이 정도가 변해서 군사적 싸움이 될 때까지는 사상으로 사상을 대항하는 싸움이 되고 있으니, 민주주의로 공산주의를 대항하는 것은 사상이 너무 평범해서 이론상 치밀한 조리에 들어서는 공산주의의 선전을 대항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일민주의하에서 4대 정강을 정하여 한 정당을 세워 일변으로는 공산화를 배격하며 일변으로는 민주주의의 영구한 토대를 삼기로 한 것이니, 이 네 가지 정강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 가지 자유’ 연상시키는 ‘네 가지 평등’
 
  이승만의 ‘4대 정강’이란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1941년에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제시한 ‘네 가지 자유’를 연상시키는 ‘네 가지 평등’이었다. 이승만은 젊었을 때부터 평민주의 내지 평등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일찍이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에서도 공산주의가 “인민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이론”이라고 평가했다(《月刊朝鮮》2005년 8월호<韓人基督學院 학생들의 고국 방문> 참조).
 
  이승만은 ‘네 가지 평등’이 일민주의의 핵심 개념임을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했다. 첫째는 신분이나 계급 차별의 철폐, 곧 기독교의 천부인권설에 입각한 인권의 평등이었다.
 
  “(1)은 문벌을 벽파해서 반상(班常)의 구별을 없이함으로 등급이나 계급은 물론하고 동등의 복리와 동등의 권리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니, 이것은 고래로 유전하던바 왕후장상〔王候將相: 제왕, 제후, 장수, 재상〕은 대대로 왕후장상이 되고 평민, 상인(常人)은 대대로 하천한 대우를 달게 여기며 자유평등의 인권과 정권을 누리지 못한 습관을 일체 제재해서 한 나라 한 법률 밑에서 한 민족으로 합동 단결하여 영원한 복리를 다 같이 누리자는 의도인 것이므로, 미국 사람들이 유럽 군주정체 압박하에서 따로 떨어져서 민주주의를 표방할 적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은 다 동등으로 창조했다는 그 사상을 토대로 삼아 민주정체를 건설한 기본적 정강으로 이 기본적 주의를 우리가 흡수해야만 과연 우리 민주주의의 만년 기초가 확고히 잡힐 것입니다.”
 
  둘째는 이익분배의 평등이었다. 이승만은 당면 과제인 농지개혁의 원칙도 이 개념으로 설명했다.
 
  “(2)는 빈부가 동등으로 구별없이 천조(天造)한 물질을 발전시켜 모든 복리를 누리며 동등 권리를 가져서, 부요한 자는 대대로 부요한 생활을 하고 빈천한 자는 대대로 노동과 사역에 복종하여 노예나 우마 같은 대우를 받던 폐단을 없이함으로 다 같은 복리를 누리자는 것이니, 부자가 재산 세력만 믿고 근로로만 생활하는 동포를 학대하는 폐단을 막으며, 노동자가 재정가를 미워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고 평균한 이익을 누리도록 합동 진행해서 서로 도우며 보호하기를 힘쓰자는 것이니, 정부에서 이를 주장하는 관계로 지주들은 토지를 (정부에) 팔고 정부에서는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여 그 소출로 대금을 갚은 후에는 다 각각 제 소유로 만들게 할 것이며, 지주는 그 대가로 공장이나 혹은 다른 장구 이익을 도모할 것이니 이 공업시대에 재산을 토지에만 넣지 말고 그 자본을 다른 공업에 사용하면 개인이나 국가경제에 크게 이익될 것이요 공업과 상업상으로도 큰 재정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곧 경제의 세 가지 기본되는 토지와 자본과 노동이 합작해서 서로 평균이익을 누리자는 유일한 계획일 것입니다.”
 
  셋째는 남녀평등이었다. 이승만이 한국인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한 교육자였던 것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月刊朝鮮》2004년 3월호, <李承晩 교장, 한국최초의 男女共學 실시> 참조).
 
  “(3)은 남녀동등을 주장하는 것이니, 이것이 민주주의의 한 큰 정강입니다. 상고 전제시대에는 남자가 여성을 구박해서 차별이 심하였으므로 어떤 나라에서는 심지어 말도 하대하고 권리도 없이 하인이나 심부름꾼처럼 부려먹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초로 이와 같이 심하게 구별은 아니하였으나 다소간 차별적 습관이 있어서 완전한 동등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터인데, 자래로 우리 여성들이 각 방면으로 남성만 못지않은 자격을 증명한 것이 여러분이요, 또는 민족운동 역사로 보아도 열렬한 애국 성심이나 총명 지혜가 누구만 못지않은 자격과 기능을 표명하여 온 것이니,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 정신으로 일제히 해방해서 구습을 버리고 공정한 신식을 채택하여 전 민족의 반수가 되는 여성과 함께 세계 무대에 경쟁 전진하는 것이 일민주의의 가장 요점이 될 것이므로 이것이 또한 정강이 되는 것입니다.”
 
