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한민국 대표문학상 수상 작가를 찾아서 ⑦ 朴範信 : 월간조선

서울 평창동의 화정박물관은 미술품의 수집과 전시를 전문으로 한다. 언뜻 볼 때는 시선을 끌거나 눈에 띄는 공간이 아니다. 우체국에서 파는 규격봉투 중 일반화된 노란색, 건물 외벽은 그런 빛깔로 칠해져 있다. 내부 포스터는 작년 9월부터 금년 3월까지 라마교의 나라 티베트 문화 전시를 알리고 있다. ‘탕카’라는 불교회화 중심이다. 언젠가 박범신의 모습도 독특한 형상이 되어 누군가의 박물관에 가치 있는 소장품이 될지 모른다.

작가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화정박물관에 있는 슬로 가든 카페이다. 작가는 제자들과 합평회를 하고 있다. ‘영원한 청년 작가’라는 별칭을 가진 박범신, 그를 상징하듯 작가가 입고 나온 점퍼는 블랙야크 마크가 새겨진 짙은 청록색 등산복이다. 푸른색 계열이 춥게 느껴지지 않고 신비로움을 준다. 히말라야에서 남태평양을 응축해 온 듯 청년 작가의 가슴은 활짝 펼쳐질 것 같다. 시멘트벽돌 카페 내부에 그려진 무궁화 벽화는 박물관의 어떤 문화유산보다 화려하게 꽃피어 있다.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장편소설 《고산자》는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다. 그렇다 하여 온통 다 가짜는 아니다. 고산자(김정호의 호)는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새로이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조선후기 중인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관아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난 아버지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얼어 죽는다. 어린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제대로 된 지도를 들고 겨울 산을 넘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 속에 그때부터 잘못된 지도를 바로잡기로 한다. 작가는 그가 왜 지도를 그렸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백두산을 여덟 번 올라가고, 국토를 걸어서 만든 지도가 아니었다. 그가 이룬 위업은 목판본 지도를 만든 것이다. 누구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정확하고 간편한 지도가 그의 완전한 꿈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독점하는 지도가 아니라 일반 백성도 소지하게 하여 경제활동을 돕고자 하였다. 《고산자》를 읽으면 조선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 하는 실학사상, 그 배경하에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갈망과 그리움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권력과 신분이라는 주홍글씨에 가려져 외롭게 살다 죽어간 한 인간을 이해하게 된다.

김정호에 대한 역사적 기록 거의 없어

—소설 《고산자》는 김정호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는 겁니까.

“이 소설은 고산자 이야기면서 인간의 본원적인 갈망, 그리움을 그리고 싶었지요. ‘갈망의 3부작’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촐라체》《고산자》《은교》 중 하나입니다. 본원적인 갈망은 충족되지 않는 것이고, 이룰 수 없는 꿈 같은 것이죠. 나는 고산자를 그런 사람이라고 봤어요. 그가 목표했던 것은 <대동여지도>가 아니에요. 그는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기 이전에 <동여도>라는 지도를 먼저 그려요. 그 지도가 <대동여지도>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은 목판본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김정호는 국가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국토에 대한 정보를 일반백성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 거죠. 목판본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니까요. 누구나 지도를 갖고 전국을 돌아다닐 수도 있고 경제활동도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요. 말하자면 완전한 민주화와 완전한 경제민주화를 꿈꾸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굉장히 선구자적인 꿈이었죠.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최소한 그것만 알더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수집은 어떻게 했습니까.

“제가 두 가지 캐릭터를 좋아해요. 떠돌이와 권력으로부터 핍박 받은 인간, 고산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해 보니까 내가 들었던 고산자에 대한 속설들이 전혀 근거가 없더라고요. 난감했지요. 지도를 그리기 위해 전국을 일일이 다닐 수가 없어요. 백두산을 몇 번, 뭐 한두 번 가 보기는 했겠지만 속설에 불과하고, 감옥에서 죽었다는 것도 역사적인 근거가 없었어요. 놀라운 것은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가장 우수한 텍스트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사람들이 <대동여지도>가 훌륭한 지도라고만 생각하지, 그게 정작 어째서 훌륭한지는 현대인들도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에요.”

