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京蘭
⊙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단편소설 《불란서 안경원》으로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풍선을 샀어》,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없다》 《혀》 《복어》 등.
⊙ 문학동네 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단편소설 《불란서 안경원》으로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풍선을 샀어》,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없다》 《혀》 《복어》 등.
⊙ 문학동네 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누군가 “단발머리를 아세요?”라고 물으면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레옹>의 주인공 마틸다를 답할 것이다. 그다음은 최근 만난 조경란 작가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녀가 카페에 나타났을 때, 90년대 영화 속의 소녀 마틸다가 성장하여 맞은편에 나타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귀밑에 머문 깜찍한 단발머리는 무엇보다 단연 돋보였다. 젊은 여성 작가와의 만남은 고궁과 청와대가 멀지 않은 동네, 외국인 관광객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삼청동에서 이루어졌다.
조경란 작가가 태어나고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현 중앙동)이다. 작가는 가끔 한강을 건너는 것을 좋아한다. 한강을 건너서 만나는 도시가 비로소 시내, 서울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40대 여성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맞벌이 여동생의 아이들을 키우며 산다. 작가의 집은 전통시장과 가깝다. 독신 이모가 소설을 쓰며 4명의 조카를 척척 키웠던 것은 가까운 시장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작가는 시장에 관한 집필도 계획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서에도 작품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소중한 공간, 그리고 자식 같은 조카들, 소설은 그 안에서 터져나왔다. 고층아파트에서 걸어나와 기사가 열어주는 승용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쇼핑을 하러 갈 강남스타일 마틸다가 재래시장을 누빈다. 그녀는 한파에 가지 두 개가 1900원이라고 물가 걱정도 한다.
삼청동 카페는 붉은 벽돌과 모자이크 창으로 벽을 꾸미고, 청색 노랑 빨간색의 컬러풀한 의자로 내부를 돋보이게 만들어 놓았다. 삶은 팥을 갈아 넣은 단팥라떼가 일품이었는데, 무료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 하여 인터뷰를 하다 말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겨울 오후 짧은 해는 쪽달만큼 남지 않았고, 사랑의 거리에도 한파는 매정하게 몰아쳐 왔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속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말은 춥다, 춥다.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 《좁은문》은 안개가 주인공이다. 등장인물보다 안개가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회색빛 벽이라고 해도 될 깊고 무거운 안개는 인간의 생명마저 질식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당포 남자와 카페 여자의 미묘한 인연과 소통의 이야기이다. 짙은 안개가 낀 날 여자는 금반지와 보증서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들고 남자의 전당포에 찾아온다. 남자는 보석 전문 감별사다. 여자가 들고 온 반지는 검안경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가짜이다. 순도 99.9% 금은 만졌을 때 물렁물렁하고 따뜻한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여자가 가져온 금은 18k도 14k도 아니다. 가짜임을 확인한 여자는 재빨리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 얼마 후 이제는 가짜 다이아몬드를 들고 찾아온다.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내밀었지만 그것도 역시 가짜였다. 그런데 남자는 가짜라고 말하지 못하고 여자에게 돈을 내어준다. 기한은 3개월이다.
그 여자는 카페에서 그네를 탄다. 그곳은 환상의 카페.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공간이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밤마다 여자는 두 시간 동안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타고 내려올 때마다 남자는 맥주를 마시며 여자의 거뭇한 곳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평온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진짜 루비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3개월 후 여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 전당포도 남자도 없다. 전당포와 남자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몽상적인 인물은 일종의 소설적 장치
—현대문학상 수상작 《좁은문》은 독자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주는 특이한 작품 같아요. 쓰게 된 동기는요.
“《좁은문》은 다소 그 점을 의도하고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무렵에 9·11에 이어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어요. 그때 작가로서, 혹은 한 개인으로서 고민이 많았어요. 이런 시대에 어떤 작품을 써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전에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라는 단편소설을 썼는데 그건 탈레반이 카불 동물원을 공격한 데서 착상했어요. 전쟁이 시작돼 어떤 도시들을 점령할 때면 우선 동물원의 맹수들부터 공격한다고 들었어요. 도시를 폭격했을 때 맹수들이 동물원을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요. 전쟁과 생명들, 불신들,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약간 우화적으로 비틀어서 썼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가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 혹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저는 늘 무엇을 쓸까 보다는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해 왔거든요. 그 무렵은 정말 작가로서 개인으로서 참 힘들었어요. 이 시대에 테러와 전쟁이라니. 꽤 오랫동안 머릿속이 멍하고 어떤 풀리지 않는 의구심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낯선 공간에 있다가 새벽에 집에 가려고 도로에 나와 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침 5시나 6시쯤이었을 거예요. 주위에 안개가 가득했어요. 불과 몇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한 안개였어요. 그때, 이 짙은 벽처럼 느껴지는 안개를 건너가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 갔어요. 때론 벽처럼 때로는 꼭 열고 들어가야 할 문처럼 느껴지는 이 안개를 이미지로 혹은 상징으로 한 남자와 여자를 소통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느꼈고 그 후에 나온 소설이 바로 《좁은문》이었어요.”
—작가의 구상 속에 있던 좁은 문은 어떤 문입니까.
“문은 문이지만 좁아서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가기도 어려운 그런 문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 사이에 안개가 있는 거죠. 안개가 사라지자 남자 주인공은 그녀에게 가 닿기 위해서 나중에는 스스로 안개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안개는 사라져 버리게 되죠.”
—안개가 되어서라도 그녀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느낌과 그리고 자살이라는 느낌도 받았어요. 맞나요.
“글쎄요, 그건 말씀드리기 힘드네요. 작가가 자신이 쓴 소설의 어떤 부분에 대해 너무 명확하게 설명해 주면 독자의 상상력을 바로 제한해 버리지 않을까요.”
—상을 받은 소감은 어땠습니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가 2012년 11월 중순이었어요. 제가 등단한 지 7년이 되던 해였죠. 어머니랑 둘이서 김장 준비를 하려고 배추를 다듬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어요. 그게 저한테는 첫 번째 문학상 수상소식이었어요. 그 당시 무척이나 의기소침하고 기가 꺾여 있던 상태였어요. 이렇게 계속 소설을 써도 되나, 글쓰기는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하고요. 그런데 어려운 시기에 어렵게 쓰기도 했던 《좁은문》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게 돼서 감사했어요. 어떤 뜨거운 위로처럼 느껴졌거든요.”