 
  壬辰倭亂의 원인도 조선시대의 지역주의 때문
 
《일민주의 개술》 표지.
  넷째는 지역평등이었다. 이승만은 지역주의의 폐단을 가장 강조해서 설명했다. 그는 임진왜란도 조선시대의 심한 지역주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역설했다.
 
  “(4)는 지방 구별을 삭제해서 남북이니 경향이니 하는 차별적 습관을 버리고 다 한동족, 한백성으로 사오천년 유전(遺傳)하여 온 통일정신을 발휘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국가의 행복을 도모하며 서로 도와주고 함께 제휴하여 전 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면 세계 각국을 대할 적에 남들이 우리의 단결과 합동심에 감복하여 경애하기에 이르도록 만들자는 결심이니, 이 주의를 중요시하지 못한 관계로 오백년래 당쟁당론으로 차별과 분열을 이루고 따라서 투쟁을 일삼게 된다면 우리는 앞길이 심히 참담할 것입니다.
 
  이조시대에 이 싸움으로 전국이 자상잔멸(自傷殘滅)하는 화근이 아니었다면 임진왜란이 생길 수도 없었을 것이요 생겼어도 많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소위 사화(士禍)와 편색(偏色)이라는 당쟁으로 서로 결딴을 낸 것이니…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서 지방열을 고취하거나 자기들끼리만 이익이나 권리를 도모하자는 의도가 있으면 어디 사람을 물론하고 전국 민중이 다 합동적으로 성토해서 그런 의사가 어디서든지 서지 못하게 해야 될 것이며 오직 서로 믿고 서로 추존(推尊)함으로써 3천만의 공동이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또 4대 정강 중 긴요한 조건입니다.”
 
  이 연설문은 뒷날 《일민주의 개술(一民主義槪述)》(1953)이라는 팸플릿으로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는데, 이승만은 팸플릿 앞부분에 수록된 ‘개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 국가의 국시(國是)를 명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본디 오랜 역사를 가진 단일한 민족으로서 언제나 하나요 둘이 아니다. 이 하나인 우리 민족은 무엇이고 하나이어야 한다. …
 
  ‘일민’이라는 두 글자는 나의 오십년 운동의 출발이요 또 귀취이다. 적이 물러가면 국토는 온전히 우리의 국토이어야 할 것이 아니냐. 세상 일이 소료〔所料: 미루어 생각한 바〕와 어그러진다 하기로서니 지금 38선문제 같이 내 흉억〔胸臆: 가슴속〕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인 우리가 갈라진 채 벌써 몇 해냐? 앞으로는 국제의 공의가 있으니 순리적 해결이 있으리라고 바라는 바이나 우리로서는 급히 자결, 자합, 자일하기에 있는 힘을 다 들여야 한다. …
 
이승만의 평생 동지 尹炳求 목사.
  우리 민족은 하나다. 국토도 하나요 생활에도 하나요 대우에도 하나요 정치상 문화상 무엇에고 하나다.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독자의 일념이 일어날 때에 하나에 위반되는 바 있거든 곧 버려라. 이 일념에서 민족이 깨어진다. 행여 분열을 가지고 일체에 더하려 말라.
 
  알라! 헤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나누어지는 데서 죽고 일(一)에서 산다.”24)
 
  이승만의 평생 동지인 재미 목사 윤병구(尹炳求)는 《일민주의 개술》의 서문에서 “이 대통령이 제창한 일민주의는 해외에서 수십년간 조국광복을 위하여 분투한 산 체험에서 나온 민족이념”이라면서 국민들에게 보급시켜 일민주의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고 또 그것을 실천하여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썼다.25) 윤병구는 3월 13일에 이승만의 초청으로 귀국했는데, 이승만은 그를 국무회의에 소개시키고,26) 외무부와 공보처 두 부서의 고문이라는 특별한 직책을 맡겼다.
 
  그런데 윤병구는 어처구니없게도 귀국한 지 석 달 남짓 된 6월 20일 아침에 과로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27) 윤병구의 죽음은 억분과 불안감을 삭이느라 속을 끓이는 이승만을 여간 당황스럽게 하지 않았다.
 