—어째서 그럴까요.

“당시엔 실학이 지식인 사회의 트렌드였어요. 그런데도 말로만 실학을 하고 내용으로는 고산자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도 남긴 것이 없어요. 생몰연대라든가 고향이 어디인지, 어떻게 지도를 그렸는지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실용을 말하면서도 사실 신분주의 조선의 속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죠. 만약 고산자가 양반이었으면 기록이 많이 남아 있을 거예요. 그는 훌륭한 지도를 그렸으니까.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 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고산자는 유령이구나, 그랬어요. 나는 이를테면 이름만 돌아다니는 고산자라는 유령에게 육체라는 옷을 입힌 거지요. 소설은 그게 가능하니까요.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산자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어서 어떻게 인물을 되살릴 것인가였어요. 하지만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니까,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를 뒤져 보고 그 안에 고산자를 놓아 보니까 고산자는 이런 사람이었겠다는 게 상상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쓰게 된 겁니다.”

—역사적인 사실 말고 배경이나 인물과 관련해서는 어디까지가 상상력에 의해 쓴 것입니까.

“거의 다 제 상상력으로 만든 인물들입니다. 물론 역사적인 백그라운드라 할 시대배경은 그대로 살렸지만, 이야기는 거의 제가 상상한 것이죠. 고산자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는 속설이 있어요. 그것도 속설이지 근거는 전혀 없었어요.”

—<대동여지도>는 실학적 지식으로 국가의 사회, 경제 공간구조를 반영한 조선시대의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지도라고 해요. 그런데 고산자가 오로지 지도를 걸어서만 그렸을까요.

“저는 고산자가 지도를 다 걸어서 만들었다고 생각은 안 해요. 만약 그가 백두산을 여러 번 갔다 해도 백두산을 어떻게 다 그리겠어요. 저는 평창동에서 20년 넘게 살았어도 이곳에 대한 정밀한 지도를 못 그려요. 고산자는 학문적이고 인문학적인 통찰력이 뛰어났던 사람이에요. 그때 당시에도 지도는 많이 나왔어요. 군현도 등 지방에서 그린 지도도 있고, 중앙관서에서 그리는 지도도 많지요. 그는 걸어서 돌아다니는 시간보다 서고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절에 가면 절 신도들이 들고 다니는 지도가 있을 거고 보부상이 들고 다니는 지도도 있고, 많은 분야의 지도를 수합하고 국가에서 만든 지도도 모으고 해서 그것을 합리적으로 바로잡고 새로운 지도법을 적용시킨 거죠.”

현대는 감수성의 지도를 갖고 있어야

—작중에서 고산자는 ‘어찌하여 지도가 나라의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로 당시 백성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했어요. 그 당시 지도는 서민경제적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죠. 지금 우리 사회에도 기득권층이 내려놓아야 할 지도가 있겠죠.

“많죠. 결국은 뭐 정보를 갖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되죠. 예를 들어 환자와 의사의 정보가 100% 똑같다면 의사의 권위가 손상되겠죠. 환자는 끝없이 당신하고 똑같이 알겠다고 요구를 하는 것이고, 의사는 환자에게 정보를 나눠 주지만, 그래도 자기가 더 많은 정보를 갖고자 하겠죠. 국가권력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금도 어떤 정보에 대해서는 국민들하고 나누지 않으려는 것이 많잖아요. 권력의 속성이죠. 완전한 민주화라는 것은 정보에 대한 온국민의 공유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게 뭐 다 그렇게 되나요? 그래서 맨날 싸우잖아요. 현재 우리 사회는, 고산자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건 사실이지요.”

—미래의 지도는 어떻게 인류를 지배하게 될까요. 또는 작가님이 꿈꾸는 지도는 어떤 지도여야 한다고 봅니까.