—소설의 이미지가 그로테스크하고, 인물은 다소 몽상적인 느낌이었어요.
“어쩌면 그게 안개라는, 형태가 불분명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의도적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소설적 장치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런 이미지뿐만 아니라 소설의 무대인 카페조차도 이런 데가 세상에 정말 있을까? 의아해지잖아요. 사실 《좁은문》은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죠. 상황도 이미지도 공간도 관계도… 열 사람이 책을 읽으면 열 명 모두 다른 느낌과 다른 감상을 갖게 되길, 다른 소설보다 더 바라기도 했고요.”
—동인문학상 수상작 《풍선을 샀어》에서는 올케와의 관계에서 심리 묘사가 좋았습니다. 실제 올케와 살아본 경험이 있었습니까.
“저는 올케가 없습니다. 남동생도 없고요. 여동생만 둘 있어요. 바로 아래 여동생은 일본 사람하고 결혼해서 도쿄에서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도쿄를 1년에 한두 번씩은 가서 보낼 수 있는 거지요. 도쿄 여동생 아이들은 태어나서 얼마 동안 저랑 같이 살다가 제부가 있는 일본으로 갔어요. 그리고 막내 동생네 두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저와 살고 있죠. 제 부모님과 함께요.”
—이모가 조카를 키운다고요.
“네. 제 막내 동생이 집 근처에 사는데 부부가 맞벌이를 해요. 말하자면 아이를 친정엄마가 키워주고 있는 셈인데, 그 친정엄마가 저랑 사시니까요.”
선택할 수 있다면 하지 않겠다는 결혼
—놀랍네요. 조카가 엄마라고 부르지 않나요.
“네, 가끔 저를 엄마라고, 엄마를 큰이모라고 부를 때도 있어요. 저는 미혼이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뭔지는 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조카들이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왔을 때 첫날부터 제가 그 신생아들을 목욕시키고 돌봤거든요. 잠자는 시간만 빼고요. 그게 몇 년이 이어졌죠. 네 아이 중 두 녀석은 지금도 함께 살고 있고요. 저에게 조카들은 상당히 중요한 존재예요. 3월에 출간할 여섯 번째 소설집 원고를 얼마 전에 출판사에 넘겼는데요, 그 소설집을 다시 읽다 보니까 조카들이 제 삶과 글쓰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더라고요. 아이들을 돌보는 게 힘들 때가 물론 많고 제가 그 아이들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아이들이 저에게 준,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아요. 그러면서 저는 서서히 다른 사람이 돼갔던 것 같아요. 뭐랄까, 생이 아름답다고 진짜 믿게 되고 긍정적이 되는….”
—큰 경험을 하고 있네요.
“정말 큰 경험이고 축복이죠. 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은 경이로워요. 그런 아이들과 같이 살지 못했더라면 저는 정말 시니컬하고 어떤 면으로는 꽤나 비관적인 그런 독신으로 나이 들어 갔을 거예요(웃음). 제가 여태 독립을 못 하는 이유는 형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제 와서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부모님은 더 늙어가고 계시니까요. 혼자 따로 나가 살면 내 마음이 편할까 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저는 요즘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부모와 같이 늙어가고 아이들과 같이 성장해 나가고 있구나 라고요. 아무튼 조카들의 탄생과 성장이 저라는 사람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글도 써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양육을 했습니까.
“정오까지는 주로 어머니가 돌보고 제가 일어나는 오후 1시부터는 별일 없으면 거의 오후 내내, 아이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제가 돌보곤 하죠.”
—결혼은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까.
“어떤 아는 선배가 하고 싶었던 결혼도 아이도 낳지 못한 채 50세가 넘어 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다행이구나,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죠. 저는 지금의 이 상황이 저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마흔이 될 때, 쉽지가 않았어요. 생각도 많았어요. 각오라고 할까요. 여성으로서 마흔을 넘긴다는 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물론 인생은 내일, 아니 오늘 당장에라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지만 내 삶에 관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이제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요. 저에게는 결혼도 그중 한 가지였어요. 그러니까 선택할 수 있다면 하지 않겠다, 라는 그런 자발적인 결심 없이 만약 그 선배와 같은 입장이 돼 버렸다면 저 역시도 후회하고 또 많이 서글퍼했겠지요.”
—적당한 상대를 고르다 자연히 독신이 돼 버린 경우와는 다를 것 같고 만약에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와도 결혼을 안 할 건가요.
“음… 그런데 저한테는 지금까지도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그랬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찾아올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고 있고요. 만약 그런 운명적인 인연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결국엔 뒤로 물러날 것 같은데요.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한 거 같아요. 어떤 색깔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그런데 저는 결혼에 관해서는 거의 한 번도 해보고 싶다 라거나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이상하리만큼 없거든요. 그냥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관심이 없이 제가 하는 일을 하루하루 해왔던 것 같아요.”
—《풍선을 샀어》에서 니체가 인간에게 더 나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로 루소적인간과 괴테적인간, 쇼펜하우어적인간 이렇게 구분해서 표현했는데 자신은 어떤 인간형으로 봅니까.
“글쎄요, 저는 그 유형들에 다 속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속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해요. 닮고 싶기도 하고 배제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사람이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유형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각각 다른, 다양성을 가진 존재여서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삼 년 전에 쓴 단편 중에 《학습의 生》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사람이 산다는 건, 한평생 배우고 배우려고 해야 하고 또 배운 것을 나눠줘야 하는 게 우리 생이 아닐까 여기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 인격체가 만들어지는 거겠죠. 그걸 성장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우고…. 그런 삶에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소설을 쓰면서 두려움을 치유하기도
—그런 의미에서 《풍선을 샀어》는 자전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겁니까.
“그 안에 제가 빠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그 소설을 쓰던 무렵에는 제 문학의 큰 주제인 두려움, 소통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자, 라는 각오가 있었어요. 그 주제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경장편쯤으로 써야겠다고 밑그림을 그렸는데 좀 느슨해지고 긴장감도 사라질까 봐 지금의 그 분량으로 완성했지요.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깊이 고민했어요.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같이 건너가 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풍선을 샀어》는 두려움과 소통이라는, 제가 오래 천착해 왔던 주제를 정면으로 다뤄볼 수 있었던 저에게는 무척 의미가 컸던 소설입니다.”