 
  4만 학도가 참석한 학도호국단 결성식
 
학도호국단 단장이 된 문교부 장관 安浩相.
  이승만이 자신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올리버와 윌리엄스(Jay J. Williams) 등과 함께 지방시찰을 떠난 4월 22일에 서울운동장에서는 반공체제의 대표적인 조직의 하나인 대한민국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결성식에는 대학생과 중등학교 생도 4만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국회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와 학도호국단에 직접 관여하게 될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국방부 장관 신성모,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 그리고 고려대학교 교주인 민국당의 김성수(金性洙) 등이 참석했다.
 
  이날 발표된 임원진에는 정부의 고위 책임자들이 두루 망라되었다. 총재는 이승만이고 부총재는 이 국무총리, 단장은 안 문교부 장관, 그리고 부단장은 문교부 차관, 내무부 차관, 국방부 차관과 고려대학교 총장 현상윤(玄相允)이었다.
 
  단장으로 추대된 안호상은 “제군은 우리 조국을 영원히 보전하지 않으면 안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조국을 방위함은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함일 뿐 아니라 또한 중국, 만주 등지의 우방을 방위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와 세계를 방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제군은 제군의 귀중한 땀과 피를 우리 고국을 위해서 흘려 주기 바란다”라는 요지의 취임사를 했다.
 
  이어 이범석의 훈시, 신익희와 김병로의 축사가 있은 다음 학생을 대표하여 문리대생 남상진(南相晉) 군의 선서문 낭독이 있었다.
 
  ◇ 선서
 
  우리 조국의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 과업인 국토통일을 달성하고 우리 민족의 영원한 기초를 닦기 위하여 국가의 핵심이요 민족의 전위됨을 자각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우리 전국 300만 학도는 한마음으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국가의 원수이시고 우리의 총재이신 이 대통령 각하와 부총재이신 이 국무총리 각하 및 우리의 단장이신 안 문교부 장관 각하 앞에서 엄숙히 다음과 같이 선서한다.
 
  1. 우리 학도는 화랑도의 기백과 숭고한 3·1정신을 발휘하여 모든 반민족적 행동과 반국가적 사상을 철저히 쳐부수고 국토통일과 조국방위에 결사 헌신한다.
 
  1. 우리 학도는 학원을 바로잡아 민족문화 앙양을 위하여 분투 노력한다.
 
  1. 우리 학도는 민족적 양심을 굳게 갖고 자주독립의 정신 밑에서 민족도덕의 재건 향상을 위하여 솔선 매진한다.
 
  선서문 낭독에 이어 내무장관 김효석(金孝錫)과 김성수의 대한민국 만세와 학도호국단 만세 3창으로 결성식을 끝내고, 결성식에 참가한 학생전원은 시가행진을 했다.28)
 
 
  3. 스탈린에게도 보고된 국회 프락치 사건
 
  이문원(李文源), 최태규(崔泰奎), 이구수(李龜洙) 세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상황에서 5월 21일에 개회된 제3회 국회(임시회)는 심상찮은 풍파가 예상되었다. 임시국회 개회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이들의 구속에 대하여 “특별한 범법 사실이 있어서 구속했을 것이니 내가 범법 내용을 알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정부나 국군, 국회내에 공산당이 잠입하고 있는 모양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적발하는 대로 처치해야 할 것이다” 하고 단호히 말했다.29)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당이 국회 안에도 잠입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彼生我死로 투쟁하고 있어
 
  이승만은 이튿날 국회 개원식에 나가서도 반공을 강조하는 치사를 했다. 그는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피생아사〔彼生我死·네가 살면 내가 죽음〕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가 두 종류의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믿었든지 저희 나라도, 저희 국가도, 저희 생명도 다 바치고 공산화해서 남의 속국과 노예가 되기를 감심(甘心)하는 분자들이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와 우리 가정과 또 우리 자유를 보장해서 다 같이 잘살자는 목적으로 우리의 목숨이라도 희생해서 민주주의를 세우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가 자유로 살 수 있고 우리 자손까지도 자유로 잘살 수 있을 것이지만 공산주의에 정복을 당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몇십년 동안은 이러한 희망조차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적색화할지라도 우리로는 꿋꿋이 싸워서 죽어도 자유민으로 죽고 살아도 자유민으로 살겠다는 결심뿐인 것을 세계에 한번 표명해야 우리가 죽어도 산 백성일 것이요 살아도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는 모든 세계가 다 남에게 속아서 공산주의의 압박을 감수할지라도 모든 민주국들이 다 자유와 독립을 희생하고 공산화해서 살려고 아니할 것이므로 언제든지 결국은 민주주의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알고 믿는 우리로서는 조금도 주저나 의뢰하지 말고 공산분자들과 함께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맹세해야 될 것입니다. …”
 