“글쎄요. 지도의 효용성은 10년이나 20년밖에 안 가요. 그보다 더 정밀한 지도가 바로 또 나오거든. 지금처럼 우주에서 사진 찍어서 보내는 정밀한 시대에 비하면, <대동여지도>야 정보를 위한 효용성은 더 이상 없어요. 그가 위대한 것은 그 당시에 국토에 대한 정보를 일반인에게도 나누어 주려고 했던, 그 점이지요. 지금은요, 국토에 대한 정보가 거의 공개돼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처럼 감수성이 발달되어 있는 민족에겐, 성공하려면 감수성의 지도를 갖고 있어야 하는 시대 같아요. 단순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감성의 지도를 정확하게 그려내고 알고 있는 자가 성공하는 시대죠. 기업도 정치도 마찬가지고요. 국토의 외형에 대한 정보는 더 이상 비밀이 없잖아요. 거의 완전하게 됐기 때문에 그런 감성의 지도가 필요하겠죠.”

—이야기를 넘어서 실제 느낀 고산자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인문학자이고,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선구자이고 과학자였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가였던 것 같아요. 뛰어난 서각인 예술가이죠. <대동여지도> 자체가 그림이고요. 지금도 그처럼 정밀하고 균형 잡힌 전국 축적도를 목판본으로 조각해 내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의 위대성을 당시는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시대와의 불화를 계속 겪어야 했고 가장 외로웠다고 느껴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그리움, 갈망과 맞물려 있는 것이지요. 이 소설에서 제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거죠. 역사나 문화나 이런 것도 사람이 갖고 있는 갈망, 그 에너지로부터 비롯되는 것 아니겠어요. 삶에 대한 본원적인 갈망,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암튼 그 갈망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평생 그는 외로웠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그 갈망을 놓지 않고 그 길을 따라간 사람이지요, 고산자는.”

—작중 혜련스님과의 로맨스도 다 만든 건가요.

“다 만든 것이죠. 혜련스님은 일종의 금기에 갇힌 인물이지요. 스님하고 어떻게 살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잖아요. 그녀에 대한 고산자의 갈망은 단지 여자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고 어차피, 그런 것들은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그들은 같은 엄마의 젖을 먹고 살아났잖아요. 그런 관점에선 근친의 관계라 할 수도 있지요. 이중삼중의 터부를 갖고 있죠. 그럴 때 인간은 더 갈망을 갖게 돼요.”

—혹시 금기적인 사랑에 대한 로망이 있나요.

“누군들 없겠어요. 인간의 본질이죠. 사랑의 열망이라는 것은 금기가 있을 때 더 뜨겁게 타올라요. 우리에게 주홍글씨가 없다면 자신이 뜨거워지는 것을 모르죠. 부모가 허락하고 부모가 사 주는 침대에서 무슨 에로티시즘이 폭발하겠어요.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볼 때 그 여자와 접근금지를 당하고 보면 얼마나 더 그립겠습니까. 본질적인 사랑의 열망이라는 것은 금기가 두꺼울수록 더 뜨거워지는 것이지요.”

요즘엔 자본의 억압이 문제

—소설 《은교》를 쓰고 늙어 가는 슬픔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했죠. 그리고 한국만큼 세대 간 간극이 큰 사회도 없다고도 했고요. 늙어 가는 슬픔은 개인의 비애가 아닌 한국 전체의 현실이 아닐까요.

“세대 간 간극만이 아닌, 정파에 따른 간극, 지역에 따른 간극, 가슴 아프죠. 그런 현상을 하나의 전략으로 삼는 사람들이 그 간극을 계속 뻥튀기한다고 봐요. 지금까지 수십 년에 걸쳐서, 정치적인 그룹도 그럴 것이고, 문화의 권력을 지배하는 일부 문화인과 경제인도 마찬가지죠. 온 나라의 국민이 사이가 다 좋으면 그들에겐 득이 안 되니까요. 세대 간의 간극도 그렇죠. 이번 선거를 통해 세대 간의 간극이 더 벌어진 것 같아 속이 상해요. 우리가 모두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대 간의 간극이 왜 있겠어요. 건강한 휴머니즘의 회복이 필요한데, 정치지도자들이나 각 분야의 기득권그룹은 말로만 통합 통합 하면서 뒷구멍에선 딴 궁리를 할 거라고 봐요. 일부 사람들에겐 국민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있어야 ‘고물’이 많이 떨어지니까요. 정치공학 정치전략, 이런 것들이 국민 사이를 끝없이 이간질시켜 왔잖아요. 더 이상 속지 말아야죠.”