—작중에서 공황장애를 갖고 있는 J가 작가님의 일부였을 수도 있나요.
“J보다는 공황장애를 겪는 J를 지켜주고 싶어하는 ‘나’라는 인물에 가깝죠. 저는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창문이 없거나 사방이 막혀 있거나 하는 장소에는 오래 못 있어요. 지하에 있는 것도 그렇고요. 심각하진 않지만 계단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우리 주변에 보면 그런 크고 작은 두려움(fear)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어요. 본인한테는 심각하고 두려운데 타인에게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그런 두려움들이 어떤 보편적인 주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래저래 《풍선을 샀어》는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소설이 되었죠.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강 하나를 무사히, 안전하게 건너온 느낌이랄까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제가 치유받았다는 걸 알았어요. 사실 저는 제가 좋아하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인간에게 희망의 몸짓은 없다 라고 한 말에 무척 상처받았었어요. 그래서 제 소설 속 인물들이 희망에 대한 몸짓을 그려보는 장면, 그것을 형상화할 수 있는 이미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죠. 그래서 떠올리게 된 게 바로 풍선이었어요.”
—소설을 쓰고 치유를 받은 셈이네요.
“그런 셈이죠. 그게 어쩌면 글쓰기가 저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고요. 자주 생기지는 않지만요. 아무튼 저 자신에게 용기를 준 소설이에요.”
니체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철학자
—《풍선을 샀어》는 니체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인데, 니체를 작중의 화자만큼 좋아하나요.
“제가 아주 우울하고 고통스럽다고 느낀 시기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철학자예요. 전집은 물론이고 그에 관해 번역된 거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어요. 왜 니체인가? 라고 묻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는 니체의 고독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가 고독과 고립을,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낸 그러한 것들을 오래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이상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상이 있다면 어떤 것들을 견뎌야 하고 버틸 수 있어야 하죠. 니체한테는 그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든 그런 것들이 한 가지쯤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도 물론 그런 게 있죠. 가 닿고 싶은 곳, 추구하는 게 있다면 맨발로 바위산을 오르는 일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소박한 저녁을 먹고 공부하고 자고 생각하는 삶은 단순히 철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죠. 소설을 쓰겠다면 저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추구하고 좇는 이상을 지키면서 하루하루 검박하게 사는 것은 중요했어요. 어떤 유혹이 와도 지그시 밀어낼 수 있는 힘은 그 안에서 생겨나겠죠. 내 자의식과 자존심이라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데서 생겨나는 힘이라는 걸 알려준 철학자예요, 니체는. 저는 원래도 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건 사실 뜬구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거라고 더 생각하게 됐죠. 우리가 추구하는 것, 혹은 추구하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을 어떻게 소설로 끌어들여 올 수 있을까, 정말 오래 고민해 왔어요. 다행히 풍선이라는 선명하고도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죠. 만약 니체가 없었다면, 저는 그때의 그 갈팡질팡하던 시기를 제대로 건너오지 못했을 거예요.”
—니체학교를 졸업한 셈이네요.
“종교적인 면에서 말하는 건 조심스럽고요, 그 이외의 면에 대해서라면 니체에게서 배울 것이 참 많아요. 우리가 A라는 사물을 본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면만이 아니라 뒷면도 보려고 해야 하고 옆면, 윗면, 밑면도 보려고 해야 해요. 총체적으로 본 다음에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편견을 갖고 있다면 그건 시작부터 힘들어지죠. 눈으로 본 것만 보고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쉽게 말해 버릴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커지면 부정이 돼 버리는 거죠. 부정하는 마음 때문에 바로 그 부정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거든요. 니체는 학자로서 저한테는 배울 게 아주 많은, 읽어도 다 읽어낼 수 없는 거대한 책 같았어요. 욕망을 숨기지 않은 것도, 성실하게 고독했다가 죽음을 맞은 것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 철학자입니다.”
《백화점》은 근대와 현대가 함께 공존하는 곳
—소설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논픽션이라는 에세이집 《백화점》은 어떤 착상하에 쓴 겁니까.
“보는 것을 살 수 없는 데서, 구매할 수 없는 데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 그다음에 근대적인 의미까지 백화점이 형성된 과정을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근대적인 의미까지 한번 더듬어보자 했을 때 이미 저는 제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거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들어가서 한 3개월 만에 썼죠.”
—그 책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 엿보였다고 할까요, 책에도 들어 있지만 백화점에 대한 간략한 생각을 말해 주세요.
“저에게 백화점은 일종의 한강을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왜냐하면 제가 열여섯 살 때 처음 선험적으로 여기 백화점 중간 부분에 나가면 그게 나오는데 실제로는 처음이 아니었을 텐데 아니 실제로 처음이 아니었을 텐데 처음이었다고 기억이 돼요.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서 광화문을 왔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근대였어요. 저에게 근대적인 장소는 서울 시내에서 백화점이었죠. 과거와 맞물려 있지만 근대적이면서 근대를 형성하고 현대를 이루어낸 공간, 그 공간에 담긴 사물들과 그 사물들을 보러 오는 팔려고 하는 인간과 구매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런 것들이 제 관심을 끌었죠. 그러니까 백화점은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에요. 그래서 재래시장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고요. 시장에 관한 책도 쓸까 해서요.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인간에게 무한한 욕망의 공간인 에세이 《백화점》을 쓰면서 소설로 써보고 싶은 영감은 없었습니까.
“백화점을 취재 다닐 때 출판사 에디터가 백화점 관계자를 섭외해 줬어요. 백화점의 높은 관계자 분들과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는 일반고객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많이 가보고 그분들을 인터뷰해 보고 꽤 오래 그랬었는데 그러고 나서 마지막 날 백화점 밑에 쓰레기를 치우러 들어오는 그 장면까지 보고 회의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에디터가 ‘선생님 이러다가 저희 꺼 안 쓰시고 소설 쓰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때 제가 취재하고 봤던 모든 것은 산문으로 제게 들어왔지 소설로 들어오진 않았어요. 그곳에서 본 옷을 수선하시는 분들이나 좁은 공간에서 구두를 수선하시는 분들, 또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분들, 그리고 채소 껍질만 벗기고 있는 분들, 이런 분들을 봤는데 전 사실 그런 분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그 인상적인 장면들과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언제 소설로 나오게 될지는 저도 모르죠. 계속 조각조각이 남아 있다가 제 주변, 제 안을 맴돌다가 불쑥 튀어나오니까. 기다리고 있는 거죠. 멍하니 앉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집에서도, 그게 다른 사람이 보면 참 한심해 보이고 놀고 있는 거 같은 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계속 뭐가 왔다갔다하고 있는 상태죠.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좀 어렵죠(웃음).”