  그러고는 제주도와 여수 순천 반란사건 뒤에 우리 민족이 그것을 확실히 깨달아 관·민과 군·경이 합해서 반란분자들은 지하공작으로 발붙일 곳 없이 하려는 결심이라고 말하고, “정부내 국회내부터 이 결심을 확실히 각오하고 이것을 지켜 나가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다시 경성(警醒)해야 될 것입니다”라고 직설적으로 경고했다.30)
 
  그러나 이러한 말 속에 담긴 이승만의 결연한 각오를 짐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국회 본회의가 개회되자마자 전남 무안 출신의 민국당 소속 김용현(金用鉉) 의원 외 49명 소장파 의원들의 긴급동의로 세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요구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결의안은 이틀에 걸친 격론 끝에 재석의원 184명 가운데 가 88표, 부 95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31)
 
  부결은 되었으나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이 88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두고 국민계몽회라는 단체가 5월 31일에 파고다 공원에서 그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 88명도 공산당이라면서 성토하는 연설회가 열렸는데, 유성갑(柳聖甲), 김웅진(金雄鎭), 김옥주(金沃周), 노일환(盧鎰煥) 네 의원이 집회현장을 살펴보러 갔다가 언쟁 끝에 유성갑이 전치 3주의 봉변을 당했다.32)
 
  6월 2일에 열린 국회 제10차 본회의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기부금 강징, 국군 월북, 국회의원 체포, 국회의원 구타 등에 대한 논란 끝에 노일환 의원이 제안한 국무총리 이하 각부 장관 총사퇴 결의안을 두 차례의 표결 끝에 재석 144명 가운데 가 82표, 부 61표, 기권 1표로 가결했다.33) 이러한 결의는 물론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경찰 40명이 反民特委 습격
 
  격분한 반민특위는 6월 4일에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趙應善)을 시위군중 동원과 배후조종 혐의로 검거하고 계몽협회 회장 김정한(金正翰)과 동원부장 김정배(金正培), 정보부장 조용철(趙龍哲) 등을 체포하여 수감했다.34)
 
  최운하는 6월 5일이 좌익청년단체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의 창립기념일이었으므로 경찰의 비상경계 태세를 지휘하고 있었다.35) 반민특위의 처사에 분개한 경찰은 바로 이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서울시 경찰국 관하의 사찰과 계원들은 6월 5일에 회의를 열고 자기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정부를 신뢰하고 일을 할 수 없다면서 440명이 사표를 제출했다.36)
 
  6월 6일 오전 8시반부터 서울시 중부서장 윤기병(尹箕炳)의 지휘 아래 서울시 경찰국 경찰대 40명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원 20명을 무장해제하는 동시에 이들을 검거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들의 권총 16정과 서류를 압수했다.37) 소란 통에 현장에 갔던 검찰총장 권승열(權承烈)이 경찰관에게 몸수색을 당하고 소지했던 권총을 압수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출동 경찰은 두 시간 만에 철수했다.
 
  이어 서울시 경찰국의 과·서·대·교장(課署隊校長)들은 이날 오후 6시에 회의를 열고 (1) 반민특위 간부 쇄신 (2) 반민특경대 해산 (3) 금후 경찰관에 대한 신분 보장 (4) 위의 요구 조건이 48시간 내에 관철되지 못할 때에는 총퇴진을 단행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그것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38) 서울시 경찰국 경찰관 9,000명도 6월 7일에 이들에 동조하는 결의문을 발표했고,39) 철도경찰대 본대 사찰과원 일동도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격문을 발표했다.40)
 
  이승만은 경찰관들이 요구한 시한인 6월 8일 오후 3시 무렵에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을 통하여 “곧 선처하겠다. 안심하고 조금도 동요 말고 치안확보에 일심전력하여 주기 바란다”는 회답을 김태선(金泰善) 경찰국장에게 보냈다.41)
 
  이기붕은 전임 서울시장 윤보선(尹潽善)이 6월 6일에 임영신(任永信)의 후임으로 상공부 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날 검찰총장 권승열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 이인(李仁)의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42)
 
  반민특위에 의하여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최운하와 조응선은 6월 6일 오후에 석방되었다.43)
 
 
  “特警隊 해산은 내가 시켰다”
 