—현실적인 대안이 없을까요.

“글쎄요. 우리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문 너머의 진실을 가려 보는 인식의 깊이를 획득해야겠지요. 우리 모두 사람이라는 인식요. 사람을 이간질시켜 덕 보는 자들을 판별해 보는 통찰력도요. 자본주의적 경쟁구조의 최종목표는 이윤창출이지요. 지상의 가치가 되고 만 이 목표는 사람과 사람, 심지어 이웃과 이웃, 형제, 부부 사이조차 끝없이 이간질시키려는 성향이 있어요. 대량소비를 하려면 서로 경쟁심을 건들 수밖에 없으니까. 옛날에는 정치적인 억압이 문제였는데 이제 자본의 억압이 문제지요. 잘못하면 평생 자본의 노예로 살면서 스스로 노예인지도 모르고 사는, 그런 삶의 허당에 빠지게 돼요. 필요한 것은 주체를 확보하는 거죠. 주체로서의 정체성이 없다면 휩쓸리게 될 수밖에요. 자본주의 소비체제가 퍼뜨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곤란해요.”

—《은교》에서는 스승의 글을 훔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제자 서지우와 스승 이적요는 동일인물 아닌가요.

“내 자신을 반영한 거라 할 수 있죠. 내가 소설을 수십 권 썼는데요, 어떤 소설 어떤 대목을 쓸 땐 범박한 서지우가 되어 괴롭고, 또 어떤 대목에선 천재적인 이적요가 돼요. 예를 들면 고산자를 쓸 때, 고산자가 길에만 나오면 내가 행복해지더라고요(웃음). 논리적인 걸 진술해야 되는 대목은 내가 다소 약한 것 같아요. 감수성이나 이런 것은 좋은데요.”

—영화 <은교>는 책보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영화는 젊은 처녀와 늙은 남자의 멜로물에 가깝죠. 소설에서는 늙은 남자(이적요)와 젊은 처녀(은교)의 사랑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쓰지 않았어요. 늙어 가는 슬픔, 어떻게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소설의 메인 주제이고, 두 번째 주제는 재능이라는 것이 과연 뭔가 하는 문제죠. 영화 때문에 때로는 마치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불륜을 썼다고 오해받아 속상할 때가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소설 《은교》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노시인이 그것에 얼마나 통렬히 반역했는가를 진술한,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 보면 돼요.”

—<은교>에서 열연한 영화배우 김고은씨 캐릭터는 만족스러운가요.

“신인배우가 무척 참신했고, 제가 책에서 그린 은교 이미지와 많이 일치했던 배우였어요. 매우 성공적인 캐스팅이었다고 봐요.”

—왜, 은교의 나이가 17세 소녀여야 했나요.

“본질적으로 ‘은교’라는 여자는 이 소설에서 나이가 없어요. 소설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열일곱 살로 설정했지. 은교의 본질은 마흔 살이어도 되고, 예순 살이어도 되는 여자예요. 왜냐하면 은교라는 인물은 작가의 관념 속에 나오는 인물이거든요. 불멸의 한 표상이 ‘은교’예요. 시공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표상이죠. 시간이 지나지 않는 것,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다 있어요. 그것이 꼭 이성이겠어요? 가령 히말라야에 지상에서 가장 큰 성전을 짓고 싶다면 그에게는 성전이 곧 은교예요. 인간은 누구나 최고의 가치,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있어요.”

—영화는 그런 작가의 의도를 디테일하게 그려내지 않았죠.

“영화에서는 노인과 젊은 처녀의 멜로드라마가 된 면이 있어요. 은교가 상징하는바, 불멸의 표상을 이해하고 영화를 봤더라면 더 좋았겠죠.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이 갖고 있는 큰 오해가 어린 처녀와 늙은이의 스캔들일 거다, 이렇게 상상하는 거예요.”

—실제로 은교 같은 젊은 처녀에 대한 생각은요.