책상을 지키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비법
—글을 쓰다가 생기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합니까.
“글을 쓰다가 안 풀릴 때는요 저는 일단 덮어요. 그리고 맥주를 마셔요. 맥주를 책상 앞에서 마시고 그리고 잠도 책상 밑에서 자요. 책상을 잘 떠나지 않아요. 그리고 생각이 정리가 되면 좀 걷죠. 걷다가 들어와서 다시 글을 써요. 소설을 쓸 때의 스트레스라는 건 소설이 잘 풀리지 않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예요. 그런데 소설은 잘 써지는 경우보다 잘 안 써지는 경우가 90%거든요. 그럴 경우는 끈기 있게 책상을 지키는 힘, 그것밖에는 없어요. 보통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영화를 보기도 해요. 그리고 스트레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세요’라고 물어봤는데 제가 ‘큰 스트레스는 없어요’ 이렇게 대답했어요. 스트레스가 쌓이게 두는 것은 내 혈관에 혈액이 응고되게 놔두는 것과 똑같아요. 한꺼번에 팍 터지면 쓰러질 수 있는,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하루에 몇 분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 어떤 의미로는 본능적으로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죠.”
—평소 블랙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블랙 옷을 입었는데 블랙을 왜 좋아하죠.
“저랑 같이 살고 있는 여섯 살짜리 조카가 어느 날 ‘큰이모는 왜 블랙만 입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큰이모는 블랙 속에 있으면 편안해져. 블랙을 입고 있으면 숨을 수도 있고, 블랙을 입고 있으면 이모가 두드러지고 싶을 때 두드러질 수도 있거든. 돋보이고 싶을 때 돋보일 수 있거든’이라고 말해 줬어요. 검은색을 입는 것과 그 사람의 정서적 기질은 어쩌면 동일한 것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렇게 검정 일색인 거는 어떤 자발적인 언어, 메시지 같은 게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옷은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고르고 입기도 하지만 나를 숨기고 싶을 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저에게는 그것이 블랙인 거죠. 거의 언제나.”
—신경숙 작가나 공지영 작가는 순수문학을 하면서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작품을 충분히 쓸 수 있지 않나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그분들한테는 그분들이 가진 장점과 개성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 개성과 장점으로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면 그건 축복이죠. 그건 그분들 거예요. 저는 비록 적거나 눈에 띄진 않더라도 제가 가진 게 있잖아요. 적은 독자일지라도 저에게는 제 소설을 찾아서 읽어주시는 그분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해요. 독자들을 더 많이 갖고 싶다, 소통하고 싶다, 더 소통하고 싶다 라는 마음은 있으나 그것은 제 한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제 인생에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고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큰 욕심을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나한텐 애초부터 그런 건 없겠지, 미리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르고요. 다만 이런 생각들은 문득문득 하죠. 소설이라는 것이 어차피 일기도 아니고 이건 책으로 만들어져서 출판이 돼서 세상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독자분이 읽어주시고 만나게 되면 좋은 거잖아요. 어떻게 독자분들을 좀 더 사로잡을 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것을 지키면서…. 이런 생각은 많이 하죠.”
밀가루를 만지면 맺혀 있는 감정 풀려
—소설가가 아닌 다른 꿈은 없습니까.
“저는 요리사를 하고 싶어요. 저는 거의 매일 빵을 굽거나 피자를 만들거나 쿠키를 구워요. 또 직접 생두를 로스팅해서 커피를 마시고요. 그런 일들을 매일매일 하죠. 왜냐하면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까 간식은 제 담당이거든요. 사실 밀가루같이 희고 부드러운 재료들을 만지고 있으면 어떤 감정들이 맺혀 있다가도 에이 별거 아니지 하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일종의 테라피예요. 그래서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한 테이블이 4개쯤 있는 조용한 간판도 없는 작은 식당의 셰프가 되었을 거 같아요. 또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혹시 손재주를 타고난 것 아닙니까.
“제가 어머니한테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손재주 타고났다는 거예요. 저는 이를테면 뜨개질이나 그림 그리기, 붓글씨 쓰는 거 이런 것들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 무엇이건 한번 잡으면 안 놓아요. 식구들이 겨울이 오면 제가 뜨개질을 할까 봐 걱정을 하죠. 저걸 붙잡고 또 며칠을 밤을 샐까. 한번 뭘 잡으면 해가 바뀌는지 날이 새는지 잘 모르거든요. 좋게 보면 집중인데 나쁘게 보면 어리석음 같은 거일 수도 있어요.”
—대체적 주부들이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요리하는 일이 좋은 거죠.
“네, 저는 정말 좋아요. 요리를 하고 있으면 소설 쓰다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글쓰기를 통해 얻지 못했던 것들을 얻을 수 있어요. 물론 똑같이 둘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하나는 내가 만들어냈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좋아해 주고 맛있게 먹어주는 거죠. 근데 글쓰기는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도,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 거죠. 소설, 글쓰기를 통해서 받지 못하는 위안 같은 것을 요리를 통해서 얻는 것 같아요.”
—나름의 요리철학이 있다면.
“제가 문장을 쓸 때, 요리를 할 때, 가끔 피식 웃는 적이 있는데 나름의 철학 때문이에요. 소설 쓰고 요리할 때 똑같은 원칙은 재료 많이 안 쓴다. 손이 많이 가지 않게 한다. 소스 거의 쓰지 않는다. 문장도 부사, 형용사 거의 안 쓴다. 가능한 한 장식을 배제한 채로 쓴다. 심플하게 쓴다. 그게 소설과 요리가 비슷해요. 아이들에게도 버터나 설탕이 안 들어간 쿠키나 빵을 구워주고요. 고구마, 감자는 그냥 구워요. 단순하게. 인스턴트는 잘 먹이지 않아요. 그래서 동생이 고품격 보모라고 부르죠(웃음).”
—식재료는 주로 어디에서 구입합니까.