  6월 6일에 열린 국회 제13차 본회의는 저물도록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오전 회의가 끝난 뒤에 국회의장단 세 사람과 내무치안위원장 나용균(羅容均), 외무국방위원장 지대형(池大亨·이청천)이 이승만을 방문하여 사태를 보고하고 국회에 출석할 것을 요청하자 이승만은 특경대 해산은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명령한 것이며, 국회의 요청에 응하고 싶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국회 출석을 거부했다.44)
 
  내무부 차관 장경근(張暻根)도 사건 전말을 보고하면서 특경대의 해산이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래 특경은 내무부에서 정식 발령한 경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위에서는 경위(警衛)니 경감(警監)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경찰 행동을 감행하고 있으므로 정부로서는 누차 해산을 종용한 바 있으나 종시 듣지 않고 경찰권의 불법행사를 하므로 오늘 아침 해산시킨 것인데, 상부의 명령에 의하여 질서정연하게 아무 피해 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압수한 문서는 특위 관계 외의 것은 곧 반환할 것이며 자동차도 경찰에서 대여한 것 외에는 전부 반환하겠다.”
 
  국회는 논란 끝에 6월 3일의 내각총사퇴 결의를 조속히 실행할 것과 반민특위 문제는 원상회복하고 책임자는 문책할 것, 만약 정부에서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국회는 정부 제출 법안과 예산안 심의를 거부할 것이라는 다분히 감정적인 결의안을 재석의원 153명 가운데 찬성 89표, 반대 59표, 기권 3표로 가결했다.45)
 
  이승만은 이튿날 자신이 경찰에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고 AP통신 기자에게 분명히 밝혔다.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한 것이다. 특위 습격이 있은 후 국회의원 대표단이 나를 찾아와서 특경대 해산을 연기하라고 요구했으나, 나는 그들에게 헌법은 다만 행정부만이 경찰권을 가지는 것을 용허하고 있기 때문에 특경대 해산을 명령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경찰대는 지난주에 국립경찰의 노련한 형사인 최운하씨와 조응선씨를 체포했는데, 이 양인은 6일에 석방되었다. 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국회에 대하여 특위가 기소될 자의 비밀 명부를 작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 명부에 백 명의 이름이 오르든 천 명 혹은 만 명의 이름이 오르든 간에 그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이와 같이 명부를 우리에게 제출해 주면 우리는 기소자를 전부 체포하여 한꺼번에 사태를 청결(淸決)할 것이다. 우리는 이때까지와 같이 그렇게 문제를 오래 끌 수는 없다.”46)
 
  이승만은 이어 6월 10일에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편지를 보내어 특경대의 운영 실태를 지적하면서 하루바삐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고, 경찰이 특경대 해산명령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과오를 범한 자가 있다면 조사하여 징벌하겠다고 말했다.47) 그러나 그것은 특경대를 원상회복시키라는 국회의 결의를 거부함과 동시에 반민법을 헌법 원리에 맞게 개정할 것을 촉구한 것이었다.
 
  6월 20일에 국회가 폐회되자마자 국회 프락치 사건의 나머지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었다. 소장파의 좌장격인 부의장 김약수(金若水)를 포함하여 노일환, 김옥주(金沃周), 김병회(金秉會), 박윤원(朴允源), 강욱중(姜旭中), 황윤호(黃潤鎬) 7명의 의원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경찰은 헌병대와 협조하여 이들의 검거에 나서 6월 22일 오후까지 모두 체포했다.48) 5월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아 오던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세 의원은 6월 25일에 기소되었다.49)
 
 
  國會 프락치 事件이란 어떤 事件인가?
 
국회 프락치 사건 주동자들. 왼쪽부터 金若水, 盧鎰煥, 李文源, 朴允源.
  이때의 국회 프락치 사건의 개요를 서울지방검찰청의 공식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반민특위가 발족되어 반민족행위자들의 검거가 본격화하자 박헌영(朴憲永)은 남로당의 도상익(都相益)이 국회 공작책이 되어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로당에 비밀 입당시킨 다음 국회활동을 통하여 합법투쟁을 전개하도록 지령했다. 도상익은 언론인 출신의 인텔리 남로당원 이삼혁(李三赫)에게 비밀공작조직을 편성하게 하여 국회의 소장파 의원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벌였다. 2월 초순 무렵에 노일환을 포섭한 이삼혁은 다시 변호사 오관(吳寬)을 통하여 하사복(河四福)이라는 가명으로 이문원을 포섭하여 이들 두 의원을 남로당에 입당시켰다. 이삼혁은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1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했고, 이들의 국회교란책동은 더욱 가열해졌다.
 