“청춘은,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빛나고 있지요. 광채가 가득해 보이잖아요. 누군들 그 빛에 대해 욕망을 느끼지 않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탄생 이전으로부터 부여받은 슬픔’을 갖고 있어요. 삶의 유한성 말이죠. 《은교》는 그걸 쓴 거예요. 욕망은 자연이지, 나쁜 게 아니에요. 노인이라고 그게 뭐 다르겠어요. 노욕이란 말이 있는데, 잘못된 말이라고 봐요. 그 말 속엔 노욕은 나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노욕은 따로 없어요. 그냥 욕망이 있는 거지. 소설 《은교》에 왜 그런 문장이 나오잖아요. ‘젊은 너희의 아름다움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은 것이 아니듯이 늙은이의 주름살도 늙은이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은 아니다’는 문장요.”

문학의 운명은 결핍과 밀접한 관계

—역사는 명분의 기록이고, 소설은 명분 너머의 오욕칠정(五慾七情)에 대한 통절한 기록이라고 했는데요.

“내가 말하는 오욕칠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마음의 빛깔을 다 말하는 거예요.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정말 일관성도 없고, 그러면서 가장 큰 역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본원적인 에너지도 되는 것. 그게 오욕칠정이지요.”

—논산일기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페북일기를 책으로 낸 것인데 잠언적인 명언이 많아요. 혹, 강연가로 나설 생각은.

“아, 강연! 뭐 요청이야 많지요. 평가도 좋은 것 같고요. 요청대로 한다면 매일 강연을 해야 할 거예요. 근데 스무 번쯤 요청 오면 한 번 정도 응해요. 강연보다 소설 쓰기가 훨씬 재미있으니까요. 강연과 달리, 소설은 전에 누구도 하지 않은 말, 쓰지 않은 문장을 계속 쓰는 일이에요. 소설가에겐 인생이라는 텍스트밖에 없죠. 그러니 재미있을 밖에요.”

—“나는 집단이 싫습니다. 나는 정파가 싫습니다. 비뚤어진 엘리트주의를 혐오합니다. 나는 계몽주의를 혐오합니다. 허세에 따른 권위주의가 싫습니다”라고도 했잖아요. 한국식 좌파, 한국식 우파가 싫다 했는데, 요즘 한국작가들의 지나친 정파편향을 어떻게 보세요.

“얼마 전 광고 낸 137명 문인들을 옹호하는 칼럼도 제가 썼죠. 문인들도 한 시민으로서 얼마든지 정파에 가담할 수 있고 발언할 수 있고 운동할 수도 있다고 봐요. 그걸 욕할 필요는 없어요. 작가의 발언을 두고 법치주의를 내세워서 처벌부터 하겠다는 수준은 이제 우리도 벗어나야 되지요. 작가는 예민하기 때문에 보통시민들보다 더, 언제나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다만 나는, 현실정치에 간여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어느 특정 정파를, 목소리 높여 지지할 마음도 없고요. 그건 내 스타일이에요. 소설은 아주 열린 형식이에요. 나는 소설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비판하고 발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내겐 일종의 문학 순정주의, 문학 제일주의 같은 게 강력히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모든 작가는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상처받은 자, 부자유한 자 편을 들게 되어 있지요. 문학의 운명이 그런 결핍들과 관계 맺고 있으니까요.”

—에레베스트 산을 열 번 이상 간 등산가로도 알려졌는데.

“나는 트래커죠. 동양에는 등산이라는 개념도 없어요. 서양에서 온 거지. 우리는 산을 순례하고 산을 의지해서 사는 거죠. 나는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를 열댓 번 갔어요. 트래킹하러 가요. 산 밑에서 걷고 많이 올라가 봤자 오천오륙백 미터예요. 보통 거기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어요.”

—현재 논산에 정착했는데, 논산은 어떤 곳입니까.