“저는 집 근처 재래시장으로 많이 가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는 재래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를 사고요. 재래시장에서 사고 얻는 것은 단지 야채나 과일, 생선뿐만이 아닌 것 같아요. 거기엔 지금의 저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어떤 ‘정서’가 있어요. 그래서 한가로이 시장을 둘러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해도 시장과 멀면 저는 살지 못할 것 같아요.”
—재래시장에서 물건값을 깎나요.
“깎으려고 하지 않아요. 미안하니까(웃음).”⊙
조경란 작가가 태어나고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현 중앙동)이다. 작가는 가끔 한강을 건너는 것을 좋아한다. 한강을 건너서 만나는 도시가 비로소 시내, 서울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40대 여성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맞벌이 여동생의 아이들을 키우며 산다. 작가의 집은 전통시장과 가깝다. 독신 이모가 소설을 쓰며 4명의 조카를 척척 키웠던 것은 가까운 시장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작가는 시장에 관한 집필도 계획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서에도 작품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소중한 공간, 그리고 자식 같은 조카들, 소설은 그 안에서 터져나왔다. 고층아파트에서 걸어나와 기사가 열어주는 승용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쇼핑을 하러 갈 강남스타일 마틸다가 재래시장을 누빈다. 그녀는 한파에 가지 두 개가 1900원이라고 물가 걱정도 한다.
삼청동 카페는 붉은 벽돌과 모자이크 창으로 벽을 꾸미고, 청색 노랑 빨간색의 컬러풀한 의자로 내부를 돋보이게 만들어 놓았다. 삶은 팥을 갈아 넣은 단팥라떼가 일품이었는데, 무료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 하여 인터뷰를 하다 말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겨울 오후 짧은 해는 쪽달만큼 남지 않았고, 사랑의 거리에도 한파는 매정하게 몰아쳐 왔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속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말은 춥다, 춥다.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 《좁은문》은 안개가 주인공이다. 등장인물보다 안개가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회색빛 벽이라고 해도 될 깊고 무거운 안개는 인간의 생명마저 질식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당포 남자와 카페 여자의 미묘한 인연과 소통의 이야기이다. 짙은 안개가 낀 날 여자는 금반지와 보증서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들고 남자의 전당포에 찾아온다. 남자는 보석 전문 감별사다. 여자가 들고 온 반지는 검안경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가짜이다. 순도 99.9% 금은 만졌을 때 물렁물렁하고 따뜻한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여자가 가져온 금은 18k도 14k도 아니다. 가짜임을 확인한 여자는 재빨리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 얼마 후 이제는 가짜 다이아몬드를 들고 찾아온다.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내밀었지만 그것도 역시 가짜였다. 그런데 남자는 가짜라고 말하지 못하고 여자에게 돈을 내어준다. 기한은 3개월이다.
그 여자는 카페에서 그네를 탄다. 그곳은 환상의 카페.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공간이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밤마다 여자는 두 시간 동안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타고 내려올 때마다 남자는 맥주를 마시며 여자의 거뭇한 곳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평온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진짜 루비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3개월 후 여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 전당포도 남자도 없다. 전당포와 남자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몽상적인 인물은 일종의 소설적 장치
—현대문학상 수상작 《좁은문》은 독자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주는 특이한 작품 같아요. 쓰게 된 동기는요.
“《좁은문》은 다소 그 점을 의도하고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무렵에 9·11에 이어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어요. 그때 작가로서, 혹은 한 개인으로서 고민이 많았어요. 이런 시대에 어떤 작품을 써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전에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라는 단편소설을 썼는데 그건 탈레반이 카불 동물원을 공격한 데서 착상했어요. 전쟁이 시작돼 어떤 도시들을 점령할 때면 우선 동물원의 맹수들부터 공격한다고 들었어요. 도시를 폭격했을 때 맹수들이 동물원을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요. 전쟁과 생명들, 불신들,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약간 우화적으로 비틀어서 썼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가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 혹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저는 늘 무엇을 쓸까 보다는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해 왔거든요. 그 무렵은 정말 작가로서 개인으로서 참 힘들었어요. 이 시대에 테러와 전쟁이라니. 꽤 오랫동안 머릿속이 멍하고 어떤 풀리지 않는 의구심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낯선 공간에 있다가 새벽에 집에 가려고 도로에 나와 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침 5시나 6시쯤이었을 거예요. 주위에 안개가 가득했어요. 불과 몇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한 안개였어요. 그때, 이 짙은 벽처럼 느껴지는 안개를 건너가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 갔어요. 때론 벽처럼 때로는 꼭 열고 들어가야 할 문처럼 느껴지는 이 안개를 이미지로 혹은 상징으로 한 남자와 여자를 소통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느꼈고 그 후에 나온 소설이 바로 《좁은문》이었어요.”
—작가의 구상 속에 있던 좁은 문은 어떤 문입니까.
“문은 문이지만 좁아서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가기도 어려운 그런 문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 사이에 안개가 있는 거죠. 안개가 사라지자 남자 주인공은 그녀에게 가 닿기 위해서 나중에는 스스로 안개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안개는 사라져 버리게 되죠.”
—안개가 되어서라도 그녀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느낌과 그리고 자살이라는 느낌도 받았어요. 맞나요.
“글쎄요, 그건 말씀드리기 힘드네요. 작가가 자신이 쓴 소설의 어떤 부분에 대해 너무 명확하게 설명해 주면 독자의 상상력을 바로 제한해 버리지 않을까요.”
—상을 받은 소감은 어땠습니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가 2012년 11월 중순이었어요. 제가 등단한 지 7년이 되던 해였죠. 어머니랑 둘이서 김장 준비를 하려고 배추를 다듬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어요. 그게 저한테는 첫 번째 문학상 수상소식이었어요. 그 당시 무척이나 의기소침하고 기가 꺾여 있던 상태였어요. 이렇게 계속 소설을 써도 되나, 글쓰기는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하고요. 그런데 어려운 시기에 어렵게 쓰기도 했던 《좁은문》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게 돼서 감사했어요. 어떤 뜨거운 위로처럼 느껴졌거든요.”
—소설의 이미지가 그로테스크하고, 인물은 다소 몽상적인 느낌이었어요.