  3월 중순 무렵에 서울시 경찰국으로부터 이들의 동태를 보고받은 검찰은 정보부의 부장검사 장재갑(張在甲), 검사 오제도(吳制道),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를 중심으로 한 특별사찰반을 편성하여 은밀하게 내사활동을 시작했다. 검찰은 자수한 남로당원 전우겸(全禹謙)의 진술을 받아 이문원, 이구수 등의 범법 내용 일부를 밝혀내고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구속했다.
 
  수사가 계속되고 있던 6월 10일에 광주리 장수로 가장하고 월북하려던 남로당 특수공작원 정재한(鄭在漢) 여인이 개성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녀는 음부에 비밀 보고문을 숨기고 있었다. 암호해독 결과 이 보고문은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박헌영에게 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였다. 정재한의 집에서 남로당의 국회공작에 관한 지령문과 보고문을 압수함으로써 조직의 실태와 범행내용을 파악한 검찰은 6월 21일부터 다시 검거를 시작하여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徐容吉), 신성균(申性均), 배중혁(裵重爀), 김병회 등 국회의원과 변호사 오관을 구속하고 8월 16일까지 국가보안법위반죄로 구속기소했다.
 
  이 사건의 재판은 15회에 걸친 공판 끝에 1950년 3월 14일에 서울지방법원에서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되었다. 노일환, 이문원은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은 징역 8년, 김옥주, 강욱중, 황윤호, 김병회는 징역 6년, 나머지 피고인들은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사건은 공소되어 서울 고등법원에 계속(繫屬)되었는데, 6·25전쟁으로 피고인들은 서용길 이외에는 모두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50)
 
 
  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이 韓獨黨과도 연결돼 있다고
 
  이승만은 6월 28일에 올리버에게 ‘비밀’이라고 표시한 긴 편지로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한 내용을 써 보냈다.
 
  “그들은 한국정부와 국회 사이의 마찰에 대하여 과장하고 있어요. 국회안의 몇몇 친공분자와 반미분자들은 한편으로는 한국독립당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 조직인 남로당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별러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이따금 자기네 결의안을 지지하도록 국회 안의 몇몇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국민이 정부를 굳게 뒤받치고 있고 정부가 국민들의 의사를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로버츠 장군은 친공적인 국회의원 세 사람이 체포된 것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범죄의 증거가 드러났어요.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고, 경찰이 그들을 체포한 것입니다.
 
  최근에 박헌영의 비서가 어떤 여성과 38도선을 넘다가 개성에서 붙잡혔습니다. 그 여성은 비밀 통신문을 숨겨 가지고 가던 참이었어요. 그들이 붙잡혀 그 문서가 발견되고 그들은 체포되었습니다.
 
  현재 철저한 조사가 진행중인데, 다른 국회의원들이 관련되었을 가망이 많습니다. 신익희 의장은 어제 나더러 이들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제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그토록 나쁜 인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신익희는 그들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즉각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회가 조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51)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자들이 남로당뿐만 아니라 한독당과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국회 프락치 사건 보고
 
  정재한의 집에서 발견된 남로당의 국회공작에 대한 지령문이란 5월 23일에 검찰총장 권승열이 국회 보고에서 밝힌 것이었다. 그것은 (1) 외국군을 완전히 철수시킬 것 (2) 남북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남북정당 사회단체대표로서 남북정치회의를 구성할 것 (4) 남북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대원칙에 입각한 선거 규칙을 작성하여 최고입법기구를 구성할 것 (6) 반민족행위를 처단할 것 (7) 조국방위군을 재편성할 것이었다.52)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프락치 사건에 관련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위의 국회의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사건 당시부터 조작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3)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1993년에 한국정부에 제공한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극비 군사외교 문서에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실상에 관한 중요한 기밀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것은 1949년 4월에 북한 주재 소련대사가 된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가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보낸 <남북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 1949년 9월 15일>이라는 비밀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의 다음과 같은 기술은 분명히 남로당 프락치들의 활동을 설명한 것이다.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했습니다.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국회 안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 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 사항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의 미군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결의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 등이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실행된 보기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법률안 심의 때에 이들은 법률안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하고 그 내용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54)
 