“논산은 유림의 본거지이지요. 조선 중후반부를 거의 지배했던 서인그룹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어요.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것도 논산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매우 중요한 곳인데 사람들이 논산 하면 훈련소로만 기억해요. 거기 사람들은 속상하죠. 논산은 전통이 있는 곳, 특히 조선의 예법과 인문학적 학통 같은 것을 근본적으로 만들어 내고 집대성하고 지켜낸 고장이에요. 논산은 지리적으로 대둔산과 계룡산 사이에 있어요. 자연도 아름답고 유구한 전통도 갖고 있는 곳이죠.”

—논산 음식으론 무엇이 유명한가요.

“강경에는 젓갈이 유명하고, 딸기가 유명해요. 논산 딸기는 씻어서 안 먹습니다. 새로 품종을 개발해 가지고 물만 주고 키우기 때문에 논산 딸기는 안 씻고 먹어도 좋아요. 논산은 또 대추하고 감이 많아요. 곶감축제, 대추축제, 딸기축제 다 유명해요. 내가 지금 호수주변에 살아서 그런지, 붕어찜 같은 거, 민물고기 매운탕 같은 것도 참 맛있어요.”

—자신을 불온한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했는데 글쓰기에 좋은 에너지인가요.

“모든 예술이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갈팡질팡하는 데서 에너지가 나오는 거지. 주관과 객관, 냉탕과 온탕, 충만과 결핍, 그런 것의 편차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분열할 때, 언필칭 상상력이 고양되지요. 나는 여전히 강력한 현역작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시종하고 싶어요. 나이의 권위 같은 것에 기댈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불온해야지요. 언제나 강력한 자기변혁을 꿈꾸며 살아야지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관습으로서의 안락에만 기대 살고자 한다면 그는 젊었어도 이미 늙은 것이고, 안락함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여전히 자기 변혁, 자기 혁명에의 욕망을 갖고 있다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그는 청년이다, 이렇게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문화·정서적인 노후 준비도 해야

—작가는 늙어 가는 슬픔을 소설로 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늙어 가는 슬픔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스스로 노력하는 거죠. 사회구조의 책임도 많아요. 부모가 되면 오로지 아빠노릇 엄마노릇만 하면서 살아요. 직장에서 벌어서 자식 키우고 뒷바라지하고 사는 것이 자기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려요. 지금 늙은 아버지들은 10시간 넘게 일하고 계속 달려와야 했기 때문에, 문화·정서적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틈을 사회에서 다 빼앗은 거나 다름없지요. 노후대비라는 것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죠. 경제적인 대비도 해야겠지만, 문화·정서적인 대비도 해야죠. 경제적인 노후대비와 아울러 어떤 삶의 본원적인 문화·정서에 따른 대비, 어떻게 시간을 받아들이고 이겨 갈지에 대한 노후 대비, 이런 것들을 반드시 해야 된다고 봐요.”

—신작 소설 《소금》은 어떤 내용인가요.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데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예요. 늙어 가는 아버지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부를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지금 우리가 이만큼 먹고살 만하게 된 것은 아버지 세대가 쏟은 희생과 헌신 때문이죠. 아까 말한 대로 인권조차 포기하고 하루 열댓 시간씩 야수적으로 일했던 세대가 만들어 낸 거죠. 지금 일부 젊은이들은 소비의 단맛에만 취해 있어요. 물론 전망부재 때문에 고통받는 젊은이도 많지만요. 《소금》은 소비의 단맛에 취한 새로운 세대에게 지난 50여년 동안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말해야 되겠다, 그렇게 시작한 소설이에요. 러브스토리도 나와요. 이 정도의 나라를 만들어 내는 데는 수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실도 있었을 거라고 보니까요. 요즘, 늙어 가는 아버지들, 쓸쓸하잖아요. 가부장제 아래에서 아버지가 가졌던 권력은 이미 완전 해체됐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아버지들의 짐도 가족이 나누어 져야지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그 모든 의무를 혼자 짊어져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소금》에서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들의 아버지를 ‘의무만 가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만 보지 말고 한 인간으로 들여다보라고요. 늙어 가는 아버지들의 저 쓸쓸하게 돌아앉은 지친 등을 좀 보라고요. 우리 사회의 모든 그늘이 아버지 탓만은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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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문학상 수상 작가를 찾아서 ⑦ 朴範信

“나는 영원한 문학 순정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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