“어쩌면 그게 안개라는, 형태가 불분명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의도적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소설적 장치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런 이미지뿐만 아니라 소설의 무대인 카페조차도 이런 데가 세상에 정말 있을까? 의아해지잖아요. 사실 《좁은문》은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죠. 상황도 이미지도 공간도 관계도… 열 사람이 책을 읽으면 열 명 모두 다른 느낌과 다른 감상을 갖게 되길, 다른 소설보다 더 바라기도 했고요.”
—동인문학상 수상작 《풍선을 샀어》에서는 올케와의 관계에서 심리 묘사가 좋았습니다. 실제 올케와 살아본 경험이 있었습니까.
“저는 올케가 없습니다. 남동생도 없고요. 여동생만 둘 있어요. 바로 아래 여동생은 일본 사람하고 결혼해서 도쿄에서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도쿄를 1년에 한두 번씩은 가서 보낼 수 있는 거지요. 도쿄 여동생 아이들은 태어나서 얼마 동안 저랑 같이 살다가 제부가 있는 일본으로 갔어요. 그리고 막내 동생네 두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저와 살고 있죠. 제 부모님과 함께요.”
—이모가 조카를 키운다고요.
“네. 제 막내 동생이 집 근처에 사는데 부부가 맞벌이를 해요. 말하자면 아이를 친정엄마가 키워주고 있는 셈인데, 그 친정엄마가 저랑 사시니까요.”
선택할 수 있다면 하지 않겠다는 결혼
—놀랍네요. 조카가 엄마라고 부르지 않나요.“네, 가끔 저를 엄마라고, 엄마를 큰이모라고 부를 때도 있어요. 저는 미혼이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뭔지는 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조카들이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왔을 때 첫날부터 제가 그 신생아들을 목욕시키고 돌봤거든요. 잠자는 시간만 빼고요. 그게 몇 년이 이어졌죠. 네 아이 중 두 녀석은 지금도 함께 살고 있고요. 저에게 조카들은 상당히 중요한 존재예요. 3월에 출간할 여섯 번째 소설집 원고를 얼마 전에 출판사에 넘겼는데요, 그 소설집을 다시 읽다 보니까 조카들이 제 삶과 글쓰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더라고요. 아이들을 돌보는 게 힘들 때가 물론 많고 제가 그 아이들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아이들이 저에게 준,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아요. 그러면서 저는 서서히 다른 사람이 돼갔던 것 같아요. 뭐랄까, 생이 아름답다고 진짜 믿게 되고 긍정적이 되는….”
—큰 경험을 하고 있네요.
“정말 큰 경험이고 축복이죠. 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은 경이로워요. 그런 아이들과 같이 살지 못했더라면 저는 정말 시니컬하고 어떤 면으로는 꽤나 비관적인 그런 독신으로 나이 들어 갔을 거예요(웃음). 제가 여태 독립을 못 하는 이유는 형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제 와서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부모님은 더 늙어가고 계시니까요. 혼자 따로 나가 살면 내 마음이 편할까 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저는 요즘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부모와 같이 늙어가고 아이들과 같이 성장해 나가고 있구나 라고요. 아무튼 조카들의 탄생과 성장이 저라는 사람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글도 써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양육을 했습니까.
“정오까지는 주로 어머니가 돌보고 제가 일어나는 오후 1시부터는 별일 없으면 거의 오후 내내, 아이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제가 돌보곤 하죠.”
—결혼은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까.
“어떤 아는 선배가 하고 싶었던 결혼도 아이도 낳지 못한 채 50세가 넘어 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다행이구나,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죠. 저는 지금의 이 상황이 저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마흔이 될 때, 쉽지가 않았어요. 생각도 많았어요. 각오라고 할까요. 여성으로서 마흔을 넘긴다는 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물론 인생은 내일, 아니 오늘 당장에라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지만 내 삶에 관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이제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요. 저에게는 결혼도 그중 한 가지였어요. 그러니까 선택할 수 있다면 하지 않겠다, 라는 그런 자발적인 결심 없이 만약 그 선배와 같은 입장이 돼 버렸다면 저 역시도 후회하고 또 많이 서글퍼했겠지요.”
—적당한 상대를 고르다 자연히 독신이 돼 버린 경우와는 다를 것 같고 만약에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와도 결혼을 안 할 건가요.
“음… 그런데 저한테는 지금까지도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그랬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찾아올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고 있고요. 만약 그런 운명적인 인연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결국엔 뒤로 물러날 것 같은데요.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한 거 같아요. 어떤 색깔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그런데 저는 결혼에 관해서는 거의 한 번도 해보고 싶다 라거나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이상하리만큼 없거든요. 그냥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관심이 없이 제가 하는 일을 하루하루 해왔던 것 같아요.”
—《풍선을 샀어》에서 니체가 인간에게 더 나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로 루소적인간과 괴테적인간, 쇼펜하우어적인간 이렇게 구분해서 표현했는데 자신은 어떤 인간형으로 봅니까.
“글쎄요, 저는 그 유형들에 다 속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속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해요. 닮고 싶기도 하고 배제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사람이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유형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각각 다른, 다양성을 가진 존재여서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삼 년 전에 쓴 단편 중에 《학습의 生》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사람이 산다는 건, 한평생 배우고 배우려고 해야 하고 또 배운 것을 나눠줘야 하는 게 우리 생이 아닐까 여기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 인격체가 만들어지는 거겠죠. 그걸 성장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우고…. 그런 삶에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소설을 쓰면서 두려움을 치유하기도
—그런 의미에서 《풍선을 샀어》는 자전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겁니까.
“그 안에 제가 빠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그 소설을 쓰던 무렵에는 제 문학의 큰 주제인 두려움, 소통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자, 라는 각오가 있었어요. 그 주제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경장편쯤으로 써야겠다고 밑그림을 그렸는데 좀 느슨해지고 긴장감도 사라질까 봐 지금의 그 분량으로 완성했지요.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깊이 고민했어요.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같이 건너가 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풍선을 샀어》는 두려움과 소통이라는, 제가 오래 천착해 왔던 주제를 정면으로 다뤄볼 수 있었던 저에게는 무척 의미가 컸던 소설입니다.”
—작중에서 공황장애를 갖고 있는 J가 작가님의 일부였을 수도 있나요.