  슈티코프는 또 이 보고서에서 남조선 노동당은 1948년 말에는 당원이 90만명에서 24만명으로 줄었고, 1949년에는 정치적으로 확고하지 못한 당원들의 탈퇴와 노동당 등록당원에 대한 탄압으로 그 수가 더욱 감소했다고 기록했다.55) 이러한 보고는 위기감을 느낀 남로당 수뇌부가 각계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세력을 만회하려고 시도한 동기를 짐작하게 한다.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과정에서 경찰과 법조계에 잠입해 있는 남로당 프락치들이 검거된 것도 그러한 보기였다.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김영재(金寧在)도 1947년부터 남로당에 입당하여 활동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법조계 프락치 사건은 1949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수사가 진행되어 김진홍(金振弘), 김두식(金斗植) 등 검사 6명과 양규봉(楊圭鳳), 백석황(白錫璜) 등 변호사 8명이 검거되었다.56)
 
 
  《로동신문》은 成始伯의 공작이었다고 주장
 
成始伯 특집기사가 실린 《로동신문》의 1997년 5월 26일자.
  이 무렵 일련의 공산주의 프락치 활동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무역상 행세를 하면서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와 《우리신문》 발행에 관여하는 등 종횡으로 활동하던 수수께끼의 인물 성시백(成始伯)이 남로당과는 관계없이 움직이는 방대한 조직의 활동이었다.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라는 이 조직은 김일성의 직접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시백은 포섭한 인사들을 1950년 5월 10일에 실시되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킨 뒤 합법 투쟁을 전개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성시백은 1950년 5월 15일에 체포되었는데, 이때에 검거된 인원은 모두 112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직업도 정당원, 공무원, 상인, 교원, 외국공관 직원, 회사원 등 다양했다.57) 북한은 평양에 ‘애국렬사릉’을 조성할 때에 그곳에 성시백의 묘도 만들어 놓았다.
 
  북한의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매우 이례적으로 1997년 5월 26일자 2면 전체를 성시백에 대한 특집 기사로 채웠는데, 이 기사는 1949년의 국회 프락치 사건이 성시백의 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괴뢰 ‘국회’ 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 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분파와 그들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반미 반괴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 연단에서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 주었다. …”58)
 
  《로동신문》의 이러한 기술의 동기가 뒤늦게나마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남로당의 투쟁사를 역사에서 지우기 위한 역사왜곡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크게 공헌한59)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 중앙 분실장 김호익(金昊翊) 경감은 수사가 마무리되고 있던 8월 12일에 남로당의 서울 총책 김삼용(金三龍)의 하수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60)
 
  국회 프락치 사건은 국회 세력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소장파 그룹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어 각자 보신책에 급급하게 된 한편, 민국당은 원내 제1세력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61)⊙
 

  1) 1 Robert T. Oliver, Sy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220.
 
  2) 國會事務處,《制憲國會速記錄(3)》, 제2회 제24호(1949.2.7), pp.443~447, p.458. 3) Robert T. Oliver, op. cit., pp.220~223. 4) ibid., pp.223~224. 5) 小此木政夫, <米國の朝鮮政策, 一九四七~四九——米軍撤退の決定を中心に>,《法學硏究》제54권 제3호, 1981, 慶應義塾大學法學硏究會, 1981, p.181. 6) “Position of the United State with Republic of Korea”,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9, vol.Ⅶ,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6, pp.969~978.
 
  7) Muccio to Acheson, Apr. 9, 1949, FRUS 1949, vol.Ⅶ, pp.981~982. 8) 《京鄕新聞》1949년 4월9일자, <맥아더案實施>. 9) Muccio to Acheson, Apr. 12, 1949, FRUS 1949, vol.Ⅶ, p.986. 10) Rhee to Muccio, Apr. 14, 1949, FRUS 1949, vol.Ⅶ, p.991. 11) Acheson to Muccio, Apr. 15, 1949, FRUS 1949, vol.Ⅶ, p.992.
 
  12) 《東亞日報》1949년 4월19일자, <美軍撤退時期를 協議>. 13) Memorandum by Butterworth, Apr. 15, 1949, FRUS 1949, vol.Ⅶ, pp.992~993. 14) 《朝鮮日報》1949년 4월21일자, <무大使信任狀을 捧呈>. 15) 國家記錄院 所藏,《國務會議錄》제41회(1949.4.16), p.263. 16) 《東亞日報》1949년 5월7일자, <二晝夜激戰後에 擊退>. 17) 《自由新聞》1949년 5월7일자, <春川聯隊의 一部가 越北>.
 
  18) 《東亞日報》1949년 5월8일자, <國土兩分은 美蘇責任> 및 <共産威脅除去策講究後에 撤退가 當然>. 19) Muccio to Acheson, May 9, 1949, FRUS 1949, vol.Ⅶ, p.1013.
 