“J보다는 공황장애를 겪는 J를 지켜주고 싶어하는 ‘나’라는 인물에 가깝죠. 저는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창문이 없거나 사방이 막혀 있거나 하는 장소에는 오래 못 있어요. 지하에 있는 것도 그렇고요. 심각하진 않지만 계단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우리 주변에 보면 그런 크고 작은 두려움(fear)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어요. 본인한테는 심각하고 두려운데 타인에게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그런 두려움들이 어떤 보편적인 주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래저래 《풍선을 샀어》는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소설이 되었죠.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강 하나를 무사히, 안전하게 건너온 느낌이랄까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제가 치유받았다는 걸 알았어요. 사실 저는 제가 좋아하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인간에게 희망의 몸짓은 없다 라고 한 말에 무척 상처받았었어요. 그래서 제 소설 속 인물들이 희망에 대한 몸짓을 그려보는 장면, 그것을 형상화할 수 있는 이미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죠. 그래서 떠올리게 된 게 바로 풍선이었어요.”
—소설을 쓰고 치유를 받은 셈이네요.
“그런 셈이죠. 그게 어쩌면 글쓰기가 저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고요. 자주 생기지는 않지만요. 아무튼 저 자신에게 용기를 준 소설이에요.”
니체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철학자
—《풍선을 샀어》는 니체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인데, 니체를 작중의 화자만큼 좋아하나요.
“제가 아주 우울하고 고통스럽다고 느낀 시기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철학자예요. 전집은 물론이고 그에 관해 번역된 거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어요. 왜 니체인가? 라고 묻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는 니체의 고독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가 고독과 고립을,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낸 그러한 것들을 오래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이상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상이 있다면 어떤 것들을 견뎌야 하고 버틸 수 있어야 하죠. 니체한테는 그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든 그런 것들이 한 가지쯤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도 물론 그런 게 있죠. 가 닿고 싶은 곳, 추구하는 게 있다면 맨발로 바위산을 오르는 일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소박한 저녁을 먹고 공부하고 자고 생각하는 삶은 단순히 철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죠. 소설을 쓰겠다면 저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추구하고 좇는 이상을 지키면서 하루하루 검박하게 사는 것은 중요했어요. 어떤 유혹이 와도 지그시 밀어낼 수 있는 힘은 그 안에서 생겨나겠죠. 내 자의식과 자존심이라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데서 생겨나는 힘이라는 걸 알려준 철학자예요, 니체는. 저는 원래도 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건 사실 뜬구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거라고 더 생각하게 됐죠. 우리가 추구하는 것, 혹은 추구하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을 어떻게 소설로 끌어들여 올 수 있을까, 정말 오래 고민해 왔어요. 다행히 풍선이라는 선명하고도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죠. 만약 니체가 없었다면, 저는 그때의 그 갈팡질팡하던 시기를 제대로 건너오지 못했을 거예요.”
—니체학교를 졸업한 셈이네요.
“종교적인 면에서 말하는 건 조심스럽고요, 그 이외의 면에 대해서라면 니체에게서 배울 것이 참 많아요. 우리가 A라는 사물을 본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면만이 아니라 뒷면도 보려고 해야 하고 옆면, 윗면, 밑면도 보려고 해야 해요. 총체적으로 본 다음에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편견을 갖고 있다면 그건 시작부터 힘들어지죠. 눈으로 본 것만 보고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쉽게 말해 버릴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커지면 부정이 돼 버리는 거죠. 부정하는 마음 때문에 바로 그 부정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거든요. 니체는 학자로서 저한테는 배울 게 아주 많은, 읽어도 다 읽어낼 수 없는 거대한 책 같았어요. 욕망을 숨기지 않은 것도, 성실하게 고독했다가 죽음을 맞은 것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 철학자입니다.”
《백화점》은 근대와 현대가 함께 공존하는 곳
—소설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논픽션이라는 에세이집 《백화점》은 어떤 착상하에 쓴 겁니까.
“보는 것을 살 수 없는 데서, 구매할 수 없는 데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 그다음에 근대적인 의미까지 백화점이 형성된 과정을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근대적인 의미까지 한번 더듬어보자 했을 때 이미 저는 제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거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들어가서 한 3개월 만에 썼죠.”
—그 책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 엿보였다고 할까요, 책에도 들어 있지만 백화점에 대한 간략한 생각을 말해 주세요.
“저에게 백화점은 일종의 한강을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왜냐하면 제가 열여섯 살 때 처음 선험적으로 여기 백화점 중간 부분에 나가면 그게 나오는데 실제로는 처음이 아니었을 텐데 아니 실제로 처음이 아니었을 텐데 처음이었다고 기억이 돼요.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서 광화문을 왔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근대였어요. 저에게 근대적인 장소는 서울 시내에서 백화점이었죠. 과거와 맞물려 있지만 근대적이면서 근대를 형성하고 현대를 이루어낸 공간, 그 공간에 담긴 사물들과 그 사물들을 보러 오는 팔려고 하는 인간과 구매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런 것들이 제 관심을 끌었죠. 그러니까 백화점은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에요. 그래서 재래시장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고요. 시장에 관한 책도 쓸까 해서요.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인간에게 무한한 욕망의 공간인 에세이 《백화점》을 쓰면서 소설로 써보고 싶은 영감은 없었습니까.
“백화점을 취재 다닐 때 출판사 에디터가 백화점 관계자를 섭외해 줬어요. 백화점의 높은 관계자 분들과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는 일반고객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많이 가보고 그분들을 인터뷰해 보고 꽤 오래 그랬었는데 그러고 나서 마지막 날 백화점 밑에 쓰레기를 치우러 들어오는 그 장면까지 보고 회의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에디터가 ‘선생님 이러다가 저희 꺼 안 쓰시고 소설 쓰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때 제가 취재하고 봤던 모든 것은 산문으로 제게 들어왔지 소설로 들어오진 않았어요. 그곳에서 본 옷을 수선하시는 분들이나 좁은 공간에서 구두를 수선하시는 분들, 또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분들, 그리고 채소 껍질만 벗기고 있는 분들, 이런 분들을 봤는데 전 사실 그런 분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그 인상적인 장면들과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언제 소설로 나오게 될지는 저도 모르죠. 계속 조각조각이 남아 있다가 제 주변, 제 안을 맴돌다가 불쑥 튀어나오니까. 기다리고 있는 거죠. 멍하니 앉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집에서도, 그게 다른 사람이 보면 참 한심해 보이고 놀고 있는 거 같은 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계속 뭐가 왔다갔다하고 있는 상태죠.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좀 어렵죠(웃음).”
책상을 지키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비법
—글을 쓰다가 생기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합니까.
“글을 쓰다가 안 풀릴 때는요 저는 일단 덮어요. 그리고 맥주를 마셔요. 맥주를 책상 앞에서 마시고 그리고 잠도 책상 밑에서 자요. 책상을 잘 떠나지 않아요. 그리고 생각이 정리가 되면 좀 걷죠. 걷다가 들어와서 다시 글을 써요. 소설을 쓸 때의 스트레스라는 건 소설이 잘 풀리지 않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예요. 그런데 소설은 잘 써지는 경우보다 잘 안 써지는 경우가 90%거든요. 그럴 경우는 끈기 있게 책상을 지키는 힘, 그것밖에는 없어요. 보통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영화를 보기도 해요. 그리고 스트레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세요’라고 물어봤는데 제가 ‘큰 스트레스는 없어요’ 이렇게 대답했어요. 스트레스가 쌓이게 두는 것은 내 혈관에 혈액이 응고되게 놔두는 것과 똑같아요. 한꺼번에 팍 터지면 쓰러질 수 있는,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하루에 몇 분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 어떤 의미로는 본능적으로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죠.”
—평소 블랙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블랙 옷을 입었는데 블랙을 왜 좋아하죠.
“저랑 같이 살고 있는 여섯 살짜리 조카가 어느 날 ‘큰이모는 왜 블랙만 입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큰이모는 블랙 속에 있으면 편안해져. 블랙을 입고 있으면 숨을 수도 있고, 블랙을 입고 있으면 이모가 두드러지고 싶을 때 두드러질 수도 있거든. 돋보이고 싶을 때 돋보일 수 있거든’이라고 말해 줬어요. 검은색을 입는 것과 그 사람의 정서적 기질은 어쩌면 동일한 것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렇게 검정 일색인 거는 어떤 자발적인 언어, 메시지 같은 게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옷은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고르고 입기도 하지만 나를 숨기고 싶을 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저에게는 그것이 블랙인 거죠. 거의 언제나.”
—신경숙 작가나 공지영 작가는 순수문학을 하면서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작품을 충분히 쓸 수 있지 않나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그분들한테는 그분들이 가진 장점과 개성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 개성과 장점으로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면 그건 축복이죠. 그건 그분들 거예요. 저는 비록 적거나 눈에 띄진 않더라도 제가 가진 게 있잖아요. 적은 독자일지라도 저에게는 제 소설을 찾아서 읽어주시는 그분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해요. 독자들을 더 많이 갖고 싶다, 소통하고 싶다, 더 소통하고 싶다 라는 마음은 있으나 그것은 제 한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제 인생에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고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큰 욕심을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나한텐 애초부터 그런 건 없겠지, 미리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르고요. 다만 이런 생각들은 문득문득 하죠. 소설이라는 것이 어차피 일기도 아니고 이건 책으로 만들어져서 출판이 돼서 세상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독자분이 읽어주시고 만나게 되면 좋은 거잖아요. 어떻게 독자분들을 좀 더 사로잡을 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것을 지키면서…. 이런 생각은 많이 하죠.”
밀가루를 만지면 맺혀 있는 감정 풀려
—소설가가 아닌 다른 꿈은 없습니까.
“저는 요리사를 하고 싶어요. 저는 거의 매일 빵을 굽거나 피자를 만들거나 쿠키를 구워요. 또 직접 생두를 로스팅해서 커피를 마시고요. 그런 일들을 매일매일 하죠. 왜냐하면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까 간식은 제 담당이거든요. 사실 밀가루같이 희고 부드러운 재료들을 만지고 있으면 어떤 감정들이 맺혀 있다가도 에이 별거 아니지 하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일종의 테라피예요. 그래서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한 테이블이 4개쯤 있는 조용한 간판도 없는 작은 식당의 셰프가 되었을 거 같아요. 또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혹시 손재주를 타고난 것 아닙니까.
“제가 어머니한테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손재주 타고났다는 거예요. 저는 이를테면 뜨개질이나 그림 그리기, 붓글씨 쓰는 거 이런 것들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 무엇이건 한번 잡으면 안 놓아요. 식구들이 겨울이 오면 제가 뜨개질을 할까 봐 걱정을 하죠. 저걸 붙잡고 또 며칠을 밤을 샐까. 한번 뭘 잡으면 해가 바뀌는지 날이 새는지 잘 모르거든요. 좋게 보면 집중인데 나쁘게 보면 어리석음 같은 거일 수도 있어요.”
—대체적 주부들이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요리하는 일이 좋은 거죠.
“네, 저는 정말 좋아요. 요리를 하고 있으면 소설 쓰다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글쓰기를 통해 얻지 못했던 것들을 얻을 수 있어요. 물론 똑같이 둘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하나는 내가 만들어냈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좋아해 주고 맛있게 먹어주는 거죠. 근데 글쓰기는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도,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 거죠. 소설, 글쓰기를 통해서 받지 못하는 위안 같은 것을 요리를 통해서 얻는 것 같아요.”
—나름의 요리철학이 있다면.
“제가 문장을 쓸 때, 요리를 할 때, 가끔 피식 웃는 적이 있는데 나름의 철학 때문이에요. 소설 쓰고 요리할 때 똑같은 원칙은 재료 많이 안 쓴다. 손이 많이 가지 않게 한다. 소스 거의 쓰지 않는다. 문장도 부사, 형용사 거의 안 쓴다. 가능한 한 장식을 배제한 채로 쓴다. 심플하게 쓴다. 그게 소설과 요리가 비슷해요. 아이들에게도 버터나 설탕이 안 들어간 쿠키나 빵을 구워주고요. 고구마, 감자는 그냥 구워요. 단순하게. 인스턴트는 잘 먹이지 않아요. 그래서 동생이 고품격 보모라고 부르죠(웃음).”
—식재료는 주로 어디에서 구입합니까.
“저는 집 근처 재래시장으로 많이 가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는 재래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를 사고요. 재래시장에서 사고 얻는 것은 단지 야채나 과일, 생선뿐만이 아닌 것 같아요. 거기엔 지금의 저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어떤 ‘정서’가 있어요. 그래서 한가로이 시장을 둘러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해도 시장과 멀면 저는 살지 못할 것 같아요.”
—재래시장에서 물건값을 깎나요.
“깎으려고 하지 않아요. 미안하니까(웃음).”⊙