  20) Memorandum of Conversation by Butterworth, May 11, 1949, FRUS 1949, vol.Ⅶ, pp.1019~1021. 21) Muccio to Acheson, May 31, 1949, FRUS 1949, vol.Ⅶ, pp.1035~1036. 22) 이원덕, <주한미군철수에 관한 연구——1947~1949의 경우를 중심으로>, 1987,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曺二鉉, <1948~1949年駐韓美軍의 철수와 駐韓美軍軍事顧問團(KMAG)의 활동>,《韓國史論》35,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96, 참조. 23) 외무부,《대한민국조약집(제1집)》, 1957, pp.49~55.
 
  24) 李承晩,《一民主義槪述》, 一民主義普及會總本部, 1954, pp.3~8. 25) 尹炳求, <序文>,《一民主義槪述》, p.1. 26) 《國務會議錄》제32회(1949.3.18), p.205. 27) 《서울신문》1949년 6월22일자, <尹炳求翁急逝>. 28) 《東亞日報》1949년 4월23일자, <祖國防衛에 學徒總蹶起!>.
 
  29) 《聯合新聞》1949년 5월21일자, <國家保安法違反嫌疑로 臨時議會 앞두고 逮捕斷行?>. 30) 《制憲國會速記錄(5)》제3회 開會式(1949.5.21), p.3. 31) 《制憲國會速記錄(5)》제3회 제2호 (1949.5.24), p.41. 32) 《京鄕新聞》1949년 6월2일자, <釋放要求88議員을 赤色視?>. 33) 《制憲國會速記錄(5)》제3회 제10호(1949.6.2), p.212. 34) 《朝鮮中央日報》1949년 6월7일자, <崔雲霞査察課長逮捕>. 35) 《東亞日報》1949년 6월8일자, <特別事件波紋至大>. 36) 《朝鮮中央日報》1949년 6월7일자, <査察課員總辭表>.
 
  37) 《聯合新聞》1949년 6월7일자, <數十名의 武裝警察特委本部를 包圍, 武器書類等을 押收>. 38) 《朝鮮中央日報》1949년 6월8일자, <身分保障을 建議>. 39) 《聯合新聞》1949년 6월9일자, <九千警官들 繼續鬪爭을 決議>. 40) 《聯合新聞》1949년 6월9일자, <鐵警도 共同步調>. 41) 《聯合新聞》1949년 6월10일자, <警察動搖一段落>. 42) 《朝鮮日報》1949년 6월7일자, <內閣一部更迭>. 43) 《東亞日報》1949년 6월8일자, <崔雲霞釋放>. 44) 《制憲國會速記錄(5)》제3회 제13호(1949.6.6), pp.271~272 ;《東亞日報》1949년 6월8일자, <特委事件波紋至大>. 45) 《制憲國會速記錄(5)》제3회 제13호(1949.6.6), p.301. 46) 《東亞日報》1949년 6월8일자, <李大統領特警解散理由言及>. 47) 《聯合新聞》1949년 6월12일자, <特警解散은 不得已한 措置>.
 
  48) 《朝鮮中央日報》1949년 6월23일자, <七國會議員에 今狀, 昨日午後까지 全部逮捕>. 49) 《自由新聞》1949년 6월29일자, <三議員全部起訴>. 50) 서울地方檢察廳,《서울地方檢察史》, 1985, pp.113~114.
 
  51) Robert T. Oliver, op. cit., pp.231~232. 52) 《制憲國會速記錄(5)》제3회 제1호(1949.5.23), pp.23~24. 53) 남시욱,《한국진보세력연구》, 청미디어, 2009, p.127. 5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 남북조선의 정치경제상황 개요, 1949년 9월15일>,전현수-기광서 역,《한국전쟁, 문서 자료, 1950~53년》, 국사편찬위원회, 2006, p.36. 55) 위의 책, p.35. 56) 서울地方檢察廳, 앞의 책, p.115 ; 김대현, <국가보안법 제정배경과 법조프락치사건>, 2012,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조. 57) 서울地方檢察廳, 앞의 책, pp.117~118 ; 吳制道 ,《追擊者의 證言》, 希望出版社, 1969, pp.258~266.
 
  58) 《로동신문》1997년 5월26일자,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 59) 《國際間諜事件—金昊翊搜査日記》, 三八社, 1949, 참조. 60) 《東亞日報》1949년 8월14일자, <金昊翊警監被殺, 白晝執務室에서>. 61) 國會事務處,《國會史 制憲國會·第二代國會·第三代國會》, 1971, pp.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